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자만은 죽음을 부르고
엄청난 굉음과 더불어 동천몽의 몸이 공격해 들어갈 때보다 더 빨리 퉁겨나왔다. 그리고 눈깜짝 할 사이에 혈부림 무사들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엇!”
“도망쳤다!”
누구도 예상 못한 돌발 사태에 모두가 놀라 외쳤다.
‘차…차력지주라니!’
공원이 눈을 부릅떴다.
차력지주(借力之走), 상대의 힘을 빌려 더욱 빠르게 도망치는 수법이다.
암습 지시와 같이 동천몽의 습성에 대한 몇 가지가 내려왔다. 거기에 보면 절대 피하거나 사술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무식할 만큼 정면충돌을 즐기며 물러설 줄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제대로 싸우기는커녕 시작하자마자 줄행랑이라니 너무 황당한 사태에 공원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뭐…뭣들 하느냐? 어서 쫓아라.”
수하들 또한 너무 충격을 받은 듯 망연자실해 있다가 공원의 외침에 정신을 퍼득 차리며 몸을 날렸다.
“이건 말도 안 돼.”
“대법왕 체면이 있지. 그런다고 첫수부터 토까다니.”
뒤 쫒는 혈부림 무사들도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중얼거렸다.
공원 또한 몸을 날려 바람처럼 동천몽이 사라진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도대체 보내온 정보는 하나도 맞지 않았다.
부친의 방문을 열고 들어선 자청단이 눈을 크게 떴다. 항상 윗목 탁자에 앉아 산판(算板)을 튕기며 그날그날 매출을 정리하고 계산하던 아버지가 없다.
와당탕!
같이 들어온 무사들이 방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벽장문을 열어 살폈고 뒤쪽 쪽문을 열고 안쪽으로 기어 들어갔으며 서재와 벽 사이에 생긴 틈도 들여다보았다.
“없습니다.”
“저 뒤 광에까지 훑어 봤는데 안보입니다.”
무사들이 빈손으로 몰려들었다.
“집안을 샅샅이 뒤져라. 어딘가 숨어 있을 것이다.”
자청단의 명령에 무사들이 일제히 밖으로 흩어졌다.
자청단의 두 눈이 탁자 위에 올려 진 손 떼 묻은 산판을 쳐다보았다. 아버지 말로는 오대 째 내려오는 산판이라고 했다.
자청단은 산판을 거머쥐었다. 이 산판을 쥔 사람이 흑수당의 주인이 된다. 이 산판을 쥐고자 얼마나 노력했던가. 하지만 부친은 절대 자신에게 산판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로 아직은 자신의 재능이 미흡하다는 것이 물려주지 않은 이유였다. 어디 그뿐인가. 동천몽의 세치 혀에 어떻게 넘어갔는지 천상각으로의 모피 거래를 느닷없이 단절했다. 자신들이 모피 거래를 끊으면 천상각도 타격을 입지만 흑수당 또한 자칫 도부가 날 수 있었다.
대규모 거래 선을 새롭게 개척 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자금이 소요된다. 특히 기존의 거래처였던 천상각을 두고 다른 곳으로 옮기면 상대 또한 이상하게 생각 할 것이고 거래를 맺더라도 천상각 과의 거래 때보다도 더 가격을 깎으려 들것이 뻔했다. 워낙 덩치가 큰 모피이기 때문에 그 손해란 상상을 초월한다. 아버지 말로는 절대 손해 없는 새로운 거래처를 만들 자신 있다고 큰 소리쳤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콱!
자청단은 산판을 힘껏 쥐었다.
동천몽의 계산은 뻔했다. 아버지를 이용해 흑수당을 통째 삼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주는 척 하며 흑수당을 도부 위기로 몰아 가볍게 포달랍궁의 자금줄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흐흐! 누구 맘대로!’
가소롭다는 듯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린 산판을 노려보았다.
홱!
문득 자청단이 고개를 들어 문쪽을 쳐다보았다.
아버지를 찾아 나간 무사들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이 새끼들 도대체 뭐하는 거야?”
자신을 돕기 위해 모두 열 명의 무사들이 파견되어왔다. 물론 자신을 도와준 댓가로 적지 않은 돈을 지원하기로 약조를 맺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무사들이 나타나지 앉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다가가던 자청단의 걸음이 멈춰졌다.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는데 여러 개였다. 필시 아버지를 찾으러 나간 무사들이 들어오는 것이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 자청단은 다짜고짜 소릴 질렀다.
“왜 이제 오는 거야? 찾았어. 못찾…”
자청단의 말이 끊어졌다. 문 앞에 부친과 자정경 맨 뒤에 모르는 승려 한 명이 들어서고 있었다.
“한심한 놈.”
탁!
그러더니 손에 들린 산판을 낚아 채갔다.
자추동이 탁자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열 놈 기다리느냐? 모두 시체가 되었으니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자청단이 기겁했다.
“감히 아비를 쫓아내고 네놈이 주인 행세를 하려 들어. 이 애비가 왜 네놈에게 가게를 물려주지 않은 줄 아느냐? 그 어리석음 때문이야. 네놈은 귀가 얇아. 그 따위 놈의 세치 혀 바닥에 놀아나다니 미련한 놈 같으니. 그런 네놈에게 아비가 어찌 수백 년을 이어온 본가를 함부로 맡기겠느냐?”
“선사!”
그러자 승려가 허리를 구부렸다.
