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절대무적 형님지계
공원은 아무리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있는 동천몽의 손아귀와 얽힌 다리를 빼낼 수가 없었다.
빠악!
마침내 일두사가 터졌다.
눈앞에 별이 보였다. 빨간 별 흰 별 검정별, 공원은 검정별이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빡---빠바박!
동천몽의 머리가 공원의 안면에 무자비하게 틀어박혔다. 그에 반해 공원은 어떻게 해서라도 동천몽의 양손에 잡힌 손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놓치면 죽는다. 어차피 힘에서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에 오래끌수록 결국 자신의 손을 빠져 나올 것이다. 그 이전에 보내야 했으므로 동천몽은 더욱 미친 듯 머리를 박았다.
뻑!
퍼---어억!
소낙비가 쏟아지듯 동천몽은 숨도 쉬지 않고 박아댔다.
공원의 얼굴은 순식간에 피로범벅이 되었고 가장 먼저 코뼈가 깨져 나갔다.
꽈직!
뒤이어 이빨이 부숴 졌고 오른쪽 눈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동천몽의 박는 속도는 갈수록 빨라졌다.
바바바박!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공원의 얼굴이 처참하게 뭉개졌다. 그리고 저항은 갈수록 약해졌다. 얼굴이 깨지며 고통과 출혈과다로 몸의 진기가 점점 소멸된 것이다.
콱!
콰아악!
동천몽의 머리 또한 공원의 얼굴에서 묻은 피로 붉게 색칠되었다.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공격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툭!
급기야 공원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던 검이 떨어졌다. 그리고 저항력이 갈수록 약화되었다. 반면 동천몽의 공격은 갈수록 기세를 떨쳤다.
상대가 약세를 보이면 반대로 이쪽은 더욱 힘을 내는 법이다. 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자 동천몽은 더욱 마지막 힘을 쏟아 박았다.
뻐---어억!
공원의 얼굴이 완전히 함몰되었고 급기야 끄르륵 소리를 내더니 축 늘어졌다.
하지만 동천몽은 멈추지 않았다. 강호경험은 풍부하지 않지만 싸움 경험은 누구 못지않았다. 죽은 척, 기절한 척 늘어졌다가 방심하는 사이 반격을 당한 쓰라린 기억이 적지 않았다.
동천몽은 축 늘어진 공원의 얼굴을 더욱 박았다.
피와 살점과 뼈 조각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퍼퍼퍼!
공원은 죽은 듯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았지만 동천몽은 마지막 힘을 다해 일두사를 펼쳤고 목을 높이 들어 쐐기를 박듯 내려찍었다.
꽈아앙!
부르르!
워낙 강력했는지 공원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극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학---하하학!”
여자의 배위에 올라간 남자처럼 동천몽이 팔을 펴고 상체를 세웠다. 동천몽의 얼굴에서 피가 떨어져 내렸는데 물론 공원의 피였다.
뚝뚝!
혹시 사기를 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고 한 번 더 박았다.
퍽!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그제서 야 동천몽이 공원의 배 위에서 내려왔다. 벌렁 풀밭으로 쓰러진 동천몽이 입을 벌리고 뜨거운 숨을 몰아 쉬었다.
잠시 후 숨이 진정되자 동천몽은 몸을 일으켰다. 쓰러져 있는 공원의 흑의를 잡아 당겨 얼굴을 닦았다. 얼굴에 묻은 피를 대충 닦은 동천몽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머리통만한 바위를 들어 올렸다.
아직 숨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꽈지직!
풀썩!
공원의 몸이 커다란 경련을 일으키더니 잠잠해졌다. 완전히 숨이 끊어진 것이다.
“아미타불! 아직까지 형님지계에 안 넘어간 놈 못 봤느니라.”
나름대로 흡족한 미소를 짓던 동천몽이 옆에 있는 납작한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만 나오시오. 답답할 텐데.”
동천몽이 조용한 숲속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숲으로부터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러자 동천몽이 목청을 가다듬더니 다시 말했다.
“언제까지 숨어서 지켜볼 셈이오? 이쯤 됐으면 그만 나타나도 될 것 같은데?”
달이 다시 구름 속으로 들어가면서 숲은 어둠속에 묻혔고 여전히 정적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동천몽은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머금으며 가만 앉아 있었다.
처벅! 처벅!
돌연 조용하던 숲속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어두워 아직 모습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였다.
동천몽이 좌측 숲을 보며 환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어둠과 대비되는 하얀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유령이 다가오는 것처럼 백의를 걸친 인영이 거리를 좁혀 왔고 동천몽은 시선을 고정시켜 보았다.
다시 달빛이 드러났고 다가오는 백영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는 놀랍게도 백쾌섬이었다. 여전히 깨끗한 백의에 오늘다라 양쪽 귀에 매달린 귀고리가 밝은 빛을 뿌렸다.
