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해후
동오룡이 방 가운데 장판 한쪽을 들췄다. 장판 아래는 나무로 잇대어 있었는데 그중 한 조각을 들어올리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조들이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마련해 놓은 비고(秘庫)중 하나였다.
역대 천상각의 각주들은 자신 대에 비고에 얼마만큼 많은 돈을 저장해 놓느냐로 능력을 자랑했다. 그래서 선대보다 더 많은 자금을 숨겨두기 위해 노력했고 그러다보니 이젠 누구도 사방에 널린 비고에 저장된 금은 보화들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을 할 수조차 없었다. 동오룡은 어쩌면 천상각 사상 자신이 가장 무능한 각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리 펼 시간이 없었다. 워낙 수양하는 승려들이 많기도 했지만 도무지 장례가 하루도 끊이질 않았다. 몰래 잠입해 들어 온지 어느덧 한 달 가까이 되는데 동천몽의 그림자도보지 못했고 첫날부터 계속 염습이었다.
처음에는 시신이라는 것을 대하고 보니 무섭기도 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이력이 붙어 망설임 없이 시신을 닦고 머리를 빗겼다. 매장도 아니고 들짐승의 먹이로 주기 때문에 염습이라고 해도 별것 없었다. 간단히 시신을 행색과 옷차림새를 단정히 해주는 것이 염습의 전부였다.
그러면 소속 집단의 승려들이 시신을 내어다 홍산의 골짜기에 가져다 버린다. 그것으로 장례는 끝이었다.
오전에 이미 한 건의 염습을 한 상도는 장명각 마루에 걸어 앉아 두 눈을 빛내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늘 만큼은 기필코 대법왕이 있는 백궁전을 가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가진 돈에서 상당액을 장명각주를 구워삶는데 썼기 때문에 자신이 어딜 가든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카악!
가래침을 뱉은 상도가 하늘을 살폈다.
아직 오시가 되려면 좀 더 기다려야 했다. 오시가 되면 낮 예불이 있다. 그때만큼은 백궁전이 약 이각정도 개방되는데 그때는 누구든지 출입이 가능하고 운이 좋으면 대법왕도 뵐 수 있었다. 대법왕은 자주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이층 창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내 순례객들을 축복했다.
상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부지런히 가면 백궁전에 도착할 때쯤 문이 열릴 것이었다. 대충 옷매무새를 살핀 상도가 장명각을 벗어났다.
장명각에서 백궁전을 가려면 장로원과 백상전을 지나야 한다. 장로원은 십이법신으로 불리는 포달랍궁 최고 의결기관으로 경계 또한 무게 만큼이나 살벌했다.
예상대로 두 명의 호위승려가 앞을 막아섰다.
상도는 품에 지니고 있던 장명각 승려의 신분패를 내 밀었다. 두 승려가 고개를 끄덕이며 통과를 허락했다. 장명각은 비록 궂은일을 하지만 포달랍궁에서는 상당히 존중을 받는다.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한다는 것과 죽은 시신을 정성스럽게 다듬어주고 챙기는 것이 야 말로 최고의 자비이자 공양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장로원을 지나 동문 앞을 건너 오르막길로 들어서자 한 채의 흰 전각 모습을 드러냈다.
백상전으로 코끼리 영혼을 모신 곳이었다. 이곳은 성지이기 때문에 지날 때에도 경건해야 한다.
자신은 종교가 없다. 부처는 물론이고 누구도 믿지 않는다. 요즘의 종교라는 게 삶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돈 뜯어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게 상도 생각이었다.
상도는 백상전을 쳐다보며 미친놈들이라고 욕설을 내 뱉었다.
백상전을 순례하는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 향을 피우고 코끼리 영정 앞에 엎드려 절을 하는 모습이 눈에 띠었다. 상도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고 지나갔다.
백상전을 지나 조용한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잔솔가지 사이로 멀리 백궁전의 위용이 언뜻 보였다. 자신의 앞 뒤로 십여명의 순례객들이 오체투지로 백궁전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들의 깊은 불심에 상도는 가슴이 찡해짐을 느꼈다. 허름하고 여유롭지 못한 삶인데도 살아생전 순례 차 포달랍궁을 찾아오는 것을 그들은 최고의 영광이자 기쁨으로 생각 한다. 수백리 길을 배를 땅에 대고 엎드려 절을 하며 오는 것이다. 손바닥 까짐을 방지하기 위해 목갑(木匣)을 끼고 엎드려 절을 한다. 자신은 걸어가기 때문에 그들을 금방 추월했는데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웅성웅성!
백궁 앞에는 이미 수많은 순례객들이 들어와 절을 하고 있었다.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단 한 사람도 화려한 차림새는 없고 모두가 남루한 행색에 검게 탄 얼굴이었다.
