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27화 (27/71)

제9장 불사심법의 함정

힘없는 사람들을 노리는 산적들이다.

“우린 절대 널 헤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몸에 지닌 좋은 물건들 있으면 얼른 바치고 계속 가줄래? 임마 뭐해 받을 준비 하지 않고.”

두목으로 보이는 구레나룻의 사내가 옆에 있는 작달막한 체구의 부하를 향해 눈짓을 했다.

“알겠습니다. 형님.”

작달막한 체구의 사내가 동천몽의 면전으로 다가와 양손을 펴서 내 밀었다.

“얼른 이곳에 올려놔. 빨리.”

동천몽은 아무 말 않고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지니고 있는 은자를 꺼내 작달막한 사내의 손 위에 올려 놓았다.

촤라라!

더 이상 내 놓을 기미를 보이지 않자 두목이 말했다.

“너처럼 현명한 인간은 처음 봤구나. 지금까지 수많은 인간을 털었지만 너처럼 대화가 통하는 상대는 처음이다. 더 없느냐? 뒤져서 나오면 죽는다.”

동천몽은 초점 없는 시선으로 두목을 쳐다보았다.

동천몽을 바라보던 두목이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구나. 좋다. 통과.”

동천몽이 두목의 곁을 지나갈 때 두목이 큰 소리로 말했다.

“임마 어깨 펴, 장부가 말이야. 돈 좀 빼앗겼다고 그렇게 축 쳐져 가느냐? 인생에서 돈이 전부가 아니잖아.”

타탁!

그러면서 동천몽의 어깨를 두어번 쳤다.

그런데 그 바람에 품속에 넣어 두었던 백상불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투툭!

“어, 이건 또 뭐야?”

두목 뒤쪽으로 서 있던 비쩍 마른 사내가 허리를 구부려 백상불을 주워들었다. 비록 어둠속이지만 백상불은 흰 광채를 뿜고 있어 한 눈에 귀한 물건임을 알아 볼 수 있었는데 두목의 인상이 와락 찌푸려졌다.

“이 자식, 너 만큼은 믿었는데, 일로 줘봐.”

비쩍 마른 사내가 두목에게 백상불을 건네주며 말했다.

“상당히 가치 있어 보입니다.”

멈칫!

백상불을 받아 살피던 두목의 눈이 커졌다. 앞 뒤로 다시 한 번 살피던 두목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퍼어억!

“오오! 대법왕이시여.”

두목이 무릎을 꿇고 공포에 젖은 표정을 짓자 부하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두목이 부하들을 향해 버럭 소릴 질렀다.

“뭘봐 새끼들아. 빨리 무릎 꿇어.”

두목의 명령에 사내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대법왕이시여 소인들이 죽을 죄를 졌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목숨만 보존해 주소서. 우리가 금품을 강취한 이 분께서는 대법왕이시다. 이건 바로 대법왕의 위대한 옥체를 보증하는 백상불이니라.”

두목이 백상불을 두 손으로 동천몽에게 올렸다.

부르르!

백상불을 올리는 두목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동천몽의 눈에서 예리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이제야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너희는 누구냐? 왜 너희들이 본왕의 백상불을 갖고 있느냐?”

동천몽이 백상불을 받으며 말했다.

두목이 작달막한 체구의 사내를 향해 인상을 썼다.

“빨리 그것도 돌려 줘.”

작달막한 체구의 사내가 동천몽에게서 빼앗았던 은자를 두 손으로 바쳤다.

“받으소서.”

동천몽은 대략의 상황을 짐작했다. 자신이 하체의 기능마비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 모든 것이 이루어 졌음을.

은자를 받아 드는 동천몽을 보며 두목이 머리를 조아렸다.

“어둡다 보니 사람을 쟤는 눈이 더욱 무디어져 대법왕님을 알아보지 못했사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일어들 나거라.”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일행이 일어섰는데 모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름이 뭐냐?”

두목이 대답했다.

“부시(夫屍)라고 하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구나. 보아하니 이 근처를 무대로 활동하는 무리들 같은데 오늘밤 어떻게 하룻밤 신세 좀 질수 없겠느냐?”

“무…물론이옵니다. 대법왕님께서 저희 산채를 이용해주시면 한 없는 영광이지요. 하지만 워낙 누추하여.”

“괜찮다. 이슬만 피할 수 있으면 되느니라.”

“하오시면 소인을 따라 오십시오. 뭣들 하느냐? 어서 대법왕님을 보호하라.”

부하들이 부시의 명령에 동천몽 주위를 멀찍이 에워쌓았다.

동천몽은 부시를 따라 숲으로 들어갔고 반 시진 정도 들어가자 넓은 공터가 나왔으며 조그만 초막이 세 채 있었다.

