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15화 (15/71)

제6장 정검세구로천동지홍대명상

신분패를 요구하는 두 사람의 말에 천장금왕을 비롯한 사대법왕은 군소리하지 않고 보여주었다. 그리고 자정경과 자청단의 신원에 대해서도 설명하자 통과하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하지만 일행은 백궁 안에서 또 한 번 검문을 당해야 했다.

척!

일목이 앞을 가로막았다.

사대법왕을 보고서도 예 따위는 차리지도 않았고 오히려 하나뿐인 일목의 눈을 보며 자정경과 자청단은 자지러질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 세상에!'

'도… 독목(獨目)의 인간이 있다니!'

일목의 주먹만 한 눈에서 차가운 한기가 쏟아져 나왔는데 오싹했다.

"대법왕님 계시느냐?"

"우선 신분패부터 보여주시오."

이미 일목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천하 없어도 신분패를 보여주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어쩌면 대법왕까지도 신분패를 보여주어야 인정받을지도 모른다는 우스갯소리가 궁내에 나돌 만큼 대법위로서 일목의 근무는 철저하다 못해 우직했다.

네 사람은 아무 말 않고 패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사대법왕은 통과를 시켰는데 일목이 자청단과 자정경을 가로막고 나섰다.

"두 분 시주께서 혹시 병기나 그 이외에 위험한 물건을 갖고 계시면 당장 꺼내놓으시오."

멈칫!

두 사람은 검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미 빈각에 놓고 나왔다. 병기 정도는 풀고 대법왕을 만나는 것이 예의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이미 풀어놓고 왔어요."

"그 말을 나더러 믿으란 말이오?"

흠칫!

자정경이 놀랐고, 지켜보던 사대법왕도 눈을 크게 떴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이… 이보게, 일목 대법위."

"말씀하소서, 금왕님."

일목이 천장금왕을 향해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천장금왕이 말했다.

"두 분의 신분은 본 금왕이 보장함세. 그러니 그냥 통과시켜 주는 것이 어떤가?"

"안 됩니다. 만약 뒤져서 쇳조각 하나라도 나오면 그땐 가만 안 둘 것이오."

"소… 소녀의 몸을 뒤지겠다는 말인가요?"

자정경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목은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몸을 조사할 테니 양손을 벌리시오."

"이보게, 일목. 자네, 미쳤나?"

천검은왕이 나서자 인상을 험악하게 만들어 말했다.

"우리가 이분들의 신원을 보장한다고 말했잖은가? 당장 그만두지 못하겠나?"

"전 지금 대법위로서의 임무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저의 행동을 제약하거나 가로막을 권한은 없습니다. 이건 저에게 주어진 고유 책무이자 엄격한 의무입니다."

사대법왕의 눈이 커졌다.

일목의 입에서 너무나 어려운 말이 유창하게 나왔기 때문이다.

자정경의 표정이 여러 번 변했다. 하지만 일목에게 결코 악의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망설이지 않았다.

"좋아요. 맘대로 하세요."

그러면서 자정경이 양팔을 벌렸다.

일목이 뒤지려 하자 자청단이 소리쳤다.

"이보시오! 당신 지금……!"

"그만두세요. 오라버니는 절대 내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자정경이 쐐기를 박듯 말하자 일목이 겨드랑이부터 더듬거리며 내려갔다.

"다리도 벌리시오."

자정경이 다리를 벌렸다.

일목은 거침없이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넣어 발목까지 더듬어갔다.

띠요용!

사대법왕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특히 일목의 손이 자정경의 허벅지 안쪽을 더듬거릴 때는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다음 당신."

자정경을 검사한 일목이 이번에는 자청단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 사람……."

'이 사람이 지금 미쳤나' 하고 말하려던 자청단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일목의 하나뿐인 눈에서 백색의 광채가 쏟아져 나왔는데 너무나 소름 끼쳤다.

"아… 알았소."

자청단이 양다리와 팔을 벌리자 일목은 자정경에게 했던 것처럼 몸을 수색했다.

"당신도 통과!"

일목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아미타불!"

천장금왕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일목의 행동은 누구도 말릴 수 없다.

자청단이 일목을 한 번 쏘아본 후 뒤를 따라 들어갔다.

백궁의 문이 열리고 일행은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백궁은 조용했다. 천장에서 으스름한 붉은 야명주가 대낮인데도 아름다운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백궁은 동천몽이 정사를 보는 곳이다.

그러나 아무리 휘둘러 봐도 동천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보거라, 일목, 대법왕님은 어디 계시느냐?"

문이 열리고 일목이 들어섰다.

"모릅니다. 확실한 건 절대 밖으로 나가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대법왕이 백궁 곳곳으로 동천몽을 찾기 위해 흩어졌다. 천장금왕은 서재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서재는 가장 안쪽에 있었는데 정사를 보는 대전과 한 개의 문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삐이걱!

