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38화 (38/71)

제2장 구천구백구십구 개의 방

장축교는 천상각에서 동북쪽으로 오십리 떨어진 곳에 있는 천년된 석교였다. 그 밑으로 해천강이 흐르고 강주위로 갈대가 우거져 가을이면 적지 않은 유람객들이 찾아드는 조그만 명승지였다.

어느새 동쪽 하늘에 조금씩 빛이 몰리고 있었다. 비록 무공으로 단련된 몸이지만 밤새 알몸으로 있다보니 조금씩 한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밤사이 조용했는데 새벽이 되면서 부터 강바람까지 불기 시작해 더욱 몸을 움츠렸다.

모용산은 자신이 날아왔던 방향으로 쳐다보며 애를 태웠다. 묵곤혈참기는 마공 중에서도 으뜸이며 동천비는 극성에 올라있었다. 당대제일의 검객 신검의 아들이지만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기에 더욱 초조했다.

밤이 조금씩 걷히면서 알몸이라는 것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고 주위가 의식되어 자꾸 살피기 시작했다.

‘제발!’

남궁관이 살아 돌아오길 간절히 바랬다.

현 무림맹주의 아들이자 사대가문중 한 곳인 남궁가의 차기 가주.

강호의 중심이자 주류이고 구팔일방도 남궁세가에게는 한 걸음씩 물러날 만큼 맹주의 권위와 위력은 크다. 또한 개문 이후 남궁세가는 최고의 부흥기를 누리고 있어서 감히 누구도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질근!

모용산의 입술이 물렸다. 이미 머리속에 모든 계산은 끝나 있었다. 하지만 계산이 세워져 있으면 뭐할 것인가. 당사자인 남궁관이 살아 돌아와야 어떻게 이행을 하든지 말든지 할텐데.

확!

석교중앙에 서 있던 모용산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왔던 석교 입구에 사람이 나타났다. 어두워 모습을 분간 할 수는 없었지만 틀림없이 움직이는 것이 사람이다.

모용산은 서너 걸음 다가섰다.

“나…남궁공자님.”

모용산은 한 걸음에 달려갔다.

남궁관은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간신히 검에 의지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모용산은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도 잊은 체 그대로 남궁관을 끌어 안았다.

“공자님!”

남궁관이 그대로 모용산의 품에 안겼다.

“공자님 정신차리세요.”

모용산을 만남으로 마지막 의지가 소멸된 듯 남궁관은 의식을 잃었다. 온 몸은 피로 범벅이 되었고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다행히 맥은 뛰고 있었지만 무척 위험한 징후가 곳곳에서 느껴졌다.

“공자님! 공자님!”

두어 번 부르며 흔들었지만 완전히 축 늘어졌다.

잠시 남궁관의 얼굴을 살피던 모용산이 다리를 벗어나 숲속으로 들어갔다. 보드라운 풀밭위에 남궁관을 반듯 하게 누인 모용산은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옷이 벗겨지고 드러난 남궁관의 몸은 처참했다. 온 몸에 검은 장인이 찍혀 있었는데 묵곤혈참기의 마기였다. 서둘러 몸 밖으로 배출 시켜주지 않으면 목숨을 잃는다.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뿐이었다. 소녀표향대법으로 남궁관의 몸의 양기를 촉발시켜 관계를 맺는 것이다. 관계를 하여 자신의 음기가 실린 내력을 남궁관의 몸에 이입하면 묵곤혈참기의 마기가 배출될 뿐만 아니라 체력도 회복할 것이다.

이거야 말로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이것보다 더 완벽하고 사실적인 인연은 없다.

모용산의 시선이 남궁관의 아랫도리에 멈췄다. 주인이 의식을 잃은 탓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모용산은 조심스럽게 남궁관의 몸 위로 엎드렸다.

남궁관의 겨드랑이 아래로 양손을 넣어 상체를 끌어안고 소녀표향대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소녀표향대법은 남자의 욕망을 부추기고 끌어올리는 사법이다.

얼음덩이처럼 차갑던 남궁관의 몸이 조금씩 소녀표향대법의 기운에 의해 온기를 내 뿜기 시작했고 잠잠하던 아랫도리에서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모용산은 더욱 대법을 끌어올렸고 반각쯤 지나자 남궁관의 남성은 모용산을 밀어 낼 만큼 거칠게 일어났다.

길게 호흡을 가다듬은 모용산이 엉덩이를 들어 올려 좌우로 서너 번 움직이더니 서서히 힘을 주었다.

“으으음!”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사내를 처음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따라 무척 고통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경험한 어떤 남성보다 힘차고 육중했다.

서서히 모용산의 하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통은 점차 희열과 쾌락으로 전신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새벽녘 장축교 위로 모용산의 쾌감에 젖은 신음이 메아리되어 울려퍼졌다.

신으로 모시는 옥황상제가 만개의 방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무례가 되지 않고자 딱 한 개를 줄여 구천구백구십구 개의 방을 만들었다. 동서로 일천장이고 남북으로 일천 오백장이며 팔백채의 대소전각이 처마를 맞대고 있고 그 한가운데 누런 황금색의 지붕이 유난히 눈에 띄는데 이곳이 바로 황제가 기거하는 곳이었다. 일만 명에 가까운 시녀와 일천 명의 내관이 황제를 에워쌓은 깊고 깊은 구중심처에서 천하를 움직이는 명령이 흘러나온다.

일목을 등에 업은 동천몽이 자금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금성 주위로는 삼십여 장 폭을 가진 해자(垓字)가 있고 동서남북으로 해자를 가로지르는 네 개의 다리가 있었다. 이 네 개의 다리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자금성을 침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동천몽의 신법이라면 단 번에 도약하여 건널 수가 있지만 문제는 담벼락이었다. 단숨에 삼십여 장의 폭이 되는 해자를 넘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오장 높이의 담벼락을 넘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즉 물이 아닌 지면이라면 땅을 박차고 도약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불가능 한 것이다.

북경에 도착한지는 오늘로 닷새째였다.

