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11화 (11/71)

제2장 용호대면(龍虎對面)

동천몽이 다시 팔용을 쳐다보았다. 역시 아는 얼굴이냐는 물음인데 팔용이 고개를 저었다.

와당탕!

바로 그때, 출입문이 박살나며 다섯 사람이 뛰어들어 왔다.

"대법왕님."

"사… 살아 계셨군요."

사대법왕과 대력 선사였다. 사대법왕은 널브러진 시신들을 보며 경악했고, 입가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있는 동천몽을 보며 더욱 당황해했다.

"오… 옥체를 크게 상했지 않사옵니까?"

"뭣 하는가? 어서 대법왕님을 궁으로 모시게. 그리고 천룡구십구불은 당장 객점을 포위하라."

대력 선사가 크게 대답하며 밖으로 나갔다.

"어… 어서 소승의 등에 업히소서."

천검은왕이 업히라는 듯 허리를 구부리자 동천몽이 버럭 소릴 질렀다.

"나 안 죽어!"

천검은왕이 깜짝 놀라며 비켜섰다.

동천몽이 의자에서 일어나다 말고 옆구리를 쥐며 또다시 신음을 흘렸다.

"아… 아이고, 이건……."

동천몽이 슬쩍 의복을 걷자 사대법왕이 파랗게 물든 옆구리를 보고 놀란다.

"이… 이건 너무 큰 상처이옵니다."

천장금왕이 염려스런 얼굴을 짓자 동천몽이 쳐다보았다.

느닷없이 동천몽이 야릇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천장금왕은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천장금왕이 어색함을 지우려는 듯 천검은왕을 향해 말했다

"사제는 당장 만동승의를 불러오게."

천검은왕이 문밖으로 달려가려 하자 동천몽이 혀를 찼다.

"나 안 죽는다니까."

"하… 하지만……."

"비켜."

동천몽이 다시 의자에 앉으며 앞을 막고 서 있는 천장금왕을 향해 손을 저었다.

동천몽이 통증을 참으려는 듯 이를 지그시 물었다.

그런데 두 눈은 고통에 젖어 있다기보다는 쉴 사이 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뭔가 나름대로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동천몽이 다시 주위를 휩쓸어 보았다. 고기에 술 한잔하고 싶어 몰래 빠져나왔다가 지불한 대가치고는 비싸다. 하마터면 가장 아끼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

"금왕."

"하명하소서, 대법왕이시여."

"저자에게 왜 날 죽이려고 했는지 물어봐라. 이름이 뭔지도. 자세히."

천장이 곧바로 용건상을 향해 물었다.

"시주는 누구요? 어디서 왔소이까?"

용건상이 웃음을 지었다. 물을 것을 물으라는 비아냥거림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 같았으면 당연히 화를 냈을 텐데 천장금왕은 수양이 깊은 고승답게 이마만 찡그리고 넘어갔다.

"말을 해야 하오. 당신들이 공격한 분은 대법왕이시오. 이 땅의 지배자이시란 말이오?"

"답답하군."

"대답해야 한단 말이오. 이건 중대한 일이오."

"괜한 수고 하느니 빨리 죽이는 것이 나을 것이오."

용건상의 얼굴은 담담했다. 하나뿐인 생명이 소멸될 위험에 처해 있는데도 전혀 흔들리는 표정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동천몽을 바라보는 두 눈에는 희열이 차올랐고 오른쪽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 웃고 있다고 해도 좋았다.

어느 누구보다도 위험한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장수는 꿈꾸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소망이라면 마지막 삶만큼은 화려하게 끝내고 싶었다. 최소한 이름 석 자만 대면 알 만한 거목의 손에 삶이 마무리되길 막연하지만 소원했다.

그런데 지금 그 꿈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것도 이 땅의 지배자 대법왕이다. 이건 두려움이 아니라 대단한 행복이며, 차라리 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영광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내 입을 통해서 뭔가를 얻으려는 생각은 일찍 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오."

"정녕 입을 열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말했지 않소? 시간 낭비라고."

"아미타불! 이보시오, 시주!"

천장금왕의 목소리가 커졌다.

"쯧쯧!"

지켜보고 있던 동천몽이 혀를 찼다.

천장금왕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고, 동천몽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옆구리가 결린 듯 휘청거리자 천검은왕이 잽싸게 부축했다.

