제4장 재생
주령왕이 거처 주령전을 오르는 길에 철모생이 나타났다. 왼쪽 옆구리에 걸린 가느다란 세검과 양팔목과 발목에 차여져 있는 각반이 그를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반주님을 뵈옵니다.”
주령전 마당으로 들어설 때 입구에 서 있던 두 무사가 나와 허리를 구부렸다. 주령전의 출입자를 일차 검문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차는 천지인검이 맡고 있다.
뻐억!
고개를 숙인 두 사람의 뒷덜미로 동천몽의 양 손바닥이 동시에 떨어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므로 동천몽의 공격을 피하기란 어려웠고 철모생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더욱 방심했다.
두 사람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엎어졌는데 숨이 끊어져 있었다.
동천몽의 오른손이 두 사람을 향해 뻗어지더니 좌측으로 뿌려졌다. 마치 돌을 주워 던지는 것과 같은 동작이었는데 두 구의 시신이 숲속으로 날아갔다.
동천몽이 계단 입구에 다다랐을 때 계단을 뛰어내려오는 사내가 있었다.
다다다다!
“왜 이제야 오십니까? 전하께서 얼마나 기다리셨는데요.”
동천몽은 눈앞의 인물이 주령왕의 세 시위 중 한 명인 해인 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미 만천의옹으로 부터 주령왕의 세 시위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그의 그림자이자 오른팔로 잔인하며 주령왕의 뜻에 반기를 든 사람들은 모조리 죽였다고 했다.
“그럴 줄 알았네. 어서 앞 장 서게.”
해인이 앞장을 섰고 동천몽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마주 보고 있어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데 등까지 돌려주었으므로 이거야 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슥!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뒤에서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체 해인은 두 번째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빡!
동천몽의 주먹이 명문혈을 때렸다. 해인의 몸이 빳빳하게 섰다. 고개를 뒤로 돌리려고 애를 쓰는 듯 목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끝내 돌아보지 못하고 뒤로 벌렁 자빠졌다.
퍽!
동천몽은 발길에 내공을 실어 해인을 몸을 툭 걷어찼다. 그러자 가볍게 날아가 맞은편 숲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리 완벽한 변장이라고 해도 미세한 차이는 있다. 그중 가장 많이 노출되는 것이 호흡과 심장이다. 천하 없는 강심장도 호흡이 빨라지고 심장 박동이 많아지는 것은 피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주 높은 고수라면 충분히 알아차리지만 중요한 것은 이쪽이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이었다. 천지인검의 무예도 뛰어나지만 동천몽은 그들이 상상할 수 없는 곳에 있으니 더욱 모를 수밖에 없었다.
동천몽은 느긋하게 주령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안쪽에서 또 한명의 사내가 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한 눈에 지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고 동천몽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녀석들, 죽이기 좋게 한 명씩 잘도 오는구나!’
만천의옹이 말하길 천지인해검의 무공은 매우 높다고 했다. 세 사람이 합공을 하면 철모생도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동천몽은 만약 정면으로 붙는다면 오십여 초 이내에 승부를 보리라고 전망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한 명씩 흩어져 마중을 나왔고 누구도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아무리 완벽한 위장을 했어도 오랫동안 철모생을 겪었으니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거사를 진행 중이기 때문에 모두가 긴장과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세밀하고 조심스런 평소의 버릇들이 상당부분 실종된 것이다.
“어찌됐습니까? 죽였겠지요?”
“자네 생각에는 어찌됐을 것 같은가?”
“그야 당연히 반주님 능력이면 그까짓 늙은이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맞네. 아무것도 아니더군.”
이번에는 앞서가는 지인의 등에 빳빳하게 선 수도가 박혔다. 소음을 외부로 퍼져나가지 않도록 일대를 내기로 차단했기 때문에 지척인 방안에서도 살인 사건을 알아차릴 수 없다.
해인과 달리 지인은 명문혈에 일격을 맞았는데도 돌아섰다. 그건 그의 내공이 좀더 심후하다는 뜻이었다.
“왜…왜 나를?”
“잘 가.”
슥!
손을 뽑았다.
지인이 벽을 한번 짚더니 그대로 무너졌다.
천하없는 고수도 방심하면 허깨비만도 못하다. 더구나 주령왕의 최측근인 철모생이 자신을 암습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테니 더욱 경계는 하지 않았다.
동천몽은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천인이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반주님. 그 늙은이를 죽였겠지요.”
“머리카락 한 올 들어 올리지 못한 늙은이 한 명 죽이지 못한데서야 말이 되겠는가?”
듣고 있던 주령왕의 얼굴에도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고 천인이 물었다.
“지인과 해인이 왜 함께 오지 않는지요. 반주님을 영접하러 나갔는데 못보셨습니까?”
“봤지, 볼 일이 있다면서 앞서 들어가라더군.”
“한심한 친구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볼일이야.”
그러면서 천인의 고개가 창가에 서 있는 주령왕을 돌아보았다. 이제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것인 천인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의지로 취할 수 있는 마지막 행동이었다.