“말씀 하십시오. 당주.”
“저놈을 자신의 방에 가두시오. 그리고 일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지켜주시오.”
승려가 뒤로 고개를 돌려 문밖을 향해 말했다.
“자공자를 데려가거라.”
문이 열리고 두 명의 당당한 체구의 승려들이 나타나 자청단의 양팔을 끼었다.
“아…아버지 왜 이러십니까? 이런다고 일이 끝난 줄 아십니까? 머잖아 아버지께서 소자에게 살려달라고 사정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자추동이 인상을 썼다.
“패죽일놈, 아비에게 하는 말 버릇 하곤? 지금 협박하냐? 네놈 믿는 것이 혹시 백대협이 보내주기로 한 무사들 아니냐?”
“아…아버지께서 어떻게?”
“그들은 오지 않는다. 이미 죽었다. 저 분은 바로 포달랍궁에서 오신 덕배선사라는 분이시다. 천룡구십구불의 수장이기도 하지. 널 돕기 위해 오던 백쾌섬이 보낸 무사들은 천룡구십구불에 의해 모조리 도륙당했다.”
백쾌섬과 약속했다. 아버지를 밀어내고 자신이 가주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해주면 백쾌섬을 적극 밀어 주겠다고.
“저…정말입니까?”
“쯧쯧! 어떻게 저런 놈이 장차 흑수당을 이끌어 갈 것인지. 어서 데려가시오.”
두 명의 천룡구십구불이 자청단을 데리고 사라졌다. 존불사로 떠나기전 동천몽은 한 통의 전서구를 포달랍궁으로 보냈다. 자신이 존불사 사건 현장으로 가면 흑수당은 텅 빈다. 동천몽이 생각하기에 일차 승부는 흑수당이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흑수당을 자신이 끌어 안아야 했다. 그런데 자신이 자리를 비우면 필시 변고가 생길것을 예상하고 천룡구십구불을 급히 불러 들인 것이다.
사실 자추동은 동천몽의 조치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너무 지나친 염려였다. 하지만 대법왕의 뜻이기 때문에 감히 이의제기는 못했고 어차피 자신의 안전을 위한 배려인데 굳이 말릴 이유까지도 없었다. 그런데 그의 예측대로 정확히 일이 진행되자 자추동의 표정은 잔뜩 굳어버렸다.
‘도대체 그분의 능력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
몇 일 동천몽과 지내면서 수십번을 까무러쳐야 했다. 워낙 장난기가 다분하고 천성이 진지한 것을 싫어해서 그렇지 유머도 풍부하고 재치가 있었다. 하나 자추동이 가장 놀란 것은 그의 두뇌였다. 어떤 계략이나 계산을 세우는데 자신 같으면 오랫동안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굴리고 쥐어 짠다. 그런데 동천몽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조치를 내렸고 그 조치는 완벽했다.
가히 타고난 지혜의 소유자라고 아니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머리가 나쁜 것과 그런 전략적 지혜는 다르다지만 그저 아연할 따름이었다.
‘그나저나 백쾌섬이란 자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사실 동천몽에게 조용히 물어보았다. 최소한 동천몽은 뭔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천하제일현상금 추적자 아니냐고 지극히 평범한 대답만 했다. 뭔가 알고 있음에는 분명했는데 입을 열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밖으로부터 또다시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말했다.
“당주님 멀리 천상각에서 손님이 찾아왔사옵니다.”
“으허헉!”
자추동이 숨이 넘어 갈듯 놀랐다.
‘어…어찌 이런 일이!’
“왜 그래요 아버지?”
안색이 하얗게 변한 자추동을 자정경이 염려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미…믿을 수가 없다. 설마 진짜로 대법왕에게는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존재한다더니 사실이란 말인가.”
사실 동천몽이 떠나면서 천상각에서 손님이 찾아 올 것이라고 미리 귀띔해 주었다.
그런데 정확히 찾아 온 것이다.
‘으음!’
자추동은 숨을 들이마셨다. 동천몽은 천상각에서 사람이 오면 대처할 방법까지 소상히 가르쳐 주었다.
“아버지 도대체 천상각 사람들이 왔다는 말에 왜 그렇게 놀라세요?”
자정경은 부친이 천상각 사람들 방문으로 놀라는 줄 알고 있었다.
‘아아! 정말 믿을 수 없는 분이시다. 정녕 신비스런 분이시도다!’
자추동은 내심 끝없이 동천몽의 능력에 감탄을 했다.
“책임자는 누구더냐?”
“여추량 총관이옵니다.”
자추동의 표정이 굳어졌다. 동천몽 또한 총관이 올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자추동이 덕배선사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히며 무언의 광채가 강렬히 교차했다. 뭔가 무언의 신호를 주고받음이 분명했는데 덕배선사가 조용히 실내를 빠져나갔다.
“안내 하거라.”
자추동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수하가 앞장섰다.
“너도 따라오너라.”
자추동이 자정경을 돌아보며 말했다.
수하를 따라 빈청으로 들어서자 여추량이 의자에 앉아있다가 일어섰다.
“핫핫핫! 여총관 아니시오이까?”
여추량과는 구면이었다.
여추량이 허리를 정중히 구부렸다.
“여모가 자당주님을 뵈옵니다.”
“반갑소. 정말 반갑소. 이게 몇 년 만이오?”
두 사람은 탁자를 놓고 마주 섰다.
