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좁혀지는 숨통
동천비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동오룡은 뒷짐을 지고서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동천비가 기척을 했지만 동오룡은 돌아보지 않았다. 동천비는 방문 입구에 우뚝 서서 동오룡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
동오룡은 돌아보지 않았고 동천비는 기다렸다. 아마 창밖의 풍경을 구경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상관량의 방문 목적과 자신의 연관관계를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을 것이다.
방에 들어선지 일다경이 넘어서야 동오룡이 몸을 돌렸다.
흠칫!
동천비는 깜짝놀랐다.
동오룡의 얼굴이 딱딱해 있었는데 이마에 주름살이 보였다. 그것은 무척 화가 나 있다는 뜻이었다.
“긴말 않겠다. 너 요즘 무엇 하고 있느냐? 사실대로 숨기지 말고 말해라.”
“무엇 하다뇨?”
“사실대로 털어 놓지 못하겠느냐?”
동오룡이 버럭 소릴 질렀다.
“네 이노옴.”
“아버님.”
동천비도 마주 소릴 높였다.
동오룡의 안색이 붉게 달아올랐다.
“당장 집어치워라. 그건 미친 짓거리다. 가능성이 있었으면 이미 옛날에 이 애비가 했다.”
“뭔가 오해를?”
“오해는 무슨 개 같은 오해, 어차피 돈은 권력을 이기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야 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사백년 본가의 역사를 잿더미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당장 그만 두거라.”
“이미 늦었습니다.”
“뭣이?”
“판이 너무 커져버렸습니다. 이제 소자가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이 판에 관계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이 멈추려 하지 않을 것이란 말입니다.”
동오룡의 눈이 커졌다.
“그래서 기어코 그들과 한판 벌려 보겠다는 말이냐?”
“못할 것도 없지요.”
동천비가 다부지게 대답했다.
“죽는다.”
“송구합니다. 칼은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습니다. 날아가는 화살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동오룡이 깊은 시선으로 동천비를 쳐다보았다.
동천비 역시 동오룡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두 부자의 시선은 한동안 바늘처럼 서로를 찔러갔다. 하지만 누구도 쉽게 물너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무림맹이 얼마나 큰 단체인줄 아느냐?”
“압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조직이 그들에게 항거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하물며 우기 같은 장사꾼 따위가 그들의 상대가 되리라고 여기느냐?”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싸우려든 단 말이냐?”
“안 되도 싸워 봐야지요.”
“이제 보니 너?”
“그렇습니다. 부인 않겠습니다. 아버지처럼 장사꾼으로 평생을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휙!
바로 아래 있던 탁자 위의 찻잔을 집어 던졌다.
동천비가 고개를 숙였고 찻잔은 맞은편 벽에 격중되며 산산이 깨졌다.
“죄송합니다.”
동천비가 몸을 돌려 나갔고 동오룡의 두 눈이 활활 타올랐다.
한동안 닫힌 문을 노려보던 동오룡이 밖을 향해 소리쳤다.
“술상을 봐오너라.”
“네!”
시녀의 대답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 조촐한 술상이 들어왔다.
동오룡이 잔에 따르려 하자 술병을 뺏는 사람이 있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부인 능씨가 다가와 술병을 쥐고 잔을 채웠다.
쭈욱!
동오룡이 아뭇소리 없이 잔을 비우자 능씨가 다시 잔을 채웠고 그렇게 연거푸 세잔을 비운 동오룡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능씨는 술병을 놓고 맞은편에 다소곳 앉아 있었다.
“지난 사백년이 넘는 세월동안 아마 본가에서 무림맹에 가져다 바친 돈을 모두 합치면 아마 중원을 열 번은 사고도 남을 거요? 나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선조들이 그들의 착취를 견디다 못해 도전을 꿈꿨지만 방법을 찾지 못했소. 물론 소규모의 저항은 있었지만 그때마다 처절한 응징을 당했소. 나 또한 몇 번 그러했고.”
주르륵!
능씨가 두 손으로 술을 따랐다.
동천몽이 찰랑거리는 술잔을 보며 말을 이었다.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난 뼈저리게 느꼈소. 그리고 찾아낸 방법이 공존공영이었소. 땅이 하늘이 되지 않는 한 결코 힘의 권력은 무한하고 무적이오.”
여전히 능씨는 듣고만 있다.
“박에 만상이 있느냐?”
“예 주인.”
“조사를 해라. 녀석의 뒤를 밟든지 캐든지 놈이 무슨 짓을 하고 누구와 손을 잡고 있는지 소상히 밝혀라. 막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본가는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당할 것이다. 놈은 아직 어려 세상의 무서움을 모른다.”
“존명.”
오만상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고 술잔을 비웠다.
“당신도 한잔 하려오?”
동오룡이 불쑥 잔을 내밀자 능씨가 가볍게 웃었다.
“당신 두?”
“아니오. 한잔 해보시오. 술이라는 게 때로는 쓸 만 할 때도 있소. 말은 않지만 당신 또한 천몽이 놈 때문에 요즘 무척 괴롭다는 것을 내가 아오. 자자.”
“그럼 조금만 주세요.”
“잔은 채워야 맛인 법이오.”
동오룡이 잔을 가득 채워 주었다.
능씨가 가득찬 잔을 보며 말했다.