퍼억!
더 이상 숨길 것도 감출 것도 없었으므로 동천몽은 전력을 끌어올려 지옥금을 천인의 옆구리에 박았다.
“컥!”
천인이 휘청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셋중 천인의 내공이 가장 심후한 듯 했다. 그는 차고 있던 검을 뽑아갔다. 그러나 동천몽의 손이 더 빨랐다.
촥!
옆구리에 차고 있던 철모생의 세검이 뽑혀나가며 허공에 섬광을 부렸다. 비명도 없고 아무런 소음도 없었다.
철컥!
검이 다시 검 집에 꽂히는 소리만 들렸다.
천인은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며 경악의 시선으로 쳐다보았는데 그의 목에서 갑자기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쿵!
그러더니 목이 잘려 바닥에 떨어졌고 뒤따라 몸통이 넘어졌다.
주령왕의 안색이 굳어졌다.
“바…반주 미쳤소?”
동천몽이 웃으며 말했다.
“유언을 남길 기회를 드리겠소. 길게는 하지 마시오. 나 시간 없으니까?”
주령왕의 눈앞의 현실이 얼른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듯 입을 쩌억 벌린 체 죽은 천인과 동천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철 반주.”
동천몽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스윽 닦았다. 그러자 다른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코와 광대뼈에 잇댔던 물질까지 떼어내자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너…너는 누구냐? 철반주는?”
“죽었지요.”
발자국 소리가 들리며 만천의옹이 들어섰다.
“어…어의.”
“전하 많이 놀라시는군요. 고뿔에 걸렸다는데 옥체는 어떠시옵니까?”
“도대체.”
“흐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은 그 흐름대로 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전하께서는 그 도도한 흐름을 막으려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흐름은 바꾸려 하니 힘이 들지요. 더구나 전하께서는 그 흐름을 막아낼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황실 일에 외부인을 끌어 들였단 말이냐?”
“비록 외부인이지만 저분은 평범하지 않습니다. 바로 환생하신 대법왕이시지요. 이 늙은이가 알기에 전하 또한 불가에 깊이 심취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주령왕이 놀란 표정으로 동천몽을 보았다.
“저…정녕 대법왕?”
동천몽이 조용히 품에서 백상불을 꺼내 보여주었다.
주령왕의 눈이 커졌다. 그것은 대법왕의 신분을 증거하는 명패가 확실했다.
정치는 황제의 몫이지만 대법왕은 그 이상의 힘과 백성의 존경을 받는다. 물론 대법왕은 서장을 통치 하지만 그의 능력과 덕은 중원에까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아무리 대법왕이라고 하지만 감히 황실 일에 끼어드는 건 용납할 수가 없소.”
동천몽이 나직이 말했다.
“죽을 사람은 빨리 죽어야 죽이는 사람의 마음도 편하지요.”
“감히 네까짓 놈이.”
주령왕의 몸이 퉁겨왔다. 어려서부터 문(文)보다는 무(武)에 재능을 보였다. 틈만 나면 검을 쥐었고 이름난 황실내 고수를 찾아가 비무요청을 마다하지 않았다. 패하면 분한 마음에 몇 날 몇 일을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반드시 패배를 앙갚음해야 직성이 풀렸다.
하지만 상대는 포달랍궁의 역대법왕 중 가장 근골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동물적 감각으로 무장되어 누구도 극성에 오르지 못한 불사심법을 완성시킨 희대의 고수.
콰아앙!
두 사람의 장력이 부딪히자 주령왕이 신음을 흘리며 뒤로 밀려났다. 단 일장에 내상을 입은 듯 안색이 파랗다. 무예에 관한 자부심 가득한 자신이 밀렸다는게 믿어지지 않는듯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본궁에 이런 말이 있지요. 살생을 금하되 해야 하거든 빠르고 고통없이 죽여라. 그것만이 그나마 최선의 자비이니라.”
콰아아!
동천몽의 신형이 빠르게 날아갔다.
일초는 체면치레용이었다. 하지만 오래 끌 필요가 없었으므로 전력을 다해 우장을 뻗었다. 주령왕 또한 조금 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붉은 손그림자를 보며 자신이 지닌 모든 역량을 쏟아 장심에 모아 발출했다.
개천풍운장, 황궁무고에서 배웠으며 무예스승이 말하길 천하에 그 적수가 드물 훌륭한 장법이라고 했다.
퍽!
개천풍운장이 붉은 손그림자와 부딪혔다.
쩌어억!
거미줄처럼 자신의 개천풍운장이 쪼개지고 있었다. 다행히 혼신을 다했기 때문에 쪼개지는 속도가 조금은 느렸지만 얼음이 깨지듯 부숴지고 있었다.
“우우욱!”
온 힘을 다 쏟아냈다. 하지만 개천풍운장은 깨졌다. 얼굴이 시뻘개졌고 관자놀이에 힘줄이 손가락 굵기로 튀어나왔다. 그러나 여전히 밀고 들어오는 붉은 손은 당할 재간이 없었다.
