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반전
이색기는 동천몽을 자금당(紫金堂)이라고 쓰인 전각으로 데리고 갔는데 들어서던 동천몽이 깜짝 놀랐다. 방안에 두 명의 시녀가 다소곳이 서 있었다.
“인사 올려라. 위대하신 대법왕님이시다.”
이색기가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 시녀가 나긋나긋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인월과 산향이 대법왕님을 뵈옵나이다.
이색기가 호통치 듯 말했다.
“대법왕님께서는 지금 아주 먼 길을 오셔서 무척 피곤하시다. 곧바로 목욕을 시켜드리고 원로에 쌓인 피로를 말끔히 풀어 드리도록 하라.”
“염려마시옵소서.”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편히 쉬십시오. 대법왕님.”
이색기가 포권의 예를 취한후 물러나갔다.
여인들이 다가섰다.
“몸을 씻겨 드리겠사옵니다. 옷을 벗으시지요.”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옷을 벗어?”
“목욕을 하시려면 옷을 벗어야 할 것 아니옵니까? 하지만 염려 마소서. 가만 계시면 소녀들이 벗겨 드리겠나이다.”
“아미타불! 하긴 옷을 입고 목욕을 할 수는 없지. 오냐 그냥 내가 벗겠느니라.”
동천몽은 훌러덩 옷을 벗었다.
옷이라고 해봤자 거의 걸레조각이 된 법의와 가사가 전부였다. 가운데 중요부위만 가린 천 조각만 남기고 알몸으로 변한 동천몽을 보며 두 여인이 눈을 크게 떴다.
“왜…왜 그러느냐? 뭐가 묻기라도?”
동천몽이 고개를 숙이다 말고 멈칫 했다. 중요 부위를 가리고 있는 속옷이 뗏 국물이 범벅이 되었고 특히 앞부분은 누렇게 물들어 있었다.
“아미타불! 너희들이 이해를 해야 하느니라. 먼 길을 오다보면 왕왕 이럴 때가 있느니라. ”
“갈아 입을 속옷을 안 갖고 다니시옵니까?”
동천몽이 눈을 크게 떴다.
“너희들이 너무 뭘 모르는구나. 중은 밥그릇 말고는 아무것도 갖고 다니지 않는다.”
“하오시면 절을 떠나 다시 돌아 올 때까지는 일체 속옷을 갈아입지 않는단 말이옵니까?”
“그…그렇지.”
생각만 해도 더럽다는 듯 두 시녀의 인상이 찌푸렸다.
동천몽이 이해를 시키려는 듯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지사지라고 했느니라. 너희도 머리 깎고 중이 되면 내 속옷의 이런 현상을 충분히 이해 할 것이다. 욕조는 어디에 있느냐?”
“이쪽으로.”
인월이 안쪽으로 데려갔고 또 하나의 방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뒤를 따르던 산향이 문을 열어주었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자욱한 수증기가 피어나는 거대한 욕조가 준비되어 있었다.
확!
동천몽이 속옷까지 벗어 던지고 욕탕안으로 들어가자 두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아미타불! 세존께서 말씀하시길 네가 머무는 곳이 곧 집이라고 했는데 정말 포근하고 좋구나.”
“등을 밀어 드리겠사옵니다.”
“그래, 부탁한다.”
두 여인이 동천몽의 등을 밀기 시작했다.
두어 번 밀었을 뿐인데 시커먼 떼가 밀려나오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세상에.”
“마…말도 안돼.”
“왜 그러느냐? 뭐가 잘못되었느냐?”
산향이 더듬거렸다.
“이건 떼라기보다는 떡고물입니다.”
“너희도 출가를 하면 그런 현상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뭣들 하느냐? 속히 밀 거라.”
두 여인이 등을 밀었고 시커먼 떼가 수북이 나왔다.
동천몽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자추동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눈앞에 있는 아들이 생각할수록 영특하고 자랑스러웠다. 십만 냥을 보내면서 얼마나 가슴 아파 했던가. 자신의 살점이 찢겨나간 듯 했고 몇일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자청단이 십만 냥을 그대로 가져왔다고 하자 날아 갈 것만 같았다.
“눈치를 채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돈 얘기는 처음부터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아마 아버님께서 돈을 주신 줄은 꿈에도 모를 것입니다.”
자추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사란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장하다. 내 아들.”
황금 백만 냥이 굳었다고 생각하자 저절로 입이 벌어진다.
두 부자가 흐뭇한 표정으로 웃고 있을 때 동천몽이 들어섰다.
“아미타불! 무슨 즐거운 일이 있기에 두 분께서 그렇게 웃고 계시오?”
두 사람은 깜짝 놀라며 표정을 관리했다.
