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36화 (36/71)

제9장 일목

덕배선사가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지금 포달랍궁의 무사들 대부분이 항주의 성과사에서 묵고 있었다. 성과사는 항주 인근에서 가장 큰 사찰로 승려만도 오백이 넘는다. 워낙 규모가 크기 때문에 이천 명 가까운 포달랍궁 사람들의 먹고 자는 문제는 크게 염려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짧은 몇 일의 일이고 오래 묵게 되면 다르다. 이미 성과사의 눈치가 처음과 다르다는 보고가 여러차례 들어왔다. 비록 말사지만 주인이 아닌 만큼 언제까지 눈칫밥을 먹을 수는 없었는데 마치 소월당이 나타난 것이었다.

“더구나 이곳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아 더욱 운신하기가 수월하다.”

“하…하오시면 이곳을 그냥 가로채겠다는?”

“이곳 주인은 죽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 아버지를 속여 빼돌린 돈으로 샀으니 천상각 소유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자신의 말에 억지가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어찌됐든 능력껏 빼돌렸으니 그것은 여추량의 재산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 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당장 모두 이곳으로 모이도록 기별을 해라.”

“존명!”

덕배선사가 사라졌고 동천몽은 우두커니 서서 아름다운 주위 풍광을 바라보았다. 볼수록 조용하고 아늑하다. 강호에 은원만 없다면 살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

어머니도 모셨고 자신이 할 일은 당분간 없다. 남은 것이라고는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지금은 무림맹과 천상각을 대표하는 동천비와 목와북천의 백쾌섬이 싸움이지 자신은 낄 때가 아니었다. 단지 그들의 싸움에서 절대 시선을 떼지 않아야 한다. 대신 자신은 따로 할 일이 있었다.

모래에 물이 스며들며 색깔이 변한 것과 흡사했다. 처음의 변화는 눈동자부터 시작되었다. 흰자위가 조금씩 검게 변했고 검은 색은 점차 얼굴로 퍼져나갔다. 잠간 사이에 얼굴은 숯덩이처럼 검게 변했고 의복이 가리고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목으로 빠르게 내려가 가슴으로 퍼져나갔음이 뻔했다.

그리고 일다경쯤 지나자 양발과 팔도 완전히 먹물로 변했다.

그것은 완전한 흑인(黑人)이었다. 걸치고 있는 옷이 백의인 탓에 더욱 검게 보였다. 어둠속에 던져 놓으면 어둠의 일부로 보일 만큼 동천비의 몸은 검었다.

동천비의 오른손이 뻗었다.

스으으!

손바닥에서 무형의 열기가 뻗어나와 전벽 석벽에 부딪혔다. 소리도 없고 충격에 의한 울림도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 석벽이 손바닥 모양으로 재가 되어 바닥에 흘러내렸다.

부스스!

묵곤혈참기가 십이성에 달하면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진기를 끌어 올리면 전신이 완전한 먹물로 변하고 장력에 화강암이 잿더미가 되었음은 묵곤혈참기가 극성에 올라섰음을 반증하고 있었다.

“흐흐흐!”

동천비의 입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무공에 무척 만족스러워 하는 표정이었다. 시커멓게 변했던 몸이 진기를 거두자 자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몸을 일으켜 석벽가까이 다가가 자신의 장력에 녹아내린 곳을 살폈다. 놀랍게도 깊이가 한자 가까이 되었다. 오성의 공력을 끌어 올렸을 뿐인데 한자 깊이 화강암이 재로 변했다는 것은 십이성을 펼쳤을 때 어떤 위력일지 충분히 짐작 되었다.

한참 동안 흡족한 표정으로 자신의 위력을 감상하듯 바라보던 동천비가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금우산장은 부산했다. 곳곳에서 부하들의 무예수련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대장간에서는 무사들의 병기를 만드는 망치질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척!

좌측으로 몸을 돌리던 동천비가 걸음을 세웠다. 그러더니 우측길로 방향을 틀었다. 우측길로 접어들어 십여장쯤 걷자 조그만 개울이 나타났고 징검다리가 있다.

징검다리를 건너 나지막한 동백나무 숲을 지나자 한 채의 전각이 세워져 있었다. 동천비가 다가서자 무사 한명이 잽싸게 나타나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대공자님을 뵈옵니다.”

“여총관에게는 아직도 소식이 없느냐?”

