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37화 (37/71)

제1장 색의 길(道)

동천몽은 조용히 일목을 끌어 안고 있었다. 동천몽의 품에 안겨 있던 일목이 입을 열어 말했다.

“태어나 그렇게 힘든 싸움은 처음이었사옵니다.”

동천몽이 떠나고 일목은 혈부림 무사들을 악착같이 막았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가 고양이에게 덤비듯 자신이 무너지면 동천몽이 죽는다고 생각하자 어디서 그런 힘과 투쟁력이 생겼는지 스스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상대는 무력 일백 명이나 되는 혈부림 고수들이었다. 오십 여초가 지나면서 일목은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온 몸이 난도질 되었고 피로 목욕을 했다.

급기야 일목은 혈파신공을 끌어 올렸다. 혈파신공은 배교의 최후 절공으로 그동안 틈 나는대로 부지런히 수련하여 오성을 조금 더 올라 있었다.

혈파신공이 십이성에 오르면 전신이 토막나지 않는 한 죽지 않는다.

하지만 완성되지 않은 혈파신공을 무리하게 사용하면 기혈이 역류하여 주화입마를 부르거나 아니면 내공이 산폐(散廢)된다. 달린 선택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일목은 혈파신공을 과감히 사용했다. 그 댓가로 적은 죽였지만 자신은 무인에게 생명과 같은 내공을 잃었을 뿐 아니라 전신경락이 폐쇄되고 말았다.

일목이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살아 계시니 소승이 희생한 보람이 있습니다.”

“왜 궁으로 찾아오지 않았느냐?”

“소승이 망가진 것은 아무렇지도 않사옵니다. 하지만 소승은 소승대로 망가져 놓고 대법왕님의 목숨도 구하지 못했다면 제가 어찌 하늘을 보고 살겠습니까?”

“너무 두려워 궁으로 돌아갈 생각을 못했다는 얘기구나.”

“대법왕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인이 어찌 살아 돌아간단 말입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했지만 막상 죽으려니 겁도 나고 잘 안되더군요. 그래서 이곳에서 순박한 백성들을 위협하며 먹고 살고 있사옵니다.”

일목이 멋쩍은 듯 씨익 웃었다.

동천몽이 일목의 하나 뿐인 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남들은 가장 무섭고 소름끼치는 눈이라고 하지만 동천몽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맑고 순수한 눈이었다.

“가자!”

“가자뇨?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일목아.”

“명을 듣습니다.”

“너에게 한 가지 약속하겠다. 넌 날 위해 너의 모든걸 버렸다. 넌 포달랍궁의 제자이기 이전에 배교의 유일한 후예이기도 하다. 내가 부덕하여 배교의 핏줄을 이렇게 끊고 싶지는 않구나.”

동천몽의 눈빛이 타올랐다.

“널 기어코 예전의 일목으로 되돌려놓겠다.”

일목의 눈이 커졌다.

“어…어떻게, 내공이 상실되었고 전신 경락이 막혔는데.”

“세상에 안되는 일은 없다. 단지 힘이 들 뿐이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를 완전히 회복시켜주마. 이건 대법왕으로서 너에게 하는 약속이니라.”

부르르!

일목이 감동으로 몸을 떨었다.

“대…대법왕님.”

일목이 주먹만 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씨벌! 옛날에 우는 사내새끼들을 보면 빙신 육갑한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오지요.”

“채비를 하거라. 여길 떠나자.”

“채비 할 것도 없사옵니다. 이대로 그냥 가면 되옵니다.”

처억!

동천몽이 일목 앞으로 등을 돌리고 쭈그려 앉았다.

일목이 놀라며 물었다.

“지금 무슨.”

“나 말 많은 사람 딱 질색이니라. 가당치 않니 업히지 못하겠다고 하는 따위의 말을 지껄이면 가만 안 놔두겠다.”

일목이 동천몽의 넓은 등을 내려다보았다.

눈빛이 여러 번 흔들렸고 수시로 얼굴색이 변했다.

“소승의 몸에서 냄새가 많이 날 것이옵니다.”

“내겐 향기다. 생명의.”

일목이 동천몽의 등에 업혔다.

“꽉 잡아라.”

동천몽이 그대로 땅을 박찼다. 일목을 업은 동천몽의 몸이 무섭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동천몽은 곧바로 월주로 향했다. 월주는 기림호를 끼고 있는 도시로 수산업이 발달해 있었다. 특히 기림호에서만 서식하는 황울금어는 귀한 생선이다. 한 마리만 잡으면 한 가족이 일 년을 먹고 살 수 있는 만큼 고가에 거래된다. 그런 이유로 인근 반아와 안다등지에서까지 고기를 잡으러 오는 어부들이 수두룩했다.

동천몽은 일단 사람들에게 물어 월주에서 가장 큰 의원을 찾아갔다. 동천몽이 찾아간 곳은 월주의원이라는 삼층으로 된 목조전각이었다. 유명세를 반증이라도 하듯 많은 환자들이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순서를 기다렸다가 일목의 상태를 보려면 최소한 한 시진 이상 걸린 것 같았다. 동천몽은 곧바로 월주의원의 원감인 공의원의 방으로 들어갔다

드르륵!

