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31화 (31/71)

제4장 중원으로

사흘을 기다려도 동천비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동천비가 죽었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었는데 일신에 금지마공 묵곤혈참기였다. 동천비의 묵곤혈참기는 십성을 넘어서고 있었다. 십이성에 오르면 비록 인성은 거의 마비가 된다고 하지만 무적이라고 했다.

여추량은 집결지인 금우산장에서 하루만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이천 여명이 무림맹 공격에 나섰다가 오백도 채 돌아오지 못했다. 그나마 상당수는 중상을 입고 있어서 사망자는 더 늘어날 것 같았다. 이거야 말로 완패였다.

아침이 밝아왔고 또다시 하루가 시작되었다. 살아남은 무사들은 무예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부상자들은 인근 마을에서 데려온 의원들로 부터 치료를 받고 있었다.

스물 세 개의 방에 환자들은 수용되어 있었고 여기저기서 고통의 신음을 흘렸다. 환자들을 한 번 살피고 밖으로 나온 여추량은 사공진을 만났다. 사공진은 자신의 심부름으로 천상각을 다녀오는 길인데 호위무사이기도 했다.

처소로 돌아온 여추량은 자리에 앉자마자 사공진에게 물었다.

“그래 본가는 어찌되었더냐? 여전 하더냐?”

“아직은 별탈 없이 돌아가고 있더군요. 그런데.”

사공진이 주저하자 다그쳤다.

“말하라.”

“가모님께서 팔이 잘리셨고 의식 불명에 빠졌다 하옵니다.”

“뭐…뭐라.”

“세 째 공자님께서.”

여추량의 표정이 굳어졌다.

잠시 뭔가를 생각 하는 듯 하던 여추량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너, 그 계집을 데려 올 수 있겠느냐?”

사공진의 눈이 커졌다.

여추량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당장 그 계집을 데려와라. 빠른 아이들 몇을 데리고 당장 가거라.”

“나…납치를 하라는.”

“시간 없다. 곧바로 가라.”

“존명.”

사공진이 서둘러 대답하고 밖으로 사라졌다.

탁자 위에 올려 진 여추량의 오른 주먹이 강하게 쥐어졌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여추량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어려운 시기에 한 가닥 서광을 찾은 것 같았다.

“무슨 좋은 일 있소?”

여추량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창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들어왔는지 동천비가 창가에 우뚝 서 있었다.

“대…대공자님.”

동천비의 옷은 완전히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고 곳곳에 상처까지 입었다. 하지만 표정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고 여전히 냉오한 기세를 갖고 있었다.

“어찌된 일이옵니까? 돌아오시지 않아 별걱정 다 했사옵니다.”

“훗훗!”

야릇한 미소를 흘리더니 물었다.

“패해가 어느 정도요?”

여추량은 있는 그대로 말했다.

하지만 동천비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여추량의 설명을 듣고난 동천비가 고개를 들었다.

“목와북천과 접촉을 시도하시오.”

“목와북천이라면?”

“아마 어쩌면 그쪽에서도 우리가 접촉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여추량의 눈이 빛을 뿌렸다. 동천비의 계산이 무엇인지 읽어 낸 것이었다.

여추량이 나가자 동천비가 주위를 살피더니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는 동경 앞으로 다가갔다. 동경 속에 거렁뱅이와 다를바 없는 한 명의 낯선 사내가 서 있었다.

“큿큿!”

동천몽이 쇳소리를 내며 웃었다.

‘무림맹, 상관량!’

동천비의 얼굴에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러던 한 순간 동천몽의 두 눈이 검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검은 눈동자에서부터 시작된 검은 기운은 눈 전체로 확대되었고 완전한 먹물로 변했다.

“크크크!”

괴기로운 웃음을 흘렸다.

“모조리, 모조리 죽여주겠다.”

그러면서 오른 손을 뻗어냈다. 그러자 손바닥으로부터 시커먼 장력이 쏟아져 나와 동경과 벽을 그대로 박살내버렸다.

콰아앙!

화강암으로 된 벽이 종잇장처럼 날아갔고 밖에서 무예수련 중이던 무사들이 경악했다.

동천몽의 몸은 이제 전체가 모두 먹물로 변해 있었다.

갑작스런 충격과 분노로 십일성에 올랐다. 마공의 특성중 하나인 것이었다.

“마…맙소사!”

무사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고 동천비가 괴성을 지르며 날아갔다.

“크아아아!”

“무…묵경이닷!”

무사들이 기겁들 하며 달아났고 동천비는 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서너 명의 무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묵경(墨境)이란 묵곤혈참기가 본격적인 완성단계 즉 십일성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이때부터는 왕왕 발작을 하는데 발작이 시작되면 오로지 피만 쫓는다.

삽시간에 이십 여명의 무사들이 시체로 변했다. 진득한 피냄새가 장원을 감쌌고 운좋게 살아난 무사들은 공포에 젖어 있었다.

스르르르!

동천몽의 전신을 물들였던 검은 기운이 몸 안으로 자취를 감추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으억!”

동천비가 눈앞에 벌어진 참상에 외침을 터뜨렸다. 그리고 대번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차렸다. 동천몽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마침내 그토록 소원하던 묵경에 이른 것이다. 정공과 달리 묵곤혈참기는 일성의 차이가 하늘과 땅이며 특히 십성과 묵경에 들어서는 십일 성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흐흐흐!”

