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피의 구경
여추량이 경악의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지…지금 무림맹을 친다고 하셨사옵니까?”
동천비가 웃으며 말했다.
“왜그러시오? 치면 안되는 것이오?”
“……”
“시간 없소. 서둘러 회의를 소집하시오.”
여추량은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놀랍고 예상 못했으며 상상을 벗어난 말이었다.
“여기서 무림맹이 있는 천목산까지 직선거리로 백리가 채 안되니까 미시쯤 출발하면 넉넉잡아 술시면 도착할 것이오. 반 시진 가량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회복 한 후 정각 자시에 칩시다.”
“저…정말이옵니까? 진짜로 무림맹을 공격 하신단 말입니까?”
여전히 동천몽은 미소를 띄고 말했다
“내가 언제 거짓말 하는 것 봤소. 빨리 나가보시오. 지금 서둘러도 계획에 맞추자면 빠듯할 것이오.”
여추량은 동천몽이 장난으로 뱉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갑자기 가슴이 뛰고 숨이 거칠어진다. 동오룡 밑에서 수십년동안 장사를 하며 잔뼈가 굵은 자신이지만 이토록 가슴이 뛰어 본 적은 아직 없었다.
여추량이 나가고 혼자 남은 동천몽은 창가로 다가갔다.
멀리 사명산 제일봉 태화봉이 구름에 가려 있었다. 무림맹은 지금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잇달아 자신의 주축인 두 곳의 조직을 궤멸 시켰으니 흥분되어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정도 타격이면 위축되거나 숨기에 바쁘다. 그래서 무림맹 또한 자신이 어디로 도주하는지 그것에만 관심을 둘 뿐 설마 기습을 해오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무림맹의 주력부대중 상당수가 밖에 나와 있었다. 천대와 용대 호대는 아직 귀맹하지 않은 상태이고 나머지 조직들은 자신의 뒤를 추적하기 위해 중원 곳곳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다시 말 해 지금 무림맹은 비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장부가 적에게 점령당하는 것은 전쟁에서 치명적이었다. 아무리 무림맹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손에 본거지가 유린당하면 그야말로 천하가 발칵 뒤집힐 것이고 상당기간 동안 자신의 목을 죄어오지 못할 것이다.
무림맹의 주축은 구파일방과 사대가문이었다. 현재 무림맹에 파견된 힘이라는 것은 구파일방과 사대가문이 지닌 힘의 십분지 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오늘밤 자신의 발길에 무림맹이 짓밟힌다고 해도 그들의 힘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무림맹의 고질적은 병폐로 인해 회복이 쉽지 않을 것이다.
무림맹의 주축이 구파일방과 사대가문이지만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은 경쟁이 벌어지고 있고 그래서 서로 간에 메워지지 않는 거리가 존재했다.
결국 무림맹의 자신의 침공으로 무너지면 쉽게 복원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때를 노려 그들의 거리를 더욱 벌리던지 아니면 각개 격파하던지 그도 아니면 자신에게 끌어들이던지 해야 한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쌓여 이뤄진 산이라 하여 홍산이라 부른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듯 시뻘겋게 보이는 홍산 한쪽으로 백색의 거대한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다.
하늘에 지어진 듯 신비롭기까지 한 웅장한 포달랍궁을 보며 동천완은 숨을 삼켰다.
포달랍궁에 도착 한 것이었다.
과거 상단을 이끌고 두어 번 지나친 적은 있었지만 그때는 별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다지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없었다. 그가 포달랍궁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서장의 소림사정도였다. 그런데 저 포달랍궁이 가문의 생사를 쥐고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자 숨이 막힐 듯 커 보인다. 그리고 위협적이며 장엄했다.
포달랍궁을 오르는 홍산 초입에 이르렀을 때 일행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조금 전 까지 눈 앞에 보이던 포달랍궁이 통째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엇!”
“어…어떻게 이런 일이.”
모두가 기절할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포달랍궁 뿐만 아니라 앞으로 뻗어가던 산길까지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길까지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불타고 있는 듯한 홍산 뿐이었다.
아무리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포달랍궁을 찾았지만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눈 앞에서 사라졌다. 일행은 믿을 수 없는 일에 당황하다 다시 처음의 위치로 물러났다.
“세상에!”
“있잖아!”
