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살인의 추억
또 한 대의 마차가 복잡한 소주의 거리로 들어섰다. 마차는 아주 화려해 지붕에는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은 한 마리 흰 봉황이 앉아 있었다.
길을 가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화려한 마차에 집중됐으며, 그들은 마차의 주인이 누군지 아는 것 같았다.
백봉거(白鳳車)는 바로 천상각의 안주인인 능씨의 전용 마차이다. 주위로 십여 명의 무사가 호위를 섰고, 마차는 조용히 소주의 저잣거리를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그런 마차 주위로는 세 명의 무사가 뒤따랐다.
"다 왔사옵니다."
마차가 후미진 골목 입구에 멈춰 서자 호위하던 무사 한 명이 잽싸게 마차 뒷문을 열어주었다. 옷매무새를 다듬는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나오더니 잠시 후 능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차에 비해 그녀의 옷차림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다. 능씨의 얼굴은 수척했는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곳 이층입니다."
마부가 이층 목조건물을 가리켰다.
"너흰 여기 있거라. 상도만 따라오고."
능씨는 마부인 상도만을 대동하고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골목은 취객들의 방뇨와 온갖 쓰레기로 지저분했다.
"으휴, 더러워."
상도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능씨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이층 목조건물 앞에 이른 능씨가 걸음을 세웠다. 입구에 세로로 현판이 걸려 있었고, '형천파!'란 글씨가 제법 멋들어지게 쓰여 있었다.
"들어가시지요."
상도가 앞장을 서자 능씨가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계단은 수직에 가까울 만큼 가팔랐고, 능씨는 치마를 한 줌 쥐어 올리며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똑똑!
상도가 이층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쪽으로부터 대뜸 짜증 섞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떤 새낀데 그래? 그냥 들어와."
차가운 욕설에 상도가 뒤에 서 있는 능씨를 돌아보았다. 놀라지 않았느냐는 살핌이었다. 능씨가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지 상도가 문을 열었다.
삐이꺽!
들어선 실내엔 뿌연 연기가 가득했다. 아편을 가루로 만들어 태우며 생긴 아연(阿煙)이었다.
"너흰 뭐야, 인마?"
필광을 비롯한 형천파 수하들이 마주 앉아 아편을 태우고 있었다. 이미 어느 정도 취한 듯 그들은 눈이 풀리고 자세가 흐트러져 있었다.
상도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한 번 차더니 날카롭게 물었다.
"여기 필광이 누구냐?"
필광이 아편을 종이에 말아 담배를 비우듯 빨아대며 말했다.
"난데, 넌 누구냐? 왜 날 찾는 거냐?"
필광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흐느적거렸다. 도저히 그 상태에서는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한 상도가 필광의 턱을 걷어찼다.
빠아악!
"크악!"
아편에 취한 필광이 그대로 날아가 구석에 처박혔고, 나머지 부하들이 동시에 옆에 놓인 검을 집어 들었지만 아편에 취한 터라 동작이 느렸고, 그들이 검을 잡았을 땐 상도의 발길질이 모두 한차례 훑고 지나간 뒤였다.
퍼퍼퍽!
필광의 부하들이 길게 뻗어버렸다.
"이런 씨이!"
필광이 두목답게 욕설을 뱉으며 품에서 비수 한 개를 꺼내 달려들자 상도가 가볍게 피하며 등짝을 뒤꿈치로 박았다.
"끄럭!"
필광이 그대로 앞으로 엎어지며 거품을 물었다.
확!
상도가 필광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퍼어억!
필광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며 말했다.
"어디서 온 놈이냐? 감히 우리 형천파의 본거지를 공격하다니, 간덩이가 부었구나!"
따악!
상도가 필광의 뺨을 쳤다.
정신을 차리라고 때린 것이다. 하지만 필광은 계속 횡설수설했고, 상도는 그런 그의 뺨을 연거푸 십여 차례 더 때렸다. 필광의 양 볼이 빨갛게 부풀어 오르자 조금씩 정신이 드는지 눈에 초점이 생겼다.
정신이 조금 들자 필광은 본능적으로 좌측 기둥에 세워놓은 자신의 검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역시 상도의 발이 더 빨랐다.
휙!
상도의 발길질에 검은 허공을 날아 반대편 벽에 깊숙이 꽂혔다.
"이런 나쁜 새끼."
뻑!
필광은 두목답게 쉽게 포기하지 않았고, 그 바람에 상도에게 더 두들겨 맞았다. 하지만 필광은 피가 흘러나오는 입을 소매로 닦으며 계속해서 욕설을 뱉었다.
"개자식, 가만 안 두겠어. 감히 나 필광을 때려?"
화악!
그 순간 상도가 뒤로 돌아가 필광의 머리채를 쥐어 고개를 쳐들도록 만들었다.
멈칫!
억지로 쳐들린 상도의 시선 속으로 한 명의 중년 부인이 보였다.
"지금부터 이분께서 묻는 말에 대답해라. 만약 태도가 불성실할 때는 가만두지 않겠다."
필광이 흠칫했다.
뒷골목에서 성장한 필광답게 상도의 목소리에 가혹한 살기가 담겼음을 직감한 것이다.
"물어보시지요, 마님."
