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모자지간
동천완이 녹풍원을 벗어나다 말고 발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렸는데 능씨가 여전히 꽃밭에서 잡초를 메고 있었다. 자신이 올 때는 없었다.
“뭐하세요. 어머니.”
능씨가 허리를 펴고 돌아서다 동천완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며 꽃밭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리고 허리를 반쯤 구부리며 말했다.
“처…천완이구나.”
“지금 뭐하는 거예요. 아들에게 굽실거리는 거예요. 소자가 뭐라고 그랬어요. 당당해져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러지 말라니까요?”
동천완이 언성을 높였다.
“아들한테 굽실 거리는 엄마가 어디있어요. 저는 어머니 아들이란 말입니다.”
능씨가 빤히 바라보았다.
“그…그래.”
“한번만 소자에게 굽실거리면 그땐 정말 화낼 것입니다. 소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러다 꾸중도 하고 그러시란 말에요.”
“그…그래.”
여전히 능씨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동천완이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깊숙한 시선으로 능씨를 쳐다보던 동천완이 조용히 말했다.
“사랑해요. 어머니.”
깜짝 놀라는 능씨를 보며 동천완이 베시시 웃으며 등을 돌렸다.
사라지는 동천완을 쳐다보는 능씨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유난히 살갑고 정이 많은 아이였다. 동천비를 비롯한 다른 아들들로부터 행패를 당할 때마다 달려와 막아주었다. 그리고 항상 형들을 대신해서 자신이 용서를 구했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작년에 어떻게 생신을 알았는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설연화 한 다발을 선물해 주었다.
설연화는 말 그대로 눈 속에서 핀다. 그래서 좀체 찾기도 어려운데 어디서 구했는지 양팔로 가득 가져와 주었다. 눈이 자주 오지 않는 지역적 특성을 감안 한다면 아마 설연화를 얻기 위해 높은 산을 이잡 듯 뒤졌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자 너무 가슴이 뜨거워졌고 밤새도록 울었다
“천완아.”
저만치 가던 동천완이 걸음을 멈추고 빙글 돌아섰다.
“그렇게, 지금처럼 그렇게 부르는 거에요. 네 어머니?”
“힘 내거라.”
동천완이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너무 걱정마세요. 또 봬요.”
동천완이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능씨의 볼에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신의 처소 수산당(水山堂)으로 돌아오자 두 명의 무사가 경장차림으로 서 있었다.
“떠날 준비는 되었느냐?”
“네, 공자님 지시대로 건포와 은자만 챙겼습니다.”
“잘했다. 괜히 이것저것 챙겨봤자 먼 길에는 고생만 재촉한다. 그럼 어서가자.”
동천완이 무사 한 명이 내주는 봇짐을 짊어졌다.
이윽고 세 사람은 수산당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정문을 나서자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위사조장이 어딜 가느냐고 목적지를 물었지만 동천완은 잠깐 다녀올 곳이 있다며 얼버무렸다.
천상각의 영역을 벗어난 세 사람은 관도로 접어들었다.
관도는 텅 비었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공자님.”
“말하거라.”
왼쪽의 무사가 입을 열었다.
“본가가 위기를 벗어나는 것은 이 길 뿐 이온지요?”
“없다.”
동천완이 단호히 말했다.
“구대문파의 힘을 아느냐? 무림맹에는 그들뿐 만 아니라 구대문파와 어깨를 나란히 견줄만한 사대가문과 수백 개의 군소문파들이 가입되어 있다. 원래 무림맹의 창건 목표는 권선징악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원래의 창건 목표에서 조금씩 벗어나 지금은 많이 부패하긴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천하의 중심이다. 그들이 칼을 뽑으면 본가쯤은 하루도 걸리지 않고 짓밟힌다.”
“속하가 듣기에 대공자님께서도 상당한 힘을 지녔다고 합니다.”
“나도 들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형님은 지금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다. 난 천하에서 아버지보다 더 계산이 빠른 분은 없다고 자부한다. 그런 아버지가 포기한 상대를 형님이 달려들고 있다. 이건 무모한 짓이 아니라 자살행위지.”
동천완의 얼굴에 언뜻 그늘이 내려 앉았다.
“형님도 지금 엄청난 자금을 투입해 많은 힘들을 긁어모으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금전을 이용해 모은 힘과 수백 년 동안 혈맹처럼 다져온 무림맹의 힘은 비교될 수가 없지. 넉넉잡고 한 달이면 무림맹은 본가를 징계하기 위한 절차에 들어갈 것이다. 그 전에 포달랍궁에 도착해야 한다. 본가가 사는 것은 서둘러 포달랍궁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뿐이다.”
“과연 소문대로 포달랍궁의 대법왕이 막내 도련님일까요?”
동천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마음속으로 소문이 사실이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동천몽이 아니면 천상각은 절대 살아 날 수가 없었다.