“언젠가 백룡퇴에서 한번 뵙고 처음이니까 칠팔년 된 것 같소이다.”
“그리 된 것 같습니다. 여전히 건강해 보이십니다.”
“그렇소이까? 고맙소이다. 자 앉읍시다.”
자추동이 자리를 권했고 자정경은 부친 곁으로 앉았다. 시녀가 차를 내왔고 세 사람은 차를 마시며 웃으며 가벼운 담소를 나눴다. 하지만 입만 움직일 뿐 두 사람의 시선은 상대를 살피느라 부지런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하하.”
“헛헛헛!”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빈청을 울렸고 표정은 무척 밝았다. 마치 오랜지기가 만난 듯 스스럼없는 농담까지 주고받는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자정경은 부친과 여추량 사이에 강한 기류가 형성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두 사람의 기 싸움과 같은 것이었는데 농담 속에 서로의 생각과 심리를 읽으려는 치열한 신경전이었다.
‘심상치 않구나!’
자정경은 조용히 숨을 들어 마셨다. 자신까지 가슴이 조여 드는 것 같았다.
대체적으로 특사(特使)나 사자(使者)는 평범한 일로 방문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토록 오랫동안 가벼운 농담과 즐거운 얘기를 오랫동안 주고받는 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 또한 본론을 꺼내기가 쉽지 않을 만큼 중대한 사안이라고 봐야 했다.
두 사람의 우스갯소리는 한동안 계속 되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에서부터 장사꾼으로 살아오면서 겪었던 황당무계한 경험담 등을 적나라하게 펼쳐 놓았다.
“당주님.”
첫 운은 여추량이 떼었다.
“말씀하시오. 여총관.”
자추동이 미소를 거두며 정색했다.
여추량이 똑바로 자추동을 보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소문을 들었사옵니다. 소문이라는게 믿을 것은 못되지만 그래도 하도 기괴망측해서 말입니다.”
“무슨 소문이기에 여총관께서 직접 이렇게 먼 길을 오셨단 말이오?”
“허참!”
여추량이 일부러 말을 꺼내지 않고 어이가 없다는 듯한숨을 내쉬었다. 자추동을 안달케 하려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자추동은 이미 여추량의 방문 목적을 동천몽에게 귀띔 받았기 때문에 전혀 초조해하거나 궁금해 하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러시오? 어서 말씀을 하셔야.”
“입에 담기도, 세상에 자당주께서 본가와 모피 거래를 끊겠다고 하셨다는 악의적인 소문이 나돌아서 말이오?”
“악의적인 소문이 아니오. 그건 진실이오.”
여추량의 눈이 커졌다.
자추당이 입을 열어 말했다.
“정확히 말씀드리지요. 이미 원국의 모피상들과 거래 계약을 맺었소이다. 가격 또한 천상각 보다 조금 더 받기로 했고 이년에 한 번씩 의무적으로 가격을 올리는 파격적인 조건이지요.”
“다…당주.”
여추량의 얼굴이 본격적으로 변했다.
두 사람의 탐색전은 끝나고 실전으로 접어든 것이다.
“어찌 그런 터무니없는 파기를, 본가와 수십 년을 거래한 당주께서 우리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런 결정을 내린단 말이오.”
“핫핫! 이해하시오.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서 말이오. 돌아가셔서 동오룡 각주님께 이 자모가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고 전해 주십시오.”
“재고 해주실 수 없겠소?”
여추량의 표정이 굳어졌다.
“여총관 이미 끝난 일가지고 우리 입 아프게 떠들지 말고 모처럼 먼 길 오셨으니 오늘 밤 이 자모와 찐하게 한잔 합시다. 수행원들도 같이 섞여서 말이오.”
그리고 밖을 향해 고개를 돌려 외쳤다.
“이봐라. 오늘밤 여총관을 환대하는 대대적인 잔치를 열테니 준비하라 이르라.”
“당주.”
갑자기 여추량의 목소리가 커졌다.
두 눈에서 붉은 냉기가 쏟아져 나왔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리오. 거래선을 원상 복구 시키시오.”
자추동의 표정이 굳어졌다.
여추량의 지금 말은 분명한 명령이었다.
“여총관 지금 뭐라고 했소? 이 자모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오? 헛헛헛! 당신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구려. 난 당신의 부하가 아니오. 먼 길을 오더니 피곤하여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구려.”
“다시 부탁하오. 거래를 회복하시오.”
“그 얘긴 그만 입에 담고 싶소. 이미 끝난 일이니.”
“당주, 흑수당이 사라질 수도 있소?”
“핫핫핫핫!”
자추동이 고개를 쳐들고 웃음을 터뜨렸다.
느닷없는 광소에 여추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추동의 웃음이 던져주는 의미는 두려움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자신의 경고가 가소롭다는 뜻이었다.
“혹시 데리고 온 무력(武力)을 말하는 것이오?”
흠칫!
여추량이 소스라쳤다. 자신이 데리고 온 낭도채 무사들은 장원 밖에 은신해 있다. 자신의 신호만 떨어지면 곧바로 흑수당을 접수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그런데 자추동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잘됐구려. 알고 있다니 얘기하기가 훨씬 수월하겠군요. 여전히 거래를 다시 회복시킬 의향은 없으신게요?”
“없소.”
자추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앉아 있는 여추량을 날카로운 눈으로 보더니 피식 웃음을 짓더니 문 쪽을 쳐다보았다.
“선사 들어 오시오.”
