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9화 (9/71)

제9장 만인지상

피 바람이 불었다. 그것은 포달랍궁이 창건된 이래로 가장 큰 피였다. 만경을 따르던 승려들 중 그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대부분 투항을 했지만 그중에는 끝까지 저항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저항하는 그들을 모조리 제거해야했다. 한번 어긋난 나뭇가지는 아무리 바로 잡으려 해도 늦다. 살려둬 봤자 끝없이 말썽을 일으킬 것이라는 게 그들을 제거토록 결정한 동천몽의 생각이었다.

좀체 보기 드문 청명한 날씨였다. 밤새 벌어진 피의 폭풍이 너무 거센 탓일까 오늘 따라 태양이 더욱 눈부셨다. 멀리 대설산의 만년설이 더욱 웅장했고 백궁(白宮)의 용마루 또한 한 마리의 백룡이 길게 누워 있는 듯 힘차게 뻗어나가 있었다.

“그자는 지금 어디 있는가?”

천검은왕이 천룡구십구불의 수장인 대력선사에게 물었다. 대력선사의 가사 곳곳에 핏자국이 묻어 있는 것을 보아 밤사이에 있었던 싸움이 얼마만큼 처절했는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수라옥(修羅獄)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이번엔 동천몽이 물었다.

“많이 다쳤다고 했나?”

“천룡구십구불 중 무려 열 아홉명이 그의 손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실로 대단한 능력이었습니다.”

대력의 아직도 놀라움이 채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미타불! 배교의 후예라면 만만한 인물이 아닐 걸세.”

천장금왕이 침대에 누워 있는 동천몽을 보며 말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일목이란 자 말입니다. 살려둬봤자 해만 끼칠 것이 뻔한데.”

모든 시선이 동천몽에게 모아졌다.

동천몽이 죽이라고 명령하면 일목의 목은 오늘을 넘기지 않고 베어질 것이다.

동천몽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계산을 하는 듯한참동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더니 조용히 말했다.

“당분간 가둬 놓도록.”

당장 죽여야 한다고 말하려다 천장금왕은 입을 다물었다. 대법왕이 내린 결정은 지엄하다. 왜냐는 이유나 질문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대법왕의 권위를 위해하는 대죄이다.

보름이면 목뼈가 붙는다고 했지만 워낙 복합적인 골절이 되어 한 달이 지나서야 동천몽은 움직일 수 있었다. 만동승의와 천장금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목을 떼어 내고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돌려보았다. 아무런 이상이 없자 만동승의가 말했다.

“좀 더 빠르고 세차게 돌려 보십시오.”

동천몽이 휙휙 소리가 나게 목을 좌우로 돌렸다. 역시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만동승의의 지시에 따라 이번에는 상하로 고개를 격렬하게 저었다. 어지러울 만큼 세차게 목을 앞뒤로 저었지만 통증은 물론이고 아픔도 없었다.

“제대로 잘 붙은 듯 합니다.”

“부러진 뼈가 붙으면 전 보다 더 강해진다는데 사실이냐?”

만동승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더욱 단해지지요.”

“호오! 그래.”

그러더니 목을 풀듯한 바퀴 돌린 동천몽이 벼락처럼 실내 좌측 기둥을 들이 받았다. 기둥은 검은 돌로 된 석주였다.

쿠쿵!

엄청난 소리가 흘리며 돌가루가 우스스 떨어졌고 머리가 부딪힌 곳이 움푹 패였다.

천장금왕과 만동승의가 기절할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괘…괜찮으시옵니까?”

동천몽이 목을 좌우로 흔들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군. 옛날 같았으면 이 정도 세게 박으면 목이 찌르르 하며 아팠을텐데.”

동천몽의 입가에 야릇한 웃음이 떠올랐고 천장금왕은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직접 돌기둥에 머리를 박아 확인을 해보다니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 날부터 동천몽은 다시 무예수련에 매진했다. 이미 만마생사혈과 지옥금의 형(形)은 완벽에게 소화시켰고 이제는 같은 동작을 반복 숙달키는 과정에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만마생사혈과 지옥금의 초식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애초 사대법왕으로부터 배웠던 자세에서 조금씩 틀어지고 있었다.

