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피[血]의 역습(逆襲)
동천몽은 바보가 아니었고 돌대가리는 더욱 아니었다. 살기 위해 바보가 된 것이다. 자신은 동천몽을 구제불능의 돌대가리로 보았다. 그래서 더욱 기회라고 여기고 이번 거사를 획책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까지 완벽하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
"대법왕님이시여."
"말해라."
"어떻게 소승이 반란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사옵니까?"
동천몽이 잔잔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창문 너머를 향해 말했다.
"은왕, 도저히 안 되겠다. 술 한 병 구해오너라."
마당으로부터 대답이 들려왔다.
"명을 받사옵니다."
"어떻게 알았냐고?"
동천몽이 불 꺼진 초를 향해 오른손 검지를 뻗었다.
쉬익!
손끝에서 한가닥 양강지력이 뻗어나가더니 팟, 하는 소리와 더불어 초에 불이 붙었다.
'지옥지(地獄指).'
천장금왕이 숨을 들이마셨다. 지옥금이 극성에 이르면 지법으로 변형이 가능하고 열기를 일으켜 불을 피울 수가 있다. 하지만 말로만 전해 들었을 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지금 동천몽이 시전해 보인 것이다. 결국 동천몽은 자신의 무공을 철저하게 숨겼다는 얘기다.
불빛이 실내를 밝혔고, 천장금왕은 결가부좌한 채 염주를 돌리고 있었다.
털썩!
그때까지 서 있던 동천몽 또한 마주 결가부좌했다.
"어떻게 네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았냐고 물었더냐?"
동천몽이 잔잔하게 웃었다.
"별것 아니다. 알고 보면 아주 간단하지. 내가 환상루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팔용과 나뿐이다. 맞지?"
동천몽이 정색하고 물었다.
"그런데 넌 싸움이 끝나자마자 환상루로 달려왔다. 이상하지 않느냐? 어떻게 내가 환상루에 있는 것을 궁에 있었던 네가 알 수 있단 말이냐?"
천장금왕이 흠칫했다.
자신은 전혀 생각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인 행동이 치명타가 될 줄이야.
"네가 환상루로 날 찾아온 것은 필시 팔용이 때문일 것이다. 그건 너희 두 사람이 한패라는 것 아니겠느냐? 즉, 팔용이 날 환상루로 데려간 것은 미리 그곳에 함정을 파놓았다는 의미겠지. 그리고 나중에 심부름 보낸 팔용은 객점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자칫하다간 자신도 다칠 수가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게 될 경우 내 의심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들어가기 싫다는 팔용을 억지로 설득해 밀어 넣었겠지?"
화악!
천장금왕의 눈이 더욱 커졌다.
단 한마디도 틀리지 않는 사실이었다. 팔용은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겠느냐고 애원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금방 눈치를 챈다면서 별일 없을 테니 들어가라고 설득하고, 그래도 거부를 하자 위협까지 해서 가까스로 밀어 넣었다.
"하… 하오시면 몸은? 피를 토하고 거동이 불편할 만큼 부상을 입으셨잖습니까? 그래서 백상거를 이용해 이동했잖습니까?"
동천몽이 씨익 웃었다.
"입으로 피를 토하는 건 아주 쉬워. 뒷골목 대장 노릇을 하다 보면 왕왕 상인들을 협박해야 할 때가 있거든. 그때 목구멍을 강하게 자극하여 가래를 뱉으면 피가 섞여 나온다. 그것도 자주 하다 보니 이제는 식은 죽 먹기지."
"온몸에 든 멍은?"
"단기토혈이라는 게 있다. 넌 모를 것이다. 대법왕만 배울 수 있는 걸병광우철포공의 초식 중 하나이니까. 기를 끌어올려 몸 곳곳에 피가 뭉친 것처럼 보이는 일종의 속임수다."
"왜 그렇게 부상을 입은 것처럼 위장했는지요?"
"내가 자객들 따위에 부상이나 입고 쩔쩔맬 인간으로 보였더냐?"
동천몽이 피식 웃었다.
"넌 날 너무 몰랐구나. 하긴 그것이 너의 실수겠지. 어쨌든 질문에 계속 답해주지. 피를 흘리고 멍을 들게 만든 건 네 욕심을 부채질하기 위해서였다."
"욕심?"
"내가 객점에서 크게 다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면 아마 넌 반란을 장기전으로 끌고 갔을 것이다. 신중하게 움직이면서 암중에서 제자들을 선동하고 날 모함하며 함정으로 빠뜨리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겠지. 그러다 보면 자칫 본 궁은 두 개로 쪼개질 것이고."
"음!"
천장금왕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의 말대로 만약 동천몽의 상태가 심하지 않았다면 좀 더 시간을 갖고 기회를 노리려고 했다.
동천몽이 계속 말했다.
"그래서 난 서둘러 승부를 보기 위해 중상을 입은 척했다. 중상을 입었으니 넌 당연히 이 기회에 확실하게 끝장을 보려고 할 것이다. 내 예상은 적중했다. 넌 이 기회가 아니면 쉽지 않다고 여기고 곧바로 밀어붙이더구나."
천장금왕은 침묵했다. 빤한 눈으로 동천몽을 쳐다만 보았다. 입이 막힌 건지, 아니면 너무 충격을 받아 정신이 혼미한 건지 눈만 깜빡거렸다.
백 년을 살아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이제 열 아홉이 조금 넘은 동천몽에게 철저히 농락당하고 역습을 당한 것이다.
"넌 날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느냐? 지난 삼 년여 겪었다고 다 안다고 여긴 모양인데 웃기는 소리다. 이 세상에서 날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알겠지만 난 소주제일의 조직, 형천파의 두목이다. 저잣거리 패거리 두목이라고 개나 소나 하는 줄 아느냐? 조직의 크고 작음만 문제일 뿐, 한 집단의 수장쯤 되려면 이것 없이는 안 되는 법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때렸다.