무림맹 습격당시 지금과 같은 묵경의 경지에만 올라섰어도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함정을 파놓고 기다렸다고 해도 절대 자신의 공격을 받아 내지 못 할 테니까.

‘기다려라. 상관량!’

동천비의 두 눈에서 사악한 기운이 뭉게뭉게 솟아나왔고 그것은 실로 소름끼치는 광경이었다.

합수벽(合水壁)이라고 불렀다. 대설산에서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총강과 천일강이 만나는 곳이었다. 좌측으로는 두 개의 강이 하나를 이룬 총천강이 흐르고 좌측으로는 칼을 세워 놓은 듯한 수직 절벽이 있다. 강과 수직 절벽사이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조그만 길이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소금의 도로라고 불린다.

소금자루를 말과 흑우의 등에 가득 실은 상인들이 아슬아슬한 절벽 길을 지나고 있었다.

산양가죽과 여우털 목도리를 하고 지나가는 상인들 얼굴은 태양에 그을려 검게 우그러져 있었다.

우르르!

쿠쿵!

말과 흑우의 발길에 채인 돌 조각들이 굉음을 내며 총천강의 급류 속으로 사라졌다.

삐이익!

맨 선두에 서서 말을 몰고가던 흑의사내가 입술을 모아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뒤를 따르던 일행이 모두 멈춰 휴식을 취했다. 선두 사내는 소금을 운반하는 이들 무리의 두목인 산장(山長)이었다. 여기저기 맨 땅에 그냥 주저 앉은 상인들은 품에서 건포를 꺼내 찢어 씹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소금은 삶이었다. 그래서 일 년 마다 소금호수까지 무려 천리나 되는 길을 왕복한다. 소금을 채취 해온 이들은 소금과 식량을 맞바꾼다. 보통 일대 일로 바꾸기도 하지만 날이 덥거나 기상이 나쁘면 소금 한 되에 옥수수 두되로 바꾼다.

“사부님 저들이에요.”

맨 선두의 산장 곁으로 가냘픈 사내가 속삭이듯 말했다. 행색은 사내인데 목소리는 여자였다.

산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 봐라. 우리가 제대로 된 상인인지 상인이 아닌지 지금 살피고 있구나.”

그들이 쉬고 있는 절벽 맞은편, 그러니까 총천강 맞은편에 일단의 사람들이 바위와 나무사이에 은신한 채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산장인 흑의사내가 뒤로 벌렁 누워 바위에 등을 기댔다.

누가 봐도 지쳐 잠시 쉬는 상인의 모습이 아닐 수 없었고 그 옆으로 조금 떨어져 가냘픈 사내 역시 누웠다.

산장 사내의 이마살이 찌푸려졌다.

“조금 가까이 누우면 안되겠느냐?”

가냘픈 사내가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산장이란 사내가 말했다.

“그래야 자연스러워 보일 것 아니냐? 같은 동료까지 떨어져 누워 있으면 눈치 빠른 저들이 알아차릴지도 모르지 않느냐?”

가냘픈 사내의 눈이 깜빡거렸다.

듣고보니 일리 있는 말이었으므로 가냘픈 사내가 산장 사내 옆으로 붙다시피 하여 누웠다.

코끝으로 분 냄새가 파고들었다.

여자와 가까이 있고 여인의 냄새를 자주 맡을수록 회복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이들은 포달랍궁의 무사들이었다. 소금 상인으로 행색을 바꾼 것은 동천몽의 생각이었다.

지금 이 곳 뿐 만이 아니라 포달랍궁 무사들은 모두 스물 아홉 곳의 노선을 이용해 중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한 무리 당 칠십에서 팔십 명인데 숫자를 그 선에서 조절한 것은 작아도 의심을 받고 그보다 많아도 사람들 눈에 띈다. 흔히 상단이나 일반 유람객들의 무리가 거의 칠 팔 십명 에서 이뤄지기 때문이었다.

포달랍궁을 공격하려던 목와북천은 진법이 발동되면서 실패를 맛봐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를 하지 않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게 동천몽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일거에 많은 사람들이 궁을 빠져나가면 그들의 감시망에 금방 잡힌다.

그래서 동천몽은 철저히 칠팔십 명씩 분산시켰다. 분산은 자칫 대궤멸을 불러올 위험도 있지만 잘만 하면 완벽하게 적의 포위와 감시망을 벗어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다른 곳에서 위험에 빠졌다는 전서구가 날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이동이 순탄한 것으로 보여 졌다.

포달랍궁을 빠져나온 무사들의 숫자는 이천명이었다. 절정의 고수들만 선발했는데 물론 포달랍궁은 다시 진법이 발동되어 외부와 격리되어 침입당할 위험은 없었다.

삐익!

동천몽이 다시 휘파람을 불자 휴식을 취하던 제자들이 일어났고 일행은 다시 이동을 했다. 길은 메말랐고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 올랐다.

맞은편에 몸은 은신 한 채 동천몽 일행의 이동을 살피던 소견사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소견사는 목와북천 아홉장로 중 한 사람으로 그는 잘 웃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웃는 순간 주위는 죽음의 천지로 돌변한다.

