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두모제근
한 채의 삼층 전각이 좌우로 십여채의 전각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동천몽은 언뜻 사찰의 건축양식을 닮았다고 생각 했다.
동천몽은 삼층 전각이 장주 원만도가 묵는 곳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삼층전각 앞 마당에 도열하듯 서 있던 세 명의 무사가 말을 타고 들어오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신속히 날아와 앞을 막았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말을 타고 오는거요? 당장 내리시오.”
“아니 정문의 이친구들은 뭐 한거야. 어떻게 말을 타고 들어오도록 만들어.”
동천몽의 우장이 뻗었다.
촤아악!
빠르고 강력했고 거기에다 누구도 기습적으로 공격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위기를 직감했을 땐 이미 가슴에 찢어질 듯 아파왔다.
윽!
크윽! 컥!
세 명의 무사는 앞가슴이 파열되어 고꾸라졌다.
자정경의 눈이 커졌다. 지금 펼친 것은 지옥금이었다. 그런데 뢰음사 뢰음칠혈과 싸울 때 보다 훨씬 강력해졌다.
두 사람은 말에서 내렸다.
어왕각(漁王閣)이라고 씌인 현판을 일별하고 두 사람은 전각의 문을 열었다. 문은 소리 열렸는데 안쪽으로부터 여인의 교소가 터져나왔다.
“홋홋홋! 원장주께서 이렇게 현명한 분인줄 몰랐어요. 나에게 충성을 바치겠다니 감사해요.”
여인의 목소리는 동천화였다. 자신의 어머니 머리채를 휘어잡고 마당으로 내 팽개치던 그녀의 표독스런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 어머니를 왜 때리냐고 나섰다가 초죽음이 되도록 맞았다. 그때 어머니와 함께 얼마나 울었던가. 나중 천상각을 떠나자고 어머니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놀랍게도 동오룡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어머니는 동오룡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떠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형제들은 그런 어머니가 재산을 노리고 떠나지 않는다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모와 행패를 부렸다.
방안에는 모두 세 사람이 앉아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긴머리를 늘어뜨린 동천화가 등을 돌리고 있었고 맞은 편에 오십 가량의 뚱뚱한 대머리 중년인은 보나마나 원만도일 것이다. 동천화 우측으로 백의를 걸친 말쑥한 차림의 서른 중반 가량의 사내는 필시 태양곡의 곡주 이화덕일 것이다.
세 사람은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큰 소리로 웃으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동천혁과 동천화가 하도 귀찮게 굴자 부친은 동천혁과 동천화에게 일 부 숨겨놓은 재산을 넘겨준 것 같았다.
촤르륵!
동천몽이 주렴을 한손으로 걷으며 들어섰다. 주렴 소리에 차를 마시던 모든 사람들이 돌아보았다.
원만도가 가장 먼저 반응을 보였다.
“누구십니까?”
동천화가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돌렸는데 죽립을 쓴 동천몽을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우측으로 앉아 있던 이화덕이 자정경의 미모에 눈을 부릅떴다. 자정경을 보자 동천화의 얼굴이 너무 추해보인다. 그렇다고 동천화가 정말로 추한 용모는 아니었다. 그만큼 자정경의 미모가 뛰어나다는 반증이었다.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이화덕의 눈이 달아올랐다.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의 눈빛이었는데 동천화가 쳐다보자 깜짝 놀라며 잽싸게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한편 원만도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미 밖에는 태양곡 고수들이 지키고 있는데도 이들이 들어왔다면 밖의 상황은 뻔했다. 동천화 역시 그 사실을 간파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유독 이화덕만 자정경의 미모에 빠져 있었다.
이화덕의 뜨거운 이선을 받은 자정경이 유혹이라도 하듯 허리를 비틀며 상체를 도발적으로 내밀고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이화덕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지며 숨결이 거칠어진다.
“넌 어디서 굴러먹다 온 계집이냐?”
동천화가 대번에 자정경을 노려보았다. 우선 자기 남자인 이화덕을 유혹하는 자정경부터 잡아야 했다.
자정경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는 네년은 날 언제봤다고 반말이냐?”
자정경이 웃으며 막말을 쏟아내자 동천화의 얼굴이 흉측하게 우그러졌다.
“이…이런 찢어죽일 년이 감히.”
“동낭자 진정하구려. 자자! 우선 자리에 앉으시오. 내가 알아서 혼을 내겠소.”
이화덕이 동천화를 부축하여 자리에 앉혔다.
동천화가 자정경의 맞욕에 충격을 받은 듯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저 년을 당장 무릎 꿇려 내 앞으로 데려와요. 이 공자님.”
“아…알겠소. 그렇게 하리다.”
이화덕이 동천화 어께를 두 번 토닥여주고 두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자정경이 숨을 쉴 때마다 앞가슴이 출렁거리자 이화덕의 눈은 심하게 흔들렸고 측면으로 비켜서며 허리를 받쳐 올리자 완전한 도발적인 자세가 되었다.
이화덕의 눈에 색기가 무섭게 피어 올랐다.