예고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제자들로 보이는 두 사람이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동천몽의 오른손이 두 사람의 가슴을 세차게 밀었고 뒷걸음을 치다 넘어졌다.

두 제자가 가벼운 손짓에 쓰러지자 환자를 눕혀 놓고 맥을 살피던 공의원의 눈이 커졌다. 동천몽은 누워 있는 환자를 잡아 당기자 맥없이 바닥을 떨어졌다.

“이런 상놈의 새끼가.”

환자는 덩치가 좋았다. 곧바로 일어나 동천몽의 뺨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동천몽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피하자 뒤에 있던 천장을 받치는 기둥을 정통으로 때렸다.

“꺼억!”

팔목이 부러 진 듯 오른손을 힘없이 늘어뜨리고 펄쩍 뛰었다.

동천몽이 일목을 눕혔다.

“으허허!”

하나뿐인 일목의 눈을 보고 공의원 뿐만 아니라 제자들까지 경악했다.

“눈은 하나지만 심성은 착하오. 어서 살펴보시오.”

“예예!”

공의원은 노련했다. 동천몽의 기분을 거슬렸다가는 좋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일목의 맥을 짚었다.

“어떻소?”

맥을 짚던 공노인이 고개를 갸우뚱 거리더니 하나 뿐인 일목의 눈을 까 뒤집었다. 가뜩이나 크고 무서운 눈이 까 뒤집히자 더욱 소름이 끼쳤고 공의원의 손이 떨렸다.

일목의 눈을 한참 살피던 공의원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상태가 좋지 않군요.”

“고칠 수 있는지 없는지만 말하시오.”

“좋소이다. 솔직히 말할테니 화내지 마시오. 난 못 고치겠소.”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답이어서 동천몽은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소?”

“글쎄요. 전신 경락이 폐쇄된 이런 환자라면 거의 없을 것이오. 하지만 거길 가면 혹시 모르겠소. 황궁의 어의라면 의신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소.”

동천몽의 눈이 빛을 뿌렸다.

‘황궁어의!’

어의가 깜짝 놀랐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목을 들쳐 업은 동천몽의 모습이 사라졌기 때문 이었다. 무림인들을 수 십차례 치료했지만 눈을 뜨고 있는데도 사라진 것을 못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무시무시한 고수였구나.’

“드러워서!”

사내가 부러진 팔목을 쥐며 고통스런 얼굴을 했다.

“봅시다.”

공의원이 사내의 오른 팔목을 만지더니 표정이 굳었다.

“부러졌소. 제대로 뼈를 맞추고 치료를 하려면 몇 일 입원 해야겠소.”

고뿔 때문에 왔다가 큰돈이 들어가게 생기자 사내의 눈이 더욱 험악해졌다.

“아이 미치겠네. 씨발놈.”

사내가 인상을 쓰며 동천몽이 사라진 창문을 노려보았다.

어둠은 항상 범죄를 낳는다. 특히 빛이라고는 전혀 없는 어둠이란 양상군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호기인데 어둠이 모든 것을 감춰버리기 때문이었다.

어둠을 이용해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너무 캄캄하여 자세히 셀 수는 없었지만 족히 수십명은 됨직했다. 그들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고 복면으로 얼굴까지 가렸다. 마치 야생동물처럼, 바람처럼 천상각 담장을 넘어갔는데 어찌나 행동이 은밀한지 망루의 무사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경비무사들이 지척에 있어도 들키지 않으면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것은 이들이 누군가를 납치하기 위해 침입했다는 뜻이다. 만약 천상각을 공격하기 위해서라면 보이는 족족 베었을 것이다.

오십여명의 복면인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어둠 저편으로 녹풍원이 버티고 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오직 야수처럼 빛나는 눈빛만이 살아 꿈틀거렸다.

스윽!

선두에 있던 복면인의 오른손이 올라갔다.

그러자 사내들이 움직였다. 물이 걸레에 흡수되듯 일제히 녹풍원안으로 사라졌다.

쿠쿠쿵!

그들이 모두 녹풍원 안으로 사라졌을 때 갑자기 지축을 울리는 굉음이 들려왔다. 놀랍게도 녹풍원의 모든 입구와 기관이 작동하면서 닫혀 버린 것이었다.

문이 닫힌데 이어 녹풍원 주위로 불이 켜졌다.

파팟!

화르륵!

석등이 켜지고 미리 준비한 듯 화톳불이 일어났다. 불이 켜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선두에 상관량이 있었고 그 뒤로 위모백과 이번에 새로 무림맹 장로의 가문이 되었던 모용세가의 모용산이 보였다.

“훗훗!”

“핫핫핫!”

“호호호!”

상관량을 비롯해 세 사람이 웃었고 뒤를 따라 수하들이 미친 듯 깔깔거렸다.

“과연 총관님이십니다. 완벽하게 걸려들었습니다.”

“왜 우리 무림맹이 불사불멸의 단체인줄 이제서야 알겠어요. 총관님이 계시는 한 누구도 우리의 상대가 될 수 없겠어요.”

