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10화 (10/71)

제1장 한 방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엄청난 폭설이었다. 아침나절 푸른 하늘이 보이기에 더 이상 눈이 내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날씨는 순식간에 변덕을 부렸고 한 치 앞이 내다보이지 않을 만큼 퍼붓는다.

하지만 폭설도 그의 앞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가 지나갔지만 단 하나의 발자국도 찍히지 않았다.

답설무흔(踏雪無痕).

눈 위를 날아도 흔적이 전혀 남지 않는다는 절정의 신법이다.

휘류류류!

거친 눈 폭풍을 뚫고 백쾌섬의 신형은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퍼붓는다고 해도 좋을 만큼 갈수록 많은 눈이 내린다. 두 개의 산봉우리를 넘자 저 멀리 눈 덮인 임주가 뿌옇게 들어왔다.

쉬이이!

한 번씩 몸을 솟구칠 때마다 삼십여 장씩 미끄러져 갔다.

폭설 때문인지 임주의 거리는 한산했고, 저잣거리 좌우로 늘어선 가게의 주인들은 집 앞의 눈을 치우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몸도 녹이고 요기도 할 겸 환상루 문을 밀고 들어섰다.

객점 안에 들어서자마자 뜨거운 열기가 훅 끼쳐 왔다. 마침 두 명의 손님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점소이가 그곳으로 안내했다.

"노배계와 술 좀 주게."

"금방 올립죠."

사람도 많은데다 피워놓은 난로의 열기로 인해 객점 안은 더웠다. 백쾌섬은 목에 두르고 있던 삼달 목도리와 털모자를 벗었다. 옷에 묻은 눈도 실내의 열기에 의해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여전히 눈은 쏟아지고 있었다. 무려 삼 년이 넘도록 중원의 산사는 거의 다 뒤졌다. 소림사를 비롯해 이름깨나 알려진 사찰을 모조리 훑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절강제일부호의 막내아들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곳은 이곳 서장과 천축뿐이었다. 다행히 서장은 중원과 달리 사찰이 많지 않았다. 포달랍궁을 비롯해 백여 개의 사찰이 있지만 무승을 둔 사찰은 십여 개 안팎이었다. 동천몽의 부하들의 말에 의하면, 동천몽을 끌고 간 사람은 무공을 펼친 승려들이라고 했다.

스윽!

품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접혀진 종이는 한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였다. 초상화 속의 사내는 무척 다부진 인상이었다. 아직 어린 티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눈이 가는 것이 무척 고집이 세어 보였고 눈매가 매우 날카로웠다.

'동천몽!'

백쾌섬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백쾌섬은 동천몽의 초상화를 보고 또 보았다. 누가 보더라도 그저 말썽꾸러기인 부잣집 막내아들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주위의 의견은 그렇지 않았다. 동천몽이야말로 천상각에서 가장 지켜볼 필요가 있는 인물이라고 입을 모았다.

비록 둘째 부인의 핏줄로 본부인에게서 낳은 형제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머리 또한 병에 가까울 만큼 형편없어 부친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경계할 요소가 전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의견은 달랐다. 예로부터 제왕들은 자신의 후계자라고 여기는 핏줄에게는 유난히 냉정했다. 그것은 첫째, 미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 보여주어 다른 형제들로부터 해함을 당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사람이란 밟으면 밟을수록 생존하기 위해 발악한다. 그렇게 다져지며 성장한 혈육은 강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동천몽에 대한 동오룡의 미움은 도를 넘어섰다고 했다. 소문에 의하면, 차라리 남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비정하게 대했다고 했다. 머리도 나쁜데다 어려서부터 말썽을 피우고 다녔기 때문이라는 것이 눈 밖에 난 이유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를 찾아달라고 청부하던 동오룡의 모습은 소문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

표정은 너무나 진지했고 목소리에는 끈끈한 부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는 천하제일거상의 눈 속에는 자신의 커다란 살점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 같은 고통이 가득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식에 대한 단순한 애정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 어쩌면 주위 사람들의 얘기가 사실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백쾌섬이 동천몽의 초상화를 품속에 갈무리했다.

자세를 고쳐 앉은 백쾌섬이 이윽고 실내를 훑어보았다. 서장제일의 상도답게 손님 대부분이 상인이었다.

팟!

돌연 별생각 없이 객점 안을 둘러보던 백쾌섬의 두 눈에서 한줄기 광채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별안간 뒷덜미가 곤두선 것이다.