“저들도 아니란 말이지?”

혼잣말처럼 말했고 옆에 있는 부하에게 대꾸했다.

“아무리 위장이 뛰어나다고 해도 상인과 무사는 구별이 됩니다. 저들은 완벽한 상인입니다.”

“우라질! 도대체 언제쯤 지나간 다는거야.”

이곳에 머물고 있으면 반드시 변장을 하고 지나갈 것이라고 눈이 세 개인 삼천목은 말했다. 물론 많은 상단이 지나갔다. 하지만 포달랍궁의 무사들로 보이는 사람들은 지나가지 않고 있었다. 벌써 꼬박 닷새째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인데 점차 짜증이 나고 귀찮아 지기 시작했다.

“모두 쉬어라.”

상단이 지나갈 때마다 바짝 긴장을 했다. 혹시 포달랍궁의 무사들인지 모르고 사실로 밝혀지면 곧바로 출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은신해 있던 부하들이 한숨을 쉬며 다시 편안 자세로 주저앉았다.

그로부터 사흘 후 일행은 총천강을 건넜다. 총천강을 건너면 운남이다. 날씨가 바뀌면서 모두 행색을 간단한 의복들로 바뀌었고 동천몽은 일행과 헤어졌다.

위험은 고비는 지난 것이었다. 어제 밤까지 스물아홉 곳으로부터 모두 안전하게 목와북천의 감시를 빠져나왔다는 전서구를 받았다. 목와북천의 눈을 따돌리는데 완벽히 성공 한 것이었다.

동천몽은 십이법신 중 한 명인 석태선사를 불렀다.

“믿겠다.”

“심려 마옵소서. 안전하게 집결지인 성과사에 도착할 것이옵니다.”

성과사는 중원에 있는 단 두 개 뿐인 포달랍궁의 말사이다. 한 개는 하북에 있는 보타사이다. 성과사는 절강 향주 근처에 있었다.

일행이 사라질 때까지 동천몽은 서 있었다. 그런데 자정경이 가지 않고 옆에 서 있었다.

“왜 넌 가지 않느냐?”

자정경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질문이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왜 가지 않다뇨? 사부님 그걸 지금 말씀이라고 하세요?”

“무….무슨?”

“제자가 사부님을 곁에서 수발들고 모시는 건 지극히 당연하면서 예의이에요. 내가 떠나면 누가 사부님의 심부름을 하며 돌봐 드린단 말인가요?”

“그래서 사부와 동행하겠다는 것이냐?”

“앞으로 저와 사부님은 무조건 행동통일이에요. 어서가요.”

탁!

그러더니 다짜고짜 팔짱을 끼었다.

동천몽이 뱉은 말은 형식적이었다. 당연히 속으로는 석태선사와 떠나지 않기를 바랬다.

“뭘 봐요. 어서가요.”

“으응! 그래 가자꾸나. 그런데 이건 좀 놓고 갈수 없겠느냐?”

“왜요?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는데, 설혹 있으면 어때요. 사부와 제자가 팔짱 좀 끼면 누가 잡아간대요.”

자정경이 끄는 바람에 동천몽은 어쩔수 없이 끌려갔다.

‘흐흐!’

하지만 속으로 무지 흐뭇해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정경을 이용해 소멸된 사내의 기능이 되살아나길 기대했다.

“사부님!”

자정경이 돌아보았다.

“응!”

“사부님께서는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요?”

흠칫!

동천몽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긴장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자정경의 의도를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그러는 정경이 너는 누가 제일 좋으냐?”

대답이 난감할 때는 한 가지 방법 뿐이다. 같은 방법으로 되묻는 것이었다.

자정경은 거침 없이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사부님이죠?”

“허험! 나 또한 세상에서 네가 제일 좋단다.”

당연한 대답이었다. 이 상황에서 다른 사람 이름 대는 병신은 천하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제자가 미치도록 아름다운 마당에는 더욱 목소리에 힘을 주어 대답해야한다.

자정경의 얼굴에 만족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사부님 우리 저기 가서 뭣 좀 먹고 가요.”

관도 한쪽으로 삼층 객점이 있었고 동천몽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자정경은 객점 안으로 들어섰다.

점소이가 큰소리로 인사를 했고 두 사람은 탁자를 놓고 마주 앉았다.

“사부님 뭐 드시겠어요?”

자정경이 동천몽을 향해 사부님이라고 말하자 점소이 눈이 커졌다.

그리고 두 사람을 연신 번갈아 쳐다보았다.

‘흐흐! 이것들이 누굴 핫바지로 아나’

점소이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객점에서 일한 지 오년이었다. 이제 척 보면 어떤 사인지 꿰뚫는다.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이런 곳으로 점심을 먹으로 나온 남녀라는게 뻔했다.

대부분이 처음에는 주위 눈을 의식해 오빠동생 하거나 아니면 스승과 제자처럼 군다. 하지만 식사하면서 술 한 잔 걸치고 곧바로 삼층 객실로 들어갔다 나오면 여보 아니면 자기로 변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고 경험했다.

눈앞에 두 사람 또한 자신의 눈을 의식해 스승과 제자인척 하고 있었다. 세상 어느 천지에 비슷한 또래의 스승과 제자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대부분 스승이라고 하면 가슴까지 내려오는 허연 수염은 몰라도 얼굴에 주름살 한두 개는 있다. 그런데 눈앞의 스승이라는 작자는 아동스럽다 못해 귀엽기까지 했다.

