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32화 (32/71)

제5장 흑(黑)과 상(商)의 결연

관제묘는 금방이라도 폭삭 주저앉을 듯 낡아있었다. 지붕은 잡초로 뒤덮여 있었고 입구의 문짝도 떨어져 나간듯 보이지 않았다. 바람에 사람 키보다 훨씬 웃자란 잡초들이 흐느적거렸고 십여마리의 새들이 하늘로 날아 올랐다.

잡초를 헤치며 관제묘 입구에 동천비가 나타났다. 문이 사라진 관제묘를 깊숙한 시선으로 쳐다보던 동천비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관제묘 안은 대 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동천비가 주위를 스윽 한 번 훑더니 입을 열었다.

“조금 늦었소.”

“신수가 더욱 훤해지는 걸 보니 묵곤혈참기가 거의 완성 직전에 이른 듯 싶구려.”

관제묘 안쪽 제단 앞에 백의를 걸친 백쾌섬이 우뚝 서 있었다.

동천비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시인을 의미했으므로 백쾌섬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자신도 묵곤혈참기의 위력에 대해서는 말로만 들었다. 십일성 까지는 꺾을 무공이 있지만 십이성에 오르면 거의 전무하다고 했다. 예의상 치켜 올려 주긴 했지만 결코 십이성은 아닐 것이다. 십일성과 십이성, 비록 일성의 차이지만 위력에서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자신의 말에 웃음으로 일관한 것은 필시 자신을 혼란에 빠뜨리게 할 의도일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 협상을 자신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이끌어갈 계산이 뻔했다.

“몸은 좀 어떻소?”

무림맹에서 쫓겨 나 올 때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는데 그것을 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말 속에는 건강을 염려한 진정성 보다는 정통무인이 아닌 동천비의 기세를 꺾을 요량이다. 한 마디로 넌 아직 멀었다는 뜻인 것이다.

동천비가 가볍게 웃었다.

“겨우 살아왔소. 하마터면 장가도 가보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될 뻔 했소이다.”

그러면서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친다는 듯 길게 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핫핫! 그래요. 놀라긴 놀란 모양이구려.”

백쾌섬이 웃었지만 눈은 더욱 가늘어졌다. 동천비의 반응이 전혀 예상 밖이었다. 당대제일 부호의 아들로 태어났고 남에게 싫은 소리를 듣지 않고 성장한 동천비 같은 부류는 자신의 인격이나 권위가 조금이라도 침탈되는 말에 참지를 못한다.

그런데 흥분하기는 커녕 오히려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순순히 인정한다.

“운이 좋았소.”

동천비가 담담하게 웃었다.

어떤 의도도 읽어 낼 수 없는 평범한 미소였다. 백쾌섬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졌다. 강호경험에 관해서는 자신이야 말로 백전 노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동천몽의 지금 태도는 오랫동안 강호에서 나뒹굴지 않고서는 보여줄 수 없는 침착함과 여유였다.

그리고 한 순간 백쾌섬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장사꾼의 신분으로 태어나서 그렇지 만약 무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면 천하를 휘어잡을 그릇이었다.

“말씀을 해보시오.”

백쾌섬이 먼저 정색하고 물었다.

동천비가 백쾌섬을 빤히 바라보았다. 백쾌섬의 눈살이 찌푸려졌는데 묵곤혈참기 때문인가 동천비의 두 눈이 여전히 시커멓다. 그건 은연중의 시위였고 압박이었다.

“반씩 나눕시다.”

“반씩 나누자면?”

“내가 목와북천이 패업을 이루는데 자금을 대겠소. 그 대신.”

“잠깐.”

백쾌섬이 동천비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 본천이 패업을 이루는데 자금을 대겠다고 했소?”

“그렇소.”

“내가 알기에 천상각의 자금도 예전 말이라더그려. 다시 말 해 이미 무림맹과 다른 두 동생이 모두 빼돌려 빈 껍데기 밖에 없다고 들었소만?”

“훗훗! 맞는 말이오. 지금 천상각은 빈 껍데기오. 나 또한 내 앞으로 된 재산은 거의 처분했소. 그래서 가진 것이라고는 별로 없소.”

“그런데 어떻게 자금을 대겠다는 것이오?”

“당신이 과연 본가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오? 장사꾼의 속마음은 본인도 모르오. 강호 뿐 만이 아니라 장사꾼도 가진 것의 전부를 세상밖에 드러내 보이지 않소. 만약을 대비해 삼 푼의 힘을 숨기는 강호처럼 우리 또한 최악의 수를 대비해 생존의 길을 항상 준비해 놓소이다.”

“어딘가 비장의 패감을 숨겨 놓았다는 것이오?”

“얘길 마저 합시다. 목와북천이 무림맹을 밀어 내고 천하를 거머쥐었을 때 북육성을 내게 넘기시오. 무림은 물론 시장의 상권까지 모두 말이오.”

흠칫!

백쾌섬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흔히 중원은 장강을 중심으로 남칠성과 북육성으로 구별된다. 즉 중 원의 절반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렵지 않소. 당연히 함께 손을 잡는다면 이익은 정확히 반반씩 나눠야지요.”

“문제는 아까 말했던 자금이라는 것이군.”