“어휴, 너무 많아요.”
“그냥 단숨에 마시구려. 한 잔쯤은 약이오.”
마른 침을 두어 번 삼키더니 능씨가 단숨에 잔을 비웠다.
“어떻소?”
“너무 써요.”
그러면서 얼른 안주로 나온 전병 한 조각을 입에 집어넣었다.
그런 능씨를 사랑스런 얼굴로 쳐다보던 동오룡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그놈, 그놈이 있어야 해.”
동오룡이 혼잣말 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원하던 그는 곁에 없다. 생사가 불 분명 한 것이다.
마차들이 들락거렸다. 흑수당을 위협했던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대법왕에 의해 일망타진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몸을 사렸던 중상들의 마차가 다시 끓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 종일 수많은 모피를 실고 들락거리는 마차 바퀴소리에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특히 대법왕이 흑수당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까지 몰려들어 얼굴 보기를 청했고 어쩔수 없이 동천몽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천몽을 발견한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를 했고 일부는 땅바닥에 오체복지하고 장수무운을 빌고 강녕을 기원했다. 동천몽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와 평화가 가득 넘치기를 축원했다.
“도대체 여기서 무얼 하시옵니까?”
수십 대의 마차에서 내리는 모피를 창고에 쌓고 있던 자추동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동천몽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약 이백 여명이 넘는 인부들이 마차에 실린 호피를 창고 안에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구경거리도 아닌데 뭘 그렇게 열심히 보시옵니까?”
자추동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주.”
“말씀하소서. 대법왕이시여.”
동천몽의 깊은 배려에 완전히 감복한 자추동은 온갖 정성을 다해 받들고 모셨다. 차갑고 독선적이며 이기적은 자추동에게 동천몽은 말 그대로 활불이었다. 누구도 자신을 좋아 하지 않았고 기피하며 손가락질 했는데 동천몽 만이 감싸고 이해하며 따뜻하게 대해준 것이었다.
“저 모피들은 모두 어디에서 생산 된 것들이오?”
“구할 가량이 대설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대설산?”
“대설산은 천하에서 가장 추우면서도 가장 큰 산이지요. 하나 사람들이 한 가지 모르는게 있사옵니다.”
“그게 무엇이오?”
“모피이옵니다. 대설산에서 나는 모피는 다른 지역의 모피와 다르옵니다. 추운 곳에서 살아가는 짐승들이기 때문에 털이 촘촘하고 짧으며 무척 부드럽습니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서 나는 모피보다 세배는 비싸게 거래되옵니다.”
“어디로 거래되오?”
“천상각이옵니다. 워낙 양이 많기 때문에 천상각 정도의 대상가가 아니면 소화를 못시키지요. 천상각 자체에서도 적지 않은 양의 모피를 생산하지만 본당의 모피가 그들이 거래하는 거래액의 칠할 이상을 차지 할 것입니다.”
동천몽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실 중간에서 돌아가지 않고 일부러 먼 길을 찾아 온 것은 한 가지 열쇠 때문이었다. 물론 그 열쇠는 자추동이 갖고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 자추동이 자신에게 완전히 감화되었으므로 이제 원래의 목적을 드러내야 할 때였다.
“만약 거래 선을 돌리면 어떻게 되오?”
“거래 선을 돌린다는 게 무슨 말씀이시 온지?”
“천상각으로 보내지 않고 다른 곳과 모피 거래를 하는 것 말이오?”
자추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동천몽이 물었다.
“왜 놀라시오?”
“글쎄, 한 번도 천상각과 거래를 단절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사옵니다. 또한 천상각이 아니면 저 많은 모피를 소화 시켜줄 상가도 없구요.”
“그 정도로 많소?”
“본가에서 한 달에 천상각으로 들어가는 모피를 금화로 환산하면 백만 관정도 될 것이옵니다.”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황금 백만 관이면 천상각의 한 달 매출의 사 할이다. 천상각 총매출의 사 할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천하에 천상각 말고 흑수당의 모피를 소화 해낼 수 있는 상가는 없소?”
“전혀 없지는 않사옵니다. 저 멀리 북방의 원국과 동영의 덕천상가가 있지요.”
“그들과는 거래를 왜 하지 않소?”
“거리상으로 일단 멀지요. 길이 멀면 운송비가 많이 듭니다. 특히 동영의 덕천상가 같은 경우에는 배로 운반해야 하는데 자칫 풍랑이라도 만나면 위험하지요.”
“내가 알기로 북방의 원국과의 거리나 여기서 절강성까지의 거리나 큰 차이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소.”
“그렇긴 합니다만 도대체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동천몽의 시선이 다시 모피를 하역하는 인부들을 바라보았다. 울긋불긋 한 호피의 줄무늬가 선명하다.
“호피에 윤기가 나는구려?”
“추운 지방에 사는 범(虎)일수록 무늬가 선명하고 광택이 납니다.”
“가만, 저건 백호피(白虎皮) 아니오?”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흰털에 검은 줄무늬가 있는 커다란 호피를 인부들이 운반하고 있었다.
“하나에 황금으로 천 냥 가지요. 가장 고가입니다.”
“만약 모피거래를 중단하면 어찌되오?”
“아마 가장 먼저 자금 부족에 시달리겠지요. 가게의 규모는 큰데 매출이 줄어들면 당연히 혼란이 오고 자칫 도부(渡不)가 날 위험이 크지요.