여러 곳을 수소문 한 가운데 황궁어의의 사가를 알아내었다. 또한 이따금 몇 일씩 사가에서 머무른다는 말을 듣고 잠복했지만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했다.

방법이라고는 자금성을 침투해 들어가 직접 황궁어의를 찾아가는 길 뿐이었다.

등 뒤에 업힌 일목은 무모한 일이라면서 한사코 내버려 두라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신을 위해 생명을 바친 수하이니 자신도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야 한다. 그것은 당연한 인간관계인 것이다. 받았으면 절반이라도 갚는 것이 올바른 삶이고 인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음!”

동천몽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마침내 어떤 결심을 한 표정이었다.

동천몽이 몸을 돌렸다.

잠시 후 동천몽이 나타난 곳은 포목점이었다. 흰 무명으로 된 띠를 은자 닷품에 구입하여 아기를 업듯 등뒤 일목을 단단히 묶었다.

“뭐…뭐하려는 것입니까? 설마.”

“조용히 해라 넌.”

“대…대법왕님.”

“시끄럽다.”

동천몽은 일목을 묶어 업고 이번에는 만물점을 찾아가 좌우 석자가 되는 연투포(軟透布)를 구했다. 연투포는 얇은 천으로 물이 스며들지 않는다. 좌우와 밑을 박음질 하여 봉지 형태로 만들었다.

잠시 후 동천몽은 다시 황궁을 에워싸고 있는 해자 앞에 섰다.

네 개의 다리 중 호석(虎石) 기둥이 세워진 호교(虎橋)였다. 네 개의 다리 경비 상태는 거의 같았고 무사들은 금위영반들이었다. 자금성의 경비는 외곽과 황제 측근무사들의 무공이 가장 높았다. 무공이 높은 금위영반 무사들을 외곽에 배치 한 것은 애초부터 적의 침입을 방지하자는 목적 때문이었다. 그런 탓에 자금성은 지난 몇 년 단 한 번의 자객도 침입하지 못했다.

정면돌파를 할 수 도 있었다. 그러나 긁어 부스럼이 될 뿐 아니라 자칫 사건을 확대시킬 위험이 있었다. 힘은 들겠지만 가장 간단한 것은 역시 잠입이었다.

“답답하겠지만 참아라!”

동천몽은 연투포에 바람을 잔뜩 넣어 일목의 고개를 집어넣고 목덜미를 끈끈한 액으로 발라 바람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했다. 봉지 안에 고개를 넣은 일목이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푸욱!

소리없이 일목을 업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은 탁기가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자 금방 햇빛이 차단되어 캄캄했다. 동천몽은 귀식대법을 펼침과 아울러 두 눈에 내력을 모아 안광을 발산했다.

“헛!”

돌연 동천몽이 기겁했다. 놀랍게도 물속에는 수많은 철조망이 거미줄처럼 쳐져 있었다. 침입자를 막으려는 장치인 듯 했는데 동천몽이 더욱 놀란 것은 철조망이 푸른색을 띄고 있다는 것이었다.

‘독이다!’

필시 독을 묻혀놨음이 분명했다.

투명한 연투포를 통해 물속 상황을 발견한 일목 또한 절망의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라면 쳐놓은지 아주 오래된 듯 철조망은 세월에 부식되고 늘어져 끊어지거나 늘어진 곳이 많았다. 조심스럽게 통과를 시도해볼 수는 있었지만 귀식대법을 사용할 수 없는 일목을 위해 준비한 연투포가 만약 철조망에 찢겨지기라도 하는 날엔 실패로 끝날 수 있었기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일목이 물속에서 숨을 쉬지 않고 견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목이 양손으로 옆구리를 두들겼다.

위험하므로 돌아가자는 뜻이었지만 동천몽은 반응하지 않았다.

스윽!

동천몽이 눈 앞에 쳐진 철조망을 쳐들어 간격을 벌렸다. 독이 침범할 수 없는 신체이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다. 일목이 철조망에 연투포가 찢어지지 않도록 얼굴을 바짝 등에 붙였다. 동천몽이 한손을 벌린 철조망 사이로 두 사람은 물고기처럼 조심스럽게 통과했고 조금씩 앞으로 전진 했다.

철조망이 워낙 얽혀 있어 나아가는 속도는 시간은 더뎠다. 사실 물속에 이런 함정이 있는 줄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연투포안에 든 공기는 이각을 넘기지 못할 작은 양이었다. 그런데 철조망을 피해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바람에 채 절반도 통과하지 못했는데 이각이 흘렀고 등으로 떨림이 전해오고 있었다. 일목이 숨을 참으며 온 몸을 떨고 있는 것이었다.

동천몽이 고개를 돌렸고 일목의 눈이 빨개졌다. 얼굴의 힘줄이 연투포를 통해 보였는데 무척 고통스러운 듯 했다. 서둘러 공기를 마시게 해주지 않으면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부들부들!

일목이 사지를 떨었다.

동천몽은 다급했다. 버티다간 일목이 죽을 것이므로 하는 수 없이 수면으로 올라갔다.

모든 건 하늘에 맡겨야 할 상황이었다.

스르르!

갑자기 물이 좌우로 갈아지고 일목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천몽은 수면아래에 있고 일목만 물 바깥으로 올라가도록 한 것이다.

쫙!

일목이 연투포를 찢었고 거칠게 숨을 내 쉬었다.

“크허허허!”

일목이 폭발하듯 숨을 뱉었다. 그리고 등뒤로 고개를 돌려 다리 입구를 지키고 있는 무사들을 살폈다. 다행히 무사들은 모두 입구 저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계속 그렇게 시선을 돌려준다는 보장은 없었다.

동천몽이 전음을 보냈다.

“살피면 신호를 보내라.”

그때부터 일목은 고개를 뒤로 돌렸고 동천몽은 수면 가까이 수영을 전개했다.

투투툭!

동천몽은 앞을 막는 철조망을 손으로 잘라갔다.

탁!