벌겋게 두 눈이 변했고 마른침을 삼키는 것이 자정경에게 완전히 빠졌다.
“낭자의 방명은 어떻게 되시오이까? 소생은 태양곡주 이화덕이라 하오.”
자정경이 동천몽을 보며 말했다.
“들으셨죠. 사부님 이자가 이화덕이래요?”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느니라.”
“그런데 어떡하죠? 사부님 매제 될 분인데?”
“난 저런 매제 둔 적 없느니라.”
“그럼 여기 누님도?”
“그건 아니지. 누님은 누님이지.”
동천화가 다시 일어섰다. 동천몽을 깊숙한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더듬거렸다.
“당신 누구죠?”
죽립 챙 아래 동천몽의 입술이 뒤틀린다.
“오랜만이오. 누이.”
동천화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자신에게 동생은 없다. 그런데 상대는 자신을 향해 서슴없이 누이라고 한다.
“훗훗! 나 천몽이오.”
“처…천몽.”
동천몽이 죽립 챙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려 얼굴을 드러내보였다.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짓고 서 있는 동천몽을 발견한 동천화가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도…동낭자.”
이화덕이 얼른 손을 잡았다.
“얼굴이 왜 그러시오? 어디 아프시오?”
굳은 동천화 얼굴을 보며 동천몽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동천화는 부드러운 말속에 어떤 예리한 칼보다 무서운 살기가 숨겨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네…네가.”
“죽었을 텐데 어찌된 일이냐는 얘기오? 어느 미친놈이 날 더러 죽었다고 합디까?”
동천몽이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주시오. 대해수장이 소유하고 있는 배들에 대한 문서 말이오.”
“호호호! 네놈이 지금 제정신이냐? 감히 뭘 내놓으라는 것이냐?”
“누이가 갖고 있어봤자 몇 일 못가 저기 이가 놈 손에 아니면 무림맹 손으로 들어가오. 그러니 내게 맡기는 것이 안전할 것이오. 어서 돌려주시오.”
“이놈이 몇 년만에 나타나더니 아예 맛이 갔구나.”
탁!
어느새 동천몽이 동천화 손을 거머쥐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동작이었다. 동천몽 살기를 쏟아냈다.
“내 입에서 거친 말 나오기 전에 내 놓으시오. 혹시 장주가 갖고 있소?”
원만도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닙니다.”
동천화가 손을 뿌리치려 들었다.
“이것 놓지 못하겠느냐?”
쫙!
동천몽의 왼손이 동천화 앞가슴을 찢었다. 그러자 한 개의 문서가 든 봉투가 떨어졌고 왼손이 번개처럼 나꿔잡았다. 동천화 손목을 쥐고 있던 손을 놓고 봉서 안에 든 서류를 꺼내 살피던 동천몽이 고개를 끄덕였다.
“뭣해요. 당장 저놈의 손에 들린 배 문서를 빼앗지 않고?”
동천화가 이화덕을 향해 소리질렀다.
그때까지 자정경의 미모에 빠져 있던 이화덕이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흐흐! 오래전에 실종되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던 그 동생인가보군. 아무튼 반갑네. 처남, 처음 만난 입장에서 불쾌한 인상을 주고 싶지 않으니 그것 이리 주게.”
동천몽이 손에 들고 있던 배 문서를 품속에 찔러 넣었다.
“지금 반항 하는 건가? 처남.”
동천화가 버럭 소릴 질렀다.
“빙신아, 처남이고 지랄이고 빨리 빼앗으란 말이다. 그렇게 말로해서 듣는 놈인줄 알아. 어서 강제로 뺏으라니까.”
“처남, 마지막 기회를 주겠네. 그것 이리주게. 나 화나면 보이는게 없는 사람일세. 자 줄까?”
그러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동천화가 답답해 미치겠다는 듯 꽥 소릴 질렀다.
“걔가 누군지 알아. 소주의 개고기란 말이다. 말로해서는 죽었다 깨도 안 듣는다니까 이 인간이 지금, 너 혹시 저 계집에게 잘 보이기 위해 지금 그러는 것 아냐?”
이화덕이 움찔하더니 눈을 부라렸다.
“날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하시오. 내 사전에 다른 여인은 없다는 걸 몰라서 그러시오?”
“그러면 당장 모가지를 비틀란 말이야. 어서.”
이화덕이 힐끔 자정경의 눈치를 한 번 보더니 동천몽을 향해 말했다.
“처남.”
“처남 소리 안 빼. 그 새끼가 무슨 처남이야.”
동천화가 또다시 버럭 소릴 질렀다.
이화덕이 목소리를 다듬고 말했다.
“그만 내놓을까?”
“아이고 속터져, 저 인간이 아무래도 저 계집에게 잘보이기 위해 개지랄을 하는구만. 야 이화덕, 너 이 새끼야.”
이화덕이 인상을 썼다.
“하나를 세겠다. 그 안에 주지 않으면 참지 않겠다. 하나.”
동천몽이 여전이 우뚝 서 있자 이화덕이 인상을 썼다.