“보다시피 집이 저렇사옵니다. 그나마 가장 소인이 거주하는 가장 오른쪽 초막이 괜찮사옵니다.”

부시가 오른쪽 초막으로 데려갔다. 입구는 문대신 억새로 엮은 발이 드리워져 있었다.

“드시지요.”

부시가 발을 걷어 올리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바닥 역시 억새가 깔려 있고 간단한 취사도구가 있었다.

“부…부끄럽사옵니다.

“좋다. 무척 아늑하구나.”

부시가 입구에 서 있는 부하들을 향해 인상을 썼다.

“뭐하고 있느냐? 어서 대법왕님의 저녁을 준비하거라.”

“아니다. 생각 없느니라. 난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고 편히들 쉬거라.”

돌아서는 부하들을 향해 부시가 버럭 소릴 질렀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을 봤나. 이 새끼들아 쉬란다고 돌아가면 어떡해. 대법왕님의 신변은 누가 지킬 거야?.”

부하들이 다시 등을 돌리자 동천몽이 웃으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말라고 했잖느냐? 돌아 쉬거라.”

하지만 부하들이 부시의 눈치를 보느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부시가 다시 인상을 썼다.

“이 새끼들아 귀가 먹었어? 대법왕님께서 돌아가 푹 쉬어라고 하잖아.”

부하들이 각자 흩어졌다.

동천몽이 나뭇가지로 얼키설키 막은 초막 벽에 등을 기댔다.

“편히 앉거라.”

동천몽이 무릎을 꿇고 있는 부시를 향해 말했다.

부시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아니옵니다. 소인은 이상하게 무릎을 꿇고 있으면 마음이 평안 하옵니다. 저어 그런데.”

부시가 말끝을 흐리자 동천몽이 말했다.

“뭐냐?”

“무…무슨 근심 있으시옵니까? 대법왕님의 존안이 무척 어두워 보입니다?”

동천몽이 가볍게 웃었다.

“그러느냐?”

“비록 소인이 이런 곳에서 산적 질을 하고 있지만 올해 나이가 예순 하나입니다. 인생 살만큼 살다보니 상대 얼굴만 보고서도 기분을 짐작해 냅니다. 괜찮으시다면 소인에게 말씀해 주실 수 있겠나이까?”

동천몽이 물끄러미 부시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길게 한숨을 쉬었다.

“혼인 했느냐?”

“해…했습니다만 얼마 전에 죽었습니다. 병으로.”

“자식은 있느냐?”

“아들이 한명 있는데 이곳에 놔뒀다가는 아비처럼 산적 신세를 면치 못할 것 같아서 무당파로 보냈사옵니다. 소인은 비록 이렇게 살지만 자식만큼은 강호의 주류로 살기를 원하거든요.”

“좋은 생각이다. 이제 개천에서 용 나던 시대는 지났느니라. 가르친 만큼 성장한다. 북경의 부호들이 왜 자식들을 그토록 목숨 걸고 구파일방으로 보내려고 하는지 아느냐? 출세의 수단으로 교육만큼 확실 한 게 없기 때문이니라.”

“말이 나왔으니까 한 가지만 여쭤도 되겠나이까?”

“물어라.”

“정말로 북경의 고관대작들은 한 달에 은자 수백 냥을 써가며 우수한 사부들을 데려다 무예를 가르치는지요?”

“사실이니라. 그래서 돈이 명문(名門)을 낳느니라. 그들이 바보 멍청이어서 그렇게 많은 돈을 자식들 뒤 구멍에 쑤셔 박겠느냐? 소림과 무당을 비롯한 구파 일방의 제자들중 거의 칠 할이 돈 많은 집 자제들이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미친 듯이 돈을 쳐 발라 벌모세수를 시키고 기초를 확실히 닦으니 어찌 없는 집 아이들이 그들을 따라가겠느냐?”

부시가 한숨을 쉬었다.

“후우! 앞으로 강호도 돈 많은 집 자식들이 주름 잡겠군요?”

“앞으로가 아니라 벌써 나타나고 있느니라. 더구나 이번 무림맹주가 새로 뽑히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느니라.”

“심각 하다 하오시면?”

“신임 맹주의 강호 정책은 철저히 가진 자의 편에 서 있느니라. 구파일방에 가장 많은 합격자를 배출하는 북경의 유명한 기초무관(基礎武館)과 같은 새로운 무관들을 이백여개 세우겠다고 하는구나.”

부시의 눈이 커졌다.

“그런 곳은 무척 관비도 비쌀텐데 없는 사람들은 그림의 떡 아닙니까?”

“그러니까 갈수록 강호도 부익부 빈인빅 현상이 심화 되는 것 아니겠느냐? 비록 본궁은 중원의 일에 개입할 처지가 못 되지만 강 건너 불구경 할 수만은 없느니라. 자칫 우리에게까지 그 여파가 밀려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

부시의 안색이 우울해졌다.