포달랍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다시 홍산 초입에 이르자 길과 포달랍궁 모두 보이지 않았다.
팟!
동천완의 눈이 예리한 빛을 토했다.
‘그것이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동천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강호에는 진법이라는 것이 있고 주위 지형을 바꾸어 버린다고 했다. 주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하며 고도로 뛰어난 상승의 진법은 바람의 침입까지도 막는다고 들었다.
틀림없는 진법이 설치되어 있음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갑자기 모든 것이 변할 리가 없었다. 진법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더 이상 포달랍궁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그쪽에서 자신들을 발견하고 다가와 주는 것 말고는 이쪽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전무했다.
그런데 자신들만 포달랍궁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기 위해 덕격으로 나와 주루를 찾아 들어가 물었더니 보름 전부터 포달랍궁이 폐쇄되었다고 했으며 그 이유는 자신들도 잘 모른다고 했다. 수십년 동안 장사를 해왔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고 특히 수 백리 먼 지역에서 순례 차 온 사람들이 헛고생만 한 채 발길을 돌리고 있다고 했다.
동천완은 몇 일 머무르며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기로 하고 주유객점에 여장을 풀었다. 모두 세 개의 방을 얻어 두 개는 호위무사들이 사용했고 하나는 자신이 썼다.
객점에 머무른 지 이틀 만에 동천완은 대략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누구도 속 시원하게 얘기해주는 사람은 없었고 다만 객점에 식사를 위해 찾아온 손님 중 무림인들로부터 들은 얘기였다. 그들도 정확한 사정은 모르고 갑자기 산문을 폐쇄한 것으로 보아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조치일 것이라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그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이십여일 전 포달랍궁의 대법왕의 행방이 묘연해 졌고 이후 산문이 폐쇄된 것으로 보아 상호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동천완이 알고 있기에 포달랍궁의 대법왕은 동천몽일 가능성이 구할 이상이었다. 그런데 그가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소문에 크게 놀랐다.
모든 희망을 동천몽에게 걸고 찾아왔는데 들어가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의 생사까지 알 수 없다면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불과 이틀 만에 오백리를 달렸다. 끼니를 찾아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오로지 달리고 또 달렸다. 잠도 자지 않았고 서장제일경이라는 황벽을 지나오는데도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동천몽의 두 눈에서는 무서운 광채가 쏟아져 나왔고 어금니는 조용히 물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누군가를 죽일 것 같은 기세에 겁을 먹은 듯 점소이가 주춤 거리며 공손히 물었다.
“소…손님 무엇을 드릴까요?”
아무래도 밤길을 달려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저녁을 먹고 가기로 한 것이다.
“만두.”
동천몽이 짧게 말했다.
점소이가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며…몇인 분을 드릴까요?”
“일인 분.”
“시…신속히 올리겠사옵니다.”
점소이 나이수는 서너 걸음 걷다 말고 뒤를 돌아보며 사정없이 썼다.
‘귀…귓볼에 피도 안마른 새끼가 어디서 인상을 긁고 있어.’
자신의 나이는 올해 서른 둘이다. 아무리 잘 봐도 동천몽의 나이는 이십 중반을 넘어 보이지 않았다.
“저…저런 애숭이들까지 날 우습게 보고 반말이라니 더러워서 이 짓 때려 치워야지.”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직업에 귀천은 있었다. 비록 점소이로 있지만 자신도 책 좀 읽었다. 단지 가정 형편이 어려운데다 맏이로서 가게를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에 일찍 직업전선으로 나선 것이었다. 손님들끼리 주고 받는 대화를 보면 그들의 수준을 짐작 할 수가 있는데 한 마디로 옷만 번지르르 하게 입었을 뿐 수준이하의 손님들이 태반이었다. 그런 무식한 손님들에게 무시당하며 인간이하의 대우를 받을 땐 눈이 뒤집힌다.
보나마나 저 인간도 그런 놈중 하나라고 욕을 하며 나이수는 주방에 대고 소리쳤다.
“만두 한 사람 것.”
일부로 동천몽 들으라고 크게 외쳤다.