“훗훗! 하는 수 없군. 날 원망하지 말게.”
촥!
이화덕이 주먹을 뻗었다. 태양곡의 성명절기인 오살권(五殺拳)이었다. 다섯 번이면 천하의 누구도 죽인다는 내력 깊은 권공이었다. 동천몽은 마주 주먹을 뻗었다.
뻑!
이화덕이 뒤로 한걸음 물러나더니 눈을 빛냈다. 순식간에 표정이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는 여유와 자비를 보였는데 완전히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흐흐! 제법이구나. 일초는 매형으로서 자비였다. 하지만.”
하지만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동천화가 다시 소릴 질렀다.
“저 인간이 끝까지, 처남 아니라니까.”
이화덕의 눈이 가늘어졌다.
불현듯한 가지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동천몽을 죽이면 자정경은 자연스럽게 자기 몫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조심해라.”
더 이상 봐주고 망설일 것이 없었다.
콰아아!
천양지차였다. 조금 전의 주먹이 부드럽다면 이번 권은 폭풍이었다.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소문대로 대단한 위력의 권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동천몽의 오른 주먹이 붉게 달아올랐다. 지옥금을 권으로 변형 한 것이었다.
이화덕의 눈이 흔들렸다. 동천몽의 권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십성에서 십이성으로 내력을 끌어올렸고 두 주먹이 정통으로 부딪혔다.
콰앙!
와당탕!
두 권이 부딪히며 파생된 기파에 의해 실내의 기물이 박살이 났고 세 사람이 마시던 찻잔과 탁자가 구석으로 날아가버렸다.
“우우욱!”
원만도가 비틀거리며 창가로 밀려났는데 얼굴이 창백해졌다. 단순한 기파에 내상을 입은 것이다.
이화덕은 가만 서 있었다. 겉으로 봐서는 아무렇지도 않았고 표정도 자신만만했다.
그런데 공격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뭣해 이 멍청아.”
동천화가 소리쳤지만 이화덕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동천화가 더욱 날뛰었다.
“빨리 저놈 잡으래니까? 이 인간이.”
그래도 이화덕은 움직이지 않았다. 동천화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가가려들자 이화덕이 말했다.
“소…손이.”
“손이 뭘?”
“아…아작 났소. 소….손목도 갔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손이 뭘 어떻다고.”
동천화가 늘어뜨려진 이화덕의 오른손을 잡아 당겼다.
“으아아! 마…만지지마.”
이화덕이 죽는다고 소릴 질렀다.
“마…맙소사!”
동천화의 눈이 튀어 나올 듯 커졌다. 이화덕의 오른손은 뼈가 없는 것 처럼 물렁거렸고 손목은 물론 손가락 마디마디가 완전히 제 자리를 벗어난 것이었다.
“더 이상 당신에 대해서는 이러쿵 저러쿵 하고 싶지 않다. 돈 많은 집 계집을 유혹하는 것도 사내 능력이니까? 그러니 살고 싶으면 조용히 떠나라.”
나이는 젊지만 세상 돌아가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버틸 상대가 있고 말을 고분 고분 들어야 할 상대가 있었다. 눈앞에 서 있는 동천몽의 말은 무조건 들어야 신상에 좋다는 것을 이화덕은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나름대로 인정을 받는 오살권을 이토록 무참히 깨뜨릴 상대라면 이미 결과는 드러났다. 고집 피우고 잔머리 굴려봤자 통하지 않는다.
“살려…주어 고맙소. 그럼 소생은 이만.”
이화덕이 조심스럽게 동천몽의 눈치를 보며 물러났다.
“이 빙신아 어딜가는거야?”
동천화가 소리쳤지만 이미 실내에서 이화덕의 그림자는 사라져 버렸다.
“저 미친놈이.”
“누이.”
동천몽이 조용히 불렀다.
동천화가 대답대신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나…날 죽여줘. 내가 잘못했다.”
돌변한 태도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동천화가 울먹거렸다.
“변명 않겠어. 날 죽여서 몽이 네 가슴에 쌓인 울분이 풀린다면 그렇게 해. 내가 어머니 팔을 잘랐어.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어. 맘대로 해.”
동천몽이 가만 내려다보았고 동천화는 고개를 떨 군 체 가볍게 흐느끼기까지 했다.
“흑! 난 천벌을 받을 게집이야. 살아 있을 가치도 없어. 어머니에게 해도 너무 했음을 인정해. 뭐하는 거야? 어서 날 죽이라니까?”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쳐다보며 외쳤다.
“어서 베라구. 난 살 가치가 없어. 흐흐흑!”
고개를 떨구며 동천화는 울음을 삼켰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그런 것 있잖아. 괜히 내 아버지를 빼앗긴 것 같은 기분 말이야. 괜히 미웠어. 심통도 났고, 그래서 더욱 거칠고 못살게 굴었어.”
바닥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널 원망하지 않을거야. 모든 것은 네가 지은 죄의 댓가야. 그래서는 안된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하면서도 막상 어머니를 보면 그렇게 심통이 나는 걸 어떡해.”