“예, 아직.”

동천비 표정이 굳어졌다. 잠시 앞에 서 있는 무사를 보더니 방안으로 들어섰다.

여추량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아직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여추량은 동천화에게 갈 대해수장의 재산을 압수하러 갔다. 동천혁은 놓쳤다. 제갈팽이 광산에 도착했을 때 동천혁은 이미 광산을 싼값에 처분하고 모습을 감춘 뒤였다. 물론 동오룡이 자신에게 넘겨준 재산 또한 적은 것이 아니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급한대로 동천화의 것이라고 빼앗아야 했다. 그런데 여추량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이다.

워낙 영리하고 임기응변헤 능하다. 딸린 부하들도 적지 않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않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지금부터는 어느것 하나도 틀어져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치명타이다.

자신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무림맹도 무척 다급한 처지였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천상각에서 가져간 엄청난 돈이 맹주와 상관량등 일부 간부들 주머니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로인해 군수물자 확보가 넉넉할 수가 없었고 목화북천이 타도 무림맹을 외치며 일어나자 당황한 것이다. 목와북천은 자신과는 또 다르다. 무림맹과 수백년을 대치하다시피 경쟁해온 흑도무림이었다. 무림맹은 서둘러 전력을 정비해야 하는데 문제는 자금이었다. 개인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버린 돈을 절대 나오지 않은 성향을 갖고 있다. 결국 외부에서 끌어들여야 하는데 역시 가장 만만한 것은 천상각이다. 그러나 천상각의 모든 운송로는 목와북천과 자신이 장악하고 있다.

“대공자님!”

문밖으로부터 부르는 음성이 들려왔다.

동천몽이 입구로 고개를 돌리자 문이 열리고 부총관 가석구가 안색이 굳어 나타났다.

“무슨 일 있느냐?”

“무림맹에 의해 본가가 폐쇄되었습니다.”

“언제?”

동천비의 눈이 커졌다. 아무리 수로와 육로를 지켜주고 보호해줘도 천상각이 폐쇄되어 들어가고 나오는 물량이 없다면 말짱 헛 일이었다.

동천비 얼굴이 딱딱하게 변했다. 운송로 확보에만 신경을 썼지 무림맹에서 심장부를 타격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상관량보다 자신이 항상 한 발 늦다. 적이지만 실로 소름끼칠 만큼 뛰어난 두뇌가 아닐 수 없었다. 먼저 생각하고 앞서 움직이는 그의 능력은 그저 놀랍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었다.

무림맹이 천상각을 장악한 것은 영업 행위를 막아 자신의 자금줄을 완전히 차단하려는 목적이 크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다른 뜻이 또 있을 것이다.

그것이 뭘까? 상관량이 천상각 내부에서 얻으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

팟!

돌연 동천비의 눈이 흑광을 발했다. 언젠가 부친이 술을 한잔 하면서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장사꾼은 주머니를 많이 찰수록 좋다고 했다. 장사란 평생 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황과 돌발 사태를 대비해 여러 개의 주머니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장수의 지름길이라고 했다.

어디 그뿐인가. 장사꾼은 절대 누굴 믿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부자간에도 믿지 말고 형제간에도 믿지 말라고 했던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 동천몽이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아차!”

부친이 자신에게 준 것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니 부친에게는 또다른 여러개의 주머니가 있음이 분명했고 상관량은 그것을 노리고 천상각을 점령한 것이 분명했다.

만약 부친이 감춘 여러개의 주머니가 집안에 있고 그것이 상관량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꼴이 된다.

콰앙!

동천비가 벽에 발길질을 했다. 거대한 구멍이 뚫리고 전각이 무너질 듯 흔들거렸다. 왜 그 생각을 못했던가. 장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온갖 묘수와 속임수 인간관계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은 훈련을 받고 자란 자신이 왜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천상각에 진주해 있는 무림맹의 규모는 어느정도 되느냐?”

“눈에 드러난 숫자는 일백여명에 불과합니다.”

하나의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려면 최소한 세배 이상의 공격력이 요구된다. 백명이 있다면 삼백명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되지만 상대는 상관량이었다. 그가 또 어떤 함정을 쳐놓고 자신을 기다리는 줄 알 수 없다. 절대 백 명만 달랑 보냈을리 없었다.