그리고 슬며시 동천몽의 반응을 살폈는데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한 듯했다. 여전히 두 눈에 힘을 주고 누군가를 잡아 죽일 듯한 기세로 앞만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
점심시간으로는 늦었고 저녁시간으로서는 일러서인지 주루안에는 손님이라고는 동천몽 한 명 뿐이었다. 그래서 다른 점소이들까지 우두커니 서서 동천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재 뭡니까? 뭔데 저렇게 인상 팍 긁고 있죠? 세월도 별로 들어보이지 않는데”
후배 점소이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나이수가 콧구멍을 쑤시며 말했다.
“내말이 그 말이야. 들어오자마자 인상 팍 긁으며 말 까잖아. 저런다고 우리가 겁먹을 줄 아나본데 웃기는 놈.”
왕왕 점소이들 앞에서 무게 잡는 손님들이 있었다. 그럴 때 굽실거려주면 더욱 좋아한다.
“저 자식 우리가 굽실거려주기를 바라나 본데 죽었으면 죽었지 어린놈에게는 못하지.”
나이수가 단호히 뱉았다.
“만두 나왔어.”
주방 쪽에서 말이 나왔고 후배 점소이가 나섰다.
“선배님, 제가 가져다 드리면 안될까요?”
나이수는 후배 점소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며 그렇게 하라고 물러섰다. 후배 점소이 성질은 객점에서 뿐만 아니라 인근에까지 소문이 날 만큼 화났다 하면 앞 뒤 안 가린다. 인근 불량배들까지도 후배 점소이를 함부로 건드리지 않을 정도였다.
“손님 만두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툭 던지듯 접시를 놓았다.
그 바람에 만두 한 개가 탁자로 굴렀다. 그런데 동천몽은 전혀 개의치 않고 떨어진 만두를 주워 입속에 넣고 삼켰고 뒤이어 양손으로 접시 위 만두를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했다.
점소이 눈이 커졌다. 다른 손님 같았으면 이미 한 바탕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 동천몽은 전혀 관심도 두지 않았으므로 자신들이 오해했음을 알아차렸다.
“죄송합니다. 손님.”
허리를 깍듯이 숙여 사죄를 했는데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이었다. 하지만 동천몽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만두만 부지런히 먹었다.
자신이 사과를 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펴졌던 점소이 얼굴이 다시 구겨졌다. 하지만 결코 자신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돌아섰다. 뭔가 개인적으로 큰 분노가 있기 때문에 저렇게 눈을 불을 켜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여기 계산.”
동천몽이 짧게 말했고 이번에는 나이수가 갔다.
“닷푼입니다.”
동천몽이 두말 않고 은자를 꺼내주더니 휭하니 밖으로 나갔다.
“꺼어억!”
트림을 한 동천몽은 다시 몸을 날렸다. 그러면서 씹어 뱉듯한 마디 중얼거렸다.
‘본왕이 네놈들을 가만 두면 사람이 아니다.’
동천몽이 서편으로 떨어지는 석양을 향해 몸을 날렸다. 삽시간에 동천몽의 몸은 황혼속으로 잠기듯 사라져버렸다.
동천몽이 덕격에 도착한 것은 유시가 조금 되지 않아서였다. 덕격은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덕격에서 궁까지는 일다경이면 자신의 신법으로 도착할 거리였으므로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 다루(茶樓)로 들어섰다.
초저녁 다루는 몇몇 손님들이 앉아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동천몽이 들어서자 점소이가 다가와 말했다.
“무슨 차를 드릴까요?”
동천몽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분노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만 대법왕정도 되면 자신의 감정 정도는 자제해야 한다. 이제는 예전 소주의 개고기가 아니라 만인의 어버이이자 활불인 대법왕이었다. 그러나 생각을 할수록 미칠 것 같았고 감정 절제가 되지 않아 혹시 차를 마시면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들어온 것이다.
다선일미(茶禪一味)라고도 했고 좋은 차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육정을 초월한다고 했다. 차를 마시므로 영혼의 혼미함을 씻고 평정한 마음으로 사물을 관조한다고 했다. 차는 역경에 처한 사람의 위로자가 되고 번뇌를 잠시 잊게 해주는 망우객(忘憂客)이라고도 사대법왕들은 예찬했다.
“용정, 사천 것으로.”
옛날 부친이 차를 마시면 용정을 즐겨했는데 한사코 사천것을 선호했다. 궁금하여 물었더니 같은 용정이라도 사천 것이야 말로 최고라고 했다.
“아미타불!”