동천몽이 비키라는 듯 손으로 그를 밀어내고 부러진 탁자 다리 하나를 주워 들더니 지팡이 삼아 천천히 용건상에게 다가갔다.

척!

용건상과 세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춘 동천몽이 빤히 쳐다보았다.

동천몽이 쳐다보자 용건상이 시선을 피했다.

"말해보겠나, 어떤 새끼가 날 죽이라고 했는지?"

동천몽의 눈이 조용히 타올랐다.

용건상이 움찔했다. 표정은 웃지만 목소리는 무엇보다도 서늘했다.

"누구냐, 그 새끼?"

용건상이 침묵했다.

히죽!

동천몽이 다시 웃었다.

빠악!

짚고 있던 탁자 다리로 용건상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아이고!"

용건상이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돼지 멱 따는 소릴 질렀다. 그는 조금 전 동천몽의 일섬단극에 경문 일부가 파괴되어 무공이 소멸되었다. 그래서 보통 사람과 똑같이 고통을 느낀다. 대번에 머리가 깨지고 피가 얼굴을 덮었다.

빠- 빠빠빠박!

동천몽이 미친 듯 용건상의 대가리를 내려쳤다. 용건상의 머리에서 깨져 나온 핏자국과 살점이 파편이 되어 동천몽의 얼굴을 덮었다.

'아… 아미타불!'

사대법왕이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자신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동천몽의 행동이었다.

퍼퍼퍼퍽!

용건상은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고, 동천몽은 타작을 하듯 연신 탁자 다리를 휘둘렀다.

용건상의 머리는 난장판이 되었다.

'여… 열 받으면 앞뒤 안 가리는 것까지 전 대법왕님이로다.'

천권동왕의 눈이 커졌다. 닮았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잔혹성까지 빼닮은 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 그만 하심……!"

천권동왕의 말을 천지철왕이 얼른 막았다.

"왜?"

천지철왕이 속삭이듯 말했다.

"전 대법왕님을 몰라서 그러십니까, 사형? 열 받아 있을 때 누가 끼어들거나 간섭하면 그 사람까지 팬다는 것을 정녕 모르냐는 말입니다."

흠칫!

천권동왕이 온몸을 떨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했다. 삼십 년 전, 전 대법왕이 만마생사혈을 수련하고 있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자 무척 흥분했다. 그래서 자신은 돕는답시고 바쁠수록 돌아가야 한다면서 이성을 되찾을 것을 주문했는데, 네놈이 뭔데 감히 대법왕인 날 가르치려 드느냐고 몽둥이로 두들겼다. 대법왕이 패는데 피할 수도 없고 해서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도록 맞아야 했다. 아직도 그때 맞은 후유증으로 비만 오려고 하면 허리가 쑤신다.

천권동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동천몽을 주시했다.

동천몽의 폭력은 계속되었다. 용건상의 머리통은 박살이 나고 있었다.

빡- 바바박!

몽둥이는 소낙비처럼 떨어졌고 용건상의 얼굴은 괴물처럼 우그러졌다. 용건상의 두 눈에 회색빛 그림자가 떠올랐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것은 두려움을 느낄 때 나타나는 공포였다.

경험에 비춰 일반적으로 고문은 반드시 질문과 병행된다.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을 시 고문을 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천몽은 한마디 묻지도 않고 그냥 때렸다. 판단하기에 따라서는 과연 알고자 하는 내용이 뭔지 모를 오리무중의 폭력이었다. 폭력의 이유를 알지 못할 때처럼 두려운 건 없다. 물론 대략 동천몽의 폭력이 무엇을 원하는지 짐작할 수 있지만 섣불리 잘못 짚고 대답했다가는 그간의 경험에 비춰 상대를 무시한 것으로 오인되어 더 맞는다. 어쨌든 자객이 갖춰야 할 최고의 능력은 비밀 엄수다.

"금왕."

동천몽이 갑자기 천장금왕을 불렀다.

천장금왕이 느닷없는 부름에 화들짝 놀라며 쳐다보았다.

"우리, 교대할까? 팔이 아파서 말이야. 이제 그대가 좀 때리지?"

천장금왕이 당황했다.

사람을 몽둥이로 때린다는 것은 끔찍한 일일 뿐 아니라 불법을 전하는 고승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동천몽이 야릇하게 웃었다.

"싫어? 그럼 관둬."

빠아악!

