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밀종대수인
왼팔이 잘리고 앞가슴에서 피를 샘물처럼 흘러내리는 묵 빛 승포의 인물을 보며 유마음선이 놀라 말했다.
"배… 백라 아니냐?"
백라 선사는 포달랍궁으로 말하면 천장금왕과 같은 위치에 있는 뢰음사 삼대뢰왕 중 수석이었다.
"처… 철수 명령을 내려주소서. 이대로 놔뒀다간 제자들이 완전히 도륙당하고 말 것이옵니다."
유마음선이 덕배 선사를 보았다.
조금 전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동천몽이 오늘의 침략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아무리 무공이 강한 뢰음칠혈이라고 해도 사로잡기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을 알고서 일부러 그들이 쳐놓은 함정에 빠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 사주시여, 어서 명령을……."
휘휘휘!
갑자기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세 사람이 장내에 내려섰다.
포달랍궁의 삼대법왕인 천검, 천권, 천지였다. 백라 선사를 뒤쫓아온 듯했는데, 그들 또한 치열한 싸움을 반증이라도 하듯 온몸이 핏물로 목욕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자네가 먼저 와 있었군."
천검은왕이 덕배 선사를 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비록 일 초의 겨룸이었지만 덕배 선사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그런데 삼대법왕까지 손을 보탠다면 승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유마음선의 표정이 조금씩 절망의 그림자에 덮이고 있었다.
고철이 비틀거렸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앞가슴이 갈라지고 내장과 핏물이 범벅이 되어 아랫배에 걸려 있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큭… 크크!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단 말인가?"
자신의 몸을 보며 불신의 표정을 지었다.
"어… 어찌 이런 개 같은 경… 우가 있… 을… 수… 가……!"
한참 불신의 욕설을 내뱉더니 마침내 고꾸라졌다.
여섯 구의 시신이 동천몽을 중심으로 부채꼴로 퍼져 있다. 그런데 온전한 형체를 갖추고 있는 시신은 단 한구도 없었다. 그 만큼 만마생사혈이 파괴적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고 동천몽의 손에 들린 검에서는 핏물이 비 오듯 떨어지고 있었다.
동천몽이 핏방울이 떨어지는 검을 힐끔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떡하겠소? 그대도 굳이 내가 수고를 해야겠소, 아니면 알아서 죽겠소?"
혼자 남은 고통의 얼굴은 잿빛으로 된 지 오래였다.
"나, 대법왕이오."
아직 자비심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지만 용서를 구하면 살려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고통은 침묵했다. 그리고 두 눈은 죽은 동생들이자 사제들을 쳐다보았다. 일반적으로 검법에 목숨을 잃으면 상처가 깨끗하다. 그런데 동생들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만마생사혈은 이미 칠십 년 전에 구경을 했다. 하지만 그때도 이렇게 처참한 위력을 보이지는 않았다. 단지 그때의 만마생사혈과 동천몽이 펼치는 만마생사혈이 조금 차이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대법왕님!"
한쪽에서 존경과 흠모의 얼굴로 동천몽을 바라보던 일목이 느닷없이 그를 불렀다.
"뭐냐, 일목?"
"속하가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일목의 목소리가 경쾌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은 겨우 한 사람과 동수를 이뤘는데 동천몽은 무려 여섯을 죽이고도 여전히 멀쩡했다.
동천몽의 강함이 한없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만약 수라옥에서 끝내 등을 돌려 떠났다면 어찌 되었을까를 생각하니 아찔하다.
강한 사람은 당연히 존경받아야 하며, 자신이 모시고 있는 동천몽이 뢰음칠혈을 쉽게 상대하자 감동이 물밀듯 차올라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해라."
동천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목이 동천몽을 향해 깎듯이 목례를 했다.
"대법왕님의 은혜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이보시오, 영감님께서 우리 대법왕님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나 본데, 제가 간단히 설명해 드리겠소이다."
일목이 영감님이라고 하자 고통의 눈이 커졌다. 일반인에게 영감님이라는 호칭은 존칭이 될지 모르지만 자신에게는 모욕이다. 자신 같은 강호의 고수를 평범한 노인으로 본다는 잔인한 폄훼인 것이다.
"저희 대법왕님은 성질이 급합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면 그 자리에서 봐줍니다. 하지만 뻔뻔하게 변명하거나 빠져나가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면 주먹이 나가지요."
동천몽은 검신에 묻은 피를 시신의 옷에 닦고 있었다.
"한 대라도 덜 맞고 온전히 죽고 싶다면 대법왕님 앞에 어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하십시오. 그것만이 영감님에게 좋을 것입니다."
"크캇캇캇!"
돌연 고통이 고개를 쳐들고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여섯 명의 동생이 죽었다는 것은 분명 자신이 불리하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자신이 누군가? 죽음이 두려워 무릎을 꿇는 삼류 잡배가 아니다. 비록 패했지만 한때는 서장을 뒤흔들었던 뢰음칠혈 중 맏이인 것이다.
"강함을 인정하마. 그렇다고 너 따위 종놈까지 나를 우습게보다니, 참을 수가 없구나. 죽음 따위가 무서워 내가 무릎을 꿇을 줄 알았더냐?"
촤악!
검을 뽑아 들었다.