파아아!
한 순간 동천몽이 조금 더 힘을 가하자 주령왕의 장력이 산산히 깨져 흩어지며 정통으로 가슴을 때렸다.
퍽!
“으악!”
주령왕이 구석으로 나동그라졌는데 꾸역꾸역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일어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몸속의 힘은 이미 빠져나갔고 의식은 점차 멀어져간다.
부르르!
온 몸을 떨며 동천몽을 보았는데 증오와 원한이 가득했다.
“아미타불!”
동천몽은 세속에 모든 한을 지우고 편히 극락왕생하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조용히 누웠지만 눈은 감기지 않았다. 보다 못해 만천의옹이 다가가 손바닥으로 감겨 주었다.
만천의옹의 얼굴이 착잡해졌다. 비록 반란의 수괴이지만 자신이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황제의 동생이다.
만천의옹이 한참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들어 동천몽 앞에 무릎을 꿇었다.
퍽!
“왜 무릎은 꿇고 그러느냐?”
“대법왕님이 아니었다면 황실은 피로 물들었을 것이옵니다. 수천 수만 명이 죽고 어쩌면 왕조가 뿌리채 흔들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하온데 대법왕님께서 모든 화근을 이렇게 뽑아주셨으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나이까. 비록 세자는 보령이 어리고 황제께서는 의식이 불분명하여 대법왕님의 은혜에 보답을 할 수 없으니 이 늙은이가 감히 대신 할까하옵니다.”
동천몽은 만천의옹을 손을 잡아 일으켰다.
너무 감격하여 눈물까지 글썽이는 만천의옹을 보며 동천몽이 말했다.
“일목은 어찌됐소?”
만천의옹의 뺨으로 끝내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금 전 깨어났사옵니다.”
동천몽이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또다시 착각처럼 세존을 보는 듯 했다.
‘아아! 대법왕은 진정 살아 있는 활불이라는게 사실이란 말인가!’
만천의옹의 눈이 떨렸다.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눈앞의 인물은 대웅전 한 가운데 뭇 중생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석가세존이었다.
들어 갈 때는 힘들었지만 나 올 때는 네 개의 다리 중 황제만 다닌다는 북쪽의 다리를 이용했다. 만천의옹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황제의 친위대가 금위영반의 무사들을 모조리 제압했다.
충신들은 한사코 만천의옹을 통해 대법왕을 뵙기를 청했지만 동천몽이 거절했다. 조용히 그냥 떠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자금성을 나와 한참을 걷던 일목이 불쑥 앞을 막아섰다.
“대법왕이시여.”
“너 갑자기 왜 이래 또?”
“너무 고맙습니다.”
동천몽이 눈을 크게 떴다.
일목이 말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이 죄인을 대법왕님께서 자비로 살려 주셨사옵니다.”
“죄…죄인?”
“저는 죄인입니다. 이 죄인을 자비로 감싸주십시오.”
동천몽이 눈을 깜빡거렸다. 느닷없는 죄인이라는 말에 머리에 혼란이 온 것이다.
“대법왕님께서는 정말 소승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앞으로 오로지 대법왕님만을 위해 이 놈의 삶 바치겠나이다.”
“일목.”
“명을 받드옵니다.”
“어서가자.”
천년설삼을 복용하여 일목의 내공은 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무인에게 내공 상승보다 더 기쁜일은 없다. 그래서 일목은 어떤 식으로라도 감사를 표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자신을 죄인이라고 낮춘 것이었다.
언젠가 동천몽이 포달랍궁에서 제자들을 앉혀 놓고 우리 모두 죄인이며 죄 가운데 살고 있다는 설법이 떠올라 잽싸게 갔다 붙인 것이었다.
“대법왕님 소승 무미이옵니다.”
갑자기 길 앞으로 눈썹이 하나도 없는 무미선사가 날아내렸다.
동천몽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무미선사는 포달랍궁의 정보기관 사불각의 각주이다. 자금성으로 떠나면서 전서구를 이용해 중원의 움직임, 특히 동천비와 무림맹 목와북천의 동태를 면밀히 지켜보라고 했다.
“강호의 상황은 어떠냐?”
“대법왕님의 예상대로입니다. 동천비 대공자께서 무림맹을 함정에 몰아넣었사옵니다.”
무미선사는 자세한 내용을 말했다.
동천비의 입술이 비틀렸다.
“훗훗! 볼만 했겠군.”
“동천비 대공자를 완전히 몰살하기 위해 무림맹의 모든 정예를 투입했는데 역습을 당하는 바람에 무림맹 상층부에서도 무척 당황하는 것 같사옵니다. 그리고 목와북천이 본격적인 피바람을 몰고 왔습니다. 이미 청해와 감숙 산서를 완전히 흑도의 세력으로 편입했고 무림맹을 따르던 세력들은 씨를 말렸습니다.”
“보고중 언뜻 남궁관이란 이름이 나오던데 자세한 얘기를 해보겠느냐?”