“섭섭하게 듣지는 마시오. 모든 것은 정확해야 하는 것 아니겠소.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믿지 않겠소.”

동천비가 실소를 지었다.

“보여 달라? 좋소. 보여주지 못할 것도 없소.”

홱!

화악!

갑자기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고 역시 누구도 앞섰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동시에 몸을 날려 관제묘 밖으로 날아갔다.

슈아악!

거의 같은 속도로 날아간 두 사람은 관제묘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무려 이십 여장을 날아가는데도 한 번도 땅에 내려서지 않을 만큼 두 사람의 신법은 상승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두 사람은 지금 기척을 느끼고 움직인 것이었다. 두 사람의 회합은 측근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더구나 그 측근들이라는 사람들까지도 무왕산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관제묘에서 만난다는 건 둘 밖에 모른다. 그런데 기척이 있다는 것은 범상치 않은 일이었으므로 동시에 몸을 날린 것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백쾌섬의 눈은 심하게 흔들거렸다.

동천몽의 신법이 자신에게 조금도 뒤처지지 않고 있었다.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선택받았고 최상의 조건에서 흑도의 미래를 짊어질 기재로 만들어졌다.

그런 반명 동천비가 무공을 접한 것은 일 년 남짓 밖에 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물론 어려서 몇몇 무림고수들에게 금전을 지불하고 기초를 배웠다고는 하지만 자신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은 부인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전력을 다한 자신의 신법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도대체 묵곤혈참기라는 마공이 무엇이기에!’

꿀꺽!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마공의 위력과 폐해는 자신도 알고 있지만 한 순간에 자신과 동수를 이룰 만큼 강해져버린 현실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기로군!”

두 사내가 도주하고 있었다.

촥!

두 사내는 좌우로 나눠졌다. 추적을 뿌리칠 의도인듯 했는데 동천비와 백쾌섬 역시 나눠져 쫓았다.

“흐흐흐!”

동천비의 입술이 가소롭다는 듯 비틀렸다. 도망자의 신법도 예사롭지 않았다. 십리쯤 추적하여 동천비는 사내의 앞으로 날아 내릴 수 있었다.

“학---하학!”

사내는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고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 만큼 필사적으로 도주했음을 반증했는데 동천비가 물었다.

“정체를 밝혀라. 왜 남의 얘기를 엿들었느냐?”

쉭!

사내는 대답대신 차고 있던 검을 뽑아 공격을 해왔다.

동천비가 가소롭다는 듯 오른 손을 뻗었다. 순간 동천비의 오른손이 완전히 먹물로 변했다.

쾅!

동천몽의 손이 검과 부딪혔고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검이 부러졌다.

사내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검은 단순한 청강검이 아니라 이름난 보검이었다. 그런데 너무 간단히, 그것도 맨손에 부딪혀 부러지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누구냐? 무림맹에서 왔느냐? 아니면.”

사내는 부러진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결코 순순히 당하지는 않겠다는 독기가 묻어난 행동이었다.

동천비의 눈에 살기가 떠올랐다.

탁!

찔러오는 검 날을 거머쥐었다. 그런데 사내가 억 하며 검에서 손을 떼어 버렸다. 검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묵곤혈참기의 기운에 쇠가 녹아 흐르고 있었다.

뚝…두둑!

물이 떨어지듯 녹아 땅으로 떨어지는 쇳물을 보며 사내의 안색은 공포에 젖어들었다.

자신의 검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동천비가 경악한 사내를 보며 웃었다. 그러더니 오른손을 다시 뻗었다

콰아!

사내는 본능적으로 역시 우장을 뻗어 맞받았다.

뻐억!

“컥!”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벌떡 일어나려는데 어느새 동천몽의 오른발이 가슴위에 올려 져 있었다. 육중한 바위에 눌린 듯 옴짝 달 싹을 할 수가 없었다.

“누구 지시를 받았느냐?”

“나…날 죽이시오.”

“물론 죽일 거야. 그 전에 누가 시켰는지 말을 해.”

사내는 입을 다물고 눈을 감아 버렸다. 죽어도 말을 할 수 없다는 행동이었다.

그런 사내를 보며 동천비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흐흐흐!”

동천비가 주위를 휘둘러보더니 머리통만한 돌을 발견하고 오른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 무거운 돌이 가벼운 솜뭉치 마냥 가볍게 이끌려왔다.

‘가…가공할 허공섭물!’

강하게 발바닥이 거궐혈을 누르고 있어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입을 열 마음이 없느냐?”

사내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걸 보며 동천비의 입술이 뒤틀리더니 들고 있던 돌로 사내의 오른손을 찍어버렸다.

퍽!

“끄아악!”

슥!

돌은 다시 허공섭물에 의해 동천비의 손에 들렸다.

사내는 고통에 온 몸을 떨었다.

“지금도 입을 열기 싫나?”

“주…죽여라.”

이번에는 왼손을 찍었다.

왼손이 짓이겨지며 피가 범벅이 되었고 사내가 벼락을 맞은 듯 온 몸을 들썩였다. 돌은 다시 올라왔고 이번에는 두 다리를 찍었다. 그래도 입을 열지 않자 얼굴을 향해 내 던졌다.

