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황실의 전쟁
동천몽은 외부인이었으므로 함부로 나다닐 수가 없었다. 만천의옹의 영향력이라면 굳이 어려울 것도 없지만 황실이라는 곳이 치열한 권력싸움이 끊이지 않은 곳이고 언제 누가 동천몽의 신상을 비밀리에 조사하여 만천의옹을 위기로 몰아 넣을지 알 수 없었다.
사흘 동안 외출을 하지 않고 방안에 틀여 박혀 있으니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았다. 일목은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만천의옹은 전혀 염려하는 표정이 없었으므로 동천몽은 불안해하지 않았다.
“하암!”
동천몽은 연신 하품을 해댔다.
만천의옹은 볼일이 있다면서 자리를 비웠다.
동천몽은 참상에 누웠다가 일어났다를 반복했고 방안을 서성거리며 숫자를 세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은 더뎠고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털썩!
의자에 털썩 주저 앉은 동천몽은 왼손 소매자락을 걷어 올렸다.
그런데 글씨가 많이 흐릿해져 있었다. 옷이 살갗에 닿으면서 지워진 것 같았다.
동천몽은 그제 서 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잽싸게 먹을 갈고 종이에다 다시 옮겨 쓰기 시작했다.
사사삭!
열심히 종이에 기도살법을 옮겨적던 동천몽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황궁무고 안에서는 서둘러 적다보니 내용에 담긴 뜻을 이해하려들지 않았다. 글이라면 더욱 거부감을 갖고 있었기에 더욱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방안에서는 달랐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시간도 때울 겸 한번쯤 생각해보면서 옮기고 있었기 때문에 구결에 담긴 의미가 들어왔다.
‘먼저 불사심법을 운용하라. 불사심법을 십이성 극성으로 끌어 올린 연후에…’
동천몽의 눈이 빛을 뿌렸다. 비록 책과 친하지는 않지만 지금 정도의 내용은 충분히 무슨 뜻인지 이해 할 수가 있었다. 한마디로 불사심법을 운용하여 십성으로 끌어 올리라는 뜻 아닌가.
동천몽은 나직이 소리 내어 읽으며 옮겨 적었다.
‘가장 먼저 아랫배에 힘을 주어 단전에 있는 내기를 천천히 경락을 따라 이동시킨다. 빨리 끌어 올려도 상관없고 느려도 괜찮다. 급하면 빨리 끌어 올리고 급하지 않으면 천천히 해도 되는 것 아니겠느냐.’
동천몽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디로 위기일발에 처했을 때는 벼락같이 운용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느긋하게 하라는 뜻이었다.
‘끌어올린 진기를 염천혈에 모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숨을 길게 들여 마신 다음 있는 힘을 다해 내 뿜어라. 그러면 상대가 누구든 보이지 않은 기도(氣刀)에 맞아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모조리 옮겨 적은 동천몽이 눈알을 굴리며 다시 읽어 보았다. 한 눈에 내용이 쏙 들어왔다. 어디에도 이해 못할 부분도 없었고 너무 단순했다. 괜히 별것도 아닌 것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자 실소까지 흘러나왔다.
탁!
동천몽은 붓을 놓았다. 그리고 곧바로 기수식을 갖추고 불사심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불사심법을 극성으로 끌어 올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동천몽의 몸에서 무형의 기세가 뻗어 나오더니 점차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소용돌이치듯 몸을 감싸던 무형의 기세들이 단단히 뭉쳐져 완전한 막을 형성했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외부의 그 무엇도 동천몽을 공격하여 상해를 입힐 수 없는 호신강기였다.
운기조식이 아니었지만 전신의 내기를 끌어올리자 호신강기가 형성이 된 것이다.
후우우!
잠시 후 몸을 싸고 있던 호신강기가 코속으로 완전히 스며들고 동천몽은 더욱 힘차게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 상태에서 속으로 중얼 거렸다.
‘아랫배에 사정없이 힘을 주라고 했지’
동천몽은 있는 힘껏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욱!
갑자기 동천몽이 신음을 삼켰다.
아랫배에 힘을 주다보니 하마터면 뒤를 볼 뻔 했던 것이다. 뒷간에서 하던 식으로 주니 그러했는데 아랫배에 힘을 주라고 하여 주었는데 하마터면 실례를 할 뻔 했으므로 속으로 짜증이 버럭 났다.
혹시 자신의 실수가 있을지 몰랐으므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삼키며 다시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끄응!
‘이런 엠병!’