“사…사부님.”
자정경이 다가왔다.
흐느끼는 동천화를 보며 자정경이 입을 열었다.
“용서해주세요. 잘못을 뉘우치고 있잖아요. 다른 건 몰라도 아버지를 빼앗긴 것 같아서 그랬다는 건 나도 이해해요. 우리 아버지를 좋아하는 여인이 있었는데 그렇게 밉더라구요. 악착같이 혼인을 못하도록 막았고 온갖 훼방을 다놨어요. 끝내 혼인을 막았죠. 지금은 너무 후회가 되지만 말에요.”
“흐흐흑! 어엉!”
동천화는 급기야 통곡의 수준으로 줄달음 쳤다.
“아무리 미워도 핏줄에 대한 미움은 가슴에 담을 수밖에 없다고 하잖아요. 사부님 누이잖아요.”
“아니야. 날 죽여줘. 더 이상 어머니 볼 낯이 없어. 내가 아무리 찾아가서 용서를 구한다고 해도 어머니의 마음이 풀리겠어. 그러니 이 기회에 날 죽여버려.”
“사부니임.”
자정경이 애처롭게 하소연했다.
“으아아앙!”
“만약 사부님이 용서해주지 않으면 나 말도 안할 거에요.”
자정경이 새침해졌다.
그리고 동천화에게 말했다.
“언니 그만 해요. 사부님은 자상하셔서 용서 해주길거에요. 그러니 그만 눈물을 그쳐요.”
“말리지마. 나 죽고 싶어. 난 벼락을 맞아 죽을 년이야.”
“으음!”
동천몽이 신음에 가까운 한숨을 쉬었다.
“좋소. 누이가 그렇게 죽기를 원하니 천벌을 받을 각오를 하고 죽여 드리리다.”
“안돼요. 사부님.”
자정경이 앞을 막아섰다.
“진정하세요. 아무리 잘못을 했다지만 누이를 죽일 수는 없어요. 사부님 제발 화를 가라앉으시고.”
“비켜라. 정경아. 저 여자는 살아 있을 가치가 없는 독사 같은 여인이다. 누이라는 것을 감안해 단 번에 숨통을 끊어주겠다.”
“사부님 제정신이에요. 어떻게 혈육을.”
“난 두 번 말하는 걸 제일 싫어한다. 비켜라.”
그리고 동천몽의 입술이 잠깐 까닥였다.
그러자 자정경이 눈쌀을 찌푸리더니 슬며시 비켜났다.
“맘대로 하세요. 사부님 집안 문제까지 내가 끼어든다는 것이 조금은 주제넘군요. 죽이든지 말든지 사부님 뜻대로 하세요.”
동천몽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동천화를 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 없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시오.”
동천화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래 죽여라 이 개자식아. 마지막으로 할말 없냐고 했더냐? 산더미처럼 많다 호로 상놈의 새끼야.”
돌변한 동천화 행동에 자정경은 물론 원만도까지 경악했다.
화악!
“어…어쩜!”
동천화가 눈에 독기를 담고 외쳤다.
“뭘 봐 이 새끼야. 어서 내 목을 쳐내라니까? 네까짓놈에게 목숨 구걸 하느니 안 산다. 재수없는 새끼.”
동천화의 눈이 파랗게 빛을 뿌렸다.
독이 오른 독사의 눈빛이었다.
“그 창녀만 아니었다면 우리 형제가 이렇게 갈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집안에 계집 하나가 잘못 들어오는 바람에 우리 가문이 이렇게 어려워 지지는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그 창녀가 아버지를 꼬득여 재산을 빼돌리고 우리 형제들의 사이를 갈라 놓았다는 것을 네놈도 인정 할 것이다.”
“정경아.”
동천몽이 웃으며 말했다.
“조금 전 이 사부가 네게 전음으로 무엇이라고 했더냐? 말해 보아라.”
자정경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말 구제 불능인 여자군요. 저 여자 하는 말과 행동 모든 것이 위선이고 거짓이라고 했어요. 필시 죽인다고 하면 바득 바득 악을 쓰고 악담을 퍼붓고 온갖 행패를 부릴 것이라고 하셨는데 어쩜 한 치도 어긋남이 없군요.”
흠칫!
동천화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동천몽은 이미 자신의 속마음을 훤히 읽고 있었던 것이었다. 자신은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온갖 재롱을 다 떤 손오공 꼴이 되고 말았다.
동천몽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맹수 있느냐?”
스르르!
허공에서 맹수가 떨어졌다. 법명답게 정말로 두 눈이 쭉 찢어졌고 새파란 괴기가 풍겨나왔다.
“대법왕님의 명을 기다리옵니다.”
“이 여자를 데려가라. 적당히 훈계 좀 한 뒤에 수라옥으로.”
동천화는 생각없이 쳐다보았다. 당연히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그녀는 수라옥이 무엇 하는 곳인줄 모른다. 더구나 적당한 훈계라는 표현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명령을 받은 맹수의 표정은 엄숙했다.
