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맨발의 덕배
천축을 다녀오던 길에 만곡령이라는 고갯길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 깜박 잠이 들었는데 그 틈에 산적들이 발낭을 훔쳐 간 것이다. 그렇다고 발낭 속에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밥을 얻어먹을 때 사용할 발우와 갈아 신을 낡은 신발 한 켤레가 전부였다. 하지만 분기탱천한 그는 참지 못했다.
그 사건 이후 스스로 자신의 살업을 털어내기 위해 토굴을 찾아들어 단 하루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며, 얼마 전 대법왕 즉위식 때도 제자들을 통해 간단한 소식만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뛰어난 자질로 나이 서른에 아직까지 누구도 제대로 얻지 못한 포달랍궁의 절대 비술 한 가지를 완숙하게 터득했으며, 무공의 강함으로만 따진다면 만경에 버금간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십 년 전의 사건으로 인해 두 번 다시 그의 손에서 무공이 펼쳐진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대법왕님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어인 행차시옵니까?"
덕배 선사가 더욱 자세를 낮추었다.
"아까 하던 얘길 계속하자꾸나. 태어나지 않았으면 살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하면 태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네?"
"흔히들 인생을 고해라고 하지 않느냐? 그러다 보니 너나 할 것 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하루도 맘 편히 살지 못하는데 태어나지 않는 방법이 있단 말이지?"
"물론 있지요?"
"오, 그래, 그것이 무엇이냐?"
"태어남이 무엇이옵니까? 남자와 여자가 혼인을 함으로써 잉태되는 불씨 아니옵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일체 혼인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입니다. 그러면 태어날 사람도 없고, 고생할 필요도 없지요."
화악!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동천몽이 입을 열지 못하자 자신의 깨우침이 완벽하다고 여긴 듯 덕배가 더욱 언성을 높였다.
"생각해 보소서. 인간이 왜 태어나더이까? 그 패 죽일 혼인 때문이 아니옵니까?"
"네 말이 틀리지는 않지만 만약 아무도 혼인을 하지 않으면 이 땅에 인간의 씨가 마를 것이 아니냐?"
흠칫!
엎드린 덕배 선사의 몸이 떨렸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한 것이다.
"생각해 보거라. 너도 남자와 여자가 혼인을 했기 때문에 생겼고 나 역시 그러한데 아무도 혼인을 하지 않으면 인간의 씨가 마를 것이 아니냐?"
퍼억!
덕배가 이마를 찍었다.
"송구하옵니다. 처음부터 다시 공부를 하겠나이다. 그 점을 미처 소승이 생각하지 못했사옵니다. 하온데 어인 일로 소승을 찾아오셨사옵니까? 설마 소승의 깨우침을 알아보기 위해서 오셨단 말입니까?"
"일단 일어나거라."
"아니옵니다. 소승은 이 자세가 편합니다."
"늙어 뼈도 약할 텐데 그 자세가 편하단 말이냐? 나도 대법왕이기 전에 사람이니라. 늙은 네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으니 몹시 불편하구나. 일어나거라."
"대법왕님의 마음이 불편하시면 그것 또한 대죄, 일어나겠나이다."
말을 마치고 덕배가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 봤자 워낙 키가 작아 동천몽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아야 했다.
"고개를 들어라."
고개를 쳐든 덕배를 보며 동천몽이 흠칫했다. 얼굴에 살점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햇빛을 보지 못해 시체처럼 창백했다. 오로지 두 눈만이 뇌전처럼 살아 이글거렸다.
"너에게 부탁을 하러 왔느니라."
"부, 부탁이라는 건 말이 안 되옵니다. 그냥 말씀하십시오."
"너, 이제 그만 깨우쳐라. 솔직히 말하는데, 넌 그쪽보다는 아무래도 무예 쪽으로 승부를 보는 것이 빠를 듯하구나. 미안한 얘기지만 무려 이십 년을 공부한 결과가 고작 그것이라면 이미 볼장 다 봤다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
"으음!"
덕배가 이를 지그시 물었다.
동천몽이 눈을 치켜떴다.
"왜? 기분 나쁘단 얘기냐?"
덕배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아… 아니옵니다. 기분이 나쁘다니요. 감히 뉘 앞이라고."
"한때 한 솜씨 했다고 들었다."
"하… 한 솜씨라뇨? 부끄럽사옵니다."