“남궁관은 현 맹주인 남궁천의 아들입니다. 신동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뛰어난 자질을 갖고 태어났으며 남궁천의 철저한 조련에 의해 이미 검강의 수준에 올랐다고 합니다.”
“검강?”
“오죽했으면 자신 보다 세배 뛰어나다고 남궁천이 극찬을 했겠사옵니까? 그가 아니면 모용산을 동천비 대공자의 묵곤혈참기에서 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사옵니다.”
무미선사의 보고에 의하면 동천비의 묵곤혈참기는 극성에 올라섰다고 했다. 그런데도 모용산을 구해냈다면 보통 인물이 아니다. 특히 부친을 닮았다면 무척 교활할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당금 무림맹주 남궁천을 정인군자의 표상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부친 동오룡의 말을 빌리면 심계가 뛰어난 무서운 효웅이었다. 상관량에게 전해지는 황금의 절반이 어쩌면 그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소림의 장문인인 우공선사마저도 남궁천 앞에서는 한발 물러선다고 했을까. 그만큼 남궁천의 영향력은 무림맹에서 절대적일뿐 아니라 무공 또한 적수를 찾기 어려웠다.
그러한 남궁천의 입에서 자신보다 세 배가 뛰어나다는 말은 무공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심계 또한 그러하다는 얘기로 해석되어 야 할 것이었다.
“소월당의 근황은 어떻느냐?”
어머니 안부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아주 행복해 하십니다. 특히.”
무이선사가 갑자기 말을 끊고 동천몽의 눈치를 살폈다.
동천몽이 눈을 빛냈다.
“왜 말을 하다 멈추느냐? 어서 말해보거라.”
“자…자낭자와 날마다 붙어 생활할 뿐 아니라.”
또다시 무이선사가 말을 잠시 멈추었다.
마른 침을 꼴깍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거…거의 고부(姑婦)간이 되어버렸습니다.”
“뭐…뭐라고 했느냐? 고부간이라니 좀 자세히 말해 보거라.”
“자낭자가 말끝마다 어머님 어머님 하고 가모님께서는 아가야 아가야 하옵니다.”
“우욱!”
동천몽이 충격을 받은 듯 비명을 질렀다.
“괘…괜찮으시옵니까?”
“난 괜찮다. 계속 말해보거라. 그리고 또 뭐가 있느냐?”
무이선사는 땀을 뻘뻘 흘렸다.
그만큼 보고 내용이 어렵고 힘들다는 뜻이었다.
“또…또한.”
“뭘 그렇게 더듬거리느냐?”
“자낭자께서 대법왕님을 그…그이라고 부르옵니다.”
동천몽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그이?”
“또 있사옵니다.”
“한 번에 모두 털어보거라.”
“미…믿을 수 없게도 대법왕님께서 이번에 돌아오시면 서둘러 혼례를?”
“누…누가 그 말을?”
“가…가모님께서.”
“아미타불! 아미타불!”
동천몽이 연신 불호를 중얼거렸다.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필시 자정경이 순진한 어머니를 꼬득여 일을 꾸며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따라오겠다는 것을 무예 연마해야 한다고 떼어 놓았는데 그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어머니 능씨는 말이 없다. 하지만 한번 자신이 결심하고 결정한 것은 기어코 밀어붙이는 저돌성이 있었다. 정말로 자정경과 혼례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사실 그동안 틈나는 대로 자정경과의 관계 정립이 무척 혼란스러웠고 갈등이 많았다. 자신의 감정도 그렇고 자정경의 마음씀씀이도 범상치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자신은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대법왕이 되었다. 그것은 뿌리칠 수 없는 현실이었고 일만이천 포달랍궁 제자들의 큰 스승이었다.
하나 자신이 운명을 받아들이게 만든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불사심법을 십이성 연마하면 남성 기능이 소멸된다는 것이었다. 결코 아무 의미 없이 그렇게 만들어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법왕으로써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색심을 미연에 단하고 막기 위한 조치라고 생각했다.
흔히 운명도 개척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뭘 몰라도 한 참 모르는 소리다. 운명이란 타고나며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절대 바꿔지지 않는다. 그래서 노력은 하되 빨리 자신의 그릇과 됨됨이를 파악하고 깨닫는 것이 가장 현명한 사람의 처신이다. 주어진 상태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그나마 지혜롭고 남은 삶을 편히 끌고 갈 것인지를 찾고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대법왕이 된 것은 팔자이며 운명이었다.
“잘 알겠느니라. 그래 다른 소식은 없느냐?”
