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21화 (21/71)

제3장 함정

무미선사의 말에 의하면 이번에 건너간 무공방은 지금까지 규모 중 가장 큰 팔십 오명이며 한 가지 중요한 물건을 가져오는 중이라고 했다.

“중파에서 온 중상들을 만나볼 수 있겠소?”

“그렇잖아도 붙잡아 두었습니다. 가시지요.”

동천몽은 곧바로 자추동을 따라 방을 나섰다.

중파에서 온 중상들은 모두 열 아홉 명이었고 열 두 대의 마차를 끌고 있었다. 모두가 모피를 싣고 왔는데 동천몽이 나타나자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예를 취했다.

“모두들 일어나시오?”

“아니옵니다. 소인들이 어찌 감히.”

“괜찮소. 어서 일어들 나시오. 그리고 자리에 앉읍시다.”

동천몽의 거듭된 요청에 상인들이 일어나 자리에 앉았는데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시 말해보시오. 본궁의 무공방 승려들이 모두 죽었단 말이오?”

“네!”

가장 늙은 상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육십이 넘어 보였는데 동천몽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자세히 좀 말해 보겠소?”

“저희도 자세한 소식은 모릅니다. 다만 안다의 주루에 들어갔다가 점소이로 부터 얘길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소인들이 안다에서 점심을 먹을 때가 사흘 전이지요. 점소이 말로는 이틀 전에 모조리 살해당했다고 했으니 닷새 된 것 같사옵니다.”

동천몽의 표정이 굳었다. 세상과 완전히 담을 쌓고 오로지 깨달음에만 매달리며 하루에 한 끼 밖에 식사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평생 옷 한 벌로 지내면서 죽음이 다가오면 스스로 홍산의 골짜기로 걸어가 눕는다.

천축까지의 원로에도 오직 풀뿌리와 야생 과일 등으로 끼니를 해결할 뿐 절대 백성들에게 손을 벌리거나 얻어먹는 폐를 끼치지 않는다. 호랑이까지 그들의 청빈한 불심에 감복하여 길을 비켜주었다는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짐승들까지 그들을 우러러 볼 만큼 그들의 삶은 깨끗하고 소박하며 말이 아닌 몸으로 세존의 가르침을 전달하기에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경외의 대상이었다.

“틀림없소?”

“가…감히 뉘 앞이라고 이 늙은이가 허언을 늘어놓겠나이까?”

동천몽이 고개를 떨구고 앉아 있는 상인들을 훑어보았다. 모두가 황송해 어쩔 줄 모른다.

“그만들 가보시오. 고맙소이다.”

“강녕하소서.”

“오래오래 소인들의 어버이가 되어 주시옵소서.”

상인들이 큰 절을 하며 물러났다.

동천몽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토록 명랑하던 자정경도 눈치만 살폈고 자추동은 더 이상 보고 있기가 안타까운 듯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금화는 동양강(東陽江)과 영강강(永康江)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수륙교통의 요지였다. 수산업과 목재업이 활발하여 일찍이 기간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고 천하절경 북산(北山)까지 근처에 있어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검은 포장을 씌운 화물마차 한 대가 금화의 대로를 소리 내어 달리고 있었다. 마부석에는 죽립을 눌러쓴 흑의사내가 연신 채찍을 휘둘렀고 말은 거품을 물며 땅을 박찼다.

마차와 십 여장 떨어져 한 사내가 따르고 있었다. 삿갓에 흑의를 걸쳤고 왼손으로 한 자루 칼을 가슴에 끌어안고 있었는데 어찌난 몸놀림이 부드럽고 민첩한지 바람 같았다.

마차는 복잡한 금화를 벗어나 북산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일각쯤 달리자 멀리 북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북산은 그다지 크지 않지만 산세가 수려하고 경치가 빼어나 유람객들의 발길이 사철 끊이지 않는다.

마차는 북산 초입에 있는 어룡장원으로 빨리듯 사라졌다.

어룡장원은 동양강과 영강강의 어업권을 독점하고 있는 북산제일 수산가(水産家)이다. 마차가 장원안으로 사라지자 정문이 보이는 소나무 아래 몸을 감추고 있던 흑의인이 숲속으로 뛰어들어 몸을 날렸다. 그리고 잠시 후 눈앞으로 어룡장원 동쪽 담장이 나타났다. 흑의인은 망설이지 않고 담장을 넘어 안으로 뛰어들었다.

휙!