"머리는 괴상한 물건이다. 책을 읽는 능력 다르고 잔머리를 굴리는 능력 다르고 도둑질하는 능력 다르다. 머리가 똑똑하다고 해서 학문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고, 나쁘다고 해서 완전히 꼴통이 아니라는 얘기지."
'무섭다. 진정 무서운 분이다!'
만경이 있을 때까지만 해도 반란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만경이 쉽게 제거되자 그때부터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장 강력한 적수였던 만경이 사라진 포달랍궁에서 이제 자신이 경계해야 할 인물은 없었다. 특히 그를 더욱 유혹한 것은 새로 즉위한 대법왕이 너무 돌대가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얼마든지 뒤엎을 자신이 있었다.
"날 허수아비로 봤겠지? 내가 워낙 꼴통 노릇을 하니 나 정도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겠지?"
"대법왕이시여, 술을 구해왔나이다."
문이 열리고 천검은왕이 술이 담긴 호리병 한 개를 건네고 사라졌다.
뽕!
마개를 이빨로 뽑은 동천몽이 그대로 병째 입으로 털어 넣었다.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한참을 마시던 동천몽이 커어, 하며 트림을 하고 소매 춤으로 입가를 슥 닦았다.
"그들은 누구냐?"
천장금왕이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일광엽(日光獵). 강호에서는 햇빛사냥꾼이라 불리는 자객 집단입니다."
"햇빛사냥꾼?"
동천몽이 눈을 좁혀 떴다.
기억이 있었다. 물론 아버지로부터였는데, 지금까지 어떤 자객 집단보다 뛰어나며 철저히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고 했다. 일파의 지존 급 아니면 아무리 거액을 주어도 청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명인(名人)들만을 사냥하는 최고의 자객들이라 했다. 십여 년 전 화산 장문인이 그들에게 당했다. 곧바로 화산은 복수에 나섰지만 그들의 총단은 물론 정체에 대해 아는 바 없어 끝내 포기했다고 들었다.
"대법왕이시여."
밖으로부터 천지철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각을 기습했던 자들을 모두 사살했사옵니다. 수뇌는 대력과 그를 따르던 천룡구십구불 중 일부였습니다."
천장금왕의 눈이 조용히 감겼다.
투투투!
염주를 굴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 동천몽이 쳐놓은 덫에 완벽하게 빠져든 것이었다.
"한 모금 하겠느냐?"
동천몽이 휙 술병을 집어 던졌다.
천장금왕은 얼떨결에 받아 들며 동천몽을 깊숙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비록 술을 먹어보지는 않았지만 술이 갖고 있는 여러 의미 중 한 가지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술은 사내들 간에 두터운 우정을 쌓게 하는 마력을 갖고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군신(君臣) 간에 이별을 재촉하는 의미도 담고 있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군왕은 충신을 죽일 때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어 한잔의 술을 내린다.
"감사합니다."
천장금왕이 고개를 쳐들고 술병을 입에 대었다. 술이 콸콸 소리를 내며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천장금왕이 술병을 입에서 떼고 병의 표면을 보며 말했다.
"술이라는 게 맛있는 음식이군요. 혈리홍이라고 쓰여 있는데 무슨 술이옵니까?"
"혈리홍에는 한 가지 사연이 담겨 있다. 과거 혈리(頁裡)라는 주장(酒匠)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진시황의 명을 받고 새로운 술을 개발하기에 이르렀지. 진시황은 뜨겁고 시원한 술을 빚으라고 했다."
동천몽이 천장금왕을 정면으로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혈리는 진시황이 주문한 술을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지하 주고(酒庫)에서 두문불출했다. 하지만 뜨거움과 시원함을 공존시킬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거라. 뜨거우면 뜨거운 것이고 시원하면 시원한 것이지 서로 성질이 다른 극양과 극냉의 기운을 어떻게 함께 담을 수 있겠느냐? 결국 고심 끝에 혈리는 자신의 피를 반은 솥에 끓이고 반은 얼음으로 얼려 술을 만들었다. 그래서 이름이 혈리(血裡)가 되었다. 또한 혈리홍은 임금이 사약을 내리기 직전 신하에게 하사하는 마지막 술이 되어 붉은 피를 뜻하는 홍(紅) 자가 붙었다."
동천몽의 설명은 자신을 죽이겠다는 노골적인 의미였다.
"한때 만경의 손에서 날 지키려고 했던 것만큼은 진심이라는 것을 난 알고 있다. 너의 그런 한때의 충심을 헤아려 삼 초를 양보해 주겠다."
천장금왕이 정색하며 말했다.
"마지막까지 소승을 위해 배려해 주시는 대법왕님의 자비에 그저 고개를 들 수가 없군요. 하오면 명을 받들어 삼 초를 먼저 공격하겠사옵니다."
천장금왕이 호리병을 한쪽으로 놓고는 동천몽을 깊숙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자신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돌발적인 탐욕이었다.
대법왕의 자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피를 흘리며 그 자리를 탈취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만경이 죽고 나자 돌변했다. 특히 앞서 언급했듯 동천몽을 너무 쉽게 보았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동천몽은 완전히 허수아비였다.
촤악!
천장금왕이 우장을 뻗었다. 손바닥에서 푸른 광채가 쏟아져 나왔는데, 능가대강수였다. 포달랍궁의 삼대장법 중 하나로, 극성에 이르면 산을 무너뜨린다고 전해온다.
두 사람의 거리는 채 일 장이 되지 않았다. 그 정도의 거리라면, 더구나 상대가 포달랍궁의 사대법왕 중 수장인 천장금왕이라면 그 어떤 고수라도 피하지 못한다.
퍼억!
천장금왕의 장력이 정통으로 동천몽의 앞가슴을 때렸다.
"헉!"
맞은 동천몽보다 때린 천장금왕이 더 놀라 소릴 질렀다. 동천몽이 가만히 앉아 맞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최소한 완전히 피할 수는 없어도 피하는 시늉은 할 줄 알았다.