능씨가 필광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쳐다보는 능씨의 눈길에 필광이 움찔했다.
"날 알아보겠어요?"
필광이 더듬거렸다.
"부… 부인께서는 누구신지……?"
"언젠가 내 아들과 우리 집에 한 번 왔잖아요. 천상각 말예요."
"처… 천상각?"
천상각이라는 말에 필광이 기겁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광은 곧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마… 마님 아니십니까?"
능씨가 눈짓을 하자 상도가 머리채를 놓아주고 조용히 한쪽으로 물러섰다.
"편히 앉으세요."
"아… 아닙니다. 감히 저 같은 것이 어떻게……."
"괜찮아요. 어려워 말고 의자에 앉아요."
하지만 필광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상도는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부드럽게 말했다.
"마님께서 편히 앉으라고 하시지 않느냐?"
그제야 필광은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는데 잔뜩 웅크린 자세였다. 자신으로서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사람이다. 언젠가 동천몽을 따라 천상각에 놀러 갔다가 한번 뵈었는데 무척 잘 대해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을 쓰레기 보듯 했지만 능씨는 친자식 대하듯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손수 음식까지 만들어주었다. 주위 눈치가 보여 일찍 떠나려고 하자 더 놀다 가라고 붙잡아 밤이 늦어서야 돌아왔었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정을 못 받고 자란 필광에게 능씨의 모습은 너무나 멋있었고 동천몽이 한없이 부러웠다. 돌아오는데 음식까지 싸주어 집에 돌아와 그 음식을 먹으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태어나 그토록 사람 대접을 받아보긴 처음이었다.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 이렇게 왔어요. 아는 대로 대답만 해주세요."
"무… 물론입니다. 뭐든지 물어주십시오, 마님."
능씨가 웃으며 말했다.
"마님이라뇨. 우리 천몽이 친구들인데 그냥 어머니라고 불러요."
홱!
필광의 고개가 발끈 쳐들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엔 능씨가 입가에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편하게 대답해요, 아주 편하게."
"네… 네, 어머니."
필광의 눈가에 습기가 배었다. 얼마나 불러보고 싶었던 이름인가. 늙은 노모를 모시고 저잣거리에서 맛있는 음식을 사주는 아들들을 보며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어머니가 없다는 것이 그처럼 미치도록 서글픈 일인지 몰랐다. 자신을 주워 키워준 개방 무사의 말에 의하면, 핏덩이로 강보에 싸여 개천가에 버려진 자신을 주워다 키웠다고 했다. 어려서는 자신을 버렸다는 것에 분노하여 어머니에 대한 적의만 쌓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는 그냥 어머니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때부터 어머니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단서가 단 한 가지도 없었기 때문에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필광이라는 이름 또한 개방 무사가 지어주었다.
빛나는 붓이란 뜻으로, 훌륭한 선비가 되라고 지어준 이름인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뒷골목 생활에 빠져들고 말았다.
"천몽이 말이에요."
"예, 뭐든지 물어주십시오. 아는 대로 대답하겠습니다, 어머니."
"천몽이가 스님들에게 끌려갈 당시 함께 있었다고 했지요?"
"예, 술을 마시며 있었습니다."
"그 스님들 말예요, 무공을 사용했다고 했는데 중원 사람들이었나요?"
팟!
필광의 두 눈이 빛을 뿌렸다.
지금까지 승려라는 것만 알았지 그들이 중원 사람인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또 어느 누구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니 소림사 승려들과 약간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말투도 달랐고 가사와 법의를 걸친 모습도 조금은 특이했다.
"중원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소림사 스님들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요?"
능씨 부인이 두 눈을 빛냈다.
"몇 마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말끝이 아주 뭉텅했습니다. 필시 어느 지역의 방언 같았는데……."
순간 능씨 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많은 글을 읽고 배웠다. 그래서 중원 각 지역의 방언에 대해 상당히 알고 있지만 끝이 뭉텅한 말은 중원에 없다.
"틀림없었나요?"
"제… 제가 어찌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진짜입니다. 구르듯 뭉텅했습니다."
능씨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한참 이마를 찡그리고 생각하더니 돌연 소매 속에서 서찰 세 장을 꺼내 들었다.
첫 번째 서찰을 펼치자 한 명의 승려가 그려져 있었다.
"잘 보세요. 이런 차림이었나요?"
필광이 서찰에 그려진 승려의 복장을 뚫어져라 보더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닙니다."
첫 번째 서찰의 승려는 소림사 복장이다. 중원 승려의 대표적인 복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건 동영 스님들의 모습이에요. 바다 건너 닌자술이 발달한."
스윽!
두 번째 서찰을 펼치자 역시 승려 한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묵빛 가사에 목에 긴 염주를 걸고 있었는데 눈썹이 유난히 길었다.
"잘 보세요."
필광이 한참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다릅니다."
능씨가 세 번째 서찰을 펼쳤다.
역시 승려 한 명이 그려져 있었는데, 소림사 승려와 비슷했지만 가사와 법의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소림사 승려들은 법의 안에 옷을 입는데 그림 속 승려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마… 맞습니다. 그들입니다. 그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능씨의 눈이 커졌다.
"잘 봐요. 틀림없나요?"