깃털처럼 가볍게 담장을 넘어 내려선 흑의사내가 흠칫 했다.

다섯 명의 사내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우뚝 서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일에 흑의사내의 몸이 가벼운 진동을 했다. 무척 당황해 하는 모습이다.

“순순히 포박을 받을 셈인가? 아니면 피를 보겠는가?”

삿갓아래 흑의사내의 눈이 섬광을 발했다.

전통적으로 뱃일을 하는 사람들은 거칠다. 그래서 일반 상가와 달리 수산가 사람들은 가혹하기조차 하다. 하지만 눈앞의 다섯 사내들에게서는 뱃사람 특유의 거친 기색과는 다른 기운이 풍겨 나왔다.

‘뱃놈들이 아니다’

가벼운 경장차람이나 옆구리에 메어진 검의 각도가 안정되어 있다. 그것은 오랫동안 검과 같이 살아왔다는 징표이다.

‘역시!’

짐작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하나 소득은 있지만 반대로 잃은 것도 있었다. 자신이 미행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사전에 알려졌다는 것이고 그것은 곳 움직임을 이들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합격 대형으로.”

우두머리인 듯한 가운데 사내가 나직이 명령을 하자 좌우 사내들이 삿갓의 흑의사내를 에워쌓았다.

“마지막 경고다. 조용히 따라 올 텐가 저항하다 죽겠는가?”

“훗훗훗!”

삿갓아래로부터 냉소가 흘러나왔다.

어이가 없다는 비아냥이었다.

“놈!”

우두머리 입에서 짧은 노호가 터지며 그의 검이 일직선으로 찔러 들어왔다.

삿갓의 흑의사내가 왼손으로 끌어안고 있던 칼을 뽑아 뻗는다.

꽈앙!

검과 칼이 부딪히고 삿갓의 사내가 뒤로 물러날 때 기다렸다는 듯 좌우의 사내들이 파고들었다.

네 개의 칼이 좌우에서 들어온다.

촤라락!

삿갓의 사내가 뒤로 한걸음 빠져 후퇴하며 칼을 좌우로 힘껏 휘둘렀다.

퍼퍼퍼!

강력한 도기에 찔러오던 검기들이 튕겨나갔다.

슉!

우두머리 검이 다시 온다.

좌우에서 파고드는 검들을 막느라 시간적으로 정면에서 파고드는 우두머리 사내의 검을 막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네 사내의 검과 부딪혀 기혈까지 일어난 악조건이다.

“훕!”

짧게 진기를 끌어 올렸다. 완전한 진기를 끌어올릴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퍽!

검과 칼이 부딪히며 삿갓사내가 뒤로 밀렸다.

“우후!”

삿갓사내의 입에서 뜨거운 숨결이 터져 나왔다. 상대의 힘을 받아 내기 버거울 때 내뱉는 신음인데 다섯 사람 모두 자신보다 아래가 아니다.

사사사!

사내들이 천천히 좌측으로 걸음을 옮겼다.

콱!

칼을 쥔 삿갓사내의 손등이 불거졌다. 수많은 위험을 넘고 헤쳐 나왔지만 어쩌면 오늘이야 말로 생애 최고의 위기라는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콰아아아!

세 사내가 달려든다.

삿갓사내가 검을 한 바퀴 돌리며 세 사내의 검을 맞받아치려는데 놀랍게도 눈 앞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헛초다!’

아 차 하는 순간 우두머리와 다른 사내의 검이 좌우에서 찔러왔다.

이미 늦었다. 전혀 헛초를 펼치리라 생각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기 때문에 회수하여 좌우 공세를 막아내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피식!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왔고 그와 동시에 좌우 옆구리가 뜨거워졌다. 물기가 빠르게 엉덩이 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피가 무척 많이 흘러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삿갓사내의 칼이 다시 곧추섰다. 상처는 어디까지 상처일 뿐이다. 무사는 살아 있으면 싸우는 것이다.

촤촤촤촤!

칼이 포효했다.

거침이 없고 뭐든지 베고 나아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용맹성이 이글거리는 도기가 우두머리를 겨눈다.

우두머리의 눈이 커졌다. 중상을 입고서도 뻗어오는 도기가 부상전과 차이가 없을 뿐 아니라 피를 보자 더욱 투쟁력을 높이고 있었다.

‘이자 한두 번 지옥을 다녀온 게 아니구나!’

