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거목(巨木)들의 몰(歿)
혈파신공의 기수식이다.
말로만 들었지 배교의 혈파신공을 아직 한 번도 견식해 보지 않은 고태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가셨다. 배교는 전설의 문파다. 온갖 신화와 술법을 지닌 비밀의 문파이기 때문에 그들 무공에 대한 장단점이 많이 노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위험한 점이다.
회오리바람에서 느껴지는 살기가 생각보다 섬뜩했다.
'만만히 볼 놈이 아니다!'
고태는 전신의 진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백상거를 덮어버린 집채만 한 바위가 들썩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쿠쿵!
마치 지진을 만난 듯 마차를 덮고 있던 바위가 꿈틀거리더니 점차 좌우로 밀려 나갔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들썩거리는 바위 쪽으로 돌아섰고, 일목과 고태도 잠시 대결을 중단하고 쳐다보았다.
와그르르!
집채만 한 바위들이 치워지며 동천몽이 자정경을 품에 안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푸하!"
동천몽이 크게 숨을 내뿜었다.
"어떤 시벌 놈이 잠자는데 이 지랄을 만들었어?"
동천몽의 행색은 가관이었다. 품위 넘치던 가사는 걸레 조각처럼 찢어졌고 목에 걸고 있던 혈자추로 된 염주는 떨어져 나간 듯 보이지 않았다.
'저… 저럴 수가!'
비록 행색은 거지꼴이었지만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품에 안고 있던 자정경을 내려놓았는데 그녀 또한 멀쩡했다.
"정경아!"
"오라버니!"
두 남매가 서로 손을 잡고 반가워했다.
자청단이 자정경의 말끔한 몸을 보며 놀랐다.
"어떻게 된 것이냐? 다친 곳이 하나도 없지 않느냐?"
자정경이 자신이 온전하게 된 경위에 대해 말했다. 폭발 소리에 자고 있던 동천몽이 벌떡 일어났고, 곧바로 자신을 덮어 감쌌다. 그렇지 않았다면 백상거까지 완전히 박살이 났기 때문에 자신은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천몽이 자정경을 살렸다는 말에 자청단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
"그… 그게 정말이냐?"
자정경이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의미예요? 제가 지금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단 말인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자청단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정경을 보았다가 동천몽을 보았다.
그때 동천몽이 버럭 소릴 질렀다.
"누구냐? 어떤 잡새끼야? 누구냐니까?"
동천몽이 버럭 소릴 질렀다.
"주인, 살아나셨군요?"
일목이 감격의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동천몽의 일목을 향해 험악한 인상을 썼다.
"야! 네놈은 봤을 것 아니냐? 어떤 새끼가 날 돌 더미 속에 묻었냐? 빨리 이름 대!"
일목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나란히 서 있는 뢰음칠혈을 가리켰다.
"저… 늙은이들입니다."
홱!
동천몽이 뢰음칠혈을 노려보았다.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노려보더니 이를 부드득 갈며 다가섰다.
콧바람이 씩씩거리는 것을 보아 화가 단단히 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런, 완전히 관 예약해 놓은 늙은이들 아냐?"
"과… 관 예약!"
고태의 눈이 곧바로 우그러졌다.
동천몽이 일곱 사람을 보며 악을 썼다.
"이 쭈그렁탱이들이 간덩이가 부었구먼! 본왕이 오늘 당신들을 살려두면 사람이 아니라 개다, 개!"
그러다 빙긋 웃는 자정경을 발견하고는 동천몽이 흠칫했다.
자정경 앞에서 지나치게 쌍소리를 뱉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대법왕으로서의 품위를 잠시 잊었다.
"씨발… 아니, 너무 뚜껑이… 아니, 분노가 잠깐 일다 보니 내가 평정을 잃었도다. 아미타불."
금세 표정을 자비스럽게 바꾸고 뢰음칠혈을 향해 물었다.
"당신들이 본왕을 묻으려 했소? 이유가 무엇이오? 본왕은 아직 당신들에게 어떤 화난 일을 하거나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소. 그리고 참고로 난 포달랍궁의 대법왕이오."
자정경을 의식해 말은 곱게 하고 있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보는 사람만 없다면 온갖 욕설을 퍼부은 다음 모가지를 사정없이 비틀어 버렸을 것이다.
눈을 뜨니 세상이 암흑 천지였다. 처음에는 밤이 된 줄 알고 다시 눈을 감으려 했는데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했다. 그래서 주위를 살핀 결과 만년한철보다 단단하다는 백상거 천장이 찌그러져 내려오고 있었고, 좌우의 벽도 움푹 파였다.