“대법왕님께서 와주신 은혜를 생각하자 너무 기뻐 웃음이 멈추질 않사옵니다. 목욕을 하신 기분이 어떠십니까?”
동천몽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아미타불! 남의 떼를 민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두 여인이 자신들 떼를 밀듯 어찌나 열심히 밀어주는지 감격했소이다.”
그때 이색기가 들어와 말했다.
“음식을 차려 놨습니다.”
자추동이 동천몽을 향해 말했다.
“대법왕님을 위해 이 늙은이가 간단한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아주
시장 하실 텐데 가시지요.”
“그렇잖아도 언제 밥 주나 하고 기다렸소이다.”
자추동은 동천몽을 커다란 방으로 데려갔다.
방으로 들어선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자단목으로 된 커다란 상위에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온갖 음식들이 빼곡 차려져 있었다. 가뜩이나 배가 고픈 마당에 코를 찌르는 음식향기에 동천몽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동천몽은 걸씬 들린 사람처럼 부지런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고 나중 들어온 백쾌섬 역시 무척 배가 고팠던 듯 군소리 않고 음식 먹는데 열을 올렸다.
그 많던 음식들이 다섯 사람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동천몽이 만족스런 표정으로 불룩 솟아난 배를 어루만졌다. 시녀들이 들어와 빈 그릇을 깨끗하게 치웠고 잠시 후 뜨거운 김이 나는 차를 내왔다.
모두 차를 마시는데 열중했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탁!
문득 자추동이 잔을 내리더니 차를 마시고 있는 동천몽을 쳐다보았다.
“대법왕님께 한 말씀 올리겠나이다.”
동천몽이 찻잔을 내리고 쳐다보았다.
자추동이 말했다.
“먼저 본가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그 먼 길을 달려와 주신 대법왕님의 자비에 이 늙은이는 진심으로 감복했사옵니다.”
“아미타불! 별것 도 아닌 걸 가지고.”
“아이들에게 본가가 처한 상황을 전해 들었으리라 생각 하지만 이 늙은이가 다시 한 번 설명해 올리겠나이다.”
그러면서 흑수당이 처한 얘기를 소상히 설명했다. 자씨 남매로부터 들었던 내용과 큰 차이는 없었다.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본가를 위협하는 암중 무리를 엄혹하게 처단해 주옵소서.”
동천몽이 차를 비우며 물었다.
“이게 무슨 차요? 혀에 착착 달라 붙는 것이 범상치 않구려?”
“쌍금차라고 이 지역에서만 나는 차이온데 피부를 젊게 하고 특히 남자에게는 정력을.”
정력이라는 말에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한 잔 더 마셔도 괜찮겠소?”
“물론이옵니다. 여봐라. 당장 대법왕님께 차를 더 한 잔 더 올리거라.”
자추동이 밖을 향해 말했고 잠시 후 시녀가 찻주전자를 들고 들어와잔을 채웠다.
동천몽이 흡족한 얼굴로 차를 마셨다.
후루룩!
동천몽이 소리 내어 서너 모금 연속으로 마시더니 잔을 내려놓았다.
모든 시선이 동천몽에게 멎었다.
“자 당주.”
“말씀 하소서.”
“자당주를 괴롭힌 적은 이미 궤멸 되었소.”
“네엣?”
자추동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고 자청단이 물었다.
“그게 무슨 얘기오? 적이 궤멸 되 다뇨?”
동천몽이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하지. 적은 사라졌소이다. 더 이상 자당주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오.”
자동추가 눈썹을 모으며 말했다.
“이 늙은이의 머리가 아둔하여 대법왕님의 말씀을 잘 헤아리지 못하겠나이다. 좀 자세히 설명을.”
“자당주의 상단을 몰살하고 협박한 적은 뢰음사요.”
순간 모든 사람들이 경악했다.
“뢰…뢰음사라면?”
“그들이 설마?”
동천몽이 조용히 말했다.
“그들이 노린 표적은 자당주가 아니었소. 실제 그들이 칼을 겨누고 있었던 적은 바로 여기 앉아 있는 본왕이오.”
사람들의 얼굴이 갈수록 찌푸려졌다.
동천몽의 말뜻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혀로 입술을 축였다.
“서장의 개인이나 집단은 누구든 억울한 일을 당하면 본궁을 찾아와 도움을 호소하오. 적은 그것을 노렸소. 그런데 자당주가 꼼짝도 하지 않자 더욱 많은 수하들을 몰살하여 기어코 본궁에 도움을 요청하도록 유인 한 것이오?”
“저…정말로 본가를 해칠 목적이 아니라.”
“그렇소. 그들은 나를 죽이려고 흑수당을 공격했던 것이오. 그래서 보다시피 그들 뜻대로 내가 이렇게 움직였지 않소?”
그때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던 자정경이 물었다.