가까이 다가온 백쾌섬이 죽어 있는 공원을 내려다보았는데 검미를 찌푸렸다. 가까이서 본 공원의 얼굴은 완전히 뭉개져 있었고 도저히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완전히 홰를 쳐놨군요?”
동천몽을 돌아보며 웃었다.
“내게 별로 할 말 없을텐데 곧바로 시작합시다.”
그러면서 동천몽이 일어섰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싸움자세를 취하는 동천몽을 보며 백쾌섬이 이마를 찡그렸다.
“대법왕께서는 어떻게 내가 근처에 있는지 알았습니까?”
“내력도 바닥이고 능력이라고 해봤자 보통 사람만 못하는데 백형 같은 고수가 숨어 있는 것을 무슨 수로 알았느냐고 묻는 거군?”
“그렇습니다.”
“꼭 감각으로 확인되어야만 알 수 있는 건 아니지.”
“딱 보면 알 수 있다는 얘기군요?”
“백형이 꾸민 일이오? 그러니 당연히 결과가 궁금할 것 아니오? 결과를 알자면 당연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아니오?”
백쾌섬의 표정이 변했다.
동천몽의 말은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지금까지 쭈욱 암중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동천몽은 자신의 그 모든 것을 계산에 넣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왜 내가 대법왕을 죽이려고 하는지 알겠습니까?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보지 않고 들리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데 모든 것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 그 불가사의한 능력이 화를 부른 것입니다.”
동천몽은 여전히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얘기가 나왔으니 백형 입으로 시원하게 드러내 놓는 게 어떻겠소?”
“얘기 못 할 것도 없지요.”
백쾌섬이 맞은편 바위에 걸터앉았다.
“알겠지만 천상각은 중원에서 가장 돈이 많습니다. 예전과 달리 이제 패업 천하를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시대는 갔습니다. 힘 보다는 황금이 위력을 발휘하는 시대가 도래 한 것이지요. 물론 힘도 중요 합니다. 그러나 금전이야 말로 어쩌면 무력보다 더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한 예가 바로 무림맹이지요. 사실 무림맹이 지난 수백년간 천하를 지배해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천상각에서 지원되는 엄청난 자금의 힘이라고 생각 합니다.”
동천몽의 눈이 반짝 빛을 뿌렸다.
그것은 백쾌섬의 말에 동의한다는 의미였다.
“물론 천상각에서 지원된 형식이지만 알고 보면 갈취에 가까웠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입니다. 어쨌든 천상각을 끼지 않고서는 무슨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가 내린 결정입니다.”
“우리라 함은 목와북천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짐작 했겠지만 본인은 목와북천의 천주이자 흑도대종사입니다.”
짐작은 했지만 본인의 입을 통해 확인이 되자 동천몽의 눈빛이 변했다. 무림맹 하나도 벅찬데 목와북천까지 천상각을 탐내고 있는 것이었다.
“내 수하중 눈이 세 개인 인물이 있습니다. 삼천목이라고 하여 그들은 신의 두뇌를 갖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한데 어느 날 그가 날 찾아와 간청하기를 천상각과 관계를 맺으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동천몽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날 찾아 주고 그 인연으로 우리 아버지의 신임을 얻겠다.”
“그것 뿐만 아니라 할 수 있다면 동천몽이 차기 각주가 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했소이다.”
동천몽이 웃음을 지었다.
“계속 말해 보도록.”
“그래서 우린 천상각에 대해 철저히 조사했소. 동천몽에 대해서도 완벽이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소문대로 가망 없는 버려진 아이였지요. 그런데 삼천목은 동오룡의 의중에는 동천몽이 있으니 반드시 그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난 믿을수가 없었지만 워낙 그의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에 따랐지요.”
“…….”
“아닌게 아니라 동오룡의 동천몽에 대한 애정은 상상을 넘어섰습니다. 날 앉혀놓고 말하는데 그의 두 눈은 열정적이었고 찾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단순히 자식에 대한 사랑만은 아니었다는 얘기지요. 그만큼 동천몽의 자질을 높이 평가한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백쾌섬은 조용한 눈빛으로 동천몽을 보았다. 워낙 영리하고 계산이 빠르다는 것을 겪었기 때문에 무력이 거의 상실되었지만 방심할 수가 없었다.
동천몽이 말했다.
“그래서 동천몽을 찾았나?”
“반 밖에 찾지 못했습니다.”
“반밖에 찾지 못하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반은 내 앞에 있는 대법왕께서 동천몽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한 편으로는 아닌 것 같기도 한다는 얘기군?”