그러면서 위로부터 계속하여 쿵쿵쿵 소리가 들리는 것이 뭔가 묵직한 물건이 마차를 덮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본능적으로 누군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산을 무너뜨렸다는 것을 간파한 동천몽은 벼락처럼 자정경을 덮쳤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워낙 쏟아지는 바위가 많고 컸기 때문에 뚫고 올라오는 데 상당한 고생을 했다.
한편 뢰음칠혈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인간이 저 엄청난 바위의 무게를 뚫고 기어나왔다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질문을 했으면 무슨 대꾸가 있어야 할 것 아니오? 왜 말을 못하는 거요? 당신들, 모두 벙어리요?"
"아무리 대법왕이라 하지만 어린놈이 너무 건방지구나! 감히 손주뻘도 안 되는 녀석이!"
"닥쳐라! 대법왕이시다! 서장에서는 누구도 대법왕께 하대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나?"
일목이 외쳤다.
"대법왕님, 저들의 정체를 아시옵니까? 뢰음칠혈이라는 늙은이들이라 하옵니다."
동천몽이 그들이 누군지 알 리 없었다.
강호를 아는 사람이라야 그들의 별호를 듣고 놀라지만 아는 게 전무한 그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늙을수록 몸조심을 해야 하는데 각오하시오. 감히 본왕을 건드린 것이 얼마나 병신 짓거리인지 깨닫게 해주겠소. 일목, 그 검을 좀 다오."
동천몽이 손을 뻗자 일목이 두 손으로 자신의 검을 공손히 건넸다.
동천몽이 검신을 스윽 한번 훑어보더니 뢰음칠혈을 향해 말했다.
"나, 바쁜 사람이오. 모두 한꺼번에 덤비시오."
한꺼번에 덤비라는 말에 뢰음칠혈의 표정이 굳어졌다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칠십 년 전 포달랍궁의 전대 법왕과 겨룰 때 말고는 아직까지 누구와 싸울 때 손을 합친 적이 없었다. 그만큼 그들은 강하기도 했지만 자존심 역시 강했다.
촤악!
동천몽의 손에 들린 검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고자를 향해 뻗어갔다. 번쩍하는 순간 검은 고자의 앞가슴을 파고들고 있었다. 이미 일목과 한 번 겨루어 몸이 지쳐 있는 상태인데다 설마 자신을 노리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화들짝 놀라며 피하려고 했지만 날아오는 검은 너무나 빨랐다. 지켜보던 형제들도 빠른 검에 그저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쉭!
파고드는 검을 쳐내기 위해 우장을 뻗었다.
뻑!
검과 장이 충돌하는 순간 강한 힘이 밀려들어 왔다. 손바닥을 타고 들어오는 거센 힘 앞에 자신도 모르게 욱! 하는 신음을 흘렸고, 가슴이 뜨끔했다.
슥!
고자는 자신의 앞가슴을 내려다보았다.
화아악!
고자의 눈이 부릅떠졌다. 자신의 앞가슴에 어느새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고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이건……!'
믿어지지가 않았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칠십 년 전 포달랍궁의 대법왕과 십 주야를 싸웠던 자신이 불과 일 초에 가슴이 뚫렸다. 앞서 일목과 격렬한 공격을 주고받아 정상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이건 말이 안 된다.
"크… 큰형님!"
엉뚱하게 제일 맏이인 고통을 쳐다보았다.
"이… 이……!"
이게 꿈이요, 생시요 하고 물으려 했지만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신은 있는데 입이 열리지 않는다. 조금씩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쿵!
"두 번째로 누굴 죽이지? 그래, 당신이 좋겠소."
동천몽의 검이 바람을 갈랐는데 이번 표적은 고태였다.
미리 준비를 하고 있던 고태가 주먹을 뻗었다. 뢰음사 제일신권인 환영권이었다. 환영권의 특징은 말 그대로 실체와 헛것의 구분이 쉽지 않다는 것에 있었다. 또한 위력이 높을수록 환권과 실권은 거의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슈슈슈- 슈!
네 개의 주먹이 뻗어왔다.
하지만 그중 두 개는 가짜일 것이다.
촤악!
동천몽의 검이 좌측 두 개의 주먹을 베어갔다.
콰아앙!
엄청난 격돌음이 생겼다는 것은 동천몽의 검이 정확히 실체를 베었다는 뜻이다.