여추량이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리고 덕배선사가 들어왔다. 가사 몇 군데가 찢겨지긴 했지만 맨발로 들어서는 그의 전신에서는 가혹한 냉기가 실내를 뒤덮었다.
흠칫!
여추량은 덕배선사의 냉오한 기세에 숨을 들이 마셨다.
덕배가 힐끔 여추량을 보며 말했다.
“아미타불! 여 총관이 데리고 온 무사들을 모조리 추살 했소이다.”
꽈당!
여추량이 너무 놀라 일어나면서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수고 했소이다. 피곤하실텐데 그만 쉬십시오.”
덕배선사가 합장을 하고 방을 나갔다.
여추량의 표정은 돌덩이가 되어 있었다.
자추동이 웃으며 말했다.
“이것이 내 의지요. 그리고 그분의 의지이고?”
“그분이라면?”
“있소. 오늘의 모든 일을 앉아서 꿰뚫어 보신분이시오. 한마디로 전지전능하다고나 할까요.”
자추동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감히 그분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기조차 송구하다는 듯 최대한의 공손함이었다.
‘어느 누가 있어 천하의 자추동을 저토록 감동으로 빠트렸단 말인가!’
자추동이 말했다.
“모든 것 잊고 이왕 오셨으니 아까 말했듯 오늘 저녁 나와 술 한 잔 하십시다.”
여추량이 의자를 세우고 다시 앉았다.
그리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금까지는 파죽지세였다. 거칠것 없이 달려왔고 마음 먹은 대로 이루어 졌다. 그런데 제동이 걸린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지금 추진하는 일에 제동이 걸려서는 절대 안된다.
불길한 그림자가 가슴 한 구석을 메우기 시작했다.
동천몽이 시키는 대로 동쪽으로 이십여리 오자 과연 용 한 마리가 누워 있는 것 같은 바위가 나타났다. 꾸불꾸불한 바위의 길이만 해도 대략 이십여장이 될 만큼 컸다. 더구나 오랜 세월의 풍상을 거치느라 이끼까지 끼어 있어 얼핏 진짜용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전설에 의하면 석룡대는 옆을 지나는 형강에 사는 수룡이 하늘로 오르다 벼락을 맞고 떨어져 돌이 되었다고 한다.
일목은 석룡대 주위를 서성거리며 존불사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지금쯤 올 때가 되었는데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시 가볼 수는 더욱 없었다. 다른 약속과 달리 이렇게 생사가 결린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조금 늦는다고 해서 함부로 자리를 비우거나 떠나서는 절대 안 된다.
아직까지 두려움을 모르고 살아온 일목의 얼굴에 초조한 빛이 출렁거렸다.
푸쉬!
지나친 긴장 탓일까. 아까부터 자꾸 방귀가 나온다.
방귀가 잦으면 뒷간을 찾게 된다. 조금씩 아랫배가 아파오기 시작하더니 뒤가 마렵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리를 떠서는 안 된다. 그 사이 동천몽이 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목은 엉덩이에 힘을 주며 초조히 기다렸다. 급기야 아랫배에서 물이 흐르는 듯한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이제는 동천몽의 신변염려에서 뒷간 걱정으로 관심이 기울어졌다.
급속히 마려워 오는 것이 사리(瀉痢)다. 천하에 어떤 장사도 사리만큼은 막아내지 못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사리는 자칫 스며 나올 수도 있었다.
‘제발!’
일목은 엉덩이에 힘을 주고 양다리를 팔자로 꿰며 몸에 대해 사정을 했다.
꾸르르!
“으큭!”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급하긴 하지만 은폐물도 없는 석룡대에서 볼일은 볼 수는 없었으므로 일목은 주위를 살폈다. 사리이므로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금방 앉았다 일어나면 끝날 것이기 때문에 볼일을 보기로 결심했다.
좌측 숲속으로 어그적 거리며 걸어갔다. 꼬마아이가 아장거리며 걸어가는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한걸음 한 걸음 정성을 다했다. 아차하면 바로 흘러나오는 것이 사리다. 더구나 여벌의 의복도 준비해오지 않았다. 만약 흘렸다가는 알몸으로 다녀야 할 판이다.
사삭!
한발 한발 옮기는 것에 신중을 기했다. 호흡과 다리의 움직임을 일치시켜야 한다. 호흡과 다리의 움직임이 어긋나면 곧바로 흘러내리는 것이 사리의 특성중 하나다.
석룡대에서 숲속까지 거의 오장도 되지 않는데 마치 십리는 되는 것 같았다. 겨우 숲속에 도착한 일목은 조심스럽게 아래 춤을 더듬었다.
다 왔다는 안도감에 함부로 힘을 빼거나 방심했다간 막판에 실수를 하게 된다는 것이 지난 시절의 경험이었다.
여전히 엉덩이는 바짝 끌어 올렸고 다리는 팔자로 단단히 꼬여 있었다. 일목은 호흡을 반쯤 내 쉬며 조심스럽게 아랫도리를 내렸다. 허리를 숙이며 내렸다가는 엉덩이 힘이 풀려 흐르고 만다.
스르르!
바지가 발목까지 내려갔고 일목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동시에 요란한 소리를 흘리며 배설이 시작되었다.
‘아아!’
자신도 모르게 환희의 감탄이 흘러나왔다. 혹자는 최고의 쾌감을 성적 쾌감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목의 경험에 의하면 그건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무식한 놈들이 하는 개소리다. 배설의 쾌감처럼 화끈하고 통쾌한 것은 없다.