“너무 뛰어납니다. 상상을 초월할 만큼, 천상각의 동천몽은 비록 장사꾼적인 자질은 뛰어나 부친으로부터 신임을 얻었는지 모르지만 대법왕과는 절대 비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강호는 온갖 기인이사들이 북적이는 곳이긴 하지만 동천몽과 대법왕과는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다만 내가 대법왕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앞서 언급 했듯 너무 두렵기 때문입니다. 곁에서 지켜본 대법왕은 솔직히 내가 상대하기에는 너무 벅찰 만큼, 말 그대로 전지전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흐흐흐! 고맙군.”
“이해하십시오. 살려두기에는 나중 너무 두려워 이런 일을 꾸몄습니다. 효웅이란 끌어들이지 못할 인물은 죽여 없애는 것 아니던가요?”
동천몽이 눈을 크게 떴다.
“백형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했소. 난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백형으로부터 우리 손잡고 같이 일해보자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소이다.”
“하오시면 소생과 같이 일할 의향이 있으십니까?”
“있고 말 고, 당연히 있지요? 우리 손잡읍시다. 백형과 잡고 싶어 미치겠소이다.”
동천몽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로 손을 잡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이 와중에도 농담을 하시다니.”
동천몽이 버럭 화를 냈다.
“백형 사람의 진심을 농담으로 매도하다니 너무 하오. 난 지금 심각하게 제의하는 건데 말이오. 손잡자니까요. 우리 굳세게 잡읍시다.”
“소생은 영웅이 아닙니다. 하지만 효웅의 그릇은 된다고 생각 합니다. 효웅은 아무 때나 손을 잡지 않습니다.”
백쾌섬은 스스로를 효웅이라 칭하고 있었다.
동천몽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백쾌섬이야말로 효웅일지 모른다.
백쾌섬이 일어났다.
“내가 생각하기에 대법왕께서는 이미 쓸 팻감은 모두 사용했을 것입니다. 조금 전 공원을 죽인 형님지계는 가히 압권이라 할 만한 멋진 반전이었습니다.”
히죽!
동천몽이 짓궂게 웃었다.
마치 그럴까? 하는 반문인 듯 했다.
“아무리 그런 표정 지어봤자 소생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있는 척 하지 마십시오. 대법왕님 답지 않으십니다.”
백쾌섬의 말 마따 나 이제야 말로 사용할 수 있는 팻감은 거의 소모되었다. 그러나 동천몽은 불안해하거나 초조한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 입가에 점잖은 미소를 다시 머금었다.
흠칫!
백쾌섬이 눈을 빛냈다. 자신을 바라보고 짓는 동천몽의 미소는 지금까지의 것과 달랐다. 대웅전을 장악하고 내려다보는 세존의 표정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동천몽이 아니라 석가세존인 듯 했다.
‘아아!’
백쾌섬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동천몽을 죽이려는 살심이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눈 녹듯 없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쾌섬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진기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잠시 얇아졌던 살심이 다시 두꺼워진다. 그리고 가급적 동천몽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지 않기로 했다.
스윽!
백쾌섬이 오른 손이 왼쪽 옆구리에 매달린 검의 손잡이를 슬며시 쥐었다.
티 없이 깨끗한 흰옷을 입고 뇌전보다 빠른 검을 사용한다고 해서 붙여진 백쾌섬이란 별호이자 이름.
그의 손에 죽은 대부분이 검이 뽑힌 것도 보지 못한다고 했다.
동천몽은 우두커니 섰다.
그것은 얼른 베라는 재촉과고 같았다.
“부디 극락왕생 하시길.”
번쩍!
한줄기 섬광이 백쾌섬의 옆구리에서 터져나왔고 순간 번개가 친 듯 숲속이 환해졌다. 하지만 잠시 잠깐이었을 뿐 은빛 섬광은 어느새 사라졌고 숲속은 어둠에 묻혔다.
동천몽은 옆구리가 벌레에 물린 듯 따끔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이 밤중에 벌레가 날아와 물었을 리는 없다. 더구나 이 지역은 한 여름이라고 해도 온도가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것은 백쾌섬의 검이 베고 간 흔적이었다.
“역시, 명불허전이로군!”
진심으로 감탄한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싸워본 그 어떤 검보다 깔끔하고 빨랐다.
휘청!
동천몽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그리고 갑자기 호흡이 거칠어졌다.
하…하학!
왼손이 오른쪽 옆구리를 감쌌는데 무척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피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걸병광우철포공 탓이다. 그러나 그 안쪽 몸속은 상상을 벗어나는 상처를 입었을 것이었다.
동천몽의 입가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마지막까지도 미소를 잃지 않았고 천천히 앞으로 넘어졌다.
쿠웅!
얼굴을 지면에 대고 앞으로 엎어졌다.
더 이상 움직임이 없다. 하지만 백쾌섬은 다시 검을 쳐들었다.