천상각을 되찾아야 했다. 포로가 된 부친의 안위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평소 부친의 성품으로 볼 때 집안 어딘가에 상상을 초월하는 팻감을 감춰놓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있다. 그것도 크다!’

동천몽은 확신했다.

“제갈팽.”

“예 주군.”

제갈팽이 완전한 수족이 되어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했다. 그의 태도가 이토록 바뀐 것은 돈천비가 묵곤혈참기를 터득하면서부터였다. 돈뿐만 아니라 이제 힘으로도 상대가 안됨을 인정하고 완전히 굴복한 것이었다.

“모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어느 정도 되느냐?”

“사백가까이 될 것입니다.”

동천비의 안색이 어두워 졌다. 사백 가지고는 어림없다. 상관량이 어떤 함정을 펼쳐놨다고 가정 하면 최소한 일천명은 되어야 한다.

방법은 하나 뿐이었다. 목와북천이었다. 그러나 돈 문제에 그들을 동원하고 싶은 맘은 솔직히 없었다. 견물생심이라고 했다. 집안에서 엄청난 자금을 찾아내기라도 한다면 그들이 돌변할 수도 있었다. 원래 그런 중요한 일에는 심복과 측근들만 데리고 움직이는 것이 가장 좋지만 지금으로서는 위험을 감수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고토를 되찾아야 하니까.

따뜻한 햇살 아래 산적들이 옷을 벗고 이를 잡고 있었다. 바느질 선이 있는 곳에 시커먼 이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여기저기서 이를 눌러 죽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네놈이 내 피를 빨았다 이거지… 개자식.”

“내 피가 어떤 핀데.”

툭!

투우욱!

“아함!”

한참 열심히 이를 잡던 부시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요즘 벌이가 신통치 않은 듯 광대뼈가 툭 튀어 나와 있었는데 열심히 이를 잡는 부하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부하들 역시 비쩍 말랐다. 부하들이 저렇게 피골이 상접해 가는 것은 이유를 불문하고 두목인 자신 책임이었다. 두목의 능력이 출중하면 부하들을 굶기지 않는다. 벌써 스무날 째 단 한탕도 성공하지 못해 풀뿌리로 연명하고 있었다. 근처에 사는 짐승이란 짐승은 거의 잡아먹어 이제 조그만 새들 말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어디가십니까?”

옷을 입고 일어서자 부하들이 일제히 쳐다본다. 음식을 숨겨 놓고 혼자 슬그머니 먹으로 가는 줄 아는 의심의 눈초리들이었다.

“야 이 새끼들아 날 그렇게 겪었으면서 그런 눈빛들을 던지는 거야. 내가 여지껏 너희들을 하나라도 더 먹였으면 먹였지 내 배 채우는거 봤어.”

“아…아니요?”

“저희를 향한 두목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는 압니다.”

“아는 새끼들이 그런 의심의 시선으로 날 봐. 잠깐 뒷간 좀 다녀오려고 그래. 의심나면 따라와.”

“아…아닙니다. 잘 다녀오십시오.”

“조심하십시오. 요즘 전충이 많던데.”

전충은 풀잎을 갉아 먹고 사는 곤충인데 독성이 있다. 엉덩이를 까고 볼일을 보다 전충에 쏘여 고생한 경험히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몇 일 전 부하 중 한 명이 전충에 쏘여 이틀 밤낮은 고통에 신음했다.

“다녀올 테니까. 이들 잡고 있어.”

부시가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 참을 들어간 부시는 주위를 살폈다. 풀이 듬성하고 제법 평평한 곳을 발견하고 아랫도리를 내렸다. 먹은 것도 없는데 자주 뒷간을 찾게 되는 것은 나무 뿌리를 먹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이 사리다.

뿌지지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엉덩이로부터 물이 쏟아졌다.

산적질도 아무나 못했다. 불쌍하다고 봐주고 장애인이라고 봐주고 여자라고 통과 시켜 주다 보니 털만한 상대가 없었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털려고 해도 막상 상대의 얼굴을 보면 가슴이 아파졌다. 대부분이 가난한 보따리 장사들이었다. 그들도 가족이 있는데 자신이 털어버리면 당장 굶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데나 볼일을 보지 말고 뒷간을 고정된 장소에 하나 만들지 그러느냐? 온 산이 배설물로 발 디딜 틈이 없구나.”