뻐어억!

얼굴이 짓이겨지며 처절한 비명을 흘렸고 동천비는 계속 사내의 얼굴을 돌로 찍었다. 사내의 얼굴은 고깃덩이처럼 짓이겨지며 만신창이가 되었다.

“초…총관님의 지시를 받아.”

“나도 그 정도는 짐작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내 움직임을 어떻게 상관량이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내부에서도 모르는 사실을 말이다.”

“그…그것은.”

슥!

다시 돌맹이를 쳐들어올리자 사내가 악을 썼다.

“월광.”

“….”

“암호명 월광이라고 부르는 사내가 모든 정보를 준다고 했사옵니다.”

자신의 행적을 상관량에게 보고할 정도면 아주 가까운 측근이다. 동천비의 눈이 더욱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어쩌면 무림맹 공격이 누설된 것도 월광이란 자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돌아오는 집이다. 동천비가 나타나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무사들이 공포에 젖은 표정을 지으며 큰 소리로 예를 취했다.

“대공자님을 뵈옵나이다.”

동천비를 그들의 인사도 받지 않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녹풍원으로 향한 동천비는 부친의 처소로 곧장 들어갔다. 방안에 있어야 할 부친은 보이지 않았다.

동천비가 잠시 이마를 찡그리더니 부친을 찾으러 나갔다.

멈칫!

부친이 연못가에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동천비가 천천히 다가가 나란히 섰다. 부친은 아무말없이 출렁이는 연못을 바라보았다.

“하는 일은 잘되느냐?”

동천비가 부친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실수로 오늘날 천상각이 위기에 빠졌다고 미워하던 부친의 입에서 오랜만에 들어보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후후!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는군요.”

노골적인 조롱이었다.

하지만 동오룡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품에 손을 집어 넣더니 한통의 봉서를 꺼냈다.

“받거라.”

“이게 뭡니까?”

“그걸 가지러 오지 않았느냐?”

동천비가 동오룡을 한 번 쳐다보더니 부욱 찢어 봉서에 든 내용물을 꺼내 펼쳤다. 한 참 내용을 살피던 동천비의 이마가 찌푸려지더니 동오룡을 돌아보았다.

“설마 이게 전부라는 것은 아니겠지요?”

“물론이다. 하나 나머지는 천혁과 천화가 이미 가져갔다. 그래도 네가 장자인 만큼 가장 큰 덩어리를 준 것이다. 귀중히 쓰거라. 그리고 부디 너의 꿈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이건 애비의 진심이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므로 동천비의 꿈이 이뤄지길 기대했다. 더 이상 어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기댈 곳이라고는 이제 동천비 말고는 없었다.

“제갈팽.”

제걀팽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당장 두 놈을 잡아라.”

“존명.”

제갈팽이 사라지고 동오룡이 경악한 표정으로 동천비를 보았다.

“지금 무슨 짓이냐? 동생들것을 빼앗으려느냐?”

“아닙니다. 죽이려는 것입니다.”

화아악!

동오룡의 눈이 기절할 듯 커졌다.

“이젠 누구든, 설혹 핏줄이라도 소자의 앞길에 방해가 되면 가만 안둘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기쁜 소식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막혔던 황하와 장강의 수로는 이삼 일 내고 곧 뚫릴 것입니다.”

“어…어떻게.”

“소자가 이미 손을 써 놓았으니 염려 마십시오. 다시 말하지만 앞으로 천상각은 소자가 책임집니다. 그러니 절대 두려워 하거나 근심하지 마십시오.”

동천비가 날아갔다.

동오룡의 이마가 잔뜩 찌푸려졌는데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오룡은 무림맹 기습에 실패하고 지금 쫓기고 있다. 무림맹에서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데 어떻게 무림맹이 장악하고 있는 그 모든 수로와 관도를 다시 회복 하겠다는 것인가.

금우산장으로 돌아온 동천비는 곧장 여추량을 불렀다. 여추량은 동천비의 표정이 밝지 않음을 보고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음을 간파했다.

“본가에 가셨다고 들었는데 일이 잘못 되기라도?”

“아니오. 아버님도 이제 천상각의 차기 각주로 날 완전히 인정하고 모든 것을 맡기더구려. 물론 내게 주었던 것이 전부라고 믿지는 않지만 어쨌든 말이오.”

여추량의 눈이 커졌다.

“축하드리옵니다. 각주님!

여추량이 각주라고 부르자 동천비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갑자기 각주라는 호칭을 받자 기분이 묘했다. 혼잣말로 각주라는 말을 두세 번 중얼거리던 동천비가 고개를 쳐들었다.

“이삼 일 있으면 뱃길과 관도가 우리의 손에 뚫려 모든 물자 수송이 순조로울 것이오. 문제는 모피요.”

여추량의 표정이 굳어졌다. 흑수당에 갔다가 살아 돌아 온 것만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만약 자추동이 자신을 죽이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식은 죽 먹기였다.

“흑수당의 움직임은 지금 어떻소?”

“산장이 잠정 폐쇄되었사옵니다. 대설산에서 생산되는 모피는 흑수당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원국으로 들어가옵니다.”