“나 백쾌섬의 검이 한 사람에게 두 번 휘둘러지기는 대법왕께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오.”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두 번 검을 휘둘러 본적이 없었다. 그 만큼 무공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워낙 빨라 피한 사람이 없었고 정확히 급소를 가격했기 때문에 모두가 정확히 절명했다.
그러나 상대는 자신이 태어나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낀 동천몽이었다.
“혹시 기억하시오. 흑수당을 오던 도중 뢰음칠혈과 싸울때 내게 했던 얘기 말이오. 당시 대법왕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소. 환상루에서도 그랬고 어떻게 내가 싸움을 하는 곳에는 묘하게 백형이 있다고 말이오. 그러면서 이러다 나중 나와 백형이 싸우게 되는 것 아니오?”
엎어진 동천몽으로부터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러나 백쾌섬은 말을 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얼마나 놀란지 아시오. 대법왕께서는 농담이라고 웃어 넘겼지만 난 그때 확신했소. 대법왕을 죽이지 않고서는 나의 어떤 꿈도 이룰수 없다는 것을 말이오. 대법왕께서는 그때, 아니 어쩌면 처음 날 만난 환상루에서부터 내 정체를 알았는지도 모르겠소.”
췩!
또다시 주위 숲을 환해졌다가 다시 암흑으로 잠겼다.
동천몽이 움직이지 않았고 피가 흘러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를 검이 베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백쾌섬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면 절명을 확인한 듯 했다.
백쾌섬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쓰러진 동천몽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두려웠소. 흑도대종사인 내가 대법왕님이 너무 두려워 입맛까지 잃었다고 하면 믿겠소.”
바로그때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장내에 한 흑의인이 나타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흑의인은 눈이 세 개였다. 두 개의 눈 사이에 또 하나의 눈이 있었다.
목와북천의 군사인 삼천목이었다. 그는 백쾌섬에게 정중히 허리를 구부리더니 빠르게 말을 이었다.
“흑수당 일은 실패 했사옵니다.”
백쾌섬이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삼천목이 빠르게 그간의 경과를 말했다.
“포달랍궁에서 장악했단 말이냐?”
“천룡구십구불이 들어와 있었사옵니다. 알다시피 천룡구십구불은 포달랍궁의 정예, 혈부림의 남은 무사들 가지고서는 그들을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사옵니다. 뿐만 아니라.”
“또 뭐냐?”
“동천비가 사람을 보냈는데 그 역시 실패로 끝났습니다.”
동천비가 자체적으로 끌어모은 낭인들의 힘은 무시 못 할 정도였다. 더구나 아직까지 천상각은 무림맹과 손을 잡고 있다. 비록 서로가 지금 극렬하게 돌아서고 있지만 만약 목와북천에서 천상각을 노리면 적의 적은 동지라고 했다. 무림맹은 급히 천상각으로 돌아설 것이다. 최소한 흑도로 천상각이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러다보면 무림맹과 정면충돌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아직 정면충돌의 때는 아니었으므로 차선책으로 자청단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흑수당의 자금을 이용할 생각이었는데 동천몽이 한 발 앞서 완벽하게 막아 버린 것이다.
“대책은 뭐냐?”
“대책이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무림맹에서 절대 천상각을 가만 두지 않을 것입니다.”
“동천비를 징계할 것이란 애기냐?”
“그렇게 되면 동천비의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옵니다.”
팟!
백쾌섬의 눈이 빛을 뿌렸다. 삼천목의 의중을 간파 한 것이었다.
언제 봐도 머리 하나 만큼은 기가 막히게 돌아갔다.
삼천목이 동천몽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자신의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뭐하려는 것이냐?”
“정확할수록 나쁠 것 없지 않겠사옵니까?”
파아!
삼천목의 검이 또다시 동천몽의 몸을 할퀴었다.
동천몽의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완전히 숨이 끊어진 듯 축 늘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곧바로 떠나지 않고 바닥에 엎어진 동천몽을 내려다보았고 백쾌섬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만약 당신이 죽지 않았다면 나는 물론이고 천하의 누구도 패권의 꿈은 접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만난, 아니 고금을 털어 당신처럼 뛰어난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무림맹과 동천비의 싸움이다. 패자는 동천비가 될 확률이 높았고 결국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이란 정해져 있었다. 이제 그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두 사람이 떠났다. 달빛이 구름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고 사방이 뿌연 은색으로 빛난다.
동천몽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몸은 움직일 수 없지만 의식까지 끊어진 것은 아니었고 지면과 맞닿아 있는 그의 입술은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씨이…바알.”
누구를 향한 욕설이 아니었다. 오로지 상한 자존심에 대한 화풀이였다.
“큿큿!”