일목의 오른발이 옆구리를 찼다. 경비무사의 고개가 이쪽으로 돌려오고 있다는 뜻이었으므로 잽싸게 잠수를 감행했고 일목의 모습은 물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두 호흡 정도 지나 일목의 고개가 슬며시 물 위로 솟구치며 경비무사를 살폈다. 경비무사의 고개를 이미 다른 곳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무사히 해자를 건너 담벼락 앞에 도달했다. 동천몽이 고개를 뽑아 살폈다. 오장 정도로 예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족히 육장은 넘어 보인다.

사삭!

동천몽의 양손이 담벼락에 닿았다. 마치 개구리 앞발이 벽에 붙는 것 같았고 이어 뒷발 또한 벽에 붙었다.

‘벽호공을!’

벽호공은 도마뱀(壁虎)이 벽을 기어다니는 것처럼 손바닥과 발바닥을 이용해 담벼락을 오르는 것이다. 벽호공의 생명은 손바닥과 발바닥이다. 손과 발바닥을 움푹하게 만들어 진공상태로 만든 후 강력한 흡착력을 일으켜 오르는 것인데 동천몽은 물이 묻은 상태로 전개 한 것이다. 물이 묻게 되면 미끄러울 뿐 아니라 진공상태로 만들 수가 없는데 동천몽은 막힘이 없었다. 더구나 등에는 자신을 매달았다.

스스스스!

동천몽 등에 매달린 일목은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동천몽은 일반적인 벽호공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척!

가볍게 담장끝으로 올라선 동천몽이 안쪽을 대략 살피더니 소리없이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일목이 무명띠를 벗고 내리려 하자 동천몽이 말렸다.

“가만 있거라.”

갑자기 열기가 전해져 왔다. 동천몽이 내력을 끌어 올려 자신의 옷은 물론 일목의 의복까지 말리는 것이었다. 하나같이 듣도 보지도 못한 경탄할 기예에 일목은 연신 입이 아플 만큼 벌렸다.

“누구냐?”

갑자기 싸늘한 외침이 들리더니 한 명의 갑옷을 입은 무사가 나타났다. 동천몽은 직감적으로 두 사람의 몸에서 나는 수증기 때문에 발각 되었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오른손을 뻗었다.

따악!

동천몽의 장심이 갑옷무사의 앞가슴에 격중되었는데 치지직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격중 부위가 녹아버렸다. 강한 양강장력이 명치를 녹여 버린 것이다.

동천몽은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시신을 완전히 삼매진화식으로 태워버렸다. 시신이 발견되면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옷이 마르자 두 사람은 이동하기 시작했다.

전진 속도가 예상보다 느려졌다. 경계가 삼엄하기도 했지만 발각 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 때문에 무척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암습으로 죽이고 편히 전진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근무를 교대하거나 경계무사가 사라지면 금방 의심을 하게 되고 문제는 커진다. 힘들고 느리더라도 들키지 않고 잠입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너무 넓고 큰 자금성을, 그것도 황궁어의의 거처를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처럼 이런 식이라면 몇 날 몇 일이 거릴지도 모른다.

고심 끝에 동천몽은 결단을 내렸다. 들키지 않기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언제까지 소극적으로만 나갈 수는 없었다.

커다란 노송 뒤에 몸을 숨기고 있을 때 두 명의 백의무사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가왔다.

‘동초로군!’

경계는 동초와 보초로 구분된다. 동초는 움직이며 순찰을 도는 것이고 보초는 고정된 자리에서 일정한 시간동안 자신이 할당받은 지역을 지키는 것이다.

두 무사가 가까이 다가오자 동천몽의 오른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파팍!

두 사람이 방어를 하기에는 동천몽의 공격이 너무 빨랐다. 마혈과 소릴 지를 것을 대비해 아혈까지 눌렀는데 두 사람은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동천몽이 아닌 일목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마 태어나 처음으로 눈 하나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동천몽이 입을 열어 취조를 하려다 얼른 다물었다.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머리를 스친 것이다.

‘일목 네가 추궁해라’

전음이 파고들자 일목이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하나 이내 동천몽의 속뜻을 간파한 일목이 두 사내를 향해 인상을 썼다.

하나 뿐인 눈에다 인상까지 쓰자 두 무사는 더욱 놀랐다. 일목의 얼굴은 거의 두려움이었다.

동천몽의 생각은 간단했다. 일목의 신체적 특징, 즉 하나 뿐인 눈을 비롯한 험악한 인상을 이용하면 훨씬 효과있는 취조가 되리란 것이었다.

“내 명령을 따르면 조용히 살려준다. 그러나 삐딱하게 나가면 모가지를 한 바퀴 돌려 버리겠다. 모가지를 한 바퀴 돌리면 어떻게 되는지 말 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일목은 첫마디부터 험하게 나갔다.

예상대로 두 무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인상만 험한 것이 아니라 심성도 독하다는 것이 느껴진다.

“왜 대답이 없느냐? 모가지를 한 바퀴 돌리면 어떻게 되느냐?”

일목이 일부러 잔인함을 풍기려는 듯 다시 물었다.

오른쪽 무사가 말했다.

“주…죽지 않겠습니까?”

“죽지요.”

“모가지가 한 바퀴 돌아갔는데도 산 놈은 여지껏 못 봤다. 참고로 내 주특기는 모가지 돌리는 것이다.”

두 사내의 안색은 완전히 흑빛이 되었다.

“빨리 가봐야 하니 어서 물어 주십시오.”

왼쪽 사내가 채근댔다. 이왕지사 이렇게 됐으니 서둘러 각자 볼일 보자는 뜻이었다.

일목이 웃었다.

“새끼 의외로 말이 통하는구나. 좋다. 임금님.”

‘황제라고 불러라’

신속히 일목의 귓가로 전음이 파고들었다.

일목이 동천몽을 힐끔 본 후 다시 말했다.

“황제님의 병을 고친 자가 있는 곳으로 우릴 안내하거라. 어의라고 있지 않느냐?”

어의란 말에 흠칫했다.

