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대상가(大商家)
북적이는 저자거리로 동천몽과 자정경이 들어섰다. 동천몽은 감회가 새로운 듯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삼년이 넘었는데도 변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몇 몇 낯이 익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고 서로 눈길이 부딪히기도 했지만 흑의에 죽립을 눌러쓰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곁에 있는 자정경의 뛰어난 미모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고 있었다. 자정경은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듯 허리와 엉덩이를 더욱 육감적으로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동천몽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는 쳐다보는 남자들을 향해 눈을 깜빡거리며 자극까지 주는걸 마다하지 않았다.
“정경아 그러다 어느 놈이 좋다고 덤벼들면 어쩌려고 그렇게 애간장을 녹이느냐?”
“봐서 잘생겼으면 같이 살죠 뭐.”
동천몽이 돌아보았는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자정경이 시치미를 뚝 떼며 말했다.
“남자가 미인 싫어하지 않듯 여자도 잘생긴 남자 좋아해요. 혹시 알아요? 소주에서 마음에 드는 남자라도 만날지.”
그러면서 쳐다보는 남자들을 향해 부지런히 눈을 찔끔거렸다.
“너무 품행이 방정치 못하구나. 자중하거라.”
“다른 건 몰라도 서로의 행동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내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어험!”
동천몽이 헛기침을 했다.
그런 동천몽의 표정을 살피며 자정경은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킥킥! 틀림없는 질투야. 네게 전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야.’
자신의 행동은 동천몽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동천몽이 대법왕이란 신분이기 때문에 여인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포달랍궁의 율법일 뿐이었다. 남녀사이란 하늘도 막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자정경에게 동천몽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런 동천몽의 관심을 갖기 위해 일부러 더욱 자극적인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였다. 비록 남성이 제 구실을 못하지만 불치는 아니었다. 자신의 능력으로 고쳐줄 자신도 있었다.
척!
열심히 쳐다보는 사내들을 유혹하던 자정경이 동천몽이 멈추자 물었다.
“여긴 기루잖아요.”
입구에 야월루라는 둥그런 간판이 걸려 있었고 한명의 점소이가 다가와 넙죽 허리를 구부렸다.
“어서 옵쇼 손님”
동천몽이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예쁜 여자들 많겠지.”
“물론입니다. 아직 초저녁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고를 수 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그러다 옆에 서 있는 자정경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야월루 기녀들도 예쁘지만 자정경에 비하면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겨…경국지색!’
점소이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때 자정경이 안으로 들어서자 넋을 놓고 있던 점소이가 깜짝 놀라며 앞을 막았다.
“뭐하는 거죠?”
“죄…죄송하기 그지 없군요. 정말 미안합니다. 낭자는 출입 할 수 없습니다. 이곳은 사내 대장부들이 계집을 끼고 인생을 논하는 곳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밖의 여자들은 들어 올 수가 없습니다.”
자정경이 눈을 부라렸다.
“누구 맘대로요. 비켜요 난 들어가야겠어요.”
“제발, 아…안된다니까요.”
“비키지 못해요. 나도 술 먹고 여자 앉히면 될 것 아니에요.”
점소이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여…여자가 여자를 앉힌 다구요. 그럼 설마 계간(鷄姦).”
“닥쳐욧. 감히 어디서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는 거죠?”
점소이가 움찔 했다.
“조금 전 여자를 앉힌다고 했잖아요. 여자가 여자를 앉힌 다는 것은 뻔하잖아요. 그런데 성질은 왜 내고 그래요.”
“아무튼 들어가야겠어요.”
“안됩니다. 저의 기루는 여자가 들어오는 것은 절대 안되며 여자란 오로지 안에서 조달해야 하고 더구나 여자가 들어와 여자를 끼고 마시는 것은 엄숙히 금합니다.”
탁!
그리고 신속히 문을 닫아버렸다.
“이봐요 문 열어요. 문 열지 못해요.”
쾅쾅!
자정경이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시끄럽게 굴자 앞서가던 동천몽이 히죽 웃었다.
“사부님 잘못했어요. 이제 안 그럴께요. 그러니 제발 저도 데려가 주세요.”
동천몽이 말했다.
“무얼 잘못했다는 것이냐?”
“길가 남자들에게 웃음을 짓고 엉덩이를 흔들며 유혹한 것 말에요. 이제 안 그럴테니.”
“밖에서 더 흔들지 그러느냐?”
“제발 잘못했어요. 사부님이 제자를 사랑하나 하지 않나 실험해 보려고 그랬어요. 사랑하면 질투를 하거든요. 그런데 별로 질투하는 것 같지 않아서 더 그랬어요. 앞으로는 절대 그런 짓 하지 않을 테니 용서해주세요.”
동천몽은 속으로 웃었다. 사실 자신의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자정경이 더욱 자극적이고 요염한 행동을 해주길 바랬다. 심한 자극과 행동이 계속되면 결국은 살아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겉으로는 대법왕이라는 신분과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감안해 무심한척 하는 것일 뿐이었다.
동천몽이 점소이를 보며 말했다.
“들여 보내거라.”
점소이가 눈을 크게 떴다.
