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생사의 읍소
운룡각으로 안내된 동오룡은 뜨거운 차를 받았다. 혈매자의 대접은 극진했다. 말 마디마디 조심했고 깍듯하게 각주님이란 호칭을 붙이며 융숭했다.
하지만 동오룡은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며 상관량을 만나러 갔던 부각주 백수신도가 다가왔다. 육척의 키에 당당한 체격이다. 하북팽문의 인물로 오십근짜리 대감도를 쓴다. 하북팽문의 고유의 힘의 도법에다 지닌 괴력까지 더해져 한번 뽑혀 나오면 폭풍을 방불케 한다.
“회의중이십니다.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사옵니다.”
혈매자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겠지만 얼마 전에 구파일방과 강호사문의 수장 회합이 있었고 요즘 목와북천의 등장으로 회의가 잦습니다. 아주 바쁘지요.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물론입니다. 난 괜찮소이다.”
동오룡이 차를 들어 올렸다.
한 모금 마시고 내리자 혈매자가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했다.
“무슨일로 상관량 총관님을 뵈려고 하십니까?”
동오룡이 빙긋 웃었다.
“별것 아닙니다. 찾아 뵌지도 하도 오래되어 인사나 드릴까 하고 왔지요.”
지극히 자연스런 미소와 목소리였다.
하지만 혈매자는 동오룡의 말을 믿지 않았다. 어지간해서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가 직접 무림맹을 찾아왔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자신이 기억하기에 아직까지 딱 한번 이십 여 년 전에 있었다.
더구나 한번 행차 할 때마다 수십 명의 수행원을 대동하는 그가 단신으로 찾아왔다는 것은 혈매자의 가슴에 더욱 의문을 증폭시켰다.
차를 마시는 척 하면서 혈매자의 눈은 동오룡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통해 뭔가를 짐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워낙 노회한 장사꾼인 탓에 표정에 어떤 변화도 없었고 시종 가느다란 미소를 달고 있다.
“한 잔 더해도 되겠소?”
동오룡이 빈 잔을 내밀었고 혈매자가 혼쾌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드십시오. 이 보거라. 차를 더 내오너라.”
“네 각주님.”
여인의 음성이 들리고 한명의 백의시녀가 차를 담은 주전자를 두 손으로 들고 와 가지런히 따르고 사라졌다.
오시가 채 못되어 도착했는데 어느덧 대청마루로 석양이 들어왔다. 무려 세 시진을 넘게 기다렸지만 상관량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이 혈매자는 세 번이나 백수신도를 보냈지만 여전히 회의중이라는 답변이었다.
동오룡의 얼굴도 조금씩 굳어갔다.
어느덧 마신 차만 열 다섯 잔이다. 그 사이 뒷간을 두 번 다녀왔다. 점차 시간이 흐르자 혈매자의 낯빛도 굳었다. 직감적으로 상관량이 일부러 기다리게 만들고 있음을 알아 차린 것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기에 천상각으로부터 무림맹 운영자금을 가져오는 것은 상관량의 몫이었다. 그런데 근자에 이르러 상관량의 천상각 방문이 뜸했다.
정문 경비 책임자이다 보니 누가 나갔고 들어왔는지 부하들로부터 보고가 되는데 근자에 상관량이 천상각으로 떠났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내용이 궁금했지만 물어 볼 수는 없었다. 물어 본다고 해서 동오룡이 가르쳐 줄 리는 더욱 만무했다.
땅거미가 몰려오고 있었다. 혈매자가 식사하러 가기를 청했지만 동오룡은 생각이 없다고 거절했다. 하는 수 없이 혈매자는 동오룡에게 양해를 구하고 저녁을 먹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은 동오룡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좋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왔지만 생각보다 상관량의 마음이 틀어져 있었다. 그가 틀어져 있다는 것은 무림맹이 천상각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음이다.
‘위험하다!’
오랜 장사꾼의 경험에 비춰 상황은 아주 심각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상관량의 오해를 풀고 과거로 관계를 복원해야 했다.
상관량이 나타난 시간은 해시가 다되어서였다. 무려 일곱 시진을 기다린 것이다.
“핫핫! 오래 기다리셨지요. 미안하오이다. 워낙 긴한 회의여서 말이오. 어떻게 저녁은 했소이까?”
“아닙니다. 생각이 없어서 그냥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일단 내 방으로 갑시다.”
상관량이 앞장섰고 동오룡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뒤를 따랐다.
상관량의 처소는 은심각이다. 그의 별호 은심자에 맞게 처소까지도 은심각이었다. 함부로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붙여진 은심자 상관량이 자리에 앉았고 맞은편에 동오룡이 앉았다.
“……”
“……”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상관량은 의자 옆으로 놓인 탁자 서랍에서 서류를 꺼내 뭔가 살피고 있었고 동오룡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참 동안 서류를 살피던 상관량이 다시 집어 넣더니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 각주께서 이 먼 곳까지 어인일이시오. 내게 긴히 할 얘기가 있다고 들었소이다?”
동오룡이 상관량을 정색하여 보았다.
한참을 쳐다보던 동오룡이 조용히 일어나더니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퍼억!
상관량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이게 무슨 짓이오? 각주.”
상관량은 말로만 놀랄 뿐 동오룡을 일으킨다거나 가로막는 행동은 일체 하지 않았다.