동천몽이 용건상의 머리를 두 손으로 내려쳤고, 그만 머리가 쪼개지고 말았다. 용건상의 몸이 기우뚱거리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숨이 끊어진 듯 움직임이 없었고, 바닥으로 검은 피가 흘렀다.

"뭐야? 벌써 죽은 거야? 생각보다 약하군."

동천몽이 실망했다는 듯 투덜거리며 피 묻은 몽둥이를 집어 던졌다.

동천몽이 피 묻은 손을 시체 옷에 스슥 닦더니 객점 밖을 향해 걸어갔다.

"그만 가자."

두세 걸음 걷다 또다시 옆구리를 쥐고 신음을 흘렸다.

그때 위치가 하필 백쾌섬 근처였기 때문에 그가 잽싸게 부축했다.

탁!

동천몽이 돌아보았다.

"인사가 늦었사옵니다. 소생 백쾌섬이 삼가 대법왕께 인사 올리옵니다."

동천몽이 불쑥 물었다.

"당신, 남자요?"

행색도 그럴 뿐 아니라 몸에서 희미한 향 내음까지 맡아진다.

백쾌섬이 환히 웃었다.

그때 천권동왕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시주께서 천하제일 현상금 추적자 백쾌섬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잠시 볼일이 있어 이곳에 왔습니다. 아무튼 영광입니다. 이렇게 존경하는 대법왕님을 뵙게 되다니."

천권동왕이 동천몽에게 백쾌섬에 대한 설명을 했다. 천권동왕의 얘기를 들은 동천몽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상금 추적자라… 그거 상당히 흥미있군. 아무튼 반갑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어떻소? 본 궁에 가면 좋은 차가 있는데 우리 진하게 한잔하는 게?"

"대법왕님께서 초대해 주신다면 이 백 모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옵니다."

백쾌섬이 동천몽을 부축하여 나란히 걸었고, 그 뒤를 팔용과 사대법왕이 따랐다.

밖으로 나오자 천룡구십구불이 객점을 에워싸고 있었다.

천검은왕이 대력 선사를 향해 말했다.

"해산하라. 궁으로 돌아간다."

"철수하라."

대력 선사의 명령에 천룡구십구불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문득 동천몽이 물었다.

"백 형, 혹시 누가 날 죽이려 했던 자들이 누군지 짚이는 바가 있소?"

전혀 생각 못한 질문이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백쾌섬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동천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동천몽은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물었을 리 없다. 고통에 인상을 찡그리며 걸어가는 그의 얼굴에서 어떤 의도를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왜 소생에게 그런 질문을……?"

동천몽의 의도를 알기 위해서는 직접 물어보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물론 자신에게 왜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 그 이유를 말해줄 리는 만무했다.

예상대로 동천몽의 대답은 간단했다.

"갑자기 백 형은 알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뭐요?"

그러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히죽 웃는다.

티없이 깨끗한 웃음이었다. 그러나 왠지 등골이 서늘했다. 만약 뭔가를 감추고 이토록 맑은 웃음을 짓는다면 동천몽이야말로 누구보다 심계가 깊은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하지만 백쾌섬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심계는 연륜에 비례한다. 아무리 대법왕이라고 하지만 이제 갓 스물 전후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가 그런 무서운 계산을 품고 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왜 느닷없이 그런 질문을 했는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해도 자꾸 마음에 걸렸다.

휘청!

동천몽이 다시 쓰러질 듯 비틀거렸고, 백쾌섬이 더욱 힘을 주어 부축했다.

"괘… 괜찮으시옵니까?"

동천몽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인상을 쓰고 말했다.

"금왕, 안 되겠구나. 당장 백상거를 불러라."

"당장 백상거를 오도록 하라."

백상거는 대법왕의 전용 마차이다.

푸드득!

천룡구십구불의 수장인 대력 선사의 품에서 한 마리 전서구가 날아올랐다. 비상용으로 항시 품에 담고 다니는 혈구라는 이름의 전서구다. 빠르고 날렵하며 훈련을 받아 천적을 만나도 곧잘 도망친다.

코끼리 문양이 새겨진 백상거가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반 시진 후였다.

동천몽은 곧바로 백상거 안으로 사라졌고, 마차는 빠르게 포달랍궁을 향해 달려갔다.