"어떠냐? 천룡구십구불을 네가 맡아줘야겠다."
홰액!
덕배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는데 무척 놀란 표정이었다.
"천룡구십구불은 대력, 그 아이가……?"
"그 아이, 죽었느니라."
"대력이 죽다뇨?"
"아무튼 천룡구십구불을 맡거라. 이것이 널 찾아온 목적이니라."
덕배가 망설였다. 하고 싶지 않았지만 감히 대법왕의 뜻을 거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자."
동천몽이 등을 돌렸다.
동천몽이 서너 걸음 걷다 다시 돌아섰다. 덕배가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고 서 있느냐?"
"아… 알겠사옵니다. 대법왕님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하지만 몇 가지 짐도 챙겨야 하고……."
"짐?"
"발우도 있고 세 번밖에 입지 않은 법의도 한 벌 있사옵니다."
동천몽이 인상을 썼다.
"그냥 가자."
동천몽이 앞장서서 내려갔다.
하는 수 없다는 듯 덕배가 토굴을 아쉬운 표정으로 한 번 쳐다보더니 맨발로 따라나섰다.
덕배 선사가 이십 년 토굴 수행을 끝내고 천룡구십구불의 수장이 되어 산을 내려왔다는 소식은 커다란 폭풍이 되었다. 특히 그의 하산을 가장 긴장의 눈으로 보는 시선은 역시 천룡구십구불이었다. 반란에 가담했던 인원도 보충되었고 그동안 수장만 공석이었다. 그들이 긴장한 이유는 덕배 선사의 불같은 성격 때문이었다. 덕배는 말보다 주먹이 앞선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는데, 그건 사실이었다. 물론 이십 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제자들 머릿속에는 주먹을 앞세우는 그의 무서움이 짙은 공포로 각인되어 있었다. 포달랍궁의 제자 중 그에게 한 번이라도 맞아본 적이 없는 제자는 없을 것이라는 게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아흔여덟이 숨을 죽였다.
맨발에다 바느질 자국이 거미줄처럼 쳐져 있는 법의를 걸치고 들어선 덕배 선사에게 시선이 고정되었다.
척!
덕배가 단상에 올라섰다. 하지만 워낙 키가 작아 바닥에 서 있는 천룡구십구불을 올려다봐야 했다.
움찔!
'우웃!'
살인 광선 같은 덕배 선사의 시선을 받은 제자들이 내심 신음을 터뜨렸다.
"나, 덕배다."
덕배의 목소리가 울렸다.
"한 가지만 말하겠노라. 우리 천룡구십구불은 오로지 대법왕님만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이니라. 듣자 하니 얼마 전 대력이란 놈이 못된 꿈을 가진 모양인데, 두 번 다시 그런 놈이 생기면 그땐 모가지를 난도질해 버리겠다."
모가지를 난도질해 버리겠다는 말에 천룡구십구불 사이에 작은 파장이 생겼다. 너무나 직설적이고 섬뜩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우린 오로지 대법왕님을 위해 존재하며 대법왕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알겠느냐?"
"아-미-타-불!"
웅장한 불호 소리가 포달랍궁을 울렸다.
한편, 백궁으로 돌아온 동천몽은 깜짝 놀랐다. 문 앞에 낯선 승려 한 명이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눈이 하나뿐이라는 것만 아니었다면 일목인지 도저히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혹시 너, 일목이 아니냐?"
"일목이 삼가 대법왕님을 뵈옵니다."
"법명은 무엇으로 받았느냐?
"천검은왕께서 그냥 그 일목이라는 본래 이름을 법명으로 쓰라고 했습니다."
"흐음! 일목 선사라… 의외로 깔끔하고 좋구나."
동천몽이 헐렁한 가사를 걸치고 옆구리에 한 자루 청강검을 매고 있는 일목을 훑어보았다. 마치 목석에 옷을 입혀놓은 듯했으므로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하지만 웃었다가는 무슨 오기를 부릴지 몰랐으므로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너의 임무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겠지?"
"이미 교육받았사옵니다. 대법왕님의 그림자이고 사지이며 위험에 빠지면 몸을 던져 막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믿겠다."
"염려 마십시오. 내가 있는 한 어떤 놈도 대법왕님을 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건방진 놈들."
그러면서 옆구리에 차고 있는 검을 불끈 쥐었다.