“생산자가 직접 원국상가와 거래를 한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생산자가 모피를 원국의 상가까지 직접 운송합니다. 그러면 흑수당에서는 운송경비와 모피 값을 결재하지요.”

“직접 물건이 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서류로만 거래를 한다는 것이오?”

“그렇게 되면 흑수당으로 돌아오는 이익이 아무래도 적을 것 아니오? 장사란 여러 단계를 거치며 이윤을 남기는 것인데 아무리 흑수당이 가격을 지불한다고 해도 생산자가 직접 원국으로 넘겨버리면 여러 단계가 줄어드니 말이오.”

“물론입니다. 자신들은 손 하나대지 않고 장사를 하므로 아무래도 이윤은 전보다 못하죠. 더구나 생산자가 원국까지 운송하는 경비도 흑수당에서 책임을 지니까요.”

“결국 우릴 겨냥하고 작은 이윤을 각오한 것인데 한 가지 이상하구려. 백쾌섬의 말에 의하면 천몽은 죽었소. 그런데 흑수당이 끝까지 이런식으로까지 해서 우리의 숨통을 조인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지 않소. 생각해 보시오. 든든한 배경이 되었던 천몽이놈이 죽었는데 그들이 끝까지 우리에게 저항할 배짱이 있느냐는 것이오.”

“저도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 하고 있었습니다만 포달랍궁이 후광이 되어 준다면, 더구나 죽은 대법왕의 복수차원에서 더욱 이를 갈고 있다면 충분한 명분이 됩니다.”

동천비가 숨을 씹듯 뱉었다.

“으음! 포달랍궁.”

포달랍궁은 크다. 지난 몇 개월 철저히 조사를 한 결과 구파일방의 우두머리인 소림의 힘을 앞선다는 결과를 내렸다. 백쾌섬 또한 포달랍궁을 직접 들어가 살핀 결과 힘의 깊이를 측정할 수 없다고 했다. 워낙 알려지지 않은 기인이사들이 많고 그 대표적인 예가 새로 천룡구십구불의 수뇌가 된 덕배선사였다. 그의 존재는 철저히 가려져 있었는데 밀종대수인이라는 잊혀진 살기로 서장을 경동시켰고 뢰음사 괴멸에 선봉에 선 것이다. 그런 기인들이 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사실 백쾌섬이 포달랍궁 공격을 포기한 것을 놓고 흑도 수뇌들과 천하는 아롱진 때문으로 알고 있지만 속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진법 때문에 포기한 것도 있지만 만에 하나 포달랍궁의 전력이 자신이 직접 들어가서 보았던 것보다 월등할 경우 자칫 무림맹과 싸워보기도 전에 흑도는 치명타를 입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백쾌섬은 사기차원에서 부하들에게는 아롱진 때문에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말을 했던 것이다.

“쳐 죽일!”

동천비의 인상이 더욱 우그러졌다. 운송로를 확보해도 천상각 거래량의 육 할을 차지하는 모피가 빠진 이상 수입은 예전만 못하다. 갈수록 자금은 밑 깨진 독에 물붓들 들어가는데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자금이란 제때에 투입해야 효과가 크다. 더구나 천하패업이 걸린 일에는 넉넉한 자금확보가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동오룡을 찾아갔고 숨겨놓은 돈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런데 동천혁과 동천화가 일부를 가져갔다고 하자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단 한푼의 돈이 필요할 때였다.

황하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주 많았다. 그중 수백 년 전부터 황하의 터줏대감을 자청하며 살라온 열두 곳의 집단이 있으니 이름 하여 황하수로맹이라고 한다.

자신들의 권역을 지나가는 배들과 어로행위를 하는 어부들로부터 일정한 통행세와 이용료를 받는데 만약 그들이 뱃길을 차단하면 황하를 이용하거나 생계의 터전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사흘 전부터 황하 곳곳에 살기가 감돌았다. 평소에는 지나가는 배와 어부들을 상대로 이용료를 받기 위한 순시선 말고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황하수로맹의 수많은 배들이 자신들의 권역에 진을 치고 모든 어로행위와 지나가는 화물선의 통행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멋모르고 지나가던 배는 모조리 실고 가는 화물을 탈취 당했고 사람들은 끌려갔다.

백기룡은 갑판에 올라 앉아 여아홍을 마시고 있었다. 여야홍은 백기룡이 가장 좋아하는 술로 하루라도 여아홍을 마시지 않으면 혀바닥에 곰팡이가 핀다고 할 만큼 즐겼다.

“좋다. 정말 좋다.”

오늘따라 파도도 잠잠하고 하늘에서 내리 쬐는 햇살은 따뜻하기 그지 없었다. 백기룡은 황하의 열두 집단 중 한 곳인 초룡각의 각주였다.

“이봐 부각주.”

갑판 끝에서 강심을 살피고 있던 부각주 맹숭철을 불렀다.

“일로와, 한잔해.”

“아니옵니다. 소인은 생각 없사옵니다.”

맹숭철이 정중히 거절을 했다.

저렇게 온화한 인상으로 한잔하라고 하지만 언제 성격이 돌변할지 모른다. 백기룡은 술 중독이었다. 그래서 한잔만 들어가면 완전히 개가

된다. 멋모르고 몇 번 그와 술을 마시다 발작하는 바람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얻어맞았다. 이후 아무리 그가 한잔 하라고 권해도 절대 같이 술을 하지 않는다.