“말했잖사옵니까. 우리 기루는 절대 여자가 출입할 수 없는 곳이 아니라니까요. 사내대장부들만 다니는 술집에 여자를 데리고 오면 우린 어떻게 장사 합니까? 소인이 들여보내고 싶어도 안에 누님들이 알면 저 죽습니다.”
동천몽이 인상을 썼다.
“내가 알기로 이곳에 여자를 데리고 들어온 손님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네? 언제요? 말도 안 됩니다.”
“나도 소문을 들었는데 소주의 개고기라는 사람은 언젠가 자기 부하인 여자를 데리고 이곳에 들어왔다더구나.”
흠칫!
점소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어떻게 손님께서 소주의 개고기 형님을 아십니까?”
“개고기는 되고 난 안 된다면 이건 엄연한 차별 아니겠느냐?”
“그…그건? 그런데 어떻게 개고기 형님은 아십니까?”
동천몽이 목에 힘을 주었다.
“응, 먼 친척이니라. 어서 문을 열어주거라. 여자가 있어도 이곳 여자를 부르면 될 것 아니냐?”
점소이가 아주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씨.”
덜컹!
대문 잠금쇠를 해체하고 문을 열었다.
“들어오시오.”
자정경이 점원을 보며 환히 웃었다.
“고마워요 아저씨.”
쪽!
점소이가 숨 넘어가는 소릴 했다.
자정경이 자신의 볼에 입을 맞춰 버린 것이다. 점소이는 거의 제정신을 잃었다. 왼손으로 자정경이 입을 맞췄던 뺨을 어루만지며 부르르 떨었다.
척!
자정경은 다시 동천몽의 팔을 끼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척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까지 부른다.
술상이 들어오고 잠시 후 입구에서 만났던 점소이가 다시 들어섰다.
“아는 낭자 있사옵니까?”
동천몽이 고개를 끄덕였다.
“홍화있느냐? 홍화를 좀 데려오너라.”
점소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홍화는 야월루 주인이자 아무 손님이나 받아주지 않는다. 말 그래도 강호 명숙이 아니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소…소님 본루의 규정을 모르십니까? 홍화 아가씨와 술을 마시려면 최소한 강호에 이름 석자가 알려진 분이거나 고관대작이 아니면 불가능 하옵니다.”
“이봐요. 듣자듣자 하니 기분 나쁘군요. 홍화라는 여자가 누군지 모르지만 손님이 부르면 올 일이지 무슨 사람의 신분에 차별을 둔단 말인가요? 그 낭자는 그곳에 무슨 금테 둘렀데요?”
띠요용!
동천몽이 놀란 눈으로 자정경을 쳐다보았다.
자정경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점소이를 향해 말했다.
“당장 데려오지 못하겠어요. 좋게 말할 때 데려와요. 감히 우리 사부님을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당장 데려와요.”
자정경이 버럭 소릴 질렀다.
자정경의 서슬 퍼런 기세에 점소이가 움찔했다. 하지만 점소이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불쾌한 기분 이해는 하지만 본루의 규정은 바꿀 수가 없소이다. 괜히 홍화아가씨를 불렀다가 손님이 별 볼일 없으면 소인은 맞아 죽소이다.”
자정경이 눈을 부라렸다.
“아니 이 사람이 그래도, 포달랍궁의 대법왕님인데도 안된단 말이에욧?”
홱!
동천몽이 놀란 눈으로 자정경을 돌아보았다.
자정경은 점소이를 향해 말했다.
“내 사부님은 대법왕님이세요. 그러니 당장 홍화인이 홍단인지 하는 계집을 데려 오세요.”
점소이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동천몽을 살폈다.
대법왕이라고 하면 옷차림부터 달라야 했는데 속인 복장 그대로였다.
“저…정말로 위대하신 대법왕님이란 말입니까?”
“당장 그 계집 데려와 우리 사부님 기분 좋게 해드리지 못하겠어요? 지금 우리 사부님 기분 별로란 말이에요.”
점소이는 곱게 물러가지 않았다.
“대…대법왕님인데 어떻게 옷차림도 그렇고, 부하들 한 명도 보이지 않은 것입니까? 소인이 알기에 대법왕 주위에는 벌떼처럼 호위무사들이 들끓는다고 들었는데?”
“본녀가 있지 않아요? 본녀 혼자서도 충분히 호위가 가능하기 때문에 단촐하게 다니는거예요. 당장 데려오세요?”
점소이가 다시 한 번 동천몽을 살폈다.
“뭘 봐욧.”
자정경이 버럭 소릴 지르자 점소이가 움찔했다.
“아…알겠사옵니다. 일단 기별을 넣어보겠지만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점소이가 나가자 동천몽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저…정경아 사부의 신분을 밝히면 어찌하느냐? 대법왕이 술집 출입한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그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그러느냐?”
자정경이 별것 아니라는 듯 콧등으로 대답했다.
“그게 중요해요. 감히 저놈이 사부님을 모욕하잖아요. 그나저나 홍화인지 홍단인지 하는 계집은 도대체 어떤 쌍판이기에 손님을 가려 받는데요. 흥! 내가 오늘 기어코 그 계집의 낯짝을 보고 말아야지. 못생기기만 했어봐라. 이 년을 내가 그냥.”