분노를 삭이기 위해 불호를 외우며 차를 기다렸다. 동천몽은 차를 기다리면서 쉬지 않고 아미타불을 반복했다. 지금 심정 같아서는 모조리 패 죽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점소이가 차를 내왔다. 동천몽은 김이 피어나는 용정을 마셨다.
후루룩 소리를 내며 마시자 주위 다른 손님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에게 지금 다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차로 마음을 진정시켜보는 것이 목표일뿐이었다.
연거푸 다섯 잔을 마셨다. 물배가 불러왔지만 뜨거운 것이 들어간 탓인지 오히려 더욱 화가 치밀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계속 불호를 외우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애썼다.
창밖은 본격적으로 어두워 졌고 다루에도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 들었다. 동천몽은 계산을 치루고 밖으로 나갔다. 차 때문인가. 들어 올 때보다는 확실히 가슴이 진정된 것 같았다.
휘이이!
동천몽은 몸을 날렸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많은 저자거리에서는 신법을 자제하는데 지금 그 따위에 신경을 여유가 없었다. 쉭 하며 지나가는 동천몽을 보며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보았다.
멈칫!
날아가던 동천몽의 눈이 빛났다. 저자거리 한쪽을 걸어가는 한 무리가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낯이 익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런 외진 곳에 자신이 아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동천완 역시 휙 하며 지나가는 동천몽을 보았다. 워낙 빨라 자세히 확인은 못했지만 옆모습이 동천몽을 닮았다고 생각 했다. 하지만 속의를 걸치고 있었으므로 그럴리는 없다고 생각 하며 포달랍궁을 향해 다시 걸어갔다. 이젠 아예 근처에서 머물 생각이었다. 그러다보면 혹시라도 어떤 방법이나 기회가 얻어질지 모른다.
홍산 초입에 도착한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주위 지형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주위가 어둡지만 자신의 시선은 어둠따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이게!’
아무리 주위를 뒤지고 찾아봐도 포달랍궁으로 오르는 길이 사라졌다. 인근을 샅샅이 뒤지고 기억을 되살려 보았지만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혹시 무상탄독의 폭발 때 입은 충격으로 기억력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까 되돌아봤지만 그런 징후는 없었다.
달이 떠오르면서 주위가 환해졌다. 하지만 전혀 낯선 풍격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팟!
동천몽의 눈이 빛났다. 순간적으로 죽은 천장금왕의 말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포달랍궁 주위로는 상고의 절진이 펼쳐져 있다고 했다. 평소에는 진을 가동하지 않지만 어떤 위험이 닥치거나 위기라고 판단하면 진을 발동시키는데 워낙 가공할 살진이자 방어진이기 때문에 누구도 침입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럼 진법을 발동 시켰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지형이 이렇게 달라질 이유가 없었다. 또한 진법이 발동 되었다면 궁에 위험이 닥쳐왔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했다. 어둠속에서 동천몽의 눈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물이 흘러가듯 동천몽의 두 눈이 부지런히 좌우로 굴러다녔다. 그리고 한 순간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진법이 펼쳐진 대략의 이유가 잡히고 있었다.
‘훗훗! 늙은이들이 제법이군.’
아무리 생각해도 진법을 가동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다.
적은 보나마나 백쾌섬이다. 그가 아닌 누구도 포달랍궁을 넘볼 능력이나 배포는 갖고 있지 못했다.
사실 백쾌섬을 의심했지만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당했을 것을 대비한 전략은 전혀 준비하지 않았고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그런데 백쾌섬이 무상탄독이라는 초강수로 자신을 공격하여 위기에 빠지면서 가장 걱정 되었던 것이 궁의 안전이었다. 전쟁에서 수뇌를 제거했으니 다음 수순은 뻔한 것 아닌가. 그런데 진법을 가동한 것을 보면 사대법왕의 머리도 제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잘한 조치이지만 자신까지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에 서서히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천장금왕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파해법을 배워두라고 했지만 당시는 오로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다.
힐끔 달을 보았다. 자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척!
동천몽이 구부러진 노송 아래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불사심법을 운용하여 전기를 끌어올려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리전음(千里傳音)을 펼친 것이었다.
천리전음이라고 해서 전음이 무려 천리를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먼 거리를 간다는 의미인데 천리전음을 펼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가지 조건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내공이었다. 전음의 경지와 거리는 내공에 비례한다.