금방이라도 눈앞에 적이 있다면 단검에 베어버릴 흉흉한 기세였다.
석공과 용새는 동갑이다. 둘 모두 올해 서른여섯이며 열두 살 때 부모 손에 이끌려 포달랍궁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 모두 불심이 깊고 무예 수련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아 같은 연륜의 사형제들보다 앞서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금룡당 소속으로 사시부터 오시까지 산문 위사를 선다. 금룡당은 산문을 비롯해 포달랍궁의 외곽 경비를 맡은 기관이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키만큼이나 큰 죽장(竹杖)을 왼손에 쥐고 우뚝 서 있었다. 사시에서 오시 사이에 포달랍궁을 출입하고자 하는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두 사람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두 사람은 포달랍궁의 산문 아래로 쭉 뻗은 산길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산문 위사는 눈도 깜빡여서는 안 된다. 석상인지 사람인지 방문자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일체의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만큼 금룡당의 율법은 엄했다.
부릅뜬 눈으로 산문을 향해 올라오는 길을 바라보던 석공과 용새의 눈이 파장을 일으켰다. 산 아래로부터 두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흑의를 걸쳤는데, 오른쪽 사람에 비해 왼쪽 사람은 허리도 잘록했고 긴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는 것이 여인이다. 두 사람 모두 옆구리에 검을 차고 있었는데 먼 길을 온 듯 신고 있는 가죽 신발에는 흙이 진창이었다.
저벅저벅!
두 사람은 눈이 녹아 질퍽한 산길을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미타불! 두 분 시주께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시오."
용새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상대로 일남일녀였다. 여인은 대략 스물 초반쯤으로 보였는데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절색이었다. 큰 키에 마치 버들잎처럼 수려하고 진하며 맑고 경쾌한 눈썹 끝이 천창을 향해 뻗어가고, 반짝이는 두 눈은 흑백이 분명하고 눈가의 주름이 빼어나게 긴 것이 총명함을 말해주었다. 우뚝 선 코는 윤택하며 도도함을 지그시 담았다. 윤택하고 붉으며 도톰한 입술은 사내들의 혼을 빼앗을 듯 도발적이며 그 아래로 뻗어 내려간 흰 목선은 흐르는 물결을 보는 듯하다. 경장 위로 도톰하게 솟아오른 가슴과 잘록한 허리는 둔부를 더욱 탄력있게 추켜세운다.
불심이 깊어 흔들림이 없던 용새의 눈이 작은 파장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수많은 향객을 보아왔지만 흑의여인처럼 자극적이며 매혹적인 여인은 보지 못했다.
"아미타불!"
석공이 불호로 용새의 혼미한 정신을 일깨운다. 용새는 자신의 추태를 깨닫고 길게 숨을 몰아쉬며 정색했다.
"아… 아티마불! 어디서 오셨습니까?"
"여기가 포달랍궁인가요?"
은 쟁반에 옥 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다.
용새가 나직이 목례를 하며 대답한다.
"그렇소이다, 여시주. 이곳은 포달랍궁이외다. 방문 목적을 말해주시면 안에 기별을 하겠소이다."
"대법왕을 뵈러 왔어요."
흑의여인의 입에서 대법왕이라는 말이 거침없이 흘러나오자 용새는 물론 뒤에 서 있던 석공까지 깜짝 놀랐다.
대법왕은 아무나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포달랍궁의 제자들일지라도 입에 담기를 적지 않게 두려워하고 담더라도 가급적 최대한의 경외의 표정을 담는다.
더욱 아무나 대법왕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최소한 대법왕을 만나려면 열흘 전에 미리 약조를 하거나 일정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래도 사나흘은 족히 걸린다.
"약속이 되어 있는지요?"
"아뇨. 약속은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주 급한 일로 찾아왔으니 만나게 해주시겠어요?"
용새의 표정이 굳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닌 지고무상한 대법왕을 만나는데 약속도 하지 않고 불쑥 찾아왔다는 것에 불쾌감을 느꼈다. 대법왕은 사람이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용새의 생각이었다.
"미리 약속이 되어 있지 않다면 곤란하오. 돌아들 가시오."
"이보시오, 우린 여기서 오백 리나 떨어진 아주 먼 곳에서 대법왕님을 뵙기 위해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왔소이다. 비록 일방적인 우리의 방문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이대로 돌아가라는 것은 너무하지 않소?"
