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29화 (29/71)

제2장 책임 추궁

자시가 넘었는데도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전음을 보내 마중을 나오라고 분명히 했는데도 한사람도 코빼기를 보이지 않자 동천몽의 속은 다시 끓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호를 외우며 감정을 자제하려 애썼다. 대법왕 다운 품위를 지켜야 한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동천몽이 분노의 감정을 자제하려 애쓰며 서성거릴 때 인기척이 들렸다.

스으윽!

마치 허공에서 뚝 떨어지듯 네 개의 인영이 떨어져 내리더니 떨리는 외침을 토했다.

“오오! 대법왕이시여.”

“아미타불! 설마 했는데 진정 대법왕님이시군요.”

“세존의 자비가 내리셨도다.”

쿵---쿠쿠쿵!

천장금왕을 필두로 사대법왕이 땅에 무릎을 꿇었다.

“이…이것이 꿈은 아닌지요?”

“어려움은 겪겠지만 위험 따위가 대법왕님을 삼키리라고는 믿지 않았사온데 과연 돌아오셨군요.”

아무리 화를 참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사대법왕의 얼굴을 보자 심장 박동수가 빨라지고 얼굴이 달아 올랐다.

“으음 아미타불!”

이를 지그시 깨물며 불호를 중얼거렸는데 듣기가 섬뜩했는지 사대법왕이 고개를 쳐들다 동천몽의 싸늘한 눈빛과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뭣들 하느냐? 어서 날 안내하거라.”

“소승들을 따라 오십시오.”

천장금왕이 맨 앞장을 섰고 그 뒤를 동천몽이 따랐다. 나머지 세 명의 법왕은 뒤에서 동천몽을 호위했다.

“아시겠지만 지금 궁 주위로는 엄한 진법이 작동되고 있사옵니다. 소승의 발자국만을 따라 오셔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조금이라도 다른 곳을 건드리거나 밟으시면 큰 일 나옵니다.”

“알았으니 어서 가거라.”

천장금왕이 진안으로 들어갔고 동천몽이 신속히 뒤를 이었다. 진법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주위 환경이 또다시 바뀌었다. 갑자기 넓은 사막이 나타난 것이었다.

분명히 진 밖에는 자시가 넘은 밤인데 진 안은 태양이 이글거리는 사막이었다. 진법의 현묘함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을 몰랐으므로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건 모두 환영 아니겠느냐?”

앞서가던 천장금왕이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모두 환영일 뿐입니다. 하지만 환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지요.”

“엇, 저건 유사 아니냐?”

좌측 오장쯤 떨어진 곳으로 모래들이 흐르고 있었다. 물이 흐르듯 흘러가는 유사를 향해 천장금왕이 법의 한 자락을 찢어 던졌다.

스르르!

법의는 순식간에 유사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져 버렸다.

언젠가 천상각의 한 상단이 새외를 다녀왔는데 고작 두 명 밖에 돌아오지 않은 적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사막을 횡단 하던 중 유사를 만나 모두 빠져 죽었다고 했다.

오십 여장 쯤 전진하자 이번에는 주위 모습이 장강으로 바뀌었다. 고개를 돌려 보아도 보이는 건 푸른 물결뿐이었다.

“이 역시 환상이겠지?”

“그렇사옵니다. 진에 빠지면 모두가 물인 줄 알고 허우적거리다 빠져 죽지요.”

천장금왕은 물 위를 그냥 걸었다. 그런데 그의 발이 딛기 전까지는 물이었는데 딛게 되면 묘하게 그 부분만 땅으로 변했다. 동천몽은 천장금왕의 발자국만 쫓아갔다.

“설치된 진법의 이름이 무엇이냐?”

“아롱진(我朧陣)이라 하옵니다. 아마 천하에서 건축물을 방어하는데 이보다 뛰어난 진법은 없을 것입니다. 사백 년 전 당시 천하제일 기관진식의 대가였던 귀곡자와 쌍벽을 이루신 본궁의 호천법왕님께서 창안하셨습니다.”

일각가까이 지나자 마침내 포달랍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천몽은 그제서야 진을 벗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는데 수많은 제자들이 백궁전 앞마당에 도열해 있다가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예를 취했다.

“아…미…타…불!”

동천몽은 백궁 문 앞 제단으로 올라섰다.

수많은 제자들이 흥분과 감동의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들의 표정을 보아 자신의 신변에 대해 많은 염려들이 있었음을 짐작 할 수가 있었는데 일부제자는 눈물까지 짜면서 자신의 귀환을 기뻐했다.

“제자들은 듣거라.”

동천몽은 일부러 내공을 가득 실어 말했다.

순간 뒤에 앉아 있던 사대법왕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동천몽의 목소리에 담긴 힘이 예전과 달라졌음을 고수답게 금방 알아차린 것이었다.

‘기연이 있었구나!’

‘오오! 대법왕님의 무예가 또 증진하셨도다.’

사대법왕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난 대법왕이니라. 내가 그 따위 인간들이 펼친 암계 따위에 당할 무기력한 사람으로 보이는가?”

“아미타불!”

“위대하신 대법왕님이시여.”

제자들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동천몽이 더욱 큰소리로 외쳤다.

“본왕은 영생불사 할 것이니라. 누구도 감히 본 왕에게 흑심을 품지 못한다. 세존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멈칫!

사대법왕의 고개가 일제히 들려졌다.