전음이라는 것이 내기를 언어로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내공이 심후할수록 멀리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동천몽의 입술이 쉴 사이 없이 달싹거렸고 반각 정도 지난 후 가부좌를 풀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한편 동오룡이 천목산 무림맹에 도착하자 해시가 조금 넘었다. 어두운 밤길을 걸어 나타난 동오룡을 무림맹 위사들이 막았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인지 예전보다 훨씬 살벌한 기세를 풍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잠시 기다리라면서 안에 기별을 넣으며 부산을 떨었다.
동오룡은 조용히 숨을 가다듬고 왼쪽 가슴을 오른손으로 쓰다듬었다. 가슴속에는 비장의 팻감이 들어 있었다. 어둠속에 무림맹은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하지만 위기에 처한 때문일까 어둠을 뚫고 수백 개의 칼날이 자신의 목을 죄어오는 느낌이었다.
“또 뵙는군요. 각주님.”
어둠속에서도 옆구리에 찬 은빛 검집이 유난히 번들거린다. 운룡각주 혈매자였다.
동오룡이 마주 포권의 예를 취했다.
“허허! 자꾸 귀찮게 하여 송구하오. 상관 총관님을 뵈러 왔소이다만?”
혈매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잖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늙은이를 따라 오시지요.”
혈매자가 웃으며 등을 돌렸다.
동오룡의 눈이 커졌다. 혈매자의 말을 되새겨보면 상관량은 자신이 찾아 올 줄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한데 혈매자는 무림맹 밖으로 걸었다.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왼쪽 담장을 끼고 난 조그만 오솔길로 들어섰다. 동오룡이 지금 어딜 가느냐고 물으려는데 앞서가던 혈매자가 입을 열었다.
“상관 총관님께서는 지금 군휘정(軍揮亭)에 계십니다.”
동오룡의 눈이 빛을 뿌렸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어쨌든 무림맹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 알고 혈매자를 따라 산길을 올라갔다.
혈매자는 무공을 모르는 동오룡을 배려하여 천천히 올랐다. 하지만 동오룡은 무척 힘이 들었고 땀이 흘렀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오솔길은 급경사로 돌변했고 하나의 봉우리를 올라서자 달빛 아래 한 채의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정자에는 한 인물이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한 눈에 상관량임을 알아보았다.
혈매자가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구부렸다.
“동각주님을 모셔 왔습니다.”
상관량이 반쯤 들어 올렸던 술잔을 내리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핫핫! 어서오시오. 동각주.”
상관량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으므로 굳어 있던 동오룡의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고 정자에 오르기 전 힐끔 현판을 올려다보았는데 군휘정이라고 쓰여 있었다.
‘군사를 지휘하는 곳이라!’
나름대로 해석을 하며 상관량이 권하는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혈매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고 자신의 잔인 듯 물고기가 새겨진 흰색 잔이 하나 더 있었다.
콸콸!
상관량이 호기롭게 술을 따랐다.
“자 듭시다!”
동오룡은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부딪쳤고 상관량은 한 손이었다. 동오룡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마셨다.
멈칫!
고개를 옆으로 돌려 술잔을 입에 대던 동오룡이 고개를 쳐들었다. 놀랍게도 정자 아래로 무림맹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무림맹은 망루를 제외하고는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상관량이 말했다.
“군휘정에 앉아 있으면 무림맹의 훤히 내려다보이지요. 원래 군휘정은 무림맹 십대 군사이셨던 백운자께서 세우셨소이다.”
상관량은 군휘정이 세워진 역사에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다. 군사는 전황을 가장 잘 살필 수 있고 적과 아군의 움직임에 대한 연락이 가장 빠른 곳에서 지휘를 해야 한다. 백운자는 그 지역으로 이곳을 선택했고 군휘정을 지었다.
이후 무림맹의 군사나 간부들은 적과 싸움이 있으면 항상 이곳 군휘정에서 진두지휘를 하여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이 상관량의 얘기였다.
왜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는지 동오룡은 이해를 하지 못했고 따라준 두 번째 잔을 비웠다.
“왜 이곳에 계시옵니까? 언뜻 운룡각주의 말을 들어보니 총관님께서는 소인이 올줄 알고 계신듯 하더군요.”
상관량을 쳐다보는 동오룡의 눈이 빛났다.