흑의여인과 같이 온 사내가 인상을 썼다.
사내는 서른 초반쯤 되어 보였는데 눈을 부라렸다.
"우리도 대법왕을 만나려면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안단 말이오. 오죽 다급했으면 이런 결례를 무릅썼겠소. 그러니 안에 기별이라도 좀 넣어주시오."
용새의 얼굴이 굳어졌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사내의 큰 소리에 비위가 상한 것이다. 엎드려 빌어도 불가할 판에 목청을 높이자 용새가 가만있을 턱이 없었다.
"아미타불! 두 분 시주는 그만 돌아가시오. 더 이상 입 아프게 떠들고 싶지 않소."
흑의사내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어? 이거 포달랍궁 맞아? 백성이 어려운 사정을 고하기 위해 달려왔으면 만사를 젖혀두고 사정을 들어줘야지. 이거 듣기와는 완전 딴판이군그래?"
용새의 입술이 물렸다.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지만 인내와 자비를 최고의 가치로 여겨야 하는 승려로서 같이 화를 낸다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그냥 가시지요?"
겨우 화를 누르며 힘들게 말했다.
"그냥은 못 돌아가겠소. 젠장, 오늘 기어코 대법왕인지 뭔지 하는 사람을 만나야겠소."
화악!
용새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대… 대법왕인지 뭔지?'
용새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늘 같은 대법왕을 마치 지나가는 사람 부르듯 하는 흑의사내의 경박한 말투에 참았던 화가 터지고 말았다.
대법왕을 향한 용새의 존경심은 누구보다 절대적이었다. 얼마 전 즉위식 때 대법왕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온몸이 벼락을 맞은 뜻 찌르르했고 너무도 감동스러워 눈물까지 흘렸다. 그날 이후 어떻게 해서라도 대법왕을 위해 살다 죽겠다고 명심하고 다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부모님보다 열 배는 더 존경하는 대법왕님을 깔아뭉개는 흑의사내의 발언은 결코 용납해서도 안 되고, 용납할 수도 없는 가공할 대죄였다.
"너… 너, 지금……!"
너무나 흥분하여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부르르!
몸이 떨리고 침이 목에 걸렸다.
"이노옴! 네놈이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튀어나왔소. 그래서 어쩔 거요?"
"어… 어쩔……?"
용새의 눈이 붉게 변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흥분하면 용새의 두 눈은 빨개진다.
그때 심상치 않음을 느낀 듯 흑의여인이 얼른 나섰다.
"오라버니, 그만 해요."
"너는 자존심도 없느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오백 리 길을 달려온 우리에게 어디 이따위로 대접할 수가 있단 말이냐? 이 인간, 정말 중 맞냐?"
"주… 중 맞냐?"
어느새 용새의 눈은 붉다 못해 파랗게 변해가고 있었다.
흑의여인이 빠르게 말했다.
"아쉬운 사람은 우리예요. 제발 참아야 해요."
"크으으! 안 되겠구나. 부처께서 말을 듣지 않으면 두들겨 패라고 했으니."
휙!
잔뜩 흥분한 용새가 바람처럼 날아가 흑의사내를 주먹으로 때렸다.
그런데 흑의사내 역시 만만치 않았다. 가볍게 상체를 좌측으로 움직여 용새의 일권을 피하더니 옆구리에 차고 있는 검을 뽑아 곧바로 반격해 왔다.
촤악!
단번에 일도양단의 기세로 파고드는 기세에 용새가 흠칫했다.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도 용서가 어려울 판인데 맞공격을 해오자 그나마 마지막 한 올의 자비심까지도 사라져 버렸다.
"내가 오늘 널 살려두면 용새가 아니라 용개다!"
반격해 오는 검을 향해 좌권을 뻗었다.
쾅!
용새의 주먹과 검이 충돌했다.
"큭!"
"후웁!"
두 사람 모두 비명을 지르며 한 걸음씩 물러났다.
용새는 용새대로 충격을 받은 얼굴이고, 흑의사내 역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산문을 지키는 한낱 위사의 무예가 당 내에서 아버지 다음으로 무공이 높은 자신과 동수를 이룬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무가는 아니라지만 무(武)의 중요성을 깨달은 부친은 어려서부터 혼신의 노력을 다해 자신을 가르쳤다. 그런데 자신의 무위가 포달랍궁의 위사와 겨우 엇비슷한 실력밖에 되지 않는 것에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간다앗!"