동천몽의 말에 뭔가 이상함을 발견한 것이었다. 서로의 얼굴을 한번 씩 쳐다본 후 침묵했다. 자신들 지식으로는 석가는 분명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여러 가르침을 포괄적으로 보면 자비를 베풀라고 했으니 꼭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본 왕은 이번 만큼은 참을 수가 없느니라. 용서를 해줘도 사람되지 못할 인간들은 빨리 없앨수록 좋다는 것이 본왕의 생각이니라. 걸레는 아무리 빨아도 걸레 아니겠느냐? 난 그자들에게 백배 천배로 갚아 줄 것이니라.”

“명령만 주소서. 제자들은 원수들을 무찌를 준비가 되어 있나이다.”

“거두절미하고,”

띠용!

사대법왕의 눈이 다시 커졌다.

동천몽이 무공뿐만 아니라 학문에서도 큰 기연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여러 답답함에 견주어 무척 어려운 말인데 간단히 사용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었다.

“본왕의 신변을 염려하며 잠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을 제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생각하니 기쁘면서도 미안하도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니 맘 편히들 먹고 돌아가 용맹정진하라.”

“대법왕이시여 영원하소사.”

“아 기쁘도다.”

제자들이 흩어져 각자 소속기관으로 돌아갔고 백궁전은 침묵에 쌓였다.

홱!

동천몽이 뒤에 앉아 있는 사대법왕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흠칫!

얼굴에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던 네 사람은 깜짝 놀랐다.

동천몽이 냉정하게 말했다.

“네 법왕은 날 따라오도록.”

휭하니 찬바람이 일도록 자신들을 지나쳐 백궁 안으로 사라지는 동천몽을 바라보는 네 사람의 얼굴에 두려움이 피어났다. 이미 오랫동안 동천몽을 겪어본 그들로서 심상치 않음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 했었다.

“무슨 일일까요? 사형!”

천검은왕이 천장금왕을 향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래도 소승들을 쳐다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사옵니다. 잘못한 것도 별로 없는데, 설마 적의 침입을 우려해 진법을 발동시킨 걸 가지고 그러시지는 않을 테고 말입니다.”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뭔가 심기가 꼬인것 만큼은 분명한 것 같으니 각자 조심하세. 늦었다고 또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모르니 어서들 가세나.”

네 사람은 서둘러 백궁 안으로 들어갔다.

동천몽은 태사의에 앉아 있었는데 표정이 굳어 있었다.

“소승들에게 하실 말씀 계시옵니까?”

천장금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동천몽이 매섭게 노려보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왕과 철왕은 나가 보거라.”

“예옛?”

“나가보라는 말도 모르느냐? 너희 두 사람은 이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으니 이 자리에 있을 필요 없느니라.”

천장금왕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의혹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표정을 보면 뭔가 대단히 심각한 사태임을 짐작 되었지만 나가 있으라고 했으므로 서둘러 등을 돌렸다. 천지철왕 역시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물러나왔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동천몽이 매섭게 일갈했다.

“은왕.”

천검은왕이 깜짝 놀라며 허릴 숙였다.

“에…대법왕이시여.”

“동왕.”

“며…명을 받사옵니다.”

두 사람은 잔득 긴장했다.

“죽고 싶었더냐? 네놈들이 정녕 이런 식으로 본왕을 속이다니 목숨이 열 개라도 되더냐?”

천검은왕과 천권동왕은 의혹의 빛을 띠었다.

“너희들이 아직까지 지은 죄를 모르고 있단 말이냐?”

천검은왕이 침을 삼키며 조아렸다.

“소승들이 우둔하여 대법왕님의 말씀을 헤아리지 못하겠나이다. 쉽게 말씀을 해주시어.”

털썩!

동천몽이 다시 태사의에 주저앉아 크게 호흡했다. 스스로도 무척 화를 자제하려는 빛이 역력했다.

“은왕.”

“하명하소서.”

“어찌된 일이냐?”

“뭐…뭐가 말이옵니까?”

“네놈이 정녕 몰라서 묻느냐? 끝까지 본왕 앞에서 시치미를 떼느냐? 대법왕을 속이거나 모욕하면 어떤 처벌이 기다리더냐?”

“그…그야 당연히 극형에.”

“네놈이 정녕 죽고 싶어서 모른체 하는 것이냐?”

천검은왕이 더욱 허릴 숙였다.

“우…우둔한 소승을 깨워 주소서. 정녕 모르겠나이다.”

“불사심법이 십이성에 올라서면 남자의 구실을 못하게 된다는 말이 사실이더냐?”

“으허헉!”

천검은왕 뿐만 아니라 천권동왕까지 소스라쳤다.

“왜 대답을 않느냐? 사실이더냐?”

쿵! 쿠쿵!

두 사람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화아악!

순간 동천몽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두 사람의 행동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사실 이곳까지 달려오면서 부시의 말이 틀리기를 간정히 바랐고 소망했다. 잘못된 뜬소문이기를 얼마나 원했던가. 그런데 무릎을 꿇는 천검은왕과 천권동왕을 보건데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온 몸을 감쌌다.

‘서…설마!’

마른침을 삼켰다.

“왜 무릎은 꿇고 그러느냐? 진짜란 말이냐?”

“소승들을 죽여주소서.”

“그…그 말은 사실이라는 뜻이냐?”

퍽퍽!

두 사람의 이마가 급기에 바닥에 박혔다.

동천몽의 얼굴이 흑빛으로 변했다.

이곳까지 달려오면서 얼마나 빌고 또 빌었던가. 절대 그럴리 없다고 마음속으로 수십 수백 번 위로하고 부시의 말이 철저히 곡해된 것이길 부처님께 빌었다.

“사…사실이옵니다.”

“뭐…뭐뭣이…이.”

동천몽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갑자기 현기증이 밀어 닥치고 충격으로 인해 앞이 안보였다.