상관량이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그냥 넘겨짚어 본 것인데 어떻게 맞은 거요? 그렇잖아도 이곳에 앉아 술 한 잔 하고 싶었는데 마침 각주가 오셨다는 기별을 듣고 이곳으로 모신 거요. 자 우리 오늘은 모든 걱정 다 털어버리고 술이나 합시다. 각주와 술을 해본지도 아주 오래 된 것 같구려.”
상관량이 따르자 동오룡은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요즘 장사는 어떠시오? 불경기라고 하지만 워낙 천하상권을 좌지우지 하는 천상각인 만큼 큰 타격은 없겠지요?”
동오룡은 단번에 마시며 대답했다.
“더…덕분에 아직은.”
“하긴 진정한 상인은 불경기 때 돈을 긁어모은다더군요.”
동오룡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가슴속에 손을 집어 넣으려 하자 상관량이 술을 내밀었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두 손으로 다시 술잔을 받았다.
“사실 잠시 후면 아주 볼만한 구경거리가 생길 것이오. 혼자보기에는 너무 아까워 각주를 불렀소이다.”
술병을 세우고 상관량이 야릇한 눈빛을 던지며 말했다.
“일생에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귀한 구경거리이니 우리 술을 마시면서 즐겁게 관전 합시다.”
동오룡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 깊은 밤에 무슨 구경거리가 있다고 하는지, 주위를 휘둘러보아도 눈을 호사시킬 어떤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쏴아아!
그때 바람 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근처 소나무들이 꼼짝도 하지 않았으므로 동오룡은 눈을 크게 떴다. 결국 자기가 들었던 소리는 바람소리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왔군!”
아래를 내려다보던 상관량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동오룡 또한 상관량 시선을 따라 무림맹을 내려다 보았다.
흠칫!
무림맹 망루의 불빛에 수많은 흑의인들이 담장을 넘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무림맹 무사들이라면 담을 넘는 따위의 짓은 할 리가 없었으므로 동오룡이 눈을 크게 떴다.
“저…적 아니오?”
“각주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나 보구려? 맞소이다. 지금 적이 무림맹을 침입하고 있는 중이오.”
돌연 무림맹으로부터 처절한 비명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크아악!”
“퇴…퇴각하라. 함정이닷.”
비명과 당황한 목소리가 뒤섞여 터져 나왔다.
동오룡은 한 눈에 모든 상황을 읽을 수 있었다. 무림맹은 오늘밤 적이 침입해 오리란 것을 예상하고 함정을 파놓고 기다린 것이 분명했다.
“으아악!”
“컥! 크악!”
그것은 비명의 폭풍이었다. 수십 명이 일거에 떼죽음을 당하며 흘리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자 듭시다.”
상관량이 잔을 들어 올렸으므로 동오룡 역시 하는 수 없이 잔을 들어 마셨고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비명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장사꾼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무리 강한 집단일지라도 기습 사실이 누설되면 절대 살아 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휘익!
그때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에 동오룡이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자신을 안내했던 혈매자가 나타났는데 옆구리에 꽂혀 있던 그의 은검이 손에 쥐어져 있었는데 붉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은검이 붉게 변할 리는 없고 모두 피라는 의미였다.
“예상대로 적의 선봉장은 낭도채의 채주 제갈팽이었습니다. 그 이외에 혈막과 청룡련의 연합 부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쳐놓은 그물에 걸려 들어 거의 도륙해가고 있으며 제갈팽을 제외한 청룡련의 수뇌와 혈막의 막주의 목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우우웁!’
동오룡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혀를 깨물어 삼켰다.
혈매자의 입에 거론된 조직과 인물들은 모두 동천비의 수하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것은 적의 수괴다. 수괴를 잡아야 한다.”
부르르!
동오룡의 손가락이 떨렸다.
‘적의 수…수괴!’
수뇌와 수괴는 다르다. 상관량이 수괴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은 동천비를 절대 살려두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그때 또 한사람이 군휘정에 날아 내렸다. 그는 운룡각의 부각주 백수신도였다. 오십 근짜리 그의 대감도는 이미 피로 완전히 물들었고 싸움의 처절함을 반증이라도 하듯 걸치고 있던 흑포는 걸레조각이 되어 있었다.
“뭐요, 부 각주?”
백수신도가 빠르게 말했다.
“적의 수괴를 발견하고 추적했지만 불행하게도.”