"맞습니다. 그 새끼들이에요. 내가 왜 어머니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확실합니다, 어머니."
능씨의 얼굴이 굳어졌다. 세 번째 승려는 서장에 있는 포달랍궁의 복장이었다. 여기서 포달랍궁이 있는 서장까지는 수천 리이다. 어쨌든 필광의 말 그대로 해석하면 동천몽은 포달랍궁으로 끌려갔다는 얘기가 되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거라. 잘 보고 대답해야 한다."
상도가 힘주어 말했다.
필광이 단정하듯 말했다.
"감히 제가 어찌 어머님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분명합니다. 이런 복장이었습니다."
능씨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지난 삼 년 동안 단 하루도 동천몽을 잊어본 적이 없다. 남편 동오룡이 다방면으로 찾고 있었기 때문에 속만 태우며 지켜보았고, 기다려도 희망적인 소식이 없어 자신이 직접 나선 것이다.
능씨의 눈가에 어느덧 습기가 그렁그렁했다. 아들을 데려간 것이 확실한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와락 그리움이 솟구친 것이다.
능씨가 아편에 취해 바닥에 쓰러져 있는 부하들을 훑어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나쁜 짓이에요.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올바르게 살아야죠."
필광이 아무 소리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능씨가 소매 속을 뒤척이더니 주머니 한 개를 꺼냈다.
"받아요."
"어머니, 이건……."
"얼마 되지 않지만 새 인생을 개척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다시 말하지만 이제 이런 짓은 그만 해요. 아주 나쁜 짓이에요."
필광은 감격을 주체할 수 없어 말을 하지 못했다. 돌아서는 능씨를 바라보는 필광의 눈가에 방울이 흘러내린다. 한참 동안 닫힌 문을 바라보던 필광이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쏴아아!
능씨로부터 받은 주머니를 거꾸로 쏟자 갑자기 실내가 환해졌다. 십여 개의 손톱만 한 구슬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 육채보환주!"
육채보환주는 황금 한 냥과 맞먹는다.
퍼억!
그대로 문 쪽을 향해 필광이 무릎을 꿇었다.
"어… 어머니, 감사합니다. 어머님 말씀대로 이 나쁜 자식, 이 바닥을 떠나겠사옵니다, 어머니!"
고개를 숙여 외치는 필광이 멈췄던 눈물을 다시 흘렸다.
정말로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손에 쥔 것이 없었기 때문에 항상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로 미련없이 저잣거리를 떠나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고 싶었다.
필광이 고개를 떨군 채 흐느끼고 있을 때 덜컹 문이 열렸다.
필광이 눈물을 닦고 고개를 쳐들었는데 흑의사내 한 명이 떡 버티고 섰다. 자욱한 아연에 이마를 찌푸리던 흑의사내가 바닥에 큰대자로 뻗어 완전히 아편에 취한 부하들을 보며 욕설을 뱉었다.
"이런 개자식들, 꼬라지 좀 봐라. 모두 일어나 새끼들아!"
흑의사내가 닥치는 대로 걷어찼다. 거센 발길질에 아편에 취해 쓰러져 있던 부하들이 꿈틀거리며 몸을 세우려 했지만 자꾸 넘어졌고, 흑의사내는 더욱 난폭해졌다.
"똑바로 서지 못해, 패 죽일 놈들아!"
그는 의자 한 개를 들어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찍었고, 피를 흘리며 필광의 부하들이 겨우 몸을 바로 세웠다.
"네놈은 누구… 커억!"
필광이 덤벼들다 말고 흑의사내의 주먹에 나가떨어졌다.
필광이 넘어지면서 능씨로부터 받은 육채보환주가 바닥에 깔렸다.
흑의사내의 두 눈이 커지더니 한 개를 주워 들고 놀라 더듬거렸다.
"아니, 이건 육채보환주!"
와락!
겨우 일어선 필광의 멱살을 거머쥐고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물었다.
"이것, 어디서 났어?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너 오늘 내 손에 뒈질 줄 알아?"
코피를 흘리며 필광이 말했다.
"어… 어머니께서 주신 것입니다. 맘 잡고 살라고."
"어머니? 네놈에게 무슨 어머니가 있어? 이 새끼 봐라? 똑바로 말 못해!"
"지… 진짭니다. 마님께서……."
"마님이라니, 조금 전 나간 그 계집 말이야?"
"예."
"마님 좋아한다, 개자식."
흑의사내는 주먹으로 필광의 복부를 갈겼다.
필광은 바닥을 나뒹굴었고, 흑의사내는 바닥에 떨어진 육채보환주를 주워 자신의 주머니에 담았다.
"이건 압수다. 감히 그 계집년이 어디서 이런 것이 났단 말이냐? 건방진 년!"
자신의 품속에 넣고 의자를 끌어당겨 앉더니 필광을 비롯한 사내들을 향해 말했다.
"그 계집년이 무슨 말을 했느냐?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모두 토해라! 만약 날 속였다가는 모가지가 성치 못할 것이다!"
흑의사내의 악독한 시선에 필광을 비롯한 부하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경험에 비춰 눈앞의 흑의사내 같은 부류는 사람의 목숨을 별로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필광은 자칫 내년 오늘이 자신의 제삿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눈앞으로 조금 전 다녀간 능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능씨는 자신에게 어머니라는 의미와 존재를 새삼 깨닫게 해주고 뭉클한 인간의 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필광은 흑의사내에게 능씨와 나눴던 얘기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별말씀 없었습니다."