포달랍궁에 도착하자 만동승의를 비롯한 많은 의승들이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다. 백상거가 의각 앞에서 멈췄고, 곧바로 바퀴가 달린 침대 위에 동천몽은 누웠다.

의승들은 침대를 밀고 신속하게 의각 안으로 사라졌다.

동천몽의 옷이 벗겨졌다. 천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완전히 벗겨지며 동천몽의 몸이 드러났는데, 온몸이 멍투성이었다. 피가 터져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자 죽은피가 되어 이곳저곳에 몰려 있는 상황이었다.

빨리 피를 뽑아내 주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진기 소통이 원활해진다.

슥!

만동승의가 칼을 들었다. 멍든 곳을 찢어 죽은피를 뽑아내려는 것이었다. 몸에 칼은 아무나 대지 못한다. 경험이 많은 숙련된 의원만이 가능하다. 더구나 동천몽의 몸은 걸병광우철포공으로 인해 보통 칼로는 턱도 없다.

"약간 따끔하기만 할 것입니다."

"만동, 모두 내보내거라."

만동승의가 멈칫하며 누워 있는 동천몽을 바라보더니 주위에 긴장한 얼굴로 서 있는 의승들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의승들이 모두 문을 열고 사라졌다.

"왜 갑자기 모두 내보내는지……?"

"칼 댈 것 없다."

동천몽이 몸을 일으키더니 우둑둑 소리가 나도록 목을 한 바퀴 돌리고 물었다.

"만동."

"하명하소서, 대법왕이시여."

"단기토혈이라고 들어봤느냐?"

"……."

"하긴, 호신술 정도밖에 모르는 네가 알 리가 없지. 내가 배운 무공 중 걸병광우철포공이라는 외문 무공이 있다. 외부의 충격에도 피부가 찢어지거나 상처를 입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일종의 철포삼 비슷한 것인데, 그중 단기토혈이라는 초식이 있다. 단기토혈은 내기를 끌어올려 마치 피가 뭉친 듯 몸 밖으로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다. 내 몸 상태가 좋지 않음을 적에게 보여주어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것인데……."

동천몽이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더니 운기에 몰입했다.

"으엇!"

바라보던 만동승의가 놀란 눈을 했다.

동천몽의 몸을 감싸고 있던 수많은 멍이 사라지고 있었다. 반 각이 채 되지 않아 언제 그랬느냐는 듯 동천몽의 몸은 깨끗해졌고, 그는 두 눈을 떴다.

놀란 만동승의를 보며 동천몽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이… 일부러 몸에 멍을 들게 만들었다는 말씀인데, 왜, 무슨 이유로……?"

"넌 알 것 없고, 상처를 꿰맨 것처럼 내 몸에 어서 천을 감아라."

만동승의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뭣 하느냐, 어서 내 몸에 흰 천을 둘둘 감으래니까! 물론 다 감고 표면에 피로 착각할 수 있도록 지초도 묻혀야겠지."

"예, 대법왕님."

뭔지 모르지만 만동승의는 시키는 대로 동천몽의 몸에 흰 천을 감기 시작했다. 진짜 상처를 싸매듯 정성을 다했는데, 얼굴은 의혹의 안개로 덮였다. 도깨비놀음 같은 동천몽의 행동을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촤아아!

칠공만 남기고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완전히 천을 감고 붉은 지초를 묻히자 제대로 외상을 입은 환자의 모습이 되었다. 동천몽이 침대를 내려와 커다란 동경 앞에 자신을 비춰보더니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됐다. 이제 날 삼층 내 방으로 데려가라."

만동승의는 바퀴 달린 침대를 밀고 대법왕만 입원할 수 있는 백상실로 향했다.

백상실은 의각 삼층 맨 끝에 있다. 동천몽이 백상실에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천장금왕이 문안을 왔다. 온몸이 피로 젖어 있는 동천몽을 바라보는 천장금왕의 눈빛이 작은 파장을 일으켰다.

"아미타불! 한마디 여쭤도 되겠사옵니까?"

동천몽의 몸 상태를 한참을 바라보던 천장금왕이 입을 열었다.

동천몽이 누워서 힘든 얼굴로 말했다.

"해보거라."

"왜 소승들에게 보고를 하지 못하도록 팔용의 입을 막았사옵니까?"

"그런 쳐 죽일 놈,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입 다물겠다고 해놓고 벌써 일러바치다니, 내 이놈을."