"욱!"
고태가 뒤로 두 걸음을 물러났는데 얼굴이 우그러져 있었다. 동천몽이 단번에 실체와 허상을 구별해 냈기 때문이다.
동천몽이 웃었다.
"날 바보로 아는군."
환영이나 허상은 주로 보법에서 많이 나타난다. 워낙 빠르면 앞의 그림자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다음 모습이 나타나며, 그런 식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일 보를 내딛는 데 서너 개, 많게는 대여섯 개의 신형으로 불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실체와 허상을 구별해 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상대보다 무공이 높으면 된다. 무공이 높으면 아무리 비슷하다 해도 금방 구별해 낸다. 절대 실체와 허상이 같을 수는 없었다. 반드시 어딘가에서 차이가 있는데 무공이 높으면 그것을 구별해 내는 것이다.
'설마!'
허상을 알아챘다는 것은 자신보다 내력이나 다른 모든 면에서 높다는 뜻이었다.
고태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절대 그럴 리 없었다. 아무리 강호가 요지경속이라 하지만 백 살이 넘은 자신이 이제 스물도 채 안된 아이에게 밀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말이 안되었다.
"당신 법명이……?"
"고태라 한다."
"고태, 좋은 법호로군."
쏴아악!
동천몽이 검을 느릿하게 그었다.
아주 느리다. 검법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느렸다. 백쾌섬 또한 눈살을 찌푸렸는데 동천몽의 검이 너무 느렸기 때문이고, 자청단과 자정경은 물론 일목까지 눈을 크게 떴다.
스으으!
굼뱅이가 기어가는 듯 느리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가만 서 있던 고태가 휘청거린 것이다.
"윽!"
앞가슴을 휘어잡고 신음을 흘린 고태를 모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저… 저건?"
"피가?"
앞가슴을 부여잡은 고태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내린다.
"도… 도무지……."
고태가 불신의 시선을 던졌다. 자기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가슴이 베어진 것이다.
"이상하군. 뢰음사 늙은이들이라면 본 궁의 무공에 대해 어느 정도 꿰고 있을 텐데 정말 모르는 상판들이잖아?"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진짜 깜깜인가 본데, 그럼 가르쳐 드려야지. 혹시 완유살(緩有殺)이라고 들어봤소?"
"와… 완유살."
고태가 처음 듣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치… 칠십 년 전 설웅, 그놈과 겨룰 때는 이런 검법이 없었다."
"아! 이제 알겠다. 설웅 그분, 무척 미련하거든. 제자들 말로는 자기 이름 석 자도 제대로 못썼대요. 그러니까 당연히 터득을 못했을 것이고, 그러니 못 봤겠지."
그러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동천몽을 날카로운 눈으로 주시하는 한 개의 눈이 있었다. 바로 일목이었는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자신이 알기에 동천몽의 머리 또한 설웅 법왕 못지않게 나쁘다고 들었던 것이다.
퍼억!
고태가 쓰러졌다.
쓰러진 고태를 보며 동천몽이 중얼거렸다.
'지금쯤 한판 벌어졌겠군.'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검을 고쳐 잡았다.
"모조리 베어드리지요."
다섯 사람의 얼굴이 급변했다. 동천몽의 눈에서 살기가 풍겨 나왔는데 모골이 송연할 만큼 섬뜩했다. 뢰음칠혈 중 남은 다섯 사람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포달랍궁이 내려다보이는 조그만 야산 등성이에 일단의 승려들이 주위 은폐물에 자신의 몸을 감추고 야수와 같은 눈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승려들이지만 묵빛 가사를 걸쳤고 이마에 박힌 주먹만 한 흑색의 계인이 이목을 끈다. 이들은 바로 포달랍궁과 쉼없는 경쟁 관계를 유지해 온 뢰음사 승려들이었다.
포달랍궁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불공을 드리는 염불 소리와 무예를 수련하는 기합 소리가 뒤섞여 흘러나올 뿐, 어디에도 자신들의 침입을 대비한 삼엄한 경계는 보이지 않는다.
모산 선사의 눈이 빛을 뿌렸다.
그는 지금 뢰음사의 주력인 뢰음백팔대를 이끌고 있었다. 정예 중의 정예라고 할 만한 뢰음백팔대의 눈이 대낮임에도 살기로 번쩍거렸다.