그것은 위험을 알리는 신호였다. 위험에 빠지면 경고를 하는 신체 기관은 사람마다 다르다. 백쾌섬은 위기가 닥치면 자신도 모르게 뒷덜미가 일어선다.

백쾌섬이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며 상인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탁자 아래로 자기 소유의 봇짐이 놓여 있고, 일부는 보따리 밖으로 양모가 삐져나와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완전한 장사꾼들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본능은 계속해서 조심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본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만약 이들이 어떤 목적을 갖고 신분을 감추고 있다면 얘기는 심각해진다. 처음 객점에 들어섰을 때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비록 추운 밖에서 들어왔고 배가 고팠다고는 하지만 그런 생리적인 현상과 위험을 알아차리는 본능은 철저히 다르다.

"음식 나왔습니다."

점소이가 주문한 노배계와 술을 가져왔다. 백쾌섬은 우선 술부터 한 잔 따라 마셨다. 빈속에 독한 죽엽청이 들어가자 목구멍이 뜨거웠고 금세 온몸이 달아올랐다. 거푸 두 잔의 술을 비운 백쾌섬은 계속 주위 상인들의 동정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보고 또 봐도 겉모습에서는 어떤 위험한 징후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뒷덜미는 꼿꼿하게 일어서 있었다.

'으음!'

백쾌섬은 상인들 모두 평범한 인물들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이들이 노리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공기가 얼어붙어 있으므로 조심하라는 본능의 암시였지 자신을 향해 죽음의 기운이 접근해 오고 있다는 신호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구란 말인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꿀꺽꿀꺽!

술이 들어가면서 더욱 뜨거운 열기가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앞섶을 약간 벌려 헤쳤다. 그러면서도 백쾌섬은 여전히 객점 안의 사람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살피고 또 살폈지만 누구도 표적이 될 만한 인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모든 것이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모습뿐이었다.

'전문가들이다!'

암살이라는 놀라운 목적을 갖고 있다면 정체를 감추기란 쉽지 않다. 살인이란 의미 자체가 긴박한 일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밖으로 긴장된 기운을 쏟아내어 금방 눈에 띈다. 그런데 이들은 그런 기세를 완벽하게 제재하고 있었다.

그때 입구의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에 백쾌섬이 고개를 돌렸다. 눈에 허옇게 덮인 팔용이 숨을 몰아쉬며 허겁지겁 들어서고 있었다.

퍼퍼퍼!

입구에서 팔용이 몸에 쌓인 눈을 털었다.

"손님, 이왕이면 밖에서 털고 들어오실 일이지."

점소이가 약간 짜증스런 표정으로 말하자 팔용이 고개를 들었다. 가뜩이나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속이 불편한데 점소이가 눈을 부라리자 인상을 썼다.

"뭐라고, 지금?"

점소이 또한 지지 않고 대꾸했다.

"아니, 그러니까……."

"죽고 싶나?

팔용이 점소이의 말을 자르며 눈에 힘을 주었다.

팔용의 기세가 돌변하자 점소이가 멈칫했다. 팔용이 입술을 부들거리며 말했다.

"건들지 마. 오늘 소… 나……."

'소승, 기분 안 좋다'라고 말하려다 얼른 속인 투로 바꿨다.

점소이를 다시 한 번 살쾡이 눈으로 본 팔용이 동천몽이 앉아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순간 팔용을 바라보는 백쾌섬의 눈이 빛을 뿌렸다. 발걸음이 사뿐사뿐한 것이 상당한 고수다. 그런데 팔용의 움직임을 쫓던 백쾌섬의 눈이 더욱 커졌다. 팔용이 앉은 탁자 맞은편에는 한 사내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졸고 있었다. 거나하게 한잔한 듯 얼굴이 약간 달아올라 있었는데, 실내의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졸음에 빠진 것 같았다.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졸고 있었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다녀왔사옵니다."

팔용이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동천몽은 깊은 잠에 빠진 듯 반응이 없었다. 팔용이 좀 더 큰 목소리로 말하자 그제야 동천몽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어, 팔용이로구나. 갔다 왔느냐?"

"여기."

팔용이 주머니에 담긴 백상불을 건네주었다. 동천몽은 주머니를 받아 품에 그대로 갈무리하고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수고했느니라. 배 많이 고프지? 돈 걱정은 말고 먹고 싶은 것 있으면 실컷 시키거라."

그런데 팔용은 음식을 시킬 생각은 않고 동천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팔용이 하도 빤히 쳐다보자 동천몽이 눈을 부라렸다.