‘이 잡것들이 이 엉아를 완전히 물로 보는구만.’

점소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봐도 자신보다 잘생긴 구석도 없고 돈 많은 구석은 더욱 없어 보이는데 꽃 같은 미인을 데리고 다니는 동천몽이 한 없이 부러웠다.

“우리 사부님은 고기를 못드시니까 만두 주세요. 그리고 난 노배계 주세요.”

“알겠습니다. 금방 올립죠.”

돌아서는 점소이가 징그런 미소를 지었다.

‘건방진 계집, 이미 다 알거늘 끝까지 사부님이라니’

자정경이 흠칫 했다.

조금 전까지 맑고 쾌청하던 동천몽의 얼굴이 굳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부님 존안이.”

“아…아니다. 신경쓸 것 없다.”

괜찮다고 했지만 동천몽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자정경은 도대체 무슨 일로 갑자기 동천몽의 안색이 굳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팟!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자정경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혹시.”

“……”

“사부님, 고기 한 번 드실래요. 어때요. 아무도 보는이 없고 복장도 속인인데?”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아이, 뭐 어때요? 이 기회 아니면 언제 고기를 드셔보겠어요. 고기 좀 드신다고 벼락을 맞는 것도 아니잖아요. 너무 야채만 먹어도 건강에 나쁘대요. 고기 드세요. 제가 입 꼭 닫아 드릴게요. 이봐요. 여기 우리 사부님도 노배계 주세요.”

“저…정경아.”

큰일이나 나는 듯 두 손을 들어 말렸다. 하지만 양팔에 전혀 힘도 없을 뿐 아니라 두어 번 말리다 그만둔다. 그런 것을 눈치 빠른 자정경이 모를리 없었다.

“어서 주세요. 이왕이면 보드라운 것으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저…정경아 이럼 안 된다.”

“사부님 제가 말했잖아요. 평생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오늘 일은 비밀에 붙이겠다고. 이 기회에 영양보충도 하고 좀 그러세요.”

“허어!”

곤란하다는 듯 인상을 쓰면서도 속으로는 기뻐 어쩔 줄 몰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자 하나는 확실히 얻은 것 같았다. 흔히 마누라의 유형을 곰과 여우로 나눈다. 거의 모든 남자들은 여우같은 마누라를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눈치가 빠르기 때문이었다. 눈치는 때로는 대화보다 중요할 때가 있다. 그 만큼 이쪽의 심리와 생각을 꿰뚫어 본다는 것인데 자정경이 그랬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노배계 두 그릇이 나왔다.

“드세요. 사부님.”

자정경이 젓가락을 들며 권했다.

하지만 동천몽은 선뜻 응하지 않았다.

들라고 해서 곧바로 기다렸다는 듯 먹으면 안된다. 최소한 한 번 정도는 더 거절을 해야 한다. 동천몽이 고통스런 표정을 짓자 자정경이 웃으며 말했다.

“부처님도 이해하실 거예요. 그리고 오늘일은 사부님과 저 밖에 모르며 평생 입 밖으로 내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고기는 가끔씩 섭취해줘야 해요. 어서 드세요. 식으면 맛없잖아요.”

동천몽이 망설이는 표정으로 노배계를 내려다보더니 긴 탄식을 흘렸다.

“세존이시여 저를 용서 하소서.”

조용히 읊조리더니 무척 큰 죄를 짓는 사람처럼 떨리는 손으로 닭다리를 잡아갔다.

부우욱!

다리를 찢으면서도 눈을 질근 감았다. 누가 봐도 무척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사부님 맛 어때요?”

자정경이 다리 한 개를 뜯어 씹으며 물었다.

동천몽이 닭다리 한 개를 듣다 말고 인상을 쓰며 힘들게 말했다.

“사…사부는 맛을 잘 모르겠구나.”

“그럴 거에요. 이런 것도 자꾸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아는 법이죠. 하지만 실컷 드세요. 부족하면 제자가 더 시켜드릴게요. 그리고 오늘 식사비는 제자가 낼 거예요.”

하지만 동천몽을 자세히 보면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뜯은 닭다리를 별로 씹지도 않고 삼킨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너무 굶주렸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대개가 씹지 않고 그냥 삼킨다.

꿀꺽!

두 번 씹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뼈까지 바로 삼켰다. 고기에 걸신들리지 않고서는 절대 보여줄 수 없는 놀라운 식욕이었다.

“이봐요.”

갑자기 자정경이 점소이를 불렀으므로 동천몽은 고개를 들었다.

점소이가 달려와 허리를 구부렸다.

“부르셨소이까? 낭자.”

“가서 죽엽청 한 근 가져오세요.”

확!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알겠사옵니다. 낭자.”

점소이가 돌아가고 동천몽이 물었다.

“수…술은 왜 시키느냐? 설마 제자가 술을 좋아 한단 말이냐?”

“많이는 못 마셔요.”

자정경이 환하게 웃었다.

점소이가 술과 잔 두 개를 놓고 사라졌다.

딱!

자정경이 능숙한 동작으로 마개를 따더니 탁 하며 동천몽 앞에 잔을 놓았다.