“꿈틀!”

동천몽의 눈썹이 모아졌다. 처음 몇 일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대법왕에게 배웠던 자세와 점점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공을 배우다 제 형을 벗어나면 주화입마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경고를 천장금왕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더럭 걱정이 되었다. 처음 자세에서 틀어지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수련하다 조금만 속도가 빨라지고 깊이 빠져들면 예외 없이 엉뚱한 동작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자세 변형이 잘못된 것이라면 진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해야 하는데 전혀 그런 느낌이나 징후는 없었다. 오히려 들판을 달리는 천리마처럼 거침이 없었고 몸놀림도 부드러워졌다. 더욱 황당한 것은 갈수록 위력이 높아진다는 것이었다.

‘이 무슨 해괴한 경우지!’

동천몽의 고개가 연신 갸웃거려졌다.

자신의 머리로서는 눈앞의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래의 형에서 벗어났으면 위력도 감소하고 진기의 흐름도 둔탁해지면서 몸에 이상이 느껴져야 정상이었다.

파파팍!

손에 쥐어진 목검은 더욱 파상적으로 허공을 누볐고 좌우 쌍장이 번득일 때마다 무려 반자 깊이로 석굴에 손바닥 자국이 새겨졌다.

‘거 참!’

일단 몸에 이상이 없었기 때문에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다. 천장금왕이 말하길 초식이 틀어지거나 잘못 되면 가장 먼저 진기의 흐름에서 장애가 발생한다고 했는데 전혀 그런 현상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수련에 매달렸다.

콰쾅쾅!

퍼퍼퍽!

기기묘묘한 종유석이 빚어낸 아름다운 동굴은 완전히 폐허로 변해 있었다. 물방울이 흘러내리듯 천장을 가득 채우던 종유석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이 곳 저곳 처마를 떠받치듯 우뚝 서 있던 석순도 잘리고 파괴되어 동굴은 휑 했다.

“저…저건!”

동굴 입구를 들어서던 천장금왕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 막종오는 손에 목섬을 쥐고 만마생사혈을 펼치고 있었는데 바라보던 천장금왕의 볼이 씰룩거렸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연거푸 충격을 감추지 못하는 불호가 터져 나왔고 나중에서야 천장금왕의 기척을 알아차린 동천몽이 검을 거두며 돌아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느냐?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느냐?”

천장금왕이 다가오면 말했다.

“송구하지만 다시 한 번 소승이 보는 가운데서 만마생사혈을 펼쳐 보여 주시겠습니까?”

동천몽이 왜 그러느냐고 땀방울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천장금왕이 말했다.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서 그러하옵니다.”

동천몽이 알았다는 듯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더니 곧바로 검을 세우고 몸을 날렸다. 바닥을 한번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친 그의 검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쉭쉭쉭!

두 눈을 부릅뜨고 동천몽의 검을 바라보던 천장금왕이 꿀꺽 소리가 날 만큼 침을 삼켰다.

‘부…분명한 귀정(歸井)!’

동천몽의 검은 유려했다.

사뿐사뿐 허공을 날아다녔고 미풍처럼 보드랍게 밀려갔다.

검무(劍舞), 처음 강렬하고 파괴적이며 거칠던 검형은 모난 곳 없이 잘 다듬어진 도자기처럼 둥글고 아름다우며 포근하기까지 했다. 사람을 죽이는 무예라기보다는 완벽함 춤사위였다.

여전히 넋이 빠진 모습으로 서 있는 천장금왕을 보며 검을 거둔 동천몽이 이마를 찡그렸다. 자신의 틀려진 자세를 알아보았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얼굴이 어두워진 것이라고 느낀 것이다.

“네가 보기에도 처음과 많이 어긋나 있지? 젠장! 아무리 고치려 해도 안 되는데 미치겠구나.”

“아…아니옵니다. 그것은 잘못된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것이옵니다.”