“놓쳤단 말이오?”
“금지무공 묵곤혈참기를 사용해서.”
“뭣이 묵곤혈참기.”
와당탕!
들고 있던 술잔이 엎어져 술이 쏟아졌다. 술잔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보아 상관량이 받은 충격의 강도를 짐작 할 수 있었다.
‘도대체 묵곤혈참기가 어떤 무공이기에!’
상관량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돌덩이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잠시 생각 하는 것 같더니 나직히 말했다.
“묵곤혈참기를 사용했다면 그대들 능력으로 적의 수괴를 잡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오. 피해만 늘어날 뿐이니 추적을 중단하시오. 그 대신 들어온 자는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시오.”
“명을 받사옵니다.”
“존명.”
두 사람이 사라졌다.
아래로부터 비명은 여전히 들려왔고 상관량이 말했다.
“동각주께서도 들었다시피 적의 수괴가 금지마공을 익혔다 하오. 혹시 묵곤혈참기가 무슨 무공인지 아시오?”
평생 장사꾼으로 살아온 자신이 알 턱이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묻는 이유는 한 가지 뿐이다. 묵곤혈참기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려는 것이고 그것은 동천비를 도저히 살려둘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묵곤혈참기는 마공서열 일위인 금지 무공이오. 금지무공이란 익혀서는 안되는 것을 말하는데 천하에는 모두 열가지 금지무공이 있소. 누구를 막론하고 금지무공을 익히면 무림의 공적이 되오.”
동오룡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고…공적!’
그 의미는 알고 있었다. 공적으로 찍히면 얼마나 가공할 보복을 당하고 말살 당해야 하는지는 얘길 들어 알고 있었다. 동천비는 이제 무림의 공적이 되어 있었다.
“금지무공은 수위가 높아갈수록 인성을 말살하는 특성을 갖고 있소. 본맹의 고수들이 쫓지 못한 것을 보면 수괴는 묵곤혈참기를 십성가까이 익히지 않았나 추정되는구려. 참고로 묵곤혈참기는 마교의 무공이면서도 그들도 터득해서는 절대 안 되는 무공으로 분류해놨다는 것이오.”
동천몽의 표정이 평정을 되찾았다.
너무 놀라다보니 더 이상 어떤 충격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이미 자신의 능력 밖에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정도 되면 품속의 팻감도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
“술이 떨어졌잖소.”
상관량이 동오룡의 잔을 채웠고 기다렸다는 듯 비우자 놀란 표정으로 또 채웠고 다시 비웠다. 연속해서 무려 네 잔을 비우자 상관량이 정색하고 바라보았다.
“어떻소? 아드님께서 직접 무림맹을 공격한 현장을 본 기분이 말이오?”
동오룡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침묵하다 시선을 들어 상관량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유구무언이오.”
“유구무언이라…핫핫핫!”
상관량의 광소가 어둠을 뚫고 메아리를 만들었다.
뚝!
웃음을 그치던 상관량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그만 돌아가시오. 수일 내로 가주를 찾아 뵙겠소이다.”
동오룡은 아무말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자 아래로 내려와 술잔을 기울이는 상관량을 향해 깍듯하게 허리를 구부렸다.
“소인 이만 물러가옵니다. 총관님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겠사옵니다.”
상관량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동오룡은 왔던 길을 내려왔다. 비명소리는 여전히 들려왔고 몇 번 미끄러져 넘어졌다. 그럴 때마다 동오룡은 옷을 털고 일어나 다시 산 길을 내려갔다. 금지마공을 익혔든 어쨌든 동천비가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고 무림맹 정문에까지 내려왔을 때 그의 행색은 유난히 초라했다. 넋이 빠진 채 산길을 내려오다 넘어져 의복이 여기저기 찢어졌고 흙까지 묻어 몹시 흉했다.
터벅터벅!
어두운 달빛 속으로 동오룡의 모습은 사라져갔다.
모용산은 혀를 깨물었다. 이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다가온 것이었다. 모용세가는 명문으로 중원사대세가에는 들지 못하지만 대대로 그 영향력을 갖추고 있었다.
모용산의 부친이자 가주인 모용파는 좀 더 가세를 확장해보기 위해 천상각과 사돈 관계를 맺었다. 천상각의 가공할 자금을 이용해 가세를 넓혀 보려는 의도였다.