삼천목의 마지막 검이 치명타인 셈이었다. 백쾌섬에게 맞은 이검에는 어느 정도 움직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삼천목이 휘두른 마지막 검이 그나마 한줌 남아 있는 의지까지 완전히 소멸 시켜 버린 것이다.
돌아눕고 싶었지만 손끝 까 닥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에게 돌아눕는다는 것은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단지 유일한 것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크우우!”
아무리 힘을 써도 몸을 꼼짝하지 않았다.
목숨이 아까워서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 생명을 자기 뜻대로 하지 못하고 타인에 의해 제약 당한다는 것이 기분 나쁠 뿐이었다.
사내라면 최소한 자기 목숨 정도는 스스로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게 동천몽의 생각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사내라면 죽을 때도 화려하게 죽어야 한다. 누구에게 얻어 터져 죽는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관에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내란 죽을 때 멋지게 죽어야 한다는 것이 어려서부터 확고한 의지였다.
그런 자신이 이런 텅 빈 산골짜기에서 짐승의 밥으로 사라진다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설혹 짐승의 밥으로 사라진다면 여우나 살쾡이 따위의 밥은 안 된다. 최소한 호랑이의 밥 정도는 되어야 그나마 체면이 선다.
‘인생은 기세다’
부친이 말했다. 거래를 할 때도 어깨를 쫙 펴고 상대를 제압하듯 당당해야 성공률이 높다고 했다. 어떤 어려움에 닥쳐도 흔들리지 말고 그럴 때일수록 더욱 호기를 부려야 한다. 웅크리며 소극적으로 나가면 그 거래는 불을 보듯 실패다. 실패 할 때 하더라도 눈 크게 뜨고 어께에 힘 잔뜩 실어야 상대가 꺾인다고 부친은 말했다.
그렇게 부친의 가르침에 충실해서 얻은 자리가 소주 형천파 두목 자리였다. 자신의 허세에 나가떨어지지 않은 자들이 없었다. 대여섯 살 위의 형들도, 오래전부터 소주 홍등가를 주름잡고 있던 패거리들 도 자신의 그런 다부진 기세에 완전히 백기투항했다.
“끄우욱!”
다시 한 번 돌아눕기 위해 시도를 했지만 몸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동천몽은 돌아눕기를 포기했다. 되지 않는 일에 신경쓰느니 한 줌 힘이라도 아껴두었다가 어떤 기회가 오면 사용해야 했다. 물론 기회란 사람에게 구함을 받는 것이었다.
다행히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산속이었다. 아침이 되면 약초나 나물 따위를 캐기 위해 산을 오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고 운이 좋으면 발견 될 수도 있었다.
“푸훗!”
자꾸 웃음이 흘러나왔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로지 남의 손을 기다려야 하는 자신의 운명이 비참했다. 그리고 그것은 백쾌섬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백쾌섬이라고 했던가. 결코 널 편히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믿어도 좋다.’
땅바닥으로부터 냉기가 얼굴을 타고 들어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냉기는 얼굴을 얼릴 듯 차가웠다.
얼굴이라도 돌릴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마음 뿐이었고 그렇게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먼동이 밝아오면서 이곳저곳에서 산새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동천몽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그렇다고 목숨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가만 갈수록 의식까지 멀어져가고 있었다. 얼굴은 지면에서 올라온 냉기로 완전히 얼어버렸고 몸의 체온은 떨어져 갔다. 숲이 우거져 해가 떠올라도 얼어가는 몸이 녹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불사심법은 심장이 밖으로 꺼내지지 않는 한 죽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완전한 성취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시간이 흐르면 죽을 수도 있다. 완전한 성취를 이루면 스스로 운기가 가능하고 몸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무튼 동천몽은 혼신의 힘을 다래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을 하고 입술을 움직이면서 얼굴이 얼어가는 속도를 더디게 하려는 것이었다.
‘씨…씨이벌!’
욕을 내 뱉었다. 물론 가까이 있는 사람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였지만 어쨌든 자신도 모르게 욕이 나온 것이었다. 동천완을 제외한 세 명의 형제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십육 년이란 긴 시간 동안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 음식에 독을 넣기도 했고 자객들을 보내기도 했으며 원행을 떠난 자신의 상단을 산적을 시켜 공격도록 했다. 갖은 방법을 다해 죽이려고 했지만 끝내 살아남은 자신이다. 그런 자신이 신이 백쾌섬 같은 조무래기들에게 당했다고 생각하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크후후후!”
그것은 차라리 살기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여…여보 여기.”
동천몽의 꺼져가는 의식이 곤두섰다.
틀림없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부부로 보이는 두 명의 남녀가 옆구리에 약초를 담는 망태기를 매고 경악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 공원의 시신이 있었는데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짓이겨진 얼굴을 보며 부부는 침을 삼켰다.
“그…그만 갑시다. 여보.”