“그…그렇사옵니다. 불사심법을 극성으로 터득하면 남자의 구실을 못하옵니다. 그것은 분명한 진실이며 틀림이 없사옵니다.”

부르르!

동천몽의 양주먹이 강하게 떨렸다.

불거진 손등의 핏줄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고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다…다시 말해보아라. 지금 뭐라…고 했느냐?”

“아룁옵기 황송하오나 불사 심법을 극성으로 터득하시면 남자 구실이 마비.”

“닥쳐.”

동천몽의 외침에 백궁이 쓰러질 듯 흔들거렸다.

두 사람은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동천몽의 외침에 두 사람의 기혈이 흔들린 것이다. 그것은 실로 가공할 내력이었고 사자후였으며 목소리만으로도 살인이 가능하다는 음살(音殺)의 경지였다.

‘겨…결국 불사심법을 십 이성 터득했단 말씀인가!’

자신들 지식으로는 아직까지 포달랍궁 역사 이래 불사심법을 십이성까지 오른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왜 본왕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느냐? 불사심법을 완전하게 깨우치면 남자이지만 남자일수 없게 된다는 말을 왜?”

불사심법이 극성에 이르면 말 그대로 죽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기연과 더불어 또 하나의 비극이 있으니 바로 남자의 기능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동천몽에게 미리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던 것은 누구도 십이성에 오르지 못했고 그의 머리와 여러 자질을 볼 때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 할 수 없었으므로 천검은왕은 더욱 고개를 떨궜다. 그러던 한 순간 떨궈진 천검은왕의 두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의 동아줄과 다를바 없는 절묘한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동천몽이 인상을 우그러뜨리며 외쳤다.

“그냥 해.”

“소…소승들은 사형께서 말씀을 해주신 줄?”

“사형이라면, 혹시 내게 반기를 들었다가 죽은 전 수석법왕 천장을 말하느냐?”

천검은왕이 고개를 들었다.

“그…그러하옵니다. 대법왕님의 무공 수련에 관한 모든 것은 그분께서 책임을 갖고 계셨기 때문에.”

스스로도 감동할 만큼 멋진 계책이었다.

사대법왕중 머리가 가장 떨어진 자신에게 그런 놀라운 묘안이 떠오를 줄은 몰랐다. 죽은 천장금왕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면 천하의 대법왕일지라도 어떡할 것인가. 천검은왕의 입가에 희미한 안도의 빛이 나타났다.

뿌두득!

동천몽의 이빨 가는 소리가 실내에 울려퍼졌고 천검은왕과 천권동왕은 고개를 더욱 떨구었다.

그런데 안도의 숨을 내쉰 천검은왕의 귓가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이게 뭔줄 아느냐?”

홱!

두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동천몽의 손에 한 권의 서책이 들려 있었다.

“이건 사대법왕과 대법왕 환생자에게 지켜야 할 법도와 책임을 기록한 대법경록이니라. 여기에 보면 환생자에 대한 모든 교육은 사대법왕이 공동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느니라. 천장금왕이 수석법왕으로서 가장 책임이 크긴 하지만 불사심법을 익히면 남자의 기능이 상실된다는 주의를 그의 입을 통해서만 전달되어야 한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단 말이니라.”

“으헉!”

“컥!”

두 사람의 목구멍에 뭔가 막힌 듯한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자신들에게 다시 책임이 돌아온 것 때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놀란 것은 동천몽이 너무 논리 정연하고 빈틈없는 반박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학문의 조예가 평범해서는 절대 추궁할 수 없는 얘기였다.

도대체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동천몽이 저렇게 똑똑해졌단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두 사람은 입까지 벌렸다.

백궁의 동쪽 창문으로 조금씩 여명이 비쳐들고 있었다. 동천몽은 여전히 태사의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을 자보려고 눈을 감았지만 갈수록 정신은 맑아졌다.

마음 같아서는 천검은왕과 천권동왕을 가만두지 않고 싶었지만 그들 에게 고의성은 없었다. 분통은 터졌지만 어떻게 화풀이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미칠 노릇이었다.

‘절대는 아니라고?’

아무튼 천검은왕은 불사심법이 극성에 이르면 남자의 기능이 상실되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절대 불치는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지금으로서 유일한 희망이고 위로였다. 그가 설혹 자신을 달래기 위해 뱉은 말이라고 해도 거기에 기대를 거는 것 말고는 달리 마음을 진정시킬 방법이 없었다.

“일목!”

동천몽이 입을 열었다가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일목에게 차 한 잔 가져오라고 말하려다 그가 죽은 사실을 떠올린 것이었다.

‘일목!’

동천몽이 가볍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신체 변화에 그동안 신경 쓰느라 잠시 일목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일목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지금 저승길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일목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도주가 가능했고 만강수 부부를 만나 천포지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일목을 떠올리자 모든 감정이 현실로 돌아왔다.

“밖에 누구 있느냐?”

“일직승 현옥이옵니다.”

“천장을 불러오너라.”

“명을 받드옵니다.”

동천몽이 동쪽 창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젖혔다.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고 길게 심호흡을 했다.

세상이 어둠을 벗어나고 있었다. 먼 대설산 꼭대기에는 여전히 만년설이 쌓여 있었고 대웅전 쪽으로부터 선승들의 아침 예불을 드리는 독경소리가 들려왔다.

“부르셨사옵니까?”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고 천장금왕이 들어섰다. 비록 어제밤 밖에 나가 있었지만 돌아가지 않고 문밖에서 자신과 두 법왕 간에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는 것을 동천몽은 알고 있었다. 나쁜 의도에서 엿들은 것이 아니라 수장으로서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이 책임을 지려는 준비였음을 동천몽은 알 수 있었다.