“부친의 오해가 깊으십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동안 적지 않게 망설였다. 부친에게 자신의 계획과 의중을 알릴 것 인지 숨길 것 인지 갈등했다. 그러나 끝내 부친에게 자신의 뜻을 생각을 감추기로 했다. 물론 그렇게 하다보면 자신을 향한 부친의 오해가 생길 것은 명약관화했다. 위기에 빠진 가문을 건져 낼 능력이 있는데도 모른 체 하는 데 어느 아버지인들 섭섭하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상관량은 영리하다. 동천비 또한 보통 두뇌가 아니었다. 만약 부친의 오해가 염려되어 살짝 자신의 의중을 가르쳐 주면 그들은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부친이 아무리 시치미를 떼고 감춘다고 해도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들이 그런 미세한 반응을 눈 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한 예로 적이 침입했을 때 구원군이 없으면 미친듯이 당황하고 두려워한다. 하지만 구원군을 숨겨 놓았을 때는 절대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친 역시 장사로 잔뼈가 굵었지만 자신의 전략을 가르쳐주면 절대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을 것이고 그걸 적이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었다.
아직 강호의 일에 개입 할 때가 아니었다지만 묘하게도 집안 문제가 곧 강호의 일이었다. 동천비와 무림맹과 목와북천 삼자가 물고 물리는 한 가운데 있었다. 최소한 집안이 완전히 풍비박산 나야 가닥을 잡기 쉬어진다. 지금은 단지 한발 물러나 지켜보고 구경할 시기였다.
상관량이 이번에 크게 당했으니 그 성품을 보아 반드시 복수를 할 것이다. 기어코 받은 만큼 돌려주려고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동천비와 목와북천은 더욱 단단히 손을 잡을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본격적인 대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명령을 내려 주소서.”
“무슨 명령을 말이냐?”
“본궁도.”
“본궁이 뭣을? 그런 것 없느니라. 우린 그저 구경이나 열심히 하자.”
“네옛?”
“지시할 것이 없으니 그만 돌아가거라.”
“피바람이 시작될 것이 온데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는지요?”
“우리가 싸우는 것도 아닌데 뭘 세운단 말이더냐? 아까 말했을 우린 열심히 굿이나 보고 놀면 된다.”
여전히 동천몽의 말뜻을 헤아리지 못한 무미선사가 눈을 깜빡거렸다.
“이 한마디만 전하거라. 머잖아 큰 싸움을 하게 될 터이니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이르라. 이것이 너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또한 정경이에게 전하라. 경거망동하면 참지 않겠다고.”
“그대로 전하겠사옵니다.”
무미선사가 포권의 예를 취한 후 사라졌다.
무미선사가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일목이 말했다.
“소승이 뭐라고 했사옵니까? 자 정경 그 계집, 아니 그분은 문제가 조금 있다고 했지 않사옵니까?”
계집이라고 불렀다고 동천몽의 인상이 구겨지는 것을 보며 서둘러 고쳤다.
“소승이 관상을 조금 볼 줄 아는데?”
“네가 관상을 볼 줄 안단 말이냐?”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일목이 목을 좌우로 한번 우두둑 소리를 내며 돌렸다. 대개의 사람들이 목에 힘을 줄 때 취하는 동작을 일목 역시도 그대로 재연해 보였다.
하지만 목에 힘을 잔뜩 준 사람치고 그만 큼 가치 있는 비밀이나 깊은 지식을 털어 놓는 사람 없다는게 동천몽의 생각이었다.
“관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뭔 줄 아십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코.”
그러면서 일목이 자신의 코를 가리켰다.
“이 코를 제백궁이라고도 부르고 얼굴 가운데 있다고 해서 중악이라고도 부릅니다.”
“중악이라면? 중원오악 중 숭산 아니냐?”
“숭산에 무엇이 있사옵니까? 바로 구파일방의 소림사가 있지 않사옵니까? 누가 뭐래도 소림사는 누천년 강호사에서 천하제일문이란 지위를 이어오고 있지요.”
일목은 침을 튀기며 말했다.
“중악의 소림사가 빛나듯 코 또한 얼굴에서 가장 독보적이고 툭 튀어나왔지요. 그런데 자정경 낭자는 코가 너무 오똑 합니다.”
“그럼 좋은 것 아니냐? 여자 코가 납작하면 그게 어디 코더냐? 떡이지.”
“코가 높은 여자는 아주 콧대가 셉니다. 성질도 무척 오만방자하고 지 마음대로지요.”
“그래서 정경이 절대 내 말을 듣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란 말이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사옵니다. 사제의 인연을 끊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 계, 여자는 평생 대법왕님을 괴롭힐 것이옵니다.”
계집이라고 부르다 잽싸게 바꾸었다.
동천몽 또한 흥미가 있는 표정이었다.
“괴…괴롭힌다니? 좀 구체적으로 말해보겠느냐?”
“대법왕님을 가장 괴롭히는 일이 지금으로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옵니까?”
동천몽이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했다.
과연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봤지만 선뜻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소승은 알고 있습니다. 자낭자는 비록 사제지간이라고는 하지만 대법왕님과 나이차이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사부님 앞이라는 이유로 옷을 홀라당 벗고 갈아입기 일쑤이고 달려가 끌어 안는 건 예사입니다. 그것 뿐만이 아니라 잠자리까지 옆에서 자려고 하는 것을 서너 번 보았습니다. 이게 대법왕님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고 뭡니까? 대법왕님도 젊은 사내인데, 그것도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천하쌍미 중 한 명이 옆에 잠을 자거나 앞에서 옷을 갈아 입으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확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동천몽이 눈을 크게 떴다.
