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34화 (34/71)

제7장 가족, 그 악연의 고리

무림맹이 일단 천상각을 접수하면 순식간에 철옹성을 만들 것이다. 뒤늦게 동천비가 공격을 해 온다 해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동천비는 천상각이 무림맹에 의해 폐쇄될 줄은 전혀 생각 하지 못하고 있으며 폐쇄되었을 때를 대비한 대책도 아직은 세우지 않고 있었다.

“위모백이라 했는가?”

“그러하옵니다. 각주님.”

위모백은 무척 정중했다.

그런 위모백의 행동을 보며 동오룡은 콧웃음을 쳤다. 정도 무림인 치고 정중하고 예의 바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안으로는 썩었고 음흉하기 그지없으며 탐욕과 욕심으로 가득차 있는 위선자들이었다.

“이해를 못하겠네. 무림맹이 무엇이건데 감히 내 집을 접수한단 말인가? 여긴 내 집이라는 걸 기억하게. 무림맹 땅이 아니고 무림맹이 본가를 들어올 자격은 더욱 없네.”

동오룡이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지었다.

“자네 집을 무림맹이 접수하겠다고 하면 자넨 어쩌겠나?”

멈칫!

위모백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무림맹은 뭐든지 자기들 맘대로 해도 되는가? 다시 말하지만 웃기는 소리일세. 당장 돌아가게. 한 번만 더 이따위 모욕적인 행동을 할 땐 가만 있지 않겠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는다면 곱게 죽음을 받아 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자신도 남은 것이라고는 오기와 악 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이판사판인 것이다.

위모백의 눈썹이 꿈틀했다.

“미안하오이다. 우린 명령을 수행할 뿐입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길.”

“집 주인의 허락도 없이 남의 집을 빼앗겠다니 이거야 말로 날강도들 아닌가?”

“말씀이 지나치시오.”

“지나친 것 무림맹일세. 남의 재산을 강탈하는 자들이 어떻게 정의를 추종하고 불의를 척살하는 무림맹이란 말인가. 그대들이 증오하듯 싫어하는 흑도인들도 이렇게까지는 폭력적이지 않네.”

“한번만 더 무림맹을 모욕하는 발언을 계속 할 땐 가만 있지 않겠소이다.”

위모백의 검자루에 얹혀진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동오룡은 눈빛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내게 가져간 돈 대부분이 군비로 사용되었다고 하지만 상관량을 비롯해 무림맹내 일부 간부들 주머니로 들어갔다는 것을 내가 모를줄 아는가? 그런데 이제 그것도 부족해 본가를 쪼개어 나누어 가지려는 속셈 아닌가?”

번쩍!

위모백의 검이 뽑혔고 어느새 동오룡의 목젖에 대어졌다.

“다시 말해보시오. 지금 했던 말.”

위모백의 눈에서 살기가 쏟아졌다.

동오룡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하라면 못할 줄 아는가? 무림맹이야 말로 천하의 안위를 지킨다는 명분아래 온갖 부정과 비리를 자행하는 그야말로 벼락을 맞을 세력일세. 겉으로는 평화와 자유를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수많은 상가와 부호들로부터 은자를 뜯어내는 기생충들 아닌가?”

“이놈이!”

파르르!

위모백의 검 끝이 떨렸다.

금방이라도 목구멍을 뚫어 버릴 듯 했다. 하지만 찌르지는 않았고 안색이 불그락 푸르락 했다.

“뭣들 하느냐? 당장 천상각을 폐쇄하라. 저항하는 자는 베어도 좋다.”

“추웅!”

부하들이 일제히 대답을 하고 장원 안으로 날아들어갔다.

위모백이 검을 겨눈채 눈을 부라렸다.

“상관량 총관의 말씀만 계시지 않았다면 당신의 목은 지금쯤 땅에 떨어졌을 것이오. 어쨌든 오늘부터 동 각주님을 가택에 연금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소이다. 활동 지역은 녹풍원이오. 그 밖으로는 이 시간이후 절대 나갈 수 없소이다.”

“여…연금!”

“강제로 모시고 싶지 않습니다. 들어가시죠.”

“핫핫핫! 날 가둔다고.”

“용서 하십시오.”

팟!

동오룡의 마혈을 제압했다.

온 몸이 제압당한 동오룡이 버럭 소릴 질렀다.

“당장 풀지 못하겠느냐? 이런 천하에 도둑놈들이 있나.”

“위모백이라고 했소?”

동천몽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모백이 돌아보았는데 긴장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처음부터 말은 동오룡에게 하고 있었지만 신경은 동천몽에게 가 있었다.

“협의지사들의 집단인 무림맹에서 하는 일이니 어련하시겠소. 하지만 굳이 마혈까지 제압해가며 수모를 줄 필요 있소. 각주님께도 명예와 자존심이 있는데.”