두 사람이 서로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지 않자 일목이 눈을 세모꼴로 만들었다.

“모가지를 돌려달라는 얘기냐?”

일목이 오른손을 쳐들어 올리는 시늉을 하자 왼쪽 사내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저쪽 길을 따라 올라가면 어의전이라고 쓰여 있는 전각이 나옵니다. 그곳입니다.”

“그 말을 날 더러 믿으란 말이냐? 만약 엉뚱한 곳으로 가르쳐 주면 죽는다.”

“감히 우리가 어찌 거짓을.”

“좋다. 너희를 믿고 싶지만 그래도 세상 인심이 모두 그러하니 일단 마혈을 제압해 놓겠다. 참고로 우리의 점혈수법은 독특해서 다른사람은 절대 풀지 못한다. 만약 무리하여 해혈하려고 했다가는 온 몸이 엄청 꼬인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꼬이면서 고통만 동반될 뿐 절대 죽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그럼 죽을때까지 고통과 함께 해야 한다는 말씀 아닙니까? 어의전은 그쪽이 아닙니다. 저쪽으로 가야 합니다.”

오른쪽 사내가 서둘러 왼쪽 사내가 가르쳐준 반대쪽을 손가락질 했다.

그러자 왼쪽 사내 얼굴이 흑빛이 되었다.

일목이 눈을 부릅뜨며 주먹을 쳐들었다.

“너 아주 나쁜 놈이구나. 그렇게 안 봤는데.”

“잠깐!”

왼쪽 사내가 일목의 동작을 제지하더니 말했다.

“솔직히 우린 황실의 무사입니다. 적에게 잡혔다고 해서 그냥 고분고분 가르쳐 주기는 그렇잖습니까?”

“그래서 한번 버텨봤다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이젠 진짜 안 버티겠습니다. 이 친구 말대로 저쪽으로 가시면 나옵니다. 믿어 주십시오.”

일목이 동천몽을 쳐다보았다. 마혈을 풀어 달라는 뜻이었으므로 손을 뻗어 해혈했다.

파팟!

그런데 일목이 갑자기 두 사내의 오른쪽 옆구리를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뭐…뭐하는 겁니까?”

“옛말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더구나 앞서 거짓말의 전력이 있기 때문에 대비책을 세워야 할 것 아니냐?”

두 사내가 호흡을 가다듬어보고 몸을 움직여 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제약된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눈살을 찌푸렸다.

일목이 웃음을 지었다.

“총혈이라는 것이다. 겉으로는 표식이 나지 않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고통을 몰 고와 나중에는 완전히 전신을 비틀어버린다.”

“헉!”

“우….우린 진심으로 말했는데요. 진짜?”

“일단 볼일 보고 한 시진 후에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 그때까지 우리에게 별일이 없으면 풀어주겠다.”

일목이 동천몽을 보며 가자는 눈짓을 했고 두 사람은 겁먹은 두 무사를 놔두고 자리를 떠났다. 무사들은 무척 불안한 표정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우라질! 잠깐 기다리쇼.”

오른쪽 사내가 달려오더니 품에서 둥근 옥패 한 개를 꺼내 밀었다.

“이게 뭐냐?”

일목이 물었다.

오른쪽 사내가 말했다.

“우리의 신분을 나타내는 패요. 누가 검문을 하거든 그걸 내미시오. 그럼 괜찮을 것이오.”

일목이 눈을 빛냈다.

“갑자기 왜 이렇게 친절을 베푸냐?”

“씨벌 진짜 몰라서 묻소? 빨리 볼일 보고 나와야 우리가 자유로운 몸이 될것 아뇨. 뭘 보우. 빨리 볼일 보고 돌아와 우릴 풀어주지 않고.”

“아…알았다.”

일목이 고맙다는 듯 손을 들어보이고 등을 돌렸다.

두 사람은 계속 숲길을 이용하자 등뒤에서 말했다.

“그럴 필요 없소. 오히려 숨어 가면 더 의심을 받을 것이니 그냥 당당하게 행동하시오.”

두 사람은 잠시 쭈뼛거리다 밖으로 나와 걸었다. 사내들의 말처럼 당당하게 걷자 누구도 쳐다보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총혈이라는게 뭐냐?”

거리가 멀어지고 동천몽이 물었다. 처음 듣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목이 뒤를 한 번 돌아보고 말했다.

“꾸며낸 말이옵니다. 놈들 겁을 주기 위해.”

동천몽이 눈을 크게 떴다.

한 참 길을 거슬러 오르자 머리 위로 반월교가 가로지르는 굴이 있었다. 굴을 지나자 넓은 대리석 광장이 나타났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통행을 했지만 자연스럽게 끼어들었으므로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광장 끝에 이르자 긴 회랑이 나타났다. 회장을 벗어나자 다시 오솔길이 이어졌고 조그만 고개를 넘어서는데 한 채의 전각이 나타났다.

“저기로군!”

어의전이라는 현판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동천몽은 어의전을 쳐다보았다. 눈에 보이는 경비무사는 없었다. 그러나 여러개의 기척이 느껴졌다. 황제의 건강을 관리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경비는 삼엄 할 것이다.

“천천히 따라오거라.”

동천몽이 일목에게 말을 하고 몸을 날렸다.

잠입하다 들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먼저 찾아 가는 것이 좋다.

휙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동천몽이 자작나무 뒤를 돌아갔는데 짧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퍼퍽!

이곳 저 곳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고 비명도 지르지 못한 무사들의 시신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십여 호흡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동천몽은 전각 주위에 숨어 있는 십여 명의 무사들의 경계를 완벽하게 허물어 버렸다.

슉!

동천몽이 전각의 계단을 날아 올라 문을 열었다. 이어 곧바로 천장을 향해 지력을 발산했고 가벼운 한숨소리가 들리며 조용해졌다.

파파팟!

연달아 벽과 기둥에 연거푸 지풍이 박혔고 동천몽이 복도 중앙에 날아 내렸다. 복도에 설치된 경계망이 제거되었다.