진정한 무사는 싸우다 죽을 때만이 그 가치가 빛난다고 사부에게 배웠다. 그래서 칠십 년 전 패배를 했는데도 죽이지 않고 목숨을 살려주었던 전대 법왕을 얼마나 원망하며 죽여 달라고 외쳤던가. 삼류들이나 삶에 애착을 갖는다.
파아아!
고통의 몸이 검과 일체가 되어 날아왔다.
동천몽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쯤 되면 보통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한다. 설혹 그러지는 않을지라도 동생들 복수에 눈이 멀어 이성이 흐트러질 만도 한데 고통은 복수 따위는 전혀 입에 담지도 않는다.
찔러오는 검에도 냉철함이 잔뜩 배어 있다. 그것은 일체 어떤 감정에 사로잡힌 검이 아니라 무사로서 승부를 논하고 싶은 순수한 열정만이 담겨 있다는 뜻이었다.
'다르군.'
이쯤 되면 이쪽에서도 최선을 다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무사로서의 대접이고 예의이다. 더구나 상대는 자신보다 연륜에서 앞서고 있었다.
스윽!
동천몽의 검이 옆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이미 여섯 차례 동천몽의 검을 보았기 때문에 느리다고 약하고 빠르다고 강한 일반 수준이 아님을 파악했다. 그래서 느리게 오지만 전력을 다해 베어갔다.
꾸궁!
검과 검이 부딪치는데 천둥이 쳤다. 비록 쇠와 쇠가 부딪쳤지만 실린 두 사람의 내공이 그만큼 심후하다는 뜻이었다.
콰콰콰!
고통은 선공에 박차를 가했다. 불리할수록 선공만이 그나마 이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빗발치듯 쏟아지는 고통의 검기 속으로 동천몽이 뛰어들었다.
'어엇!'
'저런!'
일목과 백쾌섬이 동시에 경악성을 터뜨렸다.
동천몽의 지금 모습은 일반 상식에 벗어난 행동이었다. 소낙비는 피해야지 그 속으로 뛰어들면 당연히 흠뻑 맞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놀라운 광경이 목격되었다. 동천몽이 검세 속으로 뛰어들자 오히려 고통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화악 하며 동천몽의 검이 광채를 발산하며 가운데서 원을 그렸다.
그러자 일순간에 고통의 검기가 소멸되었다.
슉!
그리고 낮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푹!
동천몽의 검이 고통의 허리를 베고 지나간 것이다.
"후훅!"
고통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는데 두 눈이 부릅떠져 있었다.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자신이 갖고 있는 검법의 약점을 단번에 파악하고 그런 행동을 취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동천몽이 가볍게 인상을 썼다.
"당신도 내 머리가 돌이라는 소문을 들은 모양이군. 그러니까 그렇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가?"
사실이었다. 돌 머리라는 얘길 들었기 때문에 더욱 놀란 것이다.
"거센 태풍의 한가운데는 오히려 잔잔하다는 말이 있소. 물론 내가 경험한 건 아니고 우리 아버지가 언젠가 친구 분들과 나눈 대화를 엿들은 게지. 당신의 그 쏟아지는 검을 보는 순간 불현듯 그 말이 떠오르지 뭐겠소. 그래서 뛰어들었더니 예상대로 오히려 검세 안은 안전할 뿐 아니라 당신의 약점이 눈에 보이더군."
파르르!
고통의 눈이 파장을 일으켰다.
사질들이 건네준 정보에 의하면, 머리가 너무 나빠 무공 초식은 물론 심법 구결을 외우는 데도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동천몽의 행동은 돌대가리는 감히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말은 부친이 친구 분들과 나누는 대화를 듣고 직접 실험을 한번 해보았다고 하지만 그건 겸손이었다. 태풍의 가운데는 조용하다는 그 이치를 정확히 깨우치지 못하고서는 보여줄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하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놀라운 것은 자신의 검세를 정확히 읽었다는 뜻이다. 중심에 허점이 있다는 것을 단번에 파악한 것이다. 그것은 우연이나 운 따위가 아니라 철저히 실력을 지닌 자의 안목이라고 봐야 한다.
콱!
고통이 검을 더욱 세차게 움켜쥐었다.
옆구리 상처가 쑤셔오는 것이 가볍지 않아 보였다. 고통의 신형이 다시 날아오르고 검이 뻗쳤다.
쿠우우!
고통의 검이 부르르 떨린다. 검끝에 자신의 모든 힘을 담았고, 그로 인해 검이 경련한 것이다.
슥!
검기를 밀어내고 또 한 개의 검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백쾌섬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거… 검강!'
틀림없는 검강이었다. 강호상에는 검강을 시전하는 고수가 있다. 하지만 직접 두 눈으로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어검술 바로 아래 단계이면서 신검의 경지를 향해 치닫는 본격적인 첫 단계인 검강.
"검강이군!"
동천몽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수평으로 쓸어가던 검을 우뚝 세우더니 날아오는 검강을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백쾌섬은 숨을 삼켰다. 검강은 말 그대로 기의 결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척 단단하여 뭐든지 부순다.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동천몽이 맞서 나가자 놀란 것이다.
슈우!
"으허헉!"
백쾌섬이 헛바람을 삼켰다.
동천몽의 검끝에서 또 하나의 검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거… 검강!'
하지만 고통의 것과는 달랐다. 고통의 것은 약간 흔들리는 것이 완전한 결집을 이루지 못했는데 동천몽의 것은 완전한 또 한 자루의 검이었다.
퍼퍼퍽!