“어서 일어서시오? 누가 볼까 두렵소이다.”
“두말 않겠소이다. 이 동모를 한 번만 용서해주시오. 진심으로 사죄를 드리오이다.”
상관량이 의자에 앉아 내려다보며 말했다.
“동각주가 내게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이오? 오히려 내가 동각주에게 많은 신세를 졌거늘?”
동오룡이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총관님, 어떻게 안되겠습니까? 자식의 허물은 곧 애비의 허물입니다. 내가 자식을 잘못 가르친 탓이지요. 자식만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더니 정말 그렇군요. 많이 노여우시겠지만 이번 한 번만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용서가 안 되겠는지요?”
상관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적검령대 몰살 배후가 아드님이라는 것을 인정 하는 것이오?”
움찔!
동오룡이 고개를 쳐들었다.
상관량이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았고 한참을 올려다보던 동오룡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동오룡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아드님께서는 중원오랑이라는 낭인집단을 휘하로 거두어 들였더군요. 그게 무슨 뜻일까요? 한번 해보자는 노골적인 선전포고 아니겠습니까?”
“초…총관님.”
“훗훗! 중원오랑이라면 약한 집단은 아니지요. 야수같은 자들이어서 전투력도 뛰어나지요. 어지간한 명문가쯤은 순식간에 쓸어버리고도 남을 능력을 갖추었음은 인정하오. 하지만 아드님이 한 가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소.”
상관량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것은 비아냥이자 매우 차가운 미소이기도 했다.
“여긴 무림맹이오. 지난 수백 년 간 무림을 경영해온 불멸불사불패의 단체 무림맹이란 말이오? 목와북천을 제외하고 아직까지 누구도 본맹에 반기를 들지 않았소. 그런데 동각주의 아들은 지금 저항을 넘어 맞서려고 하고 있소. 아니 금력과 무력을 모두 거머쥐려는 전무후무한 야망을 꿈꾸고 있단 말이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찾아왔소이다.”
“미안하오. 이젠 늦었소. 무림맹 간부회의에서 각주의 아들에게 추살령이 떨어졌소.”
동오룡이 소스라쳤다.
“추…추살령.”
“무림맹의 추살령은 곧 강호의 공적으로 규정되오.”
동오룡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이 왜 모르겠는가. 무림맹이 적으로 규정하면 그 순간부터 삶을 포기해야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 한숨을 곳은 없다.
“아직 완전한 결정은 아니지만 머지 않아 천상각의 상업 활동이 중지될 것 같소이다.”
“으허헉!”
상업활동의 중지는 곧 봉문을 뜻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형적인 징계일 뿐 천상각의 재산은 곧바로 무림맹의 마음먹기에 따라 처분될 수도 있었다.
동오룡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며 중심을 잡을 수가 없고 호흡이 가빠왔다.
바로그때였다.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문 앞에서 멈추었다.
“총관님 속하 가개묵이옵니다.”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고 가개묵이 들어섰다.
얼마 전 동천비가 거느린 낭인들에 의해 죽음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흠칫!
무릎을 꿇고 있는 동오룡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나 곧장 표정으로 고치고 말했다.
“원사왕이 주인으로 있는 혈서의 본거지를 알아냈사옵니다.”
상관량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당장 천대, 용대, 호대의 대주들을 모으라.”
“존명!”
가개묵이 물러났고 상관량의 시선이 동오룡을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혈서는 각주 아드님의 오른팔이더구려. 그런데 그들의 비밀 근거지가 밝혀졌다는구려.”
자신도 혈서가 동천비의 오른팔이라는 것을 들었다. 천하없는 장수도 오른팔을 잃으면 힘을 쓰지 못한다.
사실 동천비의 뜻을 강력히 막았다. 그러나 워낙 의지가 강했고 자신 또한 무림맹에 돈을 뜯기는 일이 넌덜머리가 났었다. 굳지 선조들까지 거론할 필요 없이 자신의 대에 건네준 무림맹 운영자금만 해도 황금 수천 만 냥이 넘는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동천비의 뜻을 무모하다고 막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슬그머니 놓아주었음을 부인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중 절대 불가능하고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부터 적극적으로 말렸지만 그땐 이미 시기상으로 늦었다.
저벅저벅!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세 명의 사내들이 들어섰다. 장사꾼이지만 동오룡은 세 사람에게서 가혹한 기세가 풍기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경험한 바에 의하면 고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한 가지는 지금처럼 맹렬한 기도를 갖고 있는 부류와 또 하나는 겉으로 봐서는 고수로 보이지 않는 평범한 기세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둘 모두 일장일단이 있었다. 전자는 상대를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하며 또한 터득한 무공의 특성이 그렇게 외형적인 기세를 퍼뜨리고 후자는 배운 무공의 특성 탓도 있지만 정말로 무서운 인물일수록 잔잔했다.
“천대의 대주 총관님의 부르심을 받고 달려왔사옵니다.”
“용대의 대주 불려왔습니다.”
“호대의 대주 고칠성이옵니다.”
무림맹을 대표하는 세 곳의 공격부대이다.
세 곳 모두 일류고수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 아니라 구파일방과 사대세가에서 정예들을 뽑아 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 자파의 무공을 쓰며 각부대당 일 백 명의 인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모두 무당과 팽문과 곤륜의 인물들이었다.