동천몽이 그런 부시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아들이 똑똑한 모양이구나. 그 어렵다는 무당파에 들어가다니?”

아들 얘기가 나오자 부시의 표정이 환해졌다.

“헤헤! 기특해 죽겠사옵니다. 내속에서 어찌 그런 영민한 아이가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응시만 한번 시켜봤는데 쏙 들어가지 뭡니까?”

동천몽 또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렇고 아까 본 왕더러 고민 있느냐고 물었더냐? 있느니라.”

그리고 동천몽은 자신이 처한 처지를 가감 없이 얘기해줬다. 듣고 있던 부시의 눈이 커졌다.

“그…그럴수가.”

무척 충격을 받은 얼굴로 동천몽을 바라보던 부시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그건 사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인데.”

염려스런 표정을 짓던 부시가 갑자기 눈을 빛냈다.

“가만.”

“왜 그러느냐?”

“정확한 건 아니지만 이십 여 년 쯤 한 가지 이상한 얘기를 들었사옵니다. 사실 소인의 친구 중 한 명이 왕흥사란 절의 주지로 있지요. 어느 날 그에게 놀러 갔다 포달랍궁 얘기가 나왔는데 그때 그 친구가 말하길 대법왕님들이 배우는 심법에 한 가지 함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동천몽의 눈이 빛났다.

“함정?”

“워낙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그가 말하길 불사심법을 극성으로 연마하면 남자기능이 상실된다고 했습니다.”

벌떡!

등을 기대고 있던 동천몽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윽!

무시무시한 동천몽의 눈빛에 부시가 비명을 질렀다.

“정말이냐? 분명 한 사실이렸다?”

부시가 더듬거렸다.

“소…소인이 왜 거짓을 고하겠나이까? 저 두 귀로 분명 그렇게 들었사옵니다.”

동천몽이 입을 쩌억 벌렸다.

청천벽력과 같은 얘기였다.

천포지에 몸을 담그면서 자신의 불사심법이 십이성 극성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전신의 힘이 예전과 다르게 폭발할 듯 했고 온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부시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침내 그 원인을 찾아낸 것이었다.

그런데 돌연 동천몽의 인상이 험악하게 변했다.

‘이런 개자식들이!’

이를 부드득 갈더니 동천몽의 신형이 초막을 꿇고 사라져버렸다.

“대…대법왕님!”

부시가 깜짝 놀라며 밖으로 쫓아나갔지만 이미 동천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집을 떠난 지 무려 보름 만에 오강에 이르렀다. 마차를 이용했으면 빠르고 편했을 것이지만 가문에 닥쳐오는 먹구름과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닥쳐올지 나름대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일부로 도보를 택했다.

피곤하긴 했지만 오강까지 오면서 아랫사람들과 많은 얘기를 나눴고 일부 강호지인들까지 만나 그들의 의견을 들었다. 분명한 것은 그들 모두 천상각의 미래를 극히 어둡게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림맹에 도전한 다는 것은 자살 행위이며 지금이라도 동천비가 무림맹을 찾아가 백기 투항을 하면 관계는 어느 정도 복원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동천비를 곁에서 보아온 자신이었다. 투항할 일이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은 성격이 형 동천비였다. 동천비는 지금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고 있었다.

“공자님 배가 왔습니다.”

동천완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강가에 배가 닿았고 천천히 일행은 배에 올랐다. 배에는 자신들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승선했다. 무림인들도 있었고 장사꾼들도 넘쳐났다. 배를 이용해 사천을 횡단 한 다음 곧바로 육로로 서장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서라!”

배가 막 떠나려는데 갑자기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모든 뱃사람들이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강가를 향해 엄청난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모두가 무림인이었는데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왔고 떠나는 배를 정지시켰다.

슈아아아!

그들과 배는 삼십 여장의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모두 단 한번 도약으로 날아 내렸다.

어려서부터 호위무사들의 무공을 보고 자란 동천완의 눈이 커졌다. 삼십 여장의 거리를 단 숨에 날아갈 정도의 신법이면 일류고수의 경지였다.

배 위로 날아든 무림인들은 대략 삼백여명 가까이 되었다. 마운자가 선장에게 금덩이 한 개를 건넸다. 삼백 명의 승선비인 듯 했다. 불안해 하던 표정을 짓던 선장의 얼굴에 금세 웃음이 피어났고 배는 미끄러져 나아갔다.

무림인들은 주위 사람들이 불안해하자 한쪽에 조용히 오와 열을 갖춰 섰다. 그리고 마운자가 배 위의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두려워 할 것 없소이다. 우린 무림맹 사람들이니 안심들 하고 편한 여행들 되길 바라오.”