거짓말을 할 때는 당당해야 한다. 동천몽의 말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양심을 속이면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드러난다고 했다. 그러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때는 더욱 어깨를 펴고 당당히 말해야지 그나마 상대를 속일 수 있다고 했다.
"너 이 새끼, 그걸 내가 믿을 것이라고 지금 헛소리하는 거야? 똑바로 말 안 해? 그 계집년이 육채보환주를 그냥 줬단 말이야?"
"아닙니다. 저잣거리에서 상인들을 괴롭히는 것은 나쁜 일이므로 맘 고쳐먹고 새 터전을 잡으라며 준 돈입니다."
"돈보다 그 계집이 와서 무엇을 물었느냐니까? 이 개자식아!"
흑의사내가 버럭 소릴 지르며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흠칫!
가슴이 철렁했다. 저 검이 뽑히면 자신의 목쯤은 쉽게 잘려 나갈 것이다.
"모조리 잘라주지."
시퍼런 검날이 조금 빠져나왔다.
목숨은 하나뿐이다. 모가지가 한 번 잘리면 다시 붙일 수도 없고 그것으로 끝이다. 자신의 인생이 여기서 끝난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쫙 빠지게 인생을 살아보지 못했다. 이제 겨우 형천파의 두목이 되어 즐거운 삶이 막 시작되려는데 여기서 죽는다면 억울해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안 되겠구먼. 이 새끼를……."
스윽!
검이 반쯤 뽑혔다. 반도 채 뽑히지 않았는데 시퍼런 살기가 눈앞을 가득 메웠다. 저 무시무시한 검이 날아온다고 생각하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마… 말할 테니 제발 그 검을 뽑지 말아주십시오!"
"진작 그렇게 나와야지. 말해봐."
"우… 우선 그 검부터 집어넣어 주십시오. 너무 떨려 말이 안 나옵니다."
"그 새끼, 생긴 것보다 은근히 겁이 많네. 알았어, 인마."
탁!
검을 힘차게 꽂았다.
"자, 말해봐. 그 계집이 와서 무엇을 묻고 사라졌는지."
필광이 침을 꿀꺽 삼켰다.
살아야 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했다. 어차피 말 좀 해준다고 해서 나쁠 것은 하나도 없었다.
흑의사내로부터 보고를 받은 동천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보고 그대로라면 동천몽은 포달랍궁으로 잡혀간 것이다.
"이건 심각한 일입니다. 그 아이들이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으니 거의 정확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여추량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때 발자국 소리가 급하게 들리더니 한 인물이 들어섰다.
"서장에서 온 전서구입니다."
동천비가 둘둘 말린 조그만 서찰을 폈다. 겉보기에는 손가락 절반 굵기밖에 되지 않았는데 워낙 단단히 말려서 펼치자 큰 서찰 한 장이 되었다.
동천비가 서찰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서찰을 읽어가는 동천비의 얼굴이 점차 환해졌다. 숨죽이며 눈치를 살피던 여추량이 동천비가 서찰에서 시선을 떼자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무슨……?"
"그쪽에서 우리 제의를 받아들이겠다고 하는군."
동천비의 심각해진 얼굴이 풀어졌다. 그리고 입가로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돈의 위력은 절대적이다. 문제는 돈을 어떻게 쓰느냐이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돈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은 다르다. 돈이면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을 기어코 증명하고야 말 것이다.
"전서구를 띄워라."
"내용은?"
"우리 제의에 응해준 것을 고맙게 생각하며 혈맹의 징표로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이다. 지금부터 내가 불러줄 테니 그대로 써서 전하거라."
동천비가 잠시 고개를 들고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어느새 반짝이는 별들로 무성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이는 별빛이었다. 저 반짝이는 별빛처럼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세상에 반짝이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떨려온다.
길게 숨을 내쉰 동천비가 전서구 내용을 말해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면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연꽃이 막 하나둘 피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산의 상징이자 덕을 높이 칭송받는 연꽃을 보며 능씨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필광은 포달랍궁 복장의 승려들에게 동천몽이 끌려갔다 했지만 확실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능씨에게는 그것조차 큰 희망이며 단서였다.
"부르셨습니까?"
상도가 다가와 그녀의 등 뒤에 섰다.
능씨가 물위에 분홍빛 꽃망울을 터뜨리는 있는 연꽃을 보며 말했다.
"포달랍궁에 다녀와야겠구나."
천천히 능씨가 돌아섰다.
상도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다녀와야겠다."
"다녀오겠사옵니다."
"고맙구나."
능씨가 소매 춤에서 묵직한 주머니 한 개를 꺼내 내밀었다. 상도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두 손으로 주머니를 받았다.
"집 나가면 고생이다. 더구나 주머니 사정이 열악하면 행동이 움츠러드는 법. 넉넉하게 준비했으니 아끼지 말고 쓰거라."
"감사하옵니다."
"제발 그곳에 몽이 녀석이 있었으면 좋겠구나."
"곧바로 다녀오겠사옵니다."