일부는 이층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이따금 대법왕이 저 창문을 열고 순례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준다. 그런 행운이 나타나길 빌며 그들은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상도 역시 이층 창문이 열리고 대법왕의 얼굴이 나타나기만을 소원하고 소원했다.
하지만 출입을 통제할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이층 창문을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던 순례객들 얼굴에도 다소 아쉬운 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상도가 아쉬운 마음으로 등을 돌릴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도는 자신도 모르게 번개처럼 돌아섰고 순례객들의 입에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대…대법왕이시여.”
“위대한 스승이며 우리의 어버이시여.”
이층 창문에 한 사람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빛 가사를 걸치고 순례객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사내의 모습에 상도의 눈은 커졌다. 웅장했고 엄숙했으며 도도하기까지 했지만 입가에 미소는 한 없이 자비롭고 어린아이처럼 해맑았다. 그러나 상도가 놀란 것은 그런 그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마…막내 도련님’
그것은 그토록 찾아 헤매었고 능씨를 눈물로 살게 만들었던 장본인이었다.
자신에게 유일하게 미소를 주었던 천상각의 인물이었고 언젠가 추위에 떨며 호위를 나가는 자신에게 모피 장갑과 목도리를 그냥 웃으며 던져 주었던 그 사내였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가도 자신이 나타나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제법 자세를 똑바로 갖추려고 했던, 망나니였지만 나름대로 예의를 갖고 있던 사내였다.
동천몽은 순례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축복을 해주었고 모두가 감동과 기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상도는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도 않았다. 이 기회가 아니면 영원히 자신이 갖고 온 뜨거운 사연을 전달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있는 힘껏 외쳤다.
“도…도련님, 대법왕님.”
순례객들이 지른 함성 때문에 못들은 듯 동천몽은 이쪽을 보지 않았다. 상도는 내공을 실어 외쳐 말했다.
“대…대법왕님, 위대하신 대법왕 소인 상도 이옵니다. 대법왕님 이쪽을 봐주소서.”
뚝!
열심히 손을 흔들던 동천몽의 동작이 멈췄고 고개가 상도를 향해 돌려졌다.
상도는 손을 흔들며 더욱 힘껏 외쳤다.
“소인 상도이옵니다. 대법왕님 불쌍한 소인을 모른체하지 마옵소서.”
탁!
그런데 갑자기 문이 닫혔다.
갑자기 문이 닫히며 주위는 정적이 찾아 들었고 순례객들은 아쉬운 얼굴로 발길을 돌렸다.
상도는 닫힌 문을 보며 넋을 놓았다. 여러 행동을 보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자신을 쳐다보았던 것은 내공이 실린 커다란 외침 때문인 듯 했다.
상도는 자신의 눈을 믿었다. 틀림없는 동천몽이었다. 죽어 시체가 되고 뼈가 가루가 되어도 구별해 낼 수 있는 얼굴이었다.
상도는 한동안 혼란에 시달렸다. 능씨 뿐만이 아니라 자신도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동천몽이었다. 그런데 그는 문을 닫고 냉정히 모습을 감춰 버린 것이었다.
백궁전을 지키는 승려들이 순례객들을 밖으로 유도했고 상도에게도 나가줄 것을 정중히 요청했다.
상도는 축 쳐진 어깨로 돌아섰다. 잘못 보았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동천몽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자신을 보고 절대 고개를 돌린 동천몽이 아니었다.
“상도 아저씨.”
뚝!
상도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섰다.
너무도 귀에 익은 음성이 등뒤로부터 들려왔다.
상도는 잔뜩 경직되어 돌아섰다. 한 사내가 그곳에 서 있었다. 아니 그건 사내가 아니라 대법왕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 이층 창가에서 내려다보던 자비스런 웃음이 아니라 짓궂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소주의 개고기로 가문과 부모 형제의 얼굴에 먹칠을 하며 다니던 사고뭉치 동천몽이었다.
“대…대법왕님!”
상도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뭔가 말을 하려는데 앞이 캄캄했고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두 뺨으로 뜨거운 눈물만이 미친 듯이 흘러내렸다. 기억을 할 수 있는 나이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던 능씨가 동천몽의 생일날 주인 없는 상을 차려놓고 눈물을 흘리는 광경 앞에서도 석상처럼 구경했던 자신이었다. 자신과 같이 능씨를 호위했던 복상이 동천비에게 맞아 죽었을 때에도 울지 않았다. 그의 무덤을 파고 묻으면서 타고난 서로의 서러운 운명을 탓하자고만 했을 뿐 유일한 친구의 죽음에도 당당했던 자신의 눈에 문제가 생긴 듯 했다.
주르르르!
아무리 그치려고 해도 빌어먹을 놈의 눈물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린다.아무리 훔치고 또 손등으로 닦아도 끝이 없다.
“도대체 언제까지 울거요? 내가 아는 상도 아저씨는 절대 울지 않기로 유명했던 것 같은데.”