동천몽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시 그런 동천몽을 바라보던 자추동은 조용히 자리를 비켰다. 동천몽이 뭔가 깊은 계산에 빠졌음을 읽고 방해 하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밤이 늦었는데도 이따금씩 마차 바퀴소리가 들린다. 모피라는 것이 짐승을 잡아 가죽을 벗긴 후 대략 사흘정도 말린 후 중상에게로 넘기고 중상은 대상에게 보내는데 모피의 값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거래되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많이 소모되어 바짝 마르면 값이 떨어지고 습기가 너무 많아도 제값을 못 받는다. 그래서 중상은 흑수당으로 넘어가는 시간을 정확히 계산하여 수송하기 때문에 밤이 되어도 멈추지 않는다.
‘사할!’
동천몽이 자신의 처소 앞 마당에서 뒷짐을 지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얼마 전까지 초승달이었는데 달은 불룩하게 솟은 임산부 배처럼 커졌다.
동천몽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이마를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사불각의 무미선사가 보고해온 바에 의하면 동천비는 지금 무림의 집단들과 활발한 접촉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막강한 자금력을 이용해 무림까지 지배해보겠다는 계산이다.
천상각의 자금능력이라면 결코 무리한 꿈이 아니었다. 하지만 금전의 갖고 있는 취약성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신뢰와 충성심이었다. 그 두 가지는 수 백년, 최소한 수십 년은 함께 피땀을 흘려야 만이 생성되고 만들어지는 끈끈한 인간관계다. 그 두 가지가 제대로 갖춰진 집단일수록 강하며 명문이었다. 그런데 돈으로 급조한 힘이란 결코 그 두 가지를 지닐 수 없다. 조금이라도 불리하다 싶으면 약속이고 뭐고 헌신짝처럼 내 팽개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팟!
동천몽의 눈이 섬광을 발했다.
‘흑수당에서 모피 거래 선을 틀어 버리면!’
동천비는 지금 엄청난 자금을 쏟아 붇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만약 거래 선을 바꿔 버린다면 곧바로 자금 압박에 시달릴 것이다.
“일목!”
한 무리 어둠이 뭉쳐지더니 일목이 나타났다.
“하명하소서.”
“자당주가 침소에 들었는지 알아보거라.”
“지금이 몇 시인데 아직도 잠자리에 안 들었…”
안 들었겠느냐고 말하려다 동천몽의 인상이 찡그려지자 잽싸게 허리를 구부리고 사라졌다.
“훗훗! 아무리 뒤에 숨어 있어도 내 눈을 빠져나가지는 못합니다.”
상식적으로 칠십 년 전에 신물까지 빼앗긴 뢰음사의 능력으로 현재의 포달랍궁을 공격한다는 것은 아무리 복수차원이라고 이해해도 무리였다. 물론 대법왕이 바뀌며 어수선하기 때문에 기회가 전혀 아님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과욕임은 틀림없었다.
결국 뢰음사 공격은 누군가 배후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배후가 될 만 한 사내는 천하에서 한 명 뿐이었다.
유난히 흰 백포를 즐겨 입고 삼각형의 작은 눈에 파묻힌 동공은 쳐다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을 끼치게 할 만큼 냉혹하다. 장사꾼의 기질에다 사나운 피의 섭취력 까지 갖고 있는 사내.
그 사내는 복수를 위해 전력증강을 꾀하는 뢰음사의 사정을 간파하고 은밀한 거래를 튼 것이 분명했다.
장부가 야망을 키우는 것은 결코 나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어머니를 향한 그들의 행동은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이미 수차례 죽이려 했었고 그래서 살기 위해 스스로 망나니가 되어 다행히 그들의 칼날을 피했다.
자신을 향한 그들의 어떤 훼방과 음모도 인내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어머니를 향한 그들의 모욕만큼은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어머니를 무시했을 뿐 아니라 미친년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감수성 예민한 나이 때여서인지 어머니를 향한 그들의 가혹한 조롱과 모독은 가슴이 못이 되었다.
셋째 동천완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어머니를 하녀 취급했을 뿐 아니라 특히 동천화는 돈에 팔려온 창녀라고까지 말했다.
한 배에서 태어난 건 아니지만 형제임은 부인할 수 없고 특히 어머니라는 사실은 더욱 바뀔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미타불!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느냐고 달마대사가 말했다던가.’
동천몽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자추동이 옷매무새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달려왔다.
“부…부르셨나이까? 대법왕님.”
의관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을 보면 자다 온 것이다. 거기다 급히 나오느라 맨발이었다. 자신에게 완전히 감복하지 않고서는 보여 줄 수 없는 행색이었다.
“잠을 깨워 미안하오.”
“아…아니옵니다. 오히려 대법왕님 보다 제가 일찍 잠이 들어 송구할 뿐이옵니다.”
“자당주.”
자추동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허릴 숙였다.
“명을 받습니다.”
“부탁이 있소?”
“부…부탁이라니 당치 않사옵니다. 무조건 명령만 내리소서. 그럼 저는 무조건 따르겠나이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려. 자당주, 천상각으로 들어가는 모피의 거래선을 돌려야겠소?”
홱!
자추동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어려운거요?”