그들은 오늘의 선봉이었다. 자신들이 급습을 하여 포달랍궁을 어지럽혀 놓으면 나머지 후속 부대들이 밀고 들어와 일거에 포달랍궁을 점령한다는 것이 애초의 전략이었다. 더구나 대법왕이 자리를 비운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더구나 벌건 대낮에 적이 침공하리라고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고금을 통틀어 대낮에 전쟁을, 그것도 기습을 한 예는 거의 없었다. 그러니 더욱 성공률이 높다는 것이 모산 선사의 생각이었다.
힐끔!
모산 선사가 하늘의 해를 보았다.
미시(未時)가 막 지나고 있다. 점심 공양을 끝내고 가장 권태와 졸음에 찌들 시간이다. 이 시간이면 모든 사람들의 감각과 사고가 늘어지고 풀린다.
휙!
모산 선사의 유난히 큰 오른손이 앞으로 뻗어나간다.
공격 신호였다. 순간 주위에서 은폐와 엄폐를 하고 있던 뢰음백팔대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초상비.
풀잎을 스치듯 날아가는 절정의 신법인데, 가히 섬전을 방불케 하는 속도였다.
뢰음백팔대가 날아가는 곳은 포달랍궁의 동북쪽이었다. 동북쪽은 지형이 험난하여 침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경계 또한 다른 곳보다 허술한데, 뢰음백팔대는 그 점을 노렸다.
이끼와 물기가 흐르는 거대한 절벽이 앞을 막고 있었다.
슈우우우!
새처럼 백팔 명의 승려가 떠올랐다. 오십여 장 높이의 절벽을 오르자 멀리 육중한 담장이 보였다. 세월의 오랜 풍상을 말해주는 듯 일 장 높이의 석벽은 잡초에 뒤덮여 있다.
스으으으!
또다시 석벽을 향해 수평으로 날아갔다.
맨 선두에 선 모산 선사가 소매 춤에서 한 자 반가량의 검을 꺼냈다. 검집도 없는 붉은 검은 칠십 년을 자신과 동고동락해 온 애검 홍추혈이다. 보검으로 어지간한 쇠는 무 자르듯 하며 예리함이 천하 어떤 명병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
일 장 높이의 석벽을 넘기 위해 일행이 다시 솟구쳐 오르려 할 때 갑자기 주위의 나무와 바위들이 변화를 일으켰다.
촤아아!
콰아아!
나무와 바위들이 일제히 뢰음백팔대를 공격한 것이다.
모산 선사는 자신을 공격해 오는 두 명의 승려를 홍추혈로 베며 외쳤다.
"매복이다!"
두 승려가 뒤로 밀려 날아갔다가 다시 달려들었다. 그때 귓가로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크악!"
"욱! 아아악!"
귀에 익숙한 부하들의 비명이었다.
촤촤악!
달려드는 두 승려의 홍추혈을 검기로 잘랐다. 한 명은 즉사하고 다른 한 명은 부상을 입은 듯 비틀거린다. 평소 같았으면 비틀거리는 승려의 목줄을 끊었겠지만 등 뒤 상황이 다급했으므로 돌아섰다.
"으흡!"
모산 선사는 기겁했다.
어느새 한 명의 비렁뱅이가 자신의 앞을 우뚝 막아서고 있었다. 걸레 조각 같은 가사를 걸친 맨발의 승려였는데 키가 아주 작았다. 포달랍궁의 주요 간부들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데 눈앞의 승려는 낯설었다.
"크악!"
"으악! 욱! 크큭!"
콩 볶듯 들려오는 비명의 대부분은 자신의 뼈와 살이라 할 수 있는 수하들이 이승을 떠나며 내지른 것이었다.
"소승을 처음 볼 것이오."
모산 선사가 이마를 찌푸렸다.
마주 선 비렁뱅이, 덕배 선사가 조용히 말했다.
"덕배라 하오. 천룡구십구불의 우두머리라고 하오."
흠칫!
모산 선사의 두 눈이 흔들렸다.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이름은 익히 들어보았다. 일체 권력에 대한 집착이 없고 토굴 속에서 삶이란 무엇인지를 공부하고 있다는 괴짜 승려라고 했다. 그렇다고 그가 깨우침에만 매달렸을 뿐, 무예 수련을 게을리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었다. 나이 오십에 포달랍궁의 전설적인 절기 하나를 완숙하게 깨우쳤다고 전해진다. 무공의 강함으로만 따진다면 서장무림 전 후대를 통털어 열 손가락 안에 들 것이라고 했다.
"도… 도대체……?"