"뭘 봐?"

"조… 존안이 너무 빨개서."

"그게 어쨌다는 거냐? 당연히 더운 곳에 있으니까 빨개지는 것 아니겠느냐?"

팔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증거가 될 만한 음식과 술병은 점소이를 시켜 말끔히 청소한 뒤였다.

벌름! 벌름!

팔용이 코를 벌름거리자 희미하지만 술 냄새가 풍긴다. 술을 먹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뚜렷한 증거도 없이 술을 먹었다고 몰아붙였다가 자칫 맞아 죽을 수도 있었다.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었으므로 팔용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만두를 시켰다. 그것도 만두 속에 고기가 들어 있지 않는 야채 만두를 시켰다.

팔용은 만두를 먹으면서도 계속 동천몽을 살폈다. 동천몽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바로 그때였다. 쾅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객점 입구가 닫혔다.

쿠쿠쿵!

연이어 창문이 닫혔고, 중앙에 활활 타오르고 있던 난로도 순식간에 꺼졌다. 실내는 짙은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단순히 빛을 차단하며 생긴 어둠과는 다른, 완전 먹물이었다. 팔용이 만두를 먹다 놀란 눈으로 주위를 휘둘러보았는데 마주 앉아 있는 동천몽도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했다.

"뭐요? 어서 문 여시오!"

팔용이 소리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이라고는 메아리뿐이었다.

화악!

갑자기 팔용의 눈이 커졌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푸른 눈동자들이 나타났다. 그것은 먹이를 노리고 모여드는 붉은 들개의 포악한 눈빛이었다. 언젠가 사대법왕과 더불어 천축을 다녀오는데 굶주린 들개 떼가 몰려들었고, 지금처럼 파란 눈빛만 보였다.

객점에 들개 떼가 나타날 리 없었다. 하지만 선뜻 해답이 떠오르지 않아 입 안에 든 만두를 삼키며 파란 눈들을 보았다.

"저게 뭐냐?"

동천몽이 신기하다는 듯 파란 눈들을 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팔용의 말이 끊어졌다. 가슴을 짓누르는 엄청난 압박에 말을 더 이상 잇기가 쉽지 않았다. 그것은 강력한 살기였는데 금방이라도 몸을 난도질할 듯 거셌다.

그때 어둠 속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단한 배짱이십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느긋하게 자리에 앉아 계시다니."

누구를 향한 음성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동천몽이 히죽 웃었다.

"나?"

"……."

"정말 나야?"

동천몽이 팔용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팔용이 동천몽을 쳐다보는 파란 눈들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 모두 대법왕님을 쳐다보고 있잖습니까?"

"이것들이… 진짜네. 그럼 뭐야? 외부와 완전히 차단했다는 것은 이곳에서 나와 같이 뒈지겠다는 뜻 아니냐?"

"그…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어둠 속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의 무덤이 될지 아니면 우리의 무덤이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무덤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얼굴을 보기 위해 아무리 안력을 돋우어도 볼 수가 없었다. 자신의 내공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어지간한 어둠쯤은 꿰뚫고도 남는데 시력이 무력화될 정도면 단순한 어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체를 밝혀라! 감히 대법왕님을 해치려 들다니, 너희들이 제대로 정신이 박힌 놈들이냐?"

팔용이 어둠을 향해 외쳐 말했다.

하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고, 오로지 삼십여 쌍의 푸른 불꽃만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야생동물이 아닌 사람의 눈에서도 푸른 광채가 발산된다는 것을 동천몽은 오늘 처음 알았다.

그때 한 개의 푸른 눈이 앞으로 다가왔다.

두목일 것이다.

다른 눈들에 비해 가늘다. 눈이 가는 사람은 심성이 잔인하다는 얘기를 떠올렸다. 경험은 아니고 부친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부친은 눈이 가는 사람과는 가급적 거래를 하지 않았다.

"인사 올리겠사옵니다. 소생은 용건상이라고 합니다. 소인들의 무례를 용서하시옵소서, 대법왕님."

푸른 눈이 상하로 까닥 움직이는 것이 가벼운 목례를 하고 있음이다.

비록 움직이는 고개의 폭은 작았지만 동천몽은 용건상이라는 사내가 자신을 향해 마음을 담아 예를 차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천몽의 눈이 좁혀졌다. 생활의 분야만 다를 뿐, 상인이나 무인이나 공통점이 한 가지 있다. 노회한 상인일수록 예의가 바르고 솜씨가 뛰어난 고수일수록 경거망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익지 않은 벼는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그대들이 날 대법왕으로 예우하니 나 또한 대법왕답게 체통을 지켜 말해야겠군. 그냥 가라."