“그…그렇지는, 알겠사옵니다. 당장 분부를 따르겠나이다. 여봐라. 이 총관 있느냐?”
자추동이 그 자리에서 소릴 질렀다.
잠시 후 어둠속에서 이색기가 부리나케 뛰어 왔는데 그 역시 자다 불려온 듯 맨발에 옷을 반 정도 걸치지 못하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당주님.”
“내일부터 천상각과 모피 거래를 단절한다. 모든 거래선을 원국으로 돌린다.”
“으헉!”
이색기가 기겁할 듯 놀랐다.
“뭘 그렇게 멍청히 서 있느냐? 어서 간부회의를 소집해라. 지금 당장 말이다.”
“가…갑자기 왜?”
“네 이놈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무슨 질문이냐? 썩 물러가거라.”
“존명!”
이색기가 올 때처럼 황급히 맨발로 사라졌다.
“대법왕이시여 또 분부하실 일은 없사 온지요?”
“정말 고맙소. 자 당주. 나 이 은혜 잊지 않겠소.”
자추동이 더욱 허리를 숙였다.
“으…은혜라뇨 당치 않사옵니다. 저는 오로지 대법왕님을 믿고 따를 뿐이옵니다.”
동천몽이 자추동의 손을 잡았다.
순간 자추동이 전신을 떨었다.
“자당주는 참 좋은 사람이오.”
“대…대법왕이시여.”
너무 감격하여 자추동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동천몽이 자추동의 두 손을 꼬옥 감싸 쥐고 입가에 자상한 미소를 듬뿍 머금었다.
잠이 확 달아났다. 잠옷 바람으로 침대를 내려온 자청단은 다시 물었지만 이색기의 고개를 여전히 끄덕인다. 너무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한참동안 이색기를 바라보던 자청단이 잠옷 바람 채로 문을 열고 사라졌다.
부친의 처소를 들어서자 이미 간부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모두들 자다 불려와 눈이 부스스 했고 비몽사몽인 듯 자추동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것 같았다.
“무슨 말씀인지?”
“자다 날벼락이라더니 갑자기 천상각과 거래를 끊겠다는건 도무지.”
여기저기서 쑥덕거렸다.
자추동이 버럭 소릴 질렀다.
“복잡하게 생각 할 것 없다. 그냥 천상각과 거래 안한다는 애기다. 알겠느냐?”
“왜 느닷없이 그런 결정을.”
“느닷없이 든 뭐든 이제 천상각과 거래를 끊기로 했으니 그렇게 알고 준비들 해.”
“하오면 그 많은 양의 모피를 누구와 거래 하신단 말이옵니까?”
“거래 할 곳은 많아. 걱정마라. 이상 가서 잠들 계속 자도록.”
하지만 너무나 돌발적이고 충격적인 일에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추동이 버럭 소릴 질렀다.
“그만 가서 자라니까?”
간부들이 투덜거리며 일어나 사라졌다. 모두가 떠난 방안에 잠옷 바람의 자청단만이 홀로 서 있었다.
“넌 왜 거기 서 있어. 너도 가서 자. 그리고 넌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왔어?”
“왜 갑자기 천상각과 거래를 중단하자는 것입니까?”
“가서 자라니까?”
“제정신입니까? 새로운 거래처를 뚫는데 얼마만한 노력이 필요한지 몰라서 그러십니까? 뿐만 아니라 저 많은 모피를 천상각이 아니면 누가 소화한단 말입니까?”
“자라니까?”
“대법왕입니까? 그가 지시한 것이지요?”
“감히 어디서 함부로 대법왕님의 신성한 용명을 담는 것이냐. 어서 가 자.”
“뭔가 있소. 대법왕도 사람이란 말이오? 필시 본가에 어떤 흑심을 품고 있단 말이오?”
“네 이놈.”
“아버님.”
“빨리 가서 안자.”
노려보는 부친을 마주 노려보다 자청단이 몸을 돌렸다.
자신의 거처로 걸어가는 자청단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미쳤다!’
자신이 보기에 부친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예전의 부친이 아니었다.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보나마나 대법왕의 세치 혀에 완전히 놀아나고 있음이 분명했다.
척!
씩씩거리며 처소로 걸어가던 자청단이 걸음을 세웠다.
어둠속에 눈처럼 흰 백의를 걸친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아…아니 백대협 아니시오?”
백의사내는 백쾌섬이었다.
자청단이 다가서며 말했다.
“주무시지 않고 여긴 왜 나와 있는 게요?”
백쾌섬이 말했다.
“그러는 자형은 잠옷 바람으로 이 밤에 어딜 다녀오시는게요. 더구나 표정을 보아하니 몹시 불쾌한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구려.”
순간 자청단의 표정이 더욱 우그러졌다.
그리고 부친의 결정에 대해 불만을 쏟아 내었다. 침까지 튕겨가며 불만을 토해내는 자청단을 바라보는 백쾌섬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 날카로운 섬광이 피었다가 사라졌다.
“그…그게 정말이오?”
“내가 이 밤에 헛소리 할 일 있소. 제기랄, 그 인간 때문에 아버님이 완전히 이상 해졌소.”
“그 인간이라면?”
“누군 누구겠소. 대법왕인지 대밥왕인지 하는 작자이지.”
“카악!”
신경질적으로 가래침을 뱉으며 자청단이 지나갔다.