“으아아앙!”
급기야 상도가 목을 놓고 소리쳐 울어버렸다.
그러자 동천몽 주위를 지키고 있던 천룡구십구불의 승려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흉이 잡혀도 좋았고 울보라고 놀려도 좋았다. 낯선 승려들이 자신을 구경하듯 바라보는데도 창피하기는커녕 좋아 미칠 것 같았다.
“흑! 으으어어엉!”
상도의 눈물로 지면에 흙탕물이 생겼다.
“아저씨!”
동천몽이 쭈그리고 앉아 상도의 한 쪽 팔을 붙잡았다.
“그만 하세요. 주위에서 쳐다보잖아요. 진짜 챙피 다 살거예요.”
“허헝!”
“일어납시다.”
상도는 일어섰다. 하지만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동천몽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울고 있는 자신을 놀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일직승! 이분을 안으로 모시거라.”
동천몽이 한쪽에 서 있는 승려를 향해 명령했고 그가 다가와 상도에게 공손히 말했다.
“안으로 드십시오. 시주.”
동천몽이 앞장 섰고 상도가 일직승의 안내를 받으며 뒤를 따랐다.
상도는 동천몽을 따라 백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상도의 눈이 커졌다. 백궁전 안은 무척 넓었지만 의외로 소박하고 단촐했기 때문이었다. 대법왕이 정사를 보는 곳이기 때문에 주눅이 들만큼 빛이 나는 곳일 줄 알았다.
일직이 나가고 동천몽이 돌아섰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고 상도가 다시 무릎을 꿇었다.
“대법왕님!”
“평소처럼 부르시오. 단둘인데 뭐 어쩌겠소?”
“아니옵니다. 그럴수는 없사옵니다.”
“그나저나 언제부터 아저씨가 걸핏하면 무릎을 잘 꿇었소? 내 기억에 의하면 내 앞에서는 한 번도 꿇은 적이 없었던 것 같소만?”
상도가 어색해 하자 동천몽이 웃으며 말했다.
“앉읍시다.”
동천몽이 한쪽의 탁자를 가리켰고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자리를 잡았다.
“어떻게 들어왔소?”
상도는 들어온 방법을 얘기했다.
동천몽이 인상을 찌푸렸다.
“본궁에 그런 허술한 일이 있었단 말이오?”
상도는 아차했다. 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뱉어 버린 뒤였다. 보나마나 동천몽의 예전 성질을 볼 때 아무리 대법왕이 되었다고 하지만 장명각주와 백면자를 절대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그래 무슨 용건으로 그런 고생을 하며 들어왔소?”
“가…가모님께서?”
“어머니에게 무슨 일 있소? 말해보시오?”
상도는 길게 한숨을 내 쉬고 말했다. 지난 삼년 동천몽을 찾기 위한 능씨의 처절한 몸부림을 소상히 말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동천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창가로 다가가 서산으로 조금씩 떨어져 가는 해를 바라보았다.
하루도 어머니를 잊어 본적이 없었다. 단지 자신이 곁을 떠났기 오히려 형들의 감시와 핍박에서는 좀더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상도의 말을 듣고 보니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편의적인 생각이었을 뿐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 편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 어머니의 건강은 어떠시오?”
“건강은 크게 나쁘지는 않습니다. 다만 도련님 때문에 거의 웃음을 잃었지요.”
동천몽은 한숨을 쉬었다.
앞서 언급 했듯 자신이 사라지면 어머니가 좀 더 편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상도의 말을 듣고보니 아주 잘못되었음을 느낀 것이다. 이렇게까지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마음고생을 많이 하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잘 계시오?”
“예!”
사실 상도는 천상각이 처한 현실을 잘 모르고 있었다. 오로지 능씨의 지시로 동천몽 찾는 데만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밖으로부터 천장금왕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승 금왕이옵니다.”
“들거라.”
문이 열리고 천장금왕이 들어섰다. 이미 상도에 대한 보고를 밖에서 들었는지 별로 놀라지 않았다. 다만 눈으로 가벼운 예를 취했고 상도 또한 얼른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 있느냐?”
“저어! 밖에 손님이 와 계시옵니다. 동천완 시주라고?”
“두…둘째공자님.”
상도가 놀라 소리쳤다.
동천몽이 눈을 치켜떴다.
“어딨소?”
“빈객당에.”
“어서 데려 오시오. 당장.”
“알겠사옵니다.”
천장금왕이 나가고 동천몽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미 사불각의 정보를 통해 무림맹과 천상각의 사이가 예전처럼 화목하지 않다는 얘긴 들었다. 그런데 상도에 이어 동천완이 찾아온 것을 보면 뭔가 일이 생겼음은 분명했다.
“혹시 형님께서 날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소?”
“전혀.”
유일하게 자신을 챙겨주었던 형이었다.