“하오시면 혹시 오는 도중 기습을 받았던 것이 바로.”
동천몽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자낭자의 두뇌는 뛰어나구려. 무척 어려운 문제를 아주 간단히 알아맞히다니.”
자정경이 부친에게 오는 도중 뢰음사 뢰음칠혈로부터 공격을 받았던것과 같은 시간에 포달랍궁 또한 공격을 받은 것을 얘기해 주었다.
“하나 중요한 것은 뢰음사 또한 본인들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것이오. 여기 한 잔 더.”
기다렸다는 듯 시녀가 들어와 잔을 채우고 나간다.
동천몽이 흐뭇한 얼굴로 차를 홀짝 거렸다. 그런 동천몽을 자정경이 미소 띈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세진 정력을 해소 할 곳도 없는 대법왕이 어디에 쓰시려고 저렇게 열심히 마실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뢰음사는 칠십 년 전 본궁을 공격했다가 신물까지 빼앗기는 수난을 당했소. 비록 그동안 절치부심 복수의 기회를 노렸지만 지금의 전력으로는 본궁의 상대가 되지 못하오. 그런데도 공격을 감행했던 것은 오로지 날 죽이기 위해서요. 그 증거는 바로 뢰음칠혈이오. 그들은 뢰음사 전력의 절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생각해보시오. 본궁을 노렸다면 그들도 본진과 합세를 해야 정석 아니오?”
‘그렇다면.!’
백쾌섬의 머릿속으로 피어나는 의문 하나.
뢰음사는 왜 포달랍궁과 원한을 맺은 형편이 되지 않는데도 동천몽을 노렸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건 곧 뢰음사의 뜻이 아니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대법왕님께 한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물어 보시오. 백형.”
“대법왕님의 말씀대로라면 뢰음사가 주범이 아니라는 얘기 아니옵니까?”
“맞소. 그들은 아니오.”
“하면 대법왕님을 공격 하도록 뢰음사를 움직인 배후가 누구이온지요?”
동천몽이 대답을 하지 않고 차를 마셨다.
모든 시선이 동천몽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잔을 내리고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글쎄, 그건 나도 모르지요. 물론 의심 가는 곳이 없지는 않지만.”
“어디?”
“증거도 없이 이 자리에서 말할수는 없지요. 자칫했다간 큰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고 상대 명예를 훼손할 위험도 있고.”
백쾌섬이 다시 차를 마시는 동천몽을 쳐다보았는데 두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동천몽과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것도 곁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그에 대해서 파악을 끝냈다.
‘알고 있다!’
백쾌섬은 확신했다.
결국 뢰음사 공격이 있기 전부터 자신을 노린 흑수당 공격이라는 것을 꿰뚫어 보았다는 뜻인데 그런 능력이라면 뢰음사 뒤에 버티고 있는 흉수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의문이 꼬리를 이었다.
뢰음칠혈이 죽었고 포달랍궁에 의해 뢰음사 사주가 생포되었다면 흑수당을 위협하던 적은 사라졌다. 그런데 왜 굳이 여기까지 왔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물론 자정경을 바라보는 동천몽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단지 여인 하나 때문에 왔을 리는 절대 없었다.
‘있다!’
이것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의미 없이 그 먼 길을 마다않고 온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었다.
백쾌섬의 눈이 가늘어졌다. 동천몽은 자신이 지금까지 겪은 강호의 어떤 고수보다 뛰어났다. 무공도 뛰어났지만 그의 재능은 두뇌였다. 학문의 머리와 전략을 짜는 머리가 다르다지만 돌대가리라는 혹평을 들을 만큼 나쁜 머리가 어쩌면 자신을 감추기 위한 치밀한 연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갈수록 짙어진다.
여인의 눈썹 같은 초승달이 대설산 머리 위에 떠 있다. 사방이 어둠에 잠겨 있는데 한 곳의 창문에서만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황초불이 실내를 환히 밝히고 있는 곳은 당주 자추동이 거처하는 벽상각이었다.
자청단과 세 시진 째 머리를 맞대고 한 가지 사안을 분석 중에 있었다. 그것은 동천몽이 무슨 일로 흑수당을 찾아왔느냐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말처럼 뢰음사가 흉수이고 이미 궤멸되었다면 올 필요가 없는 일 아닌가. 자정경의 미모에 현혹되어 따라왔다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분석해본 결과 일부는 될 지언 정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늦었다. 내일 다시 분석하기로 하고 그만 돌아가 쉬거라.”
“그만 편히 주무십시오.”
자청단이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자추동이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다 몸을 일으켰다.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한기 실린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했다. 봄이 오고 있지만 한 밤중의 바람에는 냉기가 담겨 있었다.
멈칫!