동천몽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왜…왜 사부 앞에 잔을 놓느냐?”

“아무 말씀 마시고 받으세요.”

콸콸콸!

동천몽이 말릴 틈도 없이 잔을 채우더니 자신의 잔에도 가득 따랐다.

“사부님 우리 건배해요.”

자정경이 잔을 쳐들었다.

동천몽이 눈을 크게 뜨고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보자 자정경이 인상을 썼다.

“제자 팔 아파요. 빨리 해요.”

“아…알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째앵!

잔을 들자마자 자정경이 사정없이 부딪히며 훌쩍 단숨에 비웠다.

비울까 말까 망설이는 동천몽을 보며 자정경이 인상을 썼다.

“뭐해요. 저는 비웠는데 지금.”

“하…하지만.”

“내가 무덤까지 오늘일은 가져 간대니까요?”

동천몽이 입술을 물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그럼 너만 믿고 괴롭지만 마시겠다.”

동천몽이 술을 마셨는데 커어 하면서 온갖 인상을 다썼다.

한데 자정경이 다시 술병을 들고 있자 놀란 눈을 했다.

“또 마시란 말이냐?”

“삼 세잔이란 말도 몰라요.”

주루루루!

다시 잔에 넘칠 듯 죽엽청이 찼고 자정경 역시 자신의 잔을 채웠다.

“자 비워요.”

그러면서 먼저 잔을 비웠고 동천몽이 무척 심각한 얼굴로 불호를 외웠다.

“아…아…아미타…타불!”

그러면서 술잔을 입에 가져갔는데 얼굴은 웃고 있었다. 물론 자정경의 시선에는 술잔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동천몽의 가슴은 기쁨으로 부글부글 끓었다. 더 이상 나무랄 데가 없는 자정경이었다. 태어나 지금까지 자정경 만큼 자신을 즐겁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머니도 이 정도까지는 자신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는 못했다.

“막잔이에요.”

동천몽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채워진 잔을 단숨에 비우고 닭다리 남은 한 개를 뜯었다.

“꺼억!”

술과 그릇을 모두 비운 자정경이 트림을 했고 술을 먹은 탓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술기운으로 달아오른 자정경의 모습은 무척 요염했고 동천몽의 가슴이 달아 올랐다. 눈 앞에 앉아 있는 자정경은 제자가 아니라 젊은 여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내 달아올라 있던 동천몽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붉게 상기된 자정경이 앞에 앉아 있는데도 아랫도리로 부터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성(性)은 결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일수는 없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될 절대적 기능이었다. 아무리 출가한 몸이지만 살아 있는데 자제하는 것과 애초부터 죽어버린 것과는 심리적으로 큰 차이를 가져다준다.

남자는 아랫도리에서 야망과 투쟁력이 나온다고 아버지는 강조했다. 그래서 영웅일수록 색을 즐긴다고 했다. 영웅도 아니고, 또한 사용할 곳 없는 출가인이지만 기능이 상실되었다는 것은 너무 원통하고 슬픈 일이었다.

“왜 또 표정이 어두우세요? 제자가 뭘 잘못했나요?”

“아니다. 술을 한 잔 걸쳤더니 문득 사는게 귀찮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네엣?”

자정경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삶에 의욕이 없는 중생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어야 할 사부님께서 귀찮다니요. 그런 말씀을 왜 갑자기 하시죠.”

“아미타불! 인생이란 정말 더럽구나.”

“네…네? 더럽다뇨?”

동천몽이 일어났다.

“같이 가요.”

자장경이 계산하는 동안 저만치 나가버린 동천몽을 쫒아가 팔짱을 끼었다.

그것을 본 점소이가 만족스런 표정으로 웃었다.

“그럼 그렇지. 우리 객실은 조금 부끄러울테니 다른 객점을 이용하겠지. 흐흐흐, 건방진 아이들.”

자정경이 팔을 깊숙이 끼었다. 그 바람에 팔꿈치가 자정경의 젖가슴을 자꾸 눌렀다. 그러는데도 자정경은 전혀 개의치 않고 조잘거렸다.

천하쌍미 중 한 여인이 팔짱을 끼고 젖가슴을 부비며 옆을 따른 다는 것은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의당 폭발 직전으로 성을 내고 있어야 할 아랫도리는 바보처럼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뿌드득!

또다시 이를 갈았다. 천검은왕와 천권동와을 패죽이고 싶었다. 만약 남자의 기능이 죽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불사심법을 배우지 않았을 것이었다.

사내가 기능을 상실하면 하늘의 명예를 얻는 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모두가 깊이 잠든 새벽에 조용히 일어나 일으켜 세워보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던가. 하지만 여전히 반응을 하지 않았고 은밀히 뒷골목에서 거래되는 춘화도까지 구입해 훑으며 밤새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천검은왕의 말에 의하면 불사심법을 십이성에 오르면 왜 남자의 기능이 상실되는지는 정확히 알려진바 없다고 했다. 그것은 곧 되살아 날 수도 있다는 말과 상통했기 때문에 한 가닥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다. 의원 또한 화중동거라고 하여 여인들을 자주 접촉하거나 곁에 두면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자정경은 술기운 때문인지 더욱 자극적으로 몸을 부딪혀 왔고 쉬지 않고 깔깔 거리며 우스갯소릴 했다.