길게 한숨을 내 쉰 동천몽이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고 일목이 뒤를 따랐다.

스르르!

복도 끝에 닫힌 문을 잡아 당겼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뚱뚱한 노인이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뚱보 노인은 낯선 사내가 들어서는데도 전혀 놀라거나 이상한 시선을 던지지도 않았다.

동천몽은 일목을 향해 눈짓을 했다. 한쪽에 빈 침상이 놓여 있었는데 누우라는 뜻이었다.

스윽!

일목이 침상위로 올라가 몸을 눕혔다.

자신의 허락도 없이 환자처럼 침상위에 눕자 뚱보노인의 눈이 커졌다.

“나 바쁜 사람이오?”

동천몽이 쏘아 붙였다. 그것은 빨리 살피라는 압박이었는데 뚱보 노인은 동천몽을 물끄러미 보더니 돌연 빙긋 웃음을 지었다.

“바쁜 건 자네 사정이지 난 전혀 바쁘지 않네.”

동천몽이 눈을 치켜떴다.

뚱보 노인이 계속 말했다.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군가? 황제인가?”

“….”

“난 황제폐하가 아니면 누구도 돌보지 않네.”

뚱보 노인이 침상에 누운 일목을 보며 말했다.

동천몽이 나직이 말했다.

“존장임을 감안해 한 번 더 말하겠소? 속히 내 수하의 상세를 살피시오.”

문득 뚱보 노인의 입가에 피어있던 웃음이 사라졌다.

동천몽의 몸에서는 물론이고 목소리에서도 위엄이 풍겨 나왔기 때문이었다. 한 눈에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아 본 것이다. 더구나 수하를 살리기 위해 황실이라는 용담호혈로 뛰어들 정도라면 분명히 보통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낀 것 같았다.

뚱보 노인은 보던 책을 덮고 몸을 일으켰다.

침상에 누워 있는 일목을 보더니 흠칫했다. 처음에는 원래는 두개였다가 한 개가 없어진 줄 알았는데 타고 날 때부터 눈이 하나라는 것에 놀랐고 두 번째는 겉의 상처도 컸지만 안의 상처가 깊다는 것에 놀란 것이다.

‘황실에 내려오는 천지인록이라는 서책을 보면 독목인(獨目人)을 거두면 천하를 쥔다고 했다.’

뚱보 노인이 다시 동천몽을 보았다. 쳐다보는 눈빛이 조금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황실 밥 만 오십년이었다. 그래서 사람 보는 안목은 있다고 자부했다.

“귀인이구려?”

동천몽은 묵묵히 대답했다.

“대법왕이오.”

동천몽이 지체 없이 백상불을 보여주었다.

“으헛!”

뚱보 노인이 기절할 듯 놀라더니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소인 만천의옹이 삼가 대법왕님을 뵈옵나이다.”

동천몽이 조용히 말했다.

“당신의 주인은 황제일텐데 어이 내게 무릎을 꿇으시오?”

“육신의 주인은 황제이나 영혼의 주인은 대법왕이십니다. 제가 지금 보고 있는 책이 어떤 것인줄 아시옵니까? 만불경이옵니다.”

그러면서 탁자위에 놓았던 책을 보여주었다.

제목은 초서로 쓰여 있다. 물론 동천몽의 학습능력으로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럴때는 그냥 덤덤하게 무게만 잡는 것이 대수라는 것을 이미 많은 경험으로 터득했다.

“아시겠지만 만불경은 초대법왕이신 천룡법왕께서 지으신 책이옵니다. 구구절절이 지헤롭고 마음을 울리는 내용이지요.”

“좋은 책이지.”

동천몽은 무척 신중했다. 긴말하면 책잡힌다.

“물론 라마교를 믿습니다. 오오! 내 생전에 대법왕님을 이렇게 친히 뵙다니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고 합니다.”

가만 내버려 뒀다가는 진짜 울듯 눈물을 글썽거렸다.

동천몽이 서둘러 말했다. 놔두면 울고 울면 시간이 길어지고 그렇다보면 길보다는 흉이 닥칠 가능성이 있었다.

“급하오. 어서 부탁하오.”

“염려 마십시오. 이미 병세를 읽었사옵니다.”

동천몽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만천의옹이 웃었다.

“그러니까 어의이지요. 잠시만 기다리소서.”

만천의옹이 한쪽 벽을 향해 다가가더니 귀퉁이에 조그만 단추를 눌렀다.

그그긍!

그러자 벽이 좌우로 갈아지고 수많은 약재들이 담긴 약장이 모습들 드러냈다. 약장 한 가운데에 있는 서랍을 열었는데 공유라는 글씨와 천설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만천의옹이 서랍을 열고 한 뿌리의 약초를 꺼내 돌아왔고 동천몽이 눈을 빛냈다.

“혹시 천설이라는 것이 천년설삼과는?”

만천의옹이 빙긋 웃었다.

“과연 대법왕님의 지혜는 따를 자가 없군요. 맞사옵니다. 천년설삼을 약칭해서 그렇게 부르지요.”

태어나 처음으로 지혜가 출중하다는 칭찬을 들어서인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웃으면 경박스럽게 보인다. 동천몽은 이를 악물고 품위를 지키려 애를 썼다.

천년설삼은 말 그대로 눈밭에서 천년을 성장한 삼이다. 그 효능은 공청석유와 더불어 천하최고의 영약으로 회자되며 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구할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만천의옹은 천년설삼을 나무로 된 압착기에 넣어 힘껏 눌렀다. 그러자 설삼이 눌러지며 재색의 액이 조그만 잔으로 떨어졌다. 잔을 조금 채운 액을 일목의 입속에 넣었다. 일목은 정신을 잃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입을 벌려 금세 삼켰다.

뒤이어 만천의옹은 일목의 열여덟 사혈에 금침을 꽂기 시작했다. 금침을 꽂는 속도는 무척 신중했고 열 여덟 개를 모두 꽂았을 때 입고있던 백의가 땀으로 흥건했다.