아무튼 인시가 다되어 천검은왕과 천권동왕을 내보냈기 때문에 천장금왕 역시 제대로 자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을 반증이라도 하듯 어제 입은 그 복장 그대로였다.

“흑수당의 자 추동 부녀가 본궁에 피신 와 있다고 했느냐?”

“그러하옵니다.”

어제 대충 보고를 받았지만 천장금왕은 다시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자청단이 부친을 이선으로 퇴진 시키고 자신이 흑수당의 모든 권한을 장악하려했지만 실패했다. 뿐만 아니라 여추량이 찾아와 협조요청을 했고 거절하자 데리고 온 무력을 동원하려 했으나 그 역시 실패했다.

모든 일이 동천몽이 예상한대로 돌아가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고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자정경에게 남겼다는 대목에 가서는 사람들은 비통해 했다. 하지만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말은 이미 위험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기 때문에 살아 돌아올 수도 있다는 뜻으로 모두는 해석했다.

그 날 이후 천장금왕은 자신에게 포달랍궁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위기일 때는 힘을 분산 하는 것보다는 뭉치는 것이 이롭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서 흑수당의 모든 중요서류와 재산을 포달랍궁으로 옮기도록 했고 자추동은 기꺼이 의심하지 않고 실행했다.

포달랍궁으로 모든 것을 집합 시킨 천장금왕은 진을 발동했다. 그리고 사흘 만에 흑수당이 백쾌섬의 공격을 받았다는 전갈을 받았다. 하지만 알짜배기는 이미 포달랍궁에 있었기 때문에 백쾌섬은 빈껍데기만 장악한 꼴이었다. 뿐만 아니라 백쾌섬은 그길로 목와북천의 모든 정예를 이끌고 포달랍궁 공격에 나섰지만 한 발 늦고 말았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포달랍궁은 이미 아롱진에 의해 외부와 격리되고 있었다.

“왜 그렇게 소승을 쳐다보시옵니까?”

“너무 똑똑해서 그러느니라.”

천장금왕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미타불! 부끄럽사옵니다. 그저 누구나 생각해 낼 수 있는 묘안 이옵니다.”

자신이 앉혔지만 인사 하나는 나무랄 데 없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다른 일은 또 없느냐?”

“없사옵니다. 굳이 있다면 진이옵니다. 아롱진이 오래 발동되면서 수많은 순례객들이 발길을 돌리고 있사옵니다.”

그들은 가난하다. 마음 같아서는 일생에 몇 번이라도 포달랍궁을 찾아오고 싶어 하지만 먹고 사느라 그럴 틈이 없다. 그런데 애써 온 발걸음을 돌린다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을 것이었다.

“오늘 오시를 기해 진을 해체하라.”

“알겠사옵니다. 그렇게 하겠나이다.”

그들이 우선이어야 했다. 그들의 아름다운 꿈을 방해해서는 절대 안될 일이었다. 포달랍궁을 찾아와 공을 드리고 대법왕의 얼굴 한번 보는 것을 일생의 소원으로 여기는 그들이었다. 그들에게 절대 실망을 주어서는 안되었다.

“대법왕님 소승 현옥이옵니다. 흑수당의 자당주와 자낭자께서 드셨사옵니다.”

어제 환영법회가 있었지만 그 자리에 외부인이 참석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오늘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들여 보내거라.”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자추동과 자정경이 입구에 들어섰다.

“소…소인 자추동이 대법왕님의 무사 귀궁을 감축 드리옵니다.”

“사…사부님!”

자정경이 큰 소리로 외치며 그대로 달려들었다.

와락!

누가 말릴 틈도 없었고 동천몽이 피할 시간도 없었다. 그냥 허공을 날아와 품에 안겨버렸으므로 동천몽은 어쩔 수 없이 끌어안을 수 밖에 없었다.

“아…아미타불!”

천장금왕이 경악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자추동 또한 깜짝 놀라며 말했다.

“저…정경아 무슨 짓이냐. 당장 돌아 오너라.”

“싫어요. 내 사부님 내가 반가워 안는데 아버지가 무슨 자격으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거죠. 사부님 너무 보고 싶었어요.”

허리를 끌어 안더니 이번에는 목을 끌어 안았다.

확!

동천몽의 눈이 커졌고 자정경의 빛나는 눈이 바로 턱밑에 있었다. 또한 그녀가 숨을 내쉴 때마다 매혹적인 향기가 동천몽의 코 끝을 자극했다.

“사부님은 절대 안 죽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얼마나 불안했는데요. 이렇게 살아 돌아오셔서 이 제자는 너무 좋아요. 사랑해요 사부님.”

“사…사랑! 아미타불!”

천장금왕이 또다시 눈을 감고 불호를 중얼거렸다.

“저…정경아 이제 그만 손 좀 놓았으면 한다.”

“싫어요. 이대로 조금만 더 있게 해주세요.”

자정경이 더욱 목을 끌어안았고 천장금왕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동천몽은 미친듯이 흐뭇해했다. 단지 속으로만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알지 못할 뿐이었다.

‘아미타불! 기쁘도다. 정녕 보람되도다!’

새삼 제자 하나는 잘 두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 같아서는 당장 어떻게 해버리고 싶었다. 한데 돌연 동천몽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예전 같았으면 지금쯤 아랫도리는 미친 듯이 광분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잠을 자는 듯 조용했다.

“사부님 안색이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

자정경이 걱정스런 얼굴로 동천몽의 양 뺨을 손가락으로 감싸며 살폈다. 물결보다 부드러운 손길이건만 하체로부터는 일체 어떤 기별이 없었다.

