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16화 (16/71)

제7장 미소 속에 비친 함정

주머니 안에서는 열십자로 접혀진 분홍빛 종이가 나왔다. 천장금왕은 매듭이 지어진 분홍빛 십자 종이를 조심스럽게 풀어 헤친 후 펼쳐 들었다.

촤락!

흠칫!

서찰을 보던 천장금왕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의 안색이 굳어지자 지켜보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뭔데 그러십니까?"

"답답하십니다. 이리 좀 줘보십시오."

천검은왕이 천장금왕의 손에 들린 분홍빛 서찰을 빼앗아 자신이 읽었다.

천검은왕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宮入… 궁입중뢰…….

"이게 무슨 말입니까?"

천검은왕의 손에 들린 서찰을 앞 다투어 돌아가며 읽더니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뜻을 헤아리기 쉽지 않았기 때문인데 천장금왕이 다시 서찰을 받아 뚫어져라 내용을 쳐다보았다.

"글씨 네 자를 뭘 그렇게 오랫동안 보십니까?"

천검은왕이 짜증을 내었다.

"궁입이 무슨 뜻이던가?"

말이 떨어지자마자 천검은왕이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본 궁으로 누가 들어온다는 말 아닙니까?"

"그렇지, 궁입이면."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중뢰는 무엇입니까?"

열두 장로 중 한 사람이 물었다.

천장금왕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몹시 신중한 모습이었는데 쳐다보던 사람들 또한 은근히 긴장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마를 찡그리고 있던 천장금왕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서장에서 뢰(雷)의 문파가 어디던가?"

"뢰의 문이라면……."

"가만, 뢰음사?"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천검은왕이 강렬한 시선으로 말했다.

"설마 뢰음사가 본 궁을 침입하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뢰음사(雷音寺)와 포달랍궁은 지난 수백 년 동안 경쟁 관계에 있었다. 비록 경쟁 관계였다고는 하나 엄밀히 따지면 뢰음사는 서장 제이문이었다. 중원과 비교한다면 소림과 무당의 차이인 것이다. 그래서 뢰음사의 역대 사주들은 타도 포달랍궁을 외치며 숨을 거두었고, 신임 사주는 포달랍궁을 무너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리고 급기야 칠십 년 전에 타도 포달랍궁을 외치며 일어났지만 분루를 삼켜야 했다.

"무슨 근거로 대법왕님께서 그런 말씀을 남기셨단 말이오? 대법왕님께서 그동안 본 궁 내부 사정을 파악하느라 외부로 눈 돌릴 틈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뢰음사를 알며……."

"더구나 뢰음사는 칠십 년 전에 본 궁에 신물을 바쳐 완전히 신문(臣門)이 되었거늘."

그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래전부터 대법왕님께서는 서장무림의 판세를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눈썹이 두 개뿐인 승려, 이미 선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천장금왕을 비롯한 문의 윗사람들에게 가볍게 합장을 하고 입을 열었다.

"대법왕 즉위식이 있던 그날 밤 조용히 소승을 불러 서장무림의 판세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꼼짝 않고 서서 무려 두 시진 동안 대법왕님께 설명을 해드렸지요."

모두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처음 동천몽이 환생자로 지목되어 대법왕으로 성장할 때까지를 봐온 자신들이다. 환생자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법왕이 되었지만 자질이나 제자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절대적인 권위와 위엄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말과 행동은 천박하기 이를 데 없었고 걸핏하면 폭력과 욕설이 다반사였는데, 그런 대법왕이 자신들도 모르게 이미 서장무림의 흐름을 꿰뚫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표정들이었다.

"대법왕님께서 궁입중뢰라는 네 글자를 써서 내게 준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우리 눈에는 전혀 징조가 보이지 않지만 그분의 계산으로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더구나 내가 뢰음사 사주라면 대법왕님이 궁을 비운 지금이야말로 침략의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판단하겠네."

사람들의 눈이 반짝였다.

천장금왕과 이미 선사의 말을 종합해 보건대, 동천몽은 겉으로 드러난 것이 진면목이 아니었다. 뭔가 가공할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스스로 감추고 숨겨 적으로 하여금 방심케 하는 무서운 계략을 지닌 사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놀라운 일을 예측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당장 돌아가 제자들을 격려하고 임전 태세를 갖추도록 하게. 또한 모든 기관과 진법을 작동시키고 각 위치에서 내 명령을 기다리게. 그리고 자네."

이미 선사를 돌아보았다.

"하명하소서, 금왕님."

"천룡구십구불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모두 매복에 들어가 있사옵니다."

"제발 대법왕님의 생각이 기우이길 바라야지. 그만들 돌아가서 준비하게."

모두들 굳은 얼굴로 흩어졌다.

'대법왕께서는 침략이 있다면 밤이 아니라 대낮일 것이라고 했다. 우리의 허를 찌르기 위해.'

다른 건 백 보를 양보해서라도 이해하지만 대낮에 침략이 있을 것이라는 말만큼은 이해되지 않았다. 대낮에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절대 말이 안 되었다.