동천완이 포달랍궁을 향해 떠나는 그 시간 동오룡 또한 깨끗한 백의로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능씨가 녹풍원 입구까지 따라 나왔는데 얼굴에 염려가 가득했다.
“그만 들어가시오.”
누차 그만 따라 나오라고 말렸지만 능씨는 한 걸음 한걸음 계속 따랐다.
“정문까지 따라 올 생각이오?”
몇 걸음 앞서가던 동오룡이 다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슬금슬금 따르는 능씨를 보며 언성을 높였다.
“어서 가요.”
“여보.”
능씨의 눈이 깊이 잠겨 있었다. 지금 남편이 어딜 가는 길인지 알고 있었다. 그 길은 무척 험하고 힘들뿐 아니라 위험하기도 했다. 만약 남편이 헛걸음을 하게 되면 그 날로 천상각은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한다.
“걱정하지 마시오. 나 동오룡 세상 헛살아 오지 않았소. 아무일 없을테니 맘 푹 놓고 들어가 쉬어요.”
동오룡이 가벼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다시 몸을 올렸다.
능씨는 걸어가는 동오룡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동오룡이 보이지 않는데도 능씨는 움직일 줄 몰랐다.
일다경이 넘도록 목석이 된듯 서 있던 능씨가 긴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그런데 녹풍원으로 걸어가지 않고 다른 길로 들어섰다.
녹풍원을 지나자 본격적으로 산길이 나타났다. 천상각의 배산(背山)은 화룡산이다. 그 옛날 화룡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데 그 흔적이라고 하여 정상에 거대한 구덩이가 용모양으로 패여 있었다. 산길은 조용했고 풀잎을 스치는 능씨의 치맛자락 소리만이 고요한 숲속을 울렸다.
산길은 갈수록 경사가 심해졌고 능씨의 입에서도 거친 호흡이 흘러나왔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왼손으로 연신 닦아내며 두 개의 봉우리를 넘어서자 아담한 골짜기가 눈앞에 나타났고 십여 채의 고풍스런 전각이 나타났다.
이따금 마음이 편치 않을 때 찾던 여풍사였다.
능씨는 우선 개울가로 가서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씻었다. 산길을 올라오느라 잠시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은 능씨는 곧바로 대웅전을 안으로 들어갔다. 석가세존이 입가에 환한 미소를 머금고 능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능씨는 곧바로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방석도 없는 마루에 무릎을 꿇고 석가세존을 향해 절을 올리며 모든 것이 형통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전심을 쏟아 소원했다.
상도의 몸이 지저분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바깥은 시끄러웠지만 골목 안은 조용했다. 상도는 좌우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앞으로 나아갔다. 쥐새끼 두 마리가 인기척에 놀라 찍소리를 내며 도망친다.
척!
골목 깊숙이 들어선 상도의 걸음이 멈췄다.
좌측으로 이층 목조건물이 있다. 무척 오래된 듯 밤중인데도 곧 쓰러질 듯 보였다. 작은 대문은 굳게 닫혀 있고 안으로부터는 불빛 하나 흘러나오지 않았다. 아직 술시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잠을 자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스윽!
상도는 가볍게 담장을 넘어 마당에 내려섰다. 좌우를 한 번 휘둘러 본 후 내력을 끌어올렸다.
두런두런 얘길 나누는 소리가 들려온다. 불을 끄고 얘기를 나눈다는 것은 보나마나 불온한 작당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상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안채를 향해 조심조심 걸었다.
마당에서 안채까지는 십여 장 쯤의 거리였고 가까이 다가가자 문이 반쯤 열려 있으며 댓돌위에 가죽으로 된 두 개의 낡은 신발이 놓여 있었다.
상도는 문 열린 틈을 이용해 소리 없이 들어섰다.
캄캄한 마루에 두 쌍의 눈이 반짝거리며 마주 앉아 얘길 나누고 있었다.
“여깄소.”
등을 지고 앉은 사내가 탁자 위에 뭔가를 놓았다. 빛도 없는데 반짝거리는 것이 진귀한 구슬인 듯 했는데 모두 다섯 개였다.
맞은 편 사내가 그중 한 개를 들어 올렸는데 구슬에서 쏟아지는 광채에 의해 생김새가 대략 드러났다.
한쪽 눈이 애꾸인 중년인이었다.
“진품이군요. 좋습니다. 이로써 우리의 거래는 완성 되었소.”
그러더니 탁자 아래서 사내가 보따리 한 개를 올려 놓았다.
“이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소. 저쪽 방으로 들어가 갈아 입고 나오시오.”
등을 지고 있는 사내가 보따리를 들고 좌측 방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에 나왔는데 상도가 흠칫했다.
들어갈 때는 속인 복장이었는데 나올 때는 한 명의 승려였다.
“흐흐! 아주 잘 어울리는 구려. 지금까지 이 장사 십년 했지만 가장 보기 좋소이다.”
염주까지 목에 걸고 서 있는 사내를 보며 맞은편 사내가 웃음을 지었다.