위모백의 눈이 커졌고 동천몽의 말은 계속 되었다.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야 하는 것 아니냔 말이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상하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고 자꾸 위축이 된다. 어깨를 펴고 크게 숨을 내쉬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동천몽에게 자신의 본능이 꺾이고 있는 것이었다.

“각주님의 마혈을 풀어드려라.”

부하들이 다시 마혈을 풀었다.

동오룡의 귓가에 동천몽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너무 걱정할 것 없습니다.”

동천몽을 쳐다보는 동오룡의 시선이 아주 못마땅해 있었다. 걱정할 것 없다니 내 재산을 빼앗겠다는 데 걱정할 것 없단 말이냐는 뜻이었다.

“당장 어떤 변고가 생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일한 손해라면 장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인데 소자가 대신 중상들과 거래상들에게 서찰을 띄우겠습니다. 무림맹이 모든 실권을 장악하여 어쩔수 없이 잠시 문을 닫아야겠다고 말입니다. 넉넉잡고 두 세 달 만 기다려 달라고, 그 시간에는 다른 상가와 거래를 하도록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부친의 눈썹이 꿈틀 했다. 그럼 두 세 달 이후에는 어떡하겠느냐고 묻고 있었다.

“아버님은 아직 닥치지도 않은 걱정을 하시는군요. 내일 당장 강호의 정세가 어떻게 변할지도 모르는데 두 세 달 이후를 벌써 염려 하십니까?”

흠칫!

동오룡이 깜짝 놀랐다. 동천몽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끌어다 걱정할 필요 없었다.

동천몽의 계산은 간단했다. 동천비는 지금 자금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천상각이 계속 장사를 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장강수로와 황하 수로 등을 힘으로 확보한 것이었다. 하지만 천상각이 문을 닫으면 그는 당장 자금난에 허덕인다. 어차피 돈으로 패업에 뛰어든 그에게 돈이 없다는 것은 무척 곤란한 일이다. 그래서 일부러 무림맹 일에 가로막지 않고 나섰던 것이었다.

흑수당의 모피가 원국으로 틀어졌고 천상각이 문을 닫았으니 동천비의 자금줄은 더욱 말라가고 있었다.

‘길어야 보름이겠지!’

동천몽은 동천비가 보름을 전후로 흔들릴 것으로 내다봤다. 백쾌섬 또한 돈이 없는 동천비를 우호적으로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아악!”

돌연 장원으로부터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팟!

동천몽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곧장 땅을 박차고 날아갔다.

화생각 마당에 내려서자 자정경이 무림맹 무사와 대치를 하고 있었는데 옷자락이 두 군데 찢겨져 바람에 펄럭거렸다. 그녀의 얼굴은 아직 술이 덜 깬 듯 불그레했는데 몹시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 이냐?”

“글쎄 이 작자들이 허락도 없이 자고 있는 방을 들어와 뒤지잖아요.”

동천몽의 시선이 자정경과 대치하고 있는 무림맹 무사를 쳐다보았다.

“무림맹은 여인의 방도 허락 없이 들어가도 되는가?”

무사가 멈칫 하며 말했다.

“여자 방인 줄은 몰랐소. 사과를 하려고 했는데 이 낭자가 다짜고짜 머리맡에 검을 들어 날 찌르잖소.”

“야 이 미친놈아 여자방에 들어온 남자를 가만 쳐다볼 여자가 어딨냐? 네놈이 겁탈하러 들어온 놈인지 아니면 물건 훔치려 들어온지 내가 어떻게 가 안단 말이냐?”

무사가 인상을 썼다.

“자꾸 이놈 저놈 할 것이오.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는데도 공격을 해서 어쩔 수 없이 나도 검을 들었소이다.”

자정경이 동천몽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사부님 이 작자들은 누구죠? 여기저기 험상궂게 생긴 놈들이 설치고 다니던데?”

“무림맹에서 왔다는구나. 그러니 그만 검을 거두어라. 이쪽에서도 미안하다고 하지 않느냐?”

자정경이 무사를 보며 쏘아 부쳤다.

“너 운 좋은 줄 알아.”

그러면서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빨리 꺼지지 않고 뭘보고 있어.”

자정경이 버럭 소릴 지르자 무사가 멈칫 했다.

“아…알겠소. 미안하오. 그럼 소생은 이만.”

무사가 등을 돌려 후다닥 사라졌다.

그러자 자정경이 자신의 찢어진 옷을 보며 투덜 거렸다.

“옷도 한 벌 뿐인데 어떡하지.”

“염려 말거라. 너만 괜찮다면 어머니 옷을 잠시 걸치는게 어떻겠느냐?”

“알았어요. 그렇게 할께요. 그런데 조금 전 그 자식 무척 강한데요. 내 검이 그놈 근처에도 못 갔어요.”