마당가를 살피던 자추동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마당가에 서 있는 오동나무 아래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어둡지만 한 눈에 동천몽임을 알 수 있었고 천천히 다가갔다. 발자국 소리에 동천몽이 몸을 돌렸다.
“아니 아직 안 주무셨소?”
“그러시는 대법왕님이야 말로 이 시간까지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아미타불! 하도 저 달이 아름다워 잠을 이룰 수가 없지 뭐요?”
대설산 고봉 끝에 걸린 초승달을 바라보았다.
“저 달 속에 사람이 산다는데 당주는 그 말을 믿으시오.”
“안 믿습니다.”
“하긴 장사꾼은 두 눈으로 보기 전에는 절대 믿지 않지요. 나 또한 그 말을 믿지 않소.”
잠시 대화가 끊어졌고 두 사람은 오동나무 아래 나란히 서서 초승달을 바라보았다.
휘이이!
불어오는 바람에 아직 잎이 피어나지 않은 오동나무 가지가 흔들거렸다.
“대법왕이시여?”
“본왕에게 할 얘기 있소?”
“솔직히 대답해 주셨으면 하옵니다. 이 늙은이 같았으면 뢰음칠혈을 제거한 후 곧바로 환궁 했을 것이옵니다.”
“그런데 날 더러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고 묻는 것이로군. 별것 아니오?”
“……”
“물론 당주 말씀처럼 흑수당을 위협하던 적은 중간에서 소멸되었소. 하지만 난 대법왕이오. 단순히 적이 사라졌다고 중간에서 그냥 돌아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 하오. 비록 장애물은 제거 되었지만 직접 한 번 찾아와 장주도 뵙고 또 다른 사연이나 요청할 도움은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 대법왕의 일 아니겠소.”
자동추의 눈이 커졌다.
동천몽이 별빛 가득한 야천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난 당주를 비롯해 사람들의 삶에 관여하고 싶지 않소. 다만 본 왕의 손을 빌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빌려 주고 싶을 뿐이오.”
“혹시 본가에서 아직까지 단 한 푼도 포달랍궁에 금전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들었소.”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그런 말을 듣고도 본가를 도우고 싶었습니까?”
“나도 인간이오? 어찌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소. 하지만 인간의 감정이란 스스로 움직이고 일어나야지 자극이나 타의에 의해 강요된 움직임은 생명력이 짧을뿐더러 인간관계를 악화시키오.”
“저에 대한 세간의 평은 들으셨는지요?”
동천몽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계가 아니니 사람마다 사는 방식이 달라야 정상 아니오? 난 당주를 나쁘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소. 단지 다른 사람보다 더 노력했고 악착같았다는 것이오. 돈은 신성한 것이오. 그렇기 때문에 돈이 많다는 것은 존경 받을 일이지 비난의 대상은 될 수 없소. 다만.”
“다만 뭡니까?”
“더럽게 벌었더라도 쓰임새만큼은 깨끗하고 화려하며 감동적이었으면 더 신성한 돈이 될 것이라는 얘기오.”
퍽!
자추동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동천몽이 놀라며 말했다.
“갑자기 무릎은 왜 꿇고 그러시오. 날씨도 추운데 어서 일어나시오.”
자추동이 머리를 조아렸다.
“이 늙은이를 벌해 주십시오. 이 늙은이는 너무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못질을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다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좋은 곳에 써보지를 못했습니다. 더구나 저는 대법왕님을 속였습니다.”
“날 속이다뇨?”
자추동이 자청단에게 준 십만냥 얘기를 했다.
“자식의 흠은 곧 부모의 흠 아니겠사옵니까? 그런데 이 늙은이는 아주 잘했다고 격려까지 해주었지요.”
동천몽이 빙긋 웃었다.
“그게 어찌 나쁘단 말이오? 돈을 투자하지 않고 이익을 볼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장사가 어디있겠소? 역시 장사꾼 핏줄은 다르구려.”
“대…대법왕이시여 이 늙은이와 자식 놈을 용서 하소서.”
자추동이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동천몽이 자추동을 일으켜 세웠다.
자추동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당신 지금 우는 것이오?”
“아…아니옵니다. 그냥.”
그러면서 소매로 잽싸게 눈물을 닦았다.
“당주.”
“말씀하소서.”
“본궁에 시주 하지 않아도 되오. 대신 본궁에 건네려고 했다는 그 돈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면 안 되겠소? 오면서 보니 흉년으로 끼니를 굶은 사람이 적지 않더구려. 사람은 더불어 살아야 재미난 것이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말든 자기 배만 생각하는 사람이야 말로 짐승이오. 가난은 게을러서도 아니고 무능력해서는 더욱 아니오. 그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그렇게 된 것이오.”
“대법왕님의 뜻을 받들어 그렇게 하겠나이다.”
“고맙소. 당주.”