“벼…별것 아니구나. 잠시 피곤해서 그렇다. 그래 우리 제자는 잘 있었느냐?”

억지로 웃었다.

하지만 가슴속에서는 열불이 터져 올랐다. 천하쌍미 중 한 명이 목을 끌어안고 매혹적인 향기를 풀풀 풍기는데도 의당 있어야 할 신체의 반응이 깜깜무소식인 것이 너무 괴로웠다.

“사부님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데 어떻게 잘 있을 수 있겠어요. 어찌나 눈물이 나오려는지 참느라고 혼났어요. 사부님이 이렇게 돌아오셔서 이 제자는 너무 황홀합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목을 힘껏 끌어안고 떨어졌다.

“저…정경아 이제 그만 물러 나거라.”

자정경이 자추동을 노려보았다.

“제자가 사부님 곁에 있어야 정상 아닌가요? 아버님은 왜 자꾸 저와 사부님을 떼어 놓으려고 하세요?”

그러면서 이번에는 동천몽의 팔짱을 끼었다.

‘오오! 아미타불!’

천장금왕은 열심히 아미타불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가까운 시일 안에 무슨 일이 생기고 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자꾸 머리를 채웠다. 그러나 한 순간 남자 기능이 상실되었다는 얘길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막 떠오른 아침 햇살이 정겹다. 하루 이틀 봐온 햇살도 아닌데 오늘따라 이른 봄에 막 피어나는 푸른 잎사귀처럼 햇볕은 너무 따스하고 편안했다.

척!

동오룡은 길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무림맹을 떠나 밤을 새워 걷다 지나가는 마차를 빌려 타고 지금 막 천상각이 내려다보이는 고갯길에 도착했다. 곧 찾아올 엄청난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상각은 조용한 아침 햇살에 막 깨어나고 있었다.

‘헛헛!’

동오룡이 쓴웃음을 지었다.

인생 일장춘몽이라더니 자신이 지금 그런 것 같았다. 끝없이 뻗어 나갔고 뜻을 세워 이루지 못한 것이 없었으며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불가능이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도저히 상상 할 수 없는 불행이 밀려오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끝없이 한숨만 나왔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을 뿐이었다.

자칫하다간 장구한 역사의 천상각이 넉넉잡고 몇 달 안에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었다. 아니 산산조각이 되어 공중분해 되고 말 것이다. 무림맹에서 결코 가만 놔 둘리는 절대 없었다. 자신들에게 도전하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본보기 차원에서라도 처절하게 짓밟아 버릴 것이다.

“여보!”

그때 맑은 목소리가 아래로 부터 들려왔다.

고갯길 아래로부터 한 명의 백의여인이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올라오는 백의 여인은 놀랍게도 부인 능씨였다.

“당신이 이 아침 일찍 여긴 어인 일이오?”

동오룡이 바위에서 일어나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능씨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뭘 그렇게 놀라세요. 천 첩이 이렇게 마중 나오면 안되는 것인가요?”

“아…아니 그건 아니지만.”

능씨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척 피곤해 보여요. 어서 들어가요.”

척!

능씨가 동오룡의 손을 잡았다.

동오룡이 깜짝 놀랐다.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휘둥그레 뜬 눈으로 보는 동오룡을 향해 능씨가 화사한 웃음을 지었다.

“왜요? 천첩이 손을 잡으니까 이상해요. 내 남편 내가 손 잡는데 누가 화라도 낸대요.”

동오룡은 손을 잡힌 채 끌려가며 연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한참을 걷던 동오룡이 깜짝 놀랐다.

“여…여보.”

멋모르고 쳐다보았는데 능씨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능씨는 밤새 고개 아래서서 동오룡을 기다렸다.

천상각을 살려보기 위해 온갖 수모를 참아가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동오룡을 놔두고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밤새 고개 길 아래 나와 동오룡이 돌아오길 기다렸고 지금 막 나온 것처럼 담담하게 표정을 바꾼 것이었다.

“여보 당신 지금?”

척!

능씨가 걸음을 세웠다.

눈물이 범벅이 된 시선으로 동오룡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당신 건강 망치겠어요. 당신에게는 집안이 중요하겠지만 천첩에게는 동오룡이라는 내 남편이 더 중요해요.”

동오룡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능씨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이게 우리의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잖아요. 당신이 그랬잖아요. 태양은 반드시 지고 또한 반드시 다시 떠오른다고 말이예요. 이렇게 쓰러지면 언젠가 다시 일어나겠죠. 그렇지 않을까요?”

동오룡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삼키기 위해 이를 물었다.

“가요. 당신 좋아하는 근골초 무쳐놨어요.”

“여보.”

돌아서는 능씨를 동오룡이 힘껏 끌어안았다.

“내…내가 당신만도 못하구려. 당신말처럼 다시 일어나면 되는 것을 말이오.”

“흐흐흑!”

급기야 능씨가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동오룡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어떡해요. 선조들님들에게 뭐라고 사죄를 드려야 하죠. 그분들이 피땀 흘려 쌓았는데 우리가 바보같이 지키지 못했으니 얼마나 섭섭해 할까요.흐흑!”

“됐소. 그만 하시오.”

“어엉! 이럴 수는 없는 거예요. 그 사람들 너무 하는 것 아니에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냔 말이에요. 뜯어갈 만큼 뜯어가 놓고서 이제와서는 아예 통째 가져가겠다니 해도 너무 해요.”

“눈물 닦구려. 울 것 없소. 이것이 우리가 맞이해야 할 비극이고 운명이라면 조용히 받아들입시다.”