또다시 나오려고 했다. 자신은 분명히 하라는 대로 했다. 아랫배에 힘을 주었는데 엉뚱한 뒤만 나오려고 한다. 운기조식중이기 때문에 움직일 수는 없지만 머리 굴리는 것은 문제없었다. 동천몽은 길게 심호흡을 하고 곰곰이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랫배! 아랫배!’
조용히 뇌까리던 동천몽의 눈이 빛났다.
어머니를 떠올린 것이다. 어려서 배가 아프다고 하면 어머니 능씨는 아랫배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머니의 손이 아랫배를 쓰다듬으면 그토록 찢어질 듯 밀려오는 통증이 사라지곤 했다.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배만 아프다고 하면 어머니는 곁에서 아랫배를 만져주며 노래를 불러주었고 편히 잠에 빠져들을 수가 있었다.
‘이 아랫배가 아니다!’
동천몽의 입술이 물렸다. 양피지에 적힌 아랫배는 어머니가 쓰다듬어 주던 배꼽을 포함한 단전이었다.
“우웁!”
동천몽은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헙!
동천몽이 숨을 들이켰다. 아랫배에 힘을 주자 단전의 진기가 소리 없이 경락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운기조식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진기가 단전 밖으로 나온 것이다.
빨리 끌어올려도 상관없고 느려도 괜찮다고 했지만 동천몽은 어서 빨리 기도살법의 위력을 보고 싶어 서둘렀다. 단전 밖으로 나온 진기는 채 반다경이 되지 않아 어느새 목 아래 염천에 도착했다. 염천혈은 목 부위에서 가장 큰 혈도이자 사혈이었다. 조그만 타격을 가해도 즉사를 면치 못한다. 사실 몸속의 중요 사혈은 대부분 외부로부터 공격하기가 쉽지 않은 곳에 있다. 불가에서는 그것을 세존의 오묘한 섭리하고 말했지만 아무튼 염천에 내기를 모두 모은 동천몽은 온힘을 다해 입으로 뿜어냈다.
“푸우우우!”
동천몽이 앉아 있는 곳과 앞의 벽은 일장쯤 되었다.
그런데 퍽 소리가 나며 방이 흔들거렸다.
부스스스!
갑자기 전면 벽에 거대한 구멍이 생기고 희뿌연 가루가 쏟아졌다. 벽을 쌓은 연당석이 가루가 되면서 쏟아져 나온 것이다. 동천몽은 다가가 구멍의 깊이를 확인했다.
흠칫!
놀랍게도 구멍의 한자 깊이로 뚫려 있었다. 돌만큼이나 강하다는 연당석을 한자 깊이로 뚫어 버린 것이다. 잠시 놀란 표정으로 구멍을 보던 동천몽은 뒤로 물러나와 다시 내기를 운용하여 구결에 따라 진기를 염천혈로 모았다.
“푸와악!”
이번에도 힘껏 내뱉었다.
동천몽의 눈에 보이고 있었다. 기의 결정으로 만들어진 한 자루 칼이 날아가고 있었다.
푸욱!
일반 칼과 똑같이 벽속에 깊이 박혔고 잠시 후 또다시 돌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대…대법왕님!”
등 뒤로부터 만천의옹의 목소리가 들렸고 동천몽이 흡족한 얼굴로 돌아섰다.
만천의옹의 눈이 동천몽의 양손을 살폈다. 손에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데 벽에 구멍이 뚫리자 살핀 것이다.
“무엇으로 벽에 구멍을 내셨사옵니까?”
“아미타불! 그런 게 있느니라.”
만천의옹의 눈은 여전히 화등잔만 해졌고 동천몽이 입을 열었다.
“보겠느냐?”
“보여주소서.”
“잘 봐라. 눈 크게 뜨고.”
동천몽이 다시 진기를 일으켜 입김을 훅 불었다. 그러자 퍼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멀쩡하던 전면 벽에 구멍이 생겼다.
“마…맙소사!”
만천의옹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볼 수 있었던 것은 동천몽이 입김을 불었다는 것 뿐이었다.
“서…설마 입김으로 벽을 뚫었단 말씀입니까?”
“보고서도 못 믿겠다는 것이냐?”
그러면서 다시 훅 불었다.
푹!
이번에도 깊은 구멍이 뚫렸다.