“즉시 출동 준비하라. 총 지휘는 천대의 대주 마운자가 맡으시오.”
“존명!”
마운자라는 옆구리에 검을 찬 중년인이 허리를 숙였다. 검은 피부에 광대뼈가 툭 튀어나왔는데 움푹 패인 두 눈에서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무당오검중 한 명인 마운자였다. 무당오검중 가장 손속이 냉정하고 불의를 보면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무당이 자랑하는 태청검법을 완숙하게 깨우치고 있다고 전해진다.
세 사람이 동시에 허리를 숙여 보이고 밖으로 사라졌다.
상관량의 얼굴에 굳은 의지가 피어났다. 반드시 궤멸시키고 말겠다는 다짐이었는데 과연 낭도채를 없애겠다는 건지 아니면 동천비를 죽이겠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총관님!”
혈서를 없애는 건 관심없다. 그러나 장자인 동천비의 목숨만은 보장해 달라는 애걸이었다.
하지만 상관량의 얼굴에 온기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다.
“옛정을 생각해 시신만큼은 온전하게 보전해 드리겠소. 그러니 그만 돌아가시오.”
무정하게 돌아서는 상관량을 한참 쳐다보던 동오룡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더니 오른손을 품속에 집어 넣었다 꺼냈는데 한 통의 봉서가 들려 있었다.
스윽!
탁자 위에 봉서를 놓았다.
“나 동오룡의 성의이오. 받아 주시오.”
등을 돌리고 섰던 상관량이 돌아섰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애비로써 자식의 흠을 사죄하는 의미로써 드리오이다.”
상관량이 힐끔 탁자 위에 올려진 봉서를 내려다본다.
“아무튼 각주의 마음을 알았으니 일단 돌아가시오.”
동오룡이 일어났다.
너무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어서인지 한 번에 일어 날 수가 없었다. 육십 평생 언제 어디서 누구 앞에서 무릎을 꿇어 보았던가.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면 울컥한다.
“거듭 부탁드립니다. 총관님!”
깍듯하게 허리를 구부리고 등을 돌려나갔다.
동오룡이 나가자 상관량이 탁자 위에 놓인 봉서를 들어 입구를 찝었다.
스윽!
봉서 안에서 꺼낸 종이를 보던 상관량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상상을 넘어선 엄청난 액수였다.
무림맹을 떠나는 동오룡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시간이 늦었다면서 한사코 묵고 가라고 혈매자가 말렸지만 동오룡은 점잖게 사양했다. 한 시도 지옥 같은 곳에 있기 싫었다.
달은 중천에 떠올랐고 사방은 고요했다. 천목산은 달빛에 잠겨 있었고 먼 산에서 야조가 서글프게 운다.
척!
산길을 내려가던 동오룡이 걸음을 세웠다. 그리고 길가에 있는 조그만 바위에 걸터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오룡은 한참을 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동안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온 때문일까 오늘따라 달이 무척 고독해 보였다.
꿀꺽!
동오룡이 침을 삼킨다. 귀상(鬼商)이라는 소름끼치는 별호를 얻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그들의 가슴에 뽑히지 않을 못을 박은 동오룡의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헛헛!”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뜨거웠다. 사람들은 눈물이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구멍 난 듯 흘러내린다. 소리죽여 흐느끼던 동오룡은 점점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허헝!”
그것은 통곡이었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보다 어린 사람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 억울해서는 더욱 아니었다. 그렇다고 동천비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고 해서 눈물이 나는 것 또한 아니었다.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서글퍼졌고 눈물이 솟아났다.
“허…허허헝!”
동오룡의 흐느낌은 더욱 커졌다.
달을 보며, 숲을 보며 먼 산봉우리를 보면서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자 가슴에 맺힌 무거운 덩어리가 조금 내려 앉는 기분이다.
쏴아아!
천목산의 바림이 옷깃을 펄럭거렸다.
동오룡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울퉁불퉁한 산길을 휘적거리며 걸었다. 눈에는 여전히 흘린 눈물이 맺혀 있었고 동오룡은 그렇게 어둠속으로 느릿하게 사라져갔다.
만강수의 온 몸은 땀으로 젖었다. 젊어서부터 약초를 캐느라 온 산을 뒤지고 다녀 체력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지만 더 이상은 자신이 없었다. 입에서는 단내가 났고 허리는 부러질 것 같으며 다리는 쉴사이 없이 떨렸다. 금방이라도 주저 앉고 싶었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자신이 멈추면 등에 업힌 대법왕은 죽는다. 그것은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대법왕은 살아 있는 부처이며 만백성의 어버이다.
“힘내요. 여보.”
부인이 뒤에서 격려를 했다.
“얼마 안 남았어요. 저 봉우리 한 개만 넘으면 되요.”
만강수가 고개를 쳐들어 부인이 말하는 전방의 봉우리를 쳐다보았다.
봉우리는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그다지 높지 않았고 평소 같으면 한 달음에 달려갈 거리였으나 지금은 백리길처럼 아득히 멀어 보인다.
“학…하학!”
짐을 싣고 비탈길을 오르는 황소의 입김마냥 만강수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뜨거운 숨결을 세찼고 거칠었다.
휘청!
급기야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흔들렸다.
“여…여보.”
부인이 잽싸게 부축을 했다.
땀이 후줄근한 만강수를 애처로운 시선으로 본다.