“으헉!”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힘을 주던 부시가 기겁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삼장쯤 떨어진 조그만 소나무 앞에 한 사내가 뒷짐을 지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웨…웬 놈인데 남의 볼일 보는 것까지 방해하느냐?”

“나다. 그 사이에 내 목소리까지 잊었느냐?”

“나라니? 이름을 대? 나가 한 두 명이냐?”

“쯧쯧! 내 목소리를 벌써 잊어 먹다니 그런 너에게서 무당에 합격하는 똑똑한 아들이 나오다니 불가사의 하구나.”

그러면서 흑의인이 고개를 돌렸다.

“헉! 대법왕님 아니시옵니까?”

“산채에 가 있을테니 느긋하게 보고 오너라.”

“예예! 먼저 가 계십시오. 소인 신속이 볼일을 마치고 달려가겠사옵니다.”

동천몽은 천천히 산채로 걸어갔다. 부시의 부하들이 양지녘에 앉아 웃통을 벗고 이를 잡고 있었다.

“조황이 좋은가 보구나.”

모두들 고개를 돌렸다가 동천몽을 발견하고 후다닥 일어나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대…대법왕님.”

“아이고!”

동천몽이 웃으며 말했다.

“일어나 편히들 앉거라.”

“아니옵니다. 이상하게 소인들은 무릎을 꿇는게 좋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린 그냥 행복합니다.”

“명령이니라. 일어나 편히 앉거라.”

동천몽이 목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산적들이 일제히 옷을 입고 편히 앉았다.

그때 부시가 볼일을 보고 달려왔다.

“부시가 대법왕님을 뵈옵니다. 절 받으소서.”

그러면서 말릴 틈도 없이 동천몽에게 큰 절을 했다.

절을 한 부시가 잽싸게 부하들 옆으로 가 나란히 앉았다. 마치 큰 스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숨죽이고 열을 맞춰 앉은 신도들 같았다.

“너무들 말랐구나. 장사가 그렇게 잘 안되느냐?”

부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솔직히 안됩니다. 지나가는 것들이라는게 모두 영세민어서 뺏을 수가 없습니다.”

“헛헛! 넌 내가 아는 부시와는 전혀 다르구나. 내가 아는 부시는 영세민이고 뭐고 무조건 빼앗는데, 아무튼 산적 질을 해도 기본양심은 지킨다니 눈은 감아주마. 자 일단 배를 채우러 가자.”

“저…정말입니까?”

“밥을 사주신단 말입니까?”

“따라들 오너라.”

산적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동천몽은 산을 내려가 곧바로 객점을 찾아 들어갔다. 뗏국물이 좔좔 흐르는 산적들이 들어오자 점소이가 대번에 인상을 썼다.

“잠깐! 이분은 들어가시고 여기서부터 정지.”

점소이가 동천몽은 통과 시키고 부시 앞을 막아섰다. 점소이가 위아래를 훑더니 인상을 썼다.

“당신들 개방의 거지들이지. 당장 꺼져. 여기가 거지들 집합소인줄 알아.”

부시가 눈을 부라렸다.

“어딜 봐서 우리가 거지로 보이느냐. 나 부시야 임마. 부시도 몰라.”

“부…부시?”

점소이가 눈을 찢어져라 뜨더니 허릴 숙였다.

“주…죽여주십시오. 소인이 나이를 먹다보니 이제 부시님의 얼굴도 잊었습니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나 비위 건들면 알지?”

“물론입죠.”

일행이 자리를 잡고 앉아 주문을 했다.

“마음껏 시키거라. 얼마든지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산적들의 입이 찢어졌다.

“족우탕 주게.”

“나도 족우탕.”

부하들이 하나같이 모두 족우탕을 시켰다.

부시가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난 우리 서장 족우탕으로 주게. 중원 것 말고.”

“우리도 서장것일세. 중원 것 말고.”

점소이가 굽실거렸다.

“역시 모두 족우탕을 드실 줄 아는군요. 저분께서는?”

동천몽을 가리켰다.

“난 채약탕으로 주게.”

“요즘 있는 분들은 약초와 채소로 만들어진 채약탕을 드시죠. 알겠사옵니다.”

점소이가 물러나자 부하들이 부시를 향해 물었다.

“두목님, 진짜로 중원 족우탕 먹으면 병 걸립니까?”

부시가 버럭 소릴 질렀다.