구시렁대며 지나가는 자청단을 바라보는 백쾌섬의 두 눈이 어둠속에서 더욱 형형해졌다.
복도를 들어선 동천몽은 깜짝 놀랐다. 분명 방을 나올 때 불을 껐는데 켜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방에 들어왔음을 직감하고 일목을 부르려 할 대 그가 먼저 나타나 입을 열었다.
“자 낭자께서 와 계시옵니다.”
“자 낭자?”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자시가 넘은 시간에 양해도 없이 불쑥 찾아왔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동천몽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일목의 보고대로 자정경이 창밖을 보고 서있다가 돌아섰다.
“놀라셨죠?”
“아미타불! 놀랐다기 보다는 의외구려? 무슨 일로 이 밤에 본왕을 찾아 온게요?”
자정경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앉아라는 말씀도 없으세요. 얼마나 오랫동안 서서 기다렸는데요.”
자정경이 웃었다. 사내의 혼을 빼고도 남을 만큼 뇌쇄적이다. 일부러
꾸민 것도 아닌 자연스럽게 베인 미소이어서 더욱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아미타불!’
마음이 울렁거리자 동천몽은 또 다시 불호를 중얼거렸다. 불호에는 큰 힘이 있다고 죽은 천장금왕이 말했다. 사악한 생각과 기운을 물리친다고 했다. 처음에는 콧방귀를 끼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었다.
동천몽이 권한 자리에 앉은 자정경이 똑바로 쳐다보았다.
별빛 같은 시선이 정면으로 날아오자 동천몽은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또다시 아미타불을 중얼거리며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자 말해보시오. 이 밤에 본왕을 이렇게 조용히 찾아오는 데는 필시 중요한 사정이 있을 것 같소만?”
“시간도 늦었으니 본론만 말하겠어요. 대법왕님께서는 소녀를 어떻게 생각 하세요?”
동천몽의 눈이 좁혀졌다.
“어…어떻게 생각하다뇨?”
“그냥 어떻게 생각하냐니까요? 대법왕님이 아닌 남자로서 말예요.”
화악!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나…난 대법왕이오?”
“그걸 누가 몰라요. 하지만 대법왕님도 남자잖아요. 아님 여자에요?”
“아미타불! 그건 아니지만.”
“그러니까 남자로서 여자인 날 어떻게 보는지 말씀해주세요?”
그러면서 자정경이 더욱 얼굴을 앞으로 들이밀었다.
동천몽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 또한 솔직히 말하겠소.”
“네 말해보세요.”
“자낭자야 말로 아름답고, 총명하고 예의 바르고 옷 잘 입고 똑똑하고 듣자하니 효녀이기도 하더구려.”
자정경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오른다.
동천몽은 계속 말했다.
“피부도 곱고, 여자로서는 완벽하오.”
진심이었다. 대법왕의 신분만 아니었다면 무슨 잔머리를 굴려서라도 이미 넘어뜨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것 말구요? 에를 들면.”
“예를 들면?”
“곁에 두고 가르치고 싶다거나. 남 주기 아까운 재능이니 대법왕님께서 제자로 삼고 싶다는 그런 마음 들지 않느냔 말씀이죠?”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제…제자?”
“말이 나왔으니까 까놓고 말하겠어요. 나 제자로 삼아주세요.”
“……”
“왜 그런 눈으로 보시죠? 제자 몰라요? 무예를 대법왕님께 배우고 싶다는 얘기예요. 설마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시겠죠?”
“천만에 들지 않다니 전혀, 하지만 갑자기 제자로 거둬달라니 약간 당황스럽군. 그러니까 한마디로. 예…”
동천몽이 더듬거리자 자정경이 환하게 웃었다.
“그럼 허락으로 알고 인사 올리겠어요.”
그러더니 다짜고짜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나 양손을 포개어 이마에 대었다.
동천몽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지…지금 뭐하는 거요?”
자정경이 이마에 양손을 대고 말했다.
“보면 모르세요. 사제지연을 맺으려면 구배지례를 올려야 하잖아요. 절 받으세요. 사부님.”
“자…자 낭자.”
“말리지 마세요.”
동천몽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쿵 소리가 나도록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동천몽은 망연한 표정으로 열심히 절을 올리는 자정경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정성을 다해 구배를 끝낸 자정경이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대법왕님은 저의 사부님이세요. 난 제자구요.”
“여인의 몸으로 불가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속가자제라는 것도 있다면서요?”
“웃!”
동천몽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자정경은 이미 사전에 치밀한 조사를 한 듯 했다.
“아미타불!”
“오늘부터 이방 청소는 제자인 소녀가 하겠어요. 물론 사부님의 옷 빨래 또한 당연히 제자인 제가 할거구요. 뿐만 아니라 밥상도 이 제자가 차릴 것이고.”
동천몽의 눈이 커졌고 자정경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 제자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어요. 그러니 사부님은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오로지 저에게 무공만 가르쳐 주세요. 어차피 인생이라는 게 서로 돕고 사는 것 아니겠어요. 사부님.”
자정경이 씩 웃었다.
치아가 눈처럼 희고 곱다. 양볼에 생기는 조그마한 보조개가 그녀의 미소를 더욱 화려하게 만들었는데 동천몽은 눈을 감아버렸다.