계산은 적중했고 그동안 천상각으로부터 가져다 쓴 자금만 해도 족히 황금 일천 만 냥은 되었다. 그 돈은 무사들 무예향상에 큰 도움이 되었고 어느덧 소리 소문 없이 강호사문의 아성을 위협할 만큼 성장했다. 그런데 세상사는 결코 뜻대로 흘러가주지 않았다. 오늘 밤 동천비로부터 출동 협조를 요청받았고 그에 따라 무림맹 공격에 나서려는데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상관량의 밀사 가개묵이란 자였다. 그가 전해준 상관량의 서찰을 본 모용파는 숨이 멎을 듯 했다. 상관량은 동천비의 모든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으며 만약 모용세가가 그에게 협조를 한다면 온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노골적인 경고를 보내왔다. 누구보다도 상관량에 대해서는 잘 아는 모용파이다. 그와 악연을 맺어 아직까지 온전한 사람이나 집단은 보지 못했다. 거대한 무림맹을 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누 백년 모용세가의 역사를 종지부 찍겠다는 선언이나 다를바 없었다.
“거듭 말하지만 모든 건 네가 결정하거라. 아비는 네 뜻을 존중하겠느니라.”
모용파와 모용산, 그리고 비천야차가 탁자를 놓고 마주 앉아 있었다.
모용파와 비천야차의 시선은 모용산에게 고정되었다. 비록 오늘밤 무림맹 공격에는 나서지 못했지만 모용산이 파혼을 할 수 없다면 천상각을 도와 분골쇄신 해야 한다.
“지금쯤 무림맹 공격에 나섰겠죠?”
모용산이 말했다.
비천야차가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봤자 상관량 그 늙은 여우가 이미 알고 있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나이까? 오히려 동공자가 목숨이나 부지했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그때 발자국 소리와 더불어 문이 열리더니 모용세가의 군사 도량이 나타났다.
“어떻게 됐나요?”
모용산이 다급히 물었다.
도량이 조용히 말했다.
“예상대로 공격은 실패로 끝났고 동공자는 다행히 포위망을 벗어났다고 하옵니다.”
방안의 공기는 더욱 가라앉았다.
모용파와 비천야차의 시선은 다시 모용산에게 달라 붙었다. 그런데 자신들의 예상과 달리 모용산의 결정은 빨랐다.
“파혼해요. 이미 끝난 집안에 매달리는 어리석은 바보가 될 수는 없잖아요.”
모용파가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뛰어난 생각이다.”
“좋은 말씀입니다.”
비천야차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상관량 총관으로부터 협조 할 경우 무림맹 장로 자리 제의를 받았던가요?”
모용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좋은 자리지.”
무림맹 장로자리는 각파 수장들이 맡는다. 구파일방과 사대세가 외에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어제 상관량은 모용파를 장로 자리에 옹립하겠다고 했다. 그것은 여러 가지에서 의미가 큰 일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모용세가를 사대세가의 동격으로 놓았다는 것이었다. 장로가 되면 무림맹에서의 발언권도 커진다.
“기다리던 바 아닌가요? 모용장로님.”
모용산이 웃으며 부친을 향해 장로라는 호칭을 붙였다.
부친이 흠칫 하더니 이내 껄껄 거리며 웃었다.
“헛헛! 모용장로라 듣기가 무척 좋구나.”
입구의 도량이 허릴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장로님.”
“기쁘군요. 정말 반가운 일입니다. 장로님.”
비천야차까지 축하에 나서자 모용파 입이 함지박만 해졌다.
“고맙소. 고마워. 이 모두가 산이 너 덕이다. 이 애비는 너에게 고마워하겠다. 자 이럴 것이 아니라 우리 간단히 술이라도 한잔 하는게 어떻겠소?”
비천야차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장로님.”
“장로라. 핫핫핫!”
모용파의 웃음소리가 길게 퍼져나갔다.
“호호호!”
모용산의 요염한 미소가 뒤를 따랐다.
웃음을 그친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변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홋홋! 당신 또한 어차피 본가를 이용할 목적으로 정혼을 약속했으니 피장파장 아닌가요?’
그녀의 입가에 살벌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동천비와 천상각은 그녀의 기억에 사라졌다. 남은 것은 아버지 뒤를 이어 무림맹의 장로가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