“조금만, 조금만 참아요. 다 왔어요. 당신은 강하잖아요.”
만강수는 강했다. 강한 인생을 살아왔다.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나 세명의 자식을 건강하게 키웠고 약초를 팔아 적지 않은 논과 밭을 거두었으니 약하게 살아온 인생은 아니다.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무…물론이오.”
만강수는 핏대를 올리며 산길을 올라갔다.
가시덤불이 뺨을 찢고 나뭇가지가 허벅지를 후려쳤지만 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하--하학!
동천몽의 엉덩이를 받치고 있는 손의 깎지가 조금씩 풀려졌다. 맞물린 손가락이 엿가락처럼 늘어졌고 양팔 또한 고무줄 마냥 가늘게 휘청댄다. 그러나 만강수는 이를 깨물며 산봉우리를 점령하듯 올라갔고 마침내 봉우리에 섰다.
“여…여보 다 왔어요. 저길 봐요.”
봉우리는 분지의 입구였다. 정확히 열 네 개의 거대한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그 안에 한 채의 웅장한 흑빛의 전각이 세워져 있었다.
천포지각이었다.
천포지각은 하늘의 집으로 불리는 절대성지로 오직 대법왕만이 출입 할 수 있었다. 그 안에 무엇이 있고 어떤 집인지 아는 사람 역시 대법왕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혹자는 공무에 시달린 대법왕이 잠시 찾아와 몸과 정신을 가다듬는 산장이라는 설도 있고 또 다른 이는 하늘의 샘 천포지가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산장이든 하늘의 연못 천포지든 두 가지 모두 휴식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다.
호기심을 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래 침입을 시도했지만 단 한사람도 성공하지 못했다. 대법왕이 아닌 누구도 천포지각에 들어가면 비명횡사를 면치 못했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분지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얼굴에는 두려움과 공포가 너울거렸다.
처척!
두 사람의 걸음이 세워졌는데 좌측 거대한 석봉하나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푸른이끼가 뒤덮인 석봉에 마치 한 마리 용이 요동을 치며 승천하는 듯한 폭풍같은 서체가 눈에 띈다.
---천포지각 법불입사---
대법왕이 아닌 사람이 천포지각에 들어서면 죽는다는 글귀였다.
멈칫!
만강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등 뒤에 업혀 있던 동천몽이 무슨 말을 하고 있었다. 부인이 잽싸게 귀를 가까이 대었다.
“배…백상불을 안으로 던져라.”
하지만 부인은 망설였다.
감히 대법왕의 몸에 손을 댄 다는 것은 용서 할 수 없는 불경이었다. 부인이 어쩔 줄 몰라했고 만강수 역시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동천몽이 거듭 중얼 거렸다.
“뭐…뭐하느냐? 시간…없구나. 괜…찮다.”
“부인 나중에 벼락을 맞는 한이 있어도 어쩔 수 없소. 시키는 대로 하시오. 빨리?”
대법왕의 명령을 거역하거나 뜻을 받들지 않으면 벼락을 맞아 죽는다는 설이 있다. 물론 만강수는 벼락을 맞아 죽은 사람은 보지 못했지만 죽었다는 말은 들었다.
“소…송구하옵니다. 소첩의 행동을 용서 하세요. 대법왕님.”
부인은 조심스럽게 남편의 등과 밀착 되어 있는 동천몽의 앞가슴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몇 번 더듬거리다 자신들이 땅에서 주웠던 백상불을 꺼냈다.
“여…여보 꺼냈어요.”
“어…어서 던지라고 하지 않소. 저 입구로 힘껏 던지시오.”
“그냥 던지면 되겠죠?”
“나도 모르오. 그냥 던지시오.”
부인이 앞으로 나섰다.
두어번 심호흡을 하더니 힘껏 돌을 던지듯 백상불을 분지 입구로 집어 던졌다.
휘이익!
약초 중에는 뿌리가 얕은 것도 있지만 땅속 깊은 곳까지 뻗어 있는 것도 있었다. 또한 약초는 뿌리가 생명이었다. 그래서 깊은 곳까지 파내려가자면 팔 힘이 좋아야 하고 그렇게 단련된 팔로 던진 백상불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투툭!
분지 안쪽으로 백상불이 떨어졌다.
바로 그 순간 구구궁 하는 소리가 들리며 분지 입구가 변하기 시작했다.
“여…여보.”
부인이 기절할 듯 놀라며 만강수 뒤로 숨었다. 만강수 또한 거대한 봉우리가 바뀌는 모습에 경악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쿠쿠쿠쿵!
지진이 일어난 듯 했다.
봉우리가 구름이 엉키듯 서로 교차하고 바뀌더니 놀랍게도 입구는 처음 그대로 되었다.
“지…진법이 풀렸다. 어서 들어가거라.”
동천몽이 또다시 중얼 거렸다.
두 사람은 진법이 뭔지 알 수 없었지만 대법왕의 말이었으므로 자석이 이끌리듯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천포지각 입구에는 상고의 절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구천십사지동진(九天十四地動陣)이라는 것으로 사실 눈앞에 보이는
열네 개의 봉우리는 모두 허상이었다. 단지 진법이 만들어내는 착시 현상으로 열네 개의 봉우리가 서 있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물론 진법이 해체되어도 여전히 사람들 눈에는 열네 개의 봉우리가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진법이 해체되었다고 해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제이의 진법이 침입자가 생길시 작동하기 위해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 있는 것이다.