동천완에 의해 목숨까지도 건졌었다. 동천비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귀띔을 받고 피했던 것이었다. 유난히 정이 많아 모질게 자신의 이익을 남겨야 하는 장사꾼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고 그래서 적지 않게 부친의 꾸중을 들었다.
언젠가 밤 늦은 시간에 자신을 찾아와 울면서 상인의 길을 가는 것이 정말 싫다고 하소연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은 책을 보며 선비의 길을 가고 싶은데 운명은 왜 이렇게 가혹하느냐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 기억이 생생했다.
“대법왕이시여 동천완 시주 도착 했사옵니다.”
“어서 모시거라.”
문이 열리고 천장금왕을 따라 동천완이 들어섰다. 가장 먼저 상도가 다가가 큰 절을 했다.
“둘째 도련님 소인 상도이옵니다.”
동천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니 상도 아저씨가 여긴 어인 일이오?”
“그…그럴 일이 있사옵니다. 그보다 어서 대법왕님을 뵈소서.”
상도가 한쪽으로 비켜섰고 동천완이 동천몽을 쳐다보았다. 동천몽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한동안 동천완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형님.”
“네…네가, 아니 대법왕님께서 정녕 세속의 소인 동생이란 말이옵니까?”
“대법왕이라뇨 그냥 천몽이라고 부르세요.”
순간 천장금왕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그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아니옵니다. 감히 소인이 어찌 그런 무엄한 행동을 할 수 있겠나이까?”
“형님.”
동천몽이 다가가 와악 동천완을 끌어안았다.
두 형제는 한 동안 떨어질 줄 몰랐고 상도가 또다시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짰다.
‘젠장!’
자신이 생각해도 평소 자신과 너무 다르다. 그래서 무척 화도 나고 어색하면서 부끄러웠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눈물을 계속 찔끔 거렸다.
동천몽이 동천완의 양어깨를 쥐고 얼굴을 보았다.
“얼굴이 좋지 않군요. 아픈 곳은 없습니까?”
“소인은 건강 하옵니다.”
동천몽이 다시 한 번 와락 동천완을 끌어 안은 뒤 의자에 앉을 것을 원했다.
“금왕도 앉으시오.”
천장금왕이 머뭇거리다가 거듭된 동천몽의 요청에 의자를 잡고 앉았다.
두 형제는 잠시 서로에 대한 안부를 묻더니 옛날 얘기를 꺼냈다. 서로가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었던 듯 코 흘리게 시절에서부터 세상을 어느 정도 아는 나이가 될 때까지 서로 친하게 지냈던 얘기는 여느 집안의 형제들과 다르지 않았다.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도 했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으며 아버지 몰래 물건 팔고 남은 돈을 숨겨 놨다가 그 돈으로 술 먹던 대목에서는 서로가 깔깔거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단지 형님들 애기가 나올 때면 동천몽의 표정이 굳어졌다.
세 번째 찻잔이 바뀌고 나서 동천완이 정색을 하며 찾아온 애기를 꺼냈다.
동천완은 천상각이 처한 작금의 상황에 대해 말했다. 무림맹이 시시각각 숨통을 조여 온다는 말에도 동천몽은 표정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상도가 놀라고 있었다. 자신은 오로지 능씨 호위에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에 전혀 모르고 있었던 사실들이었다.
동천완은 한 가지 사실도 빼어 놓지 않고 모두 털어놨다. 가게가 위기에 빠지자 형제들끼리도 서로 하나라도 더 챙기기 위해 혈안이 되고 사분오열되었다는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게 우리 형제들이지.”
동천완의 표정이 굳어졌다. 동천몽의 말속에 가혹한 비아냥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동천몽이 당했던 것을 옆에서 생생하게 지켜봤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이미 몇 번을 죽어야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동천몽은 놀라우리만치 적응을 해 나갔고 형들이 뭘 원하는지를 알면서 철저히 스스로를 망가뜨렸다.
“그래서 내게 뭘 하는 것이오?”
동천몽이 정색하고 물었다.
동천완이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일단 집안을 살려놓고는 봐야 할 것 아니겠사옵니까?”
“천비 형을 살려두자는 것이군.”
“꼭 큰 형이 아니라도.”
“차기 천상각의 주인은 천비 형이오. 그러니 천비형을 살리자는 것 아니오.”
동천완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유야 어쨌든 그런 꼴이군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가문이 무너지는 것을 구경할 수는 없고.”
“금왕.”
“하명하소서 대법왕님.”
“수라옥으로 가자.”
갑자기 수라옥을 가자는 말에 천장금왕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곧바로 일어나 앞장을 섰고 동천몽이 동천완을 돌아보았다.
“따라 오십시오.”
밖으로 나서자 동천몽이 말했다.
“수라옥은 본궁의 뇌옥입니다. 한 번 들어가면 좀체 생전에는 나올수 없지요.”