잔뜩 엄숙하고 장중한 설법이라도 나올 줄 알고 있다가 간단한 네 마디에 파란 불꽃들이 흔들렸다.

"대법왕이 되긴 했지만 난 아직 자비에 익숙하지 않다는 얘기다. 그러니 그냥 가. 그럼 산다."

"역시 소문대로 거치시군요."

동천몽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지난 삼 년여 절밥을 먹으며 많이 바뀐 거야. 옛날 성질 같았으면 이렇게 긴소리 하지도 않았을 거야. 우린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성미거든."

"이 패도무악한 용건상이 작별 인사 올립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대법왕님."

파란 불빛이 사라졌다 나타난 것이 용건상의 고개가 이번에는 깊숙이 숙여졌음을 알 수 있었다.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대법왕님을 모셔라."

파란 눈동자들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모든 문이 폐쇄되었다.

사실 닫힌 창문은 오늘을 위해 특별히 고안해 만든 만년한철로 된 것이라 문을 부수고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조건 싸워 이기는 것 말고는 이곳을 나가는 방법은 없다. 그것은 배수의 진을 의미했는데, 적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늘 자신을 죽이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감히 네놈들이."

팔용이 벌떡 일어서서 앞을 막아서려 하자 동천몽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물러나거라. 어차피 놈들의 표적은 나니."

"하… 하지만 대법왕님께서 위험에 처해 계시는데 어찌 한가로이 물러나 있을 수……."

"주접떨지 말고 비켜."

팔용이 머쓱한 얼굴로 물러났다.

동천몽이 의자에 앉은 채 뒤로 미끄러졌다.

드르르!

마치 의자가 바퀴가 달린 듯 뒤로 밀려갔다.

탁!

의자가 벽에 닿았다.

출렁!

그 순간 다가오던 파란 눈동자들이 흔들거렸다. 등을 벽에 기대는 것은 등 뒤로는 공격을 받지 않겠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또 하나 감춰진 속내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느니라."

"세이경청하옵니다."

"날 반드시 죽여라. 만약 죽이지 못하면 골치 아파진다."

"무슨 뜻인지 알겠사옵니다. 물론입니다."

슈우욱!

두 쌍의 파란 눈이 흰 섬광과 함께 달려들었다. 긴 꼬리를 물고 있는 흰 섬광은 검이 만든 기(氣)이다.

"쾌검이로군!"

동천몽의 양손이 벼락같이 흰 섬광을 쳐냈다.

딱!

따악!

두 개의 흰 섬광이 주춤 뒤로 밀려났다.

콰아아!

밀려가는 흰 섬광을 향해 두 개의 붉은 선이 곧바로 뒤쫓아 갔다.

붉은 선이 쫓아오자 밀려난 두 개의 흰 섬광이 흔들렸다. 보지 않아도 당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위기일발!

강한 반탄력에 밀려 나온 두 사내는 몸의 중심을 잡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뒤따라오는 붉은 선을 피하기란 불가능했다. 붉은 선은 동천몽이 펼친 지옥금이었다.

두 명의 사내가 위기에 처하자 주위 동료들이 도움을 주기 위해 동천몽을 공격했다. 두 사내를 향하고 있는 동천몽의 지옥금을 중단시킬 의도인 것이다. 동천몽 또한 당연히 공격의 방향을 틀어 동료를 구출하기 위해 파고드는 자들에게 대항해야 옳았다.

"엇!"

"맙소사!"

두 사내의 입에서 당혹성이 터졌다. 동천몽의 장력은 동료들의 공격을 무시하고 그들의 옆구리에 박혔다.

"커억!"

"꾹!"

퍼억!

장력이 두 사내의 옆구리에 구멍을 내는 순간 동료들의 공격 또한 동천몽의 몸을 때렸다.

퍼퍼퍽!

세 개의 검이 박혔다.

휘청!

의자에 앉아 상체만 옆으로 휘청거릴 뿐, 오뚝이처럼 다시 꼿꼿해졌다.

화악!

파란 불빛들이 접시만큼 커졌다. 죽지는 않는다고 해도 최소한 피라도 흘려야 하는데 피 흘리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 금강불괴."

누군가 더듬거렸다.

"아니다. 그건 말도 안 된다."