그런 촘촘한 진법의 설치로 백상불이 없이는 절대 침입이 불가능했다. 동천몽의 뒤를 이어 누군가 들어오려면 그 또한 백상불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진법이 발동하고 갇혀 숨을 거둔다.
만강수는 동천몽을 업고 안으로 들어섰다.
“저…전각 안으…로?”
만강수는 등 뒤 동천몽이 시키는 데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었는데 모두 스물 네 개 였고 전면은 나무가 아닌 석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그그긍!
스물 네 개의 계단을 올라 석문 앞에 이르자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화악!
입구에 들어선 만강수의 눈이 기절할 듯 커졌다. 전각 안은 호수였다. 뽀얀 수증기가 이른 가을 아침에 피어오르는 물안개처럼 허공을 맴돌고 있었는데 엄청난 열기가 뿜어 나왔다.
숨이 콱 막혔고 금방이라도 살을 태울 것 같은 살인적인 열기였다.
만강수는 눈앞의 호수가 소문의 천포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 동천몽이 중얼거렸다.
“나…날 천포지에 던져 넣으라. 시…시간이 없느니라.”
“아…알겠사옵니다.
만강수는 조심스럽게 천포지 앞으로 다가갔다.
“우훅!”
열기는 더욱 높아졌고 도저히 더 이상 다가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거리상으로 동천몽을 던져 넣기에는 너무 멀었으므로 이를 악물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화르르!
호수의 물이 펄펄 끓고 있었다. 무엇이든 넣었다가는 곧바로 익을 것 같았다. 만강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저 뜨거운 물속에 들어가면 쇠라도 녹을 것 같거늘 어찌 던져 넣으란 말인가. 혹시 자신이 잘못들었지 않았나 싶어 물었다.
“저…정말 던져 넣사옵니까?”
“오…오냐. 염려말고 넣어라.”
만강수는 도저히 더 이상 다가갈 수가 없었다. 대신 뒤에 있는 부인더러 동천몽을 붙잡도록 했다.
척!
부인이 동천몽의 처진 몸을 붙들었고 돌아선 만강수가 머리를 잡았다. 만강수는 머리를 잡고 부인은 다리를 잡고 두세 번 반동을 준 후 힘껏 천포지를 향해 던졌다.
휘이이!
동천몽의 몸은 뜨거운 수증기속으로 사라졌고 잠시 후 풍덩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열기에 서둘러 전각 입구로 물러 나왔다. 뽀얀 수증기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별일 없을까요?”
부인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만강수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나도 모르겠소.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자칫하다간 자신들이 대법왕을 죽인 꼴이 된다. 대법왕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하면 자자손손 벼락을 피하지 못한다.
천포지는 단순한 연못이 아니었다. 포달랍궁에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천포지 지하 수백 장 아래에는 용암보다 더 뜨거운 구화열천수라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구화열천수는 지상에서 가장 뜨거운 아홉 가지의 물을 일컬음인데 하나씩 따로 있을 때는 단순히 열기만 갖고 있을 뿐이나 하나로 합쳐지면 그 어떤 영수(靈水)보다 뛰어난 물이 된다.
구화열천수는 무엇보다 피로 회복과 상처 치료에 탁월하여 역대 대법왕들은 가끔씩 이곳을 찾아 지친 심신을 달래었다. 워낙 효과가 뛰어나 죽은 시신도 구화열천수에 담궈 놓으면 살아난다고 했다.
두 사람은 문을 나와 계단에 걸터 앉았다.
들어 올 때는 워낙 마음의 여유가 없어 발견하지 못했는데 전각 주위로는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해 있었고 벌과 나비들이 찾아 꿀을 따고 있었다.
잠시 지친 몸을 쉰 두 사람은 꽃밭으로 다가갔다.
코를 찌르는 향기에 두 사람의 피로는 삽시간에 풀리는 듯 했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꽃향기를 맡으며 천천히 꽃길을 걸었다.
혼인한지 올해로 삼십년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약초를 찾아 서장의 모든 산을 휘젓고 다녔다. 삶을 즐기고 휴식을 하며 가끔씩 살아온 인생을 반추해보기에는 두 사람이 처한 가난은 너무 팍팍했다. 오직 약초를 찾아 앞만 보고 투쟁하듯 살아온 삶이었다. 깊은 계곡과 눈 덮인 설산을 뒤지며 만난 수많은 야생화를 보면서도 단 한 번도 아름답다거나 자연의 위대한 섭리에 감탄해 본적은 더욱 없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꽃이 아름답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여보 이 꽃좀 봐요? 너무 예뻐요?”
“금요자라는 꽃이오. 이런 고지대에서는 보기 힘든 꽃인데 피었구려.”
아마 천포지의 열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세상에.”
부인이 자색 꽃군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엎드려 코를 가까이 대더니 황홀한 빛을 띄었다.
“맡아봐요. 가슴이 시원해요.”
부인의 간청에 만강수는 어쩔 수 없이 향기를 맡았다.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싸아하니 시원해졌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부인을 쳐다보았다. 꽃들을 보며 어린애 마냥 기뻐하며 이 꽃 저 꽃 향기를 맡는 부인의 모습이 오늘따라 소녀처럼 보인다.