무림맹 사람들이라고 밝히자 그제 서 야 사람들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마운자는 오와 열을 맞춘 수하들 뒤쪽으로 걸어가 배가 지나가면서 일으키는 하얀 물보라는 바라보았다. 오늘 공격의 모든 작전권이 자신에게 주어져 있었다.

전쟁에서 수장의 능력이야 말로 절대적이다. 총관이 자신을 믿고 맡긴 만큼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어야 한다.

“언제 봐도 오강의 경치는 아름답습니다.”

옆으로 한 사내가 다가왔다. 가슴에 붉은 용 한 마리가 생생하게 수놓아져 있었는데 용대의 대주 청송자다. 곤륜의 열두 장로 중 한 명이자 태허도룡검법의 일인자로 전해진다.

두 사람은 나이도 엇비슷해 무림맹 안에서도 자주 어울렸다.

“헛헛! 불쌍한 놈.”

청송자가 혀를 찼다.

마운자가 물었다.

“누굴 얘기하는 것이오?”

“누군 누구겠소? 동천비라는 친구지요. 장사꾼이라면 누구보다도 계산이 빠를 텐데 그렇게 어리석다니, 총관님은 물론이고 맹주님 또한 무척 분노해 계시던데?”

“청송자께서는 결과를 어찌 보시오? 과연 천상각과 무림맹이 예전의 관계를 회복할 것 같소이까?”

청송자가 콧방귀를 끼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이오. 그 때를 놓치면 돌이킬 수가 없지요. 천상각은 때를 놓쳤소. 눈감아 질 수가 있는 실수가 아니라 동천비는 지금 무림맹에 칼을 겨누려 하고 있소.”

“동오룡 각주가 얼마전 총관님을 뵙고 갔다고 들었소만?”

“맹주님도 그렇고 총관님도 그렇고 이미 그분 들 마음속에는 어떤식으로든 이번 기회에 천상각을 손보려 하는 것 같소. 천상각이 너무 커졌다는 것이지요.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이번 기회에 천상각이 거느린 업종 몇 개를 무너뜨려버릴 생각인 듯 하더이다.”

“무량수불!”

마운자가 나직히 도호를 외웠다.

청송자가 계속 말했다.

“금력이 너무 세어져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깨달은 듯하오. 그래서 아예 천상각의 규모를 줄여 벌 일 심산인 것 같았소. 하지만 이 정도는 최소일 뿐 어쩌면?”

“어쩌면?”

“글쎄요. 좀 더 지켜봐야지요.”

더 이상 청송자는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한편 그들과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던 동천완의 낯빛은 굳어졌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서 부친이 무림맹을 찾아갔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아냈다. 부친이 직접 무림맹을 방문했다는 것은 사태 추이가 예상보다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예상보다 무림맹이 훨씬 강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위에 있던 수하들 안색도 굳어졌다.

그들과 귀가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던 것이다.

‘사태는 더 이상 돌이킬 수가 없구나!’

동천완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어쩌면 무림맹 고위 간부들 머릿속에는 이 기회에 천상각을 산산이 쪼개어 자신들 주머니 속으로 담아 넣으려 들지 몰랐다.

강폭이 좁아졌다. 폭이 좁아지면서 물길이 빨라졌고 커다란 범선인데도 흔들거렸다.

그때 조용하던 무림맹 무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운자가 앞 장 서서 강 좌측 뭍을 향해 몸을 날렸고 이어 부하들이 일제히 솟구쳐 하선했다.

동천완 또한 강과 뭍이 그다지 많이 떨어져 있지 않았으므로 무예를 할 줄 아는 두 명의 시위의 도움을 받아 배를 내렸다. 사건의 진행과 결과가 궁금했다. 그래서 무림맹 인물들의 뒤를 따라가 볼 심산인 것이다.

무림맹 인물들은 강줄기를 벗어나 산속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채의 장원이 나타났다.

무림맹 인물들은 산속에 몸을 숨기고 장원을 살폈다.

슥!

마운자의 왼손이 들려졌다.

그러자 이미 약속이 된 듯 세 패로 나눠지더니 용대와 호대가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장원은 조용했다.

힐끔!

용대와 호대가 사라지고 힐끔 하늘을 살피던 마운자가 나직이 말했다.

“가자!”

마운자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날아간다. 무당이 자랑하는 이궁역위(移宮逆位)였다. 그가 이끄는 백명의 수하들중 무당의 인물들이 절반이 넘는다.

백명이 날아가는데도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장원 곳곳에 망루가 있었고 그곳에는 두 명씩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러나 마운자의 검은 어느새 자신들이 침입할 곳의 망루의 경계무사들을 베고 있었다.