천장금왕이 문을 열고 서재로 들어서다 말고 깜짝 놀랐다.

동천몽이 책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악!

천장금왕의 눈이 부릅떠졌다. 너무 충격을 받은 듯 천장금왕은 한동안 꼼짝을 하지 않았다. 사실 서재에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온 것은 아니었다. 그냥 찾기 위해 흩어지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서재 쪽으로 걸음이 옮겨진 것이다.

동천몽은 자신이 오는지도 모르게 독서에 푹 빠져 있었다. 듣기로는 책이라고 하면 기겁을 하며 머리가 나빠 심법 구결 한 줄 외우는 데도 몇 달씩 걸렸다고 했다. 가장 싫어하는 것이 책 보는 것이며, 그래서 절대 책을 강요하지 말라고 천검은왕이 주의를 주었다. 그런 동천몽이 눈앞에서 근엄한 얼굴로 책을 보고 있다.

"허험!"

헛기침으로 동천몽의 이목을 일깨웠다.

하지만 동천몽으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반짝이는 시선은 여전히 책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미타불! 허허험!"

좀 더 소리를 높였는데도 여전히 동천몽은 돌아보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책에 심취하셨으면!'

자신도 책을 좋아한다. 그래서 한번 독서에 빠지면 누가 와도 잘 모른다. 그런데 동천몽은 옆에서 소리를 내는데도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

"대법왕님께서 안 계시옵니다."

"외출하셨는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군요."

뒤쪽으로부터 사제들이 중얼거리며 다가왔다. 그러다 천장금왕의 어깨너머로 동천몽을 발견하고는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놀라자 대전 입구에 서 있던 자정경과 자청단까지 다가와 동천몽을 바라보았다.

흠칫!

자정경의 눈이 커졌다.

새로 환생한 대법왕에 대해 나름대로 상상을 해봤다. 그녀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상은 산문을 들어서자마자 만난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천왕이었다. 무공을 익히고 서장을 다스리자면 인상부터가 덩치도 크고 생김새도 무시무시해야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 두 눈으로 보는 동천몽은 절세의 미공자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얼마나 독서에 빠져 있으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가와 떠드는데도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대법왕님."

천장금왕이 내공을 실어 동천몽을 불렀다.

그제야 동천몽이 고개를 돌렸다.

"금왕 아니냐? 네가 여긴 웬일이냐?"

그러면서 '으와' 하며 양손을 쳐들어 기지개를 켰다.

이윽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피곤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아미타불! 아후, 눈이야."

양 손가락으로 눈 안쪽을 지그시 누르며 오랫동안 책을 봤다는 것을 강조했다.

탁!

동천몽이 책을 덮었다.

그때 책 표지를 읽은 천장금왕이 기겁하며 놀랐다.

정검세구로천동지홍대명상(亭劍洗쯝勞天洞地紅大明狀).

책 제목이 무척 길었다. 하지만 천장금왕이 경악한 건 긴 제목 때문이 아니었다. 정검세구로천동지홍대명상이라는 책 때문이었다. 천문지리의 총서라고 할 수 있으며 어지간한 학문의 깊이로는 한 줄도 이해할 수 없는 무척이나 어려운 책이었다.

놀란 사람은 천장금왕뿐만이 아니었다.

자정경의 두 눈 또한 휘둥그레졌다. 자신도 동천몽이 읽고 있는 책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어려워 도중에 그만두고 말았는데 동천몽은 그 책을 거의 절반 넘게 읽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무슨 일이냐? 어! 못 보던 분들이 있구나?"

동천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정경을 바라보는 동천몽의 표정이 더욱 엄숙해졌다.

동천몽이 밖으로 나오자 모두 한쪽으로 비켜섰다. 동천몽이 헛기침을 하고 태사의에 앉았다.

천장금왕이 두 사람의 신분에 대해서 설명했다. 동천몽은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의 두 눈은 시종 자정경에게 멎어 있었다.

"그래, 날 만나려 한 용건을 말해보시오."

자청단이 우두커니 서 있는 자정경에게 눈치를 주었다. 네가 말하라는 뜻이었다.

자정경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먼저 늦었지만 대법왕님이 되신 것을 축하드려요."

동천몽이 자상한 미소를 가득 담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자정경이라 해요."

"자정경? 무척 좋은 이름이군. 그래, 계속 말해보시오."

"소녀의 아버님은 자추동이라 불립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어요. 대법왕님께 본 가를 도와달라고 부탁을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도와달라?"

"소녀가 알고 있기에는 포달랍궁의 대법왕님께서는 백성이 어려운 일에 처하면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물론이지요. 백성이 어려움에 처했는데 어떻게 대법왕으로서 모른 체할 수 있단 말인가? 어려움이 무엇인지 남기지 말고 털어놓아 보시오."

"본 가 흑수당은 지금 생사의 위기에 처해 있어요."

자정경의 얘기를 요약하면 이러했다.