“명을 받사옵니다.”
쉭!
맹수의 오른손이 뻗어왔다. 동천화가 화들짝 놀라며 반항을 하려고 했지만 어느새 손목이 잡혔다.
“큭!”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손목만 잡혔을 뿐인데 맥이 빠지고 축 늘어진다.
“갑시다. 여시주.”
“어딜 가느냐? 이 손 놔라.”
맹수는 아무런 대꾸를 않고 동천화를 끌고 나갔다.
만나면 단칼에 베어버리고 싶었다. 아니 갈기갈기 찢어죽이겠다고 다짐하고 맹세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동씨 형제들을 죽이는 꿈을 꾸었고 그들의 뜨거운 피를 양손에 묻히기를 소원했다.
어머니에 대한 행패는 자식으로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묘한 일이었다. 막상 그녀를 면전에서 보자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대해수장 북쪽의 절벽 위로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용고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맹수는 동천화를 그곳으로 끌고갔다.
“야 이 미친 중놈아 제발 손 좀 안 놔?”
맹수는 묵묵히 동천화를 전자위로 끌고 올라가 잡은 손을 놓았다. 절벽 아래로 파도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거친 물살을 만들었다.
툭!
맹금이 떨어지자 동천화가 놀랐다. 여지껏 맹수 혼자인줄 알았었다.
맹수가 말했다.
“대법왕님께서는 여 시주에 적당한 훈계를 하라고 말씀 하셨소. 그럼 지금부터 훈계를 하겠소.”
“흥!”
동천화가 코 웃음을 쳤다. 네놈들 훈계 따위는 필요 없다는 투의 경멸이다.
“앉으시오.”
동천화는 또다시 코 웃음을 치며 팔짱을 끼었다. 턱도 없는 소리 말라는 투였다.
“우린 두 번 고운 말을 사용하지 않소. 그리고 혹시라도 출가한 승려들이어서 그저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건 큰 오산이오. 앉으시오.”
동천화는 팔짱을 끼며 먼 바다를 쳐다보았다.
“이년아 앉으라잖아.”
맹금이 머리채를 휘어잡아 사정 없이 주저 앉혔다.
꽈당!
동천화가 풀썩 주저앉았다.
“이런 미친놈들이.”
벌떡 일어서려는 동천화의 머리통을 맹금의 솥뚜껑만한 손이 내려 찍었다.
“어디서 함부로 일어나 이년아.”
퍽!
다시 엉덩방아를 찧었다.
“일어나.”
맹수가 말했고 동천화가 이번에는 노려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이년아 일어나라잖아.”
맹금이 머리채를 잡아 당겼다.
“아악!”
“앉아.”
“이년아 앉으라잖아.”
또다시 머리채를 잡아 주저 앉혔다.
“일어나.”
“빨리 일어나 이년아.”
동작이 조금만 더뎌도 맹금이 인정사정 없이 머리를 휘어잡고 세우고 앉혔다.
“여기까지는 여시주의 정신 상태를 추슬러주기 위한 것이었고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본궁식의 훈계를 하겠소. 훈계 방법은 두모제근이오.”
동천화는 표독하게 외쳤다.
“이런 맛이 간 땡초새끼들.”
척!
처억!
맹수와 맹금이 동천화 앞에 우뚝 섰다.
쭉!
맹수의 오른손이 동천화의 머리카락 한 개를 뽑았다.
그러자 맹금 또한 기다렸다는 듯 머리카락 한 개를 뽑았다.
쭉!
“개…개자식…악!”
따끔한 아픔에 동천화가 소릴 질렀다.
쭈욱!
쭉!
규칙적으로 두 사람은 머리카락을 뽑았다. 동천화는 피하려 했지만 피할 수가 없었다. 한 발만 뒤로 물러나면 절벽이고 떨어지면 뼈도 추리지 못할 만큼 높았다.
쭉---쭈죽!
쭈쭈쭈쭉!
두 사람의 머리카락 뽑는 속도는 갈수록 빨라졌다.
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한 개씩 뽑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두 개 세 개씩 뽑아졌고 더욱 아픔은 심해졌다. 어느새 정자 바닥으로 동천화의 머리카락이 수북히 쌓였다.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동천몽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자정경 또한 길게 한숨을 쉬었다. 동천몽은 무척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대법왕이라고 하지만 여느 사람들 같았으면 동천화를 죽였을 것이었다.
별천지라 하기에 충분했다. 연못 주위로 버드나무가 능청 휘어지고 제철도 아닌데 수면 위로 점점이 연꽃이 만발해 있었다. 연못 동쪽으로는 정방형의 정자가 세워져 있는데 세심사(洗心?)란 현판이 보였다.
연못 북쪽으로는 다섯 개의 거대한 돌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웅장한 전각 한 채가 있는데 놀랍게도 권아승경이라는 글씨를 현판에 써달았다. 권아승경은 건륭제의 식사를 준비하는 곳을 일컬음이다. 즉 이곳 주인 또한 황제를 시늉내고 싶어 한 것이 분명했고 그 좌측으로 소월당이라는 주궁이 세워져 있었다.