흑의사내는 노호성을 터뜨리며 자신이 배운 표풍대검식을 펼쳐 갔다.
서장 동부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표풍자에게로부터 배운 검식이었다.
용새 역시 눈알이 뒤집히고 말았다. 이름도 모르는 허름한 사내를 한 방에 때려눕히지 못했다는 것은 서장제일문 포달랍궁의 제자답지 못한 부끄러운 일이었다.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처음에는 팔 하나 정도 부러뜨릴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죽여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콰아아!
용새가 비룡권을 펼쳤다. 용이 허공을 날 때 휘젓는 발 모양에서 착안된 비룡권은 무척 거칠다.
콰콰콰!
용새의 주먹이 흑의사내의 검기를 일거에 박살 내버리며 파고들었다.
그 순간 흑의사내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의 표풍대검식이 순식간에 깨진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쾅!
가슴이 쇠망치에 맞은 듯했다.
"크억!"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치는 흑의사내를 향해 용새의 우권이 뻗어갔다.
"건방진 시주."
쇄애액!
용새가 숨 돌릴 틈을 주지 않고 연권을 쏟았다.
미칠 것 같은 분노가 담겨 있어 맞았다 하면 흑의사내는 온전하지 못할 위력이다.
이에 흑의여인이 소리쳤다.
"제발 멈추세요!"
하지만 용새의 주먹은 멈추지 않았고, 흑의여인이 뛰어들었다.
촤라락!
그녀는 흑의사내를 구하기 위해 검을 뽑아 용새의 팔목을 내려쳤다. 용새가 주먹을 회수하지 않으면 잘릴 것이다.
"이… 이런 연놈 시주들이!"
용새는 씩씩거리며 주먹을 회수한 후 곧바로 흑의여인에게 달려들었다.
쿠우우!
한눈에 봐도 살기가 뭉쳐진 주먹이다. 흑의여인이 입술을 깨물며 검을 수평으로 그었다. 설혹 상대가 안 될지라도 가만히 앉아 맞아 죽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흑의여인의 얼굴에는 암울한 표정이 떠올랐다.
바로 그때 한줄기 단호한 외침이 들려왔다.
"아미타불! 멈추어라!"
뚝!
매섭게 돌진해 가던 용새의 우권이 거짓말처럼 정지했다. 용새는 잽싸게 주먹을 거두고 돌아섰다. 어느새 산문 앞에는 붉은 가사를 걸친 비쩍 마른 노승 한 명이 서 있었다. 금룡당의 당주 남화 선사였다.
"당주님을 뵈옵니다."
용새가 잽싸게 허리를 구부렸다.
남화 선사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어인 싸움이더냐?"
용새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중에서 대법왕을 모욕했다는 것에 힘을 주었다.
홱!
남화 선사가 흑의사내를 돌아보았는데 그 시선엔 냉기가 깔려 있었다.
"사실인가? 정직하게 말하시오!"
"그렇지 않아요, 선사님."
흑의사내를 대신해 흑의여인이 나섰다.
"소녀는 자정경이라 해요. 저희 오라버니께서 조금은 무례했지만 결코 대법왕님의 존엄성을 해치려는 목적은 절대 없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더니 흑의사내를 보며 자정경이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 뭐 하는 거예요, 어서 사과를 하지 않고?"
그러면서 한쪽 눈을 찔끔 감았다.
아무리 화가 나도 형식적이나마 사과를 하라는 신호였다.
흑의사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가와 남화 선사를 향해 포권의 예를 취했다.
"소생은 자청단이라 하오. 이유야 어쨌든 소란을 피워 송구하오이다."
말은 사과를 하고 있었지만 자청단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고 용새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눈썹이 있었지만 고작 털 두 개밖에 없었다. 왼쪽 눈썹 한 개, 오른쪽 눈썹 한 개다. 눈썹이 없으면 심성이 차갑다. 그래서인지 중년 승려의 얼굴은 희다 못해 창백하여 섬뜩한 인상을 풍긴다. 거기다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구분이 안 될 만큼 가늘어 난폭한 기운까지 느껴진다.
사대법왕의 시선이 중년 승려를 향해 있었다. 새로 천장금왕이 된 고굉 선사 역시 맨 상석에 앉아 중년 승려를 바라보고 있었다.