일목의 너무 노골적이 표현에 놀란 것이다.
“막 말로 중은 사람 아니고 남자 아닙니까? 대법왕님 앞에서 알몸을 보였다가 만약 덮치기라도 하면 본인은 좋을지 모르지만 대법왕님께서는 파계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럼 본궁의 미래가 어찌되겠나이까?”
“음!”
일목의 말은 약간 중언부언 하는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제법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대법왕님께서 일반 중이라면 소승이 이토록 신경쓰지 않사옵니다. 중놈 한명 파계한다고 해서 본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대법왕님이 파계를 하면 그건 문제가 심각해지지요.”
“일목아, 네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 한 가지를 알거라. 솔직히 말하겠는데 나 남자 아니다.”
일목이 눈살을 찌푸렸다.
눈이 두개 있는 사람의 눈살 찌푸리는 모습만 보다 하나밖에 없는 눈이 눈살을 찌푸리자 아주 괴상망측했다.
“그…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대법왕님께서 사내 대장부가 아니라면?”
일목은 이해가 되지 않는 다는 듯 눈살을 더욱 찌푸렸다.
동천몽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밥부터 먹자. 배고프다.”
동천몽의 어깨가 갑자기 축 쳐졌다.
앞서가는 동천몽을 바라보는 일목의 고개가 연신 좌우로 기우뚱거렸다.
햇살이 좋았으므로 상관량은 오랜만에 처소 밖으로 나왔다. 그의 좌우 겨드랑이에는 목발 한 개씩이 끼어 있었다. 오른쪽 다리가 부러져 부목을 대었고 내상도 얕지 않아 치료 중에 있었다.
그날 목와북천의 정예 중 한 곳인 사벌(死伐)의 추적을 받았다. 인원수는 이십 명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일당백이었고 자신을 잡기 위해 동천비가 작정하고 끌고온 것이었다. 스무 명의 공격은 상관량의 무위로는 물리치기 벅찼다.
온 몸에 상처를 입고 다리까지 부러지며 생사의 위기에 몰렸을 때 나타난 이가 바로 신검 남궁천이었다.
무림맹주이지만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남궁천의 검을 구경해보지 못했다. 다만 하늘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벨 것이라는 게 무림맹 사람들의 짐작이었다.
그날 상관량은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눈앞에서 보여지는 남궁천의 검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의 검이 불과 서너 번 번뜩였을 뿐인데 이리떼처럼 이빨을 드러내며 자신의 숨통을 조여오던 사벌의 무사들이 모조리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차라리 그것은 꿈결이라고 해도 좋았다.
아직까지 그토록 깔끔하고 완벽하며 매서운 검은 보지 못했다. 남궁세가는 검으로 내려온 무가이다. 그래서 검에 관한한 중원에서 독보적인 존재이고 높은 위치에 올라서 있었다.
자신보다 높을 것이라는 걸 예상 했는데 그날 보았던 남궁천의 검은 높은 수준이 아니라 환상이었고 왜 그를 신검이라고 부르는지 증명해 보인 검무(劍舞)였다.
“밖을 나온 걸 보니 많이 좋아 진 것 같구려.”
어느새 남궁천이 다가와 있었다.
“매…맹주님!”
상관량은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구부렸다.
옛날 같았으면 턱도 없는 행동이었다. 그냥 가볍게 목례 수준으로 끝냈을 것이다.
“잠시 후면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모이는데 가능하면 회의에 참석하시오.”
“아니옵니다. 본관은 여기 있겠사옵니다. 이런 모습 보여 사기만 떨어뜨릴 뿐입니다.”
“좋을 대로 하시오.”
남궁천이 웃으며 사라졌다.
예전 같으면 당연히 참석했다. 그리고 자신이 회의를 이끌고 원하는대로 결과를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야 말로 자신은 남궁천의 뜻을 존중해야 했다. 즉 오늘 구파일방의 회의는 남궁천이 소집한 것이다. 오늘 회의 목적이 짐작되었지만 모른체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상관량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누구도 자신의 머리를 앞선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무림맹의 총관이면서도 군사직까지 겸했다. 그리고 무림맹을 거의 자기 손으로 쥐락펴락 하다시피 했고 그런 자신을 아무도 가로막거나 이의 따위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은 피라미였다. 세상 넓은 줄 모르고 날뛰는 우물안 개구리였던 것이다. 세상에는 남궁천이라는 거물이 있었고 묵곤혈참기에서 모용산을 구출해낸 남궁관이라는 혜성이 있었다. 진정한 용은 함부로 꼭 필요 할 때가 아니면 자신의 위상을 좀체 드러내지 않는 다는 것을 체득하고 보았다.
대 회의청에 모두 열세 명의 인물들이 장방형의 탁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승(僧) 도(道) 속(俗) 걸(乞)등 다양한 인물들이 앉아 있었는데 하나 같이 범접하기 어려운 기품과 위엄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부욱!