무사가 강한 것이 아니라 자정경이 약하다고 말해주려다 삐칠 까봐 동천몽은 입을 다물었다.

자정경은 모친의 허름한 무명옷을 걸쳤다.

헐렁했지만 본인은 무척 만족스러워 했는데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빼어난 용모의 자정경이 허름한 무명옷을 걸치자 묘하게 더욱 요염하게 보였다.

꿀꺽!

마른침만 삼켰을 뿐 이내 다시 표정이 우울해졌다.

“사부님 어때요? 어울리죠?”

“그래 아름답구나.”

자정경이 양팔을 벌리고 한 바퀴 빙 돌았다. 치마가 사방으로 넓게 퍼지며 허연 허벅지가 드러났고 동천몽은 눈을 부라리고 쳐다보았다.

뇌전처럼 잠깐 나타났다 사라진 허연 허벅지는 실로 자극적이었고 혹시나 하며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여전히 캄캄 무소식이었다.

‘아…아미타불!’

힘없는 불호가 입안에서 맴돌았다.

자정경은 이리저리 옷을 살피며 아주 즐거워 했다.

동천몽이 보기에는 그렇게까지 좋아 할 만큼 화려한 옷도 아니었다. 그런데 자정경이 너무 좋아했으므로 물었다.

“그렇게도 좋으냐?”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 어머니 옷을 입었는데 당연이 기쁘고 즐겁죠?”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어…어머니?”

“왜요? 사부님 어머님이니까 저에게도 어머니가 되잖아요. 나중 어머니 만나면 이 옷 달라고 해야지.”

‘서…설마 저게!’

혹시 며느리로 들어앉을 생각을 하고 있지 않는가 싶어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은 여인과 살림을 차릴 수 있는 신분이 아니라는 것을 모를리 없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사내의 구실이 망가진 걸 모르지 않는 그녀였다. 하지만 서슴없이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휘익!

한줄기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더니 덕배선사가 뚝 떨어져 내렸다. 그은 여전히 맨 발이었다.

동천몽을 향해 정중이 허리를 구부려 합장을 하고 말했다.

“여추량의 행적을 찾았사옵니다.”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생각보다 빨리 찾았구나. 그래 지금 그는 어디있느냐?”

“이십여명의 무사들을 대동한 채 항주를 향하고 있사옵니다.”

“항주라면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군.”

동천몽의 눈에서 살기가 뻗어나왔다.

그때 덕배선사가 은근한 표정으로 말했다.

“들어오면서 보니 웬 낯선 자들이 험상궂은 기세를 풍기며 곳곳에 배치되어 있더군요?”

“무림맹에 온 사람들이니라.”

덕배선사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감히 대법왕의 자택에 외부인이 침입해 왔다는 것에 분노를 느낀 것이었다.

그걸 보 고 동천몽이 웃음을 지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라. 그냥 내버려 두어라.”

그때 발자국 소리에 일행이 고개를 돌렸다. 위모백이 순찰을 도는 듯 다가왔다.

적당한 거리에 걸음을 세우더니 세 사람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중에서 덕배선사를 보며 눈빛이 흔들렸다. 그 또한 예사롭지 않음을 간파한 것이었다.

척!

위모백이 포권의 예를 취했다.

“스님께서는 어느 절에 계시옵니까?”

덕배선사는 마주 합장을 하며 말했다.

“금둔사에 몸을 담고 있소이다.”

위모백이 금둔사라고 중얼 거리며 눈알을 굴렸다. 그 모습을 쳐다보는 덕배의 입가에 야릇한 웃음이 걸렸다. 금둔사는 서장에 있는 조그만 사찰이다. 그런 곳을 위모백이 알리는 절대 없었다. 예상대로 머리에 떠올리지 못했는지 다시 한 번 덕배선사를 예리한 시선으로 살폈다.

“천상각주와는 어떤 관계이십니까?”

셋 모두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덕배선사가 힐끔 동천몽을 쳐다보았다. 대신 대답해도 되느냐는 물음이었고 동천몽이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한 때 신세를 좀 졌지요. 그래서 요즘 어렵다는 말을 듣고 도와줄 것은 없는지 찾아왔소이다.”

덕배선사의 말은 막힘이 없었다.

동천몽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과묵한 덕배선사에게 저런 천연덕스런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다.

“지금부터 천상각은 출입자를 비롯해 모든 움직임을 무림맹이 통제하니 협조해 주시오.”

말을 듣지 않으면 덕배선사도 가만 두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그러리다.”

동천몽으로부터 전음을 받았기 때문에 덕배선사는 속에서 불길이 솟았지만 고분고분했다.

위모백이 힐끔 자정경을 보며 지나갔다. 위모백이 저만큼 사라지자 자정경이 시늉을 냈다.