동천몽이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자추동이 깜짝 놀랐다. 아무리 밤이라지만 지척이기 때문에 얼굴이 또렷하게 보인다. 그런데 착시인가.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동천몽이 아니라 부처였다.
“나…나무관세음보살.”
자추동은 자신도 모르게 합장하며 몸을 떨었다.
동천몽의 오른손이 자추동의 어깨를 어루만졌는데 한 가닥 뜨거운 기운이 몸속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훈훈했고 온 몸을 황홀하게 만드는 묘한 마력을 갖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두 사람을 보며 마른침을 삼키는 사람이 있었다. 둘이서 나눈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기에 더욱 백쾌섬의 눈은 굳어 있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자추동을 완전히 감화 시켜버린 동천몽의 능력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동천몽이 수고를 마다 않고 이곳까지 온 목적이 밝혀진 것이었다.
강호인들은 사람을 힘으로 누르고 지배하려 든다. 하지만 그런 지배는 절대 충성심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사람을 지배하고 이끌어 가는 것이다. 고금을 통 털어 반란은 항상 측근에 의해 저질러진다. 그건 곧 측근의 마음을 얻지 못한 채 억지 충성을 강요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동천몽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천상각과 더불어 서장을 장악하고 있는 흑수당의 주인을 완전히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버린 것이다.
패권의 토대는 황금이다. 오늘날 무림맹이 강성기를 보내고 있는 것 또한 천상각이란 막강한 자금줄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덕에 천상각 또한 많은 시장을 독점하고 있지만.
하지만 둘 사이는 순조롭지 못하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천몽은 자추동을 마음으로 끌어안고 있었다. 마음으로 맺어진 인간관계를 힘으로 맺어진 것과는 달라서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
콱!
백쾌섬의 오른손이 불끈 쥐어졌다.
두 눈 속에서 차가운 한기를 피어냈는데 그것은 무정한 살심이었다.
자신은 두 번째 이지만 여인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아주 화려하게 가례를 올리고 싶었지만 여인은 가까운 친지와 자녀들만 모아놓은 단촐한 가례를 원했다.
뿐만 아니라 여인은 혼인할 때 주고받는 예물도 조그만 옥가락지 하나로 만족했다. 부부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신뢰이지 화려한 보석 조각이 아니라고 했다.
“차 식소.”
오랜만에 동오룡과 능씨가 마주 앉았다.
능씨는 고개를 들어 동오룡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혼인을 한지 이십 이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처음 만났을 때처럼 동오룡 앞에서 서면 얼굴이 빨개진다.
“조금만 기다리시오.”
찻잔을 내린 능씨를 보며 말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녀석을 반드시 찾아 낼 것이오. 내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몽이 놈을 당신 앞에 데려다 주겠소.”
“감사해요.”
여전히 고개를 쳐들지 못하고 조그만 소리로 대답했다.
“죄지었소. 고개 좀 들어보시오.”
하지만 능씨는 섣불리 들지 않았고 거듭된 요구에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는데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있다.
흠칫!
목덜미까지 빨개진 능씨를 보자 갑자기 아랫도리가 뜨거워진다. 근래에 한 번도 없었던 신체의 반응이었다. 나이 탓인지 부부생활은 순조롭지 못했고 근자에 이르러 무림맹과의 감정에 휘말리다 보니 더욱 움츠려들었다. 좋다는 약이란 약은 모조리 구해 먹었지만 사내의 기능은 회복되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욕망이 치솟는다. 동오룡이 찻잔을 놓았다.
“가까이 오시오?”
능씨가 고개를 쳐들어 동오룡을 보았다.
멈칫!
자신을 바라보는 동오룡의 눈빛이 평소와 다르다. 분명히 욕망을 느낄 때 사내들에게 나타나는 혈안이었다.
능씨가 고개를 숙이며 엉덩이만을 움직여 다가가 상체를 기울였다.
와락!
동오룡이 능씨를 끌어안았다.
투툭!
동오룡의 오른손이 바빠졌다.
능씨의 옷고름을 풀어 헤치고 분홍빛 저고리를 거칠게 벗겨 내었다.
저고리를 벗기자 희고 고운 속살이 동오룡의 욕망을 더욱 부채질 했다.
치마가 벗겨나가고 속곳이 방바닥을 나뒹군다. 동오룡은 가슴과 하체만을 가린 능씨를 능숙하게 조율해갔다.
툭!
가슴을 묶은 천이 풀어지고 탐스런 가슴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십이 넘었는데도 능씨의 가슴은 탄력 넘쳤다.
콱!
동오룡의 오른손이 능씨의 가슴을 세차게 거머쥐었다.
“아아!”
능씨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고 동오룡의 얼굴이 가슴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동오룡의 자극적인 애무에 능씨의 입에서는 뜨거운 신음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동오룡의 고개가 능씨의 허리 아래에 박혔다.