“어떤 호로 상놈의 새끼가 그런 말을 해. 중원 것이 좋으니까 해동국에서 미친 듯이 사가지.”

“그런데 왜 두목님께서는 서장 것으로 드십니까?”

“그…그냥! 오늘 날씨가 좋잖아. 난 날씨가 좋을 때는 마구 서장 족우탕이 먹고 싶어진다.”

잠시 후 식사가 나왔고 산적들은 미친 듯이 먹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먹는 산적들을 보며 동천몽이 조용히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런데 어인 연락도 없이 소인들의 산채를 찾아 오셨습니까?”

어느 정도 배가 찬 듯 부시가 물었다.

동천몽이 말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아랫사람이 실종 되었느니라. 그래서 조사차 지나가다 들렸구나.”

일행이 식사를 끝내고 동천몽이 계산을 했다. 모두 배가 부른듯 만족스런 표정이었고 동천몽을 존경의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모두가 동천몽을 따라가겠다고 했다. 굳이 밥값을 하겠다는 행동을 이었으므로 동천몽은 말리지 않았다.

넓은 개활지에는 단 한구의 시신도 없었다. 짐승들이 뜯어 먹었다기 보다는 생존했던 동료들이 모두 묻어 주었을 것이다.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당시의 처절했던 현장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아직까지도 여기저기 커다란 구덩이가 만들어져 있고 마른 핏자국이 있었다.

부시와 부하들은 사방으로 퍼져 수색을 했다. 결코 혈부림 무사들이 묻어주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짐승들이 먹어 치웠을 가능성이 큰데 뼈 조각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반경 오리를 이 잡듯 뒤졌지만 일목의 시신이나 소지품으로 추정되는 물건은 없었다.

“죽지 않은 것 아닐까요? 외형상으로는 생존 확률이 전무하지만 사람 일이란 모르잖사옵니까?”

동천몽을 위로한답시고 부시는 나름대로 긍정적인 말을 해댔다. 하지만 동천몽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수고들 했느니라. 너희들은 그만 가보거라.”

동천몽이 떠나라고 하자 부시와 부하들 얼굴에 아쉬움과 섭섭함이 묻어났다. 머뭇거리며 누구도 떠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문득 부시가 한 걸음 나섰다.

“존경하는 대법왕님 소인 부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양손을 가지런히 맞잡고 너무 엄숙하게 말했으므로 동천몽은 그렇게 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산적이옵니다. 비록 가난한 사람들은 통과 시켜주었지만 어쨌든 산적은 나쁩니다. 그래서 대법왕님께 한가지 부탁을 드리고자 하옵니다.”

“말해 보거라.”

“산적질도 이제 신물 나옵니다. 남은 인생이라고 까지 할 것은 없지만 앞으로는 착한 일을 하며 살고 싶습니다. 소인들을 어떻게 거두어 주시면 안되겠사옵니까?”

동천몽이 눈살을 찌푸렸다.

“모두 머리를 깎고 중이 되겠단 말이냐?”

“모…못될 것도 없지요.

“소인은 자신 있사옵니다.”

“소인의 조상들중 중 된 사람들 많습니다.”

여기저기서 부하들이 한마디씩 내 뱉었다.

부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두어 주소서. 제발 중이 되어 착한 일을 하다 죽게 해 주십시오.”

“착한 일을 하다 죽게 해주소서.”

부하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동천몽이 엎드린 부시 일행을 보며 말했다.

“중 노릇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니라. 고기도 먹지 못하고 술은 더욱 마실 수 없으며 날마다 공부도 해야 하고, 아무튼 피곤하다.”

“괜찮사옵니다.”

“절간 생활도 세속과 다르지 않아 처음에는 온갖 잡일을 맡아서 해야 한다. 밥도 하고 나무도 하고 하루도 허리 펼 날이 없지.”

“괜찮사옵니다.”

“부시.”

부시가 고개를 쳐들었다.

“하명하소서.”

“넌 자식이 있지 않느냐? 절간 생활하면 자식과 인연을 끊다시피 해야 하는데 가능하겠느냐?”

“어차피 그놈 또한 무당에 들어갔으니 평생 도사로 살다 죽을테고 아비 또한 중이 되었다고 해서 지 놈이 기분 나빠 하지는 않을 것이며 서로 서운할 일은 더욱 없을 것이옵니다.”