‘아미타불! 완전 죽이는구나.’
쉽게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가만 하는 것을 보아하니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를 한 듯 했다.
“뭐…뭐하는 것이오?”
갑자기 자정경이 빗자루를 들더니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보면 몰라요. 이렇게 불결한 방에서 사부님께서 주무신다는 것은 말이 안되요. 그리고 제자에게 공대를 하는 사부님이 어디 있어요. 앞으로 말씀 놓으셔요. 알았죠?”
“그…글세 말…이오야.”
“푸훗! 글쎄말이오야, 그게 무슨 말이죠?”
“아무래도.”
“아무래도 너무 일방적이지 않냐고 말씀하시려고 그러시죠. 하지만 이걸 아세요. 전 이미 구배지례로 하늘과 땅에 스승과 제자가 되었음을 선포했다는 것을요.”
다다익선이라고 했고 열 여자 싫어할 남자 없다고 했다. 더구나 천하쌍미 중 한명을 제자로 두었으니 싫어할 이유는 죽어도 없었다. 오히려 내심 좋아 죽을 것 만 같았다. 그렇잖아도 어떻게 하면 자정경과 계속 인연을 만들어 갈까 고민을 했었다. 그런데 스스로 제자 되 길 자청했으니 이거야 말로 기연이랄 수 있었다. 하지만 대법왕의 체면이 있으니 당연히 겉으로는 난감한 척 하는 것이다.
“아미타불!”
대낮도 아닌 오밤중에 청소를 하는 자정경을 보며 동천몽은 부지런히 불호를 되 뇌였는데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세속의 시절과 가장 달라진 것이라면 일어나는 시간일 것이다. 세속에서는 거의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다. 물론 술을 마시며 밤새 기녀들과 뒹구느라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대법왕이 되면서부터는 하루도 늦잠을 자본적이 없었다. 늦게 잠자리에 들어도 일어나는 시간은 항상 일정했다. 어제 밤 역시 축시가 다되어 누웠는데 정확히 묘시에 눈이 뜨였다.
그런데 눈을 뜨자 마가 기다렸다는 듯한줄기 옥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사부님 기침 하셨어요.”
깜짝 놀라며 상체를 일으켰다.
침대 끝에 자정경이 다소곳이 서 있었다. 동천몽이 눈을 크게 뜨고 보다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었다. 한참을 쳐다보고 나서야 어제밤 사건이 일목요연하게 잡혔다.
“아미타불! 그래 잘 잤느냐?”
“너무 잘 잤어요. 사부님도 편히 주무셨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지금 차물 끓이고 있거든요.”
자정경이 가벼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잠자리에 일어나자마자 꽃보다 예쁜 제자가 웃어주니 기분은 상쾌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한 구석이 뜨거워진다. 자신도 모르게 아랫도리가 꿈틀거렸다. 슬며시 이불을 당겨 하체를 덮었고 자정경이 차물이 다 끓여졌을 것 같다면서 방을 나갔다.
동천몽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인이 제자가 되어 기쁘기도 하지만 이럴 때는 고통이다. 삶이 고통이라는 말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고 자정경이 방을 나가자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아랫도리가 예리한 각도로 불쑥 서 있다. 얼른 풍성한 가사를 걸쳐 아랫도리를 가렸다.
잠시 한쪽 벽에 걸린 동경앞으로 다가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근엄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좀체 수그러들 줄 모르는 성 난 아랫도리가 자꾸 신경쓰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자정경이 다기를 들고 들어섰다.
탁자 위에 찻잔을 놓고 주전자에 들어 있는 차물을 조심스럽게 따랐다.
또르르!
“무슨 차인지 알아 맞춰보세요? 사부님.”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자정경이 생글 거리며 물었다.
동천몽이 머뭇거렸다. 차를 자주 마시긴 했지만 좋아서 마신 건 절대 아니었다. 차를 마시면 뭔지 모르지만 대법왕의로서의 품위가 설 것 같아서 마셨을 뿐이니 당연히 차의 종류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아미타불!”
일단 불호를 크게 되 뇌이며 잔뜩 무게를 잡았다.
그리고 아무리 코를 벌름 거리며 입맛을 쩝쩝 다셨지만 쌉쌀한 맛 말고는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제자 앞에서 망신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득 흑수당에 온 첫날 마셨던 차 이름이 떠올랐다. 그때 마셨던 차와 맛이 같았다.
“쌍금차 로구나.”
“어멋! 맞추셨어요. 차에 일가를 이루었다더니 정말 귀신 같아요.”
차에 관해 몇 마디 나누던 중 뭔가 있는 척 해보이기 위해 해박한 척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였는데 그 얘기를 두고 하는 소리였다.
동천몽은 더욱 근엄한 표정으로 차를 마셨고 잔을 비우자 기다렸다는 듯 다시 잔을 채웠다.
“저어 죄송하지만 사부님 올해 세수가?”
멈칫!
막 차를 마시려던 동천몽의 안색이 급변했다.
어려운 말이 마침내 나오고 만 것이었다. 고개를 쳐들면 당황하는 표정이 노출된다. 그래서 동천몽은 느릿하게 차를 마시며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분명 어디선가 많이 들어온 말임에는 분명했다.
‘세수!’