“출입자를 비롯해 모든 움직임을 무림맹이 통제하니 협조해 주시오. 개자식 드럽게 목에 힘주고 지랄이야. 사부님 저런 놈을 그냥 놔둘 거예요.”

동천몽이 사라지는 위모백을 보며 말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했지 않느냐? 우선 여추량부터 잡으러 가야겠구나. 잠시 아버님을 좀 뵙고 오겠다.”

동천몽이 녹풍원에 들어서자 동오룡은 굳은 표정으로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탁!

술병을 쥐고 따르려는데 동천몽이 병을 가로챘다. 두 손으로 부친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궁금하실 것입니다. 왜 무림맹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지?”

“알고 싶구나.”

기다렸다는 듯 동오룡이 쳐다보았다.

동천몽이 술병을 세우고 부친을 마주 보았다.

“아직 멀었습니다. 본가는 더 무너져야 합니다.”

“네 이노옴.”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희 집은 망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 날 것입니다.”

동오룡의 무서운 눈으로 동천몽을 노려보았다.

동천몽이 일어섰다.

“소자의 말뜻을 무엇인지 모르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동천몽이 등을 돌려 사라졌다.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던 동오룡이 채워진 잔을 단숨에 비웠다. 약간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있던 동오룡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조금 전 까지 굳어 있던 얼굴은 어느새 평정을 회복했다.

‘망해한 산다고!’

동오룡은 몇 번이고 그 말을 중얼거렸다.

일단의 행렬이 산길을 가고 있었다. 관도로 가면 수월하지만 거리가 멀다. 그래서 불편하지만 산길을 택했다. 맨 선두에서 말을 타고 가는 사람은 여추량이었다.

그는 지금 동천비의 지시를 받고 항주를 가고 있었다. 항주는 바다를 끼고 있다. 소주와 더불어 천하제일미도중 하나로 꼽히며 일찍부터 수산업이 발달했고 잡히는 생선은 대부분 전량 북경과 장안 등을 비롯한 고도로 향한다. 같은 생선이라도 이 지역에서 잡히는 것이 훨씬 부드럽고 맛이 좋기 때문이었다.

“총관님!”

나란히 말을 타고 가던 사공진이 입을 열었다.

“어선 사백척을 금화로 계산하면 어느 정도의 액수입니까?”

여추량이 앞을 보며 말했다.

“글쎄다. 중요한 것은 배가 얼마나 크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각주님이 소유한 배는 그곳에서도 가장 빠르고 크다고 했으니 못해도 황금으로 수백만관은 되지 않겠느냐?”

“수…수백만관.”

사공진이 입을 떠억 벌렸다.

“항주에서 생산 된 생선은 유달리 맛이 좋아 같은 배라도 이곳 어선이 훨씬 비싸게 매매되느니라. 같은 물건도 귀한 지역에서는 비싸게 팔리지 않느냐?”

여추량이 힐끔 하늘의 해를 살폈다.

“서두르자. 오늘 안으로 항주에 도착해야 한다.”

항주로 가는 건 동천화를 잡기 위해서이다. 동천화는 부친에게 배에 관계된 문서를 갖고 지금 항주로 향하고 있다. 그녀의 평소 성격으로 볼 때 싼 값에라도 팔아치워 종적을 감출 것이다.

말로해서 듣지 않으면 동천비는 죽여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여추량은 제발 그런 일은 없기를 바랬다.

일행이 산 고개 정상에 이르렀을 때 여추량의 눈이 빛을 뿌렸다. 세 사람이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맨발의 덕배선사였다.

‘저…저자는!’

이미 흑수당에서 한번 마주쳤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자정경 또한 그때 보았다. 문제는 한 가운데 죽립을 눌러쓰고 있는 사내였다. 주위 경치를 구경이라도 하는 듯 뒷짐을 지고 유유자적했다.

사공진이 대뜸 앞으로 말을 몰아가며 소리쳤다.

“웬 놈들이냐?”

사공진이 앞으로 나서자 이십 명의 무사들이 일제히 뒤를 따랐다.

휙!

말에서 뛰어내린 사공진이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정체를 밝혀라.”

덕배선사와 자정경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주위를 구경하고 있던 죽립의 사내가 천천히 돌아서더니 말했다.

“귀 안먹었다. 살살 말해라.”

흠칫!

사공진이 깜짝 놀랐다.

말 한마디 뱉었을 뿐인데 일거에 자신의 기세가 꺾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죽립의 사내가 말에서 내려오고 있지 않는 여추량을 보며 말했다.

“말에서 안내려 올 셈이오? 그럼 내가 올라가지.”

휙!

누가 말릴 틈도 없었다. 여추량도 눈앞에 뭔가 번쩍인다고 느낀 순간 어느새 등 뒤가 묵직했다.

히히힝!

갑자기 한 사람이 더 오르자 말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누…누구시오?”