선입견 때문인가. 갑자기 주위 공기까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천장금왕이 자리를 뜨지 않고 있는 이미 선사를 향해 말했다.

"대법왕님께서 자네에게 특별히 지시한 것이 있었을 것 같군."

사불각은 정보 기관이다. 어느 집단이건 정보 기관이야말로 중추이자 핵심이다.

"물론 있습니다."

"뭔가?"

"위기가 닥칠수록 명령 계통이 하나로 단일화되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금왕님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고 명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천장금왕의 눈이 커졌다.

포달랍궁에 몸을 담은 지 일백 년이 넘었지만 동천몽을 곁에서 수행하는 사대법왕의 수장이 된 지는 불과 며칠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동천몽은 자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천장금왕으로 앉힌 것은 철저히 자신의 연륜이 크게 작용했다지만 자리를 비우면서 모든 대법왕의 권한을 자신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은 천장금왕 자리의 임명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때에 따라서는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반란을 획책할 수 있고 자신이 대법왕에 오를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런 위험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자신에게 모든 걸 넘겼다는 것은 예상밖이었다. 더구나 앞선 천장금왕의 반란으로 신경이 예민해질 만도 한데 전권을 위임하다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신의 상식으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문득 머릿속으로 네 글자가 떠올랐다.

군신유의(君臣有義).

동천몽은 자신을 완전하게 신뢰하고 있었다. 그것은 예측 못한 감동이었고 가슴 뭉클한 사건이었다.

'거목이시다!'

자신들은 겉만 보고 평가했다. 동천몽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모든 사람을 외형만 보고 경솔하게 평가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잘못된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마차는 덜커덩거리며 산길을 내려갔다.

포달랍궁에서 흑수당까지는 오백 리 거리다. 달리지 않고 이렇게 걷는다면 족히 칠팔 일은 걸릴 것이다.

"젠장!"

뒤를 따르던 자청단이 투덜거렸다.

"이렇게 가다간 어느 세월에 도착한단 말인가? 우라질!"

목소리가 크다는 듯 백쾌섬이 눈치를 주었지만 자청단은 오히려 들으라는 듯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핫핫핫!"

"호호호!"

그런데 마차 안에서는 동천몽과 자정경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자청단은 백상거를 노려보았고, 백쾌섬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 섬광이 피어났다.

백상거 안은 무척 화려했다.

바닥은 푹신한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고, 좌우 벽 쪽으로 의자가 붙어 있어 마주 볼 수 있게 되어 있었으며, 창문이 달려 있어 언제든지 환기를 시킬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동천몽은 자정경과 마주 앉아 열심히 얘길 나누고 있었다.

"저어… 대법왕님께서는 무엇을 좋아하시나요? 취미 같은 거요."

자정경이 반짝이는 시선으로 물었다.

동천몽이 눈을 내리깔고 뭔가 진지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쳐들고 근엄히 말했다.

"글쎄요. 취미라고까지 할 것은 없지만 굳이 든다면 독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자정경의 눈이 커졌다.

"아, 맞아요. 제가 처음 뵈었을 때도 책을 보고 계셨죠? 한 달에 몇 권 정도 책을 읽나요?"

동천몽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글쎄, 정확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대략 십여 권 정도?"

"한 달에 무려 열 권을 읽는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더 읽을 때도 있지요. 하지만 평균적으로 그 정도 읽지요. 아미타불."

자정경이 더욱 호기심을 일으켰다.

"그럼 어지간한 책은 다 보았겠군요?"

"그… 그렇다고 봐야지요."

"혹시 원정래오라는 책은 보셨나요?"

"……."

"주인공이 반란을 꾸민 죄로 평생을 감옥에 갇혀 살게 되죠. 그런데 처음에는 자주 찾아오던 여인이 점차 멀어지더니 급기야 떠나는 얘긴데……."

동천몽이 눈을 치켜떴다.

"아! 기억납니다."

"재밌죠, 그 책? 난 아주 감동적으로 읽었어요."

"좋지요. 참 바람직한 책이에요. 나 또한 그 책을 읽으면서 어찌나 가슴이 아팠던지."

이미 자정경이 줄거리를 대충 말해주었으므로 대략 흐름을 꿰맞추는 건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보나마나 여자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쳤을 것이다.

"정말 대법왕님께서는 모르는 게 없군요. 소녀 또한 책이라면 남에게 뒤지지 않는데 도저히 대법왕님께는 당할 수가 없어요."

"아미타불! 겸양의 말씀이오. 아름다운 용모에 풍부한 학문까지 겸비한 자 낭자야말로 위대하오."

"과찬이에요."

자정경이 배시시 웃었다.

흰 이가 가지런히 드러나고 보조개가 살짝 만들어진다. 특히 두 눈의 맑음은 수정을 방불케 하여 그 안으로 빨려들 것 같았다.

"꿀꺽!"