자신들도 지옥이라면 신물 나게 다녀왔다. 그렇지만 양쪽 옆구리에 구멍이 났다면 저토록 용맹성을 뿜어내지 못한다. 분명히 자신들보다 승부욕에서 앞섰고 장부로써 경외심까지 일어난다.

“부상을 입었다고 방심하지 마라. 놈은 승부사다.”

우두머리는 혹시라도 긴장을 늦출까봐 부하들에게 나직한 경고를 했다.

카카카캉!

조용한 장원위로 격렬한 폭음이 메아리쳤다.

“크훅!”

삿갓사내가 더욱 뒷걸음을 쳤다. 이제는 입가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크윽!”

피를 보자 삿갓사내의 칼이 더욱 난폭해졌고 좌측 사내의 목이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파팍!

“후욱!”

삿갓 사내의 허리가 휘청거렸다.

넘어질 듯 좌측 무릎이 굽혀졌다가 대나무처럼 다시 일어섰다.

하지만 무릎 있는 데에서 피가 흐르는 것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음이 분명했다. 상체와 달리 다리에 상처를 입으면 싸움을 하는데 불리하다. 움직임이 둔해진다는 것은 이쪽은 걷잡을 수 없는 손해이고 상대에게는 절호의 기회이다.

슈아아아!

네 개의 검이 질서를 깼다. 더 이상 신중하지 않아도 충분이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탓이다.

카캉!

삿갓사내의 칼이 다시 섬광을 뿌렸고 맨 좌측 사내의 허리를 싹뚝 잘랐다. 그러나 방어를 무시한 공격은 치명상을 부른다.

푸푹!

“커헉!”

삿갓사내가 비명을 흘리며 왼쪽무릎을 땅에 구부렸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일어서려다 멈칫했다. 턱 밑에 한 개의 파란 검날이 들이대어져 있었다.

우두머리의 서릿발 같은 시선이 삿갓사내를 내려다보더니 툭 마혈을 검을 쳤다.

풀썩!

삿갓사내가 힘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데려가라!”

두 부하가 삿갓 사내의 양팔을 잡고 질질끌고 갔다. 사라지는 삿갓 사내를 쳐다보던 우두머리가 가벼운 신음을 흘리며 옆구리를 살폈다.

핏물이 베어 있었다. 조금만 피하는 동작이 늦었거나 삿갓사내의 칼에 힘이 약간만 더 실려 있었다면 허리가 잘려졌을 것이다. 적이지만 실로 놀라운 투쟁력이며 승부욕이었다.

여추량의 걸음이 빨라졌다. 평생 상인으로 살았지만 나름대로 한 무예 갖고 있었다. 하지만 상인들 사이에서 강할 뿐 강호인들에 비하면 그리 넉넉한 수준은 아니었다.

가파르긴 하지만 그다지 먼 길을 올라오지도 않았는데 숨이 턱에 찼다. 하지만 워낙 다급한 일이었기 때문에 숨돌릴 틈이 없었다.

파팍!

땅을 박찰 때 마다 오육장씩 날아갔고 두 개의 봉우리를 넘어서자 한 개의 분지가 나타났다. 호리병 같아서 입구는 좁았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광활하다 싶을 만큼 넓은 초원이 나타났다.

뚝!

분지 안으로 들어서던 여추량의 발걸음이 세워졌다.

분지는 수직 절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는데 한 가운데 둥근 공 모양의 먹물덩이가 허공에 떠 있었다. 그것은 육중한 바위를 연상케 했는데 여추량이 입을 떠억 벌렸다.

‘설마 묵곤혈참기(墨梱血斬氣)를 완성하셨단 말인가!’

묵곤혈참기가 완성되면 온 몸이 검게 변한다.

꿀꺽!

여추량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양손을 거머쥐었다.

허공 오장 높이에 공처럼 떠 있는 검은 덩어리에서 손이 빠져나왔다.

숯덩이처럼 시커먼 손은 그대로 멀리 백여장 밖에 있는 절벽을 향해 날아갔다. 단단한 기가 결집된 장력이었다.

뻐어억!

검은 장력이 절벽을 때렸다.

하지만 맞은편 절벽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고 여추량의 얼굴에 다소 실망의 기색이 나타났다.

여추량이 실망의 기색을 거두지 못하고 서너 걸음 나아갔을 때 구르릉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추량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쳐들더니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수백장 높이의 절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단단하기가 무쇠에 가깝다는 금강화석으로 된 절벽이 지진을 만난 듯 엄청난 굉음과 함께 주저앉았다.