미치도록 급한 배설을 참고 또 참아 꿈에도 그리던 뒷간을 찾아 바지를 내릴 때, 그리고 흘러내릴 때의 그 시원하고도 절묘한 쾌감은 필설로 형용할 수가 없다. 그 때만큼은 어느 대부호도 안 부럽고 더더욱 황제 따위는 부럽지 않다.
쿵!
두 눈을 지그시 감고 환상적인 쾌감에 젖어 있을 때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일목 어딨느냐?”
‘이 목소리는!’
동천몽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평소처럼 쩌렁쩌렁한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가는 소리였다.
하지만 뒷일이 끝없이 배출 되고 있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이라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일목…일목아.”
동천몽이 애타게 찾고 있었다.
“개…개자식이 어딜 간 거야. 꼼짝 말고 여기 처박혀 있으라고 했는데…일목 어딨느냐?”
주르륵!
“우욱! 어디에 쳐 박혔느냐. 빠…빨리 나오지 못하…겠…느냐. 크으으.”
목소리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대…대법왕님 소승 여기 있사오…옵니다.”
목소리를 듣고 동천몽이 나타났다.
동천몽은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 거리고 있었는데 처음 보는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퍼억!
가까이 다가온 동천몽이 그대로 일목에게 쓰러졌다.
동천몽의 무게에 의해 일목은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꽈직!
뜨거운 기운이 엉덩이를 덮었다.
일목의 품에 안긴 동천몽이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목 …내 말 잘 들어라. 동북쪽으로 가라. 여기서 오십리쯤 가다보면 천포지각(天布池閣)이 있…다. 그… 그곳으로 날 어서 데려가…라.”
동천몽의 입에서 가느다란 핏물이 넘어오고 있었다.
사실 긁은 핏줄기 보다 실낱처럼 얇은 핏물이 상태의 엄중함을 말한다.
“뭐…뭐하느냐? 시간 없다… 놈들이 뒤쫓아 오고…있느…니라.”
“아…알겠사옵니다.”
바지를 올릴 틈도 없었다. 동천몽이 가슴에 안겨 있고 양손으로 안았으므로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지체해서는 안된다는 다급한 목소리에 일목은 그대로 일어났다.
‘아미타불!’
안타까운 불호를 되뇌이며 일목은 몸을 날렸다.
휘이이!
발목에 걸린 바지가 바람에 펄럭거렸고 엉덩이에 묻은 사리가 분수처럼 허공에 흩뿌려졌다.
‘달마대사에게 제자 혜가가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신법이 무엇입니까? 달마는 이에 차력지주라고 대답했다. 그때까지 혈응(血鷹)의 날개 짓에서 응용된 응조삼력을 가장 빠르다고 여기고 있던 혜가는 차력지주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차력지주란 두 개의 힘이 충돌하는 순간의 반탁력을 이용해 날아가는 것인데 그 빠름이란 지상의 어떤 조류나 동물도 흉내 내지 못한다. 단 차력지주의 단점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거리의 한계성이라는 것이다. 상태의 힘과 내가 갖고 있는 힘을 일거에 쏟아 붓기 때문에 이십리가 한계이다’
동천몽은 그래서 일목을 이십리 밖에 있는 석룡대에 머무르도록 했다. 일목이 자신을 안고 도망치는 것보다 차력지주를 이용하는 도주가 빠르기 때문이다. 이십 리면 최소한 혈부림 무사들과 십리정도의 거리를 벌릴 수 있다.
자신까지 안고 달리는 일목의 신법은 당연히 평소에 비해 느려질 것이다. 그래서 혈부림 무사들에게 따라잡힐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일목이 어느 정도 도망치다 잡히느냐 였다. 비록 자기 편의적인 계산이었지만 잘하면 천포지각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계산이 섰다. 약간 무리라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방법 말고는 달리 생존 전략이란 전무했다.
일목의 신형이 갈수록 빨라졌다. 처음에는 올리지 못한 바지가 신경쓰여 약간 머뭇거렸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적응이 된 것이었다. 즉 용기가 생기고 뻔뻔해 진 것이었다.
다만 발목에 바지가 걸려 지면을 박찰 때 조금 불편했다.
팟!
한 순간 일목의 눈이 빛을 뿌렸다. 이왕지사 이렇게 될 바에는 좀 더 과감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더구나 동천몽의 상세를 보아 한시가 급했다.
바바바!
허공을 날아가던 일목의 양발이 움직였다. 발목에 걸린 바지를 벗어 버리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패애앵!
바지가 바람에 멀리 날아갔다. 다행히 윗도리가 길어 어느 정도 하체를 가렸지만 걸리적거리던 바지가 벗겨지자 땅을 박찰 때 더욱 힘을 쏟을 수가 있었다.
슈우우!
일목의 신형이 더욱 빨라졌다. 눈 깜짝 할 사이에 두 개의 산을 넘었다. 하지만 점차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조금씩 동천몽이 큰 부담으로 작용하면서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편 일목의 품에 안긴 동천몽은 정신까지 잃지는 않았다. 거대한 폭발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데다 그나마 남은 진기마저 차력지주를 이용해 이십 리를 도주하는데 거의 쏟아 몸의 거의 탈진 상태에 놓여 있었었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어…어디냐?”
“글쎄요. 이십 리는 온 것 같습니다.”