벌써 여아홍 세병을 비웠으니 오늘 같은 날 맞상대 했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다.

“한잔 하라니까? 내 말이 말 같지 않느냐?”

백기룡이 버럭 소릴 질렀다.

맹숭철은 가벼운 미소를 애써 지으며 거절했다.

“아침부터 배가 아파서 그렇사옵니다. 마음 같아서는 마시고 싶지만 한 번만 이해해 주소서.”

백기룡의 눈이 커졌다.

“배가 아프다고? 잘됐군. 여아홍은 배 아픈데 딱이야. 어서와 한 잔 마셔.”

백기룡이 정색하고 쳐다본다.

이쯤 되면 거절할 수가 없다. 만약 거절했다가는 상관의 성의를 무시해도 유분수지하며 인정사정 없이 밟을 것이다. 아차 했지만 이미 늦었다. 자신도 모르게 둘러댄다는 것이 하필 배가 아프다고 한 것이다. 독한 술은 배가 아픈데 적지않게 효험이 있었다. 제대로 걸려 들고 말았다.

앞전에 맞아 어금니가 아직도 흔들거리는데 오늘은 어떤 이빨이 흔들거릴까 염려하며 가려는데 한쪽에서 부하의 외침이 들려왔다.

“배다!”

오십년을 살아오면서 지금처럼 기뻐보기는 처음이었다. 부하의 외침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구원의 소리였고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내려온 동아줄이었다.

“어디냐?”

맹숭철은 부하쪽으로 달려갔다.

부하가 손가락으로 수평선 한쪽을 가리켰다.

“저깁니다.”

과연 한척의 배가 다가오고 있었다. 배는 무척 컸는데 한 눈에 보아도 엄청난 양의 화물을 실고 가는 것이 분명했다.

황하의 수로가 차단되었다는 소식이 퍼졌을 텐데도 나타나다니 간덩이가 부었다고 여겼다. 배와 화물은 무조건 압수이고 사람 또한 상황에 따라 죽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황하수로는 무림맹이 관리하며 자신들이 책임자이기 때문이었다.

배는 점점 가까워졌고 수하들이 뱃전으로 몰려들었다. 모두 입가에 입소를 짓고 있는 것이 한바탕 휘두르게 될 폭력을 생각하자 온 몸에 짜릿한 흥분이 전해지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배는 화물선이었는데 갑판 위에까지 화물을 가득 실었다. 좀 더 거리가 가까워지면 화물의 종류를 알 수 있겠지만 언뜻 보아하니 삼엽선란이었다.

“삼엽선란 같습니다.”

“향기가 여기까지 날아 오는게 확실 합니다.”

부하들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런 큰 배에 가득 실릴 정도의 삼엽선란이라면 족히 황금으로 일백관 이상의 엄청난 양이었다.

삽엽선란은 약초 중에서도 고가로 취급되며 불로장생에 효과가 있었다. 반쯤 술이 취한 백기룡도 게슴츠레한 눈으로 삼엽선란이라는 것을 확인 한 듯 누런 이를 드러내놓고 웃는다.

“흐흐흐! 오늘 제대로 한 건 하는구나.”

“배를 가까이 대거라.”

맹숭철이 내공이 실린 음성으로 외쳤다.

화물선이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배를 일단 가까이 붙인 후 이쪽에서 사람이 건너가 통행세를 받는다. 상인들 또한 항상 그래왔으므로 아무런 의심 없이 배를 가까이 붙였다.

거리가 삼장정도로 좁혀지자 일제히 초룡각 무사들이 날아갔다. 평소와 달리 수많은 무사들이 날아오자 상인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무려 일백여명의 무사들이 날아내렸다. 그리고 다짜고짜 화물을 확인했는데 예상대로 삼엽선란이었다. 맹숭철을 비롯한 초룡각 무사들이 득의양양했다.

“분명히 황하수로을 차단한다는 명을 내렸는데도 감히 배를 띄운단 말이냐?”

책임자로 보이는 상인이 나타나 굽실 거렸다.

“소인들은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한번만 봐주십시오.”

“뭣들 하느냐? 배를 나포하고 모조리 끌고 오너라.”

술병을 든 백기룡이 소리쳤다.

“모두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라. 반항하는 자는 모조리 목을 베겠다.”

바로 그 순간 이었다. 삽연선란 속에서 수많은 무사들이 튀어나오며 초룡각 무사들을 급습했다. 삼엽선란 속에 무사들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하지 못했고 경계심까지 완전히 흐트러져 있었기 때문에 초룡각 무사들을 순식간에 당했다. 거기가 급습해온 무사들의 무공은 상상을 불허했다.

“컥!”

“으아악!”

그것은 일방적이 도살이었다. 설혹 경계심을 갖추고 있었더라고 해도 상대의 솜씨가 워낙 압도적이었다.

삽시간에 뱃전은 시체로 가득했고 피가 물처럼 흘러내렸다.

맹숭철은 너무 엄청난 일에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꿈에도 생각 못한 기습이었기 때문에 부하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저기 술 쳐먹고 있는 놈이 백기룡이겠지?”