동천몽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갑자기 아랫도리까지 뜨거워진 것이다. 동천몽의 뜨거운 시선을 느꼈음인가, 자정경이 시선을 피했다

마차는 산길을 벗어나 넓은 평원을 가고 있었다. 멀리 눈 덮인 대설산과 그 아래로 넓은 초원이 나타났다. 융단처럼 깔린 초원 위로 수많은 양 떼가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런데 늑대와 맹수들로부터 양 떼를 지키던 목동들이 갑자기 말을 타고 백상거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이십여 마리의 말이 달려오자 초원이 시끄러워졌고, 자청단과 백쾌섬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언뜻 보면 마치 백상거를 공격하기 위해 달려오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자청단이 긴장의 모습을 띠었다.

백쾌섬이 손을 뻗어 말렸다. 내버려 두라는 신호였다.

히히힝!

이십여 마리의 말이 백상거 근처에 이르러 일제히 멈췄다. 마상에는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여우 털목도리를 둘렀고 호피로 된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목동들이었는데, 옆구리에는 날이 시퍼렇게 선 대감도를 차고 있었다.

목동들은 가볍게 바닥으로 뛰어내리더니 일제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대법왕이시여!"

"천상(天象)의 주인이시여!"

드르륵!

그러자 백상거 좌측 창문이 열리고 동천몽의 얼굴이 나타났다.

동천몽이 얼굴을 드러내자 엎드린 목동들이 감동과 감격으로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오오!"

"강녕하소서!"

동천몽이 손을 가볍게 내밀어 흔들며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에게 축복이 있길."

"가… 감사하나이다."

"천상이시여… 천상이시여!"

자정경의 눈이 커졌다. 백상거를 향해 진심으로 경배하는 목동들의 태도도 놀랍지만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축복해주는 동천몽의 표정 또한 언뜻 석가세존을 보는 듯했다. 때마침 구름 사이로 나타난 햇볕이 동천몽의 얼굴을 비추면서 더욱 광휘로웠다.

'마… 맙소사!'

백쾌섬 역시 눈을 부릅떴다.

그것은 틀림없는 인간을 향한 석가의 자애로움이었다.

'사람의 얼굴이 저렇게 돌변할 수가……!'

비록 대법왕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이 본 동천몽의 얼굴에는 심통과 사나움이 가득했다. 이따금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아랫사람에게 거친 표현 쏟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목동들은 백상거가 멀리 떠났는데도 일어날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끝없이 사라지는 백상거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렸다.

"부디 천년만년 강녕하소서!"

"세세연년 살아 소인들의 등불이 되어주소서!"

백상거는 초원 멀리 한 개의 점이 되어 사라졌다.

백상거는 고갯길에 서 있는 주루 앞에 멈췄다. 일목이 뒷문을 열어주고 동천몽과 자정경이 나왔는데, 백쾌섬이 흠칫했다. 자정경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천몽과의 동행이 무척 만족스럽다는 의미였다.

일행이 주루로 들어서자 주인이 기겁했다.

"으허헉!"

선두에 서서 들어가는 일목을 보며 칠십가량 되는 주인이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노안이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칠십 평생 온갖 인생 풍파를 겪고 살아왔지만 눈이 하나뿐인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미간에 떡하니 박혔는데 크기가 주먹만 했고 자신을 쳐다보는 눈엔 온통 흰자위뿐이었다.

"어으으으!"

주인은 너무 충격을 받은 듯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자리 안내 안 할 거요?!"

일목이 버럭 소릴 지르자 눈에서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하… 합니다. 이쪽으로."

객점에는 네 개의 탁자를 잡고 십여 명의 손님이 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그들 모두 일목의 모습에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뭘 봐? 밥들 먹어!"

일목이 그들을 향해 꽥 소릴 지르자 일제히 젓가락을 놀렸다.

"여기 앉으시지요."

동천몽이 가장 먼저 자정경에게 자리를 권했다.

자정경이 웃으며 사양했다.

"아니에요. 대법왕님께서 먼저 앉으시지요."

"아니오. 부처께서 말씀하시길, 여인을 먼저 배려하라고 했소. 그러니 사양하지 마시고……."

백쾌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 부처께서 여인을 먼저 배려하라는 말까지 했단 말인가?'

하지만 알지 못하니 그런 줄 알아야 했다.

"고마워요, 대법왕님."

자정경이 앉아 동천몽이 그 곁에 주저앉았다.

모두 앉았는데 일목은 여전히 동천몽 뒤에 서 있었다.

"너도 앉거라."

"아닙니다. 저는 이상하게도 서 있는 것이 편합니다."

"그래? 그럼 서 있어."

"뭘 드실 것인지……?"

주인이 일목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동천몽이 자정경을 보며 말했다.

"자 낭자는 뭘 드시겠소? 오늘 점심은 본왕이 살 테니 마음껏 시키시오."

자정경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저, 정말이죠? 그럼 난 오향건을 먹고 싶어요."

"난 돈육 주시오!"