"왜… 왜 피하지 않으시고?"
동천몽이 피식 웃었다.
"무슨 재주로 피하겠느냐? 이 거리에서."
자신은 전력을 다해 조금 전 능가대강수를 펼쳤다.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위력이라 아무리 걸병광우철포공을 익혔다고 해도 타격이 클 것이다. 아무리 무공을 숨기고 있다고 해도 자신의 능력이면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뭣 하느냐? 어서 또 공격해라."
"이초입니다."
콰아아!
조금 전보다 더 푸르다.
장력이라기보다는 푸른 돌덩이가 날아가 동천몽의 가슴을 정면으로 찍었다.
빠아악!
"후훅!"
동천몽이 신음을 흘리며 상체가 꺾여 뒷머리가 방바닥에 닿을 만큼 휘어졌다. 하지만 대나무처럼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는데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동천몽은 이를 악물었다. 필시 기혈이 넘어오려는 것을 억지로 눌러 삼키고 있을 것이다.
"훗훗! 확실히 객점의 녀석들과는 위력이 다르구나. 이제 마지막 일 초 남았다."
"대법왕님께서도 조심하소서."
천장금왕이 쌍장을 끌어올렸다. 걸치고 있는 가사가 바람을 담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자신의 모든 내력을 쌍장에 담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는 행동이었다.
휘이이이!
그의 손이 완전히 파랗게 물들었다. 장력이 아닌 손 자체가 파랗게 물들었다는 것은 능가대강수를 십이성으로 끌어올렸다는 뜻이다.
휙!
쌍장이 번득였다. 그런데 앞으로 뻗어나갈 줄 알았던 쌍장이 벼락처럼 뒤집어지더니 자신의 천령개를 찍었다.
빡!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동천몽은 놀랐다.
"아… 아미타불! 놀라시는군요."
"왜?"
"소… 소승이 눈이 멀어 태산을 알아보지 못했사옵니다. 아… 아미타불! 부디 본 궁을 서장제일에서 천하제일로 이… 끄… 끌어주… 시… 기를……."
쿵!
천장금왕은 앞으로 고꾸라지며 얼굴을 방바닥에 박은 채 숨을 거두었다. 동천몽이 무거운 시선으로 천장금왕을 쳐다보았다. 한참을 쳐다보던 동천몽이 한숨을 내쉬더니 한쪽에 서 있는 호리병을 쥐고 술을 들이켰다. 우울한 낯빛으로 엎드려 죽은 천장금왕을 쳐다보던 동천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천몽이 전각 밖으로 걸어나가자 복면인이 번개처럼 다가와 엎드렸다.
"사… 살려주십시오, 대법왕님. 소승이 잘못했습니다."
동천몽이 엎드린 복면인을 내려다보았다.
복면인은 이마를 땅에 처박고 연신 굽실거렸다.
"대자대비하신 대법왕님이여."
"뒤집어쓴 것이나 벗을래?"
확!
복면이 벗겨지고 팔용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얼굴이 창백했다.
"한 번만 봐주소서. 기회를 주시면 평생 대법왕님을 위해 살다 죽겠나이다."
와락!
팔용이 동천몽의 발목을 붙잡고 매달렸다.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팔용아."
팔용이 발목을 부여잡은 채 대답했다.
"마… 말씀하소서."
"내가 어제 말하지 않던? 비록 내가 포달랍궁의 대법왕이긴 하지만 아직 자비에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고 말이다. 아직은 열불나면 이것저것 안 가린다."
"대… 대법왕님."
"놓을래?"
"안 됩니다. 제발……."
"나, 피곤하다."
"대… 대법왕님! 어어엉!"
"이놈이 감히 뉘 앞이라고."
천검은왕이 오른손을 뻗자 팔용이 무형의 힘에 저절로 끌려갔다.
팔용이 걸어가는 동천몽을 향해 악을 썼다.
"예…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 안 되겠습니까? 그냥 가지 마시고."
"궁장(宮葬)으로 치르게나."
방에 죽어 있는 천장금왕을 향해 하는 말이다. 궁장은 대법왕이 입적했을 때만 거행하는 최고의 장례식이다.
동천몽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천검은왕이 팔용을 향해 인상을 썼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놈, 대법왕께서 네놈을 얼마나 아끼셨는데."
빠악!
천검은왕이 걷어찼다.
"으악!"
팔용이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천검은왕은 천장금왕과 다르다. 사대법왕 중, 아니, 포달랍궁에서 동천몽 다음으로 성질이 과격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가 나면 앞뒤 안 가리고 두들겨 팬다. 그래서 제자들 사이에서는 왕폭탄이라 부른다.
"너 같은 놈은 그냥 죽이면 안 돼. 일단 충분히 팬 다음에 천천히 아주 말려 죽여도 약하지."
천검은왕이 팔용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한 번씩 걷어찰 때마다 팔용은 십여 장씩 날아가 떨어졌다. 천검은왕은 번개처럼 쫓아가 땅에 떨어지려는 팔용을 걷어차기를 반복했는데, 그 모습이 꼭 제기를 차는 것 같았다.
얻어맞는 팔용을 쳐다보는 눈이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 잠시 산책을 나왔던 백쾌섬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보았다. 복면인들이 백상실을 덮치는 것에서부터 동천몽이 팔용의 뒤를 밟아 천량전으로 따라가는 것까지 모두 보았다.
물론 천리지청술을 전개하여 두 사람의 대화까지 엿들으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하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천장금왕의 반란도 충격적이었지만 백쾌섬이 놀란 것은 그 모든 것을 동천몽이 거울 보듯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철저히 제왕 수업을 받으며 성장한 자신이다. 역대 어느 대종사보다 뛰어난 자질과 지혜를 지녔다고 수많은 원로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을 아끼지 않은 자신이지만 천장금왕의 반란을 귀신같이 알아낸 동천몽의 능력에는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다.
'으음!'