‘오오! 저럴수가!’

여추량이 몸을 떨었다.

무공에 대해서 조금은 안다. 개나 소나 금강화석으로 된 수백장 높이의 절벽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지간한 검도 고수도 흠집조차 낼 수 없다는 금강화석을 무너뜨린 검은 덩어리가 거칠게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더니 사람형태의 몸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분지 한 가운데 백의청년 한 명이 우뚝 서 있었다.

두 눈은 자신의 손으로 무너뜨린 절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대…대공 완성을 축하드리옵니다.”

동천비의 시선은 여전히 무너진 백여장 밖의 절벽에 머물러 있었다.

“믿을 수가 없사옵니다.”

“아직 부족하오. 십이성 극성에 이르면 절벽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한줌 재로 녹아 사라지오.”

“으허헉!”

기겁하는 여추량을 동천비가 재밌다는 듯 돌아보며 웃었다.

“아마 그 수준에 이르면 천하에서 내 상대가 될만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오. 한데 무슨 일이오. 수련 중에는 누구도 얼씬하지 말라고 했는데?”

환하던 여추량의 얼굴이 굳어졌다.

동천비는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자신의 신분을 밝혔는데도 사내들의 몽둥이질은 멈추지 않았다. 의식을 잃으면 찬물을 부어 일깨웠고 다시 몽둥이질을 했다. 기절하면 깨우고 기절하면 깨우기를 벌써 이십여 번이다.

온 몸은 피에 절었고 피부도 찢겨져 걸레조각처럼 너덜거린 채 삿갓사내는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천상각의 인물이면 당당하게 찾아 올 일이지 그럼 왜 마차는 미행했고 지난 사흘 동안 본 장원을 염탐했어? 말이 안 되잖아. 얼렁뚱땅 속일 생각 말고 정확히 불어. 너 어디서 왔어.”

두 명의 거한이 몽둥이를 들고 삿갓사내의 복부를 쿡쿡 찔렀다. 그때마다 거꾸로 매달린 삿갓 사내는 입으로 피를 토했다.

“이 자식 봐라. 이젠 아예 말도 하기 싫다는 거야.”

빠악!

그대로 옆구리를 한 대 갈겼다.

“크왁!”

삿갓 사내의 입이 벌려지고 검붉은 핏덩이가 토해졌다.

“이게 아직 뜨거운 맛을 덜봤나?”

빡!

바바바---빡!

두 사람이 좌우에서 미친 듯 삿갓사내를 두들겼고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삿갓사내는 비명을 지를 힘도 없는지 몽둥이질에 흔들렸다.

“그만 하거라.”

두 거한이 부지런히 몽둥이질을 할 때 냉엄한 음성이 들려왔다. 지하실 입구가 열리고 동천비를 앞세운 여추량이 들어서고 있었다. 두 거한이 잽싸게 한쪽으로 비켜나 부동자세를 취했다.

저벅저벅!

동천비가 천천히 매달린 삿갓 사내 앞으로 다가갔다. 삿갓 사내는 본래 모습을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우그러져 있었다.

동천비가 쭈그리고 앉더니 품에서 흰 손수건 한 장을 꺼내 삿갓 사내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스윽!

슥!

피를 닦아내자 대략의 얼굴 모습이 드러났다.

붉은 털이 얼굴을 덮고 있는 사내의 모습에 동천비가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깨끗하게 핏방울 하나 까지 세심하게 닦은 동천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만상, 날 알아보겠느냐?”

스르르!

오만상의 눈꺼풀이 경련을 일으켰다.

눈을 뜨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지만 부어 오른 눈은 떴는지 감았는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대…대공자님.”

목소리로 알아들었다.

“그래 나다. 많이 다쳤구나.”

“소…송구하옵니다. 속하를 용서 해주십시오.”

“아니다. 네가 무슨 잘못이 있느냐? 너는 아버지가 시킨 대로 날 감시했을 뿐인데.”

“대…대공자님.”

“괜찮다. 그럴수도 있지.”

동천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손수건에 묻은 피를 빤히 바라보았다.

“피는 언제 봐도 붉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부동자세로 서 있는 거한들 곁으로 다가갔다. 동천비가 다가오자 두 거한의 눈은 더욱 정면을 응시했고 몸은 굳어졌다.

콱!

좌측 거한이 차고 있는 검의 손잡이를 거세게 움켜쥐더니 뽑아 들었다.