보름 전 한 통의 괴서찰이 흑수당으로 날아들었다. 서찰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흑수당의 모든 재산과 상권을 자신들에게 넘기라는 내용이었다. 말도 되지 않고 너무도 어이없는 요구였기 때문에 흑수당의 당주인 자추동은 콧방귀를 뀌었다. 장사로 잔뼈가 굵어온 자추동은 그따위 협박 서찰에 굴복할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은 물론 선조들은 그보다 훨씬 더 험난한 위기에서도 흑수당을 지켜왔고 서장의 상권을 삼백 년 동안 장악해 왔다.

그런데 그 다음날 멀리 회회국으로 원행을 떠난 상단 오십 오 명이 모조리 몰살을 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흑수당 사상 최악의 사건이었고, 인명 피해였다. 그래도 자추동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그런데 열흘 전 또다시 원행을 나간 상단 쉰일곱 명이 몰살을 당했다. 타고 가던 말까지 모조리 도륙한 끔찍한 사건이었다. 그제야 자추동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무사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떠돌이 무사들에서부터 인근에서 활동하는 자객들까지 달라는 대로 돈을 줘가며 가문과 상단 호위대로 쓰기 위해 모집한 것이다.

하지만 사흘 전, 힘들게 모은 일백이십 명의 무사가 하룻밤 사이에 모조리 처소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자추동이 더욱 놀란 것은 일백이십 명의 목숨이 사라지는데도 자신은 전혀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만!"

동천몽이 자정경의 말을 잘랐다.

"도대체 그럼 보름 사이에 몇 명이 죽은 거야? 처음에 쉰다섯 명이 죽었고, 그다음에 쉰일곱 명이 도살당했고, 긁어모은 무사 일백이십 명이 죽었으니……."

동천몽이 눈을 깜빡거렸다.

입술이 달싹거리는 것이 한참 계산을 하는 중이 분명했다.

"이… 칠에 십사, 삼칠… 에 이십일, 그러니까… 한마디로……."

"모두 삼백삼십이 명이에요."

자정경이 말하자 동천몽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 딱 삼백삼십이 명이로군. 정확해!"

천검은왕의 얘기를 듣건대, 부친과 이복 형들 밑에서 살아남기 위해 망나니가 되었고, 천장금왕의 반란을 단번에 짚어내는 머리는 가히 살인적이라 할 만큼 빨랐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간단한 셈을 못해 쩔쩔맨다.

'그렇다면 조금 전까지 했던 독서는?'

문득 천장금왕의 눈이 빛났다.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천장금왕의 위(位)에 오르기 전 천검은왕을 통해 동천몽에 관한 모든 정보를 얻어 들었다. 천검은왕은 혹시라도 생길지 모르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습관에서부터 말투, 성격은 물론 취미 생활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가르쳐 주었다. 그중 천검은왕이 가장 강조했던 두 가지 중 하나는 머리가 상상을 벗어날 만큼 나쁘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책을 가장 싫어한다는 얘기였다.

낮잠을 잘지언정 책은 가까이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조금 전 자신이 찾아와도 모를 만큼 독서에 빠져 있었다.

'뭔가?'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책도 어지간한 학문의 깊이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정검세구로천동지홍대명상을 읽고 있었다.

팟!

돌연 천장금왕의 두 눈에서 이채가 떠올랐다.

백궁에는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한 개는 손님을 접대하거나 대법왕의 위엄을 나타내는, 지금 앉아 있는 백상의(白象椅)이고, 다른 한 개의 의자는 앉아서 정무를 보는 의자다. 그런데 지금 정무를 보는 의자가 반쯤 뒤로 젖혀져 있었다. 똑바로 앉아 조금 전까지 정무를 보고 있었다면 의자 등이 꼿꼿하게 세워져 있어야 정상이다. 그것은 누가 봐도 책상 위에 발을 올리고 의자를 뒤로 젖힌 채 잠을 잤다는 표시이다.

천장금왕은 결론을 내렸다. 정무를 보는 의자를 뒤로 젖히고 자다가 밖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잽싸게 서재로 들어가 책을 보고 있는 척한 것이다. 천장금왕은 엄숙한 표정으로 자정경의 설명을 듣고 있는 동천몽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전 대법왕을 닮았다는 말은 들었고, 자신 또한 몇 가지 행동에서 흡사한 점을 찾아냈다. 하지만 타인 앞에서 책 보는 척하는 것까지 닮았을 줄이야.

"그러니까 자 낭자의 말은 본 궁이 위기에 처한 흑수당을 도와달라는 것이오?"

"네, 그래요. 자비가 충만하신 대법왕님께서 소녀의 청을 결코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요."

자정경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동천몽이 부르르 떤다. 뇌쇄적인 미소라고 해도 좋았다. 단순한 미소일 뿐인데 가슴이 울렁거리고 뒷골이 확 당긴다. 소주에서 수많은 기녀를 품어봤지만 단언컨대 자정경 같은 완숙미를 지니고 있는 여인은 보지 못했다.