지금으로서는 자정경만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애교가 넘치고 자신을 젊은 사내로 보기보다는 사부로 인식하여 거침이 없었다. 자신이 당황할 만큼, 타인이 보면 애정행각으로 볼 수 있는 과감한 육체적 동작과 자극적인 옷차림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자정경과 같이 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회복될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끈만 잡고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렇게 표정이 굳어 계세요. 술까지 하셨으니 당연히 좋아야하는 것 아닌가요? 제자에게까지 감출거예요. 정말?”

자정경이 더욱 가슴을 비비며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사부님께서 그러셨잖아요. 스승과 제자 사이에 감춤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말이에요. 그래서 제자는 여자인 몸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속이지 않고 모든 것을 털어 놨잖아요. 심지어는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그 날까지도 얘기해줬는데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숨기실 거 에요.”

동천몽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자정경은 필사적이었다. 얘길 듣지 않으면 궁금해서 못살 것 같다면서 한사코 매달렸다. 길가인데도 불구하고 누가 보든지 말든지 몸에 달라붙어 갖은 애교를 다 떨었다.

척!

동천몽이 걸음을 세우고 자정경을 향해 돌아섰다.

자정경이 두 눈이 반짝거렸다.

“말해 주시려구요?”

“사부의 인격과 명예를 생각하여 가급적 참으려 했지만 네가 하도 매달리니 하는 수 없구나. 하나 그에 앞서 한 가지만 명심하거라.”

“네.”

“사실.”

동천몽은 입을 다물었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가 민망했고 창피하기까지 했다.

“뭔데요?”

“아미타불!”

동천몽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자신이 기능을 잃게 된 것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사정을 소상히 말해주었다. 얘길 듣던 자정경의 표정은 여러 차례 변했다. 하지만 부끄러워하거나 당황한 기색은 일체 없었다.

“도저히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요?”

동천몽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정경 또한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세상에 어쩌다.”

어깨가 축쳐져 걸어가는 동천몽을 바라보는 자정경의 얼굴에 안쓰러움이 드리워졌다.

걸음을 재촉해 동천몽의 손을 꼭 잡았다.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한마디만 하겠어요. 용기를 잃지 마세요. 언젠가는 반드시 왕성하게 예전처럼 살아 날거예요.”

“……”

“혹시 이 제자가 도와줄 일은 없는가요? 사부님의 병을 고치기 위한 길이라면 뜨거운 불속은 몰라도 어지간한 고생은 각오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자정경이 앞을 막고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진지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동천몽의 병을 고쳐주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역력했다.

“어려워 말고 말씀해보세요. 저를 여자로 보지 마시고 단순한 제자로 보세요.”

“말이라도 고맙구나. 기특한지고.”

“그런 말씀 말고 빨리 처방이 있으면 말씀해보세요. 주저 않고 도와드릴께요.”

“처방이라는게 별것 없다. 그냥 사부 옆에서 자주 있어주면 된다.”

그러면서 의원이 화중동거만이 유일한 처방이라고 했다는 말을 가르쳐 주었다.

자정경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급한 일 아니면 가급적 사부님 곁을 떠나지 않겠어요. 아니 그럴게 아니라 오늘 밤부터 사부님 곁에서 자겠어요.”

“도…동침을?”

“그게 어때서요. 아픈 사부님을 치료하기 위한 의술 행위인데 뭐가 어때요?”

자정경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태연히 말했다.

“여인의 향기와 손길을 많이 접할수록 되살아날 가능성이 높다면서요. 제자이기 전에 저 여자에요. 당연히 옆에서 힘껏 도우는게 사제간의 의리 아니겠어요.”

“헛헛! 너의 마음이 너무 따뜻하구나. 그것만으로도 이 사부는 만족하고 기쁘게 생각한다. 내가 제자 하나는 잘 둔것 같구나. 아무튼 너의 성의는 고맙게 생각하지만 동침은 불가하다.”

“왜 안된다는 거에요. 옆에서 백번을 알몸으로 뒹굴어도 사부님은 제자를 건드리지 못하는데?”

동천몽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자정경의 말이 못이 되어 가슴에 박혔다. 자신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뱉어낸 말이었지만 사내답지 못하다는 조롱으로도 들렸다.

“두고보세요. 기어코 전 사부님을 살리고 말테니까?”

동천몽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설혹 네가 수고하여 살린들 무엇하겠느냐?”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살려봤자 소용이 없다니.”

“사부의 말은 한마디로, 회복되어봤자 사용할 수가 없다는 얘기니라. 아무리 칼을 갈고 닦으면 뭐하느냐? 사용하지 못하면 날 무딘 칼 보다 못한 법이거늘.”

“왜 사용을 못해요?”

동천몽이 인상을 썼다.

“정녕 몰라서 묻느냐?”

“가만 그러고 보니.”

자정경의 눈이 예리한 빛을 발했다.

그제 서야 동천몽이 또 하나 고민하는 이유를 알아 낸 것이었다. 대법왕이니 당연히 여인을 곁에 둘 수 없다. 그것은 강제된 법은 아니지만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럼 어떡하자는 거예요. 살려요 말아요?”

자정경이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동천몽이 조용히 말했다.