“과찬이시오. 모용낭자.”

상관량은 어떤 식으로든 동천비가 천상각을 공격하리라 여겼다. 그래서 동오룡을 위협하여 녹풍각의 모든 기관과 함정을 알아내었다. 녹풍각은 아무나 들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천하제일부호가 사는 곳인 만큼 겉으로는 평범해 보였지만 무수히 많은 기관과 함정들이 설치되었고 유사시에는 기관을 작동하여 외부로부터 신변을 보호 받았다.

중요한 것은 과연 어느 시기를 선택하여 동천비가 공격하느냐 였다. 하지만 상관량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저 전쟁이란 야간에 주로 일어나고 달빛이 없는 날을 선택한다.

달빛이 없는 날이라면 그믐이었다. 그런데 구름까지 끼어 별빛까지 막아줬으므로 오늘이냐 말로 가능성이 완벽했다.

기관이 작동이 되어 모든 출구를 차단했으므로 안에 갇힌 사람들은 절대 빠져 나올 수 없었다. 피곤하게 싸울 것도 없었다. 내버려 두면 굶어죽는 것이다.

“완벽해요. 수많은 전쟁을 해봤지만 이토록 완벽한 승리는 처음 봤어요. 총관님 이런 날 그냥 넘길 수 없지 않겠어요?”

“당연한 말씀이오. 개묵이 있느냐?”

가개묵이 바람처럼 앞으로 나타났다.

“준비한 음식과 술을 아이들에게 주고 즐기거라. 고생들 하였다.”

“존명!”

가개묵이 사라졌고 잠시 후 어둡던 천상각의 넓은 장원은 대낮처럼 환해졌다. 그리고 무림맹 무사들이 삼삼오오 화톳불 주위에 앉아 술과 음식을 들기 시작했다.

미리 술과 음식을 준비했다는 것은 오늘밤의 작전이 통하고 확실한 승리를 할 것이라는 것을 자신했다는 의미였다.

한편 동천몽의 처소였던 화생각 앞 마당에 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동오룡은 망연자실했다. 함정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옴짝달싹 할 수 없었으므로 방법이 없었다.

동천비는 장자이다.

열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 없다지만 이건 틀린 말이다. 조금 덜 아픈 손가락이 있다. 그중 누가 뭐래도 장자의 죽음은 가장 불행이고 슬픔일수 밖에 없다.

그동안 어떻게 해서라도 동천비를 살려 보기 위해 무림맹을 수차례 방문했고 상관량에게 그런 치욕을 당하면서도 인내했던 것은 오로지 동천비를 살리기 위해서였는데 이렇게 모든 것이 허무하게 끝날 줄이야.

뼈가 시리고 심장이 쪼개지는 것 같았다.

보고에 의하면 동천화는 실종되었고 동천혁은 행방이 묘연했다. 그런데 오늘 동천비마저 눈앞에서 죽는다.

울컥!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그것은 상관량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였다.

이글거리는 동오룡의 눈앞으로 동천몽이 떠올랐다. 형이 죽고 동생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가며 집안이 완전히 짓밟히는데 그는 아직 때가 아니라면서 방관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건 절대 아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갖고 있을 지라도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건 막아야 한다. 모두 뺏기고 죽고 난 뒤에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불현듯 동천비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도 그 놈에게 속고 있습니다. 아니 두 모자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놈이 겉으로만 자식인척 하지만 모든 것은 위장이고 위선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지어미와 우리 집안을 거덜 내고 말 것입니다.

‘정말로!’

사람 맘은 모른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능씨도 이미 찾아 안전하게 모시고 있다는 연락이 온지 벌써 보름이 넘었다. 그 이후로는 일제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심부름 온 자에게 능씨의 거처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지만 거절당했다.

생각할수록 의심이 든다.

‘혹이 이 모든 배후에 두 모자가!’

가슴이 두근거리고 피가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좋은 묘책이고 쓸 만은 생각이라면 반드시 형제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고 집안을 망하지 않게 하여야 한다.

그런데 형이 죽고 완전히 모든 천상각의 운영권과 재산이 무림맹에 넘어갔다면 결국은 천상각을 몰락시키려는 복수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그…그놈이!’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는 것보다 더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비록 어려서 기대를 한 때 했다가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실망을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 동천몽을 향한 기대는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포달랍궁의 대법왕이란 엄청난 신분이 되어 돌아왔을 때 그럼 그렇지 하며 자신의 예견을 자찬했다. 한데 돌아가는 꼴이 틀리다.

왜 그토록 형제들이 동천몽과 능씨를 미워했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핫핫핫”

“껄껄껄!”

무림맹 무사들의 웃음소리가 밤하늘에 울려퍼졌다.

그때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화생각 앞 마당에 나와 있던 동오룡의 고개가 돌아갔다. 어둠으로 인해 정확한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한 눈에 상관량과 모용산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밤공기가 찬데 나와 계시오이까?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상관량의 손에 술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상관량이 앞서 들어갔고 동오룡의 등을 쏘아보았다.

“아버님 뭐하세요. 들어가요.”