"난 연와탕."

자청단과 백쾌섬이 음식을 시켰다.

주인이 동천몽을 보았다.

"앵두… 백자색근."

앵두육을 달라고 하려다 자신의 신분을 떠올리며 얼른 백자색근으로 바꾸었다. 앵두육은 돼지 살코기를 주사위 크기로 잘라 설탕에 절인 신선한 앵두와 함께 항아리에 넣고 열 시간 이상 푹 삶은 것을 말한다.

"저… 저어, 어르신께서는……?"

주인이 일목을 공포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일목이 냉랭히 말했다.

"난 안 먹소."

"알겠습니다."

부인이 부리나케 주방으로 사라졌다.

"자 낭자께서는 오향건을 좋아하나 보구려."

"네, 무척 좋아해요. 집에서도 자주 만들어 먹어요."

동천몽이 눈을 크게 떴다.

"직접 요리를 한단 말이오?"

"그럼요. 제가 얼마나 요리를 잘 만드는데요. 믿지 못하시겠다면 이번에 제가 직접 한번 보여드릴게요."

"믿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놀라워 그렇소이다. 그럼 염치불구하고 자 낭자가 만든 오향건을 한번 먹어볼 기회를 주시겠소?"

"좋아요. 집에 도착하면 곧바로 만들어 드리죠. 저, 진짜 잘 만들어요."

그 말에 자청단이 자정경을 향해 쏘아붙였다.

"요리할 시간이 어디 있단 말이냐? 지금 우리 형편을 몰라서 그딴 배부른 소릴 지껄이는 게냐?"

"오… 오라버니?"

자정경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따위 한가한 얘기할 때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죽느냐 사느냐의 생사기로에 달려 있다. 과연 어떡해야 할지 대책이 안 서는데 요리할 생각을 하다니, 쯧쯧, 아무리 철딱서니가 없기로서니."

동천몽이 인상을 썼다.

"자… 자 형, 지금 대책이 안 선다는 말은 날 못 믿겠다는 말 아니오?"

자청단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말해 그렇소. 대법왕님의 능력은 존중하지만 과연 혼자 힘으로 정체도 알 수 없는 놈들을 가로막을 수 있을지 의심이 되오. 물론 환상루에서 일광엽 자객 삼십 인을 혼자 처리했다는 말은 들었소만… 욱!"

말을 하다 말고 자청단이 기겁했다.

어느새 일목의 검이 그의 목젖에 닿아 있었다.

"한 번만 더 대법왕님을 모욕하는 말을 하면 구멍을 내주겠다."

"일목, 그 검 빨리 안 치워?"

"건방진 놈이 감히 대법왕님을 우습게보지 않습니까."

"그런다고 아무 때나 검을 들이대면 어떡하느냐? 자 대협께 정중히 사죄해라.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그렇게 가르쳤거늘."

일목이 화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 미안하다. 하지만 너, 조심해."

자청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백쾌섬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대법왕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괜찮겠사옵니까?"

동천몽이 혼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시오. 백 형이 알고 싶은 건 뭐든지."

백쾌섬의 눈이 가늘어졌다.

눈은 가늘어졌지만 그 속에서 뿜어 나오는 빛은 칼날처럼 예리했다.

동천몽의 미세한 반응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뜻이다.

"혹시 고향이 절강성이 아니시옵니까?"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 것보다 미리 단정하듯 못을 박는 게 상대를 더욱 당황시킨다. 백쾌섬의 두 눈이 동천몽의 얼굴에 찰싹 달라붙었다. 먼지 끝만 한 변화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소주에서 제가 꼭 한 번 본 것 같아서 말이옵니다."

좀 더 핵심을 찔렀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정도면 충분한 반응을 보인다.

동천몽이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소주라고 하면 항주와 더불어 중원의 대표적인 꿈의 미도가 아니오?"

"그곳에서 대법왕님을 뵌 것 같습니다."

"정말이오? 허허! 묘하구려. 이 몸은 단 한 번도 소주를 가본 적이 없는데 정말 날 보았단 말이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동천몽은 환한 미소를 지었고, 백쾌섬의 눈이 빛났다. 아무리 뒤지고 살펴도 의심스러운 구석은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잘못 짚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백쾌섬은 세차게 내심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판단은 아직 단 한 번도 틀려본 적이 없고, 곁에서 지켜본 지난 한 달여의 조사는 완벽했다.

"천상각이라고 아시옵니까?"

곧바로 중심을 찌르고 들어갔다. 이 정도면 아무리 연기력이 뛰어나고 배포가 큰 사람일지라도 어떤 흔들림을 보인다. 그것은 지난 시절의 경험이었다.

"천… 천상각?"

"그렇습니다. 절강제일의 상가이자 근자에 이르러 중원 상권의 팔 할을 거머쥔 곳이옵니다. 대법왕님께서는 내가 아는 그 집의 막내아들과 너무도 닮았습니다."