자정경이 표독스럽게 눈을 세웠다.
그런 자정경을 보며 동천몽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자정경이 탁자 위에 올려진 물을 소리가 나도록 마신 후 고개를 돌렸다. 그때 동천몽은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자정경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자신은 동천몽이 왜 이곳을 찾아 들어온지 짐작 하고 있었다. 한 때 이곳 홍화라는 여인과 술 한 잔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언젠가 말했었다. 그러나 유명하지 못한 까닭에 번번이 실패했는데 이번에는 기어코 마주 앉아 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자정경은 정말로 동천몽이 진정으로 홍화라는 여인과 마주 앉아 술을 마시기 위해 이곳을 찾아 든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동천몽이 이곳을 찾아 든 이유는 고통을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그토록 떠나고자 했던, 그리고 더 이상 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형제들을 곧 만나야 한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며 그들의 눈을 피해야 했던 지나간 삶과 자신을 끝까지 죽이려 했던 형제들이 있는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동천몽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들과는 검을 겨눠야 한다. 자정경은 보았다. 아무도 모르게 깊은 밤 영탑전에 들어가 역대 포달랍궁의 대법왕들의 신위 앞에 엎드려 자신이 처한 피의 운명을 어떻게 해쳐나가야 하는지 묻고 지혜를 청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동천몽은 워낙 고통이 클 것 같기에 더욱 중원으로 돌아오지 않으려 했다. 자기 한 사람만 모든 것을 용서하고 참아버리면 된다고 생각 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만 참으면 모든 것은 조용히 끝나고 천상각은 평화를 유지하며 흘러가는 것이었다.
일단 집으로 들어가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위의 상황이 가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비극이 기다리는 집을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가기 위해, 아니 맨정신으로는 들어갈 용기가 없기에 술집을 찾아든 것이라고 생각 했다.
“호호호! 포달랍궁의 대법왕님이시라구요?”
한 명의 여인이 웃으며 들어섰다.
동천몽은 물론 자정경까지도 눈을 부릅떴다. 자신이 알기에 홍화는 최소한 스물 후반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여인은 자정경 또래로 밖에 보이지 않았고 몸에 착 달라 붙은 백의가 그녀의 굴곡진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조물주가 심혈을 기울여 빚었다고 해도 좋을 육감적인 몸매와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매혹적인 목소리에 동천몽과 자정경은 입을 벌렸다.
“정말 대법왕님이시라면 오히려 소녀가 영광이지요.”
홍화가 맞은편에 앉아 죽립을 눌러쓴 동천몽을 빤히 보았다.
홍화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다 알고 있다는 시선이었다.
“한잔 올리겠어요. 대법왕님.”
“그래 콱콱 눌러 따라 보거라.”
홍화가 동천몽의 잔에 술을 채우고 자정경에게도 내 밀었다.
“낭자께서도 한잔 받으시죠.”
자정경이 쭈뼜거렸다.
“전 술 못해요.”
동천몽이 돌아보았다. 덥석 받으면 가벼워 보일까봐 일부러 점잖을 빼는 것이었다.
홍화가 웃으며 말했다.
“왜 이러실까? 요즘 술 한 잔 못하는 낭자들이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빼지 말고 빨리 받아요.”
자정경이 마지 못해 받는 다는 듯 주춤 거리며 잔을 내밀었다.
“그럼 조금만 주세요.”
동천몽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뻔뻔하리만치 자신을 숨기는 자정경의 행동이 너무도 자연스럽기도 했고 우스웠다.
“낭자도 한잔 받아요.”
자정경이 홍화의 잔에 술을 채웠다.
홍화가 잔을 쳐들며 말했다.
“대법왕님의 본루 방문을 기념하며 건배.”
째앵!
세 사람이 잔을 부딪혀 술을 비웠다.
그런데 홍화가 술잔을 비우면서도 두 눈은 동천몽에게 꽂혀 있었다.
팟!
동천몽을 바라보던 홍화의 눈이 빛을 뿌렸다. 이 장사에 뛰어 든지 십년이 넘었다. 그래서 술을 마시는지 안 마시는지 상대가 아무리 시늉을 완벽하게 내어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동천몽의 목젖은 꿈쩍을 하지 않았다.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갔으면 당연히 목젖이 꿈틀거려야 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커어!
동천몽이 트림을 하며 잔을 내렸다.
흠칫!
홍화의 두 눈이 극심하게 흔들렸다. 동천몽의 잔에 있어야 할 술이 없다. 술이 없다는 것은 마셨거나 버렸다는 애기인데 자신이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마시지도 버리지도 않았다.
이따금 술을 마셨다가 손끝이나 신체 한 기관에 모아 강한 내력으로 밖으로 배출하는 무림인들을 몇 번 보았다. 그러나 마시지도 않고 잔 속의 술을 모두 없애 버리는 기괴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한잔 더 주시오. 술맛이 좋구려.”
동천몽은 능청스럽게 잔을 내밀었고 홍화는 충격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술을 따랐다.
“낭자도 한잔 더하세요.”
“좋아요. 주세요.”
자정경이 거침없이 술을 받았다.
콸콸!