맹숭철 앞에 한 명의 흑의인이 나타났다.

그는 검을 뽑지 않고 있었는데 옷차림이 깔끔했다. 특히 신고 있는 장화가 거울처럼 반들거렸다.

“난 육검산의 산주 고검 이여송이라고 한다.”

“유…육검산.”

맹숭철이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육검산은 흑도 십문 중 한 곳으로 철저히 검을 추구하는 인물들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그들은 검은 냉혹하며 악랄하고 무정하여 검의 이단자들로 불린다. 흑도가 궐기를 했다는 얘긴 들었지만 이렇게 눈 앞에 나타날 줄이야.

대대로 육검산의 산주는 상대가 없음에 외로워하다 죽는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고검(孤劍)이라고 했겠는가.

“오늘부로 이곳 초룡각은 우리 육검산이 지배한다. 잘 가라.”

번쩍!

이여송의 검이 날아왔다.

한줄기 검광이 날아오는 것만 볼 수 있을 뿐 너무 빨라 각도와 어느 부위를 노리고 날아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맹숭철은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 후려쳤다.

카캉!

강력한 쇠소리와 더불어 맹숭철의 검이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했다. 검의 손잡이를 서둘러 고쳐 잡을 때 눈 앞으로 이여송의 검이 들어왔다. 아직 검을 제대로 쥐지도 못했으니 이여송의 검을 막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푸욱!

목구멍이 뜨거운 기운이 파고들었다.

촥!

이여송이 검을 뽑자 붉은 피가 물줄기처럼 뻗어나간다.

꼬르르!

숨을 내쉬자 피 끓는 소리가 들렸고 눈 앞에 우뚝 서 있는 이여송을 보며 맹숭철이 중얼거렸다.

“무…무서운 검…정녕 무서운 검.”

한번 휘청 거리더니 그대로 뱃전으로 엎어졌다. 이여송은 주위 돌아가는 상황을 살폈다. 싸움은 일방적이었고 초룡각 무사들은 거의 전멸해가고 있었다.

쉬익!

그대로 몸을 날려 도주하는 백기룡의 배로 날아갔다.

이여송이 배에 날아 내리려들자 백기룡이 검을 날렸다.

파앙!

서로의 검이 부딪히며 반탄력으로 이여송의 몸이 뒤로 퉁겨 나왔다가 한 바퀴 회전을 하더니 곧바로 배에 안착했다. 술에 취하지 않았다면 이여송의 승선을 묵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술이 너무 취해 백기룡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술취한 놈의 목을 베어 보는군.”

콰아아!

이여송의 검이 찔러 들어왔다.

백기룡이 본능처럼 옆으로 움직이며 검을 쳐내려 했다.

붕!

하지만 이여송의 검은 어느새 방향을 틀며 백기룡의 검을 피했고 빙글 끝이 짧게 회전하더니 어깨를 찔러버렸다.

푹!

“윽!”

이여송의 검이 뒤로 주춤 물러나는 백기룡의 복부를 다시 파고든다.

챙!

백기룡이 힘껏 검을 아래로 휘둘러 이여송의 검을 쳐냈다. 하지만 백기룡의 검이 더 튕겨 나갔다. 술에 취해 검에 제대로 힘을 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콰악!

이여송의 검은 백기룡의 배꼽부위를 뚫어버렸다.

“크욱!”

백기룡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고개를 숙여 아랫배를 쳐다보았는데 붉은 피가 뱃전으로 뚝뚝 떨어진다. 술이 취해 빨개진 얼굴로 이여송을 쳐다보던 백기룡이 한마디 내 뱉었다.

“개…개자식!”

엎어져 숨을 거두었고 이여송이 이미 싸움을 끝낸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대종사에게 전서구를 보내라. 황하수로는 우리가 접수했다고.”

“존명.”

잠시 후 한 마리 비둘기가 날아올랐다. 배를 한 바퀴 빙 돌더니 이윽고 남쪽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애첩 산월의 몸이 더욱 뜨겁다. 뿐만 아니라 평소와 다르게 더욱 적극적이었다.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자신이 앞서 움직이고 이끌지 않았다. 상관량은 이 모든 것이 돈 때문이라고 생각 했다. 자신의 재산이 급속이 늘어나자 산월 또한 더욱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변한 것이었다.

상월은 명기(名器)다. 상관량이 산월을 처음 만난 것은 이 년 전이었다. 사주호룡거를 끌고 천상각을 다녀오던 중 술 한 잔 생각이 나서 들린 기루에서 만났다. 당시 산월의 나이는 열아홉이었는데 그날 처음으로 나온 것이었는데 상관량의 강호 신분을 생각해 주인이 붙여준 것이었다. 대저 처음 나온 여자들은 거의 단골 중에 가장 돈이 많은 사람에게 바치는 것이 관례였다.

그 날 밤 상관량은 수십 번 까무러쳐야 했다. 천명 중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다는 명기였다. 야사에 의하면 양귀비와 서시 모두 명기였다고 했다. 이후 상관량은 산월을 아예 첩으로 들여앉혔다.

“허어억!”