무엇인가 파괴되는 소리가 들리며 백쾌섬은 똑똑히 보았다. 고통의 검강이 돌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져 사방으로 깨져 날아가고 있었다. 비록 완전한 검강은 아니라고 하지만 실로 무참했다.
푸우욱!
검강이 깨졌으니 남은 것은 살생뿐이었다. 동천몽의 검이 고통의 심장을 정확히 뚫고 사라졌다.
"큭!"
고통이 짧은 비명을 질렀다.
동천몽은 처음 자리에 서 있었고, 고통은 자신의 왼쪽 가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르르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칠십 년을 갈고닦아 왔다. 타도 포달랍궁을 외치며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수련했다. 그리고 그토록 옭아매고 있던 금제를 풀고 세상에 나오는 순간 모든 것은 끝났다고 여겼다.
감히 누가 자신들 앞을 가로막을 것인가.
"허… 헛헛!"
너무도 허무했다. 칠십 년을 절치부심하여 견뎌왔는데 꿈은 이뤄지기는커녕 다시 주저앉는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인가, 아니면 정녕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인가.
고통은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뛰어나며 강했고 그릇도 컸다. 단지 같이 살아서는 안 될 사람과 동시대를 살았다는 불행이 실패를 부른 것이다. 결코 자신의 능력이 모자라서 무너진 것이 절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해서인가. 죽음이 그다지 억울하거나 서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람은 능력도 중요하지만 확실히 시대를 잘 타고나야 한다.
퍼어억!
고통이 쓰러지더니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잠시 일곱 사람의 시신을 훑어보던 동천몽이 들고 있던 검을 일목에게 던져 주었다.
"꿀꺽!"
일목은 자신의 검을 감격의 눈으로 보았다. 별 볼일 없는 청강검이 칠십 년 전 서장을 피로 물들었던 뢰음칠혈을 베었고, 그들의 피가 묻어 있다.
평범한 검이라도 누구의 목을 베었느냐에 따라 가치와 무게가 달라진다. 일목은 검에 묻은 피를 닦지 않았다. 뢰음칠절의 피를 닦지 않고 그대로 말려 사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피를 말리기 위해 햇볕을 향해 검신을 정면으로 쳐들었다.
힐끔!
동천몽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해는 서쪽으로 급속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유시가 거의 다 된 듯했다.
누구를 기다리는 듯 동천몽은 왔던 길을 힐끔거렸다.
"누굴 기다리는 것입니까?"
백쾌섬이 눈치 빠르게 물었다.
그런데 동천몽이 피식 웃더니 엉뚱한 말을 꺼냈다.
"묘하군. 어떻게 항상 백 형이 있는 곳에서 난 싸움을 하게 되지? 환상루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백쾌섬이 흠칫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흘려들을 수도 있는 말이다. 하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뭔가 가시가 담긴 말로도 들린다.
"방귀가 잦으면 뒷간을 가야 하듯 이러다 나중에는 백 형과 내가 싸우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대… 대법왕님, 그게 무슨 말씀……?"
백쾌섬이 눈을 크게 떴다.
동천몽이 히죽 웃는다.
"아미타불! 그냥 해본 소린데 뭘 그렇게 정색을 하고 쳐다보시오. 어, 저기 오는군."
모든 사람의 고개가 돌려졌다.
그곳엔 붉은 인영 하나가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는데, 단번에 포달랍궁의 승려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날아오는 신형의 신법은 무척 빨랐다. 콩알만 하게 보였는데 순식간에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었고, 휙 하는 소리와 더불어 장내에 내려섰다.
나타난 사람은 눈썹이 두 개뿐인 이미 선사였다.
땅에 내려선 이미 선사가 죽은 뢰음칠혈과 무너진 돌 더미를 발견하고는 표정을 굳혔다. 동천몽이 떠날 때 자신에게 어떤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산봉우리 한 개가 통째로 사라질 만큼 큰 폭발이었는데도 온전하다는 것은 동천몽의 능력이 이미 자신이 생각하는 그 이상의 곳에 있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일목이 자랑스럽게 그동안 벌어졌던 전 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미 선사는 일목의 얘기를 다 듣지도 않고 동천몽을 향해 합장했다.
"대법왕님을 뵈옵니다."
"궁은 어찌 됐느냐?"
"대법왕님의 예측대로였습니다."
동천몽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히죽 웃었다.
"설마 가르쳐 줬는데도 깨진 건 아니겠지?"
"물론이옵니다. 뢰음사 제자의 약 구 할이 도륙되었고, 사주 유마음선은 생포하였사옵니다."
화악!
얘기를 듣고 있던 백쾌섬의 눈이 커졌다. 이미 선사의 말을 들어보니 동천몽이 자리를 비운 사이 뢰음사가 포달랍궁을 공격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뢰음사가 왕창 깨졌다는 것이다.
"우리 쪽 피해는 어느 정도지?"
"조금은."
뢰음사의 힘이 약하지 않기 때문에 미리 준비를 했어도 어느 정도의 피해는 피할 수 없다. 동천몽은 대강 짐작이 간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몸을 돌렸다.
다시 한 번 백상거를 묻어버린 바위 무덤 쪽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할 수 없이 걸어가야겠구나."
"하오면 소승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유마음선은 내가 돌아와 직접 심문할 테니 감시 잘하도록."
"알겠사옵니다, 대법왕님."
이미 선사가 합장을 한 후 사라졌다.