동천몽이 의외로 의지가 굳건한 부시 일행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꾸나. 곧바로 머리를 깎는 것 보다는 본궁의 제자들을 따라 다녀 보거라. 그 이후에도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받아주겠노라.”

“감사하옵니다.”

“당장 중원으로 가거라. 항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소월당이라는 곳이 있는데 내가 보내서 왔다고 하면 받아줄 것이니라.”

“종이 갖고 있는 사람 있느냐?”

부시의 부하 한명이 구겨진 종이를 품에서 꺼냈다.

“나무 뿌리를 먹기 때문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뒤가 흐르는 통에 준비해서 다니지요.”

동천몽은 글씨를 쓸만한 풀을 꺾어 종이에 몇자 적어 부시를 주었다.

“이걸 보여주거라.”

부시가 종이를 받아 품속에 집어 넣었다.

일행은 동천몽에게 큰 절을 하고 떠나갔다. 동천몽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떠나가는 부시 일행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우리가 금황동어를 잡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두 사람이 개천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는데 잡은 고기를 담은 통과 그물을 어께에 메고 왔다. 고기를 잡아 오는 것이 틀림 없었다.

두 사람은 부자지간으로 보였는데 아주 귀한 고기를 잡은 듯 자꾸 통을 들여다보았다.

동천몽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낯선 사람이 다가오자 두 부자는 경계의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동천몽은 잔뜩 굳어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점잖은 목소리로 물었다.

“말 좀 묻겠소이다. 두 분께서는 이 근처에 사시오?”

“그렇소이다. 우린 저 아래 매향촌에 사오이다만 왜 그러시오?”

“이곳에서 자주 고기를 잡으시오?”

아버지로 보이는 노인이 힐끔 자신들이 고기를 잡았던 위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곳이 개울이지만 의외로 고기가 많소이다. 그래서 사흘에 한번 꼴로 고기를 잡으러 나오지요. 꽤 쏠쏠하오이다.”

사흘에 한 번꼴로 고기를 잡으러 여길 지난다면 당시 싸움에 대해서 뭔가 알지도 몰랐다.

“얼마 전 이곳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혹시 알고 있소?”

“알고 말구요. 말도 마십시오. 시신이 어찌나 많이 널렸던지 기절할 뻔 했소이다. 나중 시체는 동료로 보이는 사람들이 치웠소이다만 피 냄새는 아직도 나는 것 같습니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는 듯 몸을 가볍게 떨었다.

동천몽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어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종이는 접혀져 있었는데 망설였다.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추적하는데 까지는 하고 싶었다. 일목은 자신을 살렸다. 죽었다면 시신이라도 찾아 배교의 성지 대설산에 묻어 주고 싶었다.

“이런 사람 보지 못했소. 시체라도 좋소.”

품속에 그려 두었던 일목의 초상화를 보여주었다.

“으헛!”

“꺅!”

예상대로 두 부자는 기겁했다. 생긴 것도 험상 궂은데다 눈이 하나 뿐인 것에 무척 놀란 것 같았다.

“사…사람이오?”

“물론입니다. 혹시 못보셨습니까?”

노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워낙 생긴 것이 특이해 한 번이라도 봤으면 기억이 날텐데 전혀 떠오르는 것이 없는 것을 보면 보지 못한 듯 싶소.”

“잠깐!”

그때 연신 눈알을 굴리던 아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전 본것 같아요. 물론 초상화속의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눈이 한 개 인 것 만은 분명해요.”

동천몽의 눈이 빛났다.

“어디서 봤소?”

“용사교 아래서요.”

“용사교?”

동천몽이 묻자 노인이 대답했다.

“우리 마을과 방곡(邦曲)마을 사이에 용사교라는 다리가 있소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용이 다리아래 살면서 통행세를 주는 사람은 잡아 먹지 않고 그냥 지나가면 잡아먹었다고 하여 용사교라고 부르죠.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용사교 아래 다시 용이 나타났다는 말이 돌고 있소이다.”

“아버지 그 용이 지금 이분이 찾고 있는 그 사람 같아요. 눈이 하나뿐이어서 용사교를 건너는 사람마다 지레 겁을 먹고 은자를 한 닢씩 던집니다. 나도 얼마 전 우연히 봤는데 정말 무섭게 생겼더군요. 진짜 용 같았어요. 하나뿐인 눈에서 시뻘건 빛이 쏟아지는데 아이구야.”