“우욱!”
능씨의 눈이 커졌다.
검은 눈동자가 작아진다. 쾌감이 달아 오를 때 눈동자는 좁혀지고 대신 흰자위가 늘어난다. 동오룡의 얼굴이 쉴 사이 없이 능씨의 하체를 더듬어 갔고 급기야 엉덩이를 비틀었다.
“어서!”
능씨가 재촉했다.
동오룡의 얼굴이 들려졌다. 붉게 달아오를 두 눈이 극도의 흥분에 빠졌음을 말하고 있었는데 동오룡이 서서히 능씨의 몸 위로 자신의 체중을 싫었다.
그리고 한 순간 능씨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터져나왔다.
“아아! 여보!”
능씨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고 입술이 반쯤 열리고 뜨거운 김이 피어나온다.
저벅저벅!
능씨의 배 위에서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던 동오룡의 두 눈이 빛났다. 귓가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복도를 다가오는 발자국소리인데 끝에는 자신이 묵는 방 뿐이었다.
‘오지마라!’
동오룡은 속으로 외쳐 말했다.
실로 오랜만에 사내의 기능이 살아난 것이다. 그토록 좋은 약과 이름난 의원을 불러다 치료를 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사내의 왕성한 기능이야 말로 배포와 능력의 잣대라고 믿는 동오룡에게 상실은 충격이었다.
그런데 생각지 않게 갑자기 오늘 포기하다시피 했던 기능이 살아난 것이다. 비록 대낮이었지만 이 얼마나 기다리던 순간이고 간절히 원했던 일이었는가.
‘돌아가라!’
발자국 소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속도가 조금 빠른 것이 적지 않게 급한 일인 듯 싶었다. 하지만 힘들게 얻은 순간이었으므로 그 어떤 일도 이보다 중요할 수는 없었다.
척!
발자국 소리는 방문 앞에 멈춘다.
‘꺼지라니까 이 새끼야!’
속으로 외쳐 말했다. 하지만 밖에 있는 자가 들을 리가 없었다.
“각주님!”
예상대로 다급한 목소리였다.
동오룡은 대답하지 않았고 끓어오르는 몸을 주체 못한 능씨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연신 신음을 토했다.
“각주님! 오만상입니다.”
자신의 오른팔이다. 수십 년을 같이 했기에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다. 그런 오만상이 굳게 닫힌 방문을 보면서도 입을 연다는 것은 뭔가 아주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물론 평소라면 당연히 보고가 우선이다. 그러나 동오룡은 절대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평소 능씨의 성품을 보건데 밖에 누가 있으면 금세 옷매무새를 고쳤을 것이다. 남편이 아무리 요구해도 대낮이라면 결코 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 역시 첫날밤은 맞은 여인네처럼 적극적이고 뜨겁게 몸을 비벼대고 있다.
“무림맹의 상관 총관께서 급히 각주님을 뵙고자 하옵니다.”
뚝!
동오룡의 몸이 멈췄다.
무림맹이란 이름을 듣자 화산처럼 끓어 올랐던 몸이 얼음벼락을 맞은 듯 일시에 식어든다. 저돌적으로 여인의 몸을 탐하던 남성 또한 순식간에 힘을 잃고 고개를 떨구어 버렸다.
능씨 또한 아쉬움과 안타까움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의 배 위에 올라있는 동오룡을 쳐다보았다.
동오룡이 능씨의 배위에서 내려와 옷을 걸쳤다. 능씨 또한 몸을 일으켜 벗겨진 옷으로 알몸을 가리고 이마에 묻은 땀을 수건으로 닦아 지운다. 그리고 두 마디 말도 않고 뒷문을 통해 밖으로 사라졌다.
옷매무새를 고친 동오룡이 밖을 향해 말했다.
“뫼시거라.”
오만상의 발자국이 다시 멀어져간다.
동오룡의 시선이 조금 전 능씨가 누웠던 방바닥에 멎었다. 능씨의 등에서 흘러나온 땀이 바닥에 점점이 묻어있다.
아쉬운 한숨을 내쉬고 근엄한 얼굴로 자리를 잡을 때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상관량이 들어섰다.
동오룡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상관량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총관님.”
“핫핫! 기별도 없이 찾았는데 결례가 아닌지 모르겠소이다. 동 각주.”
상관량이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으며 반갑다는 듯 손을 내밀었고 동오룡이 잡았다.
상관량의 손이 희다. 얼굴만 가린다면 여인의 손으로 착각할 만큼 고왔는데 손이 고우면 심성이 냉혹하다는 장사꾼들의 속담이 갑자기 떠오른다.
“앉으시지요.”