모용산이 생글 거리며 웃었다.

홱!

동오룡의 눈이 시뻘겋게 달아 올랐다. 모용산이 자신을 보고 웃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동천비와 정혼한 사이였다. 물론 모용세가의 후광으로 무림맹의 갈취를 조금이라도 막아 볼 계산으로 맺어진 정략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아낌없이 주었다. 모용세가로 넘어간 돈만 해도 계산이 되지 않을 만큼 거액이었고 모용산 또한 며느리고 생각하고 진심을 다해 대해주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등을 돌린 것이다. 그녀가 등을 돌림으로 인해 동천비의 무림맹 공격은 처절한 실패로 끝났고 이제는 상관량과 손을 잡고 엊그제까지 자신의 미래 남편이었던 동천비를 죽음으로 몰아 넣고서도 부족해 뻔뻔하게 아버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헛헛! 다른 건 몰라도 사람 하나 보는 눈은 있다고 자부했거늘.”

“왜요? 섭섭한가요? 인생 다 그런 것 아니던가요? 아버님도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어제의 친구도 보란듯이 헌신짝처럼 버리셨잖아요.”

“닥쳐라. 누가 네년의 아버지란 말이냐?”

“호호호! 화를 내시다니 너무 하셔요. 틀린 말한 것도 아닌데, 아무튼 들어가요. 총관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답니다.”

모용산이 엉덩이를 유난히 흔들며 들어간다.

동오룡의 눈에서 파란 불빛이 뿜어 나왔다. 힘이 있다면 당장 머리통을 부수고 싶은 충동이 타올랐다.

화를 누르기 위해 몇 번이고 침을 삼켰다.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자 동오룡은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상관량이 아랫목을 차지하고 앉아 술병을 들어 마시고 있었다.

“뭘 그렇게 서 있으시오. 앉으시오.”

입구에 싸늘한 얼굴로 서 있는 동오룡을 보며 미소짓는다. 동오룡이 맞은편에 앉았다.

상관량이 술병을 내 밀었다.

“아무래도 술 한 잔 하는게 좋지 않을 듯 싶소.”

정말로 술 한 잔 하고 싶었다. 동오룡은 거절하지 않고 상관량으로부터 건네받은 술병을 단숨에 비웠다.

콸콸콸!

미친 듯 이 마시는 동오룡을 보며 상관량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오른다.

“아무래도 술을 더 시켜야겠소. 모용낭자께서 수고 좀 해주시오.”

“물론이예요. 총관님.”

모용산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동오룡은 단숨에 술병을 비웠다.

쾅!

술병을 세차게 놓았다.

“헛헛! 목이 많이 타신 모양이구려?”

동오룡의 입가로 술 방울이 흘러 떨어졌다.

“할 얘기라는 게 뭐요? 어디 들어 봅시다.”

술이 들어가서인가. 훨씬 마음이 편하고 느긋해졌다. 밖으로 나갔던 모용산이 양손에 술을 들고 들어섰다.

“마음껏 드세요. 아버님.”

모용산이 동오룡 앞에다 술병을 놓았다.

“오냐. 마음껏 마시마.”

동오룡은 병마개를 따 입속에 털어 넣었다.

“천천히 마시구려. 술에 체하면 약도 없다잖소이까?”

꺼억!

동오룡이 술병을 떼며 트림을 했다.

“가주, 말 돌리지 않고 말하리다.”

“듣겠소.”

“장사를 하는 분들은 항상 최후의 생로를 마련해 놓는다고 들었소이다. 내 말뜻을 알아들으셨소이까?”

동오룡의 안색이 굳어졌다. 아무리 무덤덤해지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자신 말고는 누구도 모르는 사실을 상관량은 짚어 내고 있었다.

“가주 우리 같이 삽시다.”

“……”

“공존공영 말이오.”

동오룡이 상관량을 빤히 쳐다보았다. 상관량의 눈이 무척 투명했다. 눈이 투명한 사람은 속마음을 알 수가 없다. 희대의 효웅들의 눈이 맑고 깊다.

“무림맹에서 그동안 가져간 돈이 얼마인지 알고는 있소?”

술을 마신 탓일까. 그 동안 하고 싶어도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을 뱉었다.

상관량이 웃었다.

“물론이지요. 왜 모르겠소?”

“지금까지 대대로 많은 돈을 무림맹에 기부했지만 내 대에서처럼 쓸어 가다시피 한 적은 없었소.”

어차피 막가는 마당이라고 생각 했다. 그래서 그동안 못다한 말을 모조리 토하기로 작정한 듯 동오룡은 거침이 없었다.

“지금까지 가져간 돈만 해도 무림맹 같은 단체 십여곳은 더 세울수 있을 것이오. 그런데도 아직도 무림맹에 자금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 많은 돈이 개인의 주머니로 들어갔다고 봐야 하지 않겠소?”

상관향을 비롯한 무림맹 간부 일부가 중간에서 챙겨 먹는다는 도덕적 헤이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상관량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미소띈 그대로였다.