절대 물로 얼굴을 씻는 그 세수가 아니라는 것 하나 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찻잔에서 입을 떼면 대답을 해야 하므로 악착같이 대고 있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차를 마시며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그런 동천몽을 자정경의 두 눈이 감시하듯 쳐다보았다.
팟!
동천몽의 두 눈이 이채를 발했다. 마침내 생각이 나고야 만 것이었다. 생각이 났다고 해서 얼른 대답하면 촐삭 맞다. 동천몽은 천천히 차 맛을 음미하듯 잔을 떼어내고 자신을 바라보는 자정경을 쳐다보았다.
세수는 윗사람의 나이를 물을 때 표현하는 말이었다. 한데 문제는 자정경이 갑자기 나이를 왜 물었는지 그 의중을 알아야 했다. 그러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왜 제자를 그렇게 보셔요? 빤히 쳐다보니까 조금 부끄러워지려고 그러잖아요.”
자정경의 볼이 약간 불그레해졌다. 순간 아랫도리가 또다시 불끈 일어난다. 말씨 행동 하나가 남자의 넋을 흔들어 놓기에 부족함이 없는 여인이었다.
“올해로 스물 둘이니라.”
두 살을 올려 말했다. 그 이유는 몇 일 전 우연히 자추동을 통해 자정경의 나이가 스물 하나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제자보다 나이가 적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머 그래요. 우휴 다행이네.”
자정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배고프시죠. 금방 식사를 올릴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차 주전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방을 나갔다.
멈칫!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자정경이 걸음을 세웠다. 문 앞에 일목이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봐도 봐도 일목의 하나뿐인 눈은 섬칫했다.
“왜…왜 그런 시선으로 소녀를 보시나요?”
아무리 어깨를 펴려고 해도 일목 앞에서만 자꾸 위축되었다.
일목이 매서운 눈으로 말했다.
“정말로 대법왕님을 사부님으로 모실 생각이오?”
“네!”
“본궁에는 여자 제자를 받지 않는 다는 것을 모르오?”
“그래서 속가제자로 하기로 했어요.”
“이보시오. 낭자. 지금 제정신이오? 낭자가 사부로 모시고자 하는 분은 평범한 분이 아니란 말이오. 만인의 어버이이자 살아계시는 부처 대법왕이란 말이오.”
“알아요.”
자정경이 지지 않고 대답하자 일목의 하나뿐인 눈이 더욱 섬뜩한 광채를 발했다.
“낭자? 바보요. 아직도 본 대법위의 말을 못 알아 듣겠소?”
“네!”
반항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자정경이 불쾌하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다시 말하겠소? 대법왕님을 개인적으로 제자를 둘 수 없소이다. 그렇게 알고 포기 하시오.”
“누구 맘대루요?”
자정경이 눈을 치켜떴다.
쉽게 물러날 기세가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일전불사도 마다 않을 표정이었다.
사실 궁을 출발하기에 앞서 천장금왕이 자신을 조용히 불렀다. 동천몽의 관상에 여난이 끼었으니 자신더러 각별히 신경을 써라고 당부를 했다. 혹시라도 제자들 귀에 여난으로 대법왕이 고생을 한다는 말이 들어가기라도 하면 체통이 안 선다는 것이다. 각별히 신경쓰라는 말이 무슨 뜻이겠는가. 여자가 달라붙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잘라 버리라는 의미 아니겠는가.
“내 맘대로요. 내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오.”
“흥!”
자정경이 가소롭다는 듯 코방귀를 끼며 복도를 걸어갔다.
걸어가는 자정경 등에 대고 쐐기를 박듯 엄포를 놓았다.
“분명히 경고했소. 다시 한 번 대법왕님께 사부님 운운했다가는 가만 안두겠소.”
자정경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맘대로 하라는 의미였고 일목의 눈이 좁혀졌다.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배교의 율법에 어떤 이유로도 여자와 어린아이와 노인에게는 함부로 힘자랑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여자와 어린아이와 노약자에게 힘자랑을 하는 인간이야 말로 가장 추잡하고 더럽다고 했다.
‘으음!’
일목의 입술이 물렸다.
여자에게 검을 뽑을 수도 없다. 그렇다고 수수방관 할 수는 더욱 없었으므로 이마가 찡그려 졌다.
드르륵!
일목이 갑자기 문을 소리나게 열고 들어섰다.
동천몽이 차를 마시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일목이 비장한 표정으로 다가가자 동천몽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왜 인상을 쓰고 그러느냐?”
일목이 심호흡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존경하는 대법왕님 지금부터 소승이 하는 말은 순전히 존경하는 대법왕님을 위해 드리는 충언임을 알아 주십시오.”
일목이 엄숙하게 입을 열자 동천몽의 이마가 좁혀졌다.
“뭔데?”
일목이 혀로 입술을 축였다.
“존경하는 대법왕님, 자 낭자를 조심하십시오. 그녀를 멀리 하시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이옵니다.”
이마에서 얼굴까지 찡그려졌다.
일목이 계속 말했다.
“대법왕님은 만인의 어버이십니다. 일개 여자 따위와 놀아나서는 안된다고 생각 합니다. 자고로 배교의 속담에 여자는 요물이라고 했습니다. 자정경 낭자는 소승이 보기에도 너무 아름답습니다. 어쩔 때는 저 여자가 사람인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저같이 여자를 돌같이 보는 사람도 가슴이 울렁이는데 여인을 아낄 줄 아시는 대법왕님이야 말로 오죽하겠사옵니까?”