동천몽이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목이 뒤를 따랐고, 자정경과 자청단이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백쾌섬은 걸음을 떼지 못하고 말뚝처럼 그 자리에서 걸어가는 동천몽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뭐가 뭔지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마치 귀신에 홀린 듯했다.
도대체 동천몽은 어떻게 뢰음사가 포달랍궁을 기습할 걸 알았단 말인가. 그는 이미 뢰음칠혈의 암습까지도 짐작하고 있었던 듯했다.
'도대체 저자, 누구지?'
적대 관계에서 가장 전쟁을 일으키기 좋은 기회는 권력 이양기다. 권력이 이양될 때에는 아무래도 긴장이 풀어지고 힘이 느슨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뢰음사의 공격은 아주 적절했고 병법에 충실한 것이었다. 더구나 강호 경험이라고는 별로 없는 어린 대법왕인만큼 완전한 기회라고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동천몽이 자릴 비운 틈을 노려 양동작전으로 기습을 가한 것은 자신이 봐도 꽤 적절했다.
그런데 동천몽은 그 모든 것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고, 한 가지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 난리가 났는데도 태연하게 흑수당으로 발길을 재촉한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쯤 되면 대부분 급히 궁으로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동천몽은 아무런 염려나 걱정거리가 없는 사람처럼 앞장서서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다. 자정경을 바라보는 동천몽의 시선이 범상치 않다고 여기고는 있었지만 설마 여자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팽개쳤단 말인가.
"핫핫핫!"
"호호호!"
급기야 자정경과 깔깔거리며 떠들기까지 했다.
'아니다!'
마침내 백쾌섬은 결단을 내렸다.
눈앞에 있는 인물은 자신이 찾는 동천몽이 아니었다. 포달랍궁의 대법왕은 이름만 같을 뿐, 소주의 동천몽이 절대 아니었다. 소주의 동천몽은 부잣집 막내아들로 아주 한심한 인물인 데 반해 눈앞의 동천몽은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을 만큼 두려운 인물이었다.
가개묵은 사흘째 저택을 지켜본 결과 의심의 구석이 많다는 결론을 내렸다. 드나드는 사람들이 평범한 복장을 하였지만 가개묵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진주는 아무리 흙 속에 묻혀도 제 빛을 잃지 않는다.
'강호인들이다!'
그들은 평범함으로 위장한 무사들이었다.
상관량의 명령을 받고 지난 사흘 동안 온 소주를 샅샅이 훑었다. 그리고 눈앞의 대저택을 관심있게 지켜본 결과 내린 결론이었다.
해가 떨어지며 땅거미가 몰려오고 있었다. 숲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할 필요는 없었다. 조용히 빠져나가 보고를 한 다음 명령을 받아야 한다. 괜한 호승심에 무리했다가는 일을 망친다는 것이 지난 십수년 동안 상관량을 모시며 배운 교훈이었다.
골목을 빠져나온 가개묵은 일단 주루를 찾아 들어가 배를 채웠다. 무림맹까지 길을 재촉하려면 속이 든든해야 했다. 저녁 시간 때였으므로 주루는 손님들로 가득 찼다.
배불리 식사를 마친 가개묵은 주루를 나왔다.
"끄어억!"
만족스런 얼굴로 트림을 하고 인파를 헤치며 나아갔다. 저잣거리를 벗어나면 곧바로 신법을 펼친 생각이다.
저잣거리가 끝난 지점에 한 개의 석교가 있었다. 사자 머리를 한 돌기둥이 좌우에 버티고 서 있었는데, 그곳에는 다섯 명의 사내가 어둠을 거느리고 우뚝 서 있었다.
주위 눈을 의식하지도 않고 검을 옆구리에 매단 채 서 있었는데 가개묵은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홱!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가개묵의 얼굴이 굳어졌다. 걸어왔던 석교 입구에도 다섯 명의 검사가 서 있었다.
앞뒤로 막혔다. 퇴로를 완전히 차단당한 것이다.
척!
가개묵이 석교 중앙에서 멈췄다.
지금까지 자신이 그들을 감시했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렇게 되고 보니 자신이 오히려 감시를 당했음이 분명했다.
가개묵은 앞을 가로막은 다섯 사내를 쳐다보았다. 늑대는 늑대를 알아본다. 하나같이 거칠고 삭막하며 냉혈한 기운을 온몸에 휘두르고 있다.
자신과 비슷한 분위기를 지닌 자들이다.
대사막 제일의 마적 두목이었던 자신과 같은 분위기라는 것은 이들 또한 그와 유사한 일을 하며 살아왔다고 봐야 한다.
"가되 목은 남기고 가라."
철저히 감정이 배제된 목소리였다.
죽립 아래로 가개묵의 두 눈이 섬광을 일으켰다.
슉!
가개묵의 칼이 뽑혔다.
번쩍!
한줄기 섬광이 어둠을 갈랐다. 다섯 사람을 일거에 베어가는 가공할 쾌도이다.
"화… 환도!"
"당신이!"
다섯 사람이 놀란 외침을 터뜨리며 검을 뽑아 맞섰다.
캉캉캉!
다섯 개의 불꽃이 피어났고, 뒤로 밀려 나온 가개묵의 등 뒤로 다섯 개의 검이 떨어졌다.
빙글!
가개묵의 신형이 허공에서 한 바퀴 돌더니 등 뒤로부터 날아오는 다섯 개의 검을 맞받았다.