깨끗하던 벽에 구멍이 생기며 방안에는 돌가루가 휘날렸다. 만천의옹은 한동안 넋이 나가 있었다. 입김으로 일반 칼보다 더 무서운 위력을 보이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불과 사흘 전에 얻은 기도살법의 구결을 소화하고 직접 시전해 보였다는 것에 더욱 놀란 것이었다. 말이 사흘이지 자신이 보기에 지난 이틀 동안 단 한 번도 무공 수련 따위를 하는 행동을 보지 못했다. 콧구멍을 후비거나 방안을 서성거렸고 침대에 벌렁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는 등 답답해 미치려는 모습만 보았다. 그렇다면 결국 자신이 잠시 자릴 비운 사이에 수련했다는 것인데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딜 다녀왔느냐?”
동천몽이 묻자 갑자기 만천의옹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무슨 일 있느냐? 말해보아라.”
만천의옹이 입술을 오므리며 고개를 숙였다. 뭔가 생각하는 눈치다. 잠시 그러고 있던 만천의옹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사실 황실에 조그만 문제가 있사옵니다. 현 황제의 동생인 주령왕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사옵니다.”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만천의옹이 한숨을 내 쉬었다.
“황제의 보력(寶歷)이 이순에 이르자 노골적으로 세자를 위협하며 자신이 직접 전면에 나서 정치를 하고 있사옵니다.”
“세자의 보령은 올해 몇이오?”
“황제 보력 쉰에 낳았기 때문에 이제 겨우 열 살의 소년이옵니다. 많은 충신들이 보호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그것이 가능할지 두렵사옵니다.”
“나쁜 놈 아니냐. 조카를 밀어내고 황제가 되려다니.”
“조금 전 어영대장을 만나고 왔는데 몇 일을 넘기지 않을 것 같다하옵니다.”
“몇 일 안에 반란을 일으킨단 말이냐. 주령왕인지 하는 자가 말이다?”
만천의옹이 대답대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권력 무상이라더니 그토록 황제께 충성을 맹세하던 자들이 하루아침에 주령왕에게 돌아섰지요.”
“황제의 상태는 어떠냐?”
“거의 사경을 헤매고 있사옵니다. 어떤 약으로 회생시킬 수 있는 병이 아닌 노환이옵니다. 천수를 다 한 것이지요. 오년만 더 계셔도 세자에게 굳건한 힘을 실어주었을 텐데.”
“의옹.”
“화명하소서 대법왕님!”
“넌 그 귀하다는 천년설삼을 내 수하에게 아낌없이 먹였다. 오직 황제와 세자만이 접근할 수 있다는 설삼을 말이다.”
“설삼이 저 사람과 인연이 닿았기 때문이지요.”
침대를 가리켰는데 일목은 여전히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데려 올 때와는 달랐다. 얼굴에 홍색이 피고 피부가 부드러워졌으며 숨결이 훨씬 생동감 있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너무 뻔뻔할것 같구나.”
만천의옹이 크게 놀라며 말했다.
“무…무슨 말씀이옵니까? 그런 말씀 마소서.”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현 황제는 네가 평생을 모셨던 주군아니냐? 말해라. 주령왕인지 하는 자를 없애주면 되겠느냐?”
흠칫!
만천의옹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누군가 들었다면 기절초풍할 일인데 동천몽은 태연히 뱉고 있었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옵니다. 하지만 워낙 위험한 일이옵고.”
동천몽이 히죽 웃었다.
“천하에서 날 죽일 놈은 없다.”
동천몽이 강렬한 시선을 뿜어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내가 하고자 하면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내가 마음먹으면 그대로 된다. 넌 이 사실을 믿느냐?”
만천의옹의 눈이 커졌다. 언뜻 오만을 넘어 광오한 말이었다. 한 순간 만천의옹의 뇌리를 스치는 한마디가 있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마음을 거두면 천지에는 나 홀로 있느니라.”
마치 저 먼 하늘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듯 했다. 목소리는 깨끗했고 맑았으며 영혼을 울리고 있었다. 듣는 만천의옹의 마음이 샘물처럼 부드럽고 투명해졌다. 틀림없는 세존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환의(還醫)의 두 눈이 지그시 감겼다. 굵은 맥은 어렵지 않지만 작은 세맥들은 오랜 경험과 숙련되지 않으면 잡아 낼 수가 없었다. 여인의 피부를 닮은 희고 고운 팔목에 환의의 네 손가락은 나란히 대어져 있었다.
“어떻소?”
주령왕이 물었다. 팔뚝 만한 검은 숯덩이 두개를 박아 놓은 듯한 눈썹과 호안을 가진 사내는 바로 현 황제의 동생 주령왕이었다. 유난히 피부가 곪고 희어 백옥왕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는 그의 두 눈이 자신의 맥을 짚고 있는 환의의 얼굴을 살폈다. 환의는 주령왕의 건강을 지키는 의원이었다.