"다시 말하지만 누구의 눈에 띄어서도 안 된다. 몸조심하거라."
"그럼."
상도가 가볍게 포권을 해 보이고 몸을 감췄다.
능씨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도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말썽을 피우긴 했지만 워낙 영악하고 눈치가 빨라 어지간한 위험쯤은 충분히 헤쳐 나갈 능력을 지닌 아이다. 하지만 여느 부모와 다름없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능씨가 움직였다. 오랜만에 인근에 있는 여풍사에 가 불공을 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대법왕에 즉위하고 단행한 직제 개편이 대대적이었다면 이번 개편은 일부였다. 반란으로 공석이 된 천장금왕의 위(位)와 대력 선사를 대신할 역량있는 인물과 부족한 천룡구십구불을 채우는 일이었다.
작은 개편이지만 자리의 중요성을 인식한 동천몽은 원로들을 비롯해 궁내 의견을 착실히 수렴했다. 출가인에게 있어 최고의 덕목은 도덕성이다. 하지만 그에 뒤떨어지지 않는 조건이 있으니, 바로 무공이었다. 포달랍궁은 무공을 깨우침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무찰이기 때문이었다.
"십이법신 중 수석인 고굉 선사를 천장금왕 자리에 앉히잔 말이냐?"
삼대법왕과 동천몽이 원탁을 놓고 앉아 얘길 나누고 있었다.
천검은왕이 말했다.
"고굉 선사는 연륜도 저희들보다 십여 년 위이며 사형뻘이 되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 역시 장법에 능하고 인품 또한 나무랄 데 없다는 것이 궁내의 대체적인 평입니다."
"모두들 같은 생각이더냐?"
동천몽이 삼대법왕을 쳐다보았다. 천검은왕 말고 다른 두 사람의 생각까지 같다고 여길 수는 없었다. 말은 하지 않지만 고굉 선사를 수석 법왕 자리에 앉히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길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말하거라. 난 너희들 의견을 철저히 따를 것이니."
"아니옵니다. 은왕 사형의 말씀에 소승들 또한 공감하옵니다."
"진짜? 나중에 뒷소리하지 말고 장부답게 이 자리에서 할 말 있으면 해봐."
"우린 대법왕님의 결정에 무조건 따를 것이옵니다."
천지철왕이 고개 숙여 말했다.
일목에게 죽은 천지 철왕을 대신해 그와 같은 항렬인 십이법신중 제 오장로인 대해선사를 임명했다.
동천몽이 다시 한 번 세 사람을 훑어보며 말했다.
"좋다. 너희들 의견이 그렇다면 고굉을 금왕의 자리에 앉히겠다. 그럼 천룡구십구불의 수장인 대력을 대신할 인물은 누가 좋겠느냐?"
천룡구십구불은 포달랍궁의 최정예다.
이번 천장금왕의 거사에 그들이 모두 참여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다행히 대력이 비밀 누출을 우려해 평소 자신과 친분이 두터운 수하들만 골라 움직였기 때문에 큰 화를 미리 막을 수 있었다. 그래서 역대 대법왕들은 천룡구십구불의 수석 자리에는 항상 자신이 가장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을 앉혔다.
"대법왕님께서 결정하소서. 그 일은 소승들이 관여할 자리가 아니옵니다."
자신들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천룡구십구불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동천몽의 뜻에 무조건 따르고 나아가 가장 믿음이 가는 사람을 앉히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천룡구십구불의 수석 자리는 당분간 공백으로 두겠다."
몇 명 눈여겨본 인물들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워낙 중요한 자리인만큼 시간을 두고 결정하고 싶었다.
"나머지 소속 기관들의 수장은 그대들의 의견을 전폭 따르겠다. 눈치 볼 것 없이 말해보아라."
처음에는 눈치만 보고 주저하던 세 사람이 본격적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단순히 사람만 천거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적당한지 그 이유와 당위성을 역설했다.
포달랍궁에서 무려 백 년을 보낸 고승들이다. 하루 이틀 관찰하여 내린 평가가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 거론되었던 어떤 자리보다 중요한 직위가 있사옵니다."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자 천검은왕이 정색하고 말했다.
"대법왕님을 시위하고 수발을 들 대법위입니다."
얼마 전까지 대법위는 팔용이었다. 갑자기 팔용의 얼굴이 떠오르며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는 지금 수라옥에 갇혀 있다.
"대법위 문제 또한 본왕이 알아서 하겠다."
"한 가지 더 있사옵니다."
동천몽이 고개를 들어 천검은왕을 바라보았다.
천검은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목이란 자 말입니다."
"일목! 그 눈 하나밖에 없는 놈 말이냐? 그놈이 아직 안 죽었단 말이냐?"
"대법왕님의 지시대로 한 끼의 음식도 주지 않았는데 아직까지 살아 있습니다."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만경이 죽고 곧바로 체포하여 수라옥에 가두었다. 일체 음식도 주지 말라고 했는데 무려 삼년이 넘도록 살아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 그자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정말이냐?"
"아마 뇌옥의 이끼와 물로 연명한 것 같사옵니다. 아무튼 하도 생존 능력이 불가사의하여 문득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감히 소승의 독단으로 회유를 해보았습니다."
"호오! 그랬더니?"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사옵니다.