백 명의 무사들은 어렵지 않게 장원 안으로 들어갔고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사람은 무조건 베기 시작했다.

“저…적이다!”

“컥!”

비명과 외침이 잇달아 터져 나왔다.

아무리 강한 집단일지라도 예상 못한 적의 기습에는 취약점을 갖을 수밖에 없다. 일단 전투태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당할 수밖에 없는데 기습해온 적의 무예가 출중하다면 사태는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다.

혈서의 낭인들도 숱한 위험을 넘나든 백전의 무사들이었다. 하지만 무림맹에서 작정하고 보낸 일급 전투부대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부 서주 오방마와 한가하게 바둑을 두고 있던 서주 원사왕은 들려오는 비명에 고개를 쳐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속하가 나가 보겠습니다.”

오방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여는 순간 눈앞으로 한가닥 검광이 밀려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고 너무 빨랐다. 오직 자신을 파고드는 검이 무당의 태청검법이라는 것만 읽었다.

푸욱!

상대의 검은 두 번 다시 기회를 주지 않았다. 정확히 오방마의 목적을 뚫어 버린 것이다.

촥!

목젖에 박힌 검을 뽑자 엄청난 핏줄기가 앞에 서 있던 마운자 얼굴과 가슴으로 튀었다. 마운자는 오방마의 피를 전혀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휘청!

오방마의 왼손이 목젖에서 솟아나오는 피를 막았다. 손으로 막는다고 막아질 것도 아니었지만 살아 있는 자의 본능이었다.

“마…마운자!”

오방마가 단 세 마디를 뱉고 이승을 떠났다.

마운자가 오방마의 시신을 넘어 방안으로 들어섰다. 원사왕의 표정은 이미 굳어 있었다. 밖을 나가보지 않았지만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짐작 되었다.

귓가로 부하들이 죽으면서 터뜨리는 비명이 쉴사이 없이 파고든다.

“컥!”

“악! 커거걱!”

“무량수불!”

마운자가 도로를 중얼거렸는데 살기가 묻어 나올 듯 했다.

“빈도는 무당의 마운자라고 하오. 무림맹의 천대를 이끌고 있는 수장이기도 하오. 혈서의 아미타사 원사왕 서주이시오?”

원사왕의 표정이 평정을 되찾았다.

당황해 봤자 이로울 것이 없다는 것을 깨우친 것이다.

“알고 왔을 텐데도 새삼 꼬치꼬치 묻는 건 무슨 심보인가?”

입가에 짧은 미소까지 머금는 여유를 보인다.

마운자 역시도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어지간하면 당황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할 텐데 금세 평상심을 회복한 것이 확실히 일세를 풍미한 낭인들의 수장다웠다.

“검을 쥐시오?”

바둑을 두었기 때문에 원사왕은 아무것도 휴대하지 않고 있었다.

원사왕이 빈 손을 힐끔 내려다보더니 미소지었다.

“고맙소.”

진정성이 담긴 말이었다.

이 상황에서 검을 들도록 권유할 수 있는 이는 아마 천하를 뒤져도 몇 명 되지 않을 것이었다. 소문처럼 확실히 무당의 무사는 달랐다.

툭!

벽에 걸린 검이 원사왕의 손에 끌려왔다.

놀라운 허공섭물이었다.

투툭!

검집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검을 쥔 원사왕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당탕!

밖으로부터 거친 소리가 들리더니 곤륜의 청송자가 들어섰는데 들고 있는 검에서 핏물이 떨어져 내렸다.

반짝 빛을 발하던 청송자의 두 눈이 조용히 가라앉더니 한곳으로 물러났다. 단번에 상황을 파악하고 물러나준 것이다. 합공하면 아주 간단히 죽일 수 있었다. 전쟁에서 합공은 필요한 것이지만 가뜩이나 막다른 골목에 몰린 적장에게 둘이 손을 쓴다다는 것은 너무 가혹해 보인다. 더구나 자신들은 명예와 자존심으로 일생을 살아가는 명문의 무사들 아닌가.

원사왕의 입에서 혼자만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검을 들도록 여유를 준 마운자의 행동에서 적이 놀랐고 청송자의 후퇴에서는 확실히 한수 꺾이는 기분이 들었다.

촷!

원사왕의 검이 수평으로 그어졌다.

아주 단순한 움직임이었다. 마치 농부가 낫으로 풀을 베듯 가벼운 동작이었지만 마운자의 눈이 커졌다. 밀려오는 검기가 산악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자 이미 어느 경지를 넘어섰구나!’

쓰윽!

소낙비는 소낙비로 맞서야 하듯 마운자 역시 검을 수평으로 그어갔다. 태청검법 제 오식 태청이형이다.

쿠우욱!

두 사람이 쏟아낸 검기가 충돌하며 둔탁한 굉음이 터졌다.