혼란스러워졌다. 얼굴 생김새는 틀림없는 동오룡이 찾고자 하는 동천몽이지만 반란을 일거에 잠재운 뛰어난 역량을 봐서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자신이 아는 동천몽은 그 정도로 뛰어난 지모를 갖고 있지 못했다.
대법왕이란 사람에 흥미가 느껴진다.
동천몽을 추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강호에 저토록 무서운 두뇌의 소유자가 있다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다. 그래서 당분간 이곳에 좀 더 머물며 동천몽을 살피기로 했다.
등을 돌려 걸어가는 백쾌섬의 귓가로 팔용의 비명성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멀리 동녘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백궁의 창문 너머로 밝아오는 대설산을 쳐다보았다. 이름 아침의 대설산은 유난히 희었다. 천량전에서 돌아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잠을 자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잠이 오지 않았다. 동천몽의 머릿속에는 온통 천장금왕의 생각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야월루에서 가장 비싼 정신일도하사불주를 잔에 가득 채우고 건배를 할 때 천장금왕이 방으로 들어섰다. 취기에 젖은 부하들이 기루에 웬 중놈이냐고 호통을 쳤고, 세상 말세라고 갖은 욕을 다 퍼부었다. 이왕지사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한잔하라고 부하들이 천장금왕의 손을 잡아끌었다. 술 먹는 중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붉은 가사를 그대로 걸치고 기루를 출입하는 중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천장금왕은 귀찮게 구는 부하들을 가벼운 손짓 하나로 모두 석상으로 만들어 버리더니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통곡하듯 외쳐 말했다. 자신은 포달랍궁의 사대법왕 중 수장이며 동천몽더러 타계한 전 대법왕님의 환생자라면서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워낙 말 같지 않은 소리였기 때문에 동천몽은 싱거운 소리 그만 하고 내 부하들에게 가한 금제나 풀어달라고 했다. 천장금왕은 이후 두 번을 더 동행을 청했고, 동천몽이 일체 응하지 않자 단 일격에 마혈을 제압해 사라졌다.
그에게 강제로 끌려왔지만 사실 천장금왕은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불손하게 대한 적이 없었다. 자신 또한 그를 부하로 여기기보다는 어른으로 대우했다.
'쳐 죽일 욕망!'
인간은 누구나 꿈을 먹고 자라며 산다. 그런 의미에서 천장금왕 또한 꿈을 꾸지 말란 법은 없다. 더구나 강력한 경쟁자인 만경이 없어졌으니 자신의 천하라고 해도 좋았다. 누가 봐도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반역이었다. 문제는 사람마다 꿈을 이루어낼 그릇이 되지 못하면 그건 반드시 욕망이 된다는 것이다. 천장금왕 또한 그랬다. 반란의 수괴는 다르다. 잔인하고 교활하며 치밀하고 이중성을 가져야 하는데 그는 아무런 조건도 지니지 못했고, 그저 단순한 욕심에 움직였을 뿐이다.
부친은 말했다, 야망은 아무나 갖는 게 아니라고.
오시가 되자 거대한 행렬이 창문 너머로 나타났다. 열두 명의 제자가 천장금왕의 시신을 통나무로 엮은 상교(喪轎) 위에 메고 지나갔고, 그 뒤로 수천 명의 제자가 독경을 외며 따랐는데 그 소리에 포달랍궁이 울리고 있었다.
포달랍궁의 승려들이 죽으면 풍장을 지낸다. 홍산의 여러 봉우리나 골짜기에 그냥 가져다 버리면 시신은 짐승이나 조류의 밥이 되어 뼈만 남고, 그것마저 세월이 흐르면 삭아 흩어진다. 살아서 중생을 제도하고 죽어서는 축생을 제도한다는 부처의 정신에 철저히 따르는 것이다.
동천몽은 장사 행렬을 먹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장사 행렬이 눈앞에서 사라진 지 반 시진 만에 다시 나타났다. 시신을 짐승들이나 야생 조류들 눈에 잘 띄는 곳에 놓고 오면 그것으로 장례는 끝나는 것이었다.
"대법왕이시여."
입구에 천검은왕이 숙연한 얼굴로 서 있었다. 비록 반역을 꾀하긴 했지만 자신의 사형이니 마음이 편할 리 없을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무척 수척해진 얼굴이다.
"미시에 홍궁 앞에서 수많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팔용의 목을 벨까 하옵니다. 허락해 주소서."
동천몽이 천검은왕을 빤히 바라보았다.
불교 집단이지만 어느 산사보다 율법을 엄하게 집행하는 곳이 포달랍궁이었다. 더구나 일벌백계의 차원에서 공개로 처형을 하자는 것이 원로원의 주장이었다.
"수라옥에 가두거라."
천검은왕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습니다."
대법왕의 명령은 곧 하늘의 뜻이다. 천검은왕이 물러났다. 수라옥은 살아서 들어가지만 반드시 죽어 나오는 뇌옥이다. 물론 절대 못 나오는 곳은 아니지만 그만큼 중죄인들만 가둔다는 뜻이었다.
동천몽이 몸을 돌려 백궁을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화창한 날씨였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눈앞에서 천장금왕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쳐 죽일 늙은이 같으니!'
답답했고 뭔가 목에 탁 걸린 기분이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영탑전 앞까지 와 있었다. 영탑전은 역대 대법왕들의 유물과 신위가 모셔져 있는 성역이었다. 영탑전을 들어가 삼가 역대 조사들에게 자신의 부덕을 고하고 죽은 천장금왕의 영혼이 하늘 길을 편히 가도록 재를 지내고 싶었다.
뚝!
영탑전을 향해 두 걸음 정도 내딛던 동천몽의 발걸음이 멈췄다.
영탑전 좌측 길로부터 한 명의 백의사내가 내려오고 있었다. 여인보다 더 화려한 차림의 사내는 어제 자신이 초대했던 백쾌섬이었다. 백쾌섬이 동천몽을 발견하고 서둘러 다가오더니 정중히 포권지례를 올렸다.