자정경의 잔에 술이 채워졌고 그녀는 단숨에 비워 버렸다. 그 모습에 놀란 동천몽이 말했다.
“저…정경아 누가 안 뺏어 먹는다. 천천히 마시거라.”
“왜요? 걱정 되세요. 염려마세요. 사부님. 절대 술주정 하지 않을테니까요. 기루라 그런지 술맛이 예술이에요.”
“그래요.”
홍화는 서슴없이 술을 따라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동천몽에게 머물러 있었다.
“한잔 더 드릴까요?”
“삼 석 잔이라고 했으니.”
홍화가 다시 잔을 따라 주었고 이번에도 동천몽의 목젖은 요지부동이었는데 잔은 텅 비었다.
홍화의 안색이 굳었다. 단 번에 눈앞에 있는 동천몽이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또한 어쩌면 진짜로 대법왕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포달랍궁의 대법왕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내다보고 무에 또한 선인의 경지에 올라 있다고 들었다.
“대법왕님이시면 제 복장을 갖추시지 않고 왜 속의죠?”
홍화의 말투가 달라졌다. 그냥 내 뱉는것 같았지만 말속에는 무척 조심하는 기색이 배어 있었고 그것은 동천몽을 대법왕으로 인정하는 말투였다.
동천몽이 빙긋 웃었다.
“정말 내 말을 믿나?”
“믿어요.”
그러자 자정경이 옆에서 거들었다.
“기녀답게 사람 보는 안목은 있군요. 맞아요. 진짜 우리 사부님 대법왕이셔요.”
자정경이 자신의 손으로 술을 따르려 하자 홍화가 병을 낚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자정경은 홍화의 손을 피해 자신의 손으로 잔을 가득 채웠다.
동천몽은 약간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마시는 술은 여아홍으로 죽엽청 보다 독하다. 그런데 자정경은 죽엽청 마시듯 거뜬히 잔을 비우고 있었다.
아니다 다를까. 자정경의 혀는 금세 꼬부라져가고 있었다.
“이…이름이 뭐라고 했죠? 맞아 홍단이라고 했지. 홍단, 꼭 무슨 어른들 놀이에 나오는 약 같잖아. 한데 낭자 굉장히 이쁘네요. 몇 살이에요?”
홍화가 웃으며 말했다.
“맞춰 보세요.”
“거…건방지군요, 감히 손님에게 맞춰보라니, 손님이 물어보면 공손히 대답해야 하는거 아니에요. 몇 살이에요? 대답해봐요?”
자정경이 함부로 말을 해도 홍화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좋아요. 대법왕님의 제자되신다니까 말씀해 드리죠. 올해 스물 일곱이에요. 기녀치고는 좀 많죠?”
“저…정말로 스물 일곱이에요? 그럼 언니뻘 되잖아. 에이씨이. 재미없어.”
그러더니 그대로 동천몽의 무릎 위로 쓰러졌다.
“저…정경아 정신차려라. 정경아.”
하지만 이미 술이 취한 자정경은 어느새 동천몽의 허벅지를 베고 코를 골고 있었다.
“놔두세요. 독하긴 해도 금방 깰거예요.”
잠시 허벅지를 베고 자는 정경을 바라보던 동천몽이 잔을 내밀었다.
“한 잔 더 따라보거라.”
홍화가 웃으며 말했다.
“술도 드시지 않을 거면서 자꾸 따르면 뭘해요. 대법왕님.”
동천몽이 고개를 덜어 홍화를 빤히 쳐다보았다.
홍화가 웃으며 말했다.
“대법왕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내다보고 무예가 선인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던지 사실이군요. 술을 먹었다가 내기로 태우는 분은 보았지만 술잔 안에 있는 술을 없애는 분은 처음이에요.”
“그래서 날 대법왕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냐?”
홍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천몽이 잔을 내리며 피식 웃었다.
“한때 너와 술 한 잔 해보는 것이 소원일 때가 있었느니라. 나중 이름을 날리면 가장 먼저 너를 품어 봐야겠다고 맹세했지.”
“그 말씀은 대법왕님께서 이곳 출신이란 말씀인가요?”
“태어난 곳이니라.”
“아무튼 대법왕이 되셨으니 소녀를 품을 자격이 충분해요. 소녀 또한 거절하지 않겠어요.”
홍화를 전혀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말했다.
오히려 두 눈이 서서히 타올랐다. 그것은 언제든지 원하면 자신의 몸을 내주겠다는 무언의 허락이었고 자신 또한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 할 수가 없다는 의미였다.
보통 사내라면 눈빛에 녹아졌을 정도로 야릇했고 그녀의 몸에서는 색향이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동천몽의 가슴 또한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슴만 뛸 뿐 가장 중요한 신체는 잠잠했고 소리없이 숨을 삼켰다.
“소녀가 아직까지 처녀라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그러면서 왼 소매를 걷어 올렸다.
동천몽이 깜짝 놀랐다. 팔꿈치와 팔목 중간에 수궁사가 선명히 찍혀 있었다.
동천몽이 미소를 지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있느니라.”
“무슨 뜻이죠? 본 녀가 별 볼일 없다는 건가요?”
“넌 최고다. 단지 그토록 원했던 널 앞에 두고 돌아서야 하는 내 심정이 실망스럽다는 얘기니라.”