자칫 금강불괴로 인정해 버리면 사기 저하가 우려되었으므로 두목으로 보이는 가느다란 파란 불이 단호히 부정했다. 진짜 금강불괴일지라도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이다.

쉬이이이!

이번에는 세 개의 은광이 파고들었는데 품 자 형이었다. 공격을 당하는 쪽에서 가장 방어하기가 어려운 전술이 품 자 형태이다. 동천몽의 손이 바빠졌다.

붉은 섬광이 세 사람을 향해 뻗어갔다.

"화… 확실히 지옥금!"

앞선 공격에서는 긴가민가한 듯했다.

그런데 장력의 정체를 확실히 읽어내고 수하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지옥금에 대한 전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지옥금이 극성에 이르면 무적이다. 제아무리 절세의 보검일지라도 지옥금 앞에서는 온전하지 못했다. 무엇이든 두들겨 깨버린다. 그런데 조금 전 동천몽의 공격으로 보아 아직 그에 이르지는 못한 듯했다.

슈슈- 슉!

손은 두 개인데 은광을 향해 뻗어가는 붉은 손바닥은 세 개다. 두 개의 손으로 한 번에 세 개의 장을 쏟아내기란 불가능하다. 방법이라면 진기를 나눠 때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위력은 약화되지만 방어는 된다.

뻑- 뻐벅!

휘청!

예상대로 강한 타격에 동천몽의 상체가 뒤로 꺾여진다. 하지만 활처럼 뒤로 휘어졌던 상체가 다시 회복되면서 손을 뻗었다. 상체가 휘어졌다가 곧게 돌아오면서 공격을 펼쳤는데 하나의 초식으로 보일 만큼 연결 동작이 자연스럽다.

"어억!"

반탄강기에 밀려난 자신들은 아직 재공격할 진기를 끌어올리지 못했는데 지옥금이 쫓아오자 누군가 놀람성을 터뜨렸다. 진기를 끌어올리지 못했으니 받아치기는 불가능하고, 유일한 방법이란 동료들의 도움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동천몽은 동료들이 반격을 해오는데도 그대로 갈겨 버렸다.

빡- 빠박!

둔탁한 소리와 더불어 비명도 없이 세 개의 파란 불이 찌그러지며 쓰러진다.

"으음!"

동천몽의 다문 입술을 비집고 답답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걸병광우철포공은 상처를 입지 않는다. 하지만 충격으로 인한 기혈의 울림까지는 어쩔 수가 없다.

동천몽의 계산은 아주 단순했다. 동료를 돕기 위해 검이 오든 장력이 오든 상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한번 표적으로 삼은 상대는 반드시 죽이기로 했다. 걸병광우철포공을 믿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얻어맞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이라도 더 서둘러 없애야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한 번에 끝장을 보지 않고 공격이 이 표적, 저 표적으로 산개되면 체력만 소모될 뿐이다. 뒷골목 싸움에서도 여럿을 상대할 때는 전체를 공격 표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오로지 한 놈씩만 죽인다. 한 놈을 죽이고 또 다른 한 놈을 물고 늘어지는 식으로 제압해 가는 것이 효과적이다. 물론 그런 전법은 자신도 많이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죽엇!"

동료의 죽음에 감정이 상했을까.

한 개의 백색 선이 날아왔는데 검로(劍路)이다. 동천몽이 우장을 뻗었다.

콰앙!

"컥!"

절명의 소리다. 힘 또한 아낄 필요 없다. 모조리 쏟아 가급적 빨리 끝내는 것이 좋다.

파팍!

복부와 정강이에 강한 타격이 전해져 온다. 한 놈을 죽이고 두 개의 검을 맞은 것이다.

들썩!

의자가 뒤로 넘어질 듯했다가 원 위치로 돌아왔다.

빠악!

뻑!

동천몽의 손이 뻗을 때마다 적은 비명을 토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감각과 검이 폭사하는 검광을 보며 치고받는다.

뻐어어!

동천몽 또한 엄청난 공격을 받았다. 피는 나지 않았지만 강력한 타격이 가해지며 기혈이 소용돌이쳤고, 걸치고 있던 흑의는 걸레 조각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마구 쳐라!"

두목의 입에서 다급한 명령이 떨어졌다. 지금까지 어떤 전술을 갖고 공격을 가했다면 이제는 앞뒤 가리지 말고 마구 퍼부으라는 뜻이었다.

푸른 불꽃들이 날아오더니 유성이 떨어지듯 동천몽의 몸을 향해 내리꽂혔다. 언뜻 불을 보고 날아드는 불나방 같았다.