사내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차림새를 보며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고맙소. 그럼 난 이만 가보겠소.”
그러면서 가볍게 합장을 하고 돌아섰다.
“흐흐흐! 합장도 완벽하군.”
사내가 사라진 문 쪽을 보며 맞은편 사내는 한동안 웃음을 그칠 줄 몰랐다.
잠시 후 사내는 탁자 위에 올려진 구슬을 만지며 흡족한 웃음을 떨치지 못했다. 이윽고 구슬을 손에 쥐고 일어서려는데 상도가 조용히 말했다.
“그대로 앉아 있거라.”
지척에서 들려온 음성에 사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상도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초를 발견하고 말했다.
“우선 불부터 켜야지 도깨비 놀음도 아니고 말이야.”
그러더니 화섭자를 꺼내 불을 붙였다. 촛불이 켜지고 실내가 환히 드러났는데 예상대로 애꾸의 중년인은 경악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누…누구시오?”
애꾸사내가 더듬거리며 묻더니 자신의 손에 들린 구슬을 잽싸게 품속에 감추어 넣었다.
“앉자고, 다리 아픈데.”
그러면서 상도가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하지만 사내는 너무 놀란 듯 앉을 생각을 않고 상도를 내려다보았다.
상도가 버럭 인상을 썼다.
“앉아. 고개 아퍼.”
그러자 사내가 주춤거리며 다시 주저앉았다.
애꾸의 사내가 상도를 빠르게 훑었다. 왼쪽 옆구리에 검이 보인다. 무림인과 신물나게 거래를 했다. 그래서 대충 보면 상대가 어느정도인지 짐작을 하는데 상도는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꾸민 것이 아닌 자연스런 여유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뭐 말 길게 하면 서로 입만 아플 것이고.”
상도가 품속에서 주머니 한 개를 꺼내더니 탁자 위에 힘차게 올렸다.
탁!
애꾸가 뭐냐는 듯 주머니를 보자 상도가 말했다.
“보면 알 것 아뇨?”
애꾸사내가 잠시 주머니를 노려보더니 조심스럽게 쥐고 안을 살폈다.
“허헉!”
애꾸사내가 소스라쳤다.
“이…이건 취와주.”
한 개의 구슬을 꺼냈는데 은은한 푸른색이 실내를 휘어잡는다.
이리저리 살피던 애꾸가 다시 더듬거렸다.
“지…진품.”
“우린 가짜 따위 갖고 다니지 않지.”
상도가 다리를 척 꼬더니 말했다.
“나 당신이 뭐하는 사람인지 다 알고 왔소. 백면자로 불리며 사람 얼굴 바꿔주는 것을 업으로 먹고 산다는 것까지.”
백면자가 흠칫 놀랐다.
“나도 얼굴 좀 바꾸러 왔소? 조금 전 나간 사람 아주 근사하던데 나도 그렇게 좀 안되겠소?”
백면자가 눈을 크게 떴다.
“서…설마 포달랍궁을 들어가려고?”
“몰래 잠입해 보려고 했는데 쉽지 않더군. 들어가긴 해야겠고 그래서 찾아 온 거요. 그 취와주면 평소 거래 값의 두 배는 될 텐데?”
상도의 말은 분명했다. 신분을 바꿔주고 자신이 받는 평소가격의 두 배이다.
백면자가 아까와 다른 시선으로 상도를 살폈다. 포달랍궁은 서장 제일의 사찰이기도 하지만 최강의 무문이었다. 만약 허락 없이 외부인이 들어오거나 변장 잠입할 경우 붙잡히면 죄의 크기에 따라 처벌의 강도가 다르지만 일단 수라옥에 갇힌다. 한번 들어가면 좀체 살아서는 나올 수 없다는 수라옥은 적지 않은 공포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포달랍궁을 몰래 잠입하려는 것은 여러 가지 목적이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곳의 무공을 훔쳐 배우기 위해서이다.
번쩍!
돌연 상도의 검이 허공에 빛을 뿌렸다.
“학!”
애꾸가 기겁했다.
투툭!
갑자기 애꾸의 얼굴이 열십자로 갈라지더니 껍질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주 얇고 얼굴 표정까지 드러나는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지만 상도 눈은 속이지 못했다.
드러난 얼굴은 애꾸도 아닌 지극히 정상적인 육십 초반 가량의 노인이었다. 하지만 백면자가 놀란 것은 아직까지 자신의 인피면구를 알아본 손님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상도가 인피면구를 벗기는 것은 적당히 자신의 실력을 흘림으로써 상대가 어떤 꼬투리를 잡거나 엉뚱한 장난을 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함이었다.
“잠깐 기다리시오.”
백면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상도는 신경쓰지 않았다. 백면자는 이미 자신의 솜씨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도망 따위나 허튼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백면자는 보따리 한 개를 들고 나왔다.
툭!
탁자 위에 놓았고 상도가 풀어 헤쳤다.
안에는 가사와 승려로써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 물건이 준비되어 있었다.