“맹주를 비롯해 당신과 일부 간부들 재산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소. 첩을 들이고 산장을 구입하고 북경에 수많은 전각과 토지를 매입한 것도 무림맹을 위하는 길이오?”

동오룡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내가 속았음을 인정하오. 아니 당신들에게 이용당했음을 부인 않겠소. 또한 당신들 탓을 하지 않겠소. 모든건 이 동모가 부덕하고 무능력한 탓이니까?”

“그렇지 않아요. 아버님, 아버님은 누구보다도 훌륭하고 뛰어난 장사꾼이셨어요.”

“계집 한번만 더 끼어들면 주둥이를 찢어 놓겠다.”

“호호호! 무서워라. 아버님께서 그런 말씀도 할 줄 아시네.”

모용산이 가소롭다는 듯 고개를 젖히고 웃었다.

차가운 눈으로 모용산을 쏘아보던 동오룡이 다시 상관량을 보며 말했다.

“맞소. 당신 말처럼 이 집안 어딘가에는 어쩌면 세상에 알려진 내 재산보다 더 많은 황금이 저장되어 있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소.”

상관량의 웃음이 짙어졌다.

“죽어도 좋다는 말씀이오?”

“어차피 한번은 죽는 것 아니더이까?”

“헛헛! 각주께서 단단히 독이 오르셨구려. 하지만 각주 이것 한 가지는 아셔야 하오. 누구든지 그런 식으로 말은 하오. 그러나 물리적 고통을 가하면 모든 것을 토설하지요.”

“고문을 가하겠다? 맘대로 하시오. 고문을 못 견뎌 입을 연다면 하는 수 없지요. 그러나 맨 정신에는 절대 말해줄 수 없소이다.”

“아버님, 너무 어리석은 생각이에요.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 아니던가요?”

“주둥이 닥치지 못하겠느냐? 화냥년만도 못한 천한 계집.”

모용산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이내 깔깔거리며 교소를 터뜨렸다.

“아버님 기분 이해해요. 얼마든지 욕 하세요. 전 아무렇지도 않으니까요.”

동오룡이 나직히 신음을 터뜨렸다.

자신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속여왔지만 모용산 또한 철저히 자신을 속였다.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이쯤에서 검을 뽑던지 화를 내던지 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사갈보다 더 독한 계집이었다니!’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오늘 밤 생각할 시간을 주겠소. 내일아침에는 지금과 같은 답답한 말은 하지 않았으면 하오. 각주.”

상관량이 앞에 놓인 술병을 들어 두어 모금 마실 때였다.

“아악!”

“크악! 막아랏!”

밖으로부터 비명이 들려왔다. 처음 한 두 번은 듬성듬성 들려오더니 소나기처럼 비명은 걷잡을 수 없이 들려왔다.

꽈당!

문이 박살나고 피투성이가 된 가개묵이 뛰어 들어왔다.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더냐?”

“저…적이옵니다.”

“적이라니?”

“오히려 우리가 당했사옵니다. 동천비와 묵와북천의 무사들이 술에 취해 있는 우리 무사들을 도륙하고 있사옵니다.”

벌떡!

상관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보고였다. 분명이 녹풍원의 기관을 이용해 동천비 일행을 가두었다. 그런데 동천비가 기습을 해오다니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아 이마를 찌푸릴 때 위모백이 뛰어 들어왔다. 그 또한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피…피하십시오. 워낙 숫적으로도 불리하고 우리쪽 무사들이 취해 있어 상대가 되지 않사옵니다.”

“크악!”

“무조건 막…컥!”

비명은 더욱 가까이서 들려왔다. 무림맹 무사들이 화생각 앞에까지 밀려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우당탕!

출입문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적은 예상보다 빠르게 밀고 들어온다. 상관량과 모용산이 밖으로 나갔다.

슈아악!

두 명의 흑인인이 그대로 검을 뿌리며 달려들었다.

촥!

모용산의 검이 허공을 갈랐고 두 흑의인이 허리가 양단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와장창!

좌측 창문으로 뛰어든 두 무사를 상관량의 주먹이 후려쳤다.

뻐벅!

컥!

악!

상관량의 몸에서 무서운 살기가 뿜어나왔다.

“한 놈도 살려두지 않겠다.”

“이럴 때 일수록 냉정해야 해요. 한두 명 죽여서는 대세를 바꾸지 못해요. 훗날을 기약해요.”

상관량의 몸에서 폭풍처럼 뻗어나가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느새 이성을 되찾은 것이었다.

모용산의 말에 흠이 없다. 살아 있으면 언젠가는 빚을 받아낼 수 있다.

“이쪽이에요.”

모용산이 좌측 방으로 뛰어들었다.

천상각은 자주 출입을 했다. 또한 언젠가 동천비를 따라 동천몽의 처소에 들렸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구조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서자 맞은편으로 조그만 창문이 보인다. 창문 밖은 화생각 후문으로 연결된다.

컥!

위모백이 입구로 뛰어드는 흑의인을 벤다.

와장창!

두 사람은 곧바로 창문을 넘었다. 다른 곳은 대낮처럼 환했지만 후문쪽은 어둠이 짙었다.

촤악!