"어떻게 기습 사실을 알고 매복했느냐는 질문이로군. 그렇겠지. 무척 궁금할 것이오. 어려울 것 하나도 없소. 우린 대법왕님께서 시킨 대로 따르고 있을 뿐이오."
"대… 대법왕?"
"대법왕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그러시더구려. 필시 뢰음사에서 공격을 해올 것이니 미리 준비들 하고 있다가 모조리 박멸시키라고 말이오."
모산 선사의 얼굴이 흑빛으로 변했다.
이번 습격은 완벽했다. 비밀 누설은 결코 있을 수가 없었고 동천몽과 포달랍궁을 따로 떼어내 분리, 공격한다는 전략은 훌륭했다. 누구도 실패를 의심하지 않았고, 뢰음천하가 곧 다가올 것을 인정했다.
덕배 선사가 조용히 대답했다.
"소승도 알 수 없지요. 다만 대법왕님께서는 우리와 다르다는 것이오."
"다… 다르다니?"
"그냥 다르오."
덕배 선사의 말뜻을 얼른 이해하지 못한 모산 선사가 눈을 깜박거렸다. 다르다는 말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얼른 짐작되는 것이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기에 대법왕의 세속의 이름은 동천몽이고 머리가 아주 나쁘다고 했다.
팟!
잔뜩 찌푸려져 있던 모산 선사의 두 눈이 이채를 발했다. 덕배 선사의 다르다는 말뜻을 이해한 것이다. 그것은 보통 사람과는 확연한 차이가 나도록 머리가 나쁘다는 의미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생각이 채 정리가 되기도 전에 다시 의문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멍청한 것이었다. 그런데 덕배 선사는 분명 멍청하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다르다고 했다.
'도대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역대 대법왕 중 가장 출중하다는 것이오."
모산 선사의 눈썹이 더욱 찌푸려졌다.
머리가 돌 수준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포달랍궁 역대 대법왕 중 가장 출중하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갈수록 오리무중이었다.
콩을 볶듯이 들려오던 비명 소리도 점차 잦아졌다. 이제 비명은 간헐적으로 들려왔는데 미약하다. 그것은 부상 중인 부하들을 천룡구십구불이 찾아 확신 사살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나 절망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삐이익!
머리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뢰음백팔대와 이 다경의 시차를 두고 공격하겠다는 본진의 신호였다. 본진에서는 지금쯤 뢰음백팔대가 포달랍궁을 완전히 뒤집어놓은 줄 알고 공격 신호를 보낸 것이다.
당장 가로막아야 했다. 하지만 덕배 선사가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방법이라고는 없다. 희생은 뢰음백팔대로 끝내야 했다.
멀리 수많은 검은 인영들이 포달랍궁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걸 바라보는 모산 선사의 얼굴이 절망으로 우그러졌다. 가혹하고 처참한 패배가 눈앞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으아아아!"
첫 번째 비명이 들려왔다.
그리고 연달아 들려오는 비명. 그것은 싸우다 죽으며 흘리는 비명이 아니라 기습에 당할 때 질러내는 단말마였다.
"우리도 이제 그만 승부를 결해야 할 것 갔소."
모산 선사가 홍추혈을 불끈 쥐었다.
상대는 보지는 못했지만 어쩌면 사대법왕의 무위를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포달랍궁의 숨은 고수였다. 특히 걸레 조각을 방불케 하는 누더기와 맨발이 상대를 더욱 움츠러들게 하는 묘한 마력을 풍겼다.
"오시오."
손님 대접을 해주겠다는 뜻이다.
모산 선사는 마다하지 않았다.
푸욱!
홍추혈이 사선을 그었다.
사악서추.
뢰음사 최대 검법인 마라사악 제이초이다. 빠르고 파괴적이어서 단순히 상처만 입히는 것이 아니라 검날이 접촉된 피부는 익어버린다.
슥!
베었다고 속으로 외쳤다.
그런데 검끝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파팍, 하며 둔탁한 소리가 들리더니 지면의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조금 전까지 서 있던 덕배 선사의 몸이 좌측으로 이 보 비켜서 있었다.
언제 피했는지 보지도 못했다.
촤촤촤!
연거푸 삼 검을 좌우로 휘둘렀다. 좌우로 먼저 검식을 펼쳐 피할 공간을 선점한 다음 직선으로 내리그었다. 도망갈 곳은 없었고 모산 선사의 입가에 자신감이 떠올랐다.