홍화는 동천몽의 말뜻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깜빡거렸다.
동천몽이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자정경을 등에 업었다.
“왜요? 정말로 가시려구요?”
홍화가 따라 일어섰다.
“묘하군요. 한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왜 이렇게 서운하죠?”
동천몽이 자정경의 엉덩이에 손가락을 깍지 끼어 받치며 말했다.
“술 값은 천상각에서 받아가거라.”
동천몽은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문을 나갔다.
홍화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술에 취한 자정경을 등에 업고 걸어나가는 동천몽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갑자기 가슴이 뛰며 숨이 막혔다.
수많은 강호의 호걸들과 술을 마시고 절세의 기남자들과 얼굴을 맞대었지만 아직까지 누구도 그녀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미치도록 심장이 뛰고 있었다.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기에 더욱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불현듯 달려가 붙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팔기 위한 목적일 뿐 마음에 아직까지 어느 사내도 우러러 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누구일지라도 자신의 치마폭에 깔아뭉갤 자신이 있었지만 그럴만한 사내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동천몽에게 만큼은 자존심과 명예 모두 헌신짝처럼 버리고서라도 매달리고 싶다는 충격이 온 몸을 흔들었다.
홍화는 한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동천몽은 이미 시야에서 자취를 감췄지만 그녀는 석상이라도 된 듯 서 있었다.
다 큰 여자를 , 그것도 절색의 여인을 등에 업고가자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일부는 질투와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동천몽을 쳐다보았다.
동천몽은 터벅터벅 저자거리를 걸어갔다. 해가 떨어지면서 조금씩 어둠이 밀려왔고 길가에 불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했다. 자정경은 완전히 떨어진 듯 쉴 사이 없이 코를 골았다.
그런데 등에 업혀 있던 자정경이 갑자기 토했다.
“으웩!”
동천몽이 기겁했다. 반은 자신의 등에 묻었고 일부는 지면으로 흘러 떨어졌다. 지독한 악취가 풍겼고 동천몽의 인상이 와락 찡그려졌다.
하지만 자정경은 아무것도 모르고 등에 볼을 대고 잠을 잘 뿐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동천몽은 그냥 걸었다. 집까지 멀지 않은 거리였으므로 집에서 갈아입을 생각이었다.
양손바닥에 잡힌 자정경의 엉덩이는 탱탱했다. 천하쌍미 중 한 명이고 사내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취하고 싶을 만큼 육감적인 여인이었다. 하지만 엉덩이를 주무르고 쓰다듬어보지만 감각은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멈칫!
저자거리를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서던 동천몽이 멈칫했다.
이층목조건물이 나타났고 입구에 형천파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동천몽이 걸음을 세우고 세로로 걸린 현판을 보았다. 현판이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아직까지 필광을 비롯한 부하들이 저가거리를 무대로 활동하는 것 같았다.
“뭐야? 당신.”
등 뒤로부터 투박한 목소리라 들렸다. 보지 않아도 필광의 목소리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내 말 안들려. 남의 문파 앞에서 뭐하냐고?”
동천몽이 돌아섰다.
예상대로 필광이 서 있었다. 죽립을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기 때문에 필광은 동천몽을 알아보지 못했다.
“현판 글씨가 워낙 뛰어나 잠시 쳐다보았소.”
필광이 현판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이래봬도 내 아는 형님이 망월산 개죽사 스님에게 받은 글씨야. 개죽사 주지 스님은 한때 황실에서 글공부도 가르친 유명한 분이지. 보는 안목이 있는걸 보니 글공부 좀 한 형씨 같군.”
“아, 그래요.”
자신이 직접 가서 받아왔었다. 동천몽이 다시 한 번 필광을 본 후 천천히 등을 돌려 걸어갔다.
사라지는 동천몽을 한 참 쳐다보던 필광이 고개를 갸웃했다.
“낯이 익는데, 목소리도 그렇고.”
필광이 안으로 사라졌고 동천몽 또한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땅거미가 짙어오는 관도에는 지나가는 행인 한 명 없었다. 동천몽은 자정경을 업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는 걸음으로 걸었다. 고개를 약간 떨구며 걸었는데 가슴속으로부터 알 수 없는 한숨이 계속 흘러나왔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짰지만 속 시원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답이 없다는 것은 결국 모두를 죽여야 한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죽이는 것 말고는 어떤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결코 살려두지 않으리라 다짐했고 결심했다. 하지만 대법왕이란 운명은 단단한 돌덩이 같았던 결심을 뒤흔들어 버렸다.
그것은 세존의 가르침이었다. 불사심법을 비롯해 자신이 배운 모든 무공은 석가의 가르침에 기초한 무공들이었다. 살상의 무예지만 그 안에는 불기(佛氣)가 담겨 있었고 화후가 높아질수록 몸과 영혼은 불기에 물들어간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도 알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스스로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자정경은 완전히 깊은 잠에 빠진 듯 고개가 기역자로 구부려져 있었다. 그럴 때마다 동천몽은 몸을 움직여 고개를 반드시 잡아 주었다.
털썩!