붉게 달궈진 두 개의 장영이 흰 섬광들을 맞이해 갔다.

팍- 파파팟!

유성처럼 쏟아지던 섬광이 파편이 되어 튕겨 나갔다.

빠박!

그 와중에 동천몽의 앞가슴으로 세 개의 흰빛이 파고들었고, 그에 맞은 동천몽이 신음을 흘리며 휘청거린다.

의자에 앉지 않고 움직이면 조금은 피해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적으로 하여금 자신의 공격 부위를 더 많이 노출시키는 위험이 따른다.

아무리 강한 적일지라도 시야를 벗어나지 않으면 상대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그런데 약한 적일지라도 시선을 벗어나 들어오면 곤란하다. 바로 거기에 배수의 진이 갖고 있는 장점과 단점이 있다.

동천몽의 눈빛이 횃불처럼 타올랐고, 혼신을 다해 쏟아져오는 검광을 쳤다.

빡!

버버벅!

지옥금으로 단련된 손이지만 워낙 강한 검들을 쳐내다 보니 손바닥이 얼얼해 온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탓이다. 결병광우철포공 또한 한계에 다다른 듯 몸이 붉게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봇물 터지듯 피가 쏟아질 기세다.

쉭!

정면으로 빛 하나가 들어왔다.

지금까지 본 섬광 중 가장 빠르다. 엄청난 쾌검이었다.

콱!

왼손이 검기를 막았다. 주춤하는 찰나 오른손이 검신을 정통으로 후려쳤다. 검이 옆으로 비켜나며 드러난 앞가슴에 좌장이 정통으로 찍혔다.

"크억!"

"후욱!"

즉사다. 동천몽 역시 악문 입술을 비집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보다 못해 팔용이 끼어들려고 하는데 귓가로 전음이 파고들었다.

"그대로 있으시오. 당신이 끼어들면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오."

팔용이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 환상루는 동천몽을 노리고 완전히 개조되어 있었다. 만년한철로 창문이 바뀌어 있을 뿐 아니라 흑자야오진이란 진법이 펼쳐져 완전하게 어둠을 만들고 있었다. 흑자야오진은 실내를 완전히 먹물로 만드는 진법이었다.

그래서 사전에 해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상대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약을 복용하면 상대는 동천몽의 솜털까지 볼 수 있다.

"누구요?"

팔용은 적 같아 보이지 않았으므로 전음으로 물었다.

"꼼짝 말고 있는 게 돕는 것이라는 걸 명심하시오"

퍼퍼퍽!

둔탁한 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파란 불꽃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것만 확인이 가능했다.

쉬쉬쉬쉭!

파란 불빛이 불나방처럼 날아왔고, 동천몽의 붉은 손이 그들 속에서 좌충우돌했다.

뻑!

한 쌍의 눈동자가 뒤로 밀려 나갔고, 그 뒤로 빨간 손 하나가 따라가 뒤통수를 두드렸다. 바가지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버- 뻐버버벅!

두 번은 없었다. 붉은 손이 움직일 때마다 비명은 있었다. 동천몽 역시도 한 명씩 죽일 때마다 두세 개의 검이 몸을 쑤셨고, 급기야 입으로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내상이 곪아 터진 것이다. 피부는 이제 붉다 못해 퍼렇게 멍이 들었다.

탁!

동천몽의 왼손이 찔러오는 검신 하나를 움켜잡았다.

치이익!

상대가 검을 비틀었다. 동천몽의 왼손을 완전히 부러뜨리려는 것이었다. 다행히 걸병광우철포공으로 살갗이 찢어지고 뼈가 끊어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타는 듯한 열기가 손바닥을 통해 전해온다.

동천몽이 휙 하며 검신을 잡아당겼다. 사내가 얼떨결에 끌려왔고, 오른손이 끌려온 사내의 명치를 정통으로 찍는다.

빡!

강력한 힘에 사내가 뒤로 날아갔고, 때마침 공격해 오던 두 사내의 검이 튕겨 나간 동료의 몸을 양단했다. 이미 동천몽에게 생명을 잃긴 했지만 동료를 베자 두 사내가 당황했다.

그 순간을 동천몽이 놓칠 리 없었다.

쉭!

시뻘건 혈장이 뻗어갔다.

두 사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늦었다.

"컥!"

"으허헉!"