또다시 섬뜩한 쇳소리가 나고 뒤로 밀려날 때 이번에도 뒤로부터 다섯 개의 검이 다시 날아온다. 가개묵이 처음처럼 다시 돌아서며 검을 휘둘렀다.
"쿡!"
연거푸 서너 번의 충돌에 가개묵의 입술이 열리고 신음을 흘렸다.
가개묵의 입에서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다리 좌우로는 강이다. 결국 피할 공간이란 앞뒤뿐인데 적이 가로막고 있으니 충돌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무려 열 명과 쉬지 않고 부딪쳐 봤자 결과는 뻔했다.
슈아아악!
앞에서 다섯 명이 날아왔다.
슈우욱!
그와 반 박자 정도의 시간을 두고 뒤의 다섯 명이 덮쳐 온다. 뒤는 보이지 않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한 번에 앞뒤를 상대해야 하는데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처억!
다리 난간 쪽으로 돌아서며 몸을 붙였다.
뒤이어 그의 검이 좌에서 우로 길게 그어졌다.
싸아악!
앞뒤 공격이 졸지에 좌우 공격 형태로 바뀌었다.
팍- 파파팍!
폭죽 터지듯 쇳조각이 떨어지며 불꽃이 어둠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쉬쉬쉭!
사내들은 틈을 주지 않는다. 사냥감 하나를 놓고 무지막지하게 검을 휘둘렀다.
'훗훗! 확실히 나를 닮은 놈들이야!'
오랜만에 보는 전투 수법이다.
공격할 때는 들소처럼 미친 듯이 달려든다. 그러나 도망은 절대 없다. 그것이 자신의 과거 모습이었는데 지금 이들이 그러했다. 전략이 아니라 원래 습성이 그런 것이다.
"낭인들이구나."
드디어 이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사내들의 안색이 더욱 굳어졌다. 자신들의 정체를 알아챘으니 반드시 가개묵을 죽여야 한다.
콰콰콰!
가개묵의 칼이 좌측 다섯을 향해 파고들었다.
그러자 등 뒤 우측 다섯이 달려든다. 하지만 가개묵은 그들을 무시하고 좌측 다섯을 향해 자신의 절기 폭풍십일도를 전력을 다해 펼쳤다.
파아아아!
폭풍처럼 허공에 수많은 칼이 다섯 사람을 내려쳤다. 어느 것이 실도이고 허도인지 구분이 안 되는 수십 개의 칼이 떨어졌는데, 바로 환도라는 별호를 얻은 폭풍십일도 최고의 초식 환표십구와(幻豹十九渦)였다.
가개묵의 칼이 세 사내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컥!"
"크아악!"
"꺼르륵!"
하지만 등으로 뜨거운 열기 다섯 개가 파고든다.
"쿠우욱!"
악문 이빨 사이로 신음이 터져 나왔고, 가개묵의 몸이 다리 아래 강물로 떨어졌다.
슈아아!
떨어지는 가개묵의 몸을 향해 남은 사내들의 검이 더욱 광기를 토해내었다.
풍덩!
거센 물보라가 생기며 가개묵의 몸이 사라졌다.
다리 난간에 선 일곱 명의 사내가 동시에 외쳤다.
"시체를 찾아야 한다! 반드시!"
그들은 두 명씩 두 패로 나뉘어 강 좌우 둑을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고, 나머지는 배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날려 사라졌다. 석교 위에는 목 없는 시신 세 구가 나동그라져 있었다.
반 각도 되지 않아 강 위에 한 척의 나룻배가 떴다. 그리고 강가의 둑에는 사내들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혹시 가개묵이 뭍으로 올라올 것을 대비한 행동이었다.
비록 날은 어두웠지만 물체를 식별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만큼 사내들의 무공은 높았다. 강물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며 가개묵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대략 십 리 이상을 내려왔지만 시체 비슷한 물체도 발견하지 못했다.
"죽은 것이 아닐까요?"
"물론 죽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시체를 찾는 것이다."
"죽었으면 된 거잖습니까?"
"시체를 찾아야 된다."
시체를 찾지 못하면 죽었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다.
가개묵이 누군지는 모른다. 다만 누군가가 자신들을 감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냄새를 맡았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하는 일은 무척 중요했다. 절대 누가 알아서도 안 되고 비밀이 새어나가서도 안 된다.
한편, 짙은 석교에는 검은 물체가 붙어 있었다.
"으으으!"
석교를 붙잡고 있는 인물은 가개묵이었다. 적이 강물을 따라 수색할 것을 예상하고 오히려 다리를 붙잡고 숨어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얼마 전 내린 비로 물살이 너무나 강해 뭍으로 헤엄쳐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리에서 둑까지는 십여 장의 거리다. 멀지는 않지만 중상을 입은 몸으로는 무척 멀게만 느껴졌다. 필시 시체가 발견되지 않으면 다시 올라올 것이므로 빨리 벗어나야 한다.
풍덩!
이를 악물고 있던 가개묵이 강물로 뛰어들었다. 이제 생사는 자신의 손을 떠났다. 모든 것을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일 장도 나아가지 못했는데 어느새 십여 장 밑으로 흘러내려 간다. 가개묵은 필사적으로 둑을 향해 헤엄을 쳤다.
접시 위에 작은 유등불이 깜박거리고 있다. 흐릿한 유등불 아래에서 상관량은 책을 펼쳐 들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책을 주시하는 상관량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것은 곧 시선은 책에 두고 있지만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꽉 차 있다는 뜻이다.