잠시 길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주위는 어두워졌다. 시끄럽게 울던 풀벌레들이 어둠이 짙어오자 조용해졌다. 서쪽 하늘에 별 하나가 떠올랐다. 아무도 떠오르지 않는 텅 빈 하늘에 홀로 우뚝 서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한 때 저 별처럼 외로웠었다. 부하들을 이끌고 저저거리를 쏘다니다 지쳐 잠들었고 어느 날 뒷간을 가기 위해 얼어났는데 저 별이 있었다. 외로이 새벽하늘을 홀로 밝히고 있는 별을 보면 묘한 동질감을 느꼈었다.
동청몽은 다시 걸었다. 조그만 고개를 넘어서자 좌측으로 잘 포장된 길이 나타났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두 대의 화물마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집안 사정이 아주 위태롭다고 들었는데 해가 떨어졌는데도 화물마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 아직은 그런대로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모퉁이를 돌아가자 장원의 불빛이 보였다. 예전만큼 화려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멈추시오.”
정문으로 다가가자 지키고 있던 위사가 소리쳤다.
척!
동천몽은 걸음을 세웠다. 송악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동천몽을 살폈다. 고개를 한쪽으로 빼어 등 뒤에 업힌 자정경을 보고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여자 아니오?”
“나요.”
송악이 멈칫했다.
“나나리?”
“날 모르겠소. 아저씨.”
그러면서 왼손가락으로 죽립의 챙을 밀어 올렸다. 그러자 동천몽의 얼굴이 드러났다.
흠칫!
송악이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몇 번 눈을 깜박거리고 다시 쳐다보았다.
“마…맙소사!”
송악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마…막내 공자님 아니시옵니까?”
“뭣이 막내 공자님.”
다른 위사가 달려오더니 동천몽을 바라보았다.
부르르!
“오 부처님!”
그 역시 송악 옆에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일어들 나시오.”
두 사람이 주춤 거리며 일어서더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도저히 눈앞에 벌어진 현실을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왜 들 그렇게 쳐다보시오?”
“너…너무 기쁘고, 놀랍습니다. 모두들 죽었다고 했는데.”
“마…맞군요. 아무리 봐도 막내 도련님이 틀림 없군요. 어디갔다 이제오십니까요.”
두 사람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네 형제 중 가장 아랫사람들에게 자상했던 동천몽이었다. 망나니처럼 살았을 때도 자신들에게 만큼은 누구보다도 따뜻했다. 근무 중 졸아도 못본 체 했고 심지어 훔쳐 나온 돈 중 일부를 나눠주기도 했다.
“대룡은 잘 크오?”
송악에게 물었다. 송악에게 한 명의 아들이 있었다. 지금 열 한 살인데 유난히 동천몽이 귀여워 해주었고 한번 데리고 온 적이 있었는데 하루 종일 놀아주었고 저자거리로 데리고 나가 온갖 선물을 안겨 주었다.
“덕분에 잘 큽니다.”
“요즘 뭘 가르치오?”
송악은 대룡에게 무예를 가르치겠다고 했었다.
“대관심법을 연마하고 있습니다.”
“대관심법이라면 혹시 가흥에 있는 대관무장과는?”
“맞습니다. 그곳에 입문했습니다. 상당히 자질이 뛰어나다고 칭찬이 자자합니다.”
자식 얘기가 나오자 송악의 표정이 밝아졌다.
“대관무장의 수업료가 아주 비쌀텐데.”
“한 달에 은화 한 냥 입니다.”
“송 아저씩 녹봉이 한 달에 은화 두냥 아니오? 그럼 대룡이 가르치는데 녹봉의 절반이 들어간단 말이오?”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북경이나 장안에 가면 한 달에 은자 열 냥씩 하는 명문무관이 수두룩하답니다. 이런 곳에서 아무리 잘 가르친다고 해도 그곳 아이들과는 차이가 나지요. 요즘은 은자가 강호고수를 만드는 열쇠이옵니다. 아무리 자질이 있어도 가난하면 결코 절정고수가 될 수 없지요.”
문득 눈앞으로 산적 부시가 떠올랐다. 아들이 무당파에 들어갔다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식 농사요. 할 수 있는 데까지 가르치시오. 정히 어려우면 내게 말을 하고, 크게는 몰라도 도와 줄테니.”
“가…감사하옵니다.”
송악의 허리가 휘어졌다.
역시 다른 형제들과는 달랐다. 그래서 천상각의 모든 식솔들로부터 제일 존경을 받는지도 모른다. 물론 형제들에게는 가장 미움을 받지만.
“안에 기별을.”
“아니오. 내버려 두시오. 그냥 걸어 들어가겠소.”
자정경을 업고 들어가는 동천몽을 송악은 감격과 기쁨의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꿈만 같군. 난 죽은줄 알았는데.”
“모두가 죽었다고 했지. 공자님들도 우리가 물어보면 시체로 어느 야산에 있을 것이라고 했잖는가?”
“맞아. 그랬어. 그런데 저렇게 살아 돌아오다니. 그런데 등에 업힌 여자는 누구지. 무척 미인이던데.”
동료가 씨익 웃었다.
“그걸 꼭 물어야겠는가? 딱 보면 척이지.”
두 사람의 입가에 부러움과 야릇함이 같이 차올랐다.