모용산의 검이 또다시 광채를 뿌렸고 흑의인 한 명이 집단처럼 쓰러졌다.

슈악!

상관량 또한 두 명의 흑의인을 향해 쌍장을 날렸고 비명도 없이 즉사했다.

“흩어져요.”

“그럽시다.”

가개묵이 상관량과 더불어 후분이 있는 우측 숲으로 사라졌다.

모용산은 위모백과 좌측으로 몸을 날렸다. 흩어지는 것이 여러모로 도주하는데는 좋다. 그러나 이십여장도 날아가지 못하고 내려섰다.

흠칫!

모용산이 눈을 부릅떴다.

앞을 막고 선 사내는 동천비였다. 동천비가 조용한 웃음을 짓는다. 무척 여유로웠고 넉넉하기까지 한 웃음이었다.

“오랜만이야?”

“그…그렇군요.”

모용산은 더듬거리며 터져나오는 신음을 가까스로 삼켰다. 그것은 동천비의 눈 때문이었다. 완전한 먹물로 변해버린 눈은 묵곤혈참기가 극성에 올랐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제가 막을테니 몸을 피하소서. 묵곤혈참기를 완성 시킨 것 같사옵니다.’

위모백의 전음이었다.

자신이라도 살려내려는 희생이다.

“가랏!”

자신에게 더 이상 어떤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위모백이 곧바로 동천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쏴아악!

혼신의 힘을 다한 검에 어둠이 반으로 갈라졌다. 놀라운 쾌검이었고 위력이었다.

탁!

동천비가 손을 뻗어 떨어지는 검을 맨손으로 잡았다.

“허걱!”

위모백이 기절할 듯 놀랐고 투툭 하는 소리와 더불어 검이 부러지고 말았다. 졸지에 부러진 검을 쥔 위모백은 당황하여 어쩔줄 몰랐고 그때 모용산은 저 만치 도망가고 있었다. 그러나 동천비는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어떻게?’

수 십 년을 산전수전 다 겪었지만 이런 황당한 일은 처음이었다.

쉭!

폭우일점.

자신의 검중 가장 빠른 초식이다. 짧은 검이니 빠름 말고는 더 효과적인 공격은 없다.

탁!

동천비는 이번에도 손으로 막았다. 비록 검끝이 부러짐으로 인해 뭉텅하지만 손에는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는다. 팔십년 공력이면 무쇠도 뚫린다.

투투툭!

쇠가 조각이 나고 있었다.

달랑 손잡이만 잡고 있는 위모백의 안색은 절망으로 우그러졌다. 자신은 절대 상대가 되지 않는 가공할 능력이었다.

스윽!

동천비가 다가왔는데 정말 빠르다. 피하려는 순간 이미 멱살이 잡혔다.

“컥!”

숨이 막혔으므로 적수공권으로 공격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뿌드득!

목뼈가 그대로 으스러졌다. 잠시 바둥거리던 위모백의 몸이 축 늘어졌고 동천비가 손을 놓자 지면으로 무너지듯 엎어졌다.

“훗훗! 계집!”

동천비가 모용산 사라진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휙!

가히 뇌전을 무색케 하는 빠른 신법이었다.

동천비가 지나가는데 어둠이 갈라지고 있었다. 그것은 신법이라기보다는 공간 이동에 가까웠는데 놀랍게도 육지비행술이었다. 어느새 천상각을 빠져 나간 동천비는 허공에 뜬 매처럼 검은 먹물로 가득한 눈을 크게 뜨고 아래를 살폈다.

‘저기 가는군!’

동천몽의 신형이 급속히 하강했다.

앞을 막고 선 동천비를 보고 모용산은 기절초풍할 듯 놀랐다. 아무리 신법이 뛰어나다고 해도 똑같은 절정고수라면 반다경이란 시간은 짧지 않다. 그래서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통상 수십 리 이상을 달려야 가능하다. 그런데 동천비는 채 십리도 이동하기 전에 자신을 추 월해 버린 것이다. 모용산은 동천비의 무공이 생각보다 더욱 높은 곳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할 말 있느냐?”

“어떻게 된거죠?”

“궁금하다는 건가? 너희들이 녹풍원에 가둔 무사들은 일광엽, 햇빛사냥꾼으로 불리는 자객들이다. 난 너희들을 함정에 넣기 위해 일부러 그들에게 청부를 했다.”

모용산의 눈이 커졌다.

“필시 그들을 가둔 너희들은 희희낙락하며 축제에 빠질 것이라고 계산했지. 역시 내 계산은 들어 맞았고 이렇게 된 것이다.”

모용산의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장사에 대한 수완만 있는 줄 알았다. 한데 동천비의 말을 들으면 이쪽의 수법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유언을 남겨라. 옛정을 생각해 한 마디 남기는 건 허용하겠다.”

“홋홋! 아무리 뻔뻔한 나지만 지금 이 상황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해요.”

아예 살기를 포기한 듯 가벼운 표정까지 지었다.

동천비가 가느다란 냉소를 지었다.

“물론이다. 결코 네년을 그냥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온갖 수치와 고통을 맛보인 후 죽일 것이다.”