바로 그때 덕배 선사의 넝마 같은 가사 속에 감추어져 있던 오른손이 불쑥 나왔다. 마치 발이 다섯 개 달린 갈코리가 나오는 것 같았는데, 그대로 모산 선사의 검을 내리쳤다.
파팍!
"욱!"
모산 선사가 뒤로 한 걸음 밀리면서 신음을 흘렸다.
하마터면 충격에 검을 놓칠 뻔했다. 그런데 덕배 선사는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미… 밀종대수인!'
그것은 틀림없는 밀종대수인이었다. 밀종대수인은 포달랍궁 제일의 장법이다. 워낙 어렵고 난해하여 아직까지 그 진의를 정확히 깨우치고 터득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전해진다. 밀종대수인을 가장 잘 썼던 사람은 사백 년 전 대법왕이었던 대운총왕이다. 그의 수위는 팔성이었는데 그것으로 서장을 완벽히 통치했다. 그런데 자신의 홍추혈이 튕겨 나갈 정도면 그 수위에 근접해 있다고 봐야 했다. 포달랍궁의 전설적인 무공 하나를 완벽히 알고 있다는 말은 밀종대수인을 말함이다.
모산 선사의 얼굴이 신중해졌다. 홍추혈은 보검이지만 밀종대수인 앞에서는 그 위력을 장담 못한다.
쉬쉭!
검로가 짧은 대신 굵다.
마라사악 오초 사악단혼과 육초 사악몽중이었다. 힘의 검법이어서 어지간한 것은 모두 부서져 나간다.
덕배 선사의 오른손이 다시 드러나 망설임없이 모산 선사의 검을 후려쳤다. 무척 빠르고 경쾌했다.
꽈- 아악!
"으웍!"
모산 선사가 뒤로 물러서며 비명을 질렀는데 그 순간 그만 홍추혈을 놓치고 말았다. 만약 놓치지 않았다면 팔이 부러졌을 것이다. 무사가 검을 놓쳤다는 것은 뻔한 결과를 부른다.
"모산이라 했소? 포달랍궁은 영원하오. 겉만 보고 본 궁을 모두 보았다고 말하지 마시오. 나 또한 본 궁의 깊이를 모르고 있소. 더욱이 대법왕님에 대해서는 손톱만큼도 알지 못하고 있소."
덕배 선사의 목소리가 낮게 깔려 나왔다.
석벽 너머에서는 비명이 끊임없이 메아리친다.
"필시 오늘 살아 돌아가는 제자는 아마 일 할을 넘지 못할 것이오."
오늘 처음 만났지만 결코 허튼소리를 할 사람 같지는 않아 보였다.
무려 삼천 명이 기습했는데 잘해야 삼백 명 정도 돌아갈 것이라는 것은 그만큼 준비가 완벽하다는 뜻이다. 덕배 선사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귀가 아플 만큼 비명은 폭우처럼 쏟아진다.
스스스!
덕배 선사의 양손이 올라가고 쌍수가 나왔다.
붉게 달아오른 양손이 마치 불덩이 같았다.
"허헉!"
모산 선사가 놀라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손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면 그때부터 밀종대수인은 구성의 경지에 접어든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눈앞의 덕배 선사야말로 포달랍궁 사상 밀종대수인을 가장 높게 연마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내가 단순히 깨우침을 위해 바깥과 담을 쌓고 산다고 알고 있소.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소. 지난 수십 년 동안 오로지 밀종대수인 하나를 제대로 얻기 위해 그 고생을 사서 한 것이오. 다행히 어느 정도 소득이 있었소. 당신은 밀종대수인에 희생되는 첫 번째 피해자가 될 게요."
모든 것을 버렸다. 밀종대수인을 연마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철저히 외면하고 털어냈다. 오로지 밀종대수인 하나만을 위해 평생을 연구하고 바친 것이다. 포달랍궁 안에서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나 요즘 들어 단 한 사람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다름 아닌 신임 대법왕이었다. 동천몽이라면 자신의 속마음을 이미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보기에 동천몽은 사람이 아니었다.
콰아아!
두 개의 붉은 섬광이 허공을 날아왔다.
'빠르다!'
모산 선사는 본능적으로 쌍장을 들어 맞섰다.
화아아!
파팍!
쌍장이 찢겨져 종잇조각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가슴 앞으로 파고드는 두 개의 붉은 손.
다급성을 터뜨리며 뒤로 물러났지만 쫓아오는 손이 더 빠르다.
푸푹!
두 개의 손이 앞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끄어억!"
가슴을 내려다본 모산 선사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갈비뼈를 비롯해 내장까지 완전히 긁어가 버린 것이다.