스륵!
그리고 서랍을 열더니 부엌칼 절반 정도되는 날 시퍼런 칼을 꺼냈다.
상도가 경계의 빛을 띄자 백면자가 웃었다.
“다 감춰도 머리는 방법이 없소.”
“여기서 밀어야 한다는 거군. 좋소. 어서 미시오.”
상도가 고개를 탁자 위로 들이 밀었다.
스스럼 없이 들이밀자 오히려 백면자가 깜짝 놀랐다. 자신의 손에 쥐어진 칼은 그 어떤 것보다 예리하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목구멍에 쑤셔 넣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상도는 경계없이 고개를 숙였다.
‘으음!’
백면자 표정이 굳어졌다.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런 사람에게는 최선을 다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만이 장수에 지름길이다. 괜히 서툰 짓 했다가는 죽는다.
싸악!
백면자는 상도의 머리를 밀기 시작했다. 긴 머리카락이 탁자 위로 수북히 쌓였고 채 반다경도 걸리지 않아 상도는 까까머리가 되었다. 맞은편 구석에 있는 동경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 상도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상도는 가사로 갈아입었다.
백면자가 말했다.
“이건 장명각(葬冥閣)승려의 신분을 나타내는 명패이오.”
백면자가 조그만 묵빛 목패를 주었다. 목패 중앙에 장(葬)이란 글씨가 선명하게 쓰여 져 있었다.
상도가 생각나는 것이 있어 백면자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백면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소이다. 장명각은 포달랍궁의 승려들이 죽으면 장사를 치러주는 기관이오.”
“한마디로 장의사란 말 아닌가?”
“그렇지요. 장명각의 승려는 장명각주의 재량에 의해 선발되오. 그가 어디서 데려오든지 제자 중 받아들이던지 자기 마음이라는 것이오.”
“그 말은 당신과 장명각주가 서로 통하고 있다는 말이로군.”
백면자가 가볍게 웃었다.
“당신에게 받은 취와주중 절반은 그분 수증으로 들어갈 것이오.”
상도가 이해 한다는 듯 마주 웃었다.
“법명은?”
백면자의 말을 상도가 말을 잘랐다.
“상도로 합시다. 내 이름인데.”
“좋을 대로 하시오. 장명각주가 법명을 묻거든 그리 대답하시오.”
상도가 웃으며 말했다.
“수고했소. 당신을 잊지 않지.”
그리고 몸을 돌려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상도가 사라지자마자 백면자는 품속에 넣어 둔 취와주를 꺼내 살폈다. 두 배 받았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냥 다른 사람에게서 받듯 제 값을 받았다고 하면 자신에게 훨씬 많은 양이 떨어진다. 어제 밤 꿈자리가 좋더니 이런 횡재수가 생긴다. 역시 꿈은 잘 꾸고 볼일이라고 생각하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존불사(存佛寺)는 원래 약초를 캐서 생계를 이어가는 오씨라는 사람의 초막이었다. 그런데 석가가 하룻밤 쉬어가면서 존불사란 이름이 붙었고 이후 제대로 터를 닦고 절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었다. 특히 석가가 묵었다는 방은 오늘날까지 보존이 되어 많은 유람객들이 몰려든다.
그런데 산문의 문턱이 닳아 없어질 만큼 찾아오던 유람객의 모습이 요 몇 일 사이 그림자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관부에서 나온 무사들이 산문 입구에서서 누구도 들여보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존불사 입구에 동천몽이 나타났다. 붉은 가사를 걸치고 손에 염주를 든 모습이 영락없는 승려이다. 동천몽이 나타나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두 명의 관부무사가 앞을 가로막았다.
“어느 절에서 오신 스님인지 모르나 이곳은 당분간 누구도 출입 할 수 없으니 돌아가시오.”
동천몽이 눈살을 찌푸리자 무사가 빠르게 설명을 더했다.
“열흘 전 천축을 다녀오던 포달랍궁의 승려 일행이 이곳 존불사에서 정체불명의 인물들에게 살해 당했소이다. 그래서 지금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엄명이오.”
동천몽이 품에서 한 가지 패를 꺼내 보여주었다.
작은 코끼리 한 마리가 새겨져 있었는데 포달랍궁의 승려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반패였다.
“포달랍궁에서 오셨구려. 들어가시오.”
동천몽이 패를 품에 넣고 존불사 안으로 들어섰다. 천년 고찰답게 주위 나무들부터가 달랐다. 해와 달의 빛을 덮을 만큼 높게 뻗어 있었고 기둥이 서너 아름 되어보였다. 특히 노송들은 장사가 결박된 듯 두꺼운 껍질을 입고 있었으며 바람이 불 때마다 신령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존불사는 조용했다. 워낙 큰 사건이어서 존불사 승려들도 침통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몇 명의 존불사 승려들을 만났지만 서로 합장만 하고 지나쳤다. 대법왕 신분을 나타내는 법의와 가사를 걸치면 움직이는데 불편할 것 같아서 평범한 복장으로 왔고, 그래서 입구에서도 신분을 밝히지 않고 일반 승려들이 지닌 패를 보였다.