"과거 계율을 위반했던 제자들을 중심으로 은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죽은 대력 선사를 비롯해 천장금왕과 자주 왕래했던 제자들은 밀착 감시하고 있지요."
천장금왕이 힘주어 말했다.
"거듭 말하지만 두 번 다시 이번 사태와 같은 일이 생겨서는 안 되네. 만약 또다시 반란이 발각된다면 그땐 자네를 가장 먼저 처단할 걸세."
"너무 심려 마옵소서.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미 선사(二眉禪師). 사불각의 각주이다. 사불각은 세속의 집단으로 표현하면 정보 기관인 셈이었다. 서장에 퍼져 있는 많은 무가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포달랍궁의 고승들과 일반 제자들의 일상을 낱낱이 지켜본다.
"만경 사숙의 반란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이번 반란을 사전에 감지하지 못한 것은 무조건 사불각의 책임일세. 다시 말하지만 절대 앞으로는 이런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 될 게야."
천장금왕이 위엄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용히 말했지만 어떤 경고보다 소름이 끼침을 이미 선사는 느꼈다.
"명심하겠나이다."
"조금이라도 이상 징후가 보이면 곧바로 보고하고 시간이 촉박하거든 독단적으로라도 처리하게. 위험이 발견되어 손을 썼다는데 누가 뭐라고 한단 말인가?"
"예, 금왕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밖으로부터 음성이 들려오자 모두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남화 선사가 들어섰다.
"남 당주가 여긴 어인 일이오?"
모두가 알은체를 했다.
남화 선사가 문밖을 보며 말했다.
"들어오시오, 두 분 시주."
자정경과 자청단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들어서자마자 다섯 사람을 향해 공손히 예를 취했다.
"자씨 남매가 포달랍궁의 큰스님들께 인사 올립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떠지며 일제히 자정경에 고정되었다. 비록 산사의 스님들이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에 똑같이 놀란 얼굴들이었다.
"소승은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남화 선사가 사라지자 천장금왕이 눈을 치켜떴다.
"두 분 시주께서는 어디서 오셨소?"
"저흰 흑수당에서 왔사옵니다."
"흑수당?"
천장금왕이 처음 듣는다는 듯 이미 선사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이미 선사가 조용히 설명했다.
"흑수당은 사천과 인접한 덕격에 자리한 상가입니다. 서장제일의 상가이지요."
"흑수당… 들어본 것 같기도 하군. 그런데 본 궁에는 무슨 용건으로……?"
천장금왕이 다시 물었다.
자정경이 정색하여 말했다.
"거두절미하고 찾아온 용건만 말씀드리겠어요. 대법왕님을 뵙고 한 가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왔어요."
단아한 연꽃 한 송이가 말을 하는 듯했고 목소리는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 가는 것 같았다. 모든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오랜 세월 불심에 깊이 묻혀 사는 노승들이었지만 아름다움에 반응하는 것은 본능이리라.
"아미타불! 혹시 여시주께서는 자정경 낭자가 아니시오?"
침묵하고 있던 이미 선사가 물었다.
"맞아요. 소녀가 자정경이에요."
"천하쌍미."
이미 선사가 신음을 뱉듯 말했다. 그리고 궁금해하는 사대법왕에게 천하쌍미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여인 중 한 명이라고 하자 모두가 입을 쩌억 벌리고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자정경과 자청단이 포달랍궁을 찾아온 용건을 들은 사대법왕과 이미 선사의 얼굴은 무거워졌다. 자정경 남매는 이미 빈각으로 안내되었고, 방 안에는 다섯 사람만 남아 있었는데 모두 난감한 얼굴들이었다. 원래 포달랍궁은 이런 일이 잦았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와 하소연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가급적이면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대부분 시간이 걸리더라도 모두 해결해 주었다. 그렇지만 이번처럼 대법왕을 찾아오는 이는 없었다. 몇 번 있긴 하지만 대부분 대법왕을 만나야 할 절대적인 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하도 억울하다 보니 찾아온 것뿐이었다.
대법왕은 신성이었다. 아무나 만날 수도 없을뿐더러 세인들 앞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대법왕을 만나겠다고 직접 찾아온 전례가 없었던 사태에 다섯 사람은 더욱 이마를 찡그렸다.