주위 숲들이 완전히 망가진 것이 누군가와 큰 싸움을 하다 당한 것이 분명했다.
“네 여보.”
부부가 시신을 피해 오른쪽으로 돌아 길을 갔다. 공원의 시신이 길을 떡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악!”
몇 걸음 가자마자 부인이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이번에 발견한 시신은 동천몽이었다.
앞서 발견한 시신과 다르게 일단 외형은 깨끗했다. 단지 엎어져 있어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젠장! 아침부터 시체를 보면 재수가 없는데 한 구도 아닌 두 구를 봤으니 오늘 좋은 꼴 보기는 힘들 것같소.”
남편이 가래침을 뱉으며 부인의 손을 잡고 서둘러 지나쳤다.
툭!
서두르는 남편의 발길에 뭔가 채였다.
“왜요?”
걸음을 세우는 남편을 보며 부인이 물었다.
“가만!”
남편이 허리를 구부려 발길에 채린 물건을 주었다. 그것은 대법왕의 신분을 나타내는 백상불이었다.
부르르!
남편의 손이 떨렸고 여인이 백상불을 보며 경악했다.
“그…그 것은 대법왕님의 신표인 백상불 아닌가요?”
“어…어떻게 백상불이.”
남편이 백상불을 앞뒤로 돌려 가며 살폈다. 팔년 전 처음으로 포달랍궁을 간 적이 있었다. 살아생전 이 지역 사람들은 포달랍궁을 찾아가 대법왕의 존안을 뵙는 것을 일생 일대 영광으로 생각 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모든 가재도구를 팔아 몇 달 몇 년을 풍찬노숙하며 포달랍궁으로 순례의 길을 떠난다.
포달랍궁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부인과 함께 무려 반년이란 시간을 고생하여 도착한 포달랍궁은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웅장하고 성스러웠다. 특히 산문을 들어서고 대법왕이 거처하는 백궁 앞에 이르자 거대한 백상불이 놓여 있었다.
백상불을 보는 순간 마치 대법왕을 뵌것 같아서 얼마나 흥분했던가. 아직도 당시의 떨리고 감동스러웠던 느낌이 생생했다. 그런데 자신의 손에 당시 봤던 백상불이 있다.
남편이 놀란 눈으로 엎어진 동천몽을 보았다. 겉으로 봐서는 도저히 대법왕인이 알아 볼 수 가 없었다. 듣자하니 당시 자신들이 봤던 대법왕은 죽고 환생자가 새로 뒤를 이었다고 들었다.
어쨌든 백상불을 갖고 있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남편이 허리를 숙여 동천몽의 시신을 눕혔다.
털썩!
동천이 돌아눕혀지며 가사 한 자락이 벗겨졌다. 그리고 아랫배에 흰 코끼리 형상이 드러났다.
“으….으헉 저….저건 대법왕님에게만 나타나는 표식.”
두 사람은 지체 않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대…대법왕이시여 소인 만강수가 인사 올리옵니다.”
“천 한 계집 오향숙이 대법왕님을 뵈옵니다.”
두 사람은 고개를 쳐들지 못하고 땅바닥에 쳐 박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쳐 박은 체 그렇게 엎드려 있었고 동천몽은 온 힘을 다해 입을 달싹거렸다.
동천몽이 뭐라고 입술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너무 작아 들리지 앉자 만강수가 동천몽의 입 가까이에 귀를 대었다.
“나…날 처…천포지각으로.”
하지만 알아 듣지 못한 듯 만강수가 눈을 깜빡거리자 동천몽이 다시 중얼 거렸다.
“처…천포지각.”
여전히 못 들었는지 함께 귀를 기울이고 있는 부인을 바라보았다.
“글쎄, 이년 귀에는 철포조…좆단파라고 하는 것 같은데요.”
그러면서 부인의 얼굴이 빨개졌다.
팟!
남편의 눈이 커졌다.
“천포지각?”
“알아요?”
“그곳 아니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세존의 성지(聖地)말이오.”
“맞아요. 그곳으로 데려 달라고 하시는 것 같아요.”
“아주 많이 다친 듯한데 머뭇거릴 시간이 없소. 어서 내 등에 업히시오.”
남편이 동천몽의 상체를 일으켜 세운 후 뒤로 돌아 앉았고 부인이 뒤에서 힘껏 밀었다.
처척!
남편이 동천몽을 등에 업고 일어섰다.
“당신이 내 망태기와 호미를 챙겨 따라오시오.”
남편이 동천몽을 업고 뛰었고 그 뒤를 두 개의 망태기와 호미를 든 부인이 따랐다. 뛰어가는 두 사람 위로 아침 해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한시진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무도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침통한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투툭!