동천완은 느닷없이 자신을 수라옥으로 데려가는 동천몽의 저의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어차피 가면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었다.
수라옥 앞에는 이미 연락이 닿은 듯 옥장과 옥사 이십여명이 도열해 있다가 동천몽이 나타나자 큰 소리로 예를 취했다. 옥장은 곧바로 뇌옥의 문을 열었다.
거대한 동굴 가운데가 좌우로 벌어지고 옥장을 앞세운 일행은 수라옥 안으로 들어섰다.
천연동굴에 손질을 가미해 만든 수라옥은 천장에서 쏟아지는 야명주 말고는 어떤 빛도 없었다. 어두침침한 가운데 종유석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인기척에 박쥐들의 날개 짓이 더욱 음산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왕왕 어둠속에서 파란 눈이 나타났는데 그들의 죄수들이었다.
오십여장쯤 들어간 옥장이 벽에 있는 기관 장치를 누르자 바닥이 벌어지고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덜컹!
일행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고 뇌옥 밑에는 또 하나의 뇌옥이 있었다.
다시 울퉁불퉁한 바닥이 나타났고 십여 장 가량 걸어가자 팔뚝만한 쇠창살로 된 문이 나타났고 그 안에 한명의 인물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아미타불! 사주는 눈을 뜨시오.”
천장금왕이 조용히 입을 열어 말했다.
하지만 흑의인은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천장금왕이 버럭 화를 내려고 들자 동천몽이 내버려 두라는 듯 손을 들어 제지 시켰다.
흑의인은 뢰음사 사주 유마음선이었다.
“나 대법왕이오. 당신에게 한 가지 묻고자 왔으니 대답해 주시오.”
대법왕이라는 말에 눈을 번쩍 떴다.
그 또한 동천몽은 얘기만 들었을 뿐 아직 실물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동천몽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유마음선의 눈빛이 여러 차례 변했다.
“내가 속았군.”
유마음선이 한숨을 쉬었다.
“나이도 어리고 아주 보잘 것 없다고 했는데 가히 천하를 호령하고도 남을 기상이로군. 핫핫핫! 이토록 뛰어난 준걸인줄 알았다면 진작 찾아뵙고 문안을 올리며 칠십 년 전의 전쟁을 사죄하고 용서를 구했을 것을.”
유마음선의 얼굴에 후회의 빛이 나타났다.
“크하하하!”
뇌옥이 떠날 듯한 광소를 흘렸는데 유난히 처절하게 들렸다. 동천몽은 묵묵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웃음을 그친 유마음선이 동천몽을 향해 말했다.
“나 유마음선이라고 하오이다.”
동천몽이 가볍게 웃었다.
“고생이 많소이다. 이런 곳에서 얼굴을 뵙게 되어 조금은 안타깝구려.”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소이까? 물어보시오?”
“당신에게 본궁을 공격하도록 지시를 한 사람이 있다고 했소? 물론 내가 흑수당을 돕기 위해 궁을 떠나리란 것까지 알려준 사람이겠지. 뢰주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소이다.”
유마음선은 망설이지 않았다.
“대법왕도 알고 있지 않소이까?”
“당신 입을 통해 듣고 싶다고 얘기 했잖소?”
“동천비오. 천상각의 맏아들 말이오.”
“으음!”
순간 동천완이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다시 한 번 말해주겠소?”
“동천비이오. 그가 대법왕을 죽이면 황금 십만관을 주기로 했소이다. 그 돈이면 부족한 본사의 재정 해결은 물론이려니와 칠십년 전 실패로 궁핍함을 면치 못하던 본사가 일어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오. 그래서 망설일 것도 없이 제안을 받아 들였지요.”
“확실하오?”
동천완이 물었다.
유마음선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본선이 거짓말 따위나 하는 위인으로 보이시오?”
“고맙소. 뢰주.”
동천몽이 돌아서서 동천완을 바라보았다. 동천몽이 자신을 쳐다보는 이유를 안다. 그리고 그가 왜 이곳으로 자신을 데리고 왔는지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자신이 한번만 모든 것을 접고 동천비를 도와 달라고 요청하자 데려 온 것이었다. 아직까지 자신을 죽이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고 그로 인해 애꿎은 포달랍궁과 뢰음사의 수많은 제자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척!
문 앞에 다다른 동천몽이 돌아서더니 천장금왕을 향해 말했다.
“뢰주를 풀어주시오.”
“네엣?”
천장금왕이 경악했다.
동천몽이 조용히 말했다.
“이제 과거일일 뿐이오. 이긴 자는 달라야 하는 것이고, 그만 풀어주시오.”
그러자 유마음선이 큰 소리로 말했다.
“대…대법왕이시여 진실로 감사하나이다. 큰 자비에 소인은 그저 감격할 따름이옵니다.”
동천몽이 돌아섰다.
“뢰주 한마디만 하겠소.”