책상겸 탁자로 쓴 조그만 상을 놓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동오룡이 밖을 향해 차를 가져오라고 말했고 두 사람은 잠시 그간의 안부를 주고받으며 항시 만나면 해왔던 인사를 나누었다.
시녀가 차를 들여와 놓았고 두 사람은 찻잔을 들어 마셨다.
돈을 가져 간지 두 달이 채 안되었다. 평균 일 년에 많아야 세 차례 정도 방문하는데 아직 올 때가 안 되었다. 물론 요즘 잦은 방문의 변(辨)을 들으면 흑도무림이 급속히 발호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느라 자금 소요가 많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도 강호의 정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꿰고 있다. 워낙 무림맹에서 가져간 돈이 많기 때문에 나름대로 알아보고 있는데 상관량의 말처럼 흑도무림이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구체적으로 돈 들어갈 일은 발생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두 달이 채 안되어 또 찾아왔다는 것은 필시 개인적인 부탁 때문일 것이다. 이미 그의 주머니로 상당한 돈이 조용히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각주!”
찻잔을 내린 상관량이 정색하고 쳐다보았다.
동오룡 역시 잔을 내리며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총관님.”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항상 공대를 했고 상관량은 공대를 했다가 평대를 했다가 그때그때 기분 내키는 대로였다.
상관량의 눈빛이 빛을 발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점점 그 밝기가 강해지는 별빛처럼 두 눈은 어느새 강렬한 신광으로 돌변해 있었다.
“각주!”
목소리가 조금전 부를 때와 다르다.
동오룡은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예!”
동오룡도 마주보았다.
상관량의 입술이 열렸다.
“이럴 것이오?”
“무슨?”
“이럴 것이냔 말이오?”
상관량의 더욱 낮았는데 차가웠다. 지금까지 경험에 비춰 강호의 고수들은 화가 많이 날수록 목소리를 낮추었다.
순간적으로 자신에게 어떤 서운한 점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지만 이것이다 하고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쾅!
상관량이 탁자를 내려쳤다.
그러자 찻잔이 엎어지며 박살이 났다. 뜨거운 물이 자신의 무릎위로 쏟아졌는데도 상관량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올해로 몇 대 째 장사를 해왔다고 했소?”
“그건 왜? 십오대째 이오만?”
“유구한 천상각의 역사도 이쯤에서 접어야 할 것 같구려.”
동오룡의 눈이 커졌다.
“그…그게?”
“정말 끝까지 모른 체 할거요?”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는지 본 각주는 모르겠소이다.”
“사흘 전 본맹의 무적검령대가 몰살을 당했소.”
여전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동오룡의 눈살은 찌푸려져 있었다.
“흐흐! 끝까지 그렇게 모른 체 시치미를 떼겠다는 것인데 좋소이다. 계속 말해드리지요. 사흘 전 본맹의 무적검령대가 소주 서쪽에 있는 미월관이라는 저택을 공격했소. 그런데 단 한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소.”
“미월관이라면?”
소주에서 몇 대체 살아왔던 동오룡이 그곳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백년 전 황실 금위영반의 수장을 지냈던 사람의 별장으로 반란에 연루되어 일가족이 참수되면서 주인만도 수차례 바뀌었다. 묘하게 그 집을 들어간 가문은 이상하게도 쇄락을 면치 못하였고 소문이 퍼지면서 누구도 구매하려 들지 않아 한 달 전부터는 비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미월관에 누가 살고 있었단 말이오?”
“정말 이럴 것이오. 아니 소주에 사는 당신이 모르면 누가 안단 말이오?”
동오룡의 얼굴이 굳어졌다.
당신이란 말이 거침없이 터져나왔다. 상관량이 흥분하였다는 의미인데 함부로 감정을 폭발시키는 사람이 아니었다. 소름끼칠 만큼 냉정하며 이성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더욱 조심하고 경계를 했는데 그의 입에서 당신이란 표현이 막히지 않고 나왔다는 것은 사태가 예상보다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상관량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자신의 수하 가개묵으로 하여금 미월관을 조사케 했는데 그가 겨우 목숨 건져 돌아왔고 곧바로 무적검령대를 보냈는데 함정에 빠져 몰살당했다는 것이었다.
“이상하구려. 그 사건과 본인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이오?”
“동각주의 장남과 미월관에 있던 자들과 관련이 있소. 다시 말 해 동천비와 그들이 어울리고 있었단 말이오.”
동오룡은 그제 서 야 상관량이 흥분한 이유를 알았다.
교활하긴 해도 함부로 헛소리를 할 상관량이 아니었다. 또한 근거 없이 타인을 모략하거나 추궁하는 위인은 더욱 아니다. 철저히 증거와 사실을 들이대어 상대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이 상관량의 무서운 점이었다.