동천몽이 일어나려다 윽, 하며 다시 누웠다.

"아무리 중놈이라고 이렇게 의리가 없어서야 원. 두고 보자, 이놈."

"두고 안 보면 팔용을 죽일 생각이십니까?"

"넌 누가 날 죽이려고 했다고 생각하느냐?"

동천몽이 화제를 바꿔 물었다.

천장금왕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이상하지 않느냐? 쭉 생각해 봤는데 본왕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은 궁내의 누군가 나의 대법왕 즉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세력이나 개인이 있다는 의미 아니겠느냐? 만경이 죽고 그를 따르던 대부분의 제자들 모두 소탕되거나 죄를 뉘우쳐 안전할 줄 알았는데 이런 날벼락을 맞다니, 분하구나."

천장금왕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더듬거렸다.

"구… 궁내에 대법왕님을 노리는 세력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너무 뻔한 대답이어서일까. 동천몽이 인상을 찌푸렸다.

"만경은 드러났지만 이번의 적은 숨어 있다. 앞에서 찔러 오는 칼보다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이 무섭지. 보이지 않는 적이란 무조건 두려운 법이다. 아무튼 그만 나가보거라. 한숨 자야겠다. 내가 부르기 전에는 내일 아침까지 누구도 날 찾지 못하도록 해라. 그리고 백쾌섬이란 사람, 대접 잘해주어라."

그리고 동천몽이 눈을 감았다.

잠시 동천몽을 바라보던 천장금왕이 어금니를 지그시 물고 방을 나왔다. 천장금왕이 나가자마자 동천몽이 눈을 떴다. 그런데 동천몽의 두 눈에서 용암 같은 열기가 이글거렸다.

눈은 멈췄지만 하늘은 구름에 뒤덮였다. 어둠 속에서도 은은한 홍광을 발산하는 홍궁 위로 한 마리 야조가 날갯짓을 하며 날아간다. 의각이 보이는 맞은편 노송 숲에 파란 불꽃이 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망매(닒魅) 불처럼 보였지만 깜박거리는 것이 아니었다. 망매 불은 절대 깜박이지 않고 허공을 훨훨 떠다닌다. 열 쌍의 눈동자가 거대한 노송 아래 몸을 은신한 채 의각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두건으로 용모를 완전히 가린 상태였다.

휘이이!

한자락 삭풍이 불자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흩날렸다.

사사삭!

흩날리는 눈을 뚫고 십 인의 복면인은 의각을 향해 나아갔다. 그들은 신법을 펼치지 않고 은폐물을 이용해 도보로 접근해 갔는데 움직임이 날렵했다.

싹!

선두에 가던 복면인의 검이 어둠을 갈랐고, 털썩 하는 소리가 들리며 한 명의 무사가 쓰러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이곳저곳에서 털썩거리며 경계를 서고 있던 무사들이 비명 한마디 지르지 못하고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의각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계 무사들을 해치운 복면인들은 소리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쭉 뻗은 복도는 어둠 속에 잠겨 있고 왼쪽 급환실도 불이 꺼져 있었다. 급환실은 아주 위독한 환자를 치료하는 곳인데 불이 꺼져 있다는 것은 오늘 밤은 환자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복도 좌우로는 상처를 꿰매는 육합실을 비롯해 약을 처방하는 제약실, 침구실 등이 있었고, 이층은 병이 깊어 장기치료를 하는 입원실이 있었다.

벽 쪽으로 달라붙어 빠르게 복도를 지나간 열 명의 복면인은 이층으로 올라가더니 곧장 삼층으로 치달렸다. 삼층은 고승들과 간부들이 치료를 받는 곳이었다.

삼층 복도가 어두운 땅굴처럼 쭉 뻗어 있었다. 이미 사전에 약속이 된 듯 복면인들은 망설이지 않고 복도 끝을 향해 미끄럼을 타듯 나아갔다.

뚝!

열 명의 복면인이 복도 끝에 멈췄다. 그곳에는 한 개의 문이 굳건히 닫혀 있는 것이, 지나온 다른 방문보다 컸고 어둠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지만 한 마리 거대한 흰 코끼리 문양이 당당히 새겨져 있었다.

백상실(白象室). 대법왕이 아프면 묵는 곳이었다.

쉭!

쉬쉬쉬!

복면인들의 검이 어둠을 갈랐다. 열 개의 섬광이 문을 사분오열시켰다.