삼십리 남았다.
삼십리가 이제 자신의 생사를 쥐고 있다.
동천몽이 상체를 세워 좀더 편히 안겼다. 그러다 무심결에 아래를 내려보다 말고 기절할 듯 놀랐다.
“허거걱!”
일목이 몸을 날리며 물었다.
“왜 그러시옵니까? 어디 편찮으십니까?”
“아…아랫도리를 벗었지 않느냐?”
이를 지그시 깨문 일목은 사실대로 전모를 말해주었다. 모든 얘기를 들은 동천몽이 헉헉 거리며 날아가는 일목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보니 아까부터 기이한 냄새가 맡아졌다. 하지만 워낙 다급한 상황이어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냄새의 원인이 밝혀졌다.
“소…송구하옵니다. 냄새가 고약하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소서.”
“아니다. 괜찮다.”
동천몽이 괜찮다라고 말하자 일목은 더욱 힘을 내어 달렸다.
동천몽은 일목의 품에 안겨 운기를 취해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세가 워낙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데다 몸속의 내상이 심한 때문이었다. 내상이 가벼울 때는 운기조식으로 치료가 가능하지만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약물과 병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무공을 잃거나 주화입마라는 무림인에게는 사형선고가 내려지게 될 수도 있었다. 몇 번 운기를 시도하다 효과가 없음을 느끼고 동천몽은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희망은 너무 어이없게도 사라졌다. 일목이 물이 흐르는 개활지를 횡단하고 있을 때 뒤로부터 파공음이 들렸다. 누군가 자신을 향해 공격해 오고 있음임을 직감한 일목의 신형이 벼락처럼 돌아서며 좌장을 뻗었다.
콰앙!
커다란 굉음이 들리며 일목이 뒤로 휘청 물러났다.
공격을 한 사람은 공원이었고 그 뒤를 벌떼처럼 혈부림 무사들이 따라내렸다.
혈부림 무사들은 거친 숨을 쉬며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처억!
일목이 땅에 내려서자 동천몽 또한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하고 있음을 느끼고 허리를 세웠다. 일목의 품에서 내려선 동천몽이 혈부림 무사들을 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방법이라고는 일목이 이들을 막는 틈을 이용해 자신의 두발로 이동하는 것뿐이었다. 일목이 일류고수들 백 명을 상대하기란 불가능했다. 그건 곧 자신의 도주 역시 무척 어렵다는 의미였는데 동천몽의 얼굴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소승 생각은 접고 어서 떠나시지요.”
일목은 전음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미 적들도 이쪽에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그 것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동천몽이 앞을 막아선 일목을 향해 말했다.
“미안하구나.”
일목이 황송하다는 듯 시선을 앞에 둔 채 허리를 구부렸다.
“아…아니옵니다. 소승을 믿으십시오.”
“반드시 살아야 한다. 나 또한 반드시 살아 날것이다.”
동천몽이 힘주어 말했다.
“우리 둘 절대 죽지 말자꾸나.”
“물론 이옵니다. 저보다 대법왕님이야 말로 절대 살아나셔야 합니다. 소승이야 어느 정도 살았지만 대법왕님께서는 이제 막 피어나는 인생 아니옵니까?”
그 와중에도 일목은 엉뚱한 소릴 해댔다.
“꼭 살아서 청춘을 즐기십시오.”
일목의 말이 워낙 진지했기 때문에 동천몽은 웃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성의가 있는데 침묵할 수는 없었다.
“고맙구나. 꼭 그렇게 하겠다.”
“흐흐흐! 모두 덤벼라. 진정한 배교의 무예가 어떤 것인지 오늘 똑똑히 보여주마.”
전신의 진력을 끌어올리려던 일목이 흠칫했다.
혈부림 무사들이 경악의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던 일목이 멈칫 했다. 그제 서야 자신이 아랫도리를 입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내들끼리 장부의 상징을 조금 보여주는 것이야 부끄러울 일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상징은 사내라면 누구라도 감탄하고 부러워 할 만큼 크다. 그것을 반증이라도 하듯 이미 혈부림 무사 중 몇 명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부러워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침을 삼키며 나직이 탄성을 자아내는가 하면 적대관계만 아니라면 그토록 크게 만드는 어떤 비법이라도 있느냐고 물을 것 같은 눈치였다.
“뭘 그렇게 넋을 놓고 있느냐? 어서 쳐라.”
공원이 일목의 물건에 넋이 빠져 있는 부하들을 일깨웠다.
공원의 일깨움에 그제 서 야 정신을 차린 혈부림 무사들이 살기를 피워 올렸다.
“개자식 더럽게 크구나.”
“지금 시위 하는 거야 뭐야? 다 큰 새끼가 왜 하의는 벗고 다니고 지랄이야.”
질투의 발로라고 일목은 애써 자위하며 동천몽을 향해 말했다.
“가십시오.”
“일목 힘내라. 너만 믿는다.”
동천몽이 뒷걸음을 쳤다.
“어딜!”
한명의 무사가 좌측으로 빠져나가며 동천몽을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새 일목이 그 앞을 가로막으며 일검을 뿌렸다.
쇄액!
뻑!
“큭!”
혈부림 무사가 처음 몸을 날렸던 자리로 되돌라 갈 만큼 일목의 공세는 강했다.