개방의 장문인 용두신개가 약지 끝에 묻어 나온 코딱지를 자신의 옷에 닦으며 입을 열었다.
“무림맹 사상 이런 패배는 처음이오. 그것도 정예들만 이끌고 가서 몰살을 당하다니. 쯧쯧쯧!”
“그만 둡시다. 이미 끝난 일인데 더 이상 거론해봤자 속만 상하오이다.”
가슴에 아홉 마리의 용이 수놓아진 도복을 걸친 인물이 말했다.
청성의 장문인 구룡자였다.
“하긴 그렇소.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지 뭐.”
그때 문이 열리며 남궁천이 들어서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궁천이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앉읍시다.”
모두가 자리에 앉았고 일제히 남궁천을 쳐다보았다.
남궁천 역시 자신을 주시하는 구피알방과 사대세가의 가주들을 훑어보았다. 모두가 표정이 밝지 않았는데 이번 싸움의 결과로 인해 감정들이 상해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오늘 모임의 안건을 말하겠소. 무통령(無通令)을 내려야겠소.”
“무…무통령.”
“무량수불!”
여기저기서 놀라는 소리가 들려나왔다.
무통령은 막강한 권위를 지니는 한 가지 신물이다. 초대 무림맹주였던 소림의 공공선사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물건으로 구파일방과 사대세가 수장들 모임에서 과반수의 찬성이 이뤄지면 무통령이 내려진다.
무통령이 내려지면 강호의 모든 명령과 각 문의 통제와 명령이 완전하게 무림맹주에로 옮겨진다. 무림맹주에게 구파일방과 정도문파의 작전권이 주어지는 것이다.
“맹주 비록 이번 싸움의 결과가 수치스럽긴 하지만 무통령을 내려야 할 만큼 작금의 사태가 심각하다고는 보지 않소이다.”
개방의 장문인 용두신개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러자 당문의 문주 당대군이 잘랐다.
“아니오. 당금 무림은 무통령을 내려야 할 만큼 심각한 위기오. 들으셨겠지만 청해를 비롯한 북쪽의 성들이 흑도에 넘어갔고 우리의 자금줄인 천상각이 그들과 손을 잡았소. 무림맹 창건이래 가장 큰 위기가 몰려오고 있소이다. 당장 무통령을 내려 맹주님께 모든 권한을 일임해야 하오.”
“그렇지만.”
“뭐가 그렇지만이란 말이오. 개방이야 말로 정보가 누구보다 정확하고 빠름으로 잘 알 것 아니오? 전쟁은 자금이오. 무통령을 내려 서둘러 총공세를 펴지 않고 지구전으로 돌입하면 우리의 자금은 금방 마를 것이고 군수물자 부족으로 자칫 흑도에 지배당하는 치욕을 당할 수가 있소이다.”
용두신개의 의견을 당대독이 정면으로 반박했다.
덩치도 큰데다 목청까지 굵은 그의 목소리에 장내는 숨을 죽였다.
“개의치들 마시고 고견들이 있으시면 말씀해보시오. 이 자리는 회의 석상이오. 옮고 그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각자 마음에 담긴 말을 내놓는 장소란 얘기오.”
하지만 누구도 쉽게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초대 무림맹주시절을 제외하고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무통령이 내려진 적은 없었다. 자파의 모든 권한을 무림맹주에게 이양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우공선사께서 한 말씀 해보시지요.”
소림장문인을 쳐다보았다.
주름살이 가득하고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우공선사가 굴리던 염주를 멈추고 남궁천을 쳐다보았다.
“아미타불! 맹주께서는 지금의 상태를 어찌 보십니까?”
“무통령을 내려야 할 만큼 위기로 보느냐는 질문이오?”
“그렇습니다. 소승이 보기에는 무통령을 내릴 만큼은 아니라고 봅니다만.”
남궁천이 말했다.
“무통령을 내려야 할만큼 위기라고 생각한다면 어쩌시겠소?”
우공선사의 눈이 커졌다.
“구체적으로.”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장강 이북이 흑도에 짓밟히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봅니다.”
“무량수불! 그 정도란 말입니까?”
무당의 장문인 태극자가 입을 열었다.
“지금쯤 짓밟힘을 당했는지도 모르지요.”
팽문의 문주 팽가위가 남궁천의 말에 힘을 실어줬다.
회의는 밤늦게 까지 진행 되었다. 하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고 급기야 표결로 합의를 보았다.
상관량의 자신의 처소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차가 떨어지면 시녀가 채웠고 떨어지면 채우기를 어느덧 열 두 번째였다. 열두 잔째를 마시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상관량이 아주 긴장해 있다는 뜻이었다.
미시부터 시작된 대회의가 자시가 넘은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회의가 길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진통이 많다는 의미였다.
벌컥!
문이 열리고 가개묵이 들었다.
“그래 어찌되었느냐? 결과를 말해보거라.”
상관량이 들어 올렸던 잔을 내려놓고 다그치듯 물었다. 가개묵은 대회의청의 동향을 수시로 상관량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무통령이 가결됐사옵니다.”