사실 근자에 이르러 동천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세한 이유와 속사정은 모르지만 오만상의 보고에 의하면 강호인들과 자주 접촉하고 있다고 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았소이다. 하지만 난 정녕 모르는 일이오. 어쨌든 당장 천비 그 아이를 불러 알아보겠으니 그만 진정하시고.”
상관량이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하늘일지라도 본맹의 눈은 벗어날 수 없소.”
그것은 무자비한 보복을 암시하고 있었다. 지금 철저히 조사중에 있고 만약 동천비가 연루된 사실이 확인되면 당사자는 물론 천상각 또한 온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피의 통첩이었다.
벌떡!
상관량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람소리가 나도록 몸을 돌렸다.
쾅!
문을 세차게 닫고 사라졌다.
동오룡이 굳은 얼굴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넋이 나간 듯 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무슨 일이에요?”
어지간하면 절대 남자들 일에 관여하지 않는 능씨가 뒷문을 열고 나타났다. 아마 부부생활중인 것을 눈치 챘을 텐데도 오만상이 보고를 하자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지 않고 문밖에서 안의 대화 내용을 모두 엿들은 모양이었다.
“부인은 돌아가시오.”
동오룡이 차갑게 말했다.
뭐라고 한마디쯤 하려는 듯 입을 반쯤 벌리던 능씨가 그냥 문을 열고 사라졌다.
“만상이 있느냐?”
“부르셨사옵니까?”
오만상이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칼집 없는 녹슨 칼을 여전히 왼손으로 품에 끌어안고 있었다.
“천비를 불러라.”
“대공자님께서는 지금 집에 계시지 않사옵니다.”
“찾아 데려 오거라.”
“예 주인!”
오만상이 서둘러 나갔다. 동오룡을 모신지 수십 년이 되었지만 지금 처럼 화난 모습은 처음이었다. 오만상은 발걸음을 재촉해 곤전을 찾아갔다.
곤전 입구에 이르자 경비무사가 앞을 가로막았다가 오만상임을 확인하고 예를 취했다.
“파금대주를 불러 오너라.”
파금대는 곤전을 지키는 시위들이었다. 두 사내가 대답을 하고 사라졌고 잠시 후 한명의 사내가 다가왔다. 옆구리에 자신처럼 집 없는 검 한 자루를 차고 하품을 하며 다가왔다. 나이는 대략 서른 중반쯤 되어 보였는데 백심도란 사내였다. 동천비가 새로 데려왔다는 것만 알뿐 정확한 정체에 대해서는 오만상도 모른다.
“부르셨습니까?”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늉이다.
예의와는 거리가 아주 먼 행동을 보면 정통무가의 출신은 아닌 듯 했다.
“대공자의 행선지를 아는가? 주인님께서 급히 찾으시네.”
“모르오. 우리 따위가 어찌 대공자님의 행선지를 알겠소?”
오만상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알고 있는데도 모른 척 하고 있다. 자신의 예에 비춰 동오룡은 어딜 가면 자신에게 만큼은 귀띔을 한다.
“주인어른께서 급히 찾는다고 했네. 화급을 다투는 일일세. 어디 가셨는가?”
백심도가 인상을 썼다.
“모른 다고하잖습니까? 정말 모른다니까요?”
오만상의 머리털이 일어섰다.
마치 사자갈기를 방불케 했는데 백심도가 흠칫했다. 귀찮다는 듯 서 있던 백심도가 자세를 똑바로 했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것이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대공자님은 어디계신가?”
또다시 모른다고 하면 칼을 뽑을 태세였다. 백심도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미 동천비로부터 오만상에 대한 얘긴 들었다. 한 때 비록 조그맣지만 나름대로 전설을 갖고 있는 도객이라고 했다.
처억!
오만상의 오른손이 왼손으로 품고 있는 칼의 손잡이를 슬며시 쥐었다.
바로그때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음성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오만상이 칼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몸을 돌렸다. 동천비가 여추량과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대공자님을 뵈옵니다.”
오만상이 예를 차렸다.
“네가 여긴 무슨일이냐?”
“주인님께서 찾으십니다. 어서 가보소서.”
“아버지께서?”
“조금 전 상관량이 다녀가셨사온데 언성이 아주 높아졌습니다.”
동천비가 여추량을 쳐다보았다.
여추량 또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오만상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말해보아라.”
“속하는 밖에 있어서 자세히 듣지는 못했습니다. 두 분께서 그렇게 언성을 높이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뭔가를 생각 하는 듯 잠시 굳은 얼굴로 서 있던 동천비가 몸을 돌렸다.
“가자!”
오만상이 동천비를 시위해 갔다.
걸어가는 동천비를 바라보는 여추량의 입술이 나직이 열리며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어차피 닥쳐 올 일!’
여추량이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