공원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눈이 하나 뿐인 외모에서부터 이미 범상치 않음을 간파했다. 더구나 전설의 배교 운운에 고수임을 직파한 것인데 부하와 일초의 겨룸을 보며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 사이 동천몽은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뛰다 걷다를 반복했는데 무척 힘이 들어보였다.
“외눈박이 조심해라.”
“물건 큰 놈치고 센 놈 못 봤다.”
혈부림 무사들이 달려들었고 일목의 신형이 떠올랐다.
“헉!”
혈부림 무사들이 올려다보며 놀랐다. 밑에서 쳐다보는 일목의 물건은 더욱 커보였기 때문이었다.
콰아아아!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듯 자신의 하체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하는 혈부림 무사들을 향해 검을 쓸어갔다.
고수들끼리 싸움에서 백지 한 장의 차이는 크다. 그리고 그런 한 장의 차이가 생사를 결한다. 아무리 일목의 상징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간다. 그것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남자의 본능이자 시샘이었고 그래서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데도 십여초 동안은 일목에게 계속 밀렸고 끝내 사망자까지 발생하고야 말았다.
“이 쳐 죽일 놈들아 모두 정신을 어디다 놓고 싸우느냐? 똑바로 하지 못하겠느냐?”
공원이 욕설을 내 뱉었다.
달이 떠올랐다. 구름이 떠 있어 세상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했다. 말로만 들었을 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천포지각이다. 단지 어디에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림잡아 걸어가고 있었다.
일목과 헤어 진지 두 시진이 조금 넘었다. 아직까지 적의 추격이 없는 것을 보면 일목의 꽤 오랫동안 그들을 막아 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정도 오래 막고 있으려면 상당한 부상을 각오해야 할 것이었다.
사람에게는 직감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동물적인 감각이며 거의 맞아 떨어진다. 처음 무공방 승려들 살해사건을 접했을 동천몽이 느껴진 것은 불길함이었다.
마치 자신을 끌어들이기 위한 모종의 함정이라는 낌새를 떨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런 느낌이 들었던 첫째 이유는 그들이 운반해 오던 경전이었다. 그들은 해마다 천축을 방문하여 부처님의 설법이 담긴 중요한 경전을 빌려오고 되돌려준다. 이번에 그들이 가져오는 경전은 과물해동경이라는 것으로 부처님께서 직접 자신의 말을 목각으로 남겼다는 경전인데 포달랍궁에게는 중요하지만 무림인들에게나 산적들에게는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또한 무공방 승려들이 무예를 모르고 그들의 철저히 구도자적 삶과 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만 한 사람은 다 알기 때문에 누구도 그들에게 칼 따위를 겨누거나 공격성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들의 청빈성과 안심입명(安心立命)길은 만인으로부터 공경의 대상이다.
함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제자들 죽음을 모른 체 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함정이라면 어떤 종류의 것일까였다. 자신을 존불사로 끌어들인 후 많은 고수들을 불러 포위하는 방법일지 아니면 어떤 기관이나 진법을 설치해 놓고 걸려들기를 기다릴지 등 별 가능성을 다 추려보았다. 동천몽이 생각해낸 함정의 방법은 무려 서른 가지였는데 무상탄독의 함정이 기다릴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더욱 완벽히 당한 것이었다.
문득 눈앞으로 백쾌섬의 아름다운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장사꾼이었다. 그러다보니 어려서부터 부친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다시피 보며 성장했다. 그중 자신의 눈에 비친 두드러진 특징 중 첫째는 인정사정없다는 것이다. 거래직전까지는 심사숙고 하지만 일단 거래가 이뤄지면 뒤는 돌아보지 않는다. 또한 상대의 어떤 사정도 봐주지 않는다. 아무리 울고불고 사정해도 외면하고 당신의 이익을 철저히 챙긴다.
두 번째는 불신(不信)이었다. 절대 아버지는 상대를 믿지 않는다. 설혹 거래 상대자가 먼 친척이라고 해도 믿지 않는다. 장사꾼에게는 친구란 없고 오로지 적 만 있다는 것이 부친의 설명이었다. 장사꾼에게 친구란 오로지 사기꾼일 뿐이며 세상은 적 만 있다는 극단적인 사고를 지녔다.
그런 영향 탓인지 동천몽은 사람을 잘 믿지 않는다. 어쩌면 부친에게 배웠다기 보다는 닮았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지도 몰랐다. 아버지께서 한 때 자신을 귀여워했던 것은 당신을 가장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 백쾌섬을 만났을 때 느낌이라는 것이 그다지 즐겁지 못했다. 마치 숙명적인 어떤 적수를 만난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그에게는 단 한마디의 가슴에 담긴 말도 꺼내놓지 않았다. 의례적인 대화 말고는 심도 있는 얘기는 피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무미선사를 시켜 그의 뒤를 추적도록 했다.
그런데 추적에 나선 무미선사가 가져온 정보라는 것이 누구라도 알고 있는 천하제일현상금 추적자라는 것뿐이었다. 동천몽이 판단하기에 그것은 대내외적인 신분일 뿐이었다. 현상금추적자라는 신분 안에 또 하나의 어떤 것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 백쾌섬에 대한 동천몽의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어쩌면 자신의 철저함이 오히려 그에게 빌미를 제공해 주었는지도 몰랐다. 지난 몇 개월 같이 있으면서 백쾌섬은 자신의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 그중 천장금왕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나 뢰음사를 이용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동천비의 야욕을 진압한 것 등을 통해 자신의 뛰어남을 가장 가까이서 보고 만 것이다. 결국 두려움을 느낀 그가 이렇게 칼을 뽑아 들고 만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번 사건은 자신이 자초한 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척!