일목은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닷새 정도 지나면 완치가 될 것입니다.”

만천의옹이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말했다.

동천몽이 깊숙한 눈빛으로 만천의옹을 보며 말했다.

“고맙소이다. 이건 진심이오.”

“이러지 마십시오. 대법왕님께서는 라마교를 믿는 누구에게도 경어를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걸 모르시옵니까?”

“알겠느니라. 널 만난 것 또한 세존의 뜻이 아닌가 싶구나.”

“물론이옵니다.”

“그나저나 황제가 먹어야 할 천년설삼을 내가 사용해서 어떡하느냐?”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천년설삼이 들어오지요. 하오니 너무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그 보다.”

만천의옹이 정색하여 보았다.

“대법왕님께서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들어오셨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대단한 무공을 지니신 것 같군요. 특히 이 늙은이가 사는 이곳의 경계는 허술하지 않지요. 지키는 무사들 모두 일류고수들입니다.”

“어쩔 수 없었느니라.”

죽인 것을 이해해 달라는 뜻이었다.

“비명도 듣지 못했사온데, 역시 대법왕님이시옵니다. 말이 나왔으니 이 늙은이가 좋은 곳을 소개해 드릴까 하옵니다. 그곳에서 저 독목 수하가 나을 때 까지 소일 하시지요.”

“어디이더냐?”

“황궁무고라고 들어보았습니까?”

동천몽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듣다 뿐이겠는가? 천하에서 가장 많은 책이 보관된 천하제일서고라고 했다. 그곳에는 일반서적에서부터 천문지리는 물론 무공기서와 온갖 잡학서적이 망라되어 있다.

“그곳을 구경시켜 주겠다는 것이냐?”

책을 싫어하는 동천몽이었다. 하지만 황궁무고에 관한 얘기는 적지 않게 들었으므로 호기심이 생겼다. 물론 책을 보기위해서 가려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단순한 구경삼아 가려는 것이다.

“우선 대법왕님께서 극락으로 인도한 경비무사들의 시신부터 처리하겠사옵니다. 잠시만 기다리소서.”

만천의옹이 밖으로 나갔다.

동천몽은 의식을 잃고 잠에 빠진 일목을 바라보았다. 생각할수록 일목에게 큰 빚을 졌는데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이 가볍다. 수하라고 해서 주인을 위해 아무나 목숨을 던지지 않는다. 그런데 일목은 하나뿐인 목숨을 미련없이 던졌다. 그것은 백번을 생각해도 가슴 울릴 일이었다.

황궁무고는 지하 이백여장 깊은 곳에 있었다. 사람이 지키는 다섯 개의 관문과 기관으로 된 세 곳의 함정을 통과했다. 만약 만천의옹의 안내가 없었다면 절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철저히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되고 있었다.

그그긍!

서고를 들어가는데 마지막 관문이자 사서인 백발의 노인이 만천의옹을 향해 예를 취하고 기관을 작동했다.

거대한 석문이 열렸다. 어지간한 장원의 정문보다 더 크고 높은 육중한 석문이 열리고 들어서던 동천몽은 그 자리에서 걸음을 세웠다.

그것은 서고라기 보다는 드넓은 광장이었다. 서고는 바둑판처럼 오와열을 갖추고 있었다.

“맙소사!”

“놀라시는 군요? 소인도 처음 들어왔을 때는 너무 놀라 기절할 뻔 했지요.”

동천몽은 본격적으로 서고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만천의옹의 성의를 생각해 대충 훑어만 볼 요량이었다.

각 칸 마다 꽂혀 있는 책의 종류를 알 수 있도록 입구에 글씨를 써 놓았다. 동천몽은 시큰둥한 얼굴로 서고를 돌아다녔다. 서고의 각 칸을 뛰다시피 돌아보던 동천몽의 걸음이 멈췄다.

척!

‘구파일방무(九派一幇武)’

열두 번째 칸을 돌려고 할 때 눈에 띈 팻말이었다.

슥!

소림이라고 쓰인 칸에서 손에 잡힌 대로 한권의 기서를 뽑아 살폈다. 머리를 깎은 중이 장력을 날리는 자세를 그려놨는데 표지에 항마연환신퇴라고 쓰여 있었다. 같은 불문이기 때문에 꾹 참고 서너 장을 넘겼지만 워낙 글씨가 많았으므로 얼른 꽂아 넣었다.

“왜? 볼 것이 없사옵니까?”

소림의 절기가 있는 곳을 대충 지나치자 뒤를 따르던 만천의옹이 물었다.

“별로구나.”

동천몽은 다시 통로를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뒤를 따르던 만천의옹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서장의 지인들을 통해 새 대법왕에 대해 어느정도 얘길 들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그들의 얘기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책을 무척 싫어한다더니!’

괜히 데려왔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 딴 에는 큰 도움을 주려는 것이었는데 동천몽의 행동은 그게 아니었다.

급기야 서고를 돌아다니던 동천몽이 하품했다. 더욱 어이없는 것은 서고의 책들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천장에 붙은 야광주에 흥미를 보였다. 야광주가 보는 각도에 따라 색깔이 달라 보이는데 그것이 재미있는지 자꾸 자리를 옮기며 쳐다보았다.

척!

두 번째로 동천몽의 걸음이 멈췄다. 만천의옹은 무슨 이유로 멈췄는지 궁금했으므로 서둘러 다가갔다.

동천몽이 서 있는 곳에는 포달랍궁무(包達拉宮武) 라는 글씨가 씌여 있었다. 그런데 다른 문파들은 상당한 기서들이 꽂혀 있었는데 포달랍궁무에는 달랑 양피지 한 장이 방치되듯 놓여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만천의옹이 웃음을 짓고 있는 동천몽을 향해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동천몽이 대답을 했다.