여추량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죽립의 사내는 자신의 등 뒤에 있었다. 적인지 아닌지 아직 판단을 미뤘지만 어쨌든 자신의 모든 것은 등 뒤 사내에게 완전히 묶여 있었다.

“아…아니 저자가.”

사공진과 부하들이 움직이려 들자 오히려 여추량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부하들의 검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등 뒤 사내의 공격을 앞설 수 없다.

“올해 당신 나이가 몇이던가?”

무척 다정한 음성이었다. 그것도 한손으로 어깨를 쓰다듬으며 묻는다.

파르르!

여추량은 몸을 떨었다.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지만 시원하기는 커녕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금방이라도 어깨를 부숴 뜨릴 것 같은 공포가 전신을 지배했다.

“귀…귀공은 도대체?”

“예순 다섯이던가? 몇이지?”

“예…예순 넷이오만 나이는 왜?”

“예순 넷이면 세상을 알 나이군. 자식이 셋 있지 아마?”

흠칫!

여추량이 또다시 놀랬다. 자신에게 자식이 셋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 동오룡과 동천비 말고는 없었다.

“첩도 얻었다지? 하긴 요즘 돈벌이가 제법 쏠쏠하니 첩 하나쯤 둘만 하지.”

꼴칵!

여추량은 마른침을 삼켰다. 가족을 알고 애첩의 정체를 알 정도면 자신에 대한 조사가 철저히 이뤄졌음을 반증했다. 대체적으로 상대에 대해 자세히 조사를 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죽이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경우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도움을 원하는 자가 이렇게 무례한 방문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여추량.”

“허억!”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지금 동천화 잡으러 가는 길인가?”

“……”

여추량은 아무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부하들은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판단하기에 천하에 어떤 고수라도 이 상황에서는 자신을 안전하게 탈출시키지 못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뿐이었다. 죽립의 사내가 원하는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뭘 원하오? 으헉!”

여추량이 기겁했다. 죽립 사내가 자신의 목을 매만졌기 때문이다.

죽립사내가 목을 매만지며 말했다.

“돈을 벌면 목부터 살이 찌는데 많이 쪘군. 여총관.”

“마…말씀하시오.”

“어딨느냐? 내 어머니.”

“크허헉!”

여추량은 그제서야 모든 것을 파악했다. 등 뒤에 있는 사람은 동천몽이었다. 하나 또다시 피어나는 의문이 있었다. 백쾌섬의 말로는 분명히 죽였다고 했다.

“죽었다고 들었나보군. 그렇게 놀라는 걸 보니.”

“저…정말 막내 도련님?”

“누가 네놈의 도련님이란 말이냐? 아참 덕배, 저놈들을 모두 잡아 무릎을 꿇려라.”

“그리하지요. 대법왕님.”

“대…대법왕.”

“그럼 저 분이 바로.”

사공진과 부하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고 덕배의 몸이 움직였다. 순식간에 사내들 속으로 뛰어든 덕배의 쌍수가 사방으로 원을 그리며 휘돌았다.

파아아아!

강력한 밀종대수인이 사내들의 마혈을 찍었다.

“끄럭!”

“그극! 꺽! 까가각!”

집단처럼 사내들이 쓰러졌고 몇 명이 공격을 피하고 달려들었다. 그러자 덕배가 노호를 터뜨렸다.

“아…미…타…불!”

콰아아!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가공할 밀종대수인이 쏟아진다.

퍽!

퍼어억!

그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단 이초 만에 부하들이 모조리 제압되거나 숨을 거두자 여추량의 안색이 횟빛이 되었다.

격렬하게 두근거리는 여추량의 심장의 움직임이 가슴으로 전달되었다.

동천몽은 턱을 여추량의 어께에 올리고 귀에 속삭였다.

“어머니 어디 있느냐?”

여추량이 어깨를 한 번 떨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동천몽은 조금 전과 똑같이 조용히 말했다.

“내 어머니 어디 있느냐?”

여추량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나…난 모르는.”

탁!

동천몽의 오른손이 어깨에 올려지자 여추량이 말을 멈췄다.

“날 모르느냐? 형들 손에 살려고 개같은 짓을 서슴지 않은 사람이다. 나 또한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라면 개새끼가 되는 건 어렵지 않다는 얘기지. 개새끼에게 물려 뜯기지 말고 말해라.”

자신이 납치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사공진 뿐인데 그는 조금 전 덕배의 밀종대수인에 죽었다. 또한 능씨를 납치할 당시 사공진이 데려간 수하들은 이들이 아니다. 자신의 행위라는 것이 드러날 위험과 징후는 어디에도 없었으므로 여추량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도…도련님께서도 저를 너무 모르시는군요. 소…속하가 감히 어찌 가모님을.”

여추량의 말을 다시 멈췄다.