“경청하나이다.”
“포달랍궁은 한번도 뢰음사를 속문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소. 모든건 당신들 마음이 그렇게 만들어낸 것 뿐이오.”
자격지심을 갖지 말라는 뜻이었다. 강하다고 해서 절대 횡포를 부리거나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난 공존공영을 원하오. 서장은 중원과 달리 평화로워야 하오. 그것이 앞으로 내가 생각하는 대법왕의 통치이념이오.”
드르릉!
동천몽이 계단을 걸어 올라 사라졌고 유마음선의 눈이 부릅떠졌다.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했었다. 한마디로 대법왕이라고 다 대법왕이냐는 비아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히 활불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천완은 포달랍궁을 떠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제 다른 방법이란 없었고 동천몽이 아니고서는 천상각의 미래는 없었다.
자신이 가지 않고 버티고 있으면 동천몽의 마음이 움직이리라고 나름대로 계산하며 빈객당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뻔뻔하다고 손가락질해도 하는 수 없었다. 일단 집안은 살려놓고 봐야 했다.
그런데 더욱 절망적인 소식이 날아들었다. 동생 동천혁에 의해 어머니 능씨의 팔이 잘렸다는 소식이었다. 따라온 시위무사들까지도 안색이 굳었다.
이제야 말로 모든 건 물 건너갔다고 봐야했다.
가뜩이나 자신을 죽이려한 동천비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데 능씨 팔까지 잘린 사실을 동천몽이 안다면 그 반응은 뻔했다.
“절대 이 사실을 대법왕께서 알면 안 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시위무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천완은 무거운 얼굴로 탄식했다. 이 대로 간다면 천상각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수백 년 동안 강호제일상가로 천하의 시장을 주물러 온 불멸의 신화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
동천몽이 아니면 솟아날 방법이 없었다.
“공자님 차라리.”
시위무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해보거라.”
“소인의 생각입니다만 차라리 가모님의 소식을 전해 주는 것이 어떨런지요.”
“임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미친놈.”
동료들이 눈을 흘겼다.
그러나 시위무사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 오히려 그것이 자극이 되어 막내공자님께서 마음을 바꿀지도 모르잖아.”
동천완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으로서는 가문이 살아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설혹 대공자님을 용서 않는다고 해도 가문이 존속될 수만 있다면 해볼 만 한 일입니다. 사람이든 가문이든 하나만 잃어야지 둘 모두를 잃을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그제 서 야 동료무사들도 표정을 바꾸었다.
전혀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동천완 또한 눈을 빛냈다. 한번쯤 진지하게 숙고해 볼 가치가 있는 제안이었다.
백궁 전 뒤뜰에서 자정경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수련을 한 듯 그녀의 흑의는 땀으로 젖었고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동작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했고 온 힘을 다했다.
촤촤촤!
검이 연속 세 번을 찌르고 뒤이어 대각선으로 매섭게 떨어졌다.
그러자 강한 검풍이 일어나며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연속해서 칠초식을 더 펼친 후 검이 수평을 만들며 멈춰졌다.
“학…하학!”
거친 숨소리에 어깨가 들썩였고 잠시 호흡을 안정시킨 그녀는 검을 내리며 말했다.
“어때요 사부님, 전번 과 비교해서?”
동천몽이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고 있었는데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아졌구나. 일…일취…일취…그러니까?”
“일취월장요.”
“으휴! 요즘 들어 왜 이렇게 정신이 깜빡 깜빡하는지 모르겠구나. 그렇다.”
동천몽의 얼굴에 짜증이 베었다. 어떻게 된 것이 걸핏 하면 사자성어가 튀어 나왔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절대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걸핏 하면 튀어 나오므로 미칠 지경이었다. 제자 앞에서 잔뜩 위엄을 갖추려고 의식적으로 생각 하다 보니 엉뚱한 사자정어가 튀어 나온 것이다. 자정경 앞에서만큼은 무식을 폭로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자정경에게 가르치고 있는 검법은 포달랍궁의 삼대검법중 하나인 엽전류(獵全流)다. 사실 엽전류는 철저히 공격적인 검법으로 가장 완벽한 사냥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절정에 이르면 가히 패도적이라 한만큼 살인적이었다. 그래서 포달랍궁 제자들도 가급적 익히려들지 않는데 자정경은 속인이고 본인이 원했으므로 가르친 것이었다.
물론 자신이 직접 가르치지는 않고 포달랍궁에서 엽전류를 가장 잘쓰는 십이법신 중 한 명인 매동선사로부터 자세와 구결 운영에 대한 수업을 받았다.
한 마디로 동천몽의 역할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한사코 자정경의 수련 현장에 나와 있는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화중동거’
유일한 치료방법은 여인들 속에 사는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여인과 가까이 하면 살아날지도 모른다고 했다. 자정경은 천하 쌍미 중 한명이다. 미모도 미모지만 땀에 젖어 드러난 그녀의 몸매는 가히 숨이 막혔다.