무슨 말이냐는 듯 동천몽이 쳐다보았고 천장금왕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런 현상을 흔히 귀정이라고 부르죠.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샘에서 흘러나온 물이 다시 샘으로 돌아간다는 뜻이죠. 원래대로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어려운 말이라는 듯 얼른 이해하지 못하고 동천몽은 바라보기만 했다.

천장금왕이 서둘러 설명을 했다.

“만마생사혈과 지옥금은 적지 않은 세월을 흘러 내려왔지요. 더구나 대법왕께서 입적하시기전 사대법왕에게 서둘러 가르치다보니 조금씩 본래의 형태가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행히 사대법왕의 자질이 뛰어 났을 때는 변형이 작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상당히 원래의 위력에서 이탈을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과 지금의 것에서 위력차이가 있단 말이냐?”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큽니다. 그런데 지금 대법왕께서 원래의 위력으로 만마생사혈과 지옥금을 돌려놓고 계십니다.”

“알지도 못하는 내가 어떻게 제 모습을 재현했단 말이냐?”

“소승이 말했잖사옵니까? 대법왕께서는 체신혜감이라고 말이옵니다. 몸 스스로가 초식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고 원래대로 찾아 돌아 간 것입니다.”

그제 서 야 만마생사혈과 지옥금이 원래에서 조금씩 멀어진 이유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땀에 온 몸이 젖어 있는 동천몽을 보는 천장금왕은 속으로 연신 아미타불을 중얼 거렸다. 무예에 관한 자질하나 만큼은 세존이 내렸다고 해도 좋았다. 머리가 나쁜 대신 세존께서는 야수보다 뛰어난 감각적인 몸을 준 것이다. 그것은 무의 집단인 포달랍궁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자비였고 홍복이었다.

귀정이라는 경지까지 오른 동천몽의 능력에 천장금왕의 입가에는 웃음이 맺혔다.

“보아하니 무슨 용건이 있는것 같구나? 말해 보아라. 또 궁내에 불편한 일이라도 생긴 것이냐? 만경 늙은이도 죽었으니 크게 골치 썩힐 일은 없을텐데?”

“그렇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시급히 행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사옵니다.”

“뭐지?”

“법통을 잇는 일입니다. 당장 대법왕의 즉위식을 열어야겠습니다.”

“무슨 일 있느냐?”

천장금왕의 굳어진 표정을 보며 동천몽이 물었다.

천장금왕이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만경사숙 일당이 축출되면서 대법왕의 환생자가 궁내에 들어와 있다는 소문이 퍼져 이제 모르는 제자들이 없사옵니다. 그런데 소문만 돌 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일부에서는 소승을 비롯한 사대법왕이 만경을 밀어내고 대법왕의 자리를 거머쥐기 위해 있지도 않는 대법왕의 환생자를 만들어 냈다는 해괴한 소문이 떠돌고 있습니다.”

“……”

“갈수록 우릴 보는 제자들의 시선이 좋지 않습니다. 이대로 놔뒀다가는 만경사숙이 있을 때보다 더 분란이 야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존재를 드러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내가 있다는 것을 선포해야 한다는 말이냐?”

“대법왕께서 정말로 환생했음을 보여주어야 우리를 향한 제자들의 의심이 풀릴 뿐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심정적으로 만경사숙을 지지하거나 따랐던 제자들 또한 완전히 꿈을 포기하고 돌아올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즉위식을 해야 한다는 얘긴데 하지 뭐. 괜찮은 날로 잘 한 번잡아 보거라.”

동천몽이 다시 무예를 수련하기 위해 검을 힘껏 쥐었다.

천장금왕이 입가에 웃음을 지었고 동천몽이 물었다.

“왜 웃느냐?”

“아무리 생각해도 만경사숙을 죽인 일이 꿈만 같아서 말입니다. 죽인 것도 놀랍지만 소승의 기분을 더욱 즐겁게 하는 것은 대법왕께서 착안하셨다는 형님지계라는 계책입니다. 아직까지 수많은 병서를 읽고 독파했지만 어디에도 그런 이름의 병략은 없었습니다. 포달랍궁 제일 고수를 죽였으니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병략이 분명합니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그렇게 호들갑이냐는 듯 동천몽이 피식 웃었다.