투투투툭!

문은 정확히 열 조각이 되어 주저앉았고, 복면인들은 바람이 되어 들어섰다. 침대 위에는 한 사람이 잠을 자고 있었고 그 위로 열 개의 검이 곧바로 떨어졌다.

콰아아아!

다리에서부터 머리까지 정확히 열 조각이다.

비명도 없었다. 어찌나 빠르고 날카로운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침대는 그대로 있다.

십 인은 침대를 포위하며 바닥에 내려섰다.

그런데 의당 흘러나와야 할 피가 보이지 않는다. 맨 끝에 선 복면인이 검으로 이불을 확 젖혔다. 잘려진 이불이 한 조각 공중으로 들려졌고, 뒤이어 나머지 복면인들이 자신들이 벤 이불을 젖혔다.

화라락!

조각난 이불이 허공으로 날리면서 복면인들은 기절할 듯 놀랐다. 침대 위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복면인들의 눈이 출렁거렸다. 무척 당황한 듯했는데 매서운 시선으로 침대를 쏘아보았다. 한참 침대를 바라보던 우두머리의 눈이 돌연 빛을 뿌렸다.

'혹시 뒷간!'

우두머리 복면인이 곁에 선 두 복면인을 보며 눈짓을 했다. 두 복면인이 알았다는 듯 문을 통해 밖으로 사라졌다. 나머지 복면인들은 사라진 두 복면인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잠시 후 밖을 나갔던 두 복면인이 돌아왔는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암살 대상자가 뒷간에도 없다는 신호였다. 그러자 그때까지 바윗돌처럼 가라앉아 있던 복면인들의 눈빛이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반드시 없애야 한다."

"어떻게?"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답답할 노릇이었다.

"할 수 없다. 의각 내에 있는 생명은 모두 벤다."

흠칫!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명령에 복면인들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오늘의 거사는 치밀하게 준비되었고,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역사가 바뀌자면 적잖은 피해는 각오해야 한다.

복면인들이 즉시 흩어졌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답답한 숨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 나왔다. 이 다경쯤 지나 의각 앞뜰로 복면인들이 모여들었다.

뚝뚝!

그들이 들고 있는 검끝에서 핏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자신을 제외한 아홉 명 모두가 모인 것을 확인한 우두머리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물었다.

"한 놈도 살아나서는 안 된다."

"그래서 모조리 목을 잘랐습니다."

"좋다. 일단 너희들은 각자 거처로 돌아가라. 난 보고를 하고 오겠다."

아홉 명의 복면인이 뿔뿔이 흩어져 사라졌다.

잠시 홀로 서 있던 우두머리가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려갔다. 몇 개의 전각 지붕을 넘어 날아간 우두머리가 날아내린 곳은 백궁이었다.

백궁 앞마당에는 한 사람이 뒷짐을 지고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인기척에 뒷짐을 지고 있던 인영이 돌아섰는데 그 또한 복면을 하고 있었다.

"어… 어찌 됐느냐?"

"백상실에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 밤에 어딜 갔단 말이냐?"

"그래서 혹시 몰라 의각 내 모든 생명을 완전히 도륙해 버렸습니다."

복면인이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파악한 바에 의하면, 의각에는 대략 오십여 명가량의 환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모두 죽였다는 얘기이다.

반란은 확률이 아니다. 정확해야 한다. 그런데 눈앞에 서 있는 우두머리는 확률에 걸었다. 무척 위험하고 좋지 않은 징조이다. 그러나 화살은 시위를 떠났으니 이제 와서 뭘 어쩌겠는가?

복면인이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알겠다. 돌아가 명을 기다려라."

우두머리가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이고 몸을 날려 사라졌다. 복면인은 우두머리가 사라진 어둠 속을 쳐다보았는데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했는데……!"

중얼거리는 복면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복면인이 몸을 날렸다. 백궁을 넘어서고 두 개의 건물을 더 넘어가더니 멈춰 내렸다. 어둠 속에 한 채의 전각이 있었는데 비록 캄캄했지만 천량전이라는 현판이 흐릿하게 보인다.

"들어오너라."

이미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천량전 안으로부터 노쇠한 음성이 들려왔다. 잠시 불 꺼진 천량전 문을 바라보던 복면인이 마른침을 삼키고 다가섰다.