"아미타불!"

반쯤 넋이 나가 있는 동천몽의 정신을 깨우기 위해 천장금왕이 힘주어 불호를 외웠다.

"허험!"

동천몽이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당연히 백성이 어려움에 처했으면 손을 뻗어주는 것이 본왕의 일이 아니겠소? 염려 마시오. 곧바로 손을 쓰겠소."

"대… 대법왕이시여."

"서… 성급한 결정이옵니다. 그런 문제는 십이법신 회의를 소집하여……."

천검은왕과 천권동왕이 제동을 걸었다. 천검은왕이 동천몽을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는 건 당연한 일이옵니다만 흑수당을 위협하는 적의 정체도 현재로서는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피를 부를 전쟁이 상존할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어찌 이렇게 간단히 결정하시옵니까?"

동천몽이 이마를 찡그렸다.

"그래, 듣고 보니 조금은 신중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 그럼 당장 십이법신 회의를 소집해. 그리고 자 낭자는 잠시 빈객당에서 십이법신 회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시겠소?"

"물론이에요. 얼마든지 기다릴 용의가 있어요. 오라버니, 가요."

자정경이 다시 한 번 동천몽을 향해 방긋 웃었다.

'후우웁!'

동천몽이 속으로 숨을 삼켰다.

현기증이 일어날 것 같다.

'아미타불!'

걸어가는 자정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동천몽이 마른침을 삼켰다. 경장 차림이었지만 몸에 달라붙어 완연한 굴곡이 드러났기에 동천몽은 눈을 떼지 못했다.

동천몽까지 포함하여 모두 열여덟 명이 모였다. 열두 명의 장로와 사대법왕, 이미 선사가 장방형의 탁자를 놓고 마주 않았다. 이들은 실질적으로 포달랍궁을 이끌어가는 각 기관의 수뇌들이었다.

회의가 시작된 지 반 시진가량 지났지만 격론만 이어지고 있을 뿐 여전히 결론은 내려지지 않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동천몽과 이미선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흑수당의 지원을 반대하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하면 소승을 속 좁은 위인이라고 혀를 찰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해야겠습니다."

천검은왕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동천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모두 털어놔. 눈치 볼 것 없느니라."

"흑수당이 어딥니까? 서장에서 돈이 제일 많은 집단입니다. 한마디로 돈이 넘쳐 나다 못해 그곳에서 키우는 개새끼도 금화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돌 만큼 떼부자지요. 그런데……."

천검은왕이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까지 단 한 푼의 시주도 본 궁에 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백성들을 위해서도 단 한 푼의 자선도 행하지 않은, 말 그대로 부도덕한 상가이옵니다. 아무리 대법왕의 지배를 받는 백성이라지만 그런 악덕 상가까지 보호해 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은왕의 말은 우리가 어려울 때 단 한 푼의 돈도 보태주지 않았으니 우리도 모른 체하자는 거군."

"모른 체하자는 것이라기보다는 오는 것이 있어야 가는 것이 있다는……."

"그게 그거 아냐?"

천검은왕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말했다.

"까놓고 말하면 그렇습니다. 꼴 보기 싫어서라도 도와주기 싫사옵니다."

"또 좋은 의견들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얘기해."

"소승 율천도 천검 사형의 말에 동감하옵니다."

앉아 있는데도 서 있는 듯 키가 큰 노승이 입을 열었다. 그는 열두 장로 중 한 명인 율천으로 올해 여든다섯이다. 포달랍궁의 승려 중 비도술에 가장 능하다.

"자비를 근간으로 하는 본 궁이지만 흑수당은 그동안 해도 너무했습니다. 대법왕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속된 표현을 빌리면 더러운 집구석이라고 할 수 있지요."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도대체 얼마나 더럽기에?"

율천의 눈이 싸늘해졌다.

"그들의 더러움을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사옵니다. 자신들이 열심히 노력하여 부를 축적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이 힘없는 중소 상가들을 인수하거나 병합하여 오늘날의 위치에 올랐지요."

"도덕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거군."

"자비는 상대를 가리지 않아야 함을 소승 또한 알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질이 나쁜 자는 어느 정도 제재를 가하는 것 또한 대법왕님의 의무 중 하나라고 봅니다."

"또 다른 의견 있으면 말해봐."

"소승도 반댑니다. 흑수당의 당주 자추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자는 돈벌레입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매점매석을 하여 가격이 오르면 그때 내다 팔아 엄청난 이득을 취하지요."

긴 수염을 가슴 앞까지 늘어뜨린 노승이 핏대를 올렸다. 역시 열두 장로 중 한 사람인 탄천 선사이다. 그의 건곤미허타는 포달랍궁 제일로 알려진다.