대법왕 즉위식 날짜가 정해졌다. 만경이 죽은 뒤 정확히 다섯 달 만의 일이었다.

즉위식 날짜가 정해지자 반신반의하던 제자들 또한 들끓기 시작했다. 십육 년 동안 천하를 뒤져서도 찾지 못했던 환생자를 찾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했다. 일부 성급한 제자들은 천장금왕이 가짜를 내세울지 모른다는 악소문까지 더욱 부풀어 돌고 있었다.

즉위식이 열리기 하루 전 날 밤 동천몽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까짓게 무슨 대수냐고 생각했는데 막상 날짜가 하루 앞으로 다가오자 은근히 긴장이 되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일만 이천 명 뿐만 아니라 서장을 통치하는 황제가 된다는 생각에 자꾸 목이 탔다.

대법왕(大法王)이자 황제(皇帝).

황제라고 하면 자금성에 거주하며 곤룡포를 온 몸에 휘감은 만인지상의 인물이다. 그런데 자신 또한 그런 위치에 올라선다니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흥분과 긴장으로 차를 훌쩍거리고 있을 때 문이 열리더니 천장금왕이 들어섰다.

천장금왕이 맞은편에 앉으며 미소를 띄었다.

“잠이 오지 않나보군요?”

“허험! 솔직히 조금은.”

“대법왕의 자리가 어디 보통 자립니까? 더구나 서장의 수만 백성들의 어버이가 될 터인데 쉽게 잠이 올 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맘 푹 놓으십시오.”

그러면서 소매 춤에서 한통의 서찰을 꺼냈다.

“무슨 서찰이냐?”

“내일 즉위식을 하면 제자들에게 피와 살은 아니어도 삶에 교훈이 되는 좋은 말씀 한마디쯤은 해야 합니다.”

동천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지. 그래서 피와 살이 될 말을 적어 왔단 말이냐?”

“직접 한번 살펴보시지요.”

동천몽이 건네준 서찰을 받아 살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서찰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한 참을 읽던 동천몽의 이마가 가볍게 찌푸려졌다. 그러다 고개도 갸웃거려졌는데 뭔가 못마땅한 듯 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끝까지 서찰을 읽은 동천몽을 보며 천장금왕이 물었다.

“너무 어려워서 그러하옵니까?”

“굳이 어렵다기 보다는.”

“염려 할 것 없습니다. 담긴 뜻은 제자들이 알아서 새길 테니 신경쓸 것 없습니다. 그냥 소승이 써 준대로 읽기만 하면 됩니다. 오히려 너무 쉬운 말씀을 해도 품위가 서지 않습니다.”

“그건 그렇지. 좋아. 이대로 가자.”

동천몽이 서찰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천장금왕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대법왕께서는 제 십육대 포달랍궁의 궁주이자 서장의 만 백성을 다스리시고 생사를 주관하는 황제이기도 하십니다. 앞으로는 행동거지뿐만 아니라 말씀 또한 각별히 가려서 하셔야 하옵니다. 품위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지요.”

“날 바보로 아는구나. 이런 말 들어보았느냐?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 흐흠! 염려 말거라. 누구도 감히 내 앞에서 함부로 경거망동 못하도록 할 엄청 힘줄 자신있으니까.”

“목에 힘을 주라는 것이 아니라 위엄을 갖추라는.”

동천몽이 버럭 소릴 질렀다.

“그게 그거 아냐.”

동천몽이 인상을 쓰자 천장금왕이 움찔 하며 입을 다물었다.

천장금왕이 머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소승은 이만.”

천장금왕이 합장을 해보이고 방을 나갔다.

차를 두어 모금 마시던 동천몽이 천장금왕이 주고 간 서찰을 다시 펼쳐들었다. 서찰을 읽는 동천몽의 좁은 이마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한 구절도 알 수가 없었다.