“왜 벌써 그만 두려고?”
자정경이 검 집에 검을 꽂으려하자 동천몽이 눈을 크게 떴다.
“네, 오늘은 그만하려구요.”
“안된다.”
동천몽이 단호히 제지하자 검을 반쯤 꽂아 넣던 자정경의 눈이 커졌다.
“고…고진…고진.”
“고진감래를 말씀하시려구요.”
이쯤 되면 병이었다.
‘씨벌 돌겠구만.’
미칠 노릇이었다. 자정경 앞에만 서면 튀어나온다. 한두 번 망신당했으면 됐지 갈수록 심해지니 문제였다.
챙피를 잊기 위해 동천몽이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제자 나이가 몇이더냐?”
“오…올해로 스물 하나인데요.”
“스물 하나이면 아주 늦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무공을 익히는데 빠르다고도 할 수도 없다. 하루라도 빨리, 그리고 부지런히 수련할수록 이롭다는 얘기다. 좀 더 하거라.”
하도 동천몽이 근엄한 표정을 지었으므로 자정경은 하는 수 없다는 듯 검을 다시 뽑아들었다.
“얍!”
자정경이 기합을 지르며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동천몽의 눈이 가늘어졌다. 땀으로 인해 흑의가 달라붙으면 드러난 자정경의 몸매는 열 번 침을 삼켜도 부족하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초식을 운용하다 야릇한 자세를 취했고 그것은 마치 방중술의 한 자세와 다르지 않아 동천몽을 더욱 자극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뿐 동천몽의 얼굴은 다시 어두워졌다. 눈앞에서 천하쌍미 중 한 여인이 온갖 교태를 부리고 있는데도 아랫도리는 침묵했다.
동천몽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자정경을 보았는데 시선은 그녀의 초식이나 검의 휘둘림에 있지 않고 오로지 그녀의 엉덩이에 꽂혀 있었다. 그것은 소주에 있는 어떤 기녀의 엉덩이보다 매력적이었고 사내의 가슴을 진탕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아랫도리는 계속 휴식중일 뿐이었다.
“대법왕님!”
천장금왕이 다가왔다.
“형님께서 뵙고자 합니다.”
“모셔 오너라.”
천장금왕이 돌아가더니 잠시 후 동천완을 데려다 주고 사라졌다.
동천몽은 자정경의 몸에 시선을 두었고 동천완이 힐끔 자정경을 한 번 쳐다보았다.
“왜 말씀이 없소? 할 말이 있어 찾아왔을 텐데 어서 하시오.”
동천완이 작정한 듯 마른침을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다쳤다는구나.”
홱!
동천몽의 고개가 돌려졌다.
“어머니가 다쳤다고 했소?”
동천완은 연락 받은 내용을 그대로 말해줬다.
동천몽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천혁 형님이?”
동천몽의 입술이 뒤틀렸고 수련 중이던 자정경까지 검을 세우고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동천몽은 지면을 내려다보았다. 뭔가를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꼼짝도 하지 않았는데 자꾸 표정이 변하는 것이 감정의 파고가 높음을 알 수가 있었다.
오늘따라 달빛이 밝았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전 없었고 둥근 달빛이 포달랍궁을 은빛으로 뒤덮었다. 대설산 저 멀리 한 개의 유성이 꼬리를 만들며 떨어졌고 수컷 늑대의 포효가 고요를 산산이 부숴 뜨리고 있었다.
백궁전 앞마당에 동천몽이 우뚝 서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 밖으로 나왔는데 마침 달빛까지 좋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은 중원에서 보는 것이나 수천리 떨어진 이곳 서장에서 보는 것이나 똑 같았다. 저 달이 어쩌면 녹풍원 위에도 떠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어머니 얼굴을 떠올렸다.
언젠가부터 자신이 진짜 대법왕의 환생자인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데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대법왕으로 깊이 젖어들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사심이 없어지고 세속의 동천몽을 버리고 백성들과 제자들의 안위와 평안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런 것이었다.
어머니 문제는 심각했다. 더구나 형들과의 은원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골이 깊었다.
예전 같으면 당장 흥분을 하고 한숨에 달려가 모두 때려 부 수고 말았을 것이었다. 자근 자근 짓밟고 받은 대로 돌려주어야 직성이 풀릴 텐데 알 수 없는 감정이 자신을 옭아 메고 있었다. 무어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세속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사부님!”
자정경이 다가왔다.
“아직 안 잤느냐?”
“사부님께서 주무시지 않는데 어떻게 잠이 와요?”
입을 삐쭉거리는 자정경을 동천몽이 웃으며 쳐다보았다.
“중원으로 가세요.”
자정경이 나란히 서며 말했다.