“기대되는군요. 그게 뭔데요?”

“서둘지 마라. 밤은 길다.”

멈칫!

모용산의 눈 깊숙한 곳에서 잔 파장이 일었다. 동천비의 말뜻에 어떤 의미가 담긴지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모용산은 더욱 허리까지 비틀며 웃었다.

“서둘러줘요. 뭔지 궁금해 죽겠어요?”

“여전히 기고만장하구나.”

촥!

동천비가 다가왔다.

모용산은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고 뒤로 물러났다.

찌익!

하지만 어느새 앞가슴 옷은 동천비의 갈고리 같은 손에 찢겨져 나갔고 가슴을 둘러맨 허연 천이 드러났다. 어둠속에서도 탐스런 젖가슴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하지만 모용산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홋홋! 이제 알겠어요. 당신이 원하는게 바로 이거군요. 좋아요. 원한다면 나 또한 피하고 싶지 않아요.”

찌이익!

오히려 자신의 손으로 가슴을 감싼 천을 찢어버렸다.

추울렁!

두 개의 젖가슴은 도발적이었다. 쳐진 듯 늘어졌다가 급경사를 이루며 치켜 올라간 가슴의 정점에 보랏빛 유두가 짙은 색향을 뿌리며 매달려 있다.

“아래도 벗어야겠죠?”

동천비가 멈칫했다. 모든 여자들이라면 이 상황에서 반항을 해야 정상이었다. 핏대를 올리며 까탈을 부려야 하는데 모용산은 오히려 적극적이었으므로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까짓것! 다른 분도 아닌 서방님인데.”

확!

그녀는 완전히 알몸이 되어버렸다.

어둠이 짙었지만 그녀의 눈부신 나신은 하얗게 빛났다.

모용산이 한 걸음 다가서자 가슴이 출렁거렸고 그녀의 눈은 색염으로 타올랐다.

“빨리 안아줘요.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일에는 완전 쑥맥이거든요.”

파르르!

갑자기 동천비의 먹물로 가득한 눈빛이 흔들렸다.

순간 그것을 바라본 모용산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걸려들었다!’

그녀는 더욱 허리를 비틀고 가슴을 내밀었다. 또한 양 다리를 약간 버려 몸을 좌측으로 약간 돌렸다. 어둠이어서 일반 사람들은 보이지 않지만 무인에게 어둠은 그다지 큰 방해 작용을 하지 못한다. 더구나 묵곤혈참기로 단련된 동천비의 눈에 신비스런 샘의 모습이 살짝 드러났다가 그녀가 몸을 움직이면 감춰졌다를 반복했다. 어디 그뿐인가 그녀는 의도인 듯 자꾸 상체를 미세하게 흔들었고 그 바람에 가슴은 잔물결처럼 출렁거렸다.

처척!

동천몽이 다가들었다. 모용산의 여체에 완전히 녹아든 모습이었다.

스윽!

모용산은 다리를 좀 더 벌렸고 가슴을 흔들었다.

“어서! 날 안아줘요.”

꿀꺽!

동천비가 침을 삼켰다. 완전한 욕망에 사로잡힌 듯 했는데 양손을 들어 올렸다. 모용산의 젖가슴을 움켜쥐려는 행동이다.

‘좀더…조금만!’

모용산은 소리없이 진기를 끌어올렸다. 단 한 번에 즉사 시켜야 한다. 상대는 금지마공을 익혔기 때문에 한 번에 숨통을 끊지 못하면 위험했다.

그녀가 펼치고 있는 것은 소녀표향대법이었다. 이 역시 금지마공이었다. 사내의 넋을 유혹하여 격살하는 마공이다. 이 마공에 걸려들면 천하의 누구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완전히 여체의 탐욕에 영혼을 빼앗긴다. 십여년 전에 천축을 다녀오던 중 밀교의 어느 폐찰에서 비급을 발견하여 연마한 것이었다.

“계집!”

동천비의 양손이 그녀의 젖가슴을 와악 움켜쥐려는 순간 그녀의 오른손이 동시에 뻗어나갔다.

적수마벽(寂手魔壁), 일체 소리가 없는 모용세가의 비전 장법이었다.

이미 십이성에 이르러 정통으로 마지면 온 몸이 으스러진다.

빠악!

모용산의 손이 동천비의 가슴을 정통으로 찍었다.

“커억!”

동천비가 휘청하더니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하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았고 웩 하며 피를 한 모금 토했다.

‘이…이런!’

모용산의 얼굴이 굳어졌다. 적수마벽을 정면으로 맞고서도 쓰러지지 않은 동천비에 놀란 것이다. 강한 충격에 정신을 차린 듯 동천몽의 눈빛이 변했다.

“이…이런 쳐죽일 년이 감히 사술을.”

왜 사람들이 묵곤혈참기를 무서워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소녀표향대법으로 완전히 경계심을 흐트러뜨린 후 적수마벽을 퍼부었는데도 죽지 않았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파앗!

옷을 걸친 틈도 없었다. 지금은 오로지 도망치는 것만이 유일한 계책이었다. 다행이 밤이고 인적이 없으니 그녀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온힘을 다해 신법을 펼쳤다.