"대법왕이시여,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
천장금왕의 죽음을 두고 하는 얘기였다. 그런데 천장금왕은 동천몽을 해치려고 했기 때문에 적이다. 그래서 조의를 표한다는 백쾌섬의 말은 언뜻 무례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계산법일 뿐이고, 백쾌섬의 의도는 성군일수록 설혹 반역자라 해도 뛰어난 수하의 죽음을 아파한다는 것에 착안한 위로였다. 한마디로 동천몽을 뛰어난 대법왕으로 치켜세운 것이다.
"별말씀을. 그나저나 백 형을 초대해 놓고 대접이 너무 소홀했소이다."
동천몽이 호탕하게 말했다. 상대가 우울한 인사를 한다고 해서 함께 우울해하면 자신을 좁게 본다. 오히려 환하게 표정을 바꿈으로서 상대의 허를 찌를 필요가 있었다.
백쾌섬의 눈빛이 잠깐 변했다. 예상을 뒤엎고 밝게 치고 나오는 동천몽의 행동에 놀란 것이었다.
두 사람은 금세 밝은 표정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는데, 백쾌섬을 만났으므로 하는 수 없이 영탑전을 가는 것을 포기하고 동천몽은 반월지를 향했다. 반월지는 반달 모양의 연못으로, 영탑전에서 우측으로 백여 장 떨어진 곳에 있었다. 주위로 수백 년 묵은 사류(絲柳)들이 빼곡히 둘러싸고 있어서 공부하다 지친 제자들이 휴식을 취하러 자주 찾는다.
"소생이 서장에 온 목적을 물으셨사옵니까?"
백쾌섬이 돌아보자 동천몽 또한 몸을 돌려 백쾌섬을 쳐다보았다.
백쾌섬이 잔잔한 연못의 물결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은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왔습니다."
"당연히 사람을 추적하는 직업을 가졌으니 짐작은 하고 있었소이다. 그런데 누구요? 상대가 누구기에 중원에서 이 먼 곳까지 오셨소이까?"
동천몽은 곁에 선 백쾌섬을 돌아보았다. 가까이서 본 백쾌섬은 더욱 화려했다. 나비 모양의 귀고리가 유난히 눈에 띄었고 그 밑으로 뻗어 내려간 하얀 목선이 마치 여인을 방불케 했다.
천검은왕의 말에 의하면, 이름도 없이 그냥 현상금 추적자, 또는 백쾌섬으로 불린다고 했다. 백쾌섬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눈보다 흰 백의와 번개처럼 빠른 검을 갖고 있다고 해서 붙었다고 했다.
"중원의 대부호 한 분께서… 정확히 말하면, 삼 년이 조금 넘었군요. 자식 한 명을 납치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금전을 노리는 단순 납치인 줄 알았는데 단 한 번도 흉수들로부터 어떤 거래 제의가 들어오지 않은 것을 보면 전혀 다른 목적의 납치인 듯싶습니다."
"다른 목적이라면?"
"글쎄요. 저도 아직 뭐라고 단정을 내릴 수는 없지만……."
"그 부호의 이름이 뭐요?"
"귀상(鬼商)이라 불리는 거상으로, 동오룡이란 분이지요."
그러면서 백쾌섬은 동천몽을 돌아보았다. 동천몽은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백쾌섬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니란 말인가?'
여러 가지 정황을 보아 그가 소주에서 납치된 동천몽일 가능성이 무척 높았다. 특히 생긴 것은 거의 완벽하게 닮아 있었다. 소년에서 성인이 됨으로써 신체의 변화가 있긴 했지만 틀은 확실했다.
더구나 형천파 부하들의 말에 의하면, 납치범들은 승려라고 했다. 포달랍궁 또한 사찰이므로 제대로 맞아떨어진다. 그런데 동천몽이 남의 얘기 듣듯 전혀 변화를 보이지 않았으므로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
한 대의 마차가 포장된 소주의 뒷골목을 소리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이두마차였다. 마부석에는 오십가량의 흑의인이 앉아 있었는데 죽립을 깊게 눌러쓴 탓에 생김새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마차는 포도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말 또한 뛰지 않고 한 발씩 짝을 맞추며 걸었다. 인적은 드물었고 해는 서쪽으로 조금씩 떨어져 가고 있었으며, 손님 없는 가게의 주인들은 대부분 낮잠을 자거나 옆 가게 주인과 장기 따위를 두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차는 골목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더니 한 채의 저택 앞에서 멈췄다.
저택은 거대한 청색의 철문이 성채처럼 육중하게 출입자를 가로막고 있었는데, 마차가 다가가자 안에서 보고 있던 듯 자동적으로 문이 열렸다.
그그긍!
문이 열리고 마차는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또다시 포장된 길이 나타났다. 주먹만 한 자갈을 거꾸로 박아 매끈하게 다듬어놓아 마차가 전혀 진동하지 않았고, 좌우로는 아름드리 노송과 기화이초가 빼곡히 길을 따라 가꾸어져 있었다.
마차가 저택 앞에 이르자 흑의와 백의를 걸친 두 명의 인물이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백의인은 사십 중반쯤 되어 보였는데 얼굴이 둥근데다 적당한 살집이 올랐고, 특히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언뜻 부처를 닮았다.
흑의사내는 서른 중반가량으로 약간 왜소했는데, 두 눈이 쭉 찢어 올라갔고 왼쪽 얼굴에 칼자국 흉터까지 더해져 약간 음험해 보였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죽립인이 뒤로 돌아가 마차 문을 열었다. 그러자 잠시 후 안으로부터 백의사내가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자님."
두 무사는 마차에서 내린 동천비를 향해 깍듯이 예를 취했다.
동천비가 주위를 스윽 한번 훑더니 두 사람을 빤히 보았다.
"멀리 동영에서 온 상인들과 면담이 길어지는 바람에 조금 늦었소."
"아니옵니다. 별말씀을.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동천비는 곧 두 사람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섰다.