동천몽은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의자 밑으로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피로 흥건했다. 하지만 눈빛은 꼿꼿했고 앞만 쳐다보았다.

뒤는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적은 무조건 앞에 있고 앞만 살피면 된다.

"개새끼, 죽어라."

욕설을 뱉고 두 개의 검이 들어오자 동천몽이 다시 쳐냈다.

처음보다 위력이 떨어졌지만 두 개의 검은 지옥금의 충격에 좌우로 벌어지며 아슬아슬하게 어깨를 스친다. 그러나 두 사내는 아랫도리를 노출했고, 동천몽의 두 발이 바람을 갈랐다.

"헉!"

"꺽!"

정통으로 낭심을 찍힌 두 사내가 숨넘어가는 비명을 토했다.

힘이 실린 한 방이기도 했지만 급소인지라 두어 번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말없이 무너졌다.

학학!

동천몽의 호흡도 거칠어졌다. 체력이 거의 바닥에 달한 듯했는데 눈빛만큼은 무정하다. 그것은 활불로 불리는 대법왕의 눈빛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로지 죽이고야 말겠다는 살의였다.

남은 파란 불빛은 정확히 열 쌍이었다.

진한 피비린내가 실내를 메웠고, 열 쌍의 파란 눈이 동천몽을 향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촤촤촤악!

강력한 쌍장에 파고들던 검기가 주춤했다. 무형의 벽에 막힌 듯 번쩍이는 은빛 검신들이 파르르 몸서리를 친다.

십 대 일.

파파파팡!

서로 밀리지 않기 위해 엄청난 내력이 쏟아졌고, 어둠이 경련을 일으켰다.

쿠우우우!

가로막고 있는 동천몽의 지옥금을 뚫기 위해 열 개의 검신이 더욱 희어졌다. 사내들이 혼신의 진력을 검신에 주입함으로써 빛이 더욱 강해졌고, 급기야 유리처럼 투명해졌다. 동천몽의 쌍장 역시 더욱 핏빛으로 물들었다.

우당탕!

밀고 들어가려는 열 개의 검기와 막는 장력의 대치는 실내를 거센 기파로 가두어 버렸고, 의자와 탁자들이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되어 부스러졌다.

"꾸울꺼억!"

한쪽 구석에서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백쾌섬이 마른침을 삼켰다. 난생처음 보는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강호에서는 숫자가 적다고 지는 것은 아니다. 한 명이 백 명과 싸워서 이길 수도 있는 곳이 강호이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능력이 어느 정도에 올라 있는 자들과 싸워 이겼느냐에 따라 그 명성이 달라지는데, 자신이 보는 장사꾼들로 변장한 자객들은 일류였다.

특히 이미 많은 적을 처치한 뒤끝이어서 내력이 상당히 소모되었을 텐데 열 명과 과감히 내공의 격돌을 벌이는 동천몽의 투쟁력은 무모하다기보다는 경이로웠다.

"아자자!"

"죽어어엇!"

사내들이 악을 썼다. 젖 먹던 힘까지 검에 실어 동천몽의 몸에 구멍을 내려는 기합이 귀청을 찢을 듯 실내를 울렸다.

추울렁!

붉은 벽이 흔들리며 동천몽 쪽으로 밀려간다. 동천몽의 힘이 부족함이다.

바로 그때, 동천몽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지금까지는 죽은 사람의 눈처럼 단 한 번의 변화나 움직임없이 달려드는 적을 묵묵히 죽일 뿐이던 무정목(無情目)이 작은 파장을 일으킨 것이다.

동천몽의 발아래는 맞아 죽은 시신이 있었는데, 배 위로 한 자루 검이 가로질러 떨어져 있었다.

탁!

동천몽이 손잡이를 툭 치듯 밟았다. 그러자 검은 강한 반동에 공중으로 튕겨 올랐고, 그 순간 열 사내의 검기를 가로막고 있던 동천몽의 쌍장이 거두어졌다.

촤악!

강력하게 버티고 있던 엄청난 힘이 일시에 소멸되자 열 사람의 검기는 중심을 잃고 무너지듯 앞으로 쏟아졌다.

탁!

그때에 동천몽의 오른손이 튀어 오르는 검의 손잡이를 낚아채더니 길게 횡으로 그었다.

촤아악!

열 개의 검기는 단단히 뭉쳐 있었는데, 동천몽이 힘을 빼자 돌덩어리 같던 결집력이 흐트러진 것이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동천몽의 검이 십 인의 검기를 베었다.

일섬단극(一閃斷極).