휘청!
땅바닥에 떨어진 내장과 뼛조각을 보며 모산 선사가 중얼거렸다.
"아… 악몽, 이건 지옥… 이… 다."
모산 선사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불거졌다. 경악과 충격이 어우러진 공포의 모습이었다. 한참 동안 담 너머 포달랍궁을 핏빛 눈으로 쳐다보던 모산 선사의 신형이 서서히 넘어졌다.
잠시 쓰러진 모산 선사를 바라보던 덕배 선사가 주위를 살폈다. 뢰음백팔대의 시신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고 일부는 산짐승들에 의해 뜯기고 있었다.
휘이이!
덕배 선사의 몸이 떠오르더니 담장을 넘어 궁 안으로 날아갔다.
곳곳에는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고, 여전히 싸움은 벌어지고 있었다. 시신의 대부분은 뢰음사 제자들이었다.
파팍!
전각 지붕에서 떨어지는 두 명의 뢰음사 제자를 일장에 격살하고 백궁 앞으로 날아갔다. 백궁은 동천몽이 정무를 보는 곳으로 궁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었다.
파파팍!
덕배 선사가 날아가면서 눈에 띈 뢰음사 무사들을 쓸 듯 후려쳤다.
"컥!"
"크윽! 커어억!"
밀종대수인 앞에 누구도 온전하지 못했다.
예상대로 백궁 앞마당에 이르자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포달랍궁 쪽에서는 어느새 뢰음백팔대를 제거한 천룡구십구불이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었다.
처음 덕배 선사는 천룡구십구불을 데리고 흑수당을 갈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동천몽은 단호히 거부했고, 계속 호위를 주창하는 덕배 선사를 조용히 부르더니 오늘 일을 귀띔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반신반의했지만 동천몽이 워낙 자신감에 찬 얼굴로 뢰음사의 침공을 단정했고, 그래서 대비했는데 사실로 입증될 줄이야.
천장금왕은 백궁으로 들어가는 계단에 우뚝 서서 장내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덕배 선사가 곁으로 내려서자 천장금왕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자네의 공이 크네."
"전황은 어떻사옵니까?"
"이곳은 보다시피 이렇고, 다른 곳은 거의 전멸이라는 보고일세."
문득 천장금왕이 품에 손을 집어넣었는데 한 개의 주머니가 잡혀 나왔다. 동천몽이 주고 간 두 개의 주머니 중 나머지 한 개였다. 천장금왕은 망설이지 않고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봉투를 꺼냈다.
부우욱!
봉투를 찢고 서찰을 꺼내 펼쳐 들었다.
역시 내용이 아주 짧은 듯 잠시 시선을 주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덕배 선사에게 건네주었다. 덕배 선사가 서찰을 받아 내용을 살폈다.
刀峯… 유마덕배.
'도봉유마!'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천장금왕을 쳐다보았다.
천장금왕이 말했다.
"도봉에 유마음선이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다녀오겠사옵니다."
덕배 선사가 몸을 날려 갔다.
자신도 덕배 선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라고는 별로 없었다. 토굴 속에서 거의 두문불출하며 인간의 삶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한 공부 중이라는 것이 그에 대한 정보의 전부였다.
그런데 동천몽은 어떻게 그를 불러냈고 무엇을 통해 그가 무공에 뛰어나다는 것을 알아보았단 말인가. 그리고 덕배의 무공을 어떻게 알았기에 뢰음사 사주를 잡으라고 그에게 명령을 내렸단 말인가. 또한 유마음선이 어떻게 도봉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단 말인가.
의혹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나 가장 놀라운 것은 그가 뢰음사의 침공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줄곧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지만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할수록 동천몽의 능력에 대해 감탄을 넘어 두려움까지 일었다.
'불가사의하시다!'
접전이던 싸움은 천룡구십구불이 난입함으로써 포달랍궁이 압도해 가고 있었다.
천장금왕과 헤어진 덕배 선사는 포달랍궁을 벗어나 가파른 산을 오르고 있었다. 맨발이 땅을 한 번씩 박찰 때마다 삼십여 장씩 솟구쳤는데 전광석화와 같았다.
눈앞으로 수직의 절봉이 나타났다.
도봉이었다. 도봉에 서면 포달랍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뢰음사 사주는 필시 그곳에서 작전을 진두지휘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동천몽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슈우우!