파르르!

거한의 몸을 떨었다. 동천비가 자신을 보며 검을 살피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내려 칠 듯한 기세였다. 역천의 마공을 익히고 있다고 들었다. 그 마공은 속성이 가능하지만 화후가 깊어갈수록 본신의 정기를 잃는다던데 벌써 그 마기가 나타난 것일까. 그래서 지금 날 죽이려는 것일까. 거한의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들이 회오리바람처럼 휘돈다.

‘후우!’

거한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동천비가 검을 들고 오만상 쪽으로 가고 있었다. 동천비가 거꾸로 매달린 오만상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만상아.”

“마…말씀 하소서 대공자님.”

“그동안 고생 많았다.”

“네에?”

촥!

동천몽이 검을 휘둘렀다.

팍!

검은 오만상의 목을 지나갔고 머리가 정확히 땅으로 떨어 뜨렸다.

콸콸콸!

잘린 목에서 피가 흥건히 쏟아져 나왔다. 머리는 잘렸지만 육체는 아직 죽지 않아 버둥거리며 떨고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육체까지 잠잠해지고 목에서 쏟아지던 피도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툭!

동천비가 검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잠시 목 잃은 오만상의 시신을 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시신을 곱게 묻어주어라.”

“존명!”

두 거한이 잽싸게 오만상의 시신을 끌어 내려 밖으로 가져갔다.

동천비가 뒷짐을 지고 한 참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고 여추량은 침묵으로 바라보았다.

‘이로써 주군과는 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바로그때였다. 지하실에 한 중년인이 나타났다.

“총관님 서장으로도부 급보가 날아들었나이다.”

“급보라니 말해보게?”

부총관 가석구였다. 부총관 또한 이미 동천비의 수족이 되었고 무슨 일이 생기면 동오룡 보다는 이쪽으로 먼저 보고를 했다.

“흑수당에서 본각과 모피 거래를 더 이상 지속 할 수 없다는 통첩이 왔사옵니다.”

홱!

그때까지 천장을 보며 무거운 얼굴로 있던 동천비가 매서운 눈으로 돌아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보소서.”

가석구가 품에서 서찰 한 장을 건네주었다. 서찰을 받아 살피던 동천비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이…이런!”

“공자님.”

여추량이 슬며시 서찰을 가져가 읽더니 경악했다.

“지…지금이 어떤 시기인데.”

여추량이 놀란 얼굴로 동천비를 쳐다보았다. 동천비 얼굴은 바위덩이가 되었다.

“다시 알아봐라. 아니 정확한 사유를 당장 알아봐라. 당장.”

여추량이 소리쳤고 가석구가 허겁지겁 달려 나 갈 때 동천비가 물었다.

“아버님께는 보고 했느냐?”

가석구가 돌아서서 말했다.

“아직!”

“잘했다.”

가석구가 고개를 굽실하고 사라졌다.

여추량이 다시 서찰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쳐 죽일 늙은이가 노망을 했나?”

동천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여추량은 쉴 사이 없이 서찰을 보며 자추동을 욕했다. 자추동은 몇 번을 죽일 놈이 되었고 신의 없는 인간이 되었으며 여추량의 입을 통해 벼락을 일곱 번이나 맞아야 했다.

“여총관.”

한참을 침묵하던 동천비가 입을 열었다.

“지금이야 말로 내가 하는 일이 고비에 와 있소. 다시 말 해 가장 많은 자금이 들어갈 때란 말이오. 지금 자금이 제대로 회전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쌓아 놓은 공든 탑이 무너질 위험이 있소.”

“그러하옵니다. 이달 말일에 장 황금 백만냥이 지출 되어야 하고 다음달 중순에는 십만관이 집행 되어야 합니다.”

동천비가 여추량을 돌아보았다.

“하는 수 없소. 당신이 흑수당을 한 번 다녀와야겠소.”

“알겠사옵니다. 당장 떠날 채비를 하겠사옵니다.”

“어떻게 된 사정인지 자세히 알아보고 정말로 그런 결정을 내렸다면 자당주의 마음을 돌려야 하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이오.”

동천비의 눈동자가 검게 변했다.

묵곤혈참기를 배운 사람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제갈 채주.”

휘이이!

천장에서 제갈팽이 떨어져 내렸다.

“대령 했사옵니다. 주공.”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랐다. 제갈팽은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허리를 숙였다.

“가장 빠른 아이 백명만 골라 여총관을 수행케 하라.”