“그나저나 가뜩이나 사분오열된 집인데 원수덩이로 여기는 막내공자님이 오셨으니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겠군.”
“그렇겠지. 제발 별일 없어야 할 텐데.”
두 사람의 얼굴에 염려가 떠올랐다. 둘 모두 동천몽을 염려하는 눈빛이었다.
녹풍원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불도 켜지 않은 체 동오룡은 서재의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이 능씨를 납치해 갔을 것이다.
천상각과 적대관계라면 무림맹이다. 하나 이내 고개를 내 저었다. 상관량이 교활하고 야망이 크긴 해도 한낱 여자를 납치해 어떤 수단으로 이용할 만큼 야비한 인간은 아니다.
팟!
능씨를 납치해 간 납치범을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 녹풍원 앞마당을 들어서고 있었다. 흑의인영은 느릿하게 다가왔는데 거리가 가까워오면서 머리에 죽립을 썼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척!
흑의인영은 녹풍원을 가만 올려다보았다. 마치 회상에 잠기는 듯 한숨소리까지 들린다. 이곳 저 곳 꼼꼼하게 살펴보던 흑영이 천천히 녹풍원 안으로 들어서면서 시야에서 사라졌다.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더니 문 앞에서 멈췄다. 동오룡은 문을 쳐다보았다. 한동안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아마 문 앞에서 들어올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꿀꺽!
동오룡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리고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며 손바닥에 식은땀이 흘렸다.
딸칵!
문이 천천히 안으로 열렸다.
한 명의 건장한 체구의 흑의인영이 입구에 버티고 섰다. 가까운 거리였지만 죽립으로 인해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 다만 무척 당당하여 자신도 모르게 위축이 되었다.
“누…누구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그 만큼 흑의인영에게서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기세가 흘러나왔다.
흑의인영은 아무런 대꾸를 않고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그러더니 무척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로군요.”
동오룡의 눈이 커졌다. 부모는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자식을 알아본다. 어두워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에서 이미 잃어버린 자식을 기억했다.
“이것도 아직 있네.”
서재 한쪽 책상 위에 올려 진 화병이었다. 구리로 만들어진 화병인데 부친의 돈을 훔쳐 도망치다 붙잡혀 구리 화병으로 한 대 맞았다.
스윽!
아직도 자신의 머리에 맞아 한쪽이 찌그러진 채 있었다. 구리로 만든 화벽에 정통으로 맞고서도 깨어지지 않은 자신의 머리가 그토록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더욱 자신감을 갖고 싸울 때는 일두사를 썼다.
스으으!
자리에 앉아있던 동오룡이 일어났다.
“모…몽이란 말이냐?”
“후훗!”
화병을 놓고 동천몽이 메마른 웃음을 지었다.
“저…정녕.”
“어머니는요?”
동오룡의 몸이 얼어 붙었다.
동천몽의 죽립아래 눈이 빛을 뿌렸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이었다.
“어머니 어디계시죠?”
“어머니는 없다. 어느 놈이 납치해갔다.
팟!
죽립 아래서 섬광이 터졌다. 동오룡의 눈에 보기에는 그것은 분명 번갯불이었다.
동오룡은 동천몽이 달라졌음을 알았다. 능씨에 의하면 포달랍궁의 승복을 입은 사람들에게 끌려갔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쪽에서 무공을 배워 온 것이리라.
콰앙!
서재 좌측으로 안방이 있었는데 동천몽의 신형이 어느새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방안은 어두웠다.
쉭!
동천몽이 오른손을 뻗었다. 그러자 검지 끝에서 한줄기 불빛이 쏘아나가 탁자 위 촛불에 옮겨 붙었다. 기상천외한 기예에 동오룡의 눈은 더욱 커졌다.
동천몽은 환해진 방을 쳐다보았다.
어머니 냄새가 난다. 남들은 천하제일상가의 여주인이라고 하면 호화의 극치를 이루며 사는 줄 안다. 하지만 자신의 눈에 보이는 어머니의 생활은 검소와 절약이었다.
스윽!
벽에 걸린 어머니 적삼을 들었다. 앞고름과 옆구리에 바느질 자국이 선명했다. 어머니의 냄새가 나고 금방이라도 웃으며 내 아들왔느냐 하며 끌어안을 것 같았다.
적삼을 걸어 놓고 어머니가 즐겨 보시던 책을 한권 뽑았다.
어머니는 책을 자주 펼쳤다. 책을 볼 때마다 가장 즐겁다 하시며 자신에게도 책을 가까이 할 것을 권했지만 관심도 없었다. 그땐 오로지 형들 틈에 살아나기 위해 모든 신경을 그쪽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책 따위가 눈에 들어올리 없었다.
그때 동오룡이 옆에서 능씨가 납치 당할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었다. 동오룡의 설명을 들은 동천몽의 눈이 빛을 뿌렸다. 동천비는 야망이 크다. 하지만 여자를 상대로 뭘 꾸밀 만큼 졸렬하지는 않다. 동천혁 동천완 또한 유난히 어머니를 미워하지만 그들에게서도 가능성은 적었다. 동오룡의 말처럼 무림맹의 짓일 가능성은 더욱 낮았다.