둥둥!
멀리서 자시를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온다.
탁!
상관량이 책을 덮었다. 잠시 깜빡거리는 유등불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했고 시원한 바람 한줄기가 거처인 만기전 앞마당을 휩쓸고 지나간다. 상관량은 마당 한가운데 우뚝 서서 별빛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루에 두 번씩 전서구를 보내온다. 그런데 오늘은 아직 단 한 번의 전서구도 날아오지 않았다. 여태껏 이런 일은 없었다. 그의 능력을 믿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이 꺼림칙하다.
문득 눈앞으로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준수한 용모이나 눈이 가늘고 좁다. 눈이 가늘고 좁은 사람은 잔인하면서도 교활하다. 굳이 관상을 볼 줄 아는 자신의 안목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내는 평범하지 않았다. 부친과 달리 뭔가 반드시 일을 저지르고도 남을 야망과 독한 집념으로 뭉쳐 있었다. 오랜 강호 경험에 비춰 사내는 뭔가 사악하고 피 냄새 짙은 일을 꾸미고 있음이 확실했다.
꾸욱!
상관량의 어금니가 강하게 물렸다. 누구도 자신의 눈을 절대 벗어나지 못한다. 그 사내뿐만이 아니라 천하의 누구도 자신의 이목을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은 상관량이며 무림맹의 총관이다. 무림맹의 총관에게 주어진 권한은 막강하다. 사람 한두 명쯤 죽이거나 가문 한두 곳쯤 쓸어도 문제가 될 수 없다.
만약 그 사내가 도전을 꿈꾼다면 권력의 무서운 맛을 톡톡히 보여줄 것이다. 수백 년 강호 역사에서 무림맹에 도전했다가 온전한 상가는 없었다.
무림맹은 성역이다.
"총관님!"
어둠 속에서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두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중 한 사내의 어깨에는 축 늘어진 채 한 사람이 메어져 있었다.
"자네는 전통이 아닌가?"
상관량의 시선이 또 다른 사내에게 멎었다. 그는 건장한 체격의 오십가량의 중년인이었다.
염객(焰客) 전통(全統). 무림맹의 경비를 총괄하고 있는 건곤대 대주이다.
"이자는 누군가?"
흑의사내의 등에 업힌 사람을 보며 물었다.
전통이 대답했다.
"가 대협입니다. 문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을 위사들이 발견했습니다."
"뭣이? 개묵이란 말인가?"
허리를 구부려 땅 쪽으로 숙여진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상관량이 기겁했다.
"뭣 하는가? 어서 탕의전(湯醫殿)으로 데려가게!"
세 사람은 곧바로 무림맹의 의료 기관인 탕의전을 향해 몸을 날렸다.
가개묵의 상처는 깊었다.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이라고 했는데 닷새가 지났는데도 깨어나지 않았다. 상관량은 닷새 동안 탕의전을 떠나지 않았다. 가개묵의 몸 상태를 보아 심각한 일이 벌어졌음을 오랜 경험을 통해 읽었기 때문이다.
"이보거라."
"예, 총관 어르신."
가개묵을 전담하고 있던 두 명의 의원 중 한 명이 허리를 숙였다.
상관량이 말했다.
"당장 가서 무적검령대 대주를 불러오너라."
"알겠사옵니다."
사십가량 되는 중년 의원이 서둘러 방을 나가자 상관량은 굳은 얼굴로 가개묵을 보았다. 외상은 꿰매고 금창약을 발라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문제는 내상이었다. 베인 피부와 상처를 보건대, 상대는 검객이다. 특히 잘려 나간 피부 표면이 매끄러운 것을 보면 상당한 조예가 있는 자들이었다.
어느 정도 도법에 일가를 이룬 가개묵이 당할 정도면 상대는 최소한 열 명 이상이었을 것이다.
눈앞에 그 사내의 얼굴이 계속 어른거린다. 필시 그 사내의 짓이 틀림없었다. 아마 지금쯤 가개묵의 숨통을 완전히 끊지 못해 무척 당황해하고 있을 것이다.
'보여주리라!'
힘의 권력이 어느 정도 대단한지를 보여주고 말겠다고 다짐하고 있을 때 긴 흑발을 가지런히 묶은 서른 초반의 사내가 들어섰다.
"부르셨사옵니까?"
"어서 오게, 동 대주."
사내는 무적검령대의 대주 동장세이다.
무적검령대는 무림맹의 공격 부대 중 하나로, 일흔일곱 명 모두 일 갑자 이상의 내공을 소유했으며, 최소한 십 회 이상의 실전 경험을 가진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출진 준비를 하게. 지금 당장."
"출진 준비를?"
동장세의 눈이 커졌다. 무적검령대가 맹 밖으로 나가야 할 만큼의 사건이 일어났다고는 들은 바 없었다. 하지만 동장세는 상관량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음을 발견하고 곧바로 허리를 구부려 대답하고 물러 나왔다.
어지간해서는 얼굴 표정이 변하지 않은 상관량이다.
'뭔 일이 터진 게로군.'
동장세는 곧바로 무적검령대의 처소로 돌아가 수하들을 소집했다. 소집 명령이 떨어진 지 불과 반 다경도 되지 않았는데 일흔일곱 명이 완전무장을 하고 모여들었다.