소월당에 앉으면 흰 구름에 감싸인 앞산이 들어오고 수시로 연못에서 만들어진 안개가 산을 덮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이곳이 바로 여추량의 별장이었다.
“아함!”
별장을 지키는 무사가 긴 하품을 했다.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천상각이 무너졌을까?”
하품을 한 무사가 동료 무사를 향해 물었다. 맞은 편 동료무사 또한 찢어져라 하품을 한 후 대답했다.
“글쎄, 아무리 천상각이라고 해도 무림맹에게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으니 온전하겠나?”
“하긴, 자고로 금력(金力)이 무력(武力)을 이기는 건 못 봤으니까. 그나저나 주인님께서는 적당한 시점에서 발을 빼실것 같던데.”
“영리하신 분이야.”
“누구 말인가?”
“누군 누구야? 주인님이시지. 무림맹에서 천상각을 접수하면 간부들을 가만 놔두겠나. 본보기 차원에서라도 모조리 죽이겠지. 그러기에 앞서 발을 빼시는 걸 보면 말일세.”
“주인님의 머리는 그야 말로 절묘해.”
“저 인간은 뭐지?”
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 걸이였고 걸치고 있는 붉은 가사 또한 반 누더기였다. 하나 두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맨발이라는 것이었다.
“정신 나간 놈 아냐. 거 보면 미친놈들이 맨발로 다니잖아.”
“ 미친놈이 길을 잃어 이 깊은 산중까지 왔을리는 없고, 가사를 보아하니 중놈 같기도 한데, 대가리 털도 짧고 말이야.”
“정지!”
두 사람이 창을 힘주어 겨누며 앞을 막았다.
덕배가 가느다란 시선으로 두 사람을 보았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여기가 소월당이오?”
“그렇소. 그런데 스님은 누구시오? 어떻게 여길 찾아 오셨소?”
가슴 앞에 걸린 긴 염주를 보고 승려라는 것을 확신했다.
“우리 두 사람을 포함해, 그런데 그건 왜 묻소?”
대답을 하려다 뭔가 이상한낌새를 느끼고 반문했다.
덕배가 버럭 소릴 질렀다.
“빨리 대답하지 못하겠소? 모두 몇놈이 안에 있소이까?”
하도 큰소리로 윽박지르듯 묻자 얼떨결에 대답을 했다.
“우…우리 둘을 포함해 모두 아홉인데요?”
덕배가 힘주어 말했다.
“모두 나오라고 하시오. 당장.”
“네.”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좌측 무사가 등을 돌려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혼자 남은 무사는 덕배의 눈치를 살폈다. 낡았지만 붉은 가사를 걸쳤고 앞 가슴을 덮은 염주를 보면 승려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맨발이라는 것이 왠지 섬칫한 느낌을 자아냈다.
“저…저어 한 마디 물어도 되겠습니까?”
무사는 용기를 내었다.
덕배가 쳐다보자 움찔 놀라면서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근처 절에 계시옵니까?”
덕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무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나도 불자입니다. 집안 대대로 불교를 믿습니다. 저를 낳을 때 어머니께서 부처님을 만나는 태몽을 꾸셨다더군요.”
덕배는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시…실례인줄 압니다만 법명을 좀 물어도 될까요?”
“덕배요.”
“더…덕배 좋은 법명이시네요. 전 국흥금이라고 합니다. 저 뒷산에 있는 의심사에 계십니까?”
덕배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때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무사들이 나타났다. 데리러 갔던 무사를 포함해 모두 여덟이었는데 덕배를 보고 흠칫 했다. 그들 역시도 맨발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린 것 같았다.
“스님께서 우릴 모두 모이라고 했소?”
우두머리로 보이는 중년인이 앞서 나와 물었다.
제법 야무지게 보였고 옆구리에 찬 검도 수실까지 달아 한껏 멋을 부렸다.
“여기 있는 인원이 소월당에 있는 무사들 전부이오?”
“그…그렇습니다만 도대체 뉘신지요?”
그러자 덕배와 얘길 나눴던 무사가 말했다
“저 뒷산에 있는 사찰에서 온 덕배 스님이십니다.”
“아 그래, 그럼 탁발을 나오셨군요. 그럼 진즉 그렇게 말씀하시지요. 뭣들 하느냐? 모두 은자 한 푼씩 거두어 드리거라. 많이 바칠수록 복을 받느니라.”
“아이씨이. 탁발 나온 줄도 모르고 은근히 쫄았잖아. 무슨 놈의 스님이 그렇게 살벌하오. 젠장!”
무사가 투덜거리며 동료들을 향해 말했다.
“아까워하지 말고 주자고.”
그러면서 자신이 솔선 수범 하겠다는 듯 은 자 한 닢을 꺼내 다가갔다.
덕배가 말했다.
“모두 죽어야겠소.”
흠칫!
다가가던 무사를 비롯해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시 말하겠소. 모두 죽어야 할 것 같소이다. 이건 내 뜻이 아니라 내가 모시는 대법왕님의 명령이시오.”