한참 눈을 감고 맥을 살피던 환의가 눈을 떴다.
근래 들어 입맛이 없고 자꾸 기침이 생겼다. 처음에는 계절의 변화에서 오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생각했는데 열흘이 지났는데도 기침이 멈추지 않아 환의를 부른 것이다.
입구로는 주령왕의 심복들인 세 명의 흑의무사가 유령처럼 서있다.
천인(天人) 지인(地人) 해인(海人)으로 불리는 가공할 검사들로 이름하여 천지해검이다. 주령왕의 그림자로 하루종일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주령왕의 심기를 건드리거나 그를 방해하는 인물은 세 사람의 손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고뿔입니다. 기침이 조금 심하지만 약 몇 첩 드시면 쾌차 할 것입니다.”
“고뿔이라니 다행이구나.”
“약을 지어 올릴 테니 그동안 따뜻한 물을 드시면서 누워 계십시오.”
환의가 허리를 구부리고 방을 나섰다.
주령왕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은근히 걱정을 했었는데 천만다행이다.
힘들게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만약 자신의 건강에 이상이 있기라도 하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돌아설 것이다.
인심이라는 것은 무섭게 돌변한다. 필시 세자에게로 다시 돌아갈 것이고 자신을 하루 빨리 처형해야 한다고 온갖 감언이설로 꼬득이고 상소를 올릴 것이다.
“가벼운 고뿔이라고 들었사옵니다. 천만 다행이옵니다.”
한 사람이 들어서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금위영반의 수장 철모생이다. 경장차림이었는데 양팔과 발목에 각반을 찼고 옆구리에 일반검보다 한 뼘 정도 짧은 세검(細劍)을 찼다. 한 눈에 매서운 기세가 뿜어나왔는데 황제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이미 주령왕에게 돌아섰다.
“형님의 병세는 어떠시오? 들리는 말로는 사흘을 넘기지 어려울 것 같다고 했는데 벌써 보름을 넘기고 있소?”
철모생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것이 간단하지 않사옵니다.”
“자세히 말해보시오.”
철모생이 가벼운 한숨을 쉬며 툭 내뱉었다.
“모든 건 그 늙은이입니다. 만천의옹 그 늙은이가 무슨 처방을 어떻게 하는건지 꺼져가는 생명을 이렇게 오래 붙들어 놓고 있사옵니다.”
주령왕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만천의옹의 어의였다. 역대 어느 어의보다 실력이 뛰어나며 시체도 살려낸다고 할 정도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황제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어야 했다.
“어제 밤 그 늙은이가 한 개의 알약을 복용시켰다는데 그래서인지 황제의 안색은 더욱 핏기가 돌았습니다. 이러다 벌떡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되옵니다.”
주령왕이 딱딱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었다. 이마를 약간 찡그리며 철모생을 바라보았는데 뭔가 좋은 계책이 없는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차라리 그 늙은이를 제거하는게 어떻겠습니까? 물론 그 늙은이가 뒈지면 우리쪽 소행이라고 모두가 의심을 하겠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사옵니까?”
“으음!”
주령왕의 눈을 치켜떴다.
만천의옹을 죽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죽으면 필시 자신의 소행임을 어린아이도 알 것이고 그렇게 될 경우 지금까지 중립을 지키고 있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세자 쪽으로 돌아설 위험이 있다.
“이제야 말로 무리수를 두어서라도 일을 빨리 진행해야 할 때이옵니다. 시간을 끌다가 무슨 변고가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옵니다. 북쪽 국경을 지키던 맹사옥 장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하옵니다.”
“보고는 들었다.”
“그는 철저한 황제의 수족입니다. 더구나 거느린 군사만 이십만이옵니다. 이십만이 밀고 들어온다면 누구도 막지 못하옵니다. 빨리 거사를 일으켜 가장 먼저 어명을 내려 놈의 목부터 쳐야 하옵니다.”
주령왕의 찌푸려진 이마는 풀리지 않았다.
오늘 내일 한다던 황제의 병세가 벌써 일 년 가까이 지나고 있었다. 만천의옹이 한 번씩 처방을 할 때마다 꺼질 것 같던 황제의 숨결은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콱!
문득 주령왕의 주먹이 쥐어졌다.
지나치게 조심해도 우유부단하다는 말을 들을 수가 있다. 그것은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에게 실망을 주는 행동이고 일부는 대열에서 이탈할 수도 있다.
주령왕이 철모생을 쳐다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강력한 의사를 전달하는 눈빛이다.
철모생 또한 주령왕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는 듯 힘차게 포권하였다.