"수많은 중소 상인들의 가슴에 못을 박은 위인이옵니다. 그뿐 아니라 막대한 자금으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을 포섭하여 항간에서는 금전법왕이라는 말이 돌고 있지요."

"그… 금전법왕이라면, 한마디로 돈왕이라는 뜻 아니냐?"

"그렇지요. 그러니까 소승이 화를 내는 것이옵니다."

"좋아, 계속 얘기들 해. 여긴 토론회장이니라. 내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말하라."

"소승도 반댑니다."

"소승도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흑수당이 망하든지 말든지 눈 딱 감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싶습니다."

끝없는 반대 의견에 동천몽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일다경쯤 지나자 장내는 조용해졌다. 모두가 하고 싶은 애기를 모두 쏟아내었다. 그들의 얼굴은 굳어진 채 흑수당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타오르고 있었다.

동천몽이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겨 있자 모두가 그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다.

번쩍!

순간 감겨 있던 동천몽의 두 눈이 뜨였다.

"결론을 내리겠다. 흑수당을 돕는다."

"네엣?"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도……?"

"마… 말도 안 돼."

스윽!

동천몽이 조용히 하라는 듯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장내는 조용해졌고, 동천몽이 입을 열었다.

"부처께서는 말씀하셨다. 마음에 절대 미움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형형한 안광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고승들을 보며 말했다.

"옛말에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말도 있고."

"그래서 돕겠단 말입니까?"

가장 다혈질인 천검은왕이 따지듯 물었다.

"나의 백성이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는데 어떻게 모른 체할 수 있단 말이냐? 일목."

스르르!

안개 한 무리가 나타나더니 일목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씀하소서, 대법왕님."

"당장 흑수당으로 떠날 채비를 갖추어라."

"명을 받습니다."

일목이 다시 연기가 되어 사라지자 가벼운 소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누구도 대놓고 동천몽에게 따지지 못했다. 그것은 동천몽의 성질을 잘 아는 까닭이었다.

빈객당으로 다시 돌아온 지 두 시진이 넘었는데도 감감무소식이자 자청단은 마음 한구석에 조금씩 불안감이 싹텄다. 부친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포달랍궁의 도움을 얻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팻감으로 한 가지를 귀띔해 주었다. 포달랍궁이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거든 일 년에 황금 십만 냥씩 향후 십 년 동안 백만 냥을 내겠다고 말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선 약속의 증표로 십만 냥짜리 전표를 한 장을 주었다.

물론 부친과의 일은 자신만 알 뿐, 자정경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자청단은 절대 십만 냥의 팻감을 쓰기 싫었다. 말이 황금 십만 냥이지, 상상을 초월하는 거금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중놈들에게 황금 십만 냥을, 그것도 향후 십 년 동안 무려 백만 냥을 던져 준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다행히도 동천몽이 자정경의 미모에 현혹되어 도와줄 기미를 보이고 있는 것이 고무적이었지만 아직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원래는 자신과 총관이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부친이 가로막고 나섰다. 총관 대신 아무것도 모르는 자정경을 딸려 보낸 것이다. 일을 망치려 드느냐고 따졌는데 부친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튀어나왔다.

사실 아직까지 자정경의 미모에 현혹되지 않은 사내를 보지 못했다. 고관대작의 자제들은 물론 내로라하는 명숙들도 자정경을 탐냈고, 한번 그녀를 본 사내들은 거의 상사병에 걸릴 만큼 빠져 헤어 나오지를 못했다.

부친은 사방에서 들어온 청혼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장사꾼답게 자정경의 미모를 이용해 뭔가 획기적인 이윤을 남기겠다는 계산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번 길 또한 자정경을 대동하면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계산을 했다. 아무리 대법왕이지만 피 끓는 청춘이니 자정경에게 빠지지 않을 리 없다고 자신한 것이다.

그런데 부친의 계산이 거의 적중하고 있었다.

"너무 초조해하지 마세요. 아마 도와준다고 할 거예요."

긴장의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자청단을 보며 자정경이 위로했다.

동생이지만 착하다. 하지만 여인으로서는 장점일지 모르지만 장사꾼의 핏줄로서 선함은 그다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부친은 어려서부터 여러 가지 상술을 가르쳤지만 그녀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장사보다는 무림의 일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제법 이름깨나 있는 사람을 찾아가 적지 않은 금전을 지불하고 무예를 배웠다. 자신이 알기에 자정경은 이미 세 명의 스승을 두었다. 물론 덕격 인근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사람들이지만 그런 관계로 무공만큼은 자정경이 자신의 솜씨를 능가한다.

그때 들려온 발자국 소리에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듯 방문을 쳐다보았다.

벌컹!

문이 거칠게 열리고 일목이 들어섰다.

흠칫!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듯 놀랐다. 아무리 봐도 일목의 몰골은 소름이 끼치기에 충분했다.

"대법왕님께서 흑수당에 자비를 내리셨소. 당장 백궁 앞으로 오라는 분부이시오."