동천몽은 곧바로 본전을 지나 요사채로 향했다. 요사채는 본전에서 이백여장 떨어진 북서쪽에 지어져 있었는데 입구에 도착한 동천몽이 걸음을 멈췄다.
아직까지 비릿한 피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끼이익!
요사채로 들어가는 대문을 밀었다.
요사채는 정면 일곱 칸짜리 전각이었는데 조용했다. 댓돌위에 떼묻은 목혜(木鞋)가 가득 있었는데 필시 무공방 승려들이 신었던 신발들일 것이다.
덜컹!
동천몽은 방문을 열었다.
우욱!
막 들어서던 동천몽이 구역질을 했다. 비린내와 시신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넓은 방안에 시신들이 즐비했다. 모두 자다가 당했다는 것을 증명하듯 모두 편히 누워 있었다.
팟!
동천몽의 눈이 빛을 뿌렸다. 엄청난 인원이 죽었으므로 당연히 방바닥은 피로 흥건해야 한다. 그런데 시신 한 구당 핏방울 몇 개씩 밖에 흘러나오지 않았다.
동천몽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피를 흘러나오지 않게 죽이는 방법은 쉽지 않다. 무공방 승려들은 모두 검에 당했다. 그런데 피가 몇 방울 정도 밖에 몸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흉수의 검법이 초절정에 이르렀다는 뜻이었다.
짧은 순간 검이 급소를 베고 지나가버리면 피가 몇 방울 흘러나오기도 전에 상처가 다시 아물어 버리는 것이다. 소문은 산적에 당했다고 했는데 아니다. 물론 산적이 거듭된 흉년으로 인해 절간을 턴다는 소문은 심심찮게 들렸다. 하지만 산적이 식량을 털기 위해 존불사를 기습했다면 존불사 승려들까지 죽여야 말이 된다.
시신을 둘러보던 동천몽이 방 한 가운데 누워 있는 키 큰 시신으로 다가갔다. 다른 승려들과 달리 허리에 흰 코끼리가 새겨진 낡은 은빛 요대를 했다. 무공방의 우두머리인 방주 극천선사였다. 한 번도 만난적은 없지만 무공방 우두머리는 허리에 은빛 요대를 찬다는 것을 보고 받았다.
동천몽이 시신 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팟!
은빛 요대 아래를 살피던 동천몽이 시선을 빛냈다. 조그만 고서 한권이 삐져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번 길에 가져온 경전일 것이다. 고서는 요대와 가사 사이에 끼어 쉽게 빠지지 않았다. 잃지 않으려고 요대를 힘껏 졸라 맨 탓이었다. 동천몽이 힘을 주자 고서가 빠져 나왔다.
툭!
콰아앙!
고서를 빼내자마자 엄청난 굉음과 함께 시신이 폭발하며 동천몽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극천선사의 시신이 폭발하면서 주위 시신들이 연쇄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콰콰콰쾅!
요사채 건물이 통째 날아갔고 동천몽의 몸으로 엄청난 쇳조각들이 들이닥쳤다. 가공할 폭발력에 날아가며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무상탄독(無上彈毒)!’
사실 무상탄독을 본적도 없고 맞아 본적은 더욱 없다. 그런데 본능적으로 무상탄독을 떠올린 것은 코를 파고드는 그윽한 향기 때문이었다. 대법왕의 무예를 배우면서 강호의 특이한 신공과 병기와 독을 비롯한 화탄에 대해 배웠다. 그중 가장 무서운 다섯 개의 화탄을 고금오대사탄(古今五大死彈))이라고 부르며 흑수당에 올 때 뢰음칠혈이 사용했던 뇌정탄이 두 번째 강하고 맨 첫 번째가 바로 무상탄독이라고 했다.
무상탄독은 절밀철주(折密鐵珠)라는 쇠로 만든다. 절밀철주는 쇠붙이이지만 조그만 충격을 가하면 유리처럼 파편으로 쪼개지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 절밀철주에 강력한 염백탄화라는 화약을 넣고 폭발시키는데 보통 주먹만 한 무상탄독에는 손톱 크기의 절밀철주 일천여개가 박혀 있다. 그래서 폭발 순간 일천여개가 비상하는데 절밀철주에는 극독까지 묻어 있어 한 개만 인체에 박혀도 죽음을 면치 못한다.
워낙 폭발력이 강해 만년한철로 된 한 자 두께의 철벽도 뚫어버리는 절밀철주 수천 개가 빗발치듯 동천몽의 몸을 타격했다.
거센 폭풍에 허공으로 날아갔던 전각의 잔해들과 바위 조각들이 떨어져 내렸고 요사채가 있던 자리에는 깊이 이십 여 장의 거대한 분화구가 생겼으며 근처 십여 채 전각들까지 폭삭 주저앉았다.