"이유가 뭐야?"
"자신은 장부이기 때문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장부는 오로지 한 명의 주인을 목숨으로 보좌하다 죽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불사이군이라는 얘기 아냐?"
순간 삼대법왕의 눈이 커졌다. 동천몽이 사자성어를 쓴 것이다. 그것도 거침없이 썼기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 법왕의 시선에 담긴 의미를 모르지 않는 동천몽이 헛기침을 했다.
"허험!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말거라. 나, 아주 책 안 본 것 아니다."
"소… 송구하옵니다. 용서하소서."
천검은왕이 고개를 숙였다.
"죽었으면 죽었지 두 명의 주인을 섬기지 않겠다고? 크하하하! 그 자식, 눈깔 하나 있는 놈치곤 뼈대가 있구나."
"어떻게 할까요? 그냥 고통스럽지 않게 죽여 버릴까요?"
동천몽이 천검은왕을 빤히 쳐다보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서 죽여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오래 살아 있는 것도 자신의 주인인 만경 사숙에 대한 배신이라면서 빨리 목을 베어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죽고 싶은 놈이 이끼와 물은 왜 먹고 버텨?"
동천몽이 눈을 빛냈다. 죽고 싶었으면 이끼와 물을 먹지 말았어야 정상인 것이다.
엄지손톱만 한 두께의 쇠사슬이 손목과 발목을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만강환삭은 쇠이지만 질기다. 그래서 특별한 보검이 아니면 잘리지 않는다. 일목은 벌써 이 년이 넘도록 손발이 꽁꽁 묶인 채 수라옥 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무공까지 폐쇄된 몸으로 차가운 수라옥 바닥에서 이 년을 묶여 있는데도 그의 하나뿐인 두 눈은 번갯불을 토하고 있었다. 더구나 음식 한 끼를 주지 않았는데도 힘들어 보이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저벅! 저벅!
하나뿐인 눈을 감고 있는 일목의 귓가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보나마나 사대법왕일 것이다. 근래에 들어 돌아가면서 찾아와 회유를 했다. 하지만 죽어도 자신은 그들과 손을 잡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가슴속에는 오직 죽은 만경 말고는 다른 사람은 결코 담을 수 없었다.
일목은 결가부좌한 채 더욱 눈을 질근 감았다.
저벅! 저벅!
발자국 소리를 보아 두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보나마나 한 명씩 안 되니 이제 두 명이 떼거리로 찾아와 설득하려는 것이 뻔했다.
'웃기는 놈들!'
일목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배교의 후예는 절대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 그게 배교의 전통이다. 보나마나 오늘도 대법왕께 아뢰어 목숨을 부지토록 해줄 테니 포달랍궁의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유혹할 것이다. 하지만 턱도 없는 소리다. 불사이군, 장부는 죽을지언정 두 주군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배교의 율법은 가르치고 있었다.
척!
발걸음이 자신이 갇혀 있는 쇠창살 앞에서 멈춘다. 안 봐도 뻔하다. 지금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일목은 더욱 어깨에 힘을 주고 당당한 자세를 취했다.
"네 이놈, 당장 눈을 뜨지 못하겠느냐?"
목소리를 보아 사대법왕 중 가장 성질 더러운 천검은왕이다. 천검은왕에게는 몇 번 쥐어박힌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일목은 눈을 떴다. 괜히 또다시 맞으면 자신만 손해다.
흠칫!
천검은왕만 온 줄 알았는데 곁에 동천몽이 서 있었다.
"이놈, 대법왕님을 뵈었으면 당장 예를 차리지 못할까?!"
천검은왕이 버럭 소릴 질렀다.
일목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보… 보다시피 이렇게 묶여 있는데 어떻게 예를 차리란 말이오?"
"저… 저놈이 어디서 말대꾸를."
그 순간 동천몽이 나직한 목소리로 천검은왕을 불렀다.
"은왕."
"하명하소서, 대법왕이시여."
"풀어주어라."
"예옛?"
천검은왕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동천몽이 다시 말했다.
"당장 풀어주어라."
"저 패 죽일 놈은 만경의 부하로서 대법왕을 시해하려 했던 흉악무도한 대죄인이옵니다."
"본 궁의 최대 덕목이 뭐더냐?"
"그야 물론 자비……."
"풀어주어라."
동천몽의 표정은 엄숙하였다. 천검은왕이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쇠창살로 된 잠긴 문을 열고 일목의 온몸을 묶고 있는 만강환삭을 풀었다.
촤라락!
만강환삭이 풀렸는데도 일목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창살 밖에 서 있는 동천몽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 년이 넘도록 묶여 있었으니 혼자 힘으로는 어려울 것이다. 어서 부축하여 일으켜 세워주거라."
천검은왕이 일목을 부축했다. 갑자기 일어나자 일목은 똑바로 서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현기증이 일어나면서 동굴이 거꾸로 보인다. 적응을 위해 하나뿐인 눈을 깜빡거리며 한참을 서 있던 일목이 부축하고 있는 천검은왕의 손을 벗어났다.
"일목이라 했더냐?"
"예… 예, 대법왕님."