“존명.”

제갈팽이 나타날 때와 같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동천비의 입술이 지그시 물렸다. 이젠 물러설 곳도 없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야 할 때였다. 설혹 앞에 태산이 있다면 그것도 치워야 한다.

안개가 자욱했다. 전각의 용마루만 희미하게 드러나 보일 뿐 안개는 모든 것을 덮어 버렸다. 안개가 짙으면 비가 온다. 먼 거리를 떠나는데 비가 내리면 좋지 않다. 소주서 서장까지 마차로 달려도 보름은

걸린다.

출발을 앞둔 시위무사들은 바빴다. 마차를 다시 한 번 점검하고 객점을 찾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건포와 비상식량을 챙겨 마차 한 켠에 싣느라 부산했다.

“허험!”

안개 속에서 느닷없는 기침소리가 들려오자 마차에 짐을 싣던 무사들이 고개를 돌렸다. 안개가 걷히고 한 사람이 나타나자 무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일제히 허리를 구부렸다.

“각주님을 뵈옵니다.”

무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동오룡은 무사들의 예에는 관심 없다는 듯 그대로 스쳐 전각안으로 들어갔다. 동오룡이 지나자 무사들은 다시 각자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전각 안으로 들어가자 짧은 복도가 나왔고 좌우로는 격자창으로 이뤄진 문이 있었다. 동오룡은 천천히 복도 끝으로 다가가 마지막 방문을 열어젖혔다.

드르륵!

동오룡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여추량이 혼자 의관을 갖춘 채 한 잔의 차를 마시고 있었다.

“주…주군.”

여추량이 소스라칠 듯 놀라며 찻잔을 놓고 일어섰다.

“소…속하의 처소에는 어인일이시옵니까?”

지난 수십 년 동안 동오룡을 그림자처럼 수행하고 받들었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처소를 찾아온 적이 없었다.

여추량의 물음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동오룡이 실내를 한 번 스윽 훑어보았다. 방안은 매우 단촐 했다. 한쪽 서가에 꽃인 백 여 권 가까운 책들과 우측 벽으로 걸린 매화도 한 점과 구석진 곳에 놓인 백자 한 점이 장식물의 전부였다. 누가 봐도 대상가의 살림을 총괄하는 총관의 거처치고는 초라하다 싶을 정도였다.

동오룡이 여추량이 앉았던 방석위에 자리를 잡았다.

“뭐하는가? 어서 마시게. 차는 식으면 맛없는 것 아니던가.”

여추량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두 사람은 찻상을 놓고 마주 앉은 꼴이 되었다.

“용정을 마시고 있었군.”

동오룡이 찻잔을 보며 말했다.

“자네가 예전부터 용정을 좋아했지. 천비 녀석도 유독 용정을 좋아했고, 따르는 주군과 취향이 같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지.”

멈칫!

여추량의 고개가 들려졌다. 동오룡이 뱉은 말속에 적지 않은 가시가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보거라. 주군께도 차를 내오너라.”

여추량이 밖을 향해 소리치자 동오룡이 손을 저었다.

“아냐, 난 마시고 왔네. 필요없어.”

그리고 다시 한 번 방안을 휘둘러보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먼 길을 가는 것 같더군. 아이들 준비가 바쁘던데 말일세?”

여추량이 조심스럽게 고개들어 말했다.

“잠깐 다녀올 곳이 있사옵니다.”

“헛헛! 언제부터 자네가 내게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던가.”

흠칫!

여추량이 허리를 바짝 세웠다.

“사…사실은.”

“아닐세. 됐네. 내가 이렇게 자네를 찾아온 것은 한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어서 이네.”

“……”

“자네 혹시 만상이 봤는가? 요즘 그 아이가 보이지 않아서 말일세.”

수행무사 오만상을 찾는 것이었다.

여추량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담담하게 표정을 바꾸어 말했다.

“글쎄, 속하도 도통 못봤사옵니다.”

“사실 내가 그 아이에게 일 한 가지를 시켰네.”

“무슨?”

“별것 아닐세. 천비 녀석이 뭔가 옳지 않은 일을 꾸미는 것 같아서 뒤를 조금 밟아 보라고 했네. 그런데 그 일을 시작한지 몇 일 되지 않아 이렇게 보이지 않는구먼.”

여추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공자께서 옳지 않은 일을 꾸미신다 하오시면?”

“정말로 만상을 못 봤는가?”