“너도 봤겠지만 다른 문파의 기서들은 많지 않았느냐? 설혹 그것이 진본이든 사본이든, 하지만 보다시피 우리 포달랍궁 것은 달랑 저 양피지 한 장 뿐 아니냐? 명문일수록 자파의 진산절기의 외부유출을 엄격히 제한하고 단속한다. 다른 문파의 것들은 수북한데 본궁의 절기는 거의 없다는 의미는 우리가 그만큼 절기보호에 철저했다는 뜻이며 그건 곧 더욱 명문이라는 것 아니겠느냐?”

“그러하옵니다. 물론 구파일방의 무예 중 사본이 더 많지만 적지 아니 진본도 있지요. 그런데 포달랍궁만은 저 양피지 한 장인걸 보면 역시 다릅니다.”

만천의옹의 은근한 칭찬에 더욱 흡족한 듯 동천몽은 노골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양피지는 어찌나 오래됐는지 먹물처럼 검게 변해 있었다. 겉에 뭐라고 글씨가 쓰여있었는데 동천몽이 이마를 찡그렸다. 너무 흐릿했기 때문에 글씨를 정확히 읽을 수가 없었다.

물론 학문이 깊은 만천의옹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눈에도 글씨는 부정확했지만 대강의 윤곽만으로도 무슨 글씨인지 알아 볼 수 있었다.

“뭐지, 어두워서 이놈의 글씨가.”

그러면서 책을 멀리 밀어 살폈고 두 눈을 좁혔다. 누가봐도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 취하는 행동이다.

“기도살법(氣刀殺法)이라고 쓰여 있군요.”

“아, 이게 도자인가? 맞아 칼 도자로군. 난 이것 때문에 힘 력자로 읽을 뻔 했군.”

칼(刀)의 윗부분이 접혀지면서 언뜻 력자로도 혼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앞 뒤 문맥을 본다면 누가봐도 칼(刀)자로 읽을 것이다.

“가만, 기도살법이라면?”

권태가 가득하던 동천몽의 눈알에 힘이 들어갔다.

“왜 그러시옵니까?”

동천몽이 다시 책 표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흐릿한 글씨를 쳐다보는 동천몽의 눈앞으로 죽은 천장금왕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법왕님의 절기는 모두 네 가지가 있사옵니다. 첫째는 불사심법이고 둘째가 지옥금이며 세 번째는 만마생사혈이지요.’

‘네째는 뭐냐?’

‘네 번째 절기는 지금 본궁에 없사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백여년 전에 사라졌지요. 기도살법이라는 것으로 소승도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전해오는 얘기를 빌리면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신비막측한 절기라 하옵니다.’

‘대충이라도 말해보거라.’

‘한마디로 보이지 않는 칼입니다.’

‘뭐? 보이지 않는 칼? 어떻게 칼이 눈에 안보일수가 있단 말이냐?’

‘오로지 불사심법으로만 가능한 절기이지요. 불사심법이 극성에 이르면 내기를 칼로 만들 수가 있사옵니다.’

‘정말이냐? 거짓말이지?’

‘감히 소승이 뉘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나이까. 다시 말하지만 불사심법이 십이성에 이르러야만 가능한 절기입니다.’

‘내기를 칼로 만든다는 것은 곧 입에서 칼이 나온다는 얘기 아니냐?’

‘그렇습지요. 고금을 통 털어 입안에 칼을 숨겼다가 공격하는 절기는 있었으나 내기를 칼로 만들어 공격하는 비기는 본궁의 기도살법 뿐이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사라졌지요’

동천몽의 눈이 부리부리해졌다.

‘그럼 이것이.’

동천몽은 양피지 뒷면을 살폈다.

그곳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순간 동천몽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비록 한 면 밖에 차지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양이 작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글씨가 깨알 같이 작았다. 작고 빽빽한 글씨는 동천몽을 질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혹시나 하면서 샅샅이 살피고 앞면을 다시 보았다.

“무얼 찾으십니까?”

지켜보던 만천의옹이 물었다.

“그림이 없잖아.”

“무슨 그림입니까?”

동천몽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대저 모든 무공 기서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구결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곁들어 놓은 거지. 그런데 이건 어떻게 된 것이 무척 깔끔하구나.”

“하오면 그림이 없으면 배울 수 없단 말이옵니까?”

동천몽이 번쩍 고개를 들어 만천의옹을 노려보았다.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흠칫!

만천의옹이 깜짝 놀랐다. 자신은 별 생각 없이 물었는데 동천몽이 노려보았으므로 당황스러웠다. 사실 신임 대법왕이 책 보기를 싫어 한다는 말만 전해 들었지 돌대가리라는 얘긴 듣지 못했으므로 만천의옹의 반응은 당연했다.

동천몽은 연신 양피지를 앞뒤로 살피고 또 살폈다. 하지만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런 패죽일!’

동천몽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당시 천장금왕의 애기를 들으면서 가장 관심이 갖던 절기가 눈앞의 기도살법이었다. 상대의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입에서 내기로 만들어진 칼이 튀어나와 상대의 숨통을 끊는다고 생각하니 무척 흥미로웠고 재미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몹시 아쉬운 생각을 떨치지 못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황궁무고에서 대법왕의 사대절기중 마지막 것을 얻은 것이다. 한데 그림이 없다면 자신에게는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림만 있다면 이까짓 것 쯤은 배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그대로 시늉내는 것에 관한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다.

그림이 없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설명된 글씨를 읽어 터득해야 한다는 뜻인데 무척 달갑지 않았다. 별 볼일 없는 무공 같았으면 이미 버리거나 포기했을 것이지만 대법왕의 사대절기중 하나이자 자신 또한 관심을 가졌던 것이었기 때문에 외면할 수는 더욱 없었다.

스윽!

동천몽은 일단 품속에 양피지를 집어 넣었다.

“가져가도 되지?”

만천의옹이 웃었다.

“이미 넣어놓고 물으십니까?”

“안 된다는 것이냐?”

“사실 황궁무고는 일체 황족이 아니면 누구도 들어올 수 없지요. 더구나 안에 있는 무공은 열람은 가능하지만 유출은 더욱 불가합니다.”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그럼 어떡하란 말이냐?”