부지런히 산길을 걸어가던 동천몽의 발걸음이 세워졌다.
때마침 달이 구름 속을 벗어나 주위를 비추었는데 앞을 가로막고 선 사람은 한 자루 검을 든 잿빛 승포의 인물이었다.
혈부림의 림주인 공원이었다.
동천몽의 표정이 굳어졌다. 공원은 부상을 입은 듯 옷자락 여기저기가 찢어져 있었다.
어쨌든 그가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일목의 방어가 무너졌다는 뜻으로 봐야 했으므로 가슴이 아파왔다. 자신을 위해 싸우다 죽은 것이다.
동천몽은 내심 길게 한숨을 쉬었다. 단 한 번도 일목에게 따뜻하게 대해준적 기억이 없었다. 걸핏하면 무식하다고 타박을 했고 손찌검을 했다. 심지어 자신의 감정의 기복에 따라 분풀이 상대가 되기도 했으며 돌이켜 보면 마음을 다해 거두어 본적이 없었다.
그래도 일목은 자신을 존경했다. 그것은 가식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난 존경이었다. 만경의 사주를 받아 적지 않은 포달랍궁의 제자들 목숨을 거둔 자신의 죄를 간단히 사하고 놓아준 동천몽의 배려에 완전히 감동 받은 것이다. 물론 그런 일련의 조치는 고도로 치밀하게 세운 동천몽의 잔머리였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동천몽을 그때부터 진심으로 받들고 충성을 다했다.
“죽었느냐?”
그래도 직접 듣고 싶었다. 마음속으로는 절대 죽지 않았다는 말이 공원의 입에서 나오길 기대했다.
“아니오. 최소한 내가 그 자리를 벗어 날 때까지는 살아 있었소. 하지만 지금쯤은 죽었을 것이오. 어쨌든 대단한 수하임은 분명했소. 무려 이십 여명에 가까운 내 수하들이 그의 손에 죽었으니.”
‘일목!’
동천몽은 나직히 이름을 불러보았다.
왜 사람은 곁에 있을 때 잘해주지 못할까. 그것은 부친도 마찬가지였다. 곁에 있을 때는 마음으로 받아주지 못하고 떠나고 난 뒤에 항상 잘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를 했는데 자신도 그러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좀 더 잘해주었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후회가 더욱 가슴을 짓눌렀다.
“어쨌든 그대가 일목이 친 방어선을 벗어 날 때까지는 살아 있었다는 얘기 아니냐? 그건 곧 그의 죽음을 직접 확인한 건 아니라는 뜻이고?”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설마 살아 있으리라고 생각 하시지는 않겠지요.”
희망이 생겼다. 죽음이란 목격하지 않는 한 장담 할 수 없는 신기한 것이었다. 죽은 사람도 살아나고 살아 있는 사람도 돌아서면 죽는 곳이 생사의 오묘한 모습이었다. 동천몽은 일목이 부디 살아 있기를 진심으로 마음으로 빌었다.
“대법왕님의 몸은 지금 정상이 아닐 것이오?”
“그렇다.”
“무상탄독의 폭발에 죽지 않았다는 것만 해도 전설이오. 하지만 생명은 건졌으나 몸 상태는 보통 사람보다 못할 것이오. 더구나 차력지주를 펼쳤으니 마지막 남은 진기까지도 소모했을 것이오?”
“너무 정확히 알고 있구나.”
“고통 없이 죽여주겠소.”
“고맙다.”
공원이 다가왔다.
다가오는 공원의 발자국 소리가 고요한 산속이어서 인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동천몽은 다가오는 공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공원 역시 동천몽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다가오고 있었다.
척!
공원이 삼장의 거리를 두고 섰다.
검을 쥔 손으로 포권을 취했다.
“영광입니다. 대법왕의 삶의 종지부를 저 같은 미천한 인간이 찍을 수 있게 되다니 가슴이 떨리옵니다.”
피식!
동천몽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 새끼 더럽게 뽀대 잡네. 죽이려거든 빨리 죽여 새끼야.”
스으으!
공원이 늘어뜨리고 있던 검을 서서히 들어올렸다.
팟!
그때 공원의 뒤쪽을 보며 동천몽이 눈을 빛냈다.
그것은 누가 봐도 공원의 뒤쪽에 사람이 나타났음을 증거 하는 행동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의 변화였지만 공원 같은 절정의 고수가 놓칠리 만무했다. 아무런 기척이 없는 걸을 보아 고수이다. 동천몽은 거의 허수아비상태이므로 등 뒤 접근해오는 자를 신경 써야 한다.
홱!
공원이 돌아섰는데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공원이 돌아서는 순간 동천몽이 전력을 다해 도약했다. 단 한 번의 기회였다. 이걸 놓치면 모든 건 끝장이라는 생각에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했고 공원이 속았다는 것을 느끼고 돌아섰을 때 그의 허리는 동천몽의 양팔에 끼어 있었다.
꽈당!
동천몽의 밀치는 힘에 공원은 뒤로 자빠졌다.
허리를 끌어안았던 동천몽의 양손이 빠르게 풀리며 공원의 양 손목을 굳세게 거머쥐었다. 그와 동시에 공원의 가랑이 사이로 발을 집어 넣고 완전하게 옭아 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