퍼어억!
허공으로 날아간 동천몽이 땅에 떨어졌다.
주르륵!
엎어진 동천몽의 입가에서 꾸역꾸역 피가 흘러내렸다. 걸치고 있던 가사는 그물처럼 조각이 되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폭발 속에서도 피부는 멀쩡했다.
털썩!
동천몽이 몸을 뒤집었다.
입에서는 피가 흘러 내렸고 무척 고통스러운 듯 이마를 찡그렸다. 피가 멈추지 않은 걸을 보아 걸병광우철포공에 의해 외상은 면했지만 수천 개의 절밀철주에 몸속은 완전히 망가졌으리라.
와악!
거대한 핏덩이 한 개를 토했다.
핏덩이를 토하고 숨 쉬기가 조금 편해진 듯 가슴의 굴곡이 좀더 커졌다.
동천몽이 눈을 떴다. 태양은 하늘 가운데 있었고 강렬한 햇살에 눈살을 찌푸렸다.
“훅!”
동천몽의 입술이 비틀렸다.
“후훅훅!”
조금씩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더니 급기야 광소로 변했다.
“크핫핫핫핫!”
엄청난 광소를 터뜨리자 피가 다시 입 밖으로 넘어왔다. 한 동안 울음을 멈추지 않던 동천몽이 기침을 했다. 그러자 거대한 핏덩이가 또다시 입 박으로 흘러나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동천몽의 입가에 진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누군가를 조롱하는 듯한 비아냥이었는데도 언뜻 섬칫 하기 까지 했다. 동천몽은 한동안 누운 체 꼼짝을 하지 않았다.
“큭큿! 제대로 걸렸군. 완벽하게.”
동천몽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이런 식으로 날 끌어 들여 날려 버리다니 정말 대단한 대가리다.”
누군가에게 하는 말인가. 언뜻 상대를 칭찬하는 것 같았지만 자세히 들려다보면 말 속에는 신랄한 자기 조롱이 가득 들어 있었다. 어리석음에 대한 비판이고 방심에 대한 야유였다.
동천몽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우우욱!”
또다시 피를 토했다. 몸은 움직일 수가 없을 만큼 심각했다. 하지만 일어나야 한다. 돌아갈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더욱 없었다.
동천몽은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쓰러질 듯 중심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지만 두 다리로 대지를 밟고 똑바로 섰다.
웩!
또다시 피를 토하고 고개를 쳐든 동천몽이 히죽 웃었다.
“뭘 보고 그렇게 서 있느냐? 밤이 길면 꿈도 길다고 했는데 서둘러 해치우지.”
눈앞으로 재색 그림자들이 어른 거렸다.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존불사의 승려들이었다. 그런데 들어 올 때 만났던 평범하고 엄숙한 승려의 기색들 오간데 없고 전신에서 강렬한 기세들이 뻗어 나왔다.
비록 무공방 승려들의 죽음에 온 정신을 팔고 있어 그들에 대한 경계와 살핌이 부족했다고 하지만 자신을 완벽히 속일 정도라면 이미 이들의 능력에 대해서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
처억!
존불사 승려들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다른 승려들과 달리 법의를 망토처럼 길게 늘어뜨린 말쑥한 생김새의 승려였는데 쉰 정도 들어 보였다. 바라보는 눈빛은 평범하다 못해 승려 고유의 따스함이 풍기기까지 한다.
‘노화순청의 경지에 이른 자구나!’
동천몽은 속으로 숨을 삼켰다.
앞으로 나온 승려가 합장을 하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경외하는 대법왕님께 정식으로 인사 올리옵니다. 소승은 존불사의 방장 공원이라고 하옵니다.”
공원은 허리를 폈는데 앞가슴에 모인 합장은 풀지 않았다.
“무척 놀라셨을 줄 아옵니다. 또한 지혜가 풍부하신 만큼 모든 사태를 어느 정도 읽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대략은 파악했다. 하지만 꾸민 너희들의 입을 통해 좀 더 상세히 듣고 싶구나.”
“알겠사옵니다. 우선 그에 앞서 한가기 질문을 던져도 되겠는지요?”
“해라.”
“사실 저는 지금 눈앞의 현실을 꿈이 아닌가 하고 있습니다.”
“무…무슨 말이냐? 쉽게 말해…라.”
“아직까지 무상탄독에, 그것도 정통으로 걸려들었는데도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습니다. 아시겠지만 무상탄독은 금강불괴지신일지라도 치명타를 입힐 만큼 위력적입니다. 오죽했으면 고금제일 사탄이라고 명명했겠습니까?”
“쉬…쉽게 말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결론만 말해라. 그러니까 내가 강하다는 애기냐?”
“그러하옵니다.”
“강하다는 말을 네놈처럼 길게 하는 인간은 첨 본다. 훗훗! 아무튼 기분이 더럽지는 않구나. 역시 애나 어른이나 칭찬은 듣기가 좋군. 그래.”