“가서 어머니도 찾아보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사부님께서는 평생 대법왕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주의 동천몽도 아닌 어중간한 사람으로 살 거예요.”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자정경이 돌아보았다.
“제자는 잘 모르지만 세속의 인연은 끊을 수도 없고 끊어서도 안된다고 들었어요. 인간의 삶이란 세속이든 절간이든 인연과 악연의 연속 아니겠어요. 인연은 인연대로 악연은 악연대로 순리에 따라 움직이면 된다고 생각해요.”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달빛아래 자신을 쳐다보는 자정경의 모습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자정경은 입술을 삐죽이며 계속 말했다.
“어머니는 사부님을 낳아준 이 세상에서 한 분 뿐인 가장 가까운 분이세요. 사부님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고초를 겪었구요. 팔이 잘린 것 또한 사부님 탓이 커요. 이복 형제들은 항상 어머니가 몰래 재산을 사부님 앞으로 빼돌리고 있다고 의심을 하죠. 만약 사부님이 안계셨다면 어머니의 삶은 지금처럼 황폐해지지 않았을 거예요.”
동천몽의 얼굴이 잠겼다.
자정경의 말이 비수가 되어 찔러왔다.
“세속의 모든 것을 깨끗하게 정리하지 않고서는 결코 온전한 대법왕으로, 포달랍궁 사상 가장 뛰어나고 덕이 많은 분으로 남기는 어려울 거예요.”
“그런 꿈은 없다. 난 그냥 평범한 대법왕일 뿐이다.”
“거짓말 하지 마세요. 사부님 가슴속에는 이왕지사 이렇게 되었으니 포달랍궁 역사에서 가장 큰 획을 그은 대법왕으로 남고 싶어 하고 있잖아요.”
동천몽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자정경의 말이 정확함을 반증하는 행동이었다.
“사부님께 있어 대법왕의 길은 제이의 삶이죠. 그럼 제일의 삶을 완전히 정리하세요. 피로 정리하든 용서로 정리하든, 세속의 삶이 깨끗하게 정리되어야 대법왕님의 몸과 마음이 온전히 불가에 바쳐질 거예요.”
“아미타불! 그러하옵니다. 대법왕님.”
고개를 돌리자 천장금왕이 다가오고 있었다.
동천몽이 눈썹을 보았다.
“금왕도 나처럼 고민 있소?”
그러자 금왕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있지요? 아주 큰 고민이 있사옵니다. 그래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사옵니다.”
동천몽의 눈이 크게 떠졌다.
“금왕 같은 고승도 잠이 오지 않을 만큼 큰 고민이 있단 말이오? 여태 헛공부 했나보구려.”
“소승은 자 시주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옵니다. 인생은 결코 과거와 단절 될 수가 없사옵니다. 좀 더 큰 뜻을 이루고 세우고 싶으시거든 세속의 모든 인연을 이번 기회에 깨끗하게 정리 하소서. 자 시주 말처럼 그것이 설혹 피가 되면 피로 씻고 용서가 된다면 용서로 씻으소서.”
“사실 사부님은 지금 한 가지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어요.”
동천몽이 그게 뭐냐는 듯 자정경을 쳐다보았다.
자정경이 야무지게 말했다.
“칼을 들면 너무 많은 피를 흘릴 것 같으니까 그게 두려워 망설이는 것 아니던가요? 이 제자의 말이 틀렸나요? 틀렸으면 틀렸다고 말씀해보세요?”
동천몽은 아무말도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특히 사부님이 가장 미워했고 용서 할 수 없는 형제들을 어찌해야 할지 그게 가장 고민거리잖아요.”
“베소서.”
홱!
동천몽이 천장금왕을 돌아보았다.
천장금왕이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승이 나름대로 알아봤는데 살려 둬 봤자 세상에 득이 되지 않을 형제들이더군요. 음참마속의 심정으로 단호히 징계를 하소서. 그것만이 좀 더 나은 세상을 창출하는 길이옵니다.”
“죽이란 말이군?”
“네 사부님.”
자정경이 대답했다.
“하긴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형제들이지. 그러나 그들을 죽이면 한 사람이 슬퍼할 것이다.”
“누구죠?”
“능씨라는 한 여인이다. 그 여자는 한 번도 그들을 남의 자식이라고 여기지 않았느니라. 어머니는 나한테보다 훨씬 더 그들을 챙겼고 보듬었으며 따뜻하게 대해주기 위해 노력했지. 물론 그런 어머니의 진정을 그들은 오해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더 잘됐군요. 손을 써도 좀 더 덜 미안하겠네요. 그렇게 잘해준 어머니의 팔을 잘랐으니.”
자정경이 차갑게 말했다.
이미 부친과 여러 사람들을 통해 동천몽의 이복형제들이 얼마만큼 모질고 악질적으로 대했는지 들었다. 남일지라도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동천몽은 말없이 만월(滿月)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