아들이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용사교를 가려면 어디로 가오?”

“이 개천을 따라 계속 내려가면 나옵니다.”

“고맙소이다.”

동천몽은 가볍게 포권을 해보이고 몸을 돌렸다.

살아 있을 가능성은 전무하지만 사람일은 모른다. 더구나 눈이 하나 뿐이고 아주 흉악한 생김새라고 했으므로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봐도 일목은 천하에서 가장 공포스럽게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울던 아이가 일목을 보고나서 울음을 뚝 그친 것을 한두 번 본것도 아니었다.

쉬이!

빠르게 몸을 날렸다. 백여장 내려가자 물길이 넓어져 뚝으로 올라섰다. 뚝은 곧장 사람들이 다니는 도로였는데 제법 넓었고 잘 닦여져 있었다.

동천몽의 신형은 흐르듯 날아갔다. 주위 풍광이 전광석화와 같이 뒤로 후퇴를 거듭했고 차 한 잔 마실 시간쯤 되자 강줄기가 좌측으로 휘어지면서 한 개의 다리가 나타났다.

동천몽은 눈앞의 다리가 용사교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용사교 좌우로는 갈대가 무수히 자라고 있었고 물은 한 가운데로 흘렀다. 동천몽이 용사교를 건너려고 들 때 다리 아래서 갑자기 으스스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냥 가면 안되지.”

멈칫!

동천몽이 걸음을 세웠다.

“촌스럽게 왜 이래? 어제 오늘 일도 아니면서? 빨리 넣어.”

동천몽이 주위를 휘둘러보자 용사교 난간 쪽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조그만 팻말에 전구(錢口)라는 글자가 씌여 있었는데 그렸다고 할 만큼 악필이었다.

“저 구멍으로 돈을 넣으란 말이오?”

“아 이 자식 너 이 다리 처음 지나가?”

“예!”

“저 구멍에 성의껏 넣고 가. 그럼 돼.”

“얼마를 넣어야 지날 수 있소?”

“성의껏 넣으라고 했잖아. 물론 많이 넣으면 이쁘지.”

“그냥 지나가면 안 돼오?”

“이런 개자식이 본 어른신과 지금 장난 치냐?

다리 밑 갈대가 부스스 소리를 내며 좌우로 갈라지더니 뚝과 다리가 맞닿은 언덕으로 한 거렁뱅이가 올라왔다. 다 떨어진 초맆을 눌러쓴 거렁뱅이는 다리 위로 올라오자 마자 동천몽을 노려보았다.

한 눈 뿐이었는데 보통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하고도 남을 만큼 험상 궂은 인상이었다.

움찔!

동천몽을 발견한 거렁뱅이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동천몽을 이리저리 살피던 거렁뱅이가 돌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대…대법왕님?”

“네가 정녕 일목이란 말이냐?”

“대법왕님이 맞군요. 으아아아!”

일목이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 앉더니 대성통곡을 했다.

“크아아앙! 아이고! 크아아앙!”

마치 부모가 죽어 통곡 하는 사람처럼 다리를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일목은 큰 소리로 울었다.

“이…이게 꿈입니까? 생시입니까? 저 하늘의 해가 떠 있는 걸 보니 꿈은 아닌듯한데, 아미타불 대법왕니임.”

동천몽은 가만 내버려 두었다.

가슴에 쌓인 한이 많은 사람일수록 울음은 도움이 된다. 실컷 울고 나면 가슴에 맺힌 것이 어느정도 뚫리는 것이다.

일목의 울음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무려 일다경 가까이 다리 바닥을 두드리며 울더니 비칠거리며 일어나 말했다.

“저…절 받으소서.”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허리를 숙이던 일목이 퍽 소리를 내며 그대로 얼굴을 지면에 박으며 엎어졌다.

“일목아.”

동천몽이 벼락처럼 달려들어 부축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목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동천몽은 일목이 무공을 잃었음을 느꼈다. 안는 순간 이미 전신에 기력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일목은 쌍코피를 흘리며 말했다.

“소…송구하옵니다. 절을 올려야 하는데.”

“받은 걸로 하겠다.”

가까이서 본 일목은 정말 흉측했다. 얼굴은 수많은 흉터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옛날에는 못생기긴 했지만 흉터는 없었는데 필시 그날 혈부림 무사들과 싸우며 생긴 흉터일 것이었다.

<4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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