자청단이 다그치듯 물었다.

"본 가를 도와준다는 말씀이오?"

"자비를 베풀었다고 하지 않았소."

일목이 몸을 돌려 걸어가자 자청단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걸렸다. 마침내 자신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뤄진 것이다.

탁!

앞가슴을 만졌다. 가슴속에는 언제든지 금화로 바꿀 수 있는 십만 냥짜리 전표가 들어 있다. 사용하지 않고 고스란히 챙겨 돌아가게 되었다. 이런 것이 바로 장사인 것이다.

칼을 거꾸로 박아놓은 듯한 단애 끝에 백쾌섬이 장승처럼 우뚝 서 있었다. 단애로부터 올라오는 거센 회오리바람에 걸치고 있는 백의가 찢어질 듯 펄럭거렸고, 호접 귀고리까지 땡그랑거리며 소리를 냈다. 어지간한 사람은 바람에 휩쓸려 날아갈 것 같은데도 백쾌섬은 옴짝달싹 않고 저 멀리 눈 덮인 설산을 바라보았다.

'으음!'

백쾌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는 지금 동천몽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덧 자신이 포달랍궁에 들어온 지 한 달 가까이 지나고 있었다. 동천몽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아마 오래전에 떠났을 것이다. 오래 머물 명분도 없었다. 다행히도 동천몽이 언제든지 가고 싶을 때 떠나라고 하여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동안 백쾌섬은 동천몽에 대한 조사를 면밀히 진행했다. 부족한 정보는 중원으로 전서구를 보내 보충했다. 조사 결과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대법왕이 납치된 천상각의 막내아들일 가능성이 팔 할 이상이었다.

넓은 중원에서 동명이인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지만 어쨌든 이름이 같았고, 비록 성인이 되어 얼굴이 조금 변하긴 했지만 초상화 속의 동천몽과 거의 흡사했다. 특히 그가 사용하는 말씨는 완전한 절강성 남부 지역의 방언이었고, 그가 소주에서 왔다는 것까지 알아내었다.

여러 가지 정황은 천상각의 동천몽임이 확실하지만 딱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그것은 바로 무예와 머리였다. 환상루에서 일광엽의 특급 자객들을 상대하던 그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더욱 놀라운 일은 반란의 주모자를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며, 그것은 소름 끼칠 만큼 치밀했고 완벽한 전략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덫에 천장금왕은 반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걸려든 것이다.

자신이 조사한 동천몽은 멍청이였다.

그런 그가 그런 섬뜩한 병략을 썼다는 것은 아무리 기적이 밥 먹듯 일어나는 강호라지만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또한 높은 무예일수록 어렵고 난해하다. 강한 무예를 익히기 위해서는 머리가 좋아야 하는 것이다.

무공은 어떤 학문보다 깊고 오묘하다. 그래서 머리가 나쁜 사람은 절대 고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강호의 정설이었다. 자신도 경험해 봤지만 강한 무공일수록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물며 소림사와 더불어 천하제일의 대가람을 다투는 포달랍궁의 무예, 그것도 살아 있는 활불이라고 하는 대법왕의 기예를 배우기란 보통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동천몽은 대법왕의 무예를 완숙하게 익혔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포달랍궁 사상 가장 강한 대법왕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앞뒤가 맞아야 동천몽임을 확신하는데 말이다.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쉰 백쾌섬이 몸을 돌렸다.

천천히 홍산을 내려가면서 한 달 동안 살핀 동천몽에 대해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혹시 어디에선가 자신이 중요한 단서를 흘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두 번 세 번 꼼꼼하게 복기를 하고 되새겨 봐도 놓친 것은 없었다. 하지만 본능은 더욱 그가 천상각의 막내아들 동천몽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온통 동천몽의 생각으로 꽉 차 있던 백쾌섬의 걸음이 멈췄다. 어느덧 산을 내려와 빈객당 옆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그 순간 자정경과 자청단이 마당으로 나오고 있었다.

'저 여인은?'

백쾌섬의 걸음이 빨라졌다.

"혹시 이 백 모의 눈이 틀리지 않다면 천하쌍미 중 한 분이신 자정경 여협 아니시오?"

자정경이 깜짝 놀라며 돌아섰다.

눈같이 흰 백의에 화려한 행색을 한 백쾌섬을 보며 자정경의 눈이 커졌다. 화려한 만큼이나 용모 또한 준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자정경이 놀란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소… 소녀가 자정경인 것은 맞지만 여협이라는 말은……."

"핫핫핫! 어젯밤 꿈에 모란 한 송이가 내 가슴에 피어나 오늘 무척 좋은 일이 생기려나 했는데 천하쌍미 중 한 분인 자 낭자를 뵙게 될 꿈이었구려. 이거 영광이오이다. 소생은 백쾌섬이라 하오."

곁에 서 있던 자청단이 눈살을 찌푸렸다.