만마생사혈 중 가장 빠른 쾌검이었다.

쫘아악!

그 순간 백쾌섬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사내들의 검기가 두부처럼 깨끗하게 잘려지고 있었다. 수평으로 그어진 검은 나무를 자르듯 십 인의 허리를 단번에 싹둑 가르며 지나갔다.

죽음 같은 정적이 실내를 덮는다. 검에 베인 열 쌍의 파란 눈이 찢어질 듯 커져 있었다.

털썩!

한 쌍의 눈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투투투투!

연이어 아홉 쌍의 파란 불빛이 상체와 하체가 양단되며 무너져 내렸다.

꿈틀!

그런데 한 쌍의 눈이 일어서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출렁거렸지만 기어코 몸을 바로 세웠다. 하지만 제대로 서 있지를 못하고 술 취한 사람처럼 좌우로 비틀거린다.

가느다란 눈, 두목임을 알 수 있다.

"우… 우! 이… 이건 악몽……."

충격이 너무 큰 탓인지 쇳소리를 흘렸다.

어둠에 적응할 수 있는 해독약을 복용했기에 자신의 눈에는 동천몽의 모습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였다.

조그만 의자에 앉아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절정고수 스물아홉을 베었다. 입가의 피를 보면 적지 않은 내상을 입은 듯했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할 만큼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휙!

동천몽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검을 던지더니 손바닥을 툭툭 털며 발을 꼬았다.

"용건상이라고 했던가?"

동천몽의 눈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문 좀 열지 그래. 아무리 눈에 힘을 줘도 안 보이는 것이, 무슨 진법 같은데?"

용건상은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 열어, 이 새끼야!"

동천몽이 인상을 썼다.

용건상이 더듬거렸다.

"이… 입구 기둥 두 번째 중간 부위에 보면 진법을 해제하는 기관 장치가 있소이다."

동천몽이 팔용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팔용이 더듬거리며 입구로 가 두 번째 기둥을 살폈는데 주먹만 한 돌출 부위가 손끝에 만져졌다.

탁!

팔용이 돌출 부위를 주먹으로 때리자 닫혔던 출입문과 창문이 일제히 열렸다.

그그그긍!

끼익!

어둡던 실내가 환해졌다.

'맙소사!!'

'아미타불!'

팔용과 백쾌섬이 앞 다투어 신음을 터뜨렸다.

상황은 끔찍했다. 수많은 시신이 걸레 조각처럼 찢어져 있었고, 일부는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었다. 표정이 공포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는 것은 동천몽의 지옥금이 그만큼 파괴적이었음을 보여주었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용건상이었다. 그는 놀랍게도 점소이였다.

"나참!"

동천몽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곧바로 이마를 찡그리더니 왼쪽 옆구리를 살폈다. 주먹만 한 멍이 생기다 못해 튀어나와 있었다. 걸병광우철포공이 버텨주긴 했지만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죽은피가 폭포처럼 쏟아질 것 같았다.

"대… 대법왕님."

팔용이 걱정스런 얼굴로 쳐다보았다. 동천몽은 가볍게 신음을 한 번 터뜨린 후 시신들을 보았다.

"아는 얼굴이 있느냐?"

팔용이 시신들을 훑어보았다. 하지만 전혀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시신을 살피던 동천몽의 시선이 백쾌섬에게 멎었다. 잠시 놀라운 표정을 짓던 동천몽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씨익!

느닷없는 웃음에 백쾌섬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백쾌섬이 웃음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 동천몽이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손님이 있는 줄 알았으면 좀 더 뽀대나게 싸우는 건데."

동천몽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는데 백쾌섬을 바라보는 시선이 평범하지 않았다.

절정고수라 해도 자신과 사내들이 뿜어낸 기파에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 솜씨 하는 무인일지라도 지금 같은 싸움에 휩쓸리면 온전하지 못할 만큼 양측이 뿜어낸 기파는 난폭했다. 그런데도 전혀 타격을 받거나 영향을 받은 행색이 아닌지라 백쾌섬의 진면목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백쾌섬은 백쾌섬대로 눈이 커져 있었다. 진법이 해체되면서 드러난 동천몽의 얼굴이 어디서 본 듯했기 때문이다. 선뜻 떠오르는 얼굴은 없지만 눈에 익었다.

"본래의 쌍판인가?"

동천몽이 묻자 용건상은 망설임없이 얼굴을 찢었다.

그러자 중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눈썹이 짙고 눈이 부리부리한 것이 호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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