순간 동천몽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백쾌섬이 말을 이었다.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는 포달랍궁 대법왕의 환생자로 지목되어 납치되었더군요."

동천몽이 눈을 크게 떴다.

"어, 환생자는 이 몸이며 내가 대법왕인데, 그게 정말이오?"

"사실입니다."

동천몽이 반듯하게 돌아섰다.

동천몽이 옷매무새를 다듬고 얼굴을 한 번 쓰다듬으며 눈을 부라렸다.

"다시 한 번 봐주시오. 앞전에 말씀하실 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는데 정말 내가 천상각의 막내아들 동천몽을 닮았단 말이오? 어떻소이까? 그 집 아들 노릇을 하면 충분히 속아 넘길 수 있겠소? 내 소원이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보는 거였는데 잘됐소이다. 얼른 좀 판단을 내려주시오."

갑자기 헷갈린다. 일부러 농담을 하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진정으로 부잣집 아들 노릇을 해보고 싶어하는 설렘이 얼굴에 들어차 있었다.

"음식 나왔사옵니다."

그때 객잔 주인이 탁자 위로 주문한 음식을 내려놓았다.

"자, 듭시다."

동천몽이 먼저 젓가락을 들었고, 뒤따라 모두가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쾌섬만은 여전히 음식을 먹고 있는 동천몽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춰 아무리 완벽한 변장을 하고 있어도 증거를 들이대면 백이면 백 두 손을 들었다. 그런데 동천몽에게서는 미세한 징후도 포착되지 않았다. 만약 진짜로 어떤 계산을 갖고 있다면 동천몽이야말로 강호에서 가장 무서운 인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또다시 머릿속을 채웠다.

그때 돌연 식사를 하던 실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동천몽이 식사하는 탁자 앞에서 일제히 엎드렸다.

"소인들을 죽여주소서. 대법왕님을 보고서도 알아보지 못했나이다."

"죽고 싶사옵니다."

동천몽이 엎드린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늦게라도 알아보고 예의를 차렸으니 됐다. 어서 식사들 하거라."

"대법왕님의 성은에 감사드리옵니다."

"불로장생하시옵소서."

일행이 큰절을 하고 물러났다.

자신들의 식탁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동천몽을 쳐다보았는데 하나같이 존경과 경외의 빛을 가득 담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탓인지 졸음이 밀려온다. 입이 찢어져라 연신 하품을 해대던 동천몽이 창밖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는 자정경을 보며 말했다.

"자 낭자, 한숨 붙여도 되겠소이까?"

자정경이 고개를 돌려 보며 미소 지었다.

"졸리시는가 보군요. 소녀 신경 쓰지 마시고 주무세요."

"그럼 잠시 눈 좀 붙여야겠소. 자 낭자도 졸리면 언제든지 주무시오."

동천몽이 등을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마자 곧바로 코를 골았다.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진 동천몽을 자정경의 두 눈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대법왕의 신위를 살리기 위해 금상의(金象衣)를 걸쳤고, 가슴에 혈자추(血子楸)로 된 염주를 걸었다. 허리를 가르는 요대는 황금빛으로 번쩍인다.

아무리 잘 봐주려고 해도 농부에게 갓을 씌워놓은 듯 이질적인 분위기가 절절 풍긴다. 자신을 의식하고 나름대로 위엄을 갖추려 노력하는 모습이 오히려 우스꽝스러울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언(言)과 행(行) 모두 품위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묘하게도 천박하다거나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벼워 보이는 안쪽 깊숙한 곳에 태산보다 진중하고 무거운 기세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느낌은 단지 대법왕이라는 선입견 때문만은 아니었다. 왕왕 숨이 막히곤 했다. 동천몽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기세가 가슴을 압박하기 때문인데 절대 과시하려는 의도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연 발생적인 호신강기와 같은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부친 앞에 서면 어떤 상인도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자정경이 한참 자고 있는 동천몽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을 때 돌연 엄청난 굉음이 천지를 갈랐다.

콰아아앙!

백상거는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 사이의 좁은 길을 가고 있었다. 밑으로는 수백 장의 수직 절벽이고 그 아래 검호(檢湖)의 푸른 물결이 넘실대고 있었는데 귓구멍이 먹먹할 만큼 폭음이 들리며 산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우르르릉!

콰가가강!

집채만 한 바위가 마차를 향해 떨어져 내렸고, 자욱한 먼지가 하늘을 뒤덮었다.

"으허헉!"

일목은 기겁했다. 산봉우리 하나가 통째로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말은 겁이 많은 동물이다. 위험이 닥치면 도망을 치기보다는 제자리에서 팔짝거린다. 때문에 거대한 폭발음에 앞다리를 쳐들고 어쩔 줄 몰라 했고, 순식간에 바위가 백상거를 덮어버렸다.

다행히 마차 밖에 있던 일목과 자청단, 백쾌섬은 신속히 몸을 날렸지만 안에 있는 동천몽과 자정경은 그대로 바위 속에 묻히고 말았다.