그믐날인데다 구름이 달까지 가려 그야말로 먹물을 뿌려 놓은 듯 캄캄했다. 그것도 하루 중 가장 어둡다는 축시였다.
추울렁!
갑자기 장막처럼 드리워진 어둠이 흔들리고 있었다. 온몸을 흑의로 칭칭 감아 맨 사내들이 저택의 담장을 넘는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위사의 목은 동장세의 검에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동장세가 정문 기둥을 살폈다. 하지만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아볼 수 있는 현판 따위는 없었다.
어제 아침 가개묵이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했다.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해 이 저택이 의심스럽다는 얘기를 듣고 곧바로 상관령으로부터 출동 명령을 받았다.
소주에 도착했을 때가 오늘 묘시였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낮 동안은 인근 천망산에 은신해 있다가 자시가 되자 저택으로 이동했다.
가볍게 정문을 넘어선 동장세는 주위를 살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저택이었다. 바람결에 꽃향기가 날아왔고 쭈욱 뻗은 포도 좌우로 정원이 가꾸어져 있었다.
척!
포장된 도로를 따라 올라가던 동장세의 걸음이 멈췄고, 돌연 그의 두 눈이 섬광을 발했다. 마치 어둠을 가르는 한줄기 번개 같았는데 뭔가 불길한 그림자를 느낀 것이다.
너무나 조용했다. 지금쯤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와야 정상인데 주변은 숨죽인 듯 고요했다.
'뭐지?'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진다.
바로 그때 첫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비명 소리가 들려온 서북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곤두섰던 동장세의 눈빛이 가라앉았고, 비명이 본격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크아악!"
"악! 캐애액!"
그런데 십여 장쯤 걸어 올라가던 동장세의 걸음이 다시 멈췄다.
비명은 끊임없이 들려왔지만 그의 두 눈은 다시 타올랐다.
'이 목소리는!'
비명 소리가 귀에 익었다.
팟!
동장세의 신형이 어둠을 뚫었다. 순식간에 백여 장을 날아간 동장세가 경악했다. 저택 앞마당에는 수많은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모두가 자신의 수하들이었다.
'이… 이럴 수가!'
수하들의 몸은 깨끗했다. 그것은 반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뜻이다. 동장세는 숨을 들이마셨다.
'지… 진법이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리고 세 개의 시커먼 인형이 자신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어찌나 빠르고 강렬한지 동장세는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싹뚝!
세 인영의 허리가 베어졌다. 그런데 잘려진 허리가 다시 붙더니 자신을 향해 파고들었다.
촤촤촤!
동장세의 검이 더욱 빨라졌다. 그런데 이번에도 잘려진 인영들이 허리를 다시 붙었다. 그뿐 아니라 좌우에서 다섯 명의 인영이 합세했다.
진법이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동장세는 검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적이 펼친 함정에 빠진 것이다.
돈은 가만히 앉아서는 벌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돈을 쫓아다녀서는 벌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뭘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돈이 있는 곳이면 쫓아가야 하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문제는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었다.
한번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따뜻한 피를 지녀도 안 되고, 눈물을 지녀도 안 되며, 상대를 사람으로 봐서도 안 된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냉정한 각오로 덤벼들어 빼앗아야 돈은 쌓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사갈이니 뱀이니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니 하며 손가락질한다. 손가락질 받으면 어떤가. 모두가 돈을 벌지 못한 나약한 자들의 질투와 시기심의 발로라고 치부했다. 세상에서 돈보다 더 위력을 지닌 것은 없었다.
그 돈이 오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누군가 수백 년을 그렇게 쌓아온 가문의 돈을 노리고 있다. 돈이 있는 곳에 범죄가 끓고 죽음이 늘 도사린다. 그래서 적지 않은 무사들을 데리고 있지만 그들 힘으로는 터무니없을 만큼 막강한 적이 칼날을 세우고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무력(武力)도 키우는 건데 하는 후회를 했지만 이미 늦었다.
"오늘이 며칠이더냐?"
자추동이 햇볕이 드는 대청마루에 앉아 물었다.
총관 이색기가 대답했다.
"열나흘입니다."
열나흘이면 두 자식을 보낸 지 오늘로 열나흘째였다. 시간상으로는 충분히 돌아올 시간이 된 것이다.
대청에 앉으면 장원으로 들어오는 넓은 길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하지만 장원으로 들어서는 길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불과 보름 전까지만 해도 문턱이 닿도록 들락거리던 마차도, 상인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흑수당에 드리워진 검은 먹구름을 의식하고 모두가 발길을 끊은 것이다.
"너는 어찌 생각하는가? 과연 대법왕이란 자가 우릴 도우러 올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최소한 사람이라도 보낼 것으로 보느냐?"
이색기가 대답하지 않고 난감해하는 표정을 짓자 자추동이 다시 말했다.
"괜찮다. 말해봐라."
"속하의 생각으로는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유를 말해보겠느냐?"
"이유는 빤한 것 아니겠습니까?"
"단 한 푼의 돈도 포달랍궁에 시주를 하지 않았으니 노부의 행위가 괘씸해서라도 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구나."
"인지상정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대법왕이고 활불이라고 하지만 사람인데 어찌 불쾌한 기분이 들지 않겠습니까? 백성도 국가를 위해 뭔가를 해야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고 도움을 받는데 포달랍궁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으니."
"틀린 말은 아니구나.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올 것이다."
이색기가 자추동을 돌아보았다.