능씨는 아예 통곡을 했다.

참았던 분노와 슬픔이 터지고 만 것이었다. 모든 것이 자기 탓만 같았고 자신이 동오룡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몰랐다. 자식들은 모든 것이 자기 탓이라고 했다. 여자 하나가 잘못 들어오는 바람에 온 집안을 풍비박산 나게 생겼다고 욕을 퍼붓고 손가락질했다. 그러면서 지금이라도 당장 나가라고 했지만 오기가 생겼다. 자신은 진정으로 동오룡을 사랑했고 그래서 자식이 있는줄 알면서도 청혼을 받아 들였다. 다리 밑에서 거렁뱅이로 살아도 동오룡과 함께라면 행복할 것 같았다.

능씨의 울음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살아온 삶이 슬퍼 울고 무림맹의 횡포가 분해 우는 것이었다.

동오룡의 앞가슴이 능씨의 눈물로 흥건히 젖었다.

“흐흐! 그런다고 우리가 당신에게 속을 줄 아시오?”

갑자기 들려 오는 동오룡의 고개가 돌아갔다.

동천혁과 동천화가 냉소를 머금고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각기 세 명씩의 시위 무사를 거느렸다.

동오룡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어미에게 당신이라고 했느냐?”

동천화가 코웃음을 쳤다.

“우린 한 번도 저 여자를 어머니라고 생각 해 본적이 없어요.”

“못 된.”

동오룡의 오른손이 허공을 갈랐다.

탁!

하지만 어느새 동천화 뒤에 서 있던 시위 무사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서 동오룡의 팔목을 거머쥐고 있었다.

부르르!

동오룡의 입술이 떨렸다.

자신의 팔목을 잡고 있는 무사를 보며 하도 기가 막힌 듯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네…네 이놈.”

“각주님의 자식이기 이전에 소인의 주군이옵니다. 용서 하소서.”

“뭐…뭐라?”

“됐다. 비켜라.”

동천화가 나섰고 시위무사가 뒤로 물러섰다.

동오룡이 너무 충격을 받은 듯 휘청 거리자 능씨가 서둘러 부축했다.

“여…여보.”

동오룡이 눈을 깜박거리며 능씨를 밀어냈다.

동오룡이 동천화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흘렸다.

“허허! 허허허!”

힘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웃음이었다. 동오룡이 한참을 웃더니 웩 하며 피를 토했다.

“여보!”

“비켜 이년아.”

쫙!

동천화가 부축하기 위해 달려들던 능씨의 뺨을 후려쳤다.

꽈당!

능씨가 그대로 주저앉았고 동오룡이 버럭 소릴 질렀다.

“미친년.”

탁!

이번에는 동천화가 동오룡의 손을 잡았다.

“시간 없어요. 무림맹에서 모든 것을 청산하기 전에 아버지께서는 할 일이 있어요. 지금 여기서 허송세월 할 때가 아니라는 얘기죠.”

동천혁이 음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버님에게는 아직도 많은 재산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무림맹에서도 모르는 재산이 많더군요. 귀주에 조그만 은광도 있고 항주에는 사백여척의 배도 갖고 있더군요.”

“그 두 곳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곳에 비밀 보고(寶庫)를 만들어 놓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 모든 것을 빼앗기기 전에 우리에게 서둘러 나눠 주시죠. 놔둬봤자 무림맹 그 미친 작자들 아니면 저 계집 몫이 될텐데.”

동오룡의 얼굴이 돌덩이 마냥 굳어졌다.

정녕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이 자신의 자식인가 싶었다. 가문이 위태로우면 온 핏줄이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하거늘 이 무슨 날벼락보다 더한 패악이란 말인가.

“너희들의 요구는 들어 줄 수가 없다. 아비가 여러 곳에 안전 금고를 만들어 놓은 것은 최악을 대비하고자 함이었다. 그것들은 내가 모은 것이 아니라 조상들이 준비해온 것이었다. 나 또한 다음대 각주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그것마저 사라진다면 천상각은 영원히 이 땅에서 자취를 잃게 된다.”

촤앙!

동천혁이 시위무사의 옆구리에 매달린 검을 뽑아들었다.

“아버님께 검을 겨누는 불효자식까지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아쉬운대로 귀주의 은광과 항주의 배와 어장(魚莊)을 주십시오.”

동오룡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검을 들고 서 있는 동천혁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너…너희들이 진정 나 동오룡의 자식들 맞더냐?”

“틀림없는 아버지의 자식들입니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잖사옵니까?”

“처…천혁아 제발.”

슉!

능씨가 다가서서 말리려 들자 어느새 천혁의 검이 목젖에 대어져 있었다.

“계집, 한번만 더 우리 일에 끼어들면 그땐 목이 달아 날것이다.”

“네…네 이놈 당장 그 검을 치우지 못하겠느냐? 이 불한당만도 못한 놈들이 감히 어미에게.”

동천혁이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누가 어미란 말입니까? 난 아직까지 저 계집을 한 번도 어미라고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빨리 내놓으십시오. 소자 오래 기다려줄 여유가 없사옵니다.”

동오룡이 차가운 시선으로 말했다.

“불가하다.”

“아버님!”

“애비를 죽여도 어렵다.”

“그래요. 흐흣!”

동천혁이 야릇한 웃음을 짓더니 검을 휘둘렀다.

쉭!

“아악!”

능씨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동오룡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능씨의 머리가 잘려나간 것이었다.

“계집 다시 말한다. 넌 당장 이 길로 본가를 떠나라. 그것만이 그나마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 길이다.”

능씨의 얼굴은 굳어졌다.