“다녀오겠사옵니다. 전하.”
“조심하게.”
철모생이 방을 나갔다. 주령왕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가급적이면 피없는 권좌를 원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더 기다렸다간 자신들쪽에서 먼저 균열이 생길 것 같았다.
철모생의 무장이었다. 그것도 금위영반이라는 황제 친위대의 수장으로 자금성 안에서 만큼은 자신의 적수는 없었다. 또한 금위영반을 이끌고 있으므로 어쩌면 가장 확실한 무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황제의 목은 쉽게 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몇 번을 치겠다고 했지만 주령왕은 단호히 가로막았다. 아무리 반란이라고 하지만 무턱대고 피를 흘릴 수는 없다고 했다. 특히 황제를 죽이는 것은 마지막 수순이라고 했다. 황제는 폐위시키는 것과 죽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변화가 민심이라고 했다. 어떤 이유로라도 황제를 죽이는 것은 정당성이 없고 나라를 혼란에 빠뜨릴 위험이 크다는 것이 주령왕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황제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고 있는 만천의옹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내 그를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었다.
상당한 호위무사들이 만천의옹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멀리 만천의옹이 묵고 있는 전각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전각을 쳐다보았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자신과 무척 돈독한 사이였고 가끔씩 보약까지 지어주기도 했던 만천의옹이다. 그래서 사석에서는 형님이라고 부르기까지 했었다.
‘용서하시오. 형님, 인생이라는 게 다 이러는 것 아니오!’
먼저 선택하는 놈이 임자다. 그리고 이기는 자가 옳은 것이고 역사는 항시 이기는 자의 편에 선다.
전각 안으로 들어가는데도 누구도 제지를 하지 않았다. 내공을 끌어 올려 주위를 살폈지만 경비무사들의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어의전을 지키는 무사들이 상당한 고수들이긴 하지만 자신의 이목을 속일 정도는 되지 않는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상식적으로 엄중한 경비가 이뤄지고 있어야 하는데 아무도 제지를 하지 않고 지키는 무사가 없다는 것이 왠지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여기서 무슨 일이, 어떤 돌발변수가 생긴다고 해도 걸음을 되돌릴 수는 없다. 만약을 대비해 잔뜩 내공을 끌어 올리며 걸어 들어갔다. 이따금 찾아와 차를 마시고 갔었는데 오늘의 방문은 전혀 목적이 다른 탓일까. 심장이 조금씩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계단을 올라서서 막 문을 열려던 철모생의 뻗었던 왼손이 멈칫 했다. 지금까지 수십 차례 어의전을 찾아왔지만 자신의 손으로 문을 열어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자신이 온다는 기별을 하면 항상 만천의옹이 문을 열어놓고 기다렸다.
삐이걱!
여느 문과 다를바 없이 가볍게 열린다. 뻗은 복도를 걸어가면서도 내공을 늦추지 않았지만 여전히 감각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더 이상 그 문제에 매달릴 여유가 없었다.
문은 닫혀 있었다. 먼저 들어가며 어서 들어오게 아우님 하던 만천의옹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스르르!
조용히 열고 들어섰다. 약냄새가 코를 찌른다. 보이지 않지만 맞은편 벽 너머 안에 약장이 있었다. 그곳에는 그 가치를 논 할 수 없는 귀한 영약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멈칫!
있어야 할 만천의옹은 없고 웬 흑의사내가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좌측 침대에는 눈이 하나 뿐인 괴상한 인물이 누워 있었다.
“허험!”
가벼운 기침을 하여 흑의사내의 시선을 불렀다. 흑의사내가 고개를 돌리더니 물었다.
“어떻게 오셨소?”
“그대는 누구시오? 내가 아는 여긴 어의 만천의옹의 거처이오만?”
흑의사내가 가벼운 미소를 짓더니 책을 덮었다. 그리고 양팔을 들어 기지개를 켰다. 그것도 소리까지 내어가면서.
“아갸갸갸!”
철모생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혼자 있을 때라면 몰라도 모르는 손님이 있는데 거침없이 소리까지 지른 기지개라니 매우 천박해 보인다.
“어의께서는 여기 없소.”
“어디 가셨단 말이오?”
“그건 나도 잘 모르겠고 내게 이말 한 마디만 하고 나갔소. 여기서 책을 보고 있으면 철모생이란 사람이 찾아올테니 그를 죽이라고 말이오.”
흠칫!
철모생의 눈이 커졌고 흑의사내가 물었다.
“당신이 철모생이오? 금위영반의 수장 말이오?”