팟!
한 순간 동천몽의 눈에서 섬광이 피어났다.
짚이는 인물이 있었다. 거의 확신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는 충분히 이런 일을 하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삶에는 과잉충성이라는 것이 있다. 그는 남달리 지나치게 충성을 했는데 이따금 그게 문제가 되어 과거 동오룡으로부터 꾸중을 듣곤 했다. 머리도 뛰어나고 판단력도 좋지만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단점을 갖고 있었다.
‘그놈이다!’
동천몽의 어금니가 조용히 물렸다.
“덕배!”
휘이이!
느닷없이 방안으로 한줄기 바람이 불어들어왔다. 그리고 바람은 회오리로 변했고 이어 사람이 되었다.
맨발의 덕배를 보고 동오룡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장 사불각주에게 연락하여 한 사람을 찾으라고 해라. 이름은 여추량이다.”
“알겠사옵니다. 대법왕이시여.”
“찾으면 절대 손 대지 말고 지키고만 있으라고 전하도록. 내가 직접 가서 손을 쓸테니까.”
“아미타불!”
덕배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동오룡이 눈을 빛냈다.
“여총관이 납치를 했단 말이냐?”
동천몽이 동오룡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평생을 곁에 두고도 그 자의 됨됨이를 그렇게도 모르십니까?”
동오룡이 흠칫했다.
마치 쇠망치로 한 대 맞는 기분이었다.
‘평생을 곁에 두고서도 그자의 됨됨이를 그렇게도 모르십니까?’
동천몽이 뱉었던 말을 다시 뇌까려 보았다. 그럼 자신은 몰랐는데 동천몽은 알고 있었다는 말 아닌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 그가 여추량에 대해 그토록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단 말인가. 오로지 술먹고 놀기에 바쁜 동천몽이었다.
“트…틀림없느냐?”
“그자는 여우요. 강자에게만 머리를 숙이는 저급한 여우입니다. 내가 아버지였다면 진작 잘랐습니다.”
동오룡의 안색이 굳어졌다. 자신은 여추량 만한 충신도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에게 막중한 임무를 자주 부여했다. 그런데 여추량이 능씨를 납치해가더니 믿을 수가 없었다. 워낙 믿었던 탓일까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자…자네가. 자네가!’
동오룡은 거의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그때였다. 문이 급하게 열리더니 한 사내가 불쑥 들어섰다. 사내의 얼굴은 거의 사색이 되었다.
“가…각주님 큰일 났사옵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시끄럽느냐?”
“무…무림맹에서.”
동오룡의 눈이 커졌다.
“무림맹이라니 자세히 말해 보거라.”
“무림맹 무사들이 지금 정문 앞에 와 있습니다.”
동오룡의 안색이 굳어졌다.
무림맹의 무사들이 온 것은 뻔했다. 천상각을 완전히 접수 하겠다는 의지였다. 필시 동천비에 의해 자신들이 차단했던 육로와 수로가 뚫리자 아예 모든 것의 중심인 천상각을 장악해버리겠다는 계산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뱃길로 육로가 아무리 크게 뚫려 있어도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만다.
“만나 보십시오.”
동천비가 말했다.
동오룡이 동천비를 쳐다보았다. 마치 방법이 없겠느냐는 도움 요청이었다.
“손님이 왔으니 일단 영접부터 하는게 순서 아니겠습니까?”
동오룡이 동천비를 쳐다보았다.
남의 일처럼 말하는 동천몽이 조금은 섭섭한 눈치였다. 동오룡이 밖으로 나갔고 뒤를 따라 동천비도 나섰다.
정문에 도착하자 일백여명의 무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석상처럼 꼿꼿하게 서 있었는데 그들에게서 뿜어나온 기세가 하늘을 짓누를 듯 했다.
‘절정의 고수들이구나.’
동천몽은 무림맹에서 솜씨 좋은 자들로 선별하여 보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생은 위모백이라 하오.”
동천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미 무림맹의 중요 인물들에 대한 분석과 조사는 마쳤다.
위모백은 종남파가 낳은 최고의 고수다. 올해 마흔 둘로 현 장문인 장패무검의 뒤를 이어 천하삼십육검을 완성시킨 검의 귀재이다. 무림맹에서는 청룡대를 이끌고 있다. 천룡대는 구파일방과 사대세가 및 오십대 명문에서 선발한 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어인일이시오.”
위모백이 큰 소리로 말했다.
“당분간 천상각을 우리가 접수하겠소. 다시 말하지만 당분간임을 분명히 말하오.”
동오룡의 눈이 발끈 일어섰다. 말이 당분간이지 한번 접수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모든 거래를 중단시키고 문을 폐쇄 할 것이다. 그렇게 한 달 만 가면 모든 중상들은 다른 곳으로 거래 선을 바꿀 것이고 천상각은 고사할 수 밖에 없었다.
‘병신 같은 놈!’
처음에는 동천비가 하는 일이 못마땅했지만 이토록 궁지에 몰리다보니 차라리 그가 하는 일이 잘됐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동천비는 항상 반걸음 늦었다. 상관량이 한 발 앞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건 곧 두뇌 싸움에서 동천비가 상관량에게 미치지 못 한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