불현 듯 가슴이 울렁거렸다.
오로지 자신만 따라다니며 약초를 캤다. 하루도 쉬지 않고 돈벌이에 급급했기에 꽃을 보며 기뻐하는 부인의 모습이 무척 낯설어지면서 가슴이 아려온다. 그리고 처음으로 부인이 여자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만강수는 나비를 쫓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부인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만강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앞으로는 가끔씩 여행도 다니며 삶에 여유를 갖겠다고.
저녁이 되었는데도 동천몽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안위가 무척 궁금했지만 태울 듯한 열기 때문에 들어갈 수도 없었고 수증기로 인해 확인은 더욱 어려웠다.
두 사람은 몇 번 전각 안으로 발길을 들여놨다가 물러나오기를 반복했다. 다행히 곳곳에 야생 과일나무들이 있었기에 두 사람은 그것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한편 천포지에 담궈진 동천몽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해초처럼 부글부글 끌어 오르는 물살에 이리 저리 떠다녔다. 하지만 동천몽은 미세하나마 의식을 갖고 있었고 악착같이 의식의 끈을 붙들었다.
천포지는 불사심법을 익히지 않은 사람은 결코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들어오는 순간 익어 버린다. 오로지 불사심법을 배운 대법왕들만이 출입이 가능했다.
동천몽은 모든 것을 구화열천수에 맡겼다. 그렇게 구화열천수 속을 해초처럼 떠다니길 닷새째 동천몽은 상처가 조금씩 치료되고 있음을 느꼈다.
무상탄독으로 완전히 파괴되고 끊어진 경락과 신체기관들이 조금씩 이어지고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천포지에 들어온지 이레째 되는 날 끝없이 떠다니기만 하던 동천몽이 불사심법의 구결을 외우기 시작했다.
내상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을 운기는 치료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회복불능의 심한 내상일 때 무리하게 운기를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생긴다. 동천몽은 이제 운기를 시작해도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 한 것이었다. 쇠약해진 환자의 병을 치료할 때 일단 체력을 회복시킨 후 처방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불사심법을 끌어 올렸다. 처음에는 고통만 느껴질 뿐 별 차도가 없었지만 쉬임 없는 도전에 단전의 내기가 모였다. 구화열천수가 상처를 치료해가며 앙금처럼 단전에 내력을 만들어 본신의 진기를 촉발시키는 심지 역할을 했다.
동천몽의 부상은 무상탄독이 가져온 것이었다. 사실 일류고수라고 해도 무상탄독 앞에서 살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금을 통털어 무상탄독이 사용되어 생명을 부지한 사람은 없다. 그만큼 확실하고 정확한 살상기구에서 살아났다는 것은 그야 말로 꿈같은 얘기였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이미 존불사에서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걸병광우철포공이란 희대의 외공이 그나마 한 가닥 생기를 지니게 만든 것이다.
부르르르!
동천몽의 몸이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에 따라 주위로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가 생겼다.
콰르르르!
단전에 쌓인 구화열천수가 만든 내기가 온 몸을 휘돌며 본신의 진기를 끌어 내며 생기는 경련이었다. 워낙 경련이 크게 일어나다보니 소용돌이가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우욱!
비명을 흘렸다.
파파팍!
동천몽의 몸은 벼락을 맞은 듯 마구 요동했다. 그러나 불사심법의 구결을 멈추지 않고 외우며 운기에 전력을 다했다. 온 몸에 조금씩 힘이 붙고 있음이 느껴졌다. 어느 정도 힘이 생기자 의식이 더욱 또렸해졌고 떠다니던 동천몽은 중심을 잡고 단단한 바닥에 앉은 듯 결가부좌했다. 물속에 떠서 결가부좌하고 있는 모습은 신비롭다 못해 괴상하기까지 했다.
콰아아아!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동천몽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겼다. 거대한 범선이라고 삼킬 듯 소용돌이는 상상을 초월 할 만큼 거칠고 굉음을 흘렸는데 충격적이게도 구화열천수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었다.
콰르르르!
동천몽의 전신을 통해 구화열천수는 빠르게 스며들었고 불과 한시진이 채 되지 않아 자욱한 수증기를 내 뿜으며 넘실대던 천포지는 말라버렸다.
그런데 더욱 괴기스런 일은 물이 마른 천포지 위로 동천몽의 신형이 여전히 떠 있다는 것이며 그의 몸 주위로 칠채서기가 감싸고 있었다.
“여…여보 저게.”
때마침 동천몽의 안위가 궁금해 전각 안으로 발을 내 딛었던 만강수와 부인은 돌변한 장내 상황에 두 눈을 크게 떴다.
휘류류류!
강렬한 칠채서광으로 인해 동천몽은 한 개의 빛의 덩어리로 보였는데 그것은 너무 신비롭고 차라리 아릅답기까지 했다. 만강수와 부인의 얼굴에 일순 두려움이 스쳤다. 인간의 머리로써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 괴이한 변화가 이해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물스물!
태양처럼 빛나던 칠채서광이 동천몽의 몸속으로 흡수되더니 감겼던 눈이 떠졌다.
팟!
동천몽의 눈에서 한가닥 뇌전이 작렬했다.
파파파!
맞은편 전각 돌기둥에 커다란 두 개의 구멍이 뚫렸고 만강수와 부인은 소스라치며 전각 밖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흐흣 기연인가? 내가 불사심법을 십이성에 오르다니!’