방 안은 캄캄했다. 단지 두 개의 눈빛이 들어서는 복면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복면인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우두머리가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겼다.

얘기가 끝났는데도 어둠 속의 인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복면인의 눈이 찌푸려졌다. 자신의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불안해진 것이다.

"아미타불! 결국은 이렇게 되는구나."

기다란 탄식이 어둠을 흔들었다.

"무… 무슨?"

"바보 같은 놈, 꼬리를 달고 오다니."

"으헉!"

복면인이 놀라며 잽싸게 뒤를 돌아다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두 개의 눈이 복면인 뒤쪽을 보며 말했다.

"밖에 날씨가 찹니다. 그만 들어오십시오."

조용하던 복도로부터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복면인은 기겁하며 입구를 쳐다보고 있었고, 잠시 후 한 인물이 들어섰다.

"으어어! 대… 대법왕님?"

복면인이 기절초풍할 듯 놀라 외쳤다.

입구에 선 사람은 동천몽이었다. 금방이라도 죽을 듯 힘이 없어 보이던 낮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대법왕의 신분을 알리는 붉은 가사에 어둠 속에서도 똑똑히 보이는 흰 코끼리 문양이 유난히 위압적이었다.

"네놈은 나가 있거라."

이미 복면인이 누군지 알고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복면인이 머뭇거리자 버럭 소릴 질렀다.

"안 나가?"

그제야 복면인이 굽실거리며 뒷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복면인이 허겁지겁 방을 빠져나와 마당으로 나오다 말고 또다시 벼락을 맞은 듯 놀랐다.

마당 가운데에는 두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천검은왕과 천권동왕이었다.

"패 죽일 놈, 그 자리에 꼼짝 말고 있거라. 죽을 각오를 하고."

복면인의 안색이 굳었다. 그리고 한참 후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된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느끼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복면인은 시선을 들어 불 꺼진 방문을 쳐다보았다.

"앉으십시오."

문 앞에 서 있는 동천몽을 향해 천장금왕이 조용히 말했다.

동천몽은 그냥 서 있었다. 주위를 휘둘러보는 동천몽을 향해 천장금왕이 물었다.

"무얼 찾으십니까?"

"술 같은 것 없나? 이럴 때 술 한잔하면 딱인데."

"헛헛! 가슴이 몹시 아프다는 말씀이군요."

"아프다. 진짜로."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천장금왕이 정색하고 물었다.

"지금 소승 앞에 앉아 계신 분이 불사심법 하나를 제대로 외우지 못하고 만마생사혈 구결을 끝내 이해하지 못해 몸으로 무예를 체득한 분 맞는지요?"

동천몽이 씨익 웃었다.

어둠 탓인지 동천몽의 이가 유난히 희었다.

"그런 돌대가리가 네가 계획한 반란을 어떻게 알아차렸느냐는 질문이로구나, 천장?"

"솔직히 소승은 아직까지도 뭐가 뭔지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알지도 못하겠나이다."

"한심한 사람이로군. 반란을 계획한 사람이 모르면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

동천몽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

"동오룡이란 사람을 아느냐?"

"대법왕님의 춘당이 아니십니까?"

"귀상(鬼商)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 내가 왜 우리 아버지 눈 밖에 났는지 아느냐?"

"……."

"살기 위해서였다면 이해가 될지 모르겠구나."

팟!

천장금왕의 눈빛이 예리한 섬광을 발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사실 강호의 소문과 달리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아주 각별했다. 나에게서 당신의 모습을 발견한 거지. 호랑이 새끼임을 읽어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 형들이었다. 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자 그들은 흥분했다. 날 가만두려고 하지 않았지. 더구나 난 첩의 자식이 아니더냐?"

동천몽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위험은 잔인하게 다가왔다. 운이 좋았는지 몇 번의 암살당할 고비를 넘겼다. 그때부터 난 날마다 어떻게 하면 형들 손에서 무사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망가지는 것이었군요."

"그 방법뿐이었다. 특히 어지간히 망가져서는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까지 미움을 받을 만큼 철저히 망가졌지. 아버지까지 속이고 완전히 개망나니가 되자 마침내 그분도 날 포기하더구나. 당연히 날 죽이지 못해 안달하던 형들은 더 이상 날 경계하지 않았고."

천장금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실로 충격적인 비사였고 생존을 위한 자기 파멸이었다. 형들의 칼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개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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