철모생의 눈이 가늘어졌다.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철모생이냐고 묻잖소?”
“내가 철모생이오.”
“어떻게 죽고 싶소. 원하는 죽음을 말하면 그렇게 죽여주겠소. 말해보시오?”
철모생이 동천몽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조금씩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감각으로 동천몽의 몸에서는 아무런 기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서…설마 육식귀원의 경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상대의 몸에서 어떤 기세도 뿜어나오지 않는 다는 것은 두 가지 이유라고 볼 수 있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든지 너무 강해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든지.
자신을 죽이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젊은 나이에 벌써 그런 경지에 오른 고수라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빨리 대답하시오. 죽고 싶은 방법을.”
철모생이 피식 웃었다.
감히 금위영반의 수장인 자신을 파리 목숨 여기듯 말하는 동천몽의 태도가 어이가 없었다.
문득 철모생의 입가에 야릇한 웃음이 피어났다.
“헛헛! 무척 자신이 있나보군. 좋소이다. 그렇게 물으니 대답을 하는 게 예의겠구려. 패 죽여주시오.”
병기도 지니지 않았으므로 맨 주먹으로 때려 죽이라고 했다. 물론 그것은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농담삼아 던진 말이었다.
우두둑!
동천몽이 양손을 깍지 끼더니 쭈욱 뻗었고 뼈마디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뭐 그런 것 없소? 내가 손님이니까 예우 차원에서 몇 초를 양보해주겠다는 그런 것 말이오?”
멍청한 것인지 아니면 귀여운 것인가. 생사를 목전에 두고 던지는 대화라는 것이 너무 의외였다.
철모생은 다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구려. 그럽시다. 주인 된 입장에서 손님을 배려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 삼초를 양보해주겠소.”
“고맙소. 아주 감사하오.”
동천몽이 히죽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싸우기 전에 한 가지 만 부탁 할 것이 있소?”
철모생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오십 평생을 살아왔지만 이런 자는 처음이었다. 정말 헷갈리고 이상한 놈이 아닐 수 없다. 주인이 양보를 하고 안하고는 그의 양식의 문제이다. 그런데 뻔뻔하게 양보를 해달라고 억지를 부리지를 않나 어떻게 죽고싶냐고 종류를 선택하라고 하지를 않나 정말 해괴한 놈이었다.
“또 뭐요?”
철모생이 짜증스럽게 내 뱉었다.
“남아 일언 중…중…중.”
갑자기 생각이 안 난다.
괜히 내 뱉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나쁜 머리를 어찌할 것인가. 그런데 철모생이 뒷말을 이었다.
“중천금이오.”
“일구이언은…이…이.”
철모생이 버럭 소릴 질렀다.
“무슨 말이 그렇게 많소? 이부지자란 얘기 아니오?”
“맞소?”
“알았으니 염려말고 공격하시오. 난 내 잎으로 뱉은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키는 성미이니.”
“그럼 지금부터 공격을 하겠소. 거듭 말하지만 번복하면 안되오?”
“아 진짜.”
철모생의 입에서 금방이라도 욕설이 나올 것 같았다.
동천몽이 서서히 진기를 끌어 올렸고 철모생의 눈이 날카롭게 빛을 뿌렸다. 진기를 끌어 올리고 공격직전에 보이는 기수식을 보면 상대가 어느 무공을 사용하려는지 칠 팔 할은 알아볼 수 있다.
보통 사람들에 비해 양 발의 간격이 조금 넓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징후나 이상한 자세는 아니었다. 더구나 적수공권이므로 자신이 모르는 놀라운 살기는 없다고 단언해도 좋았다.
검세나 도세는 다르지만 주먹으로 펼치는 무공의 기수식은 거의가 엇비슷했다.
“일초요.”
“그냥 하시오. 다 알고 있으니까?”
철모생이 버럭 소릴 질렀다. 한편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래 말 많은 사람들 제일 싫어하는 데 끝까지 들어주고 있는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천명을 넘어서면 성격도 변하는데 자신도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동천몽이 주먹을 뻗어왔다.
부우웅!
그다지 빠르지는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상당한 위력이 담겼음을 간파했다. 자신의 신법 추서십육섬을 펼쳐 좌측으로 이동했다. 거리가 가까워 조금은 위험했지만 일초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쾅!
뒤쪽 창문이 통째 떨어져 나갔다.
“이초요. 조심하시오. 일초는 예의상 적당히 한 것이니까?”
“알고 있으니 제발 그냥 공격 하시오. 장부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소?”