와그르르!

충돌에서 생긴 폭풍과 기파가 방안을 완전히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렸다. 기물들이 파손되고 서재가 쓰러졌고 바둑판이 산산조각이 되어 버릴 만큼 간단했지만 파괴적인 두 사람의 일초였다.

청송자는 뒤로 한 걸음 더 물러났다.

이번 기회에 마운자의 검을 제대로 한 번 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소문만 들었을 뿐 마운자의 검을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고 비록 강호에서의 명성은 자신을 누르지만 그에게 진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슥!

스으으!

일초의 겨룸에서 상대의 검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두 사람의 얼굴이 숙연해졌다. 두 마리 대호가 틈을 노리 듯 자세를 낮추고 좌우로 걸음을 옮겼다.

좁은 방안이었다. 여건은 어느 쪽에게도 유리하지 않은 둘 모두 에게 공평했다. 권이나 장일지라도 방안에서는 제 실력을 뽐내기 어려운데 검이기 때문에 더욱 서로의 실력을 펼치는 데는 상당한 장애가 따른다.

또한 오래 끌 수도 없는 것이 협소한 공간에서의 싸움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일거에 쏟아내 속전속결하는 것이 서로에게 득이 된다.

슈욱!

두 사람이 동시에 검을 뻗었다.

쾅!

쩌어억!

강한 기파에 오른쪽 벽이 무너졌고 밖이 드러났다.

멈칫!

짧은 순간 무너진 벽을 통해 개미떼처럼 쓰러진 부하들의 주검을 발견한 원사왕의 눈빛이 흔들렸다. 백전의 경험과 지옥을 넘나든 삶으로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원사왕이었지만 스치듯 보인 처참한 상황 앞에서는 그 또한 어쩔 수 없었다. 더구나 우두머리로서 부하들의 죽음을 보는 감정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 찰나의 감정 변화는 일거에 싸움판의 균형을 깨버렸다.

마운자의 검이 떨어져내렸다.

콰콰콰!

미세한 틈도 팽팽한 승부에서는 승기가 되고 위기를 부른다. 내려치는 사람과 막는 사람의 차이는 크다. 내려치는 사람은 온 힘을 다 쏟아내는 위치적 장점을 갖고 있지만 막는 사람은 밑에서 위로 올려야하는 신체적 특성, 즉 반동 따위를 줄 수 없는 그야말로 단순동작이어야 하기 때문에 힘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서로가 팽팽한 힘일 때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콰악!

“욱!”

팔꿈치가 강제로 굽혀지자 통증이 밀려왔고 원사왕이 신음을 흘렸다.

촤촤촤!

마운자의 검은 더욱 맹렬했다. 숨 돌릴 여유도 주지 않는 맹공이었고 수세에 몰린 원사왕은 자꾸 뒷걸음을 쳤다.

뒤는 벽이었다. 등에 벽에 닿으면 끝장이다. 최소한 공격과 방어를 하는데 필요한 공간은 확보해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등이 닿아 버리면 물러나거나 움직임이 제한되어 더욱 위기를 자초한다.

쿠우우!

원사왕의 검이 돌변했다.

혼신의 힘을 쏟았음이 느껴지는 강한 검기가 마운자의 검기를 일거에 자르고 파고들었다. 오늘날 혈서라는 중원오랑중 한 곳의 수뇌로 올라서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자신의 절초 귀원파랑이었다.

흠칫!

마운자의 안색이 굳어졌다. 힘들게 잡은 승기를 놓치면 싸움은 다시 안개 속으로 빠져들고 오히려 자신이 밀릴 수도 있었다. 마운자는 승부를 걸어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쿠욱!

마운자의 검이 벼락처럼 펴진다. 도도한 검세가 뻗어나가고 청송자의 눈이 커졌다.

‘거…검강!’

말로만 듣던 검강이었다. 아직 완성되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틀림이 없었다. 검강은 입문이 어려울 뿐 일단 초입이라도 들어서면 완성은 빠르게 이뤄진다.

자신은 아직 검강을 깨우쳐 가고 있는 중이었다. 결국 마운자가 자신보다 반 수 정도 높다고 인정해야 했다.

뻐---어억!

거친 충돌이 있었고 겨우 버티고 있던 기둥과 나머지 벽들이 완전히 무너졌다. 청송자는 잽싸게 몸을 날려 피했고 두 사람 주위로 떨어지던 전각의 잔해들이 사방으로 튕겨 날아갔다.

먼지 속에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둘 모두 꼿꼿하게 서로를 보고 서 있었지만 원사왕의 입가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생김새가 그래서인지 입가에 미소가 걸린 듯 보인다.

“과…과연 무당의 검은 명불 허전…이…오.”

그 한 마리를 남기고 휘청거리더니 조용히 엎어졌다.