밑에 깔린 상관량의 눈이 뒤집혔다. 하체를 옴짝달싹 못하게 산월이 조여 버린 것이다. 벼락을 맞은 듯 온 몸이 떨리고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쾌감이 흘렀다. 살아오면서 이보다 더 짜릿하고 소름끼치는 쾌감은 없었고 명기가 아니면 가져다 줄 수 없는 황홀경이다.

산월은 콱 물고 놓지를 않았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자를 깨물듯 조이는 것이 명기의 특징이었다.

“그…그만.”

이제 흥분을 넘어 아파오기 시작했다.

산월이 배위에서 웃음을 지었다.

“호호호! 알았어요. 빼드릴게요.”

그녀의 엉덩이가 천천히 솟구쳤다. 그에 따 라 미끄러지듯 상관량의 남성이 빠져나왔다.

“우우웃!”

상관량이 자지러졌다.

“호호호! 아기처럼.”

산월이 상관량의 볼에 입을 맞추고 하체를 가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상관량의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 늙은 말년에 이런 복도 없지 싶었다.

사내에게 가장 큰 복중 하나가 계집 복이라고 했는데 자신이야 말로 그 어렵다는 명기를 얻었으니 부러울 것이 없었다. 거기다 재산은 갈수록 불어나 사가의 재산만 다루는 집사만도 무려 열 명이었다. 물론 그 재산의 거의가 천상각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서서히 몸을 일으켜 아랫도리를 닦고 의관을 갖추고 있을 때 밖으로부터 음성이 들려왔다.

“총관님 속하 개묵이옵니다.”

“들라.”

가개묵 말고는 누구도 자신과 산월의 관계를 모른다. 문이 열리고 가개묵이 들어섰는데 여전히 한쪽 가슴에 칼을 품고 있었다. 동천비에게 죽을 뻔 하다 살아난 이후 더욱 충성심이 강해졌고 상관량도 그 어렵다는 공청석유를 구해 먹였다. 그래서 가개묵의 무공은 예전보다 배는 강해졌다.

가개묵의 안색이 좋지 않을 것을 보아 즐거운 소식을 가져온 것 같지는 않다.

“말해보아라. 망설일 것 없다.”

가개묵이 고개를 쳐들었다.

“차단했던 장강수로와 황하수로가 개통되었사옵니다. 또한.”

벌떡!

상관량이 침상에서 내려섰다.

“관도 역시 완전히 통행이 재개 되었고 천상각으로 들어가는 모든 물자와 거래는 정상적으로 진행 되고 있사옵니다.”

상관량의 두 눈이 이글거렸다.

물어 볼 필요도 없다. 동천비의 혼 자 능력으로 그 모든 것을 해결하기에는 불가능했다. 동조자가 있을 것이 분명했고 머리에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목와북천!’

흑도무림과 손을 잡은 것이다. 흑도무림이라면 자신의 조치쯤은 손쉽게 무력화 시킬 것이었다. 동천비는 흑도무림과 손을 잡고 재차 저항을 시작 한 것이었다.

‘놈!’

상관량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살모사의 눈처럼 푸른 광기가 뻗어 나왔다. 동천비의 행동은 끝까지 해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천상각의 공준분해가 아니라 아예 강호에서 없애야 한다.

굳은 표정의 상관량이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차라리 잘된 것이었다. 별 저항이 없는데도 천상각을 무너뜨리면 온갖 잡음이 일 것이고 강호의 시선 또한 무림맹에 우호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동천비가 극렬하게, 더구나 무림맹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흑도무림과 손을 잡았다면 이거야 말로 기회였다. 흑도멸사의 기치를 들고 일어나 천상각까지 쓸어버리면 된다. 누구도 그 안에 감춰진 자신의 계산은 읽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흑도를 소탕하는 와중에 일어난 사태의 일환으로 생각 할 것이었다.

“개묵, 맹주님은 어디 계시느냐?”

“사가에 계시는 줄 아옵니다.”

“즉시 서찰을 띄워라 찾아뵙겠다고?”

“존명.”

가개묵이 문을 닫고 사라졌다.

상관량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야 말로 거칠 것 없이 천상각을 집어 삼킬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남궁세가는 중원제일의 검가이다. 원래 남궁세가를 처음 창건한 남궁일은 장법의 대가였다. 생사일만고백장이라는 장법으로 천하를 휩쓸었다. 하지만 말년에 무명의 검도고수를 만나 처절한 패배의 쓴맛을 본 남궁일은 그때부터 검에 관현 연구를 시작했고 죽기직전 오늘날까지 남궁세가를 중원제일검가로 만들어 주고 있는 암향류(暗香流)를 탄생 시켰다.

삼십 초반 가량 되는 사내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사내의 검을 빨랐다. 일반인의 육안으로는 쫓아 갈 수 없을 만큼 빨랐고 그의 검이 지나가는 곳에는 어김없이 허공이 갈라지고 있었다.

쉭! 쉬쉬쉭!

놀랍도록 빠르다. 좌측을 찔렀다 싶은데 어느새 검은 오른쪽을 찌르고 있었다. 원을 만들었다 싶은 데 직선으로 뻗어가는 신출귀몰한 검세에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콰아아!

사내의 검이 떨어져 내렸다.