그런데 그토록 겁에 질려 있던 능씨의 얼굴이 차갑게 변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내 집을 놔두고 어딜 간단 말이냐? 너야 말로 천하에 불효막심하구나. 감이 에미 아비의 목에 검을 들이대다니 천벌을 받은 짓이구나.”

동천혁의 눈에 살기가 떠올랐다.

“크하하하! 감히 네년이 지금 날 훈계 하는 것이냐?”

촥!

동천혁의 검이 다시 떨어졌다.

팍!

“아아악!”

능씨의 입에서 다시 처절한 비명이 흘러나왔고 왼팔이 어깨에서부터 잘려나갔다. 능씨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한 번 더 지껄여 보아라. 이번엔 아예 목을 잘라주겠다. 계집.”

능씨가 고개를 발끈 쳐들더니 말했다.

“천하에 몹쓸 놈.”

“이년이.”

동천혁이 다시 검을 휘둘렀고 막 솟아오른 햇빛에 한 가닥 섬광이 반사되었다.

뚝!

하나 동천혁의 검은 중간에서 멈췄다.

능씨 앞을 동오룡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날 죽여라. 나도 죽이란 말이다. 이 패악무도한 놈아.”

“흐흐! 할 수 없구려. 그렇다면 원하는대로 해드리지요.”

동천혁이 검을 휘두르려 들자 동천화가 가로막고 나섰다.

“오라버니 서두를 것 없어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시한을 드리세요. 그게 더 낫지않겠어요?”

동천혁이 검을 멈추더니 괜찮다 싶었는지 늘어뜨렸다.

“사흘의 말미를 드리겠습니다. 그 안에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아버지와 형님께서 집안을 망하게 했으니 우리에게 보상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매서운 눈으로 동오룡과 능씨를 쏘아보더니 돌아섰다.

“가자, 사흘 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동천화 역시 능씨를 보며 말했다.

“그때는 네 년을 안 봤으면 좋겠구나. 만약 그때도 내 집에 머물고 있다면 내가 가만 안 있겠다.”

두 남매가 시위들을 거느리고 떠나갔다.

쿵!

능씨가 그대로 쓰러졌고 동오룡이 부리나케 부축했다.

“여보, 정신 차리시오.”

능씨는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동오룡이 능씨를 등에 업고 장원을 향해 덜려가기 시작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정문앞에 이르자 지키던 무사들이 동오룡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가…가주님, 엇 가모님께서.”

“당장 의원을 불러라. 시간 없느니라.”

동오룡이 능씨를 업고 안으로 들어갔고 두 명의 시위가 장원 밖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동오룡은 우선 급한 대로 능씨를 침대에 눕힌 후 피가 더 이상 흐르지 못하도록 잘린 어깨를 묶었다. 그리고 물걸레로 피를 닦아냈고 뜨거운 물을 축여 입술에 묻혔다. 두 명의 시녀가 달려들어 능씨의 사지를 주무르고 깨어나길 기원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갈수록 파래졌다.

“여보 눈을 떠보시오. 죽으면 안 되오.”

동오룡이 흔들며 소리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가주님.”

“들어오너라. 어서.”

문이 열리고 무사 한명이 늙은 의원을 업고 들어왔고 다른 무사는 보자기 한 개를 들고 따라 들어섰다.

무사가 의원을 내리자 헛기침을 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동오룡을 향해 큰 절을 했다.

“가…가주님 오랜만에 뵈옵나이다.”

“왕 의원이 왔구려. 그래 어서 살피시오. 어서.”

“아니 가모님이 어쩌다.”

의원이 의식을 잃은 체 피투성이가 된 능씨를 보며 경악했다.

맥을 집고 눈을 까 뒤집어 보던 의원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피를 많이 흘렸사옵니다. 그로 인한 충격으로 의식을 잃었지요. 깨어나게 하시려면 한 가지 처방이 있어야 합니다.”

“뭔가? 서둘러 말해보게.”

“동중조초입니다.”

“동중조초라면 춥고 음지에서 기생하는 이끼 아닌가?”

“독초입니다. 하지만 피가 모자라 의식을 잃은 환자들에게는 쓰임새가 크지요. 당장 동중조초를 복용시켜야 합니다.”

“어디가면 구할 수 있는가?”

“소인이 알고 있기에 사천에 가면 당문이라는 유명한 독문이 있사옵니다. 그곳에 가면 구할 수가 있는데 꽤 돈을 많이 달라고 할 것이옵니다.”

“독문?”

“알고 계시옵니까?”

“그곳을 내 왜 모르겠는가? 뭐하느냐? 당장 사천 있는 당문을 다녀올 준비를 하거라.”

두 명의 무사가 허리를 구부렸다.

“명을 받사옵니다.”

동오룡이 품에서 전표 한 장을 건네주며 말했다.

“빠를수록 좋다. 밤을 새워서라도 빨리 다녀오거라. 어서 가거라.”

“예 가주님.”

두 명의 무사가 나갔고 의원이 능씨의 옷을 벗겼다.

젊은 여인 못지 않은 희고 부드러운 피부에 의원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더구나 앞가슴은 금방이라도 터질듯 둘러 맨 천을 비집고 나와 있었다.

의원은 심호흡을 하고 금침을 꽂았다. 능씨의 가슴은 금침으로 가득 했고 의원이 콧등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허릴 폈다.

“당분간은 더 악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수고했네. 차 한 잔 하게나.”

동오룡이 의식을 잃은 능씨를 염려의 시선으로 바라본 후 의원과 같이 방을 나왔다.

동오룡의 의원과 함께 서재로 자리를 옮겼고 두 명의 시녀가 용정을 갖고 들어왔다.