“정말이냐.”
“표결결과 맹주님까지 포함하여 찬성이 여덟이었고 반대가 다섯, 그리고 기권이 한 곳이었습니다.”
상관량이 한 동안 얼어 붙은 듯 가개묵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천하가 남궁천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다. 이제 구파일방과 사대세가는 물론 무림맹에 소속된 모든 문파와 개인은 남궁천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거절한 자는 그 자리에서 목이 베이는 참형을 당한다.
소림으로 돌아가는 우공선사의 낯빛은 굳어 있었다. 무림맹에서 하룻밤 보내고 아침 일찍 출발하라고 했지만 고즈넉한 밤길이 걷기에는 그만이라면서 빠져나온 것이다.
뒤를 따르는 시자(侍者) 명철 스님은 앞서가는 우공선사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무림맹을 떠난 지 반시진이 넘도록 아무 말씀이 없었다. 평소 볼일이 있어 자신과 산을 내려가면 항상 좋은 말씀을 해주셨고 어려운 질문도 막힘없이 대답하여 자신의 부족함을 일깨워 주었다.
털썩!
앞서가던 우공선사가 길가 언덕에 털썩 주저앉았다.
명철스님이 한쪽에 조용히 시립하자 말했다.
“너도 앉거라.”
“아니옵니다. 저는 서 있는 것이 편하옵니다.”
“네 이놈, 네가 나무더냐? 서 있는 것이 편하게, 얼른 앉아라.”
우공선사가 버럭 소릴 지르자 명철스님은 조금 떨어져 언덕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명철아.”
“예 방장스님.”
“네 나이가 올해 몇이더냐?”
“갑자기 왜 나이를?”
“이놈아 물으면 대답이나 할일이지 말이 많느냐?”
또다시 우공선사가 인상을 쓰자 명철스님이 얼른 대답했다.
“스…스물 셋이옵니다.”
“스물셋이라, 인생에서 가장 좋을 나이로구나. 가장 혈기가 왕성하고 꿈도 가장 크게 꾸며 그 어느것도 두렵거나 무섭지 않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연령이라고 할 수 있지.”
평소와 다른 우공선사의 말에 명철스님의 고개가 돌아갔다.
“별빛도 참 곱구나.”
우공선사가 어두운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쳐다보았다.
“명철아.”
“예 방장스님.”
“저기 저 별이 보이느냐?”
우공선사가 동쪽 하늘을 가리켰다. 동쪽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었고 명철은 우공선사가 가리키는 별이 어느 것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아는 척 대답했다.
“예. 보입니다.”
“저 별을 천살성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계명성이라고도 부르지. 저 별은 자시 이전에는 그다지 환하지 않지만 새벽녘이 되면 아주 밝게 변하느니라.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요즘은 초저녁부터 아주 밝게 빛나는구나.”
팟!
명철스님의 눈이 빛났다.
밝게 빛난다는 말에 관심을 갖고 살폈고 그 많은 별들 중 시선을 끄는 별 하나가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무척 밝았다.
“돌아가신 전대 장문인, 이 늙은이를 가르쳤던 천통사부께서 말씀하셨다. 저 계명성이 자시 이전에 빛이 나면 천살성이라고 부르며 피의 폭풍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피 바람이 분다구요?”
“그만 가자꾸나.”
우공선사가 일어나 휘적휘적 걸었고 명철스님이 뒤를 따랐다. 하지만 명철스님의 두 눈은 의혹과 긴장으로 빛났다.
조용한 산속으로 우공선사의 불장 짚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흔히 천기라고 하는데 사람 사는 세상에 거대한 변고가 생길 때 하늘에서 어떤 징조를 보인단다. 그게 바로 천살성인데 아마 머잖아 강호에 난리가 나려나보다.”
“구체적으로.”
홱!
우공선사가 돌아섰는데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
“구체적으로 알면 이 늙은이가 막지 이렇게 탄식만 하고 있겠느냐? 이놈이 이제 보니 아주 미련하지 않는가?”
하지만 명철스님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누구로부터 피바람이 시작되는지는 짐작 하실 것 아니온지요?”
“아미타불!”
나직한 불로를 중얼거리며 우공선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명철의 눈은 더욱 빛나고 우공선사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강호의 피는 항상 정(正)에서 시작되었다. 명분은 악의 무리를 소탕한다는 것이었지만 거의가 경쟁 문파나 눈엣가시 같은 명숙들을 죽이는데 혈안이 되었지.”
팟!
명철스님의 눈이 광채를 뿌렸다.
“오늘 내려진 무통령이 혹시 저 천살성과 관계가 있는 것 아니옵니까?”
“아미타불! 없기를 바랄 뿐이니라. 어서가자. 이렇게 걷다가는 내년에나 소림에 닿겠구나.”
우공선사가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나 명철스님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우공선사는 절대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돌다리도 두들겨 걷는 성품인 그의 입에서 그런 무서운 얘기가 나왔다는 것은 확신을 했기 때문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