퍽!

마운자의 어깨가 움찔했다. 긴장이 풀리면서 뜨거운 피가 목구멍을 향해 치솟았다. 그러나 청송자가 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억지로 참다보니 어깨가 흔들린 것이다.

그때 천대의 대원중 한 무사가 급히 다가왔다. 무당의 무자 항렬의 제자 진무였다.

“사숙님 총관님으로부터 날아온 전서구입니다.”

그러면서 조그만 쪽지를 내밀었다.

마운자는 쪽지를 받았지만 곧바로 펼쳐들지 못했다. 내상이 얕지 않았고 토해야 할 피를 억지로 삼키자 속이 메스꺼워 졌다. 무당과 곤륜도 경쟁 관계이지만 자신과 청송자도 은연중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악물로 삼켰다.

슥!

조심스럽게 전서구를 펼쳐 읽던 마운자의 안색이 가볍게 변하자 청송자가 다가와 물었다.

“무슨 내용이오?”

마운자가 보라는 듯 내밀었고 청송자가 전서구를 보더니 그 역시 표정이 가볍게 굳어졌다.

“비록 승리는 우리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지만 피해가 적지 않을 텐데 또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라는 것은.”

상관량이 보낸 전서구는 간단했다.

무림맹이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 동천비의 추종세력인 중원오랑중 또 하나인 무영각의 본거지를 찾았으니 그곳도 궤멸시키라는 명령이었다.

상관량이 계산이 눈앞에 훤히 보였다. 일거에 동천비에게 치명타를 입힐 생각인 것이다.

자신이 겪어본 상관량은 용의주도했다. 그에게 한번 밉보이면 누구든 무림맹에서 버티기 어려웠다. 자주 적을 만들지 않지만 한 번 그가 적이라고 여기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밟는다. 흔히 사람들이 동오룡에게 피도 눈물도 없다고 하는데 자신이 겪어 본 바에 의하면 상관량이야 말로 무정했다.

“단 한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고 척살 했사옵니다.”

피에 젖은 한 무사가 다가와 보고했다.

“당장 집합 시켜라.”

“추웅!”

무사가 날아갔고 반각 후 세 개의 전투부대가 모였다. 모두가 피에 젖어 있었고 부상자도 적지 않았으며 사망자도 이십 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피해가 경비하였기 때문에 마운자는 안도했다.

눈앞의 전력으로도 무영각을 공격할 힘은 되었다. 확실히 상관량은 보지 않고 있지만 이쪽과 적의 전력을 훤히 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영각까지 일거에 치라는 전서구를 보냈을 것이었다.

문득 동천비가 불쌍했다. 적을 만들어도 봐가면서 만들어야 하는데 무림맹 안에서도 가장 무서운 인물로 통하는 상관량의 자존심을 건드리다니.

“날 따르라.”

마운자가 앞장섰고 이백칠십여명의 무사들이 몸을 날려 순식간에 사라졌다.

바람에 피 냄새가 진득하게 묻어 있었다. 동천완은 마운자 일행이 떠나고 한참이 되었는데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혈서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자신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들의 무서운 점은 살아온 길이 너무 거칠고 생사를 밥먹 듯 넘나들었다는 것이었다. 무사에게 위험한 고비가 많았다는 것은 그 만큼 단련이 되었고 강해졌다는 뜻이었다. 그런 혈서가 불과 한 시진도 채 되지 못해 이 땅에서 사라져 버렸다.

‘무섭다!’

정말로 공포스러웠다. 무림맹이 왜 지난 수백 년 간 천하의 중심이 되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절망의 그림자가 밀려왔다. 무림맹의 의지는 확실해졌다. 동천비를 죽이고 천상각을 해체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그만 가시죠?”

동천완이 움직이려들지 않자 수하들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동천완의 시선은 피 냄새 진득한 장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천상각 또한 저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현기증까지 느껴진다.

“그래 그만 가자꾸나.”

동천완이 발길을 돌렸다.

동천완이 무거운 표정을 짓자 수하들 또한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도 천상각의 미래가 보이는 듯 잔뜩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방법은!’

동천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아이, 천몽이 뿐이다. 제발!’

길은 오직 한 곳 뿐이었다.

동천몽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녹풍원으로 햇빛이 길게 드리워진다. 예전과 다르게 요즘은 하루하루가 숨이 막혔다. 하루가 무사히 지난 다는 것이 이토록 다행스럽고 반가운 일인지 예전에는 몰랐다. 날마다 보는 석양이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붉다.

동오룡은 수십 년 간 보아온 석양인데 왜 오늘따라 저리도 붉은가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석양이 붉으면 내일 비가 내린다. 그것은 어김이 없었다.

동오룡은 비라도 한 차례 시원하게 쏟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 했다.