자신도 모르게 대법왕님이란 말이 나오자 그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동천몽이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
"얼마나 힘들었느냐? 본 법왕을 많이 원망했겠지. 분명히 말하지만 널 이렇게 고생시킨 것은 네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니라. 죄는 미워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느니라."
"아… 압니다."
"몸이 많이 야위었구나. 만경 이외에는 누구도 섬기지 않겠다는 꿋꿋한 너의 의지에 본왕은 솔직히 감복했다. 사내대장부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불사이군의 정신을 가져야지. 비록 한때 내 반대편에 섰지만 너의 그 충심을 본 법왕은 존중한다. 그동안 고생 많았느니라."
슉!
동천몽이 오른손을 뻗자 네 가닥 지력이 날아갔다.
파파파팍!
혈도를 격중당한 일목의 전신이 경련했다. 폐지된 무공을 동천몽이 회복시켜 준 것이었다. 일목은 물론 천검은왕까지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석방도 이해할 수 없는데 무공까지 회복시켜 주다니,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 대법왕님!"
동천몽은 천검은왕의 놀란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운기를 해보아라."
일목이 가볍게 운기를 해보았다. 처음에는 반응이 없더니 두어 번 더 구결을 따라 일으키자 단전에서 진기가 꿈틀거린다. 확실히 무공이 회복된 것이다.
"어떠냐?"
일목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더듬거렸다.
"되… 됩니다."
"너 가고 싶은 대로 가거라. 이제 넌 자유의 몸이니라. 어딜 가도 막지 않겠다."
일목이 벙찐 표정으로 동천몽을 쳐다보았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려 했고, 심지어 사대법왕 중 한 명을 죽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렇게 무공까지 회복시켜 풀어준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 같으면 절대 이렇게 살려주지 않는다. 자신이 대법왕이라면 갈기갈기 찢어 죽였을 것이다. 절대 용서해서도 안 되고, 용서할 수도 없다.
"뭣 하느냐? 어서 가보거라. 네가 어디로 가든 절대 붙잡거나 가로막지 않겠다. 듣자 하니 배교의 후예라던데, 문으로 돌아가도 좋고, 어디로 돌아가든 네 맘이다."
"저… 정말 가도 되는 거요?"
동천몽이 자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럼!"
"진짜지요?"
"그렇다니까? 얼른 가."
여전히 믿겨지지 않는 듯 눈을 깜박거리던 일목이 다시 물었다.
"나중에 다른 소리 하기 없기요?"
"아미타불! 본 법왕의 명예를 걸고 자신있게 말한다. 가거라."
하나뿐인 일목의 눈에서 묘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녹광에 가까운 광채는 섬뜩할 만큼 사악했다.
천검은왕이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배교의 환혈심법을 끌어올리면 지금과 같은 눈빛이 뿜어진다. 극성에 이르면 눈빛만으로도 상대의 이성을 제압할 만큼 사악한 마공이었다.
여차하면 살수를 쓰기 위해 잔뜩 양손에 내력을 끌어올리고 있는데 다시 녹광이 사라지고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에 따라 천검은왕도 끌어올렸던 내력을 다시 풀었다.
퍼억!
갑자기 일목이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천검은왕뿐만 아니라 동천몽까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배교의 인물들은 자신이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절대 무릎을 꿇지 않는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라니까 무릎은 왜 꿇고 그러느냐?"
일목이 고개를 쳐들어 말했다.
"날 거두어주시오. 난 갈 곳도 없고, 솔직히 말하면 대법왕님께 감동했습니다."
동천몽의 두 눈이 야릇하게 빛났다.
일목이 거듭 소리쳐 말했다.
"저 같으면 절대 안 살려주거든요. 그런데 대법왕님은 저 같이 나쁜 놈을 무공까지 회복시켜 풀어주시다니, 정녕 위대하십니다. 괜찮으시다면 소인을 거두어주십시오. 스스로 뭔가를 알아서 하는 능력은 떨어지지만 시키는 명령은 잘 듣습니다. 곁에 두시면 요긴하게 쓰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건 안 될 말이다. 듣자 하니 너도 일문의 주인이라는데, 어떻게 본 법왕의 수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더구나 수하가 되려면 머릴 깎아야 하고."
"머리, 깎겠습니다."
"……."
"까짓것 깎지요, 뭐."
"중이 되겠다는 것이냐?"
"못 될 것도 없지요. 어서 중으로 만들어주십시오. 머리도 깎고 법의도 주십시오."
동천몽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후회 않겠느냐? 중이 되면 제약이 많이 따른다. 우선 고기를 먹지 못하고 술은 더욱 먹지 못하며……."
"전 원래부터 고기를 싫어했고, 술은 한 잔만 해도 얼굴이 빨개집니다."
"중이 되면 성질이 나도 참아야 하고 가급적 욕도 자제해야 하며 어지간한 상대의 잘못은 눈감아주어야 하는데 너의 성질로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일목이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좀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노력하겠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정말 후회 않겠느냐?"
"전 후회할 일은 하지 않습니다. 평생 대법왕님을 모시며 살다 죽고 싶습니다."
"너의 뜻이 정히 그렇다면 나 또한 기꺼이 수용하겠다. 그러나 언제든지 싫으면 떠나도 된다."
"우린 한 번 약속하면 죽어도 밀고 나갑니다. 두고 보시면 알 것입니다."