“사…사용하지 못해도 죽어 있는 것보다는 살아 있는게 더 낫지 않겠느냐?”

동천몽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자정경은 걸어가는 동천몽을 측은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한참을 쳐다보던 자정경이 돌연 눈을 빛내더니 쪼르르 달려가 동천몽의 팔짱을 끼었다.

척!

동천몽은 모른 체 그대로 걸었고 팔짱을 낀 자정경이 웃으며 말했다.

“사부님.”

“….”

“제자가 부르면 대답을 하셔야죠. 사부님.”

“말하거라.”

“맘대로 해요?”

홱!

동천몽이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너무 어이 없는 얼굴이었고 자정경이 베시시 웃었다.

“만지고 싶으면 만지고 원하는 것 있으면 말하세요. 아까도 말했지만 사부님의 치료를 위한 길이라면 이 제자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아미타불!”

“그것도 제자가 죽을 때까지 입 닫아 드릴께요. 그러니 얼마든지 요청하세요.”

동천몽이 정색하여 말했다.

“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 하느냐?”

“왜 말이 안되요?”

“간두자꾸나.”

다시 걸어가는 동천몽을 따라 붙으며 자정경이 큰 소리로 말했다.

“괜찮다니까요.”

“못들은 것으로 하겠다.”

동천몽이 돌아서서 눈을 부라렸다.

“한 번 만 더 여자 입에서 나와서는 안될 말을 뱉으면 널 가만 안두겠느니라.”

“맘대로 하세요. 난 포기 않을 거에요.”

“네 이놈. 네가 알다시피 사부는 대법왕이니라. 아무리 병을 고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행해야 할 일이 있고 행해서는 안될 일이 있느니라.”

“사부님은 진짜 멍청이에요.”

띠용!

동천몽의 두 눈이 튀어나왔다.

자정경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대법왕은 사람 아닌가요? 불손한 목적을 갖고 행해지는 것도 아닌데 뭐가 어때서요. 강호에 명숙입네 하면서 뒤로는 엄청 호박씨 깐 인간들 많아요.”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자정경이 더욱 목청을 높였다.

“수백 수천 명의 신도들 앞에서는 부처님의 나라가 어떻고 부처님의 삶이 어떻다는 둥 피를 토하면서 뒤로는 자기네들 잇속 챙기느라 얼마나 바쁜데요. 얼마 전 황실의 발표에 의하면 강호 명숙들의 자식들이 변방의 무사로 가는 비율이 일반 백성들 자식들보다 훨씬 떨어진데요.”

“저…정말이더냐?”

“중원의 금란사를 비롯해 순복사 등 내노라하는 대형 사찰의 수장들 비리가 얼마나 크고 광범위 한지 대법왕님은 모를 거예요. 사찰 재산을 마치 사유재산인양 땅 사고 고급 마차 사는데 물쓰듯 썼어요. 그래놓고도 양심에 거릴낄 일 없다면서 얼마나 뻔뻔하게 고개들고 다니는데요. 그런데 병을 고치기 위해 조금은 야해 보일수 있는 행동을 취한다고 해서 뭐가 잘못되느냔 말이에요.”

“네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구나. 어찌 다른 사람도 아닌 내 노라 하는 명찰의 수장들이 그런 나쁜 짓을 한단 말이냐?”

“그 뿐인 줄 아세요. 사부님처럼 치료를 위해서가 아니라 즐기기 위해 여신도들을 건드리기도 한다고 해요.”

“아미타불! 아무튼 치료가 실패로 끝나도 좋으니 어느 선을 넘는 건 원치 않는다. 그렇게 알거라.”

“어휴 답답해.”

“이제 그 얘기 그만 하고 어서 갈 길이나 가자꾸나.”

동천몽이 또다시 자정경으로부터 무슨 말이 나올까 싶어 몸을 날렸다. 신법을 펼쳐 날아가는 동천몽을 보며 자정경이 투덜거렸다.

‘사부님 바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이더니 자정경 또한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의 모습은 잠시 후 관도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동중조초를 구하러 떠난 무사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의원은 치료는 빠를수록 좋으며 열흘이 고비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이 팔일 째였다. 아침부터 동오룡은 정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천상각은 정문은 예전과 달랐다. 수많은 마차들과 상인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했는데 근자에 이르러서는 그 수요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 이유는 무림맹에 의해 천상각이 곧 공중분해 될 것이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모두가 떠나고 있는데 몇몇 군소상가에서는 끝까지 옛정리를 내세워 거래를 원했고 한사코 다른 상가로 거래처를 옮기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동오룡은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자신이 인생을 헛살아오지 않았음을 느끼며 행복했다.

아랫사람들이 들어갈 것을 권유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올랐고 동오룡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 오늘을 포함해 사흘이란 시간이 능씨의 생사를 결정한다고 생각하니 한시도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열흘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면 능씨는 죽는다. 동중조초를 구해와도 시기적으로 늦어 효과를 볼 수가 없다고 했다.

“각주님 그만 들어가시지요.”

보다 못한 듯 정문을 지키고 위사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각주님께서 이렇게 애를 태운다고 해서 그들이 빨리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사옵니까? 건강을 해칠까 염려되오니 그만 들어가시지요. 무슨 일이 생기면 소인이 곧바로 연락 드리겠나이다.”