가파른 산인데다 급작스런 일이었기 때문에 일목을 비롯한 누구도 손을 써볼 틈이 없었다. 비록 백상거가 특수하게 제작되어 어지간한 충격에는 끄떡도 않는다고 하지만 집채만 한 바위에서 온전하기란 불가능했다.

쿠쿠쿠쿵!

콰아아아!

바위는 끝없이 쏟아져 백상거 위로 쌓였고 일부는 검호로 굴러 떨어지며 거대한 파도를 일으켰다.

"대법왕님!"

거대한 흙먼지가 가라앉고 흔적도 없이 바위 속으로 묻혀 버린 백상거를 보며 일목이 소리쳐 말했다.

일목이 거대한 바위 무덤으로 몸을 날려 살폈지만 깊이 묻힌 뒤라 보일 리가 없었다.

와그르르!

퍼퍼퍽!

일목은 미친 듯이 바위를 검으로 쪼개며 치웠다. 하지만 엄청난 크기와 양의 바위를 치워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너무 급작스런 사태에 자청단은 물론 백쾌섬까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두 사람 모두 자정경을 부르며 뛰어들었다.

"저… 정경아!"

"자 낭자!"

장풍과 검으로 마구 바위들을 깨뜨리고 치웠다. 그러나 워낙 크고 많은 양의 바위였기 때문에 티도 나지 않았다.

"저… 정경아! 정경아!"

"낭자, 내 소리가 들리면 대답해 보시오!"

두 사람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소리쳐 불렀지만 반응은 없었다. 일목을 비롯해 세 사람 모두 넋을 잃은 얼굴이었고, 급기야 우두커니 서서 산봉우리가 되어 있는 바위를 쳐다보았다.

와락!

"네놈 주인이 우리 정경이를 끌어들이지만 않았어도 죽지는 않았다! 이놈!"

자청단이 일목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모든 건 대법왕인지 뭔지 하는 인간 때문이다! 책임져라, 이놈!"

파아아!

일목의 눈에서 백색의 섬광이 쏟아졌다.

가뜩이나 분노가 솟구쳐 있는데 자청단이 동천몽을 비하하자 참지 않았다.

"네… 네놈이 모가지가 서너 개는 되는가 보구나!"

"그만두시오."

일목이 검의 손잡이에 오른손을 얹자 백쾌섬이 말렸다.

"이런다고 해결이 되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하오. 이건 인위적인 폭발이오. 화산이 폭발한 게 아니란 말이오."

백쾌섬의 말이 끝나자 일목의 눈이 주위를 훑었다. 아닌 게 아니라, 화산이 폭발했다면 뜨거운 용암이 흘러야 하는데 전혀 그런 징후는 없었다.

"어느 놈이 감히!"

일목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분노가 극에 이른 것이다.

"흐흐흐흐!"

그때 주위를 울리는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이 모두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자 좌측 산봉우리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님, 저놈들이 무척 당황하고 있는 것을 보니 그 아이가 제대로 묻히긴 묻힌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네, 아우. 서장 말에 이르기를, 돌무덤에 묻히는 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하다고 했는데 그놈이야말로 무척 행운아로군."

화악!

산봉우리를 쳐다보던 백쾌섬의 눈이 커졌다.

"저… 저들은?"

산봉우리의 인물들을 백쾌섬은 알아본 듯하자 일목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공을 실은 목소리였기 때문에 똑똑히 들렸을 뿐, 사실 산봉우리까지의 거리는 무척이나 멀었다. 안력을 돋우어도 사람의 형태만 겨우 보였다.

자신이 듣기에 백쾌섬은 현상금 추적자라고 했다. 강호에는 백쾌섬과 같은 부류는 적지 않다. 그중 백쾌섬은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라고 했다. 아무리 그가 가장 뛰어난 추적자라고 하지만 자신의 육안으로 분간키 어려운 사람의 모습과 얼굴까지를 확인할 정도라면 충격적인 일이었다.

"아는 사람들이오?"

자청단이 물었다.

백쾌섬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들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니……."

"누구요?

"자세히 봐야 알겠지만 언뜻 행색과 생김새를 보아 뢰음칠혈(雷音七血) 같소이다."

일목은 그들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다만 백쾌섬을 말을 짐작해 보건대 전대의 인물들임이 추정 가능했다.

칠십 년 전 서장무림 사상 최악의 전쟁이 있었다.

뢰음사와 포달랍궁의 전쟁이 그것이었다. 그동안 두 문파는 끝없는 경쟁을 벌였고, 물밑으로는 치열한 암습과 소규모 충돌을 일으켰다. 하지만 포달랍궁의 굳건한 지위에 도전하기에 뢰음사의 힘은 부족했다.

그런데 어느 날 뢰음사가 칼을 뽑아 들었다. 뢰음사가 일어선 데에는 일곱 명의 자파 기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고 자 항렬의 승려들이자 같은 핏줄인 칠 인.

고통(古痛).

고철(古鐵).

고도(古都).

고만(古慢).