"흑수당에 대해 자세히 말해보게. 조금 전에 서장제일상가라고 한 것 같던데?"
천장금왕이 이미 선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에 이미 선사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천장금왕을 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흑수당은 서장제일상가이지요. 삼백여 년 이상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합니다. 서장을 통째로 사고도 남는다는 말이 있을 만큼 대상가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뭔가?"
"그다지 세간에서는 좋은 평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말해보게."
"아미타불!"
이미 선사가 이마를 찡그렸다. 어디서부터 입을 열어 설명해야 할지 난감한 표정이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이미 선사가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악덕 상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십 개의 군소 상가를 막강한 자금력을 이용해 흡수하고 통폐합시켜 오늘의 가세를 이뤘습니다. 특히 시장에서의 독점적 위치를 철저히 악용하여 물건 값을 자신들 마음대로 조정하고 형성해 엄청난 중상들을 파산으로 몰아갔습니다."
"아미타불!"
천장금왕이 굳은 얼굴로 불호를 외웠다.
이미 선사가 말을 이었다.
"이런 말을 드리기가 조금은 그렇지만, 사실 아직까지 본 궁에 단 한 푼의 시주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백성들을 위한 자선은 더욱 없었고요."
사대법왕의 안색이 굳어졌다.
머릿속에 흑수당이라는 상가의 이미지가 그려진 것이었다.
"소승이 알기에 이따금 찾아 예불은 올렸지만 단 한 푼의 시주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옵니다."
"그렇다면 천하의 수전노가 아닌가?"
천검은왕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런 놈이 무슨 면목으로 자식들을 보내 본 궁에 도움을 요청한단 말인가? 낯짝도 좋군."
직설적인 성격답게 천검은왕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당장 내쫓아 버립시다."
그러면서 천장금왕을 돌아보았다.
천장금왕이 손에 쥔 염주를 굴리며 조용히 말했다.
"한마디로 서장의 모든 상권을 쥐락펴락하는 곳이란 얘기 아닌가?"
"그렇사옵니다. 그런데 두 자식을 직접 보낸 것으로 보아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어지간해서는 절대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할 자추동이 아닙니다."
자정경과 자청단은 무슨 일로 대법왕을 만나려고 하느냐는 천장금왕의 질문에 직접 만나 얘길 하겠다면서 입을 다물었다.
"어떡하면 좋겠는가? 두 사람을 대법왕님께 데려가는 게 좋을 것 같은가, 아니면……."
"대법왕님께서는 평범한 분이 아니십니다. 전 대법왕님만 보더라도 아무나 만나지 않으셨지요."
천검은왕이 발끈하며 목청을 높였다.
"자네들은 어찌 생각하는가?"
천권동왕와 천지철왕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소승들도 은왕 사형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부처님을 숭배한다고 하면서도 단 한 푼의 시주도 바치지 않은 자이옵니다. 물론 금전으로 인간의 불심을 잴 것은 아니지만 해마다 굶주린 백성들을 위한 본 궁의 구호 사업도 외면했다고 들었습니다."
"소승 또한 철저히 모른 체했다가 갑자기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은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이라고 봅니다."
그때 이미 선사가 입을 열었다.
"소승이 한 말씀 더 드려도 되겠는지요?"
"물론이네. 해보게."
이미 선사가 천장금왕을 보며 말했다.
"소승의 생각으로는 대법왕님과 만나도록 주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이유를 말해보게."
"대법왕님을 새롭게 즉위하셨습니다. 당분간은 사람들에게 후덕한 인품과 따뜻한 모습을 충분히 보여주어야 할 때라고 생각하옵니다."
"만천하에 대법왕님의 자비스러움을 널리 알리는 차원에서라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얘긴가?"
"그러하옵니다. 필시 거절했다간 온갖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만 해봐. 내가 흑수당을 가만 놔두나."
천검은왕이 눈을 크게 떴다.
이미 선사의 말은 계속되었다. 천장금왕의 표정이 부드러워졌고 천검은왕을 제외한 나머지 이대법왕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 선사의 말에 공감하는 표정을 지었다. 유일하게 천검은왕만이 절대 안 된다고 고집을 피웠다.
빈객당으로 안내를 받은 자정경과 자청단은 가만 앉아 있지 못하고 실내를 서성거렸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면 기별을 해준다고 했는데 벌써 반 시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야?"