"백쾌섬이라고 하면… 가만, 천하제일현상금 추적자?"

"보잘것없는 졸명을 기억하시는군요. 그렇소이다."

"그렇소이까? 소생은 자청단이오."

"하면 여기 계시는 자 낭자와는……?"

"오라버니 되오이다."

"핫핫! 천하쌍미 중 한 분인 화왕 곁에 지혜가 사해를 덮고 기상이 태산을 넘보는 한 분의 오라비가 있다고 들었는데 바로 자 대협이시구려."

노골적인 추킴에 자청단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이는 아직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극찬이었다.

백궁 앞에 화려한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바로 동천몽의 전용 마차인 백상거였다. 그 곁으로 십이법신과 사대법왕이 서 있었는데, 동천몽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얼굴이 바위처럼 굳어 있었다.

모두가 반대하는 길을 가려는 동천몽이 못마땅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천몽의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꾸 빈객당 쪽을 쳐다보았다.

"일목, 어찌 된 것이냐? 자 낭자가 왜 이렇게 안 오는 것이냐?"

일목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오라고 전했습니다."

동천몽의 시선은 빈객당 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대법왕이시여,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재고해 주심이……?"

천검은왕이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동천몽은 못 들은 체했다.

"흑수당 그자들은……."

"그만 해!"

동천몽이 돌아보며 짜증을 냈다. 그러자 천검은왕이 흠칫 하며 얼른 입을 다물었다.

"핫핫핫!"

"허허허!"

갑자기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와 모두가 빈객당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자청단과 백쾌섬이 뭐가 그리도 좋은지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고, 그 뒤로 자정경이 따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동천몽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누구도 그 미소를 본 사람은 없었고, 동천몽이 다가가며 큰 소리로 입을 열어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이오? 자 공자와 백 형이 잘 아는 사이인 모양이구려?"

백쾌섬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오이다. 뵙는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자 대협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요."

'자 대협!'

동천몽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를 드러내 놓고 웃는 자청단을 보았다.

'훗훗!'

자청단과 백쾌섬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들었다.

"그럴 게 아니라 백 형도 날 따라 흑수당으로 가는 게 어떻겠소?"

"그러잖아도 자 대협으로부터 초빙을 받아 그리할 예정이었습니다."

"아주 잘됐구려. 자자, 얘기는 가면서 나누기로 하고 일단 출발부터 합시다."

말을 마친 동천몽이 백상거 안으로 들어갔다.

벌컹!

백상거의 문을 닫던 동천몽이 고개를 밖으로 빼더니 말했다.

"모두 탈 수는 없고 연약한 자 낭자께서는 본왕과 마차로 가는 것이 어떻겠소?"

십이법신과 사대법왕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대법왕은 사람이되 활불이다. 그래서 여자 한 명쯤 동승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동천몽은 피 끓는 청춘이다. 대법왕이긴 하지만 아직도 세속의 티를 완전히 털어내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나 더욱 놀라운 것은 자정경의 반응이었다. 조금이라도 부끄러워하거나 거절할 줄 알았는데 선뜻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소녀를 생각해 주어 감사합니다. 그럼 대법왕님의 명을 받들어 마차에 타겠나이다."

"저… 정경아."

자청단이 놀라 불렀을 때는 이미 자정경의 모습이 백상거 안으로 사라지고 난 뒤였다.

백쾌섬까지 아연한 얼굴로 서 있을 때 동천몽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일목, 출발해라."

"존명."

일목이 마부석에 죽립을 눌러쓰고 앉아 말고삐를 세차게 당겼다.

촤촤악!

두 마리의 흰 말이 백상거를 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꿀꺽!

백쾌섬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상당한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는데 마차가 멀어지자 정신을 수습하여 뒤따랐다. 마차가 산문을 향해 나아갔고, 마당에서 지켜보던 십이법신과 사대법왕이 앞 다투어 침통한 불호를 중얼거렸다.

"아…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 부우울."

"별일 없어야 할 터인데. 아미타불!"

천장금왕의 중얼거림에 모든 시선이 몰려들었다.

천검은왕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사형, 무슨 말씀이오? 별일 없어야 하다니? 그럼 별일이라도 생길 것이란 말이오?"

자신을 쳐다보는 모든 시선을 쭈욱 훑어본 천장금왕이 조용히 입을 열어 말했다.

"이왕지사 이렇게 말이 나왔으니까 하겠네. 사실 대법왕님의 올해 춘추가 몇이던가?"

"춘추라뇨?"

"내 말은 그분은 지금 한참 피 끓는 연륜이라는 뜻이네. 그런 대법왕님 곁에 천하쌍미 중 한 명인 자 시주가 동승했으니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어찌 보장한단 말인가?"

"우웃!"

"그렇고 보니 이거……."

십이법신과 나머지 삼대장로가 눈을 크게 떴다.