“무…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요?”
우두머리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소이다. 그냥 떠나면 되오이다. 그럼 살 수 있소. 하지만 떠나지 않으면 내 손에 죽소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좀 알기 쉽게 해보시오. 그러니까 떠나면 살고 남으면 죽는다는 건데 왜요?”
“소월당을 노납이 접수 한다는 얘기오. 떠나겠소? 죽겠소?”
우두머리가 인상을 썼다.
“이제보니 이 새끼 완전히 맛이 간 중 새끼잖아. 네놈이 뭔데 떠나라 마라 하는거야? 진짜 웃기는 놈이잖아. 네놈이야 말로 죽기 싫으면 꺼져라. 우리 어머니가 절에만 다니지 않았다면 이미 모가지 잘랐느니라.”
“그래서 모두 죽겠다는 것이오?”
“뭣들 하느냐? 저 미친 중놈을 쳐라.”
우두머리가 소리쳤고 수하들이 달려들었다.
덕배가 오른손을 들어 달려드는 무사들을 향해 후려쳤다.
“미…밀종대수인. 피해랏!”
우두머리가 기겁하며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단 일격에 무사들이 멀리 날아가 떨어졌다. 하지만 숨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고 덕배가 다가가 일제히 혈도를 쳤다. 그러자 무사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이그러졌다. 무공이 폐지된 것이었다.
흠칫!
덕배가 돌아서자 우두머리가 기겁하며 한걸음 물러났다.
그러더니 죽어라 몸을 날려 도망쳐 버렸다.
덕배는 곧장 소월당 안으로 들어섰다. 세상사에 무관심 한 덕배선사도 화려한 장원의 경관에 눈을 부릅떴다.
덕배는 길을 따라 올라갔고 바람에 꽃향기가 실려 있었다. 한참을 올라간 덕배가 걸음을 세웠다.
소월당 마루에 서서 구름이 낀 건너편 산을 바라보고 서 있는 한 명의 중년여인이 있었다. 덕배선사는 한 눈에 동천몽과 닮았음을 알아 보았다.
덕배선사의 발자국 소리에 능씨가 고개를 돌렸다. 붉은 가사를 걸친 덕배를 보며 능씨의 눈이 빛났다. 단 번에 포달랍궁 승려 복장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었다.
“아미타불! 소승은 덕배라 하옵니다. 대법왕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대…대법왕이라 하면?”
“세속의 존함이 동 천자 몽자 이오며 본궁의 대법왕이십니다.”
“처…천몽이 보냈단 말인가요?”
“그러하옵니다. 이미 이곳을 지키던 무사들은 소승이 모두 쫓아 버렸사옵니다. 이제 불안해 하실 필요 없사옵니다.”
주르르!
능씨가 눈물을 흘렸다.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아들을 찾은 것이었다.
“저…정말이죠. 우리 천몽이가 보냈단 말이죠?”
“아미타불! 감히 출가인의 입에서 어찌 거짓이 나올수 있겠사옵니까? 이곳으로 오신다고 했사오니 곧 뵈올 것입니다.”
“곧 뵈올 것이 아니라 지금 왔습니다.”
느닷없는 소리에 두 사람이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동천몽이 자정경이 말을 타고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파르르!
능씨가 온 몸을 떨며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비록 헤어질 때에 비해 체격도 컸고 얼굴도 조금은 달라졌지만 틀림없는 동천몽이었다.
“모…몽아.”
능씨가 맨발로 계단을 뛰어 내려왔고 동천몽이 그대로 몸을 날려 계단 앞에 섰다.
계단을 내려온 능씨가 우뚝 서 있는 동천몽의 위 아래를 한참 훑어 보았다.
와락!
능씨가 넘어지듯 동천몽을 끌어안았다.
“왔구나. 내 아들이 살아왔구나.”
능씨는 동천몽을 끌어안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
“네가 죽었을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내 아들이 말썽쟁이기는 해도 어디 내놔도 떨어지지 않는 녀석이었기에.”
끌어안긴 동천몽이 피식 웃었다. 그 와중에도 능씨는 아들을 자랑하고 있었다.
“어디 얼굴 좀 다시 보자꾸나.”
양손으로 동천몽의 뺨을 감싸고 뚫어져라 보았다.
“아니오?”
“진짜다. 진짜 내 아들 맞다.”
다시 힘차게 동천몽을 부둥켜 안았다.
능씨는 떨어질 줄 몰랐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동천몽을 안고 있었다.
그때 자정경이 다가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능씨가 꾀꼬리 같은 음성에 동천몽을 밀어 내고 고개를 돌렸다. 자정경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다운 자정경의 미소에 놀란 것이다.
“누…누구?”
“소녀는 자정경이라고 해요. 대법왕님께서는 저의 사부님 되세요.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어머니.”
“어…어머니.”
능씨가 더듬거리며 중얼거리더니 얼굴이 환해졌다.
“네…어서와요 낭자. 우리 몽이 제자라구요?”