“계속해.”
“사제의 연은 안됩니다. 당장 자르십시오. 득보다는 실이 많을 여자이옵니다.”
“드…득보다는 실?”
“이익보다는 손해가 많을 것이라는 뜻이옵…으악!”
일목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동천몽이 앉은 자세에서 그대로 이단 옆차기를 날려 왔기 때문이었다.
“다시 떠들어봐라. 뭐가 어쩌고 어째. 이런 호로 새끼가 그동안 눈 하나 뿐이라고 봐줬더니 이제 날 가르치는구만.”
퍼퍽!
막 일어나는 일목의 앞가슴과 얼굴에 또다시 옆차기가 틀어박혔다.
꽈당!
일목이 다시 고꾸라졌고 일어나는 일목의 가슴으로 연속해서 두 번의 옆차기가 더 박혔다.
주르르!
일목의 코에서 쌍코피가 흘러내렸다.
“아이고, 살려주십시오. 잘못했사옵니다.”
일목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삭삭 빌기 시작했다.
“대법왕님 자비를 베푸시어.”
“고개 들어.”
동천몽이 의자를 끌어 당겨 거꾸로 앉았다.
무릎을 꿇은 일목이 겁에 잔뜩 질린 눈으로 의자에 앉은 동천몽을 보았다.
일목의 코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내렸다.
“다시 말해봐. 조금 전에 내게 했던 말.”
“아…아니옵니다. 제가 미쳤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제자를 받고 안 받고는 내 맘이다. 그런데 네놈이 뭔데 감히 감놔라 배 놔라 하는 거야.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가.”
“주…죽여주십시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제가 요즘 이상해진 것 같사옵니다. 대법왕이시여 자비를 풍성히 내려주소서.”
“일목!”
“하명하소서. 대법왕님이시여.”
“한번만 내가 하는 일을 간섭하려 들었다간 그땐 그 하나 뿐인 눈 없어진다. 알았느냐?”
“명심 하겠사옵니다. 절대 간섭 않겠사옵니다.”
“나가봐.”
“옛!”
“닦거라.”
동천몽이 흰 수건 한 장을 던져주자 일목이 굽실거리며 받았다.
동천몽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가는 일목을 노려보았다.
그때 밖으로부터 자정경의 꾀꼬리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사부님 식사 가져왔어요.”
“오 그래!”
문이 열리고 상을 들고 들어서는 자정경이 흰 수건을 콧구멍에 박고 나가는 일목을 보며 기겁했다.
쾅!
일목이 문을 닫고 나가고 자정경이 밥상을 한쪽에 놓고 물었다.
“사부님 일목선사께서?”
“까불기에 손 좀 보았느니라. 넌 신경쓸 것 없다.”
자정경이 문 쪽을 보고 쌤통이라는 듯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동천몽이 화려한 밥상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이 모든 것을 네가 다 준비 했단 말이냐?”
“그럼요?”
자정경이 시선을 피했다. 부잣집에고 곱게 큰 그녀가 이토록 능숙하게 요리를 한다는 것은 사실 믿어지지도 않을뿐더러 설득력이 부족했다. 필시 아랫사람에게 시켜 만들어 왔겠지만 동천몽은 모른 체 하기로 했다.
“맛이 어때요?”
“아미타불! 가히 꿀 이로고.”
동천몽이 칭찬을 하자 자정경의 표정이 환해졌다.
동천몽이 본격적으로 숟가락을 들 때 밖으로부터 발자국 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자정경도 고개를 들어 입구를 쳐다보았다.
“대법왕님 자추동이옵니다.”
‘아버지께서.’
자정경의 눈이 커졌고 동천몽이 큰 소리로 말했다.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고 자추동이 들어섰다. 그런데 자정경이 동천몽의 밥상 앞에 앉아 있자 순간적으로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아버님 어쩐 일이세요. 여긴?”
자정경이 어색하게 웃었다.
잠시 자정경을 쳐다보던 자추동이 동천몽을 향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중파에서 온 본가의 중상들로부터 한 가지 놀라운 소식을 들었사옵니다. 안다(安多) 에서 큰 난리가 났다고 하옵니다.”
“난리라면?”
자추동이 얼른 입을 열지 않았다.
그때까지 밥 먹는데 정신을 팔고 있던 동천몽이 뭔가 불길함을 감지한 듯 고개를 돌렸다.
꾸울꺽!
입안에 들어 있는 음식을 그대로 집어 삼키며 말했다.
“왜 말을 하다 마는 거요?”
자추동이 더듬거렸다.
“무공방(無空房) 스님들께서 모두 살해되었다하옵니다.”
동천몽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자추동이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산적들 짓으로 판단하고 관부에서 조사를 하고 있지만 별 소득이 없나 봅니다.”
“무공방이라고 하면 천축으로 경전을 얻으러 다니는 학승들 아닌가요?”
무공방은 철저히 공부만 하는 선승들이다. 자주 천축을 들어가 세존의 발자취를 더듬고 그가 남긴 말씀을 기리는 순례자들이었다. 오로지 말씀만을 얻고 깨우치기 때문에 무공과는 담을 쌓는 승려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