그의 검이 떨어진 곳에는 제법 큼지막한 바위가 있었는데 검이 지나고 나서도 바위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한줄기 바람이 불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부르르르!

돌이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돌을 가루로 만들기 위해서는 도대체 몇 번을 베어야 할까. 그것은 조금 전 사내의 검이 한번

벤 것이 아니라 최소한 수십 번 베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눈에는 분명 한 번 밖에 휘두르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거의 완성된 듯 하구나.”

검을 거둔 사내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섰다.

등 뒤 십여장쯤 떨어진 곳에 한 명의 백의노인이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띄며 서 있었다.

“아버님.”

“몇 달 못 본 사이 많이 늘었구나. 거의 완벽해졌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백의노인은 현 무림맹주 신검 남궁천이고 사내는 그의 아들 남궁관이었다.

“관이 아버님을 뵈옵니다.”

땀으로 젖은 남궁관을 쳐다보는 남궁천의 얼굴을 밝고 맑았다. 아들이라고는 남궁관 하나인데 다행히도 자질이 뛰어나다. 어디 그 뿐인가. 야망도 있고 승부를 즐긴다. 자신의 뒤를 잇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만 들어가자.”

두 부자는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걸어갔다. 무슨 좋은 얘기를 하는 듯 이따금 서로 돌아보며 웃기도 했다.

오랜만에 부자끼리 마주 앉아 마시는 차였다. 차를 마시며 남궁관을 쳐다보는 남궁천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시지 않는다. 자신의 예상보다 남궁관의 성장이 더욱 빠르기 때문이었다. 청출어람이라고 했는데 확실히 자신이 나이 때보다 앞서고 있었다.

“무슨 일로 연락도 없이 오셨습니까?”

남궁관이 정색하고 물었다.

남궁천이 찻잔을 내리더니 말했다.

“이놈 봐라. 아비가 집에 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냐?”

남궁관이 당황해 하며 더듬거렸다.

“소…소자의 말뜻은 그게 아니라.”

“헛헛! 알고 있느니라. 혹시 아비의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염려하여 묻는 것이라는 걸 말이다.”

남궁천이 웃음을 거두었다.

그리고 정색하여 남궁관을 보며 말했다.

“너도 이제 그만 출사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출사라면?”

“무림맹에 자리 한 개를 봐뒀느니라.”

“아버님.”

“강호는 경험이다. 아무리 집에서 무예를 쌓아봤자 경험이 부족하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자리를 마련해 놨으니 조만간 짐을 정리하여 무림맹으로 오너라.”

남궁관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듯 차를 마시는 부친을 굳은 얼굴로 쳐다보았다.

남궁천이 입에서 잔을 떼고 말했다.

“흑도가 준동하여 강호가 심상치 않다. 이때 너의 솜씨를 보이고 이름을 알려라. 장부란 거칠게 성장해야 하는 법이니라.”

“아버님 뜻을 따르겠사옵니다.”

“머잖아 흑도와 전면전이 예상된다. 그들도 그동안 우리의 등쌀에 숨어 많은 고생을 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배수의 진을 치고 나올 것이다. 이때 너의 능력을 보여주어라. 그럼 아비의 뒤를 잇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니라. 남궁천하를 위해서는 너도 그만 기지개를 켜야 할 것 아니냐?”

남궁관이 음흉하게 웃었다.

“좋습니다. 켜지요.”

“가주님.”

밖에서는 맹주이지만 집에 들어오면 가주로 불린다.

“들어와 말하라.”

문이 열리고 가신 차우가 들어섰다. 차우는 곱추이며 올해 나이가 팔십에 이른다. 남궁관에게 조부가 되는 남궁우가 거둬들인 가신으로 유엽비(柳葉匕)를 귀신같이 사용한다. 하지만 말로만 들었을 뿐 아직까지 차우가 유엽비를 사용하는 모습을 본적은 없었다.

“상관 총관께서 오셨사옵니다.”

“상관총관이? 어서 안으로 뫼시거라.”

차우가 나갔고 잠시 후 상관량이 들어섰다.

“어서오시오 상관 총관.”

“송구하옵니다. 불숙 찾아온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옵니다. 더구나 자제분과 말씀을 나누고 있었던 듯한데.”

“아니오. 앉으시오.”

남궁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생은 이만 물러날까 하옵니다.”

남궁관이 정중히 인사를 하고 물러났고 상관량의 시선이 뒤를 쫓았는데 눈빛이 여러번 변했다.

“헛헛! 내 아들놈이오. 언젠가 상관 총관에게도 말했듯 맏이인데 출사할 생각을 않소이다.”

“남전생옥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헛헛! 부끄럽소이다. 그래 맹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소?”

“묵와북천이 물 위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우리가 천상각을 고사시키기 위해 차단한 장강과 황하의 수로를 그들이 점령하여 다시 통행을 시켰고 관도까지도 완전히 장악했사옵니다. 뿐만 아니라 다시 천상각에 중상들이 몰려 들고 있다하옵니다.”

남궁천의 안색이 굳어졌다.

이번 기회에 천상각을 완전히 조각내기로 밀약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흑도를 업고 다시 가사 회생한다면 이건 위기가 아니라 어쩌면 호기였다.

묘하게도 맹주와 총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