“네 사부님께서 소녀를 거두어 주셨어요.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저에게는 사고가 되십니다. 그러니 앞으로 뭐든지 시키고 부려 먹으세요. 열심히 하겠어요.”
능씨가 동천몽을 바라보며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자 동천몽이 버럭 소릴 질렀다.
“왜 웃습니까?”
“아…아니다. 그냥.”
“이상한 생각 하지 마세요. 절대 그런 것 아니니까?”
“누가 이상한 생각을 한다고 그러느냐? 넌 아직도 앞서가는 건 여전하구나.”
“어머니 듣자하니 크게 다치셔서 의식을 잃었다던데 어떻게 쾌차 하셨어요?”
능씨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
“여총관이 의원을 데려다 치료 했다더군요. 아마 내가 죽으면 쓸모가 없어지기 때문 아니겠어요.”
“맞아요. 인정으로 살려준 것이 아니라 인질로써 가치를 높이기 살린 것이죠. 그런데 어머니 저에게 존댓말 하지 마세요. 사고가 어찌 아드님 제자에게 존댓말을 써요. 그냥 말씀 낮추세요.”
“아무리 그렇지만.”
“아니에요. 그것이 예법이에요. 그냥 정경아 하고 부르세요. 아셨죠 어머니.”
동천몽이 눈살을 찌푸렸다.
“정경이 너도 어머니라는 호칭보다는 사고님이라고 불러야 정상 아니냐?”
“어떻게 부르던 내 맘이에요. 소녀가 사고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아요. 아니면 지금처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좋은가요?”
“그…그야 당연히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좋아요.”
동천몽을 돌아보며 혀를 날름 내밀었다.
“거봐요.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고 하시잖아요. 어머니 드리기 위해 제가 몇 가지 선물을 사오셨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어요.”
그러면서 품에서 조그만 옥함 한 개를 꺼냈다.
그걸 본 동천몽이 눈을 크게 떴다. 이곳을 오던 중 저자거리에서 잠시 볼일이 있다고 사라졌는데 그러고 보니 저 옥함을 사기 위함인 것 같았다.
딸칵!
옥함 뚜껑을 열자 능씨의 눈이 커졌다.
“이…이건 비취 옥환아닌가요?”
“어머니 말씀 놓으시라니까요. 듣기 거북해요. 진짜.”
자정경이 울상을 짓자 능씨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비쌀텐데.”
“하나도 안비싸요. 어서 손가락에 끼어 보세요. 제가 끼어 드릴께요.”
자정경이 반지를 꺼내 능씨의 손가락에 끼었다.
스윽!
“어때요. 커요?”
“아니 크진 않는데.”
“작아요.”
“아니 딱 맞아.”
“잘됐어요. 내가 보는 눈이 있군요. 내 손가락에 맞췄는데 설마 어머니 손가락이 나와 같을 줄 몰랐어요. 정말 잘 어울려요.”
능씨 또한 손가락에 낀 반지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는데 입가에 미소가 가득 한 것이 무척 마음에 든 듯 했다.
“그리고 이것도.”
자정경이 품에서 또 한 개의 옥함을 꺼냈는데 조금 전 것보다 컸다.
“이건 또 뭐지?”
“직접 열어 보세요.”
동천몽까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았다.
모친이 조심스럽게 옥함 뚜껑을 열었다.
달칵!
옥함이 열리고 능씨의 눈이 커졌다.
“맙소사. 이건 백향분 아닌가요?”
“네 맞아요. 어머님 같이 아름다우신 분들은 백향분을 쓰셔야 해요. 그럼 훨씬 피부도 고와질 뿐 아니라 우아해 보이거든요.”
“어쩜!”
좋아하는 능씨와 옆에서 온갖 찬사를 늘어 놓는 자정경을 보며 동천몽이 눈을 감아 버렸다.
도무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이건 제자가 아니마 마치 며느리가 시어머니 선물을 사오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는데 더욱 중요한 것은 능씨의 눈빛이었다.
자정경을 쳐다보는 눈빛이 단순히 아들의 제자를 보는 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쁜 며느리를 쳐다보는 시어머니의 자상한 눈빛이었다.
묘하게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았다. 지금 막 만났을 뿐인데 서로 손을 잡고 다정히 얘길 하며 소월당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런 두 사람을 쳐다보던 동천몽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한편 나란히 어깨를 하고 들어가는 자정경과 능씨의 모습을 불안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덕배선사였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덕배선사 또한 자정경을 바라보는 능씨의 눈빛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것은 가족을 바라보는 눈빛이었고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미타불! 대법왕님께 여난이 있을 것이라고 금왕님께서 그러시더니’
천년의 법통과 율법도 인간의 운명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다시 말해 대법왕이 혼인하는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지지 말란 법도 없다. 물론 절대 불가한 일이지만.
“덕배.”
“예 대법왕님.”
“어떠냐? 이곳 말이다. 경치도 이만하면 됐고 공간도 좁지 않는데다 먹고 자는 시설이 완벽히 갖춰줘 있는데 본궁의 중원거점으로 사용하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