위사가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쳐다본다.

동오룡이 위사를 쳐다보았다. 위사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고 그의 두 눈에서는 진심으로 자신을 염려하는 빛이 가득했다.

“너 이름이 무엇이더냐?”

“소…송악이라 하옵니다.”

“나이가?”

“서른 둘이옵니다.”

동오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구나. 그렇게 날 염려해주니, 너 같은 아이가 한명만 더 내 곁에 있었더라도 본각이 이렇게 위기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인데.”

자신을 염려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인지 몰랐다. 한마디 말이 이렇게 용기를 주고 자신을 일깨워 주는 격려가 될지 몰랐다.

송악의 말처럼 자신이 애를 태운다고 그들이 빨리 돌아올 것도 아니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마음을 굳게 먹어야 했다.

“알겠다. 무슨 일 있거든 속이 연락해다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어서 들어가소서.”

동오룡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몸을 돌렸다.

동오룡은 송악의 말에 용기를 얻어 두 주먹을 굳세게 쥐었다. 살다보면 수많은 위험이 찾아든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쓰러지거나 비틀거리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이다. 분명한 위험이긴 하지만 반드시 헤쳐 나가고 말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덜컹!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런데 지독한 비린내가 코를 파고들었다.

고개를 쳐들던 동오룡이 소스라칠 듯 놀랐다. 침상위에 누워 있어야 할 능씨가 없었다. 그리고 곁을 지키던 의원은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이…이런!”

동오룡은 당황했다. 쓰러진 의원을 부축해 일으켰다. 아직 미약하나마 숨은 쉬고 있었다.

“이…이보게 왕의원 날 알아보겠는가?”

의원은 숨만 쉴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왕의원, 누가 집사람을 데려갔는가? 누가 왔는가?”

꼬르륵!

하나 잠시 후 의원의 목구멍에서 가래 잠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동오룡은 의원을 뉘여 놓고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건너방과 주방은 물론 녹풍원 뒤뜰까지 살폈다. 하지만 의식을 잃고 있던 능씨가 여기까지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납치를 당한 것이 분명했다.

“거기서 뭐하십니까?”

동오룡이 넋을 놓고 서 있을 때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동천혁과 동천화가 다가왔다.

“아버님.”

동천혁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무슨 일 있으시옵니까? 안색이.”

동천혁의 두 눈이 빛났다. 순간적으로 혹시 자신들보다 앞서서 동천비나 동천몽이 모든 것을 가져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득 들었다.

“설마.”

동천화가 눈을 빛냈다.

“말씀 좀 해보세요. 왜 그렇게 넋을 놓고 계시죠? 아버님.”

동오룡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희 어미를 누군가 납치해갔느니라.”

“어머니라뇨? 우리에게 어머니가 어디있어요? 아 그 계집 말에요. 난 또 깜짝 놀랐잖아요.”

동천화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잘됐군요. 가뜩이나 꼴 보기 싫은 계집인데, 앓던 이가 빠졌네요. 그렇지 않아요. 오라버니.”

동천혁이 빙긋 웃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아버님께서 그 계집의 눈치를 보느라 우리에게 주고 싶은 유산도 마음대로 건네지 못했는데 마침내 하늘이 우릴 돕는구나.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아버님도 더 이상 그 계집 눈치 볼 일이 없어졌으니 어서 유산의 일부라도 주십시오.”

동오룡이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동천혁이 웃으며 말했다.

“할 말 있으세요? 그럼 하세요.”

동오룡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걸어가는 동오룡을 보며 두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뒤를 따랐다.

“각주님!”

일단의 사람들이 날아왔다.

동오룡의 눈이 커졌다. 사천으로 동중조초를 구하러 떠났던 무사들이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초췌한 행색이 얼마만큼 능씨를 살리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려왔는지 짐작이 되었다.

일제히 동오룡 앞으로 달려와 허리를 구부렸다.

“각주님. 동중조초를 구해왔사옵니다.”

그러면서 한 무사가 품에서 흰 종이에 둘둘 말 린 것을 풀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잎사귀가 다섯 개 달린 한 뿌리 약초가 모습을 드러냈다.

“받으소서.”

화지만 동오룡은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부하들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듯 동오룡을 쳐다보았다.

“고생들 했다. 하지만 한반 늦었구나.”

부하들이 놀라며 외쳤다.

“설마 가모님께서 돌아가셨단 말입니까?”

“닥쳐라. 감히 누가 가모님이란 말이냐?”

동천혁이 부하들을 향해 매섭게 소리쳤다.

“당장 물러들 가라. 여긴 네놈들이 있을 곳이 아니니라.”

“소…속하들은 그만 물러가옵니다.”

부하들이 주춤 거리더니 몸을 돌려 사라졌다.

“아버님 뭐하세요. 어서가셔야죠.”

동오룡이 돌아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두 남매를 쳐다보는 동오룡이 갑자기 조용한 미소를 띄었다.

“오냐, 주겠다. 내 자식들이 달라고 하는데 내가 어찌 마다 하겠느냐?”

“진작 그러셨어야죠.”

“역시 아버님이세요.”

“따라 오너라.”

동오룡이 앞장을 섰고 두 사람의 미소를 가득 물고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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