이번에는 동천몽의 왼손이 어깨 위에 올려졌기 때문이었다.

“여추량.”

“하…하명하소서.”

“넌 아직도 날 돌대가리로 아는 모양이구나. 이봐 덕배, 내가 돌대가리더냐?”

느닷없이 묻자 덕배가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정중히 합장을 하며 대답했다.

“아미타불! 대법왕님께서는 천기를 보시고 미래를 예지하시고 사람의 마음을 읽으십니다.”

“들었나? 난 지금 네놈 머리속을 훤히 들려다보고 있다. 마지막이다. 어머니 계신 곳을 말해라.”

“모…모르.”

우두둑!

왼쪽 어깨 위에 올려진 왼손에 힘이 들어가고 쇄골 뼈를 그대로 부숴버렸다.

“커억!”

“훗훗! 내가 대법왕이 되었다고 하니까 무척 자비스러울 줄 아는 모양이구나. 물론 자비스러울 때도 있지. 하지만 소주의 개고기로 돌아갈 때도 있다. 어머니 계신 곳을 말해라.”

능씨는 최후의 팻감이었다. 이제와서 정도를 따지고 도덕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어차피 전쟁은 과정이야 어찌하든 이기면 그것으로 끝이 나고 승자만 기려진다.

백쾌섬은 동천몽이 죽었다고 했다. 그런데 도대체 이건 어찌된 영문인가.

자신이 능씨를 납치한 것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서였다. 백쾌섬이 동천몽을 죽였다고 했지만 시신을 찾지 못했다. 시신이 없는 죽음은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는게 자신의 평소 지론이었다.

설혹 동천몽이 죽었다면 포달랍궁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었다. 대법왕의 복수를 외치며 중원으로 밀려 올 것이 뻔했다. 능씨를 납치 한 것은 양수겸장이었다.

최악의 경우 동천몽이 살았을 때와 포달랍궁이 중원으로 쳐들어올 것을 대비한 팻감인 것이다.

와지직!

이번에는 오른쪽 어깨뼈가 산산이 부숴졌다.

“커어억!”

여추량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동천몽이 귓가에 대고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제법이군. 무사들보다 장사꾼의 고집이 세다더니 역시 그렇군. 그럼 계속 고집 피워보라고.”

뻐억!

이번에는 오른쪽 허벅지를 내려쳤다.

뚝!

뼈가 부러진 소리가 섬칫하게 들렸다.

퍽!

이번에는 좌측 허벅지를 쳤고 역시 뼈 부러지는 소리가 사람들 귀속을 파고들었다.

여추량의 얼굴에 공포의 기색이 떠올랐다.

동천몽은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다. 죽이는 것 보다는 어쩌면 평생도록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모진 고통을 겪게 하려는 의도인지 모른다.

뼈만 부러져서는 죽지 않는다. 동천몽은 지금 양팔을 못쓰게 만들었고 양다리를 부러뜨렸다. 지금이라도 빨리 의원을 찾아가면 부러진 뼈를 이을 수 있지만 시간이 지체되면 평생 사지를 사용하지 못한다. 사지를 사용하지 못하면 이륜거도 탈수 없고 오로지 방안에 누워 대 소변을 받아내야 한다.

“마…말하겠습니다. 어머니는 안전하게 모셔 두었습니다.”

“장소가 어디냐?”

“소월당이옵니다.”

동천몽의 눈쌀이 오므라졌다.

“소월당(素月堂), 그곳은 또 뭐냐?”

“소…속하의 산장이옵니다.”

멈칫!

동천몽의 눈이 좁혀 졌다가 이내 커지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네놈이 가끔씩 휴식을 취하는 별장이라는 말 아니냐? 네놈에게 별장이 있었더란 말이냐?”

여추량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훗훗! 똑똑함을 자랑으로 여기시던 우리 아버지 밑에서 산장을 갖출 만큼 돈을 빼돌렸다는 얘긴데 과연 그대답군. 이 사실을 아버지께서 아신다면 아마 거품을 물고 나자빠지겠지.”

동천몽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추량.”

“말씀 듣사옵니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 하느냐? 너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 하느냐? 아니면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 하느냐?”

움찔!

여추량의 어깨가 다시 떨렸다. 동천몽의 질문에 여추량은 본능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 자신의 생사가 오늘 결정된다는 것을 느꼈다.

퍼퍽!

말이 무거운 지 앞다리를 들었다 놓았다.

“잘 생각해 보도록, 주위에 도움이 되는 사람인지, 살아 있어봤자 남에게 해만 끼칠 사람인지 말이야.”

“고…공자님 어찌 그런 질문을 물으십니까? 사람이 자신을 평가 한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로써.”

“지금 내게 설교하나? 묻는 말에 대답만 해라.”

“그게 아니오라.”