저택 안으로 들어선 동천비는 곧바로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방은 꽤 넓었고 벽 쪽으로 서가가 있었으며, 상당한 분량의 책이 꽂혀 있었다. 방 안 곳곳에는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화공들의 그림이 공간을 메웠고, 황혼이 조금씩 들어오는 창가로 윤기 나는 자색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때 백의사내가 자릴 권했다.
동천비가 먼저 자리를 잡고 이어 백의사내와 흑의사내가 맞은편에 앉았다. 마차를 몰았던 총관 여추량은 동천비 뒤에 시립했다.
문이 열리고 이미 준비가 된 듯 두 명의 아름다운 시녀가 차를 놓고 사라졌다.
"드십시오. 대공자님께서 용정을 좋아한다고 해서 특별히 준비했습니다."
동천비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찻잔에서 올라온 향을 맡던 동천비가 조용히 말했다.
"사천 것이로군."
흑백의 두 사내가 깜짝 놀랐다. 향기로 어디에서 난 용정인지를 알아낸다는 것은 자신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도에 일가를 이뤘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차 맛은 구별해도 어느 지역에서 난 것인지까지는 쉽게 알지 못한다.
"과연!"
"다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더니… 그렇사옵니다. 사천에서 생산된 것이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용정은 사천 것이 최고이오."
동천비가 흐뭇한 표정을 짓자 두 사람의 낯빛 또한 밝아졌다. 자신들의 대접에 손님이 마땅해한다는 것은 즐거울 일이었고 무척 순조로운 징조이다.
"곡렴수로군."
화악!
두 사내의 눈빛이 다시 커졌다.
차의 산지를 알아내는 것도 충격이었는데 물의 종류까지 알아맞히자 소스라치게 놀란 것이다.
곡렴수(谷簾水)는 여산의 곡렴 폭포의 물을 말한다. 물이 깨끗하고 무색 무미하여 차 맛을 가장 잘 우려내어 천하제일다수라고도 부른다. 다도를 즐기는 사람들은 곡렴수를 뜨기 위해 수천 리 길을 마다않는다. 동천비의 표정이 만족스런 기색을 띠었다.
동천비는 천천히 차를 마셨고, 두 사람은 각자 앞에 놓인 차를 마실 생각도 않고 쳐다만 보았다. 자신들이 준비한 대접이 제대로 이뤄졌다는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운 듯했다.
탁!
동천비가 잔을 내리고 두 사람을 쳐다보았는데,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말해보시오."
그때까지 입가에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던 두 사내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제야말로 서로가 은밀히 이렇게 만나야 할 이유와 목적이 거래되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칼자국이 있는 흑의사내가 입을 열었다.
"소생 제갈팽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동천비의 시선이 제갈팽을 향했다. 그는 아무런 온기도, 감정도 들어 있지 않는 죽은 자의 눈을 갖고 있었다. 장사꾼은 거래를 할 때 상대의 관상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 제갈팽처럼 눈이 흰자위뿐이어서 마치 죽은 시신의 눈 같은 사람을 흔히 악사목(惡邪目)이라 부른다고 부친은 가르쳤다. 악사목을 가진 자들의 습성은 성품이 잔인하다. 그러나 한번 거래를 트면 평생을 간다. 누가 돈을 더 준다고 해도 옮기지 않는다.
"아시겠지만 저희 낭도채(狼道砦)는 중원오대 낭인 집단 중 한 곳입니다."
"들었네."
"수많은 전쟁을 치렀고, 심지어 황실의 권력 다툼에까지 개입했지만 단 한 번도 실패를 하지 않았습니다."
"들었네."
"우리 형제들은 한 번 약속을 하면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반드시 이행합니다."
"들었네."
동천비는 연속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에는 많은 낭인 집단이 있다. 그중 최강의 다섯 개 집단이 있으니 이름하여 중원오랑(中原五狼).
낭도채(狼道砦)는 중원오랑 중 한 곳이었다.
원래 낭인이란 어떤 집단에 소속되거나 묶이지 않고 강자를 찾아 세상을 떠돌거나 이권에 개입해 밥벌이를 하는 부류를 말한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 또한 하나의 집단으로 뭉쳐진 것이다. 혼자보다는 집단을 이루면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낭인들은 거칠다. 인간의 얼굴을 하였지만 야수에 가까운, 생사를 일상으로 여기는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집단을 이루자 어지간한 명문 정도는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릴 만큼 강해졌다. 그래서 백도와 흑도로 나눠진 강호에서 요즘은 낭도(狼道)라고 하여 그들을 또 하나의 세계로 인정하고 있었다.
흑의사내는 낭도채 채주 오살자(烏殺子)이다. 검은 학살자라 불리는 그의 악명은 오래전부터 강호를 뒤흔들고 있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대상을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한 장을 주십시오."
"한 장이라면 백만 냥?"
"백만 관입니다."
동천비가 움찔했다. 하지만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황금 백만 관은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이다.
동천비의 시선이 이번에는 백의인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백의인이 입을 열었다.
"긴말 않겠습니다. 우리 혈서(血鼠) 역시 낭도채와 같은 대우를 바랍니다."
혈서(血鼠). 일명 붉은 들쥐 떼로 불리는 오대 낭인 집단 중 한 곳이다. 그들이 한 번 지나가면 수목이든 사람이든 모든 생명은 깡그리 사라진다고 하여 붉은 들쥐 떼라 불리며, 백의인은 그런 혈서의 서주 아미타사(阿彌陀死) 원사왕이다.
소리장도(笑裏藏刀)로도 불리는 그의 미소 속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살기가 담겨 있다. 그래서 그의 손에 죽은 자들은 대부분 웃고 있다.
동천비가 찻잔을 놓았다.
"여 총관."
등 뒤에서 시립하고 있던 여추량이 대답했다.
"예, 대공자님!"
"한 장씩을 더 얹어 결재하시오."
"대… 대공자님!"