“방법은 한 가지 뿐입니다. 여기서 모든 초식의 구결을 외워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요.”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그것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동천몽은 다시 양피지 뒷면을 보았다. 지금 보니 구결의 양이 더욱 많았다. 불사심법 구결보다 두 배는 될 것 같았다.

“몰래 숨겨 나갈 수는 없느냐?”

만천의옹이 말했다.

“몰래 숨겨 나간다고 해도 적발이 되지요. 황실 무고에 들어있는 모든 책에는 용흡액이라는 물질이 묻혀져 있습니다. 용흡액이란 물질은 기름성분으로 천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사옵니다. 그런데 그 용흡액을 먹고 사는 금설편복이라는 박쥐가 있습니다. 무고에서 밖으로 나가는 통로 천장 곳곳에 금설편복이 살고 있지요.”

“옷 속에 숨겨 나가면 금설편복이 달려든다는 것이군.”

“금설편복은 단순히 먹이 냄새를 맡고 달려들 뿐이옵니다. 중요한 것은 금설편복이 움직이면 자동으로 기관이 작동되고 밖에서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개지랄하는구만.”

동천몽이 품에 넣었던 양피지를 다시 꺼내 있던 자리에 휙 던져버렸다.

“외우시면 될 것 아니옵니까? 보아하니 몇 자 되지도 않는데.”

동천몽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금방이라도 주먹이 나갈 듯 했는데 애써 참아 냈다. 아직 자신의 머리에 대해 알지 못한 사람에게까지 스스로 정체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팟!

갑자기 동천몽의 눈이 광채를 발했다.

“의옹.”

“하명하소서. 대법왕님.”

“혹시 붓 갖고 있느냐. 붓이 아니어도 좋다. 글씨를 쓸 수만 있다면 뭐든지 되느니라.”

만천의옹이 의혹의 표정을 띄었다.

“붓은 왜?”

“있어 없어?”

동천몽이 짜증을 냈다.

“부…붓은 없고 점먹침은 있사옵니다.”

만천의옹이 소매춤에서 반자 길이가 채 안될 것 같은 검은 침 하나를 꺼냈다. 점먹침이라는 것으로 외상 환자 피부에 표식을 남길 때 사용하는 일종의 침필(針筆)이었다.

동천몽은 왼쪽 팔소매를 걷어 부쳤다. 그리고 만천의옹에게 받은 점먹침을 이용해 양피지에 적힌 내용을 옮겨 적기 시작했다.

화악!

만천의옹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도저히 생각지 못한 행동에 아연했다.

‘어떻게 저런 짓을, 외워가면 아주 간단할텐데’

그때 만천의옹의 속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동천몽이 말했다.

“의옹, 그대는 내가 하는 짓이 아주 한심스럽게 보일 것이다. 외워가면 아주 손쉬울 일을 왜 추접스럽게 이런 고생을 하는가 하고 말이다.”

“소…솔직히 그러하옵니다.”

“나도 그 생각을 못한 것은 아니다. 외우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이까짓 것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되지 않아 머리에 접어 넣어버리지. 그러나 이걸 알아야 한다.”

동천몽이 만천의옹을 돌아보았다.

“무공 구결이란 아주 위험한 학문이다. 다시 말해 글자 하나만 틀려도 심각한 위험을 초래한다는 것이지. 일반 학문은 한 두 글자 틀려도 목숨에 지장은 없지만 무공은 다르다. 글 자 하나가 생사를 좌우하고 위력을 정한다. 더구나 이백 년 전에 실전된 대법왕의 절기이다. 글자 하나도 틀리지 않게 옮겨가 남기려면 이 방법 말고 더 확실한 것은 없지 않겠느냐.”

다시 팔뚝에 글씨를 옮겨 적으며 말했다.

“나도 이 고생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대법왕으로써 후대 대법왕들과 본궁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까짓 수고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것이다. 만사…만사 불여 튼튼이라는 말도 있지 않느냐?”

뚝!

동천몽의 동작이 멈췄다.

자신의 입에서 사자성어가 거침없이 나오고 만 것이다. 자정경 앞에서 그토록 잘난 체 하려 할 때마다 막히고 떠오르지 않던 것이 지금은 단 번에 나오고 말았다. 갑자기 가슴이 뛰며 뿌듯해지기 시작했다.

‘만사불여튼튼!’

도저히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 같지 않았다. 그런 말은 어려서부터 대가리를 먹물로 목욕한 사람들이나 하는 말인 줄 알았다. 한데 자신의 입에서 나와 버린 것이다.

동천몽이 스스로 감동하고 있을 때 만천의옹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 늙은이를 용서하소서. 대법왕님의 그 깊은 마음을 알아보지 못하고 잠시나마 의심을 했사옵니다. 역시 대붕의 마음을 나 같은 참새가 어찌 알겠나이까?”

만천의옹의 얼굴에 존경과 흠모의 빛이 넘실대었다. 비록 자신보다 젊지만 대법왕의 사려깊은 행동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대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야 말로 곧 자비의 실천이라고 생각하자 더욱 숙연해졌다.

스윽!

쓰스스!

동천몽은 부지런히 팔뚝에 옮겨 적었다. 글씨의 양이 적지 않아 손바닥까지 채웠다.

“으음! 아미타불!”

자신의 팔뚝에 쓰인 글씨를 흡족한 눈으로 바라본 동천몽이 소매를 내렸다. 감쪽같이 글씨는 사라졌고 양피지는 제 자리에 놓여 있었다.

“이제 나가도 들킬 염려는 없겠지?”

“그렇사옵니다. 역시 대법왕님의 지혜는 놀랍기 그지 없군요. 위대하시옵니다.”

“아미타불! 앞장 서거라. 너무 오래 갇혀 있었더니 머리가 아프구나. 어서 나가자.”

만천의옹이 앞장서고 동천몽이 뒤를 따랐다.

지하계단을 오르면서 동천몽은 자꾸 천장을 힐끔 거렸다. 과연 노란 박쥐들이 군데군데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지나가도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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