천장금왕의 염주 굴리는 소리가 좀 더 커졌다. 마음이 그만큼 초조하다는 것을 반증 하고 있었다. 대법왕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흑수당으로 달려온 것이다.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자 모두가 입구로 고개를 돌렸고 문이 열리고 덕배선사가 들어섰다.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말해보게?”
천장금왕이 염주 굴림을 멈추고 물었더.
덕배선사가 조용히 말했다.
“대법왕님의 흔적을 전혀 찾지 못했사옵니다. 뿐만 아니라 존불사는 흑도세력인 혈부림의 위장총단이었습니다.”
덕배선사는 존불사의 사정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그럴수가!”
“아미타불! 그럼 대법왕님께서 운명을.”
“닥치시게.”
천장금왕이 천검은왕을 노려보았다.
천검은왕이 흠칫 하며 얼른 입을 다물었다. 마치 칼로 찌르는 것 같은 시선이었는데 저토록 노한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해보시게?”
덕배선사가 말했다.
“화산이 폭발한 듯한 거대한 분화구가 있었소. 조사 결과 무상탄독이 터졌음을 알아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대법왕님의 시신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살아계시다.”
천장금왕이 단호히 말했다.
수많은 시선이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는 듯 일제히 돌아보았다.
“옥체가 발견되지 않았으면 무조건 살아 계신다. 대법왕님께서는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고들 있는가?”
그것은 믿음이었고 신뢰였다. 뿐만 아니라 동천몽에 대한 외경심이자 절대적인 숭배에 가까운 말이었다.
“장담하네. 대법왕님께서는 살아계시네. 다만 그런 함정이었다면 옥제가 부척 불편하시겠지. 하지만 난 크게 걱정하지 않으시네. 그분은 이미 위험을 떠나기 전에 감지 하셨다면 당하고 나서의 대책도 수립해 가셨을터.”
“저기.”
그때까지 침묵으로 앉아 있던 자정경이 입을 열었다.
아름다운 자정경이 입을 열자 앞 다투어 모든 시선들이 쏠렸다.
“사실 사부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제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미 동천몽이 자정경을 속가제자로 받아 들였다는 사실은 알려졌고 모두가 인정 하고 있었다.
“이번 길은 아무래도 길(吉)보다는 흉(凶)많을 것이라면서.”
“결국 알고서도 가셨다는 말씀이군. 하긴 그분께서는 누구보다도 제자들을 사랑하셨으니까? 얼마나 무공방 스님들의 죽음이 가슴 아팠으면 위험을 알고도 가셨단 말인가 아미타불!”
천장금왕의 말에 장내가 갑자기 숙연해졌다.
자정경이 계속 말했다.
“그러시면서?”
“그러시면서 또 뭐라고 말씀하시었소?”
천검은왕이 급한 성격답게 다그치듯 물었다.
자정경이 천검은왕을 보며 말했다.
“집안을 튼튼히 해야 할 것이라고 했어요.”
“집안?”
천검은왕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안이라면 흑수당 아니오?”
천장금왕이 입을 열었다.
“자낭자께서는 그런 말을 왜 이제야 하시오?”
“워낙 농담을 잘하시는 사부님이어서 그냥 제자 앞에서 잘난척 하시는 줄 알았어요.”
“자…잘난 척?”
“자낭자 말이 약간 심하오.”
천검은왕과 천권동왕이 표정을 굳혔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불똥이 튀어도 크게 튀었을 것이다.
“대법왕님께서 말씀 하신 집안이란 본궁일걸세. 당장 돌아가 혹시 생길지도 모를 비상사태를 대비해야겠네. 단 천룡구십구불은 이곳에 남게. 흑수당을 지키는 일 또한 중요하니까?”
“예 금왕님.”
“시간 없네. 즉시 우린 궁으로 돌아가세.”
천장금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염주를 굴리며 걸어 나갔다.
“패죽일 놈, 아무리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우리가 지 놈에게 바친 식사가 몇 끼고 제공한 잠자리가 몇 일인데 대법왕님을 노리다니.”
천검은왕이 이를 부드득 갈았는데 백쾌섬을 두고 한 얘기였다.
모두가 떠나고 넓은 회의실에 자추동과 자정경 두 사람만 남았다.
자추동이 불안한 얼굴로 서성거렸다.
어느덧 자추동의 가슴속에는 동천몽이라는 거대란 그림자가 깊숙이 자리 잡았다. 숨 막혔던 지난 두 달이었다. 만약 동천몽이 아니었다면 흑수당은 천상각 아니면 흑도무림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가슴 뜨거운 일은 동천몽이 함정인줄 알면서도 와 주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사이 뢰음사가 침공하고 앞길에 뢰음칠혈이란 가공할 고수들이 잠복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고서도 길을 떠났다. 뢰음사가 흉수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서찰로 알려주어도 될 일을 직접 나타났다는 것은 자신을 위로하고 안심시키려는 배려인 것이다. 서찰 한통 받는 것과 동천몽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과는 자추동과 식솔들이 받아들이는 여유는 천지차이다.