눈부신 나신이 허공을 날아간다.

“흐흐! 네년을 내가 살려두면 똥천비다.”

사악한 미소를 흘리며 동천비의 신형이 날아갔다.

휘이이!

그것은 유성이었다. 오리쯤도 지나지 못하고 모용산은 앞길을 차단당했다.

그녀의 얼굴이 아까와는 다르게 굳어졌다. 한 번 속았으므로 더 이상 잔꾀는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한 생을 마감할 수는 없었다.

“미…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이년을 죽여주세요.”

그러면서 다가오는데 앞가슴을 내밀고 다리를 벌려 온다. 그것은 가혹하리 만치 독한 유혹이었다. 그녀는 부끄러움도 잊은 척 망설임이 없었다.

척!

그녀가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쳐들고 울며 말했다.

“동공자님, 이년이 못된 짓을 했어요. 어서 날 단번에 쳐죽여요.”

가슴을 내밀었다. 탐스러운 가슴이 눈 아래서 흔들거리는 것은 철석간담의 사내라도 의지를 잃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묵곤혈참기로 무장된 동천비에게 두 번의 실수는 없었다.

퍼억!

동천비가 그대로 장력을 날렸다.

“악!”

달빛처럼 흰 나신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고 동천비가 뒤따라가며 재차 쌍장을 뻗었다.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년, 네년 몸뚱이를 부하들 에게 나눠주겠다.”

검은 장력이 뻗어갔다.

쏴아아!

돌연 맞은편으로부터 한 가닥 검기가 밀려왔다.

‘거…검강!’

동천비가 더욱 장력에 힘을 넣었다.

콰쾅!

묵곤혈참기와 검강이 충돌하며 거대한 폭음이 사방을 울렸다.

“윽!”

“커억!”

두 마디 비명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맙소사, 검강이 깨지다니!’

어느새 모용산과 동천비 사이에 한 명의 백의청년이 내려서 있었다.

“나…남궁공자님.”

비록 한 밤이고 등을 돌리고 있지만 그녀는 한 눈에 알아보았다. 동천비를 떠나 그녀가 새로 둥지를 틀고자 하는 사내였다.

그는 무림맹주 남궁천이 신검인 자신보다 세배는 뛰어난 자질을 갖고 있다고 극찬한 그의 아들 남궁관이었다.

남궁관은 넘어오려는 기혈을 가까스로 눌러 삼켰다. 동천비의 몸이 먹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묵곤혈참기가 극성에 이른 사람만이 보이는 모습이다. 그냥 펼치는 묵곤혈참기와 온 몸이 검게 변해서 펼칠 때의 위력은 천양지차이다.

“크크크! 네놈이 바로 남궁 늙은이 아들이란 말이지. 잘됐다. 네 아비에 앞서 네놈부터 숨통을 잘라주마.”

모용산의 귓가로 남궁관의 전음이 들렸다.

‘모용 낭자 내 걱정은 말고 내가 이자를 막는 사이 도망치시오.’

‘그래도 될까요. 그자는 지금 묵곤혈참기를.’

‘내 한 몸 건사는 하오. 그러니 염려 말고 가시오.’

‘장축교에서 기다리겠어요. 꼭 오세요. 공자님.’

그녀는 염려의 시선을 남궁관의 등에 던지고 알몸으로 날아갔다.

“흐흐! 나와 헤어진 지가 언제라고 벌써 목숨까지 던져가며 도와주는 사이가 되었단 말이지.”

동천몽의 몸은 하나의 먹물로 완전히 변했다.

‘가…가공하다!’

엄청난 마기가 숨통을 조일 듯 밀려왔으므로 남궁관은 운기를 하여 극성으로 내력을 끌어 올렸다.

파파팡!

양쪽에서 뻗어나간 기가 중간에서 충돌하며 불꽃을 피웠고 근처 나무들이 모조리 뽑히거나 넘어졌다.

“크하하하! 놈 가랏!”

쿠와아아!

장력이 날아왔다. 그런데 거대한 돌덩이다.

화악!

남궁관의 눈이 커졌다.

“자…장강!”

하지만 묵곤혈참기의 장강은 일반 것과 다르다. 묵곤혈참기의 마기가 더해져 위력은 설명이 안된다.

정확한 표현을 하자면 묵곤혈참강인 것이다. 십이성 이하일 때는 묵곤혈참기라고 부르지만 십이성에 오르면 강으로 변한다.

슈우우!

콰아아!

한쪽은 금지마공이고 한쪽은 신검이 자신보다 세배는 자질이 뛰어났다고 극찬한 검의 귀재.

뻐억!

검강과 묵곤혈참강이 다시 충돌했다.

우직끈!

콰르르르!

방원 이십여장의 나무와 바위들이 송두리째 날아가고 뽑혀졌다. 단 일초에 이십여장의 공간이 황무지로 변해버린 것이다.

두 사람은 거의 무릎까지 땅에 박혀 있었고 남궁관이 검붉은 피를 토했다. 하지만 동천비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입가에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

실력의 우위가 드러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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