“그럼 지금부터 대법왕님의 궁금증을 풀어 드리겠사옵니다. 사실 존불사는 일반 사찰이 아니옵니다. 사찰로 위장한 목와북천의 휘하 세력 중 한 곳인 혈부림(血浮林)이지요.”
애써 여유를 찾고 있던 동천몽의 안색이 흔들렸다.
“음 목와북천.”
몹시 당황스런 표정이었다.
목와북천(?渦北天)은 흑도의 영원한 본가이다. 흑도의 뿌리이자 근간이고 중심이자 핵심이다. 정도무림의 결정체가 무림맹이 듯 흑도무림은 철저히 목와북천에 소속된다.
목와북천과 무림맹의 혈사는 수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과 불처럼 무림맹과 목와북천은 끝없는 대립관계를 형성하며 물고 물리는 피의 전쟁을 벌여왔다. 양쪽 모두 뚜렷한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공존하듯 내려오다 백 년 전 무림맹에 의해 마침내 목와북천이 완전히 짓밟혔다.
목와북천이 사라지며 흑도 또한 뿔뿔이 흩어져 완전히 사라졌다. 이후 강호에서 흑도란 단어는 거의 잊혀 져 갔다.
하지만 얼마 전 무미선사로부터 목와흑천이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목와북천이 부활한다는 것은 곧 무림맹에 졌던 부채를 갚기 위한 힘이 완성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동천몽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기 때문인데 동천몽의 심중을 헤아린 듯 공원이 입을 열어 말했다.
“무림맹에 속하지도 않은 대법왕님을 왜 흑도에서 공격을 하느냐는 질문이시군요. 답해 드리겠습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너무 뛰어나시기 때문이지요.”
“내가 뛰어나다고?”
동천몽이 눈을 크게 뜨더니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우헤헤헤! 병주고 약준다더니 개자식들이 사람 이렇게 만들어 놓고 드럽게 띄우는구만. 계속 지껄여 봐라.”
너무 세차게 웃다 비명을 질렀다. 웃는 바람에 어느 정도 진정되어가던 내상이 다시 도진 것이다.
“얼마 전까지 우리 목와북천의 살인 명단 일위에는 무림맹주가 몰라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흘 전 살인명단 일위가 바뀌었습니다. 무림맹주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대법왕님이 올랐지요.”
동천몽이 다시 웃음을 지었다.
“대강 그림이 잡히는구나.”
“역시 지혜가 넘쳐 나시는 분이시군요. 저의 몇 마디 설명에 모든 속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한 것을 보니.”
“큿큿! 이 와중에도 기분이 별로 더럽지 않은 것은 감히 나 같은 인물이 무림맹주를 제치고 목와북천의 살인명단 일위에 올라서는 영광을 얻은 것 때문인가. 그나저나 앞뒤 정황을 보니 지금쯤 흑수당도 한바탕 난리가 났겠구나?”
흠칫!
공원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동천몽의 짐작이 맞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곳 존불사의 암습과 흑수당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다. 그런데 동천몽은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음을 간파한 눈치였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이곳에 뭔가 자신을 노리는 암계가 깔려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들어왔다는 얘기가 된다. 뿐만 아니라 어쩌면 자신들의 배후 또한 읽고 있을지도 몰랐다.
“처음 무림맹주를 끌어 내리고 대법왕님을 살인명단 일위에 올릴 때 상당한 의문을 가졌습니다. 솔직히 무림맹주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 여겼지요. 그런데 이제 보니 내 생각이 한참 부족했군요. 맞습니다. 흑수당 역시 주인이 지금쯤 바뀌어 있을 것입니다.”
“뜻대로 되었으면 좋겠구나.”
팟!
공원의 눈빛이 이채를 발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과연 그럴까? 글쎄, 너희들 뜻대로 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야유처럼도 들린다.
갑자기 마음 한 구석이 꺼림칙해졌다. 완벽하다고 여긴 이번 작전이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친다. 당장 확인해보고 싶지만 마땅한 수단이 없었다. 그쪽에서 일이 잘되었다는 연락을 보내오기 전까지는.
공원은 서두르기로 했다. 무엇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오래 붙들고 있어서 좋을 것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중상을 입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다. 빨리 해치워 버리고 싶었다. 더구나 외상이 없는 것을 보아 중독은 전혀 된 것 같지 않았다.
특히 무상탄독이 동원되어 아직까지 죽이지 못한 인물이 없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초로 죽지 않는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그건 동천몽의 능력을 자신들에게 정보를 제공해준 사람까지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
내상은 보이지만 외상이 없다는 것은 동천몽의 몸이 어지간한 파괴력 지닌 물건이나 병기로는 손상되지 않을 만큼 단련되어 있다는 뜻이다.
“편히 보내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깍듯하게 합장을 한 공원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주위에 포진하고 있던 승려들이 앞으로 다가섰다.
동천몽은 승려들을 대략 훑었다. 족히 백 명에 가까운 적지 않은 숫자였다.