“결국 네 입으로는 말을 못하겠다는 것 같은데 그럼 대신 내가 말해주겠다. 넌 죽어야 한다. 살아 있어봤자 전혀 세상에 득이 되지 않는 사람이다.”

“……”

“어디 별장만 사들였겠느냐? 별장은 극히 일부분이겠지. 워낙 영리한 그대이니 갖은 방법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을 거야. 아무튼 난 지금 그것을 탓하고자 입 아프게 혀바닥을 놓리는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십년 전 사건을 거론하고자 함이다.”

“시…십년 전이라 하오면?”

“기억을 못하는가 보군. 이봐 덕배, 그게 뭐였더라. 대법왕님들이 써놓은 책이 뭐였지?”

덕배선사가 대답했다.

“법왕록(法王錄)이옵니다.”

“맞아 왕록, 거기에 보니 강자는 약자에게 부린 횡포를 자꾸 잊는 습성이 있다는거야. 그들의 의식으로는 별것 아닐테니까. 그런데 너도 기억을 못하는 걸 보니 그런가 보군. 십년 전 넌 내 어머니 생신날 뺨을 때렸다.”

파악!

동천몽이 여추량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쩌어억!

여추량의 머리통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수박처럼 정확이 반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동천몽이 살기를 담고 말했다.

“다시 태어나면 곱게 살기 위해 노력 하도록, 소주의 개고기였다면 이렇게 안 죽였다. 널 아마 갈기갈기 찢어 죽였을 것이다.”

쿠우웅!

여추량이 발 밑으로 굴러 떨어졌고 순식간에 주위가 피로 적셔졌다.

말이 기겁하며 날뛰었고 동천몽이 말고삐를 쥐더니 전정시켰다.

“워…워어어!”

이윽고 말이 진정했고 동천몽이 입을 열어 말했다.

“덕배 넌 소수의 인원만 날 따르도록 하고 당장 여산으로 이동해라. 그곳에 있는 소월당을 접수 하도록, 그리고 어머니에게 아들이 곧 찾아갈테니 맘 편이 계시라고 전하거라. 난 동천화를 잡으러 가야겠다.”

“이들은 어찌할까요?”

무릎을 꿇어 놓은 여추량의 부하들을 보며 덕배선사가 말했다.

동천몽이 그들을 둘러보았다. 동천몽의 시선이 닿자 무사들은 찔금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동천몽의 입에서 어떤 말이 떨어지느냐에 따라 생가가 결정된다고 생각하자 모두 두려운 기색을 떠올렸다.

“모두 무공을 폐지하고 돌려 보내라. 이미 못된 생각들이 골수에 박혀 돌려보내도 다시 독초로 살아갈 것이니라.”

“알겠습니다.”

“하…한번만 봐주십시오. 공자님, 맘 잡고 살테니 제발 무공 폐지만은.”

“존경하는 형님.”

무사들이 울부짖었다.

하지만 덕배선사의 오른손이 무자비하게 휘둘러졌고 날아간 지풍이 그들의 무공을 일거에 파괴해버렸다.

무공이 폐지되자 모두의 얼굴에 혈기가 사라지고 창백해졌다. 무공으로 달련된 기력이 빠져나가면서 일어나는 반응이었다.

“늦어도 이레 안에 소월당으로 갈테니 그렇게 알거라.”

“옥체 보중하소서.”

동천몽이 말머리를 돌리려들자 휙 하는 옷자락 소리가 들리더니 자정경이 어느새 등 뒤에 달라붙었다.

와락!

그러면서 동천몽의 허리를 사정없이 양팔로 끌어안았다.

순간 덕배선사가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고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저…정경아 꼭 그렇게 잡아야 하느냐?”

“그럼 어딜 잡아요. 잡을 곳이 사부님 허리 뿐이잖아요.”

아닌게 아니라 잡을 곳이라고는 허리 밖에 없었다. 거친 말 위에서 자칫 하다간 굴러 떨어진다.

“조…조금 살살 잡으면 안되겠느냐?”

“아 진짜, 그러다 떨어지면 어떡해요. 어서가요.”

그러면서 뺨까지 등에 대며 사정없이 붙었다.

겉으로만 곤란한척 할 뿐 동천몽의 내심은 흐뭇하다 못해 감동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머릿속에 또다시 화중동거란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일부러 더 노골적으로 몸을 부대낀지 모를 일이기도 했다. 어쨋든 절대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팍!

양발로 말 잔등을 걷어차자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항주만 쪽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보며 덕배선사가 땅이 꺼져라 불호를 외웠다.