여추량의 눈이 커졌다. 인생은 모든 것이 거래다. 하물며 이렇게 큰 거래를 함에 있어서 단 한 푼도 깎는 조율을 거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백만 관을 더 얹어주라는 폭탄선언에 여추량은 그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놀란 사람은 여추량뿐만이 아니었다. 제갈팽과 원사왕 또한 눈을 부릅떴다.
"배… 백만 관을 더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여 총관, 뭐 하시오?"
"명을 듣습니다."
여추량이 품에서 네 개의 봉투를 꺼냈다. 무거운 시선으로 봉투를 쳐다보더니 동천비에게 넘겼다. 처음 백만 관짜리 전표 네 장을 준비하라고 하기에 이곳 말고 또 다시 거래를 위해 들릴 곳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들에게 모두 쏟아 붓기 위해서였다니 여추량은 내심 당황했다. 한 두푼도 아니고 원하는 돈의 두배를 건넨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배포가 아니다.
투툭!
동천비가 두 사람 앞에 봉투 두 개씩을 던지듯 놓았다.
"천상전장에서 발행한 전표외다."
천상전장은 중원에서 가장 신용이 높고 자산 규모가 큰 천상각 산하 전장이다.
두 사람이 봉투 안의 전표를 꺼내 확인했다. 각 봉투마다 황금 백 만관과 바꿀 수 있는 금액의 전표가 한 장씩 들어 있었다.
부르르!
거친 인생을 살아왔다. 피를 물 마시듯 했고 비명을 음악처럼 들었다.
낭인들의 세계야말로 철저한 약육강식이다. 살기 위해 죽였고, 먹기 위해 칼을 휘둘렀으며, 쾌락을 위해 겁탈을 했다. 사람이지만 짐승에 가까워 누구든 자신들을 피했다. 그래서 어느덧 낭인들의 우상으로 성장했고, 그 어떤 위협이나 위험 앞에서도 당당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처음으로 온몸을 떨었다. 황금 백만 관도 과하게 부른 금액인데 백 만관을 더 얹으니 급기야 자신들도 모르게 호흡이 가빠온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자신들도 배포 하면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지만 이 정도에는 턱없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목숨을 던지는 것뿐이다.
갈 때와 달리 돌아올 때는 동천비도 마부석에 앉았다. 마차 안은 답답하다면서 햇볕도 쬐일 겸 여추량 곁에 앉은 것이었다.
마차는 한가한 관도를 가고 있었다. 이따금 짐을 가득 실은 화물 마차만 지나갈 뿐, 대체적으로 한가했다. 해는 완전히 서산으로 기울었고, 농부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루의 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여 총관, 혹시 역습이라는 것을 아시오?"
여추량이 동천비를 돌아보았다.
동천비가 앞을 보며 말했다.
"공격을 받고 있던 수비 측이 거꾸로 공격을 하는 것을 말하는데, 역습을 당하면 적은 속수무책이오."
그것은 백만 관을 더 얹음으로 그들을 역습했다는 의미이다.
여추량의 눈이 커졌다. 사실 상대로 하여금 충성심을 유도하기 위해 예정에 없는 좀 더 많은 액수를 내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려 두 배를 내놓는다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무척 불만스러웠는데 동천몽의 속셈을 듣고 보니 놀라웠다.
"원하는 것만큼만 주었다면 그들과 난 철저히 거래 관계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오. 하지만 더 많이, 그것도 물경 두 배를 주었으니 그들은 내 미끼를 아주 튼튼히 물었소. 더구나 난 그들의 힘을 원하는 게 아니라 목숨을 원하오."
동천비의 얼굴에 자신감이 차올랐다.
"두고 보시오. 이제 그들은 내 말 한마디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질 것이오. 어떻소? 거래를 하려면 상대가 목숨 정도는 바치게 해야 하는 것 아니오?"
그는 자신이 던진 패에 몹시 만족해하는 얼굴이었다.
여추량이 동천몽을 돌아보았다.
'이제 갓 이립(而立)에 들어섰거늘, 노회한 장사꾼보다 더 심오한 전략을 구사하다니…….'
창업이수성난(創業易守成難)이라고 했다. 하지만 여추량의 눈앞으로 화려하고도 푸른 천상각의 미래가 보이고 있었다.
"하나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소."
"무엇입니까?"
"비밀 유지요. 우리의 움직임이 노출되면 그들은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그래서 내가 여 총관만 데리고 간 것이오. 당연히 아버지 또한 이 사실을 몰라야 하오."
동오룡이 안다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상대가 되지 않는 승부라면서 결사코 제지할 것이 뻔했다. 동오룡 또한 그들의 힘을 벗어나 보기 위해 적지 않은 수단과 방법을 써봤지만 끝내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끝내 적당한 선에서 공존하는 길을 택했다.
"그때도 말했지만 더 이상 그들의 주머니 노릇을 할 수는 없소. 이제 내 돈은 내 힘으로 지킬 것이오!"
멈칫!
돌연 앞을 보던 동천비의 두 눈이 빛을 뿌렸다.
석양을 등지고 맞은편에서 눈에 익은 한 대의 마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승천하는 용의 형상을 한 네 기둥과 지붕에 엎드린 한 마리 대호가 위압적이었다.
무림맹의 호송 마차 사주호룡거였다.
마부석에는 여전히 환도 가개묵이 앉아 있었는데, 그 순간 동천비의 인상이 굳어졌다. 천상각이 있는 곳에서 오고 있다는 것은 또다시 막대한 돈을 가져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대공자가 아니오?"
가개묵이 동천비를 발견하고 알은체를 했다. 그러자 마차 뒤로부터 늙수레한 음성이 들려왔다.
"동 대공자란 말이냐? 마차를 세우거라."
마차가 멈추고 뒷문이 열리더니 무림맹의 총관 상관량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부석에 여추량과 나란히 앉아 있는 동천비를 보며 상관량은 대소를 터뜨렸다.
"오랜만이외다, 대공자. 어딜 다녀오시는 길인가 보구려."