일목의 표정에는 진심으로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열의가 피어나고 있었다.
지켜보던 천검은왕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놀라운 분이시다.'
자신뿐만 아니라 동천몽을 알고 있는 사람 모두가 그를 구제불능의 돌대가리로 알고 있었다. 천장금왕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도 동천몽 정도면 충분히 자신있다고 여겼기 때문이고.
동천몽이 비록 대법왕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를 존경하는 마음보다는 아래로 내려다보는 무시가 짙게 깔려 있었다.
그런데 환상루의 습격 사건을 천장금왕의 짓으로 읽어낸 안목과 계산은 그런 인식을 일거에 뒤집어 버렸다. 그 누구도 동천몽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고 받들던 천장금왕이 암살 음모를 꾸몄으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그런데 동천몽은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계산하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흉수를 읽고 반란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일목을 감화시킨다. 지난 이 년 동안 자신들은 일목의 감정만 자극했을 뿐, 그로부터 어떤 협조나 충성의 다짐 따위는 전혀 얻어내지 못했다. 워낙 일목의 재능이 아까웠기 때문에 포섭하여 포달랍궁의 인물로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동천몽은 너무도 간단히 그를 무릎 꿇리고 있는 것이다.
"은왕, 본인이 원하니 당장 일목의 머리를 깎고 법의를 입혀라."
천검은왕이 고개 숙여 대답했다.
"대법왕님의 명을 따르나이다. 따르거라."
일목이 천검은왕의 뒤를 따라 나섰다.
두 사람이 실내를 나가자 동천몽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일목은 단순하고 우직하다. 그런 부류는 절대 강압적으로 해결하려 들어서는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쪽에서 단순하고 우직하게 접근해야 한다. 무식은 무식에 약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슬쩍 인간적인 감동을 섞으면 금상첨화이다. 이 모든 건 부친이 아랫사람을 다스릴 때 눈여겨봐 놨던 용인술이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이곳도 봄이 오고 있는지 바람이 훈훈하다. 대설산의 눈이 유난히 반짝거리는 건 봄기운에 녹아 흘러내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백궁을 벗어난 동천몽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나가던 제자들이 동천몽을 발견하고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엄숙히 예를 취했다. 동천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며 경내를 벗어났다.
오솔길에는 눈이 아직 쌓여 있었고 간간이 짐승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눈을 밟는 뽀드득 소리가 주위를 울리고, 산달 한 마리가 인기척에 부리나케 바위틈으로 숨어들었다.
이 다경 가까이 산을 오른 동천몽이 커다란 바위에 올라섰다. 십여 장 높이의 수직 바위에서 내려다보는 포달랍궁은 흰 눈 속에 고요히 잠겨 있었다.
지난 일천 년 동안 오직 불도에만 정진했던 은둔의 대가람.
중원의 피바람도 결코 이곳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몇 번 중원의 세력들이 침략을 감행했지만 모두 처절한 패배의 쓴맛을 다시며 물러나야 했던 절대 무찰.
침략하지 않으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잠시 포달랍궁을 내려다보던 동천몽은 다시 산길을 올랐다. 반 식경쯤 오르자 조그만 토굴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입구에 마른 낙엽과 풀이 깔려 있는 것이 사람이 기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허험!"
동천몽이 기침으로 인기척을 냈다.
그러자 대뜸 안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어떤 새끼냐? 나 지금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거의 깨달아가고 있으니 방해하지 말고 꺼져 줄래?"
동천몽이 토굴을 보며 말했다.
"그게 정말이오? 인간이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얻었단 말이오?"
"입을 비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하라고 했다. 깨우쳤다는 것이 아니라 절반쯤 깨우쳐 가고 있다고 했다."
"그 절반이라도 좀 가르쳐 주시오. 인간은 도대체 왜 사는 것이오?"
"아미타불! 그거, 별것 아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전혀 없다. 태어났으니까 사는 것이다. 생각해 보거라. 태어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살겠느냐?"
"호오! 듣고 보니 과연 그렇구려."
"너도 나도 태어나지 않았다면 살 필요가 없지? 내 말이 틀리냐?"
"전혀. 맞소이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살 필요가 없다. 가히 누구도 깨우치지 못한 진리외다."
"그런데 넌 누구냐? 감히 나 덕배에게 말을 함부로 거는 걸 보니 보통 배짱이 아닌 것 같은데?"
"상천감초라 하오."
"헉!"
다급히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토굴에서 한 노승이 뛰어나왔다.
마치 비렁뱅이를 방불케 하는 낡은 법의를 걸친 오 척 단구의 왜소한 노승은 동천몽을 보자 기겁하며 그 자리에 엎드렸다.
"소… 소승 덕배가 대법왕님을 뵈오이다."
너무나 당황한 듯 고개를 쳐들지 못했다.
덕배 선사(德培禪師). 올해 세수 아흔다섯으로 얼마 전에 죽은 천장금왕과 같은 항렬이었다. 성격이 워낙 다혈질이어서 사형제 간에도 쉽게 어울리지 못했고, 특히 이십 년 전 자신의 발낭(鉢囊)을 훔쳐 간 합기채라는 산적 집단 일백 명을 도륙하여 서장을 발칵 뒤집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