자칫하다간 포달랍궁 사상 최초로 혼인한 대법왕이 탄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정경을 떼어 놓아야겠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대법왕은 절대이다. 누구도 대법왕의 뜻을 막을 수 없고 대법왕의 명령은 하늘의 뜻이었다. 하지만 곁에 여인을 두는 것 만큼은 막아야 한다. 그런데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이 겪은 신임 대법왕은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장부 답고 적당히 아랫사람들에게 웃음을 줄지 알고 가급적 끼어들지 않고 아랫사람들이 하는 일을 존중해준다. 더구나 무예까지 출중하여 어쩌면 포달랍궁 사상 가장 훌륭한 대법왕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여자만 빼면.

“맹수, 맹금.”

두 명의 승려가 갑자기 나타났다.

덕배가 동천몽을 수행한다면 맹수와 맹금은 덕배를 수행한다.

“대법왕님을 따르라. 특히 자 낭자와의 관계를 날카롭게 지켜보도록.”

“존명.”

두 승려가 사라지고 덕배선사 또한 크게 한숨을 내쉰 후 반대편으로 몸을 날려갔다.

갯내음을 실은 끈적끈적한 바람이 불어왔다. 멀리 짙푸른 바다와 강물이 보이고 만선을 알리는 깃발을 세운 어선들이 떼를 지어 포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한 마리의 말이 항주만으로 들어섰다. 무서운 속도로 달리던 말은 인파가 북적한 도심으로 진입하면서 속도를 늦추었다. 마상에는 죽립을 눌러쓴 동천몽과 자정경이 타고 있었다.

동천몽은 부둣가를 따라 거칠게 말을 몰았다.

서쪽으로 오리쯤 달리자 야트막한 산이 나타났고 바다를 내려다보며 한 채의 장원이 세워져 있었다. 멀리서도 대해수장(大海水莊)이라는 웅장한 현판이 문루에 위풍당당하게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대해수장의 주인은 원만도란 사람이었다. 항주만에서 가장 큰 어문(漁門)이며 거느린 배만 해도 수백척이고 항주일대에서만 아니라 중원의 수산업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칠 만큼 규모가 크다. 항주 사람들의 약 절반이 대해수장의 밥을 먹고 산다고 할 정도로 대어가인데 이곳의 실질적인 주인은 동오룡이었다.

그런데 대해수장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항상 두 명이 지키던 정문에 오늘은 다섯 명이 흉흉한 기세로 서 있고 북적이던 수산물을 실은 마차들도 오늘따라 뜸했다.

“어디서 온 분들이시오?”

동천몽과 자정경이 다가가자 다섯 명의 무사가 험상궂은 눈빛을 쏘아 보냈다.

동천몽은 동천화가 데려온 수하들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사불각의 무미선사의 보고에 의하면 동천화는 태양곡의 힘을 빌리고 있다고 했는데 곡주 이화덕과 뜨거운 사이라고 했다. 태양곡은 무림맹에 몸을 담고 있지만 사대세가와 거의 비견할 정도의 힘을 갖고 있었다.

이화덕은 무공도 출중하지만 여자를 다루는데 남다른 재능이 있어서 이미 수많은 명문가의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고 있었다. 그런 색마에 가까운 사내가 동천화에게 목을 매달고 있다는 것은 필시 천상각이란 배후 일 것이다. 야망이 있는 자라면 천상각 같은 대상가의 여식은 가장 좋은 배경이 될 수 밖에 없다.

동천몽이 다섯 사내들을 내려다보았다. 말로는 절대 들어갈 수 없다. 피를 흘리고 싶지 않지만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을 것이고 어떤 핑계와 이유를 대어도 가로막을 것이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파아아!

동천몽의 오른손이 뻗었다. 빳빳하게 곧추선 다섯 손가락에서 지옥지가 날아간다.

사내들이 공격을 감지하고 대응에 나서려고 했지만 지옥지는 그들의 마혈을 제압했고 모두 석상처럼 놀란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스으으!

동천몽이 칼로 두부를 자르듯 오른손을 모로 세워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그러자 만년한철로 된 정문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기이이이!

마혈이 제압당한 다섯 사내의 눈이 개구리 눈처럼 튀어 나왔다.

쿠쿠쿵!

정문이 두 조각이 되어 나뒹굴었고 두 사람을 태운 말이 안으로 들어섰다. 곧장 조그만 연못이 나왔고 그 위를 석교 하나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석교 위를 건너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는데 희귀한 바닷고기들이 물속을 노닐고 있었다.

석교를 건너자 아름다운 정원이 우거져 있고 그 사이로 소롯길이 뚫려 있었다. 자정경은 말을 타고 가면서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에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려서 열하에 있는 건륭제의 산장에 놀러 간적이 있었어요. 그것도 아름다웠지만 이곳과는 비교도 안되는 군요. 정말 아름다워요.”

자정경은 연신 탄성을 내지르며 부지런히 고개를 돌리며 구경에 열을 올렸다. 소롯길은 오십장쯤 되었고 끝에 이르자 웅장한 장원의 전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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