‘나무관세음보살!’
마음속으로 제발 별일 없기를 자추동은 기원했다.
“아버지 염려마세요. 우리 사부님 아주 똑똑해요.”
자정경이 가벼운 미소를 짓자 자추동이 버럭 소릴 질렀다.
“넌 제자라는 녀석이 사부가 행방불명 되었는데도 웃음이 나오느냐?”
“난 사부님을 믿어요. 누구도 우리 사부님을 어쩌지 못해요. 그분은 불가사의해요. 두고보세요. 두 발로 멀쩡히 걸어서 소녀 앞에 나타날 테니까요.”
자정경이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걱정하는 모습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산세가 험하고 끝이 뾰쪽하여 마치 하늘의 눈과 같다고 해서 천목산(天目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천목산에서 나는 차는 천지(天池)와 용정(龍井)다음으로 귀하고 비싸게 대접을 받으며 유운봉(流雲峯)은 천하칠대고봉중 한 곳으로 뽑힌다.
워낙 높고 가팔라 구름이 채 오르지 못하고 미끄러진다고 해서 붙여진 유운봉에 한 채의 커다란 장원이 세워져 있었다. 멀리서 보면 구름 위에 지어져 있어 천상의 집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곳은 바로 천하무림의 중심 무림맹이었다.
유운봉을 오르는 길을 한 곳 뿐이다. 사면이 수직 절벽이고 동쪽만 경사가 야트막해 유일한 출입구 인 것이다.
평범한 옷차림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범상치가 않다. 몸에 병기 따위도 지니지 않았고 일신에 가공할 절예를 지닌 것 같지는 더욱 않았다. 단지 먼 길을 온 듯 약간 허름한 행색이었지만 형형한 눈빛이 가슴을 압박한다.
내 노라 하는 명문의 무사들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는데 이 알 수 없는 노인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자신의 의지가 못마땅했지만 일단 방문 목적은 알아야 하겠기에 입을 열었다.
“어…어디서 오셨소이까?”
빌어먹을, 목소리가 떨린다.
도대체 저 노인이 뭔데 내가 이렇게 왜소해야 져야 하는지 무림맹의 위사 진청옥은 불쾌했다. 하지만 속으로 삭힐 뿐 겉으로 드러낼 용기는 더욱 나지 않았다.
“상관량 총관님을 만나러 왔소. 기별을 좀 부탁드리오? 천상각의 동오룡이 찾아왔다고 하면 알 것이오.”
진청옥의 눈이 커졌다.
천상각을 왜 모르겠는가. 중원제일의상가이자 마음만 먹으면 황실까지 쥐락펴락 할 수 있다는 당대제일의 부가(富家)이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일 년에 천상각에서 무림맹으로 들어오는 자금만 해도 상상을 초월한다고 들었다.
“아…알겠소이다. 안에 기별을 넣을테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무림맹 정문은 두 명이 한 시진씩 교대 근무를 선다. 방문자를 맞이하는 것은 선임자의 몫이고 하여 진청옥이 나선 것이다. 그와 같이 근무를 선 가철봉은 신참이었기 때문에 뻣뻣하게 서 있었다.
안쪽 초소로 들어가 잽싸게 신호 줄을 잡아 당겼다. 줄은 무림맹 외곽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운룡각 각주의 처소에 있는 종을 울린다.
슈슈슉!
연속해서 줄을 잡아 당겼고 반 다경이 되지 않아 정문으로 한 명의 회의노인이 나타났다. 손잡이도 은색이고 검집도 은색인 은검 한자루를 왼쪽 옆구리에 멋들어지게 찬 노인은 화산파 소속의 혈매자(血梅子)였다. 그의 검끝에서 폭발하는 이십사수매화검법은 유독 붉다.
진청옥이 손가락으로 동오룡을 가리켰다.
동오룡은 그때 주위 경관을 훑어보고 있었는데 기침 소리에 돌아섰다.
혈매자가 포권의 예를 취했다.
“운룡각주 혈매자라 하오이다.”
동오룡이 마주 허릴 숙였다.
“천상각의 동오룡이라 하오. 상관 총관을 뵙고자 왔소이다.”
“천상각의 동각주님이셨구려. 오신다고 기별을 주시면 이 혈모가 기다리고 있을텐데 어서 드시지요.”
혈매자의 태도가 공손해졌다.
“고맙소이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무림맹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두 사람을 보며 진청옥이 고개를 갸웃했다. 천하제일부호가 수행원 한명 없이, 그것도 도보로 무림맹을 찾아온 것이 뭔가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