고진(古進).

고태(古態).

고자(古瓷).

그들은 광풍이었다. 불과 서른 전후의 나이에 이미 뢰음사의 모든 절학을 섭렵했을 뿐만 아니라 사상 최초로 삼십대에 장로의 위에 오른 놀라운 인물들이었다.

그들을 앞세운 뢰음사의 공격은 폭풍이었다.

기습인데다 워낙 거세었기 때문에 삽시간에 포달랍궁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시산혈해를 만들었다. 급기야 그들은 포달랍궁 제일고수 중 한 사람인 당시의 십이법신을 쓰러뜨렸다.

더 이상 그들의 상대는 없는 듯했다. 그때 포달랍궁의 대법왕은 폐관 수련 중이었는데 뢰음사 또한 그 틈을 노리고 침입한 것이다.

포달랍궁은 창건 이후 최대의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에 폐관 중이던 대법왕이 모습을 드러내었고, 기세등등하던 뢰음사의 고수들은 속절없이 쓰러졌다. 그리고 마침내 뢰음칠혈과 대법왕의 건곤일척 싸움이 벌어졌다.

여덟 사람의 움직임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일수 일검이 뻗을 때마다 산봉우리가 하나씩 사라졌다. 무려 십 주야의 격전 끝에 마침내 싸움은 대법왕의 승리로 끝났고, 뢰음사는 자파의 신물이자 생명이랄 수 있는 뢰음장(雷音杖)을 바치고 물러났다. 신물을 바쳤다는 것은 철저한 승복이자 신문(臣門)의 관계로 들어가겠다는 완전한 백기 투항이었다.

그런데 뢰음칠혈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뢰음사가 다시 일어섰다고 봐야 했다.

"그럼 저들의 나이는 지금 몇이라는 거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모르긴 해도 백 살 이상은 되었을 게요."

"배… 백 살?"

일목의 눈이 커졌다.

우우!

일곱 사람이 날아왔다. 허공에 계단이라도 설치된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밟고 오는데, 실로 그 모습이란 자못 당당하다 못해 웅장하기까지 했다.

능공허도다. 능공허도는 느릴수록 경지가 높다. 세 사람의 능공허도는 보통 사람이 걷듯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고, 더구나 일곱 명이 도란도란 얘기까지 나누며 온다.

자청단의 눈이 부릅떠졌다. 비록 상인이지만 능공허도란 신법이 있고 그것은 아무나 펼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들었다. 거의 선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시전한다는 그 꿈의 신법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자 입이 저절로 벌어지고 눈은 찢어질 듯 커졌다.

일목 또한 안색을 굳혔고 오로지 백쾌섬만이 담담한 시선으로 다가오는 뢰음칠혈을 쳐다보았다.

처처척!

일곱 사람이 땅에 내려서더니 백상거를 덮은 거대한 돌무덤을 쳐다보았다.

"허헛! 생각보다 뇌정탄의 위력이 크군요, 형님."

백쾌섬의 눈이 커졌다. 뇌정탄은 가공할 위력의 폭탄이었기 때문이다. 워낙 파괴적이어서 주먹만 한 크기 한 개만 폭발해도 어지간한 산봉우리는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다.

"허엇!"

누군가 놀람의 소릴 내질렀다.

"형님들, 저놈 좀 보세요! 크크크! 눈이 한 개뿐입니다!"

키가 가장 작고 막내인 고자가 일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나머지 여섯 사람이 고개를 돌렸는데, 모두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잠시 후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히히! 그놈, 묘하게도 생겼다."

"하나인 대신에 무척 크구나. 암, 그래야지."

"살다 살다 눈이 한 개뿐인 놈은 첨 본다. 야, 이놈아, 잘 보이느냐?"

신기한 물건을 구경하듯 일곱 사람은 침까지 삼켜가며 구경했다.

"크흐! 볼수록 멋지구나. 야, 우리 눈 바꿀래?"

일곱 사람의 조롱과 비아냥거림에도 일목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동천몽을 죽인 원수라는 사실만 머릿속을 채우며 오른손으로 검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화아아!

돌연 일목의 몸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안개처럼 얇아지며 너울거린다.

일곱 사람이 놀란다.

"어쭈구리! 완전히 아지랑이 같은 놈 아닌가? 가만, 네놈 혹시 배교의 조무래기 아니냐?"

일목의 몸이 뿌연 안개로 변했다.

슈우우!

흐릿한 안개가 긴 꼬리를 남기며 일곱 사람을 향해 덮쳐 갔다.

"그놈, 보통이 아닐세그려."

"성질 한번 더럽게 급한 놈이군."

콰앙!

맨 막내 고자가 앞으로 나서며 일목의 검을 맞받아쳤다.

거대한 굉음이 터지며 두 사람이 동시에 뒤로 주춤거리며 밀려났다.

확!

고자뿐만 아니라 모두의 눈이 커졌다.