동오룡의 두 눈이 강렬해졌다.

돌변한 동오룡의 시선에 여추량이 순간적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 천비 녀석과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더구만?”

“공자님의 일을 조금 도와드리고 있지요.”

“좋은 일이네. 뜨는 해를 섬겨야지. 지는 석양을 섬겨서 무슨 득을 보겠는가?”

“주…주군.”

“마저 차를 마시게. 그만 가보겠네.”

동오룡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추량이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그냥 가시옵니까? 속하가 대접하는 차라도 한 잔 드시고 가시지요.”

“아니야. 자네도 바쁜 몸 아닌가? 나중에 또 보세. 그런데 이제 내가 자네를 보러 찾아와야 하는군. 헛헛.”

탁!

동오룡이 문을 닫고 사라졌고 여추량의 표정이 굳어졌다.

한참동안 닫힌 문을 바라보던 여추량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습니다. 주군의 시대는 지났지요.’

여추량이 다시 자리에 앉아 식어버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여추량의 처소를 나온 동오룡은 안개를 헤치며 자신의 처소 녹풍원을 향해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해가 떠오르며 안개가 조금씩 사라졌고 녹풍원이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멈칫!

녹풍원을 향해 걸어가던 동오룡의 발길이 멈췄다.

정원 한쪽의 꽃가지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꽃가지들이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눈을 빛내며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간 동오룡의 눈이 커졌다.

꽃밭 사이에서 능씨가 호미로 잡초를 메고 있었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흰 무명치마를 걸친 채 열심히 잡초를 메고 있는 능씨를 바라보는 동오룡의 두 눈이 흔들렸다. 호미가 잡초를 캐면 왼손으로 잡초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그리고 잡초는 잡초대로 모았고 흙은 호미로 다시 고른다.

“허험!”

동오룡이 기침을 하자 능씨가 깜짝 놀라 일어났다.

“여보.”

“뭘 그렇게 열심히 메시오. 잡초도 생명을 갖고 있거늘 그냥 내버려 두시오.”

“그렇지 않아요. 같은 생명을 갖고 있어도 주위에 도움을 주는 생명이 되어야지 해만 끼치면 오히려 없는 만 못해요. 오히려 다른 생명의 성장을 방해하므로 뽑아 없애 줘야 해요.”

능씨가 베시시 웃었다.

자기 말에 너무 주제넘었다고 생각 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다른 생명의 성장을 방해한다.’

동오룡이 능씨의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였다.

“헛헛!”

동오룡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길을 올라갔다.

하지만 걸음을 옮길수록 미소는 걷히고 표정은 굳어 졌다.

‘맞아 그놈들 모두가 그 아이의 성장을 방해했지. 아니 죽이려고까지 했었지. 그놈들 모두는 그 아이에게는 최소한 잡초야. 성장을 가로막았던.’

동오룡이 굳은 표정으로 녹풍원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동오룡이 깜짝 놀랐다. 한 명의 흑의사내가 우뚝 서 있었다.

“넌 천완이 아니냐?”

흑의사내가 돌아섰다.

약간 창백한 안색에 마른체형은 사내는 동오룡의 셋째 아들 동천완이었다. 장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동오룡의 강권에 하는 수 없이 자신의 길을 포기했다.

“네가 아침 일찍 애비를 찾아오다니 무슨 일이냐?”

동오룡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동천완이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동오룡의 눈썹이 찡그러졌다. 동천완의 웃음이 한겨울의 삭풍처럼 차갑고 메말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늙으셨네요.”

느닷없는 말에 동오룡이 눈을 치켜떴다.

“난 아버지는 안 늙을 줄 알았는데.”

동오룡의 눈이 커졌다.

설마 그 말을 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제대로 농담도 잘 하지 않는 아이다. 꼭 해야 할 말이 아니면 입을 함부로 열지 않은 과묵한 아이다.

“앉아서 말해라. 애비 고개 아프다.”

하지만 동천완은 앉지 않았다.

천천히 서재 쪽으로 걸어가더니 꽂힌 책을 한 권 뽑아 들어 책장을 넘겼고 동오룡은 동천완의 일거수일투족을 가만 쳐다보았다.

‘으음!’

불현듯 가슴이 아려왔다. 유난히 유약하고 섬세했던 아이였다. 계집보다 더 감성이 예민하고 부드러웠으며 남과 다투기를 죽기보다 싫어했다. 오로지 좋아 하는 것이라고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은 것이었다.