덕배 선사의 몸이 새처럼 떠올라 봉우리 위에 안착했다. 봉우리 정상은 방원 이 장이 채 되지 않는 아주 좁은 공간이었는데 그곳에 한 묵포승려가 우뚝 서 있었다. 육 척의 신장에 족히 백 관은 나갈 것 같은 뚱뚱한 체격이었는데, 저 아래 포달랍궁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달싹거리며 전음으로 작전 지휘를 하고 있었다. 이따금 입 밖으로 목소리가 튀어나온 것이 전세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전황이 워낙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어서인지 가까이에 이르렀는데도 묵포승려는 자신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덕배 선사는 헛기침을 하여 상대를 일깨웠다.
묵포승려가 돌아섰다.
멈칫!
비록 전황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등 뒤에 사람이 왔는데도 몰랐다는 것에 다소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금세 표정을 엄숙하게 고치더니 물었다.
"처음 보는구나."
급박한 상황인데도 말에서 무게가 느껴졌다.
"노납은 유마라 한다."
유마라면 유마음선을 말한다. 올해 일흔으로, 그는 현 뢰음사의 사주이기도 했다.
유마음선의 눈빛이 흔들렸다. 찢어진 가사, 맨발의 덕배 선사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세를 느꼈으리라.
"인사 올리지요. 소승은 덕배라고 합니다. 천룡구십구불의 수뇌이기도 합니다."
"덕배?"
경쟁 문파이다 보니 대부분의 간부들은 죄다 꿰고 있다. 하지만 덕배는 기억에 없었으므로 눈살을 찌푸렸다.
"소승이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나이까?"
"하라."
"제자들을 데리고 떠나십시오. 그럼 더 이상의 피해는 물론이고 오늘 사건에 대한 추궁은 없을 것입니다."
"푸핫핫핫!"
유마음선이 광소를 터뜨렸다.
분노와 모욕을 느꼈음이리라. 한참 동안 피를 토하듯 광소를 흘리던 유마음선이 덕배 선사를 노려보았다.
"이걸 알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설혹 우리의 싸움은 패한다고 해도 너희 대법왕은 우리 손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아마 지금쯤 본승 사숙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유마음선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덕배 선사가 조용히 말했다.
"사주의 사숙이시라면 혹시 뢰음칠혈을 말씀하시는지요?"
"그렇다. 그분들께서 금제를 벗고 세상으로 나오셨다. 지금쯤 아마 그대들의 애송이 대법왕은 그분들께 잡혔거나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칠십 년 전 전대 법왕은 침략의 주된 인물이었던 뢰음칠혈에게 금제를 가했다. 그런데 이제 금제를 벗어난 듯했다.
유마음선이 덕배 선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동천몽이 죽었을 것이라고 얘기하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얻어내지 못하자 유마음선이 입을 열었다.
"너무 믿을 수 없는 일이어서 실감이 나지 않겠지. 하지만 내 말엔 거짓이 없다. 두고 보면 알 것이니라. 그러니 그대야말로 빨리 천장금왕에게 대법왕을 살리고 싶다면 투항하라고 전하라."
"아직도 뭘 모르고 계시는구려. 뢰음사의 본 궁 침입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소이까?"
사실 그것은 지금까지 유마음선의 머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내용이었다.
덕배 선사가 조용히 말했다.
"대법왕님께서 미리 귀띔해 주셨소이다."
흠칫!
유마음선이 놀란 얼굴을 짓자 덕배 선사가 잔잔한 음성으로 모산 선사에게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흐흐흐흐!"
유마음선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음산한 웃음을 지었다.
"유치하도다. 그런 터무니없는 억지로 날 놀래키려 하다니."
"아무튼 다시 한 번 권고합니다. 제자들에게 후퇴 명령을 내리십시오. 그리고 본 궁의 대법왕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반성하십시오. 그럼 목숨은 건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아마 뢰음사는 창건 이후 최대의 위기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노옴!"
유마음선이 날아왔다.
거구의 몸이 바람처럼 빠르다.
덕배 선사는 방심하지 않고 오른손을 뻗었다. 붉게 달아오른 오른손이 유마음선의 장력을 정면으로 후려쳤다.
콰아앙!
커다란 굉음이 들리고 두 사람 모두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그런데 유마음선의 눈이 커져 있었다.
"서… 설마, 밀종대수인?"
"과연 뛰어난 안목이시군요. 맞습니다."
"그 어렵다는 무공을……?"
"어려우니까 수십 년을 매달렸는데도 아직 완성을 못했지요."
그때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쿵!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봉우리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