"대법왕님이기 이전에 젊은 청춘이란 얘기지. 하나 정작 중요한 것은 다른 곳에 있네."

"다른 곳이라면?"

"자 시주 말일세. 모든 장부가 아름다운 여인을 쫓듯 여인들 또한 훤칠하고 잘생긴 사내를 사모하는 게 본능 아니던가? 우리가 모시는 대법왕님이어서가 아니라 그분이 얼마나 잘생기셨는가? 내가 여자라도 한눈에 반할 준수한 용모 아니신가?"

"그건 그래. 성질이 조금 그래서 그렇지 생긴 것 하나는 죽이지요."

"같은 남자인 나도 어쩔 때는 확 반할 때가 있는데 하물며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쓸 수도 있지요. 그러고 보니 장난 아닙니다."

모두가 염려스런 표정을 지었다.

천장금왕이 계속 말했다.

"그런데다 대법왕이라는 신분은 어떤 여인이라도 반하지 않을 수 없는 완벽한 배경이 아니던가? 비록 대법왕님께서 여인을 멀리하시고 싶어해도 여인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얘길세."

"그럼 어떡하지요? 듣고 보니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닌데."

천검은왕이 눈을 깜박거렸다.

"좋은 방안이라도……?"

"좋은 방안이라는 게 뭐 있겠는가? 모든 걸 대법왕님의 지혜에 맡길 수밖에."

"지… 지혜라고 하셨사옵니까?"

천검은왕이 눈을 크게 떴다.

"대법왕님께서 어떤 분이라는 걸 몰라서 지혜 운운하십니까? 송구한 얘기지만 대법왕님께서는 지혜라고는 아예 없사옵니다."

"소승이 보기에도 그건 좀 무리인 듯싶습니다. 지혜라는 건 말이 안 되지요."

"아미타불! 그건 그렇고, 내 자네들에게 할 애기가 있으니 가까이들 와보게."

천장금왕이 할 얘기가 있다는 말에 다들 가까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천장금왕은 쉽게 입을 열지 않고 뭔가 생각하는 듯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자 성질이 가장 급한 천검은왕이 다그치듯 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게요?"

천장금왕이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사실 대법왕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날 조용히 부르셨네. 그리고 은밀히 한 가지 당부를 하셨네."

"뭡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빛을 뿌렸다.

천장금왕이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어젯밤 천기를 봤는데……."

"으허헉! 천기?"

"대… 대법왕님께서 천기까지 보신단 말이옵니까?"

모두들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대법왕님의 표현을 빌리면 굳이 천기랄 것까지는 없고, 그냥 심심해서 밤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았는데 평소 보던 별자리들이 조금 이동해 있더라는구먼."

"벼… 별자리도 이동을 합니까?"

"허허! 금시초문이외다."

천검동왕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별은 만날 그 자리에 있는 것 아니오?"

그러면서 옆에 있는 천지철왕을 쳐다보았다. 천지철왕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글쎄올시다. 내가 보기엔 항상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있던데?"

다른 사람들 또한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나같이 천장금왕의 말에 반신반의하는 얼굴들이었다.

"암튼 대법왕님께서 천호(天虎) 경계령을 내리셨네."

"천호 경계령!"

"저… 정말이옵니까?"

포달랍궁에는 모두 세 가지의 경계 등급이 있었다. 가장 낮은 등급이 평소보다 경계를 한 단계 높이는 일호(日虎) 경계령이고, 두 번째는 지호(地虎) 경계령이며,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등급이 천호(天虎)이다.

천호는 적의 침입 가능성이 구 할 이상일 때 발령되는데, 칠십 년 전 뢰음사 침공 이후 단 한 번도 발효된 적이 없었다. 더구나 서장무림은 지금 태평천하라고 해도 좋았다. 조그만 사건들은 일어나지만 포달랍궁이 끼어들 만한 큰 사건이나 사고는 발생하지 않고 있었고, 백성들 또한 그럭저럭 부족함이 없이 살고 있었다.

"누가 쳐들어오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아니지요. 감히 본 궁을 침략한 만한 집단이 있을 수는 없고, 혹시 저번과 같은 반란이……?"

천검은왕의 두 눈에서 광채가 쏟아졌다.

동천몽도 없는데 반란이라면 심각한 문제였다.

천장금왕이 나직이 말했다.

"대법왕께서는 내게 두 개의 주머니를 주고 가셨네."

그러면서 품에서 붉은색과 흰색의 주머니를 꺼내 보여주었다.

"흰 주머니는 대법왕님께서 산문을 벗어나는 즉시 열어보라고 했네."

"그럼 어서 열어보시지요."

"뭐가 들었기에……."

모두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조그만 코끼리 문양이 새겨져 있는 주머니는 앙증맞기까지 했다. 마치 여인들 속곳에 달고 다니는 복주머니 같기도 했다.

스윽!

천장금왕이 흰 주머니를 열고는 이윽고 손을 집어넣어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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