"예, 개인적으로 볼일이 있어서……."
그러면서 동천비의 시선은 헐떡거리는 말들을 향했다. 말이 헐떡거린다는 것은 그만큼 마차에 많은 은자가 실렸다는 뜻이다.
동천몽의 시선을 의식한 듯 상관량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요즘 흑도무림이 창궐하는 바람에 어찌나 자금이 많이 소요되는지 말이오. 어쩔 수 없이 부친께 또 한 번 도움을 받았소이다. 군량미를 비롯해 병기와 무사들의 피복을 준비하자면 장난이 아니어서 말이오."
"잘하셨소이다. 흑도는 반드시 토벌해야 할 대상이지요."
"댁에 돌아가면 알게 되겠지만 황하의 뱃길을 천상각에 독점으로 내주기로 무림맹에서 결정을 내렸소이다. 핫핫핫! 서로 돕고 사는 것이 인간사 아니겠소이까?"
"좋은 말씀입니다."
"공존공영(共存共榮), 이것이 무림맹의 원칙이오."
상관량의 미소가 짙어졌다.
동천비는 그런 상관량을 표정없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상관량에 대해 무림맹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인물이라고 부친은 말했다. 속에 능구렁이 열댓 마리가 똬리를 틀고 앉았으며 심계가 하늘을 덮는다고 했다.
"그럼 나중에 또 봅시다."
상관량이 마차 안으로 사라졌고, 가개묵이 가벼운 목례를 하며 사라졌다.
동천비의 고개는 사라지는 사주호룡거에서 쉽게 떠나지 못했다. 나중에 또 보자는 상관량의 말이 머지않아 또 돈을 얻으러 오겠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마차가 관도 저편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출 때까지 쳐다보는 동천비의 두 눈에서 불꽃이 이글거렸다.
"훗훗! 본 가는 무림맹의 주머니로군."
여추량이 흠칫했다.
동천비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석양이 붉구려."
시뻘건 석양이 동천비의 얼굴을 정면으로 태우듯 비췄다.
태어나 기억이 가능한 나이 때부터 사주호룡거를 보아왔다. 사주호룡거가 한 번씩 집에 오면 아버지는 사람들을 시켜 엄청난 돈을 실려 보냈다. 왜 그들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주어야 하는지 궁금했고, 어느 날 부친에게 물었다가 오히려 된통 꾸중만 당했다. 넌 네 일이나 잘하라며 자신의 의문을 깔아뭉개는 아버지의 두 눈에 선 핏발을 지금도 기억한다.
나중에 보호비 명목으로 무림맹에서 막대한 돈을 음으로 양으로 가져간다는 사실을 알면서부터 고민은 시작되었다.
그들은 무서운 세력이었다. 부친은 견디다 못해 여러 차례 저항을 시도했지만 종국에는 처참하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이후 부친은 그들의 요구 조건을 무조건 수용했고, 오늘날까지 내려온 것이다.
뿌드득!
하지만 자신은 부친과 다르다. 반드시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힘이 있다면 자신에게는 돈이 있다. 돈이 얼마만큼 무서운 것인지 그들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말 것이다.
동천비와 헤어진 사주호룡거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관도를 가고 있었다. 가개묵은 삿갓을 밀어 올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한쪽 눈썹이 없었고 그 자리에 흉터가 있었다.
"마차를 세워라."
마차 뒤로부터 상관량의 음성이 들려오자 가개묵은 말고삐를 끌어당겼다. 마차 뒷문이 열리고 상관량이 마부석으로 오더니 가개묵에게 손을 내밀었다.
"말고삐를 다오."
가개묵이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자 상관량이 담담한 얼굴로 마부석에 앉았다.
"넌 할 일이 있다. 동천비가 어딜 다녀오는 길인지 알아보거라. 사령부에서 보내온 소식에 의하면, 요즘 놈의 움직임이 수상쩍다는 보고이다."
사령부(死令府)는 무림맹의 정보 기관이다. 죽음의 영혼들로 불리며 그들이 개입하면 결코 온전할 수 없고 누구도 감시와 시선을 피하지 못한다.
"놈은 제 아비와 다르다. 동오룡은 영리하지만 놈은 교활하다."
"존명."
가개묵이 앉은 채 사라졌고, 상관량이 마차를 몰며 갔다.
'아버지를 통해 충분히 봤을 텐데, 무림맹에 칼을 겨누려다 얼마나 큰 고초를 겪었는지.'
상관량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무림맹은 천하제일이다. 그 누구의 도전도 용납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법을 어기는 것을 눈감아줄 수 없다.
동천비가 장원으로 돌아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흑의사내 한 명이 다가와 속삭이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조금 전 백봉거(白鳳車)가 외출했습니다."
동천비의 눈이 빛나자 여추량이 물었다.
"목적지는 알아봤느냐?"
"밝히지 않고 그냥 나간 듯합니다."
"뭣들 하느냐? 당장 추적하여 따라붙어라. 그 여자가 만난 사람들 모두 조사하고 파악하라."
"존!"
사내가 빠르게 몸을 날려 사라졌다.
사라지는 사내들을 한참 쳐다보던 여추량이 동천비를 보며 말했다.
"갑자기 무슨 일로 외출을 했을까요? 그것도 행선지를 밝히지 않고."
"대강 감은 잡히오만……."
여추량의 말했다.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 여인이 얼마만큼 지능적이고 교활한지. 어쩌면 가주님까지도 완전히 속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자기 아들에게 객점을 넘겨줬다는 사실 아니겠습니까? 대공자님도 알다시피 객점이야말로 소문나지 않은 본 각의 노른자위입니다. 그 여자가 어떻게 가주님께 꼬리를 쳤으면 그런 일이 생기겠습니까?"
동천비가 나직하지만 냉혹히 말했다.
"맞소. 우리 모두가 그 계집에게 속고 있는지 모르오."
동천비의 얼굴에 살기가 떠올랐다. 그것은 결코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