“미안하오. 난 이상하게 입만 열면 마구 말을 하고 싶어지오. 너그럽게 양해를.”
쿠와아아!
이번에도 오른 주먹이 뻗어왔다. 하지만 앞선 일초와 그다지 큰 차이는 없었고 또다시 좌측으로 몸을 움직여 피했다. 뒤에 천장을 떠받치고 있던 돌기둥이 우직끈 소리를 내더니 부러지고 대들보가 들썩거렸다.
“과연 금위영반의 수장답소. 적이지만 진정 훌륭한 신법이오. 신법의 이름을 물어도 되겠소?”
철모생의 인상이 다시 우그러졌다.
도대체 신법의 이름을 알아서 무엇 하겠다는 것인가.
“추서십육섬이오.”
철모생은 귀찮아 얼른 말해주었다.
“추…추 뭐라고 했서?”
“추서십육섬이라고 하잖소. 니기미.”
급기야 욕설이 나오고 말았다. 욕은 무식한 부랑아들이 하는 천박한 언어라고 여겼는데 자신도 모르게 뱉고 만 것이다. 금위영반의 수장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금위영반의 수장쯤 되면 무예도 높아야 하지만 학문도 깊고 품위가 있어야 한다.
“이름을 보니 불가의 신법 같지는 않구려.”
하나마나 한 소리에 더 이상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동천몽이 다시 진기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이제 마지막 삼초가 남았소. 조심 하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지막이라는 것에 긴장의 끈을 늦추다가 맞아 죽는 경우가 종종 있소. 절대 그런 우를 범하지 않기 바라오.”
살다 살 다 적의 안위까지 염려해주는 적은 처음이었다.
“준비됐소?”
“후우!”
철모생이 그만 한숨을 쉬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당장 검을 뽑아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지켜야 한다. 무인에게 약속은 목숨보다 소중할 때가 있다.
“왜 대답이 없소. 준비됐나요?”
“준비 됐다니까.”
“아자잣!”
동천몽이 엄청난 기합을 질렀다.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서 큰 기합을 질렀는데 목소리 하나 만큼은 쩌렁했다.
“아리오옷!”
또다시 움직이지 않고 소리만 지르자 잔뜩 경계하고 있던 철모생의 분노가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이런 상놈의 새끼야 지금 장난 하냐? 빨리 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앞으로 흑영이 날아왔다.
진기를 잔뜩 끌어 올린 상태에서 버럭 소릴 질렀기 때문에 끌어올린 진기가 흩어지면서 흔들렸다. 더구나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지른 소리였기 때문에 진기의 요동은 작지 않았다. 그런데다 상대의 공격 속도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달랐다.
흔히 말하는 백팔십도 달랐다.
‘이…이런!’
흔들린 진기를 추스릴 시간적 여유도 없을 만큼 빨랐다. 첫 번째와 두 번째처럼 몸이 신속하게 따라주지는 않는다.
뻐어억!
가슴에 일격을 맞았는데 돌덩이 한 개가 후려치는 것 같았다.
꽈당!
충격에 뒤로 날아가 벽에 부딪히고 떨어졌다. 다행히 쓰러지지는 않았고 중심을 잡았는데 철모생의 눈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커져 있었다.
자신의 앞가슴이 없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어른 주먹 만 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고 피가 앞뒤로 미친 듯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몸이 통째 구멍이 나버린 것이다.
콸콸콸!
가슴과 등 뒤로 피가 쏟아졌다.
너무 어이가 없고 믿을 수 없으며 상상못한 일이었기에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리고 이내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속았다는 것이었다.
상대를 속이는 것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가장 많이 즐겨 사용하는 것이 상대의 감정을 자극하여 이성을 잃게 만드는 격장지계가 있다. 또한 장력 속에 암기를 섞어 공격을 펼치는 수법인데 하오문이나 당문 사람들이 즐겨쓴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는 자신이 약한 척 겨우 겨우 버티는 듯 비칠대다 이쪽에서 방심하면 단 일격에 끝내는 것인데 지금 자신은 제일 마지막 방법에 당한 것 같았으나 냉정히 보면 이 또한 아니었다. 세 가지 방법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신종 속임수였다.
“당신은 강하오. 아마 나와 정면승부를 벌이면 족히 삼십초 상대는 될 것이오.”
“사…삼십초.”
가슴이 뚫린 것보다 더 충격을 받았다.
금위영반의 수장이라면 황실제일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자신이 고작 삼십초 상대 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에 하마터면 저절로 숨이 끊어질 뻔했다.
“믿지 않겠지만 사실이오. 왜냐하면 난 대법왕이기 때문에.”