자추동의 얼굴에 자신감이 떠올랐다.
"두고 봐라. 그는 온다. 반드시."
아직까지 단 한 번도 허튼소릴 하지 않던 자추동이다. 그리고 그가 된다고 하면 되었다.
"어떻게?"
"훗훗! 두고 보면 안다."
자추동의 입술이 얇아지며 미소가 떠올랐다.
육십 평생 돈과 여자 싫어하는 인간은 보지 못했다. 그중 아름다운 미색을 지닌 여인을 멀리하는 사내는 더욱 보지 못했다. 자정경은 자신이 보기에도 나무랄 데 없는 미인이다. 사내라면 반드시 한 번 품어보고 싶을 만큼 완벽에 가까운 딸이다. 대법왕의 나이가 한창때라고 했으므로 반드시 자정경의 미모를 쫓아 따라올 것이라는 것이 자추동의 계산이었다.
'대법왕이기 이전에 그도 사람이다.'
자추동의 확신이었다.
"당주님, 저기……."
이색기가 입구를 가리켰다.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자추동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힘을 주었다. 거리가 멀어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다섯 명이다. 그중 한 명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것을 보아 여자이고 필시 자정경일 것이다.
넷 중 자청단을 빼면 세 명이 오고 있다는 뜻이므로 자추동의 인상이 구겨졌다.
고작 세 명이라니, 너무나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힌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자신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맨 앞에 금빛 법포를 걸친 사내는 보지 않아도 대법왕일 것이다. 한데 옷차림이 초라했다. 걸레 조각을 걸친 듯 찢겨지고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듣기에는 꽤 준수한 용모의 사내라고 들었는데 거지가 따로 없었다.
"아버님."
자정경이 다가왔다.
"오, 그래, 어서오너라."
자추동이 마당으로 내려가 자정경의 손을 잡았다. 먼 길을 온 탓에 행색이 초라했지만 진흙 속에 핀 연꽃마냥 미모는 더욱 빼어났다.
"아버님, 다녀왔사옵니다."
자청단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고생이 많았다. 아픈 곳은 없느냐?"
"무탈하옵니다."
"다행이구나."
그러면서 자청단의 뒤에 서 있는 일목을 발견한 자추동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으허헉!"
그 역시 장사로 잔뼈가 굵었지만 눈이 하나뿐인 사람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마 한가운데 주먹만 한 크기로 박혀 흰자위가 출렁거릴 때마다 소름이 끼친다.
"소개하겠소. 난 대법왕님의 법위인 일목이라 하오."
"어… 어서 오시오."
자추동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눈도 하나뿐인데다 인상까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낭상(狼相)이다. 낭상의 인간은 무식하고 난폭하다. 걸핏하면 주먹부터 날리는 대책 불가능한 인간이다.
"아버님, 이분께서 대법왕님이세요."
자정경이 동천몽을 소개했다.
자추동이 허리를 숙였다.
"자추동이 삼가 대법왕님께 인사 올립니다. 이 늙은이의 하소연을 마다않고 이렇게 오백 리 길을 달려와 주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옵니다."
"아미타불! 오백 리가 아니라 오천 리라도 백성이 고초를 겪고 있다면 찾아가 봐야 하는 것 아니오이까."
"이 총관, 뭣 하느냐? 어서 대법왕님을 안으로 뫼시거라."
"대… 대법왕이시여, 소인을 따라오소서."
동천몽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색기의 뒤를 따랐다. 동천몽이 이색기의 뒤를 따라 사라지자 자추동이 백쾌섬을 물었다.
"이분 대협께서는……?"
자청단이 잽싸게 웃으며 말했다.
"백쾌섬 대협이라고, 강호에서는 아주 유명한 분이십니다. 본 가의 어려움을 듣고 혼쾌이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아버님."
"오호! 이런 고마울 데가. 이 늙은이는 자추동이라 하오."
"헛걸음이 되지 않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청단아, 어서 백 대협도 모시거라."
"들어가시지요. 소생을 따라오십시오."
자청단이 백쾌섬을 데리고 사라지자마자 자추동이 입을 열었다.
"어찌 된 일이냐? 어떻게 달랑 대법왕 혼자 왔단 말이냐? 도대체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일이란 말이냐?"
자추동의 표정이 굳어졌다. 수백 명의 무사를 흔적도 없이 해치운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해야 하는데 고작 동천몽 혼자 온 것이 너무나 기가 막히고 심지어 불쾌하기까지 했다.
자추동의 심각한 표정과 달리 자정경이 배시시 웃었다.
"염려 마세요, 아버지. 별일 없을 거예요."
"별일 없다니, 아무리 대법왕이라지만 신이 아닌 이상 혼자서 그들을 상대할 생각이란 말이냐?"
"아마 상대하고도 남을걸요."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아무튼 염려 마세요. 너무 오랫동안 씻지 않아 죽겠어요. 금방 씻고 나오겠어요."
그러면서 자정경이 안으로 들어갔다.
사라지는 자정경을 보며 자추동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청단과 달리 자정경은 냉철하다. 비록 상인의 길보다는 무인의 길을 선호하지만 어려서부터 사리 판단이 명확하고 경거망동하지 않는 침착한 아이다. 그런 자정경이 아무런 탈이 없을 것이라는 듯 환히 웃는다는 것은 자신의 염려와는 다른 뭔가가 준비되어 있다는 뜻이었으므로 다소 안도할 수 있었다.
<2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