피식!
동천몽이 메마른 웃음을 지었다. 몸은 천근만근인데 적이 너무 많았다.
아까부터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벗어 날수 있을까 계산을 했지만 뾰쪽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잔머리라고 하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에서는 앞이 캄캄했다.
자신의 몸 상태를 완전히 파악한 까닭인지 다가오는 걸음도 빠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일백여명의 일류고수가 벌떼처럼 달려든다고 생각하자 소름이 끼쳤다. 아마 형체도 없이 난도질 당 할 것이 뻔했다. 더구나 혈부림은 목와북천 휘하에서도 잔인하기로 소문난 집단이다.
‘대법왕님 제발!’
아까부터 일목은 계속 허공에서 나타나려고 발버둥쳤다. 자신이 직접 나서서 적을 맞을 테니 그사이를 이용해 도망치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동천몽은 일체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말라는 엄명이었다. 하지만 일목은 일목대로 죽음이 다가오는 현실에서 안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동천몽이 안전거리 박으로 도망칠 때까지 적을 막을 자신은 있었다. 자기 한 목숨 죽는 것이 대수인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대법왕이 살아 날수만 있다면 죽는 것 따위는 별것 아니었다.
‘어서 명령을!’
일목의 전음이 다급히 들려왔다. 하지만 동천몽은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동천몽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살아날 궁리를 하고 있는데 뾰쪽한 수가 별로 없어 보인다.
오늘따라 그 잘 돌아가던 잔머리가 완전히 멈췄다. 앞이 캄캄하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은 내상이 너무 심하여 본능이 그쪽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었다.
머리도 마음이 편해야 잘 돌아가는데 고통과 더불어 위기를 느끼자 더욱 더딜 뿐이었다.
‘음 이 노릇을!’
적은 코앞으로 다가오고 방법은 없고 일목은 재촉한다. 하지만 일목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절대 안 된다. 일목이야 말로 마지만 최후의 선택이 되어야 하고 그건 반드시 성공을 해야 한다
‘그 방법뿐이다. 오로지!’
동천몽의 두 눈이 빛을 뿌렸다.
마침내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일목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일체 질문은 하지마라. 오로지 내가 지시하는 데로 따르기만 해라’
한 푼의 진기라도 아끼려면 말수도 줄여야 했다. 전음을 보내는데도 상당한 진기를 필요로 한다.
‘동북쪽으로 이십 여리 가면 석룡대라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날 기다려라. 잊지 마라 석룡대다. 길다란 돌이 마치 한 마리용처럼 누워 있다. 그냥 보면 알 것이다.’
일목은 왜? 라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동천몽이 절대 질문을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일목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 사라진 듯 했다. 다행히 적은 아직 일목의 존재를 모른다.
‘후후훕!’
동천몽은 몸속에 남아 있는 모든 진기를 끌어 올렸다. 혈부림 무사들과의 거리는 처음 칠 팔 장 정도에서 이제 오장 정도로 좁혀졌다. 오장이면 어느 쪽이든 공격할 수 있는 거리였다. 통상 강호에서 싸움 거리는 삼장에서 오장이다. 그 정도의 거리가 대부분의 무공이 가장 위력을 발휘하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스윽!
동천몽의 갈기갈기 찢어지고 구멍 난 가사가 부풀어 올랐다.
파파팡!
거센 기류에 가사의 일부가 찢어 나갈 정도였고 그것을 보는 공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정도의 폭발 속에서도 저런 위력의 기세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자신들로써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절대 보여 줄 수 없는 능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서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의지를 더욱 다졌다.
불현 듯 암살명령이 전달되면서 마지막 글귀가 떠올랐다.
‘반드시 죽여라. 만약 실패하면 우린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무서운 적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죽이지 못하면 우리는 다시 어둠속으로 사라져야 한다.’
“쳐랏!”
공원의 입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고 천천히 거리를 좁혀가던 백인의 혈부림 무사들이 일제히 떠올랐다.
슈와아아!
단 일격에 동천몽을 박살내고야 말겠다는 산악 같은 기세였다. 동천몽 또한 그대로 떠올랐다. 여전히 옷자락은 끌어 올린 기류에 뜯겨나갈 듯 펄럭 거렸고 서로가 서로를 향해 전속력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일백 대 일.
백 명과 한명이 서로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든다.
공원의 입가에 웃음이 감돌았다. 백전노장의 눈에 비치는 동천몽의 모습은 너무 무모했기 때문이었다. 정상적인 몸일지라도 일류고수인 자신의 부하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리면 승산은 없다. 그런데도 동천몽은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슈슈슛!
일백 개의 장과 권과 검이 쏟아 졌는데 그 기세란 차라리 장엄하기까지 했다.
동천몽 역시 거대한 절벽처럼 밀려오는 백인의 공세에 지옥금으로 맞섰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보다 더 붉은 손바닥이 백인의 공격에 정면으로 부딪혔다.
콰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