하지만 동오룡은 그런 아들의 모습이 꼴도 보기 싫었다.

대상인의 아들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성향이자 행동이었고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호되게 일을 시켰고 단 한 번도 칭찬을 해 본적이 없으며 오로지 자신이 배우고 터득한 상술을 주입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눈물을 흘리며 상인이 되기 싫다고 울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천완아.”

“예 아버지.”

동천완이 책을 든 채 돌아섰는데 환히 웃고 있었다.

“난 오늘 지난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찾아가보지 않았던 여 총관의 처소를 내 발로 들어가 봤다. 그런데 너 또한 지난 삼십년간 단 한 번도 찾지 않던 애비 방을 찾아왔구나.”

“용건이 있어서 찾아 왔을 것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런데 어떡해요. 그냥 불쑥 아버지가 보고 싶어 왔는데.”

흠칫!

동오룡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입니다. 아버지가 갑자기 보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왔는데 안계시지 뭐예요. 그런데 여 총관을 만나러 가셨군요.”

동천완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안 믿는 눈치군요. 사실인데.”

그러면서 다시 등을 돌려 손에 들린 책을 꽂아 놓고 다른 책을 뽑아 들었다.

동오룡은 책을 펼쳐봤다가 다시 꽂아놓고 다시 펼쳐보기를 반복하는 동천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미안하구나.”

동오룡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면목이 없구나. 이 애비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천하를 뒤흔드는 석학이 되어 있을 텐데.”

진심이었다. 사람에게는 자신이 갖고 태어난 그릇이 있다. 그런데 자신은 동천완이 갖고 태어난 그릇을 무시하고 자신의 그릇을 들이밀어 채우려 했었다.

끝없는 욕망과 야망으로 만들어진 자신의 원대한 그릇에 동천완을 담아버린 것이다.

“지금이라도.”

“아버지.”

동천완이 돌아서며 말을 잘랐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원하면 네 갈 길을 가라고 하려던 참이었다.

“재밌어요. 장사 말이에요. 해볼수록 흥미롭고 신이 납니다. 내가 물건을 팔아 이익을 남겼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처…천완아.”

동천완의 얼굴에는 정말로 재미있다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진심입니다. 거짓 아닙니다. 보고 받으셨겠지만 요즘 면화와 약재의 매출이 작년에 비해 두 배로 늘었습니다.”

이미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다. 자식들에게 가업을 물려준 이후 유일하게 매출이 증가한 분야였다.

“소자를 좀더 엄하게 다루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능력이 키워졌을텐데 조금 아쉬워요. 죄송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꾸 벗어나려 했던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자신이 사과를 해야 하는데 오히려 동천완이 하고 있다.

표정이 진지한 것이 절대 비아냥이 아니었다.

“아버지 걱정마세요. 본가는 영원히 푸르를 것입니다.”

“천완아?”

동오룡이 크게 놀랐다.

동천완이 말했다.

“위기는 위깁니다. 어쩌면 사백년 천상각 역사가 종지부를 찍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소자가 절대 가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살려낼 것입니다.”

동오룡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가. 자식은 진정으로 얘기를 하고 있으므로 의당 기뻐야 하거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싫다는 아이를 두들겨 패가면서 상술을 가르쳤고 그가 보던 책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자신을 증오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아들의 입에서 이제 본격적인 상인의 길을 가겠다는 말이 흘러나왔으므로 기뻐해야 하는데 너무 서글픈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인가.

“아버지, 지금 구대문파 수장 회의가 열리고 있대요.”

“구…구대문파.”

“아마 본가 문제는 논의하려는 건가봐요. 듣자하니 얼마 전 무림맹의 한 기관이 집단으로 몰살당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에 형님이 개입되어 있다고 그들은 생각 하고 있답니다.”

“천비는 관련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믿겠어요. 아마 회의 결과에 따라 본가의 생사가 결정되겠죠. 만약 형님의 짓으로 판단이 되면 곧바로 본가를 응징하러 테니까요. 하지만 최선을 다해 소자가 막아 볼 테니까 너무 걱정 하지 마세요.”

슥!

동천완이 들고 있던 책을 꽂아놓고 방을 나갔다.

“천완아.”

동오룡이 방문을 빠져나가는 동천완을 불렀다.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동천완을 향해 말했다.

“고맙구나. 그리고 미안하다.”

동천완이 문 밖으로 사라졌다.

동오룡은 한 동안 문 쪽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