아직 누구도 십이성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는 불사심법을 마침내 구화열천수의 영험한 기운을 빌어 도달하고 만 것이었다.
천천히 바닥에 내려선 동천몽은 주위를 휘둘러 보았다. 세시진 전까지만 해도 뜨거운 구화열천수로 가득했던 천포지는 가뭄에 드러난 논바닥처럼 갈라져 있었다. 발바닥을 통해 은은한 열기가 느껴지는 것만이 이곳이 조금 전까지 포달랍궁 대대로 성지로 불리었던 천포지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동천몽이 밖으로 나오자 만강수와 부인이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잔뜩 겁에 질린 듯 온 몸을 땅에 대고 개구리처럼 뻗어 있었다.
동천몽이 조용히 말했다.
“일어 나거라.”
하지만 두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동천몽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다. 일어 나거라.”
두 사람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고개는 여전히 들지 못했다.
“날 쳐다보거라.”
멈칫!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두 사람이 잔뜩 겁에 질려 고개를 쭈뼛거리며 들었다.
홱!
그러다 동천몽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떨궜다.
“그대는 부부인가?”
만강수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그러하옵니다.”
“너희 두 사람이 날 살렸다. 그래서 그대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다. 말하거라.”
“네에…?”
만강수가 고개를 들었다가 얼른 다시 숙였다.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소…소인들의 소원을 들어 주시겠다는 말씀이옵니까?”
“말해봐라. 뭐든지 어서?”
만강수가 얼른 말을 하지 못하자 부인이 말했다.
“소…소원을 말해도 되겠사옵니까?”
“그래.”
“저…저기 소첩의 소원은 막가놈을 혼내주는 것이옵니다.”
“막가 놈?”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부인이 계속 말했다.
“대설산을 자기 것인 냥 우리에게 입산료를 받는 막가 놈을 혼 좀 내주십시오.”
만강수가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여…여보? 그런 말을 어떻게.”
부인은 작정한 듯 고개를 발끈 쳐들고 말했다.
“저희는 약초를 캐서 생계를 잇습니다. 그런데 오년 전 부터 막가 놈이 대설산에 들어가려거든 한 달에 은자 반냥씩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캔 약초를 그놈 혼자서 독점하여 사들이기 때문에 가격을 마음대로 조정합니다.”
“아주 못된놈이구나?”
“온갖 행패를 다 부립니다. 불한당이 따로 없사옵니다. 대설산은 워낙 귀한 약초가 많아 저희들에게는 신의 성지로 불리는데 지놈것인양 합니다.”
“막가놈이란자의 이름이 정확이 무엇이냐?”
만강수가 말했다.
“막오광이옵니다.”
“앞장서라.”
“네?”
“막오광이 있는 곳으로 가자는 얘기다. 어서 날 그곳으로 안내 하거라.”
“저…정말 그놈을 혼내주시겠습니까?”
“물론이다. 너희 부부가 날 살렸다.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 줄 테니 염려말고 가자.”
“그…그럼 소인을 따라 오십시오.”
만강수가 앞장을 섰고 그 뒤를 동천몽이 따랐으며 맨 뒤에 부인이 걸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만강수라 하옵니다.”
“좋은 이름이구나. 자식은 있느냐?”
“아들만 셋이옵니다. 모두 장성하여 각자 밥벌이를 하지요. 단지.”
“단지 뭐냐?”
“아직 혼인을 시키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옵니다.”
“걱정이 크겠구나. 하긴 요즘 낭자들이 이런 시골로 시집을 오려고 해야 말이지. 아무튼 잘 될 것이니 너무 염려 말거라.”
“명심 하겠사옵니다.”
일행은 천포지각를 빠져나왔다.
동천몽은 잠시 천포지각를 돌아보았다. 더 이상 이곳은 대법왕들의 휴식처가 되지 못할 것이다. 구천열화수는 햇빛을 보면 그 영기가 사라진다. 그래서 호수 위로 전각을 지어 세운 것이었다.
막오광은 안다 제일의 부호였다. 안다 지역 약초 상권을 그가 거머쥐고 있었다.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약초거래를 할 수가 없었고 그의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누구도 대설산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약초 시장을 독점하여 돈을 벌고 대설산 입산료로 돈을 뜯으며 그의 재산은 눈이 부시게 불어났다.
몇몇 사람들이 약초시장에 진출을 했지만 그의 횡포를 견디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말을 듣지 않으면 휘하에 있는 무사들을 보내 심지어 목숨까지 해쳤다.
막오광이 살고 있는 장원 앞으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모두 망태기에 갖은 약초를 가득 담고 있었는데 산에서 캐온 약초를 막오광에게 팔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것이다.
“이건 은자 닷푼.”
줄은 장원안까지 이어졌고 거대한 창고 앞에서 총관 철재수가 약초꾼이 내민 망태기를 보며 그 자리에서 가격을 부르자 곁에 있던 사내가 잽싸게 품에서 은자 닷푼을 꺼내 주었다.
약초꾼은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아무소리 못하고 창고 안에다 망태기에 든 약초를 붓고 돌아섰다.
다음 사람이 다가오자 철재수는 거침없이 가격을 불렀다.
“은자 네푼.”
“네엣? 이 많은 약초가 고작 은자 네푼 밖에 안 된다는 말입니까?”