“대…대법왕? 포달랍궁의 대법왕이란 말이오?”
“당신은 내가 펼친 두개의 덫에 걸린 것이오. 그 첫째는 삼초를 양보해 줬다는 것이오? 물론 양보를 받아내기 위해 난 적당히 당신의 자존심을 건드렸소. 절대 양보를 해서는 안 될 일이었소. 왜냐하면 내가 당신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에, 물론 당신은 내가 그 정도 고수라는 것을 알았겠지만 그래도 설마 했던 것일테고”
틀림 없는 사실이었다.
“두…두 번째는?”
“본왕의 잔소리였소. 횡설수설했던 것은 당신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기 위한 목적이었소. 예상대로 계속잔소리를 늘여놓자 당신은 흥분하여 소리쳤고 그 바람에 진기가 흔들린 것이오. 맞지요?”
너무 정확했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이 있었다. 왜 자신보다 강한 실력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그런 잔머리를 굴렸냐는 것이었다.
동천몽이 대답했다.
“힘으로 이길 수 있소. 그러나 삼십초라는 시간동안 싸우다보면 황실의 무사들이 몰려들 것이오. 물론 그들이 온다고 해서 내가 당신을 죽이지 못하고 이곳을 도망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오. 다만 귀찮아질 뿐이오.”
숨이 느려지며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철모생은 동천몽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직까지 저토록 자신감에 찬 표정의 사내를 본적이 없다.
“이왕이면 간단하고 편히 싸워 이기는 것이 좋은 것 아니오?”
철모생이 휘청 거렸다. 몸에 피가 빠져나가자 가장 먼저 어지러워졌고 이어서 세상이 흐릿하게 보인다.
“이…왕…이면 간단하고 편히…싸워…이기는 것이.”
쿵!
앞으로 고꾸라지며 얼굴을 방바닥에 쳐박았다.
“야 말…로 가장 좋은…것…이지.
이어 조용해졌다.
그때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만천의옹이 가죽 보따리를 든 한 명의 노인을 데리고 들어섰다.
멈칫!
죽어 있는 철모생을 보며 노인이 놀랐다.
“처…철모생 아니오?”
“인사 하시오. 내가 말했던 대법왕님이시오.”
철모생은 신경쓸 것 없다는 듯 만천의옹이 말했다.
노인이 합장을 하며 허릴 숙였다.
“대…대법왕님을 뵈오이다. 소인은 장분사(裝扮師)이옵니다.”
장분사는 황제의 용태를 바꾸는 사람이다. 황제는 자주 백성들의 살림을 살피러 나가고 그때마다 장분사가 얼굴을 바꾸어 암살이나 신분 발각에 대비한다.
“철모생의 얼굴로 어서 만들어주게.”
“알겠사옵니다. 이쪽으로 앉으소서.”
동천몽은 장분사가 가리키는 의자에 앉았다. 장분사는 들고왔던 보따리를 풀었는데 형형색색의 물감과 온갖 분장 기구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잠시 철모생의 얼굴을 한 참 요리조리 살피던 장분사가 물감이 든 병마개를 열고 붓을 쥐었다.
사사삭!
마침내 동천몽의 얼굴에 색이 칠해지기 시작했다. 코와 광대뼈에 얇은 가죽이 붙여지고 조금씩 얼굴 모습이 바뀌어갔다. 이각이 조금 지났을 쯤 방안에서 동천몽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고 죽은 철모생이 환생했다.
장분사가 갖고 있던 동경을 건네주었다.
동경을 보던 동천몽이 깜짝 놀랐다. 강호에도 수많은 변장술이 있다. 인피면구를 이용하는 것에서부터 근육을 바꾸는 역용술등 다양했다. 그러나 지금 동경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완벽한 철모생이었다.
“이걸 드시옵소서.”
장분사가 한 개의 검은 알약까지 내 밀었다.
“성음환이라는 약이옵니다. 목소리를 바꾸어 줄 것이옵니다.”
동천몽은 망설이지 않고 약을 삼켰다.
잠시 후 목구멍이 약간 뜨거워지는 것 같더니 다시 잠잠해졌다.
“어! 어어!”
기침하듯 소리를 내어보았는데 놀랍게도 철모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미타불!”
너무나 완벽했으므로 동천몽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늙은이가 봐도 진위를 구분 못하겠나이다.”
만천의옹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은 기묘한 일이 밥먹듯 일어나는 곳이 강호라고 했다. 동천몽은 다시 한 번 세상의 넓음을 깨달았다.
눈앞의 노인은 틀림없는 기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