지금 일목과 고자가 일 초를 주고받았는데 누구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일곱 사람이 놀란 것은 일목의 무예였다. 자신들의 막내와 동수를 이루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이… 이 자식, 세잖아."

모두가 놀란 눈을 했고, 고자는 얼굴이 우그러졌다. 형님들이 보고 있는데 창피를 당한 것이다.

"너, 오늘 죽었다고 복창해라. 흐흐! 요 외눈박이 새끼가 건방지게 감히 내 공격을 막아?"

콰아아!

고자의 신형이 바람처럼 날아갔다.

흐릿한 사람 형체의 안개가 마주 날아갔다.

퍼퍽!

검과 장이 또다시 중간에서 부딪치고 둘 모두 튕겨 나오듯 뒤로 밀려났다.

추울렁!

일목의 모습이 조금 더 사람에 가까워졌다. 그건 강한 타격을 입어 기혈이 울렁거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쿠콰콰콰!

연속된 공격에도 일목을 쓰러뜨리지 못했다는 것에 고자는 완전히 흥분했다. 곧바로 다시 달려들었고, 우수에서 돌덩이 같은 장력이 뻗어나갔다.

백쾌섬의 눈이 커졌다.

강호에 출도하여 처음 장강(掌)을 보는 것이었다. 장경까지는 봤지만 장강은 처음이다. 약간씩 흔들림이 있는 것이 초보 단계인 것 같았지만 틀림없는 강이었다.

쉭!

일목의 검이 요란하게 뻗어갔다.

대낮인데도 주위를 환하게 밝힐 만큼 강렬한 섬광으로 보아 온 힘이 실린 필살초임이 분명했다.

까각!

또다시 충돌이 있고 섬뜩한 소리가 들리더니 일목의 몸이 뒤로 밀려 나왔다. 안개가 걷히고 완전히 사람 형태를 되찾은 일목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반면 고자는 창백한 안색으로 비틀거렸다.

"이 새끼가 아직도 서 있잖아!"

고자가 다시 달려들었다. 기필코 작살을 내겠다는 의지였고, 새파란 어린 후배에게 쩔쩔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형님들 앞에 너무 초라해 보였다.

쐐애애!

일목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처음과는 완전히 달라진 기세이다.

퍼억!

갑자기 일목의 우측에서 강력한 장력이 뻗어나가 고자의 공세를 가로막았다.

"욱!"

"음!"

두 사람의 입에서 모두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일목 곁에는 백쾌섬이 서 있었고, 그를 본 고자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넌 누구냐? 이름이 뭐냐?"

다른 형제들 또한 백쾌섬을 예리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백쾌섬이 정중히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소생의 안목이 틀리지 않다면 혹시 일곱 분 노선배님께서는 뢰음칠혈이 아니신지요."

일곱 사람이 흠칫했다.

"네놈이 어찌 우릴 아느냐? 네놈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노부들은 강호를 떠났는데."

백쾌섬이 환하게 웃었다.

"영웅은 동시대를 살지 않아도 기억을 하며 알아보지요. 인사 올리겠습니다. 소생은 현상금 추적자 백쾌섬이라 하옵니다."

고자를 비롯한 뢰음칠혈의 눈이 가늘어졌다. 백쾌섬의 신체를 수색하듯 훑더니 눈빛이 여러 차례 변했다.

'이놈 봐라?'

표정들이 굳어졌다. 백쾌섬에서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기세를 읽어낸 듯했다. 그들의 심정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백쾌섬이 야릇하게 웃었다.

"역지사지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주인이 죽었으니 주인을 죽인 사람에게 검을 겨눈 것은 하인으로서 당연한 것 아닌지요."

일목을 용서해 달라는 얘기였다.

"닥쳐라!"

일목이 백쾌섬을 노려보았다.

"이건 나와 저 늙은이들 간의 일이다. 넌 끼어들지 마라. 아무리 대법왕님의 손님이라고 해도 한 번만 더 끼어들면 참지 않겠다."

콱!

일목이 검을 더욱 힘껏 쥐며 말했다.

"일곱 늙은이 모두 덤벼라! 오늘 내 손으로 너희를 죽여주겠다!"

일목의 몸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핏빛은 더욱 짙어지더니 급기야 혈인으로 변해 버린 일목을 보며 뢰음칠혈의 맏이인 고통이 외쳐 말했다.

"혈파신공(血波神功)이구나!"

혈파신공은 배교 최후의 무공이었다. 하지만 워낙 어렵고 자신의 자질이 부족해 오성 수준밖에 이르지 못했지만 일목은 과감히 시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채 완성되지 않은 혈파신공을 무리하게 펼치면 자칫 큰 화를 입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번엔 내가 상대해 주겠다. 어디 혈파신공을 한번 견식해 봐야겠다."

팔 척 거구의 고태가 나섰다. 큰 덩치가 산악을 방불케 했는데 두 눈에서 횃불 같은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휘리리리!

일목의 몸에서 가공할 핏빛 회오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건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스치기만 해도 찢겨 나가는 가공할 톱니바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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