철재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왜? 그래서 기분 나빠? 그럼 갖고 가. 야! 돌려줘.”
약초꾼이 서둘러 굽실거렸다.
“아…아니옵니다. 그냥 주십시오.”
약초꾼은 네 푼을 받아 돌아섰다. 네 푼이라도 받지 않으면 팔 곳이 없었다.
‘드러운 새끼들, 도대체 그 많은 벼락들은 어디가고 저 인간들 안 때리는지 몰라.’
약초꾼은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걸어갔다.
“다음! 시간 없는데 빨리 빨리 와 임마.”
투덜거리고 사라지는 약초꾼을 바라보는 흑의사내를 향해 철재수가 버럭 소릴 질렀다.
흑의사내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자신의 약초가 담긴 망태기를 던지 듯 놓았다.
“이거 뭐야?”
망태기 안에 들어 있는 약초를 살피기 위해 철재수가 이리저리 살폈다.
흑의사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보다시피 천지유불초 아닙니까?”
“으음!”
철재수가 망태기에서 천지유불초 한 뿌리를 꺼내 냄새를 맡아 보았다.
고개를 갸웃 하는 철재수를 보며 흑의사내가 말했다.
“왜요?”
“조금 이상한데, 이거 천지 유불초 맞느냐?”
그러면서 돈 계산하는 사내에게 뿌리를 넘겨주었다.
돈 계산 하는 사내가 이러지러 살피고 냄새를 몇 번 맡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총관님도 참, 뭐가 이게 천지유불초입니까? 사지구사초 아닙니까?”
“그렇지? 어쩐지.”
흑의사내 눈이 커졌다.
“사…사지구사초라니 말도 안됩니다. 이게 어딜 봐서 사지구사초냐구요?”
그러면서 한 뿌리를 들어 뒤에 대기하고 있는 약초꾼에게 내밀었다.
“형장께서도 이게 사지구사초로 보이오?”
“이건 천지,,,가 아니라 사…사지구사초 아뇨.”
철재수의 부리부리한 눈과 마주치자 사내가 얼른 말을 바꿨다.
흑의사내 눈이 커졌다.
“혀…형장의 눈에도 이게 사지구사초로 보인단 말이오?”
“난 몰라요? 그쪽에서 알아서 해요. 왜 가만 있는 나한테 묻고 지랄이야.”
사내가 버럭 짜증을 냈다.
흑의사내가 들고 있는 뿌리를 철재수에게 내밀며 눈을 부라렸다.
“잘 보십시오. 어디가 사지구사초 입니까?”
“장사 한 두 번 하나 이런 나쁜 놈이 날 속이려고 해. 은자 아홉 푼.”
철재수가 큰 소리로 말했다.
돈 계산 하는 사내가 전대에서 은자 아홉 푼을 꺼내 던졌다.
“뭐해 빨리 꺼지고 다음?”
철재수가 손바닥 위에 놓인 아홉푼을 바라보는 흑의사내게게 인상을 썼다.
히죽!
갑자기 흑의사내가 철재수를 보며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진짜를 가짜로 후려쳐 헐값에 사들인다고 해서 설마 했는데 사실이로군.”
슥!
흑의사내가 다시 한 뿌리를 뽑아 철재수 눈앞에 들이 밀었다.
“다시 묻겠다? 이것이 정말로 사지구사초로 보이느냐?”
흠칫!
흑의사내가 갑자기 말투를 바꾸자 철재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대답이 없느냐? 사지구사초이냐 천지유불초이냐?”
“허험! 이런 미친놈,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뻐억!
벼락같은 발길질에 피할 틈도 없다.
흑의사내의 오른발이 철재수의 낭심을 걷어찼다.
“끅!”
뜨거운 불덩이에 데인듯 아랫도리가 달아오른다. 너무 고통스러워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철재수 앞으로 흑의사내는 다시 약초를 들이밀었다.
“잘 봐라. 사지구사초가 맞느냐?”
“이런 쳐 죽일 놈이 미쳤나. 감히 총관님을.”
계산하던 사내가 달려들었다.
빡!
그 역시 낭심을 얻어맞았다.
“크거걱! 아이고오오!”
돈 계산 하던 사내가 아랫도리를 감싸며 그대로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동천몽이 웅크리고 있는 철재수 앞에 약초를 들이밀었다.
“아직도 사지구사초이냐?”
“네놈은 누구…끄억!”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낭심에 동천몽의 오른발이 박혔다.
부르르!
쭈그린 철재수가 온 몸을 떨며 입술이 파래졌고 그 앞으로 다시 약초가 들어온다.
“아주 자세히 살펴봐. 사지구사초이지? 틀림없지?”
“주…죽고 싶어 환…으와아악!”
철재수는 이번에도 할 말을 끝내지 못했다.
연거푸 세 번씩이나 같은 곳을 얻어맞자 하늘이 노래지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털썩!
급기야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는데 눈앞으로 잎사귀 세 개 달린 약초가 또 보인다.
“이게 뭐지?”
“사지…아니 천지유불초.”
그제서야 동천몽이 씨익 웃었다.
“분명하지?”
“으…으응. 맞아.”
“그럼 천지유불초 값을 계산해야지.”
“뭐…뭣 하느냐? 어서.”
철재수가 말을 하다 중단했다. 돈 계산 하던 사내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