자청단이 투덜거렸다.
"포달랍궁, 이렇게 안 봤는데 알고 보니 형편없는 집단 아냐?"
자정경이 정색했다.
"오라버니, 말씀 좀 가려 하세요."
"내가 뭘?"
자청단이 눈을 치켜떴다.
자정경이 말했다.
"자세히는 몰라도 본 가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포달랍궁에 한 푼의 시주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게 어쨌단 말이냐?"
"어쨌다뇨? 포달랍궁이 일 년에 굶어가는 민초들을 위해 쏟아 붓는 돈이 적지 않다고 들었어요. 심지어 승려들의 끼니까지 줄이며 구호 사업을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 포달랍궁에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는 얘기죠."
"그렇다고 그것을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시주를 하고 하지 않고는 철저히 아버지의 불심일 뿐이다."
"틀린 말씀은 아니에요. 한 푼의 시주도 하지 않은 것을 굳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죠. 누구라도 불심이 깊지 못하면 시주는 당연히 가벼워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불심을 떠난 자선 행위를 말하는 거죠. 서장에서 가장 부자이면서도 우린 빈자들을 철저히 외면했다는 거예요."
"남을 돕기 위해 돈을 버는 건 아니다."
"쓰기 위해 버는 게 돈이에요. 그리고 부자는 당연히 가난한 사람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펼쳐야 해요. 그건 책임이고 의무에요."
"그건 억지가 어디 있느냐?"
"아무튼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의 행동은 뻔뻔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 가급적 말조심하고 이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았으면 해요."
"암튼 난 이곳 중놈들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건방진 놈들."
자청단의 눈이 이글거렸다. 부잣집 외동으로 태어나 수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성장했다. 누구든 자신의 말 한마디면 굽실거렸고,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이라도 했다. 자신은 그들의 생명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절대군왕이었다. 아직까지 자신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세운 뜻을 가로막는 사람은 없었다. 부친 또한 철저히 자신이 무엇을 하든 가로막거나 꾸중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자존심이 짓밟힌 것이다. 이런 수모는 난생처음이었다. 더구나 출가한 승려들에게 무시를 당했다는 것이 더욱 속을 뒤집어놓았다. 자신은 아직까지 포달랍궁이든 어디든 승려는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만날 놀고먹는 승려들이야말로 철저히 기생충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자신들을 안내했던 스님이 입을 열어 말했다.
"소승을 따라오십시오."
"대법왕을 만나러 가는 것이오?"
자청단이 뒤를 따르며 물었다.
하지만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걷기만 했다.
"이보시오, 대법왕을 만나러 가는 길이냐고 묻잖소?"
"소승은 아무것도 모르오."
스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자청단의 인상이 또다시 찡그려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절간이기에 겪으면 겪을수록 마음에 들지 않는다.
스님은 자신들이 처음 들어갔던 천량전으로 데려갔다.
여전히 그곳에는 사대법왕이 있었는데 이미 선사만이 자리에 없었다.
두 사람을 데리고 온 스님을 돌아가자 자청단이 대뜸 물었다.
"또 뭐요? 대법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더니 왜 또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오?"
그 말에 천검은왕이 눈을 부라렸다.
"젊은 시주, 말을 조심하게. 난 자네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네. 그리고 이곳은 포달랍궁일세. 사찰이라고 해서 잘 참는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닐세. 한 번만 더 경거망동하면 가만두지 않겠네."
천검은왕의 눈에서 살기가 뻗어 나오자, 자청단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금방이라도 살수를 펼칠 것 같은 기세에 얼굴이 굳었다.
"따라오시오."
천장금왕이 앞장을 섰고 그 뒤로 자정경과 자청단에 이어 삼대법왕이 뒤를 이었다.
일행은 백궁 입구를 들어서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두 명의 승려가 앞을 막았다. 그러나 곧 사대법왕을 발견하고는 허리를 구부려 예를 취했다.
"천룡구십구불이 법왕님들을 뵈옵니다."
천장금왕의 반란 이후 천룡구십구불이 백궁을 에워싸 버린 것이었다. 그전까지 천룡구십구불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묵으며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출동했다. 하지만 덕배 선사가 수장이 되면서 천룡구십구불을 동천몽의 친위대로 바꿔 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동천몽을 만나기 위해서는 천룡구십구불의 검문을 받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