“월상이 있느냐?”

문이 열리고 한 명의 무사가 들어와 허리를 구부렸다. 오만상을 대신해 자신의 수행 호위무사로 뽑힌 사내였다.

“무림맹으로부터 무슨 연락 없느냐?”

“없습니다.”

혹시나 하고 상기되었던 동오룡의 안색이 가라앉았다.

“알았느니라. 그만 가보거라.”

월상이 사라지고 동오룡이 어깨를 펴고 숨을 크게 들어 마셨다.

상관량에게 건네준 돈은 천상각 재산의 일할이었다. 그 정도면 제아무리 무림맹이라고 해도 감정을 누그러뜨리기에 부족하지 않다고 자부했다.

무림맹주를 비롯해 고위 간부들이 나눠 갖는다고 해도 일인당 최소한 황금 십만 관씩은 떨어질 것이다. 아직까지 돈 앞에 움직이지 않은 인간 보지 못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고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다. 언젠가는 무림맹도 그 위세 등등한 힘이 소멸될지 모른다. 하지만 금력은 영원하다. 때가되면 금력의 무서움을 무림맹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각주님.”

밖으로부터 조금 전 들어왔던 월상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오룡의 눈이 빛을 뿌렸다. 필시 무림맹으로부터 화친의 제의가 왔을 것이다.

“들라!”

월상이 들어섰는데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동오룡은 그런 월상의 표정을 읽기 보다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다.

“그래 무림맹에서 뭐라고 하더냐?”

“그게 아니옵고.”

팟!

동오룡은 그제 서 야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성급해 하고 있음을 느꼈다.

“혈서가 궤멸되었다고 합니다.”

동오룡의 눈이 커졌다.

월상의 보고는 계속 되었다.

“무영각까지 조금 전 무림맹의 급습으로 완전히 불에 탔다고 하옵니다.”

동오룡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혈서가 무엇이고 무영각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다. 동천비의 행동을 커다란 실수라고 규정했지만 이왕지사 이렇게 된 마당에 성공하기를 바랐다.

“혈서와 무영각이 사라졌다고 했느냐?”

“예!”

“나가봐라!”

월상이 물러났고 동오룡이 쓰러질 듯 휘청 거렸다.

탁!

다행히 왼손으로 벽을 짚어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아랫도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으므로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방안이 도는 것 같았다. 두 눈을 감고 길게 호흡을 하며 마음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고 현기증도 멈췄다. 눈을 뜬 동오룡의 두 눈에 초점이 없었다. 마지막 기대까지 완전히 무너졌다.

동천비에게 많은 승산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무림맹에서 빠르게 움직일 줄은 몰랐다. 더구나 그런 거액을 넘겨 줬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안심을 했었는데.

벌떡!

동오룡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액수가 작다!’

자신들도 그 돈이면 천상각의 재산 일할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자식의 목숨을 구하고 가문을 보존시키는데 일할이란 액수는 너무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부는 과감하게 해야 한다. 동오룡은 다시 외출을 준비했고 이번에는 제대로 승부수를 던지겠다고 마음먹었다.

혈서와 무영각의 궤멸 소식에도 동천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대로 자신의 일에 충실했다. 그가 현재 묵고 있는 곳은 사명산장이었다. 사명산장은 절강성 영파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상가인데 몇 번 어려움에 처했을 때 손을 뻗어주어 장주 금중대와는 각별했다.

사명산장에 자신의 본거지를 세우겠다고 얘기하자 금대중은 기꺼이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미력하나마 무림맹 타도에 힘을 보태겠다고 했다.

“공자님!”

보다 못해 여추량이 입을 열었다.

“속히 어떤 조치를 취하셔야.”

동천비는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여추량의 재촉에도 그의 시선은 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여추량은 몇 번이나 큰 소리를 낼 뻔했지만 겨우 눌러 참고 있었다. 시시각각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림맹에서는 지금 동천비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사면초가라 해도 넘치는 말이 아니었는데도 동천비는 유유자적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책 읽을 때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팔랑!

동천비가 책장을 넘겼다. 그가 읽고 있는 책은 기서도 아니고 삼경 따위는 더욱 아닌 어이없게도 춘화도였다. 미소까지 지어가며 책을 보는 동천비를 보며 여추량은 끝내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제갈 채주와 혈막의 막주와 청룡련의 련주를 부르시오.”

제갈채주는 낭도채의 수장 제갈팽이고 혈막과 청룡련 중원 오랑 중 나머지 두 곳이었다.

여추량이 돌아서며 눈을 크게 떴다.

동천비가 책을 덮고 일어섰다.

“오늘 밤 무림맹을 칩시다.”

“네…네엣?”

여추량의 눈이 부릅떠졌다.

<3권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