“드시게.”

“가…감사하옵니다.”

의원이 황공한 표정으로 두 손으로 잔을 들었다.

‘아 이것이 말로만 듣던 용정이란 차로구나.’

의원은 감격과 흥분에 찬 표정으로 차를 마셨다.

한 모금 마시던 의원의 표정이 와락 우그러졌다. 달고 맛있을 줄 알았는데 텁텁했고 뒷맛은 무척 썼다. 혹시 자신의 혀가 잘못 되었나 다시 한 모금 마셔 봐도 여전히 쓰다.

이해 할 수가 없다. 어떻게 이렇게 쓰고 공짜로 줘도 마시기 싫은 이런 차를 천하제일이라고 돈 있는 사람들은 환장하고 좋아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왕의원.”

의원이 얼른 찻잔을 놓고 긴장의 자세를 취했다.

“말씀 하십시오. 가주님.”

“궁금하겠지? 왜 집사람이 저렇게 처참한 꼴이 되었는지.”

의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원이란 환자나 보호자가 입을 열지 않으면 가급적 묻지 않는다. 물론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 하면 묻지만.

“자네도 소문 들었을 걸세. 본가가 흔들리고 있다는 말을.”

의원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도 귀가 있기 때문에 천상각에 대한 얘기는 이미 듣고 있었다.

태산보다 더 높고 만리장성보다 더 철옹성 갖던 천상각이 흔들린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나 의원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만약 천상각이 무너지면 강호에 미칠 여파였다.

엄청난 불황이 몰려올 것이라고 다들 입을 모았다. 그 후 폭풍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면서 일부에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천상각의 궤멸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했다.

하나 또 일부에서는 무너뜨려야 한다는 주문도 있었다. 물론 큰 잘못이 없는 만큼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는 얘기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고 무림맹에서 권력을 이용해 힘없는 상가를 압박한다면서 정작 무너져야 할 집단은 천상각이 아니라 무림맹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난 본 가가 무너지고 무너지지 않고는 솔직히 이제 관심 밖일세. 내가 슬픈 것은 잘못 지어진 자식 농사 일세. 그들이 끼친 실망이야 말로 사백년 본가의 역사가 무너지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프네.”

자신도 자식이 있다. 세상에 그 무엇보다 중요 한 것이 자식농사이다. 그런 면에서 자신의 자식농사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모두 출가했고 각자 자시 위치에서 제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헛헛! 오늘따라 그녀석이 더욱 보고 싶군.”

“송구한 말씀이옵니다만 그 녀석이라고 하오면 혹시 천몽 도련님을 말씀 하는 것입니까?”

동오룡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제 보니 뭔가 있었던 게야. 잘 나가던 녀석이 하루아침에 망가진 이유가 말일세.”

흠칫!

동오룡을 쳐다보던 의원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동오룡의 눈가에 눈물이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아는 동오룡은 태산이었다. 푸른 하늘이었고 영원한 상왕(商王)이었다. 그런 거인의 눈에 물기라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그때였다. 문이 벌컹 열리더니 오십가량의 왜소한 체구의 중년인이 급히 들어섰다.

“부총관 무슨 일인가?”

부총관이 굳은 신색으로 말했다.

“황하의 뱃길이 끊어졌사옵니다.”

“화…황하의 뱃길이 끊어지다니 무슨 말인가?”

“황하수로맹에서 앞으로 천상각의 배는 일체 황하를 통과할 수 없다고 통보를 해왔습니다. 만약 명을 어길 시에는 모든 배와 화물을 압수하겠다는 것이옵니다.”

툭!

동오룡의 손에 들린 찻잔이 떨어져 박살이 났다.

“그것 뿐만이 아니옵니다. 장강수로채에서도 앞으로 허락없이 물길을 이용할 경우 엄중 처벌하겠다는 통지를 보내왔습니다.”

동오룡의 얼굴은 흑빛으로 변했고 부총관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천산북로는 물론 장안을 중심으로 무림맹이 관할하는 육로 또한 천상각의 모든 화물과 마차에 대해서는 통행을 금지한다는 소식이옵니다.”

동오룡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워낙 폭풍처럼 밀려 들어온 소식이어서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또한 본가와 거래를 하던 수많은 중상들이.”

“그만.”

동오룡이 버럭 소릴 질렀다.

살기 가득한 시선으로 부총관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부총관이 슬그머니 허리를 구부리고 방을 나갔다.

콰악!

동오룡의 주먹이 무섭게 쥐어졌고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 올랐다. 본격적으로 숨통을 죄여 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저벅저벅!

또다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이번에는 총매사가 들어섰다.

“각주님 심상치 않사옵니다.”

“자네는 또 뭔가?”

“어음이 밀려들고 있사옵니다. 워낙 한꺼번에 밀려들고 있어 자금이 턱 없이 부족하옵니다.”

동오룡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일부는 오늘내로 해결해 주지 않으면 가만 있지 않겠다면서 서슬 퍼렇게 기세를 올리고 있습니다.”

“지금 움직일 수 있는 자금이 얼마나 되는가?”

“자금이란 자금은 모두 긁어봤는데 절반도 막기에 벅차옵니다.”

동오룡의 두 눈이 잠겼다.

만약 제 때에 막지 못하면 관부가 개입한다. 관부가 한 번 개입하면 그때는 빼도 박도 못한다. 필시 배후에 무림맹이 있는 것이 확실했지만 당장 사태를 해결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동오룡의 눈이 지그시 감겼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져야 한다. 천상각 역사에 가장 위기가 도래했음은 분명했지만 반드시 일어서야한다. 이대로 물러 설수는 절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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