그때 팔용이 들어서더니 넙죽 절을 했다.

“이 밤에 웬 절이냐?”

팔용이 깊숙이 절을 하며 고개를 쳐들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심으로 대법왕의 위에 오르심을 축하드리옵니다.”

“아직 오르지 않았다.”

“내…내일은 무척 바쁠 것이고 그러다보면 대법왕님의 존안을 뵙기 어려울 것 같아서 미리서 올리는 것이옵니다.”

“고맙다.”

“존경합니다.”

팔용이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오백 년 전 포달랍궁이 지배하는 서장무림에 피의 폭풍이 일어났다. 타도 포달랍궁을 외치며 일어난 인물들은 스스로를 아수라의 후예라고 부른 수라삼백육십오군(修羅三百六十五君)이었다. 하나같이 절정의 마공으로 무장한 그들의 기세는 삽시간에 서장을 시산혈해로 만들며 포달랍궁을 침범했다.

백일혈전(百日血戰)으로 불리는 수라삼백육십오군과 포달랍궁의 백일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침공을 받은 포달랍궁이 밀렸고 궁의 삼분의 이가 그들에게 점령당했다. 그러나 당시 폐관수련 중이던 대법왕 화우감천(火雨甘天)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전황은 백팔십도 바뀌었다. 만마생사혈을 깨우친 그의 가공할 검에 수라삼백육십오군은 무릎을 꿇었고 이후 목숨을 다해 화우감천을 받들겠다는 충성의 서약으로 자신들의 피를 묻혀 지은 건물이 바로 홍궁(紅宮)이었다.

피빛의 궁전 앞에 일만이 천 명의 제자들이 도열해 있는데도 숨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단상에는 십이법신을 비롯해 사대법왕 중 천검은왕과 천권동왕, 그 이외에 포달랍궁의 원로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날씨는 맑았고 해는 조금씩 중천을 향해 줄달음질 치고 있었다. 도열한 제자들의 두 눈은 단상 뒤에 고정되어 있었다. 말로만 들었지 아직 한 번도 환생한 대법왕의 얼굴을 보지 못한 그들의 얼굴은 기대와 흥분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태양이 중천에 이르고 그림자가 사라지는 일중무영(日中無影)일 때 커다란 외침이 홍궁을 울렸다.

“대법왕님께서 납시오.”

우렁찬 외침과 더불어 일만이천명의 제자들이 일제히 그 자리에 오체투지를 했다. 단상의 원로들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워 허리를 구부렸다.

구구궁!

단상 뒤쪽 홍궁의 문이 요란하게 열리더니 천장금왕의 안내를 받은 동천몽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흰 코끼리(白象)가 수놓아진 금포를 걸쳤고 일만 이천 명을 근엄한 시선으로 쳐다보며 천천히 다가왔다.

원로들 있는 단상을 가로질러 관세음보살상이 조각된 탁자 앞에 우뚝 서자 천장금왕이 큰 소리로 외쳤다.

“만제기립(卍弟起立)!”

오체투지를 하고 있던 일만 이천의 제자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고 단상의 원로들까지 큰 소리로 합장하며 외쳤다.

“아--미--타--불!”

천둥보다 큰 웅장한 불호가 홍궁을 뒤흔들었고 주위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들이 놀라 날개 짓을 푸드득거렸다.

“상면(上面)!”

그러자 제자들의 숙여졌던 고개가 일제히 들렸다.

“아미타불!”

“오오! 어쩌면 저리도 같단 말인가? 입적하신 대법왕님께서 돌아오심이 분명하도다.”

동천몽을 향해 제자들이 놀라움과 탄성을 내 뱉었다.

“대법왕이시여.”

“당당하시도다. 저 눈빛이야 말로 완전 중생을 바라보는 세존의 자비로다.”

제자들이 흥분하여 떠들었다.

“갈!”

천장금왕이 외쳤다. 내공이 실린 사자후에 홍궁이 들썩 거렸고 웅성거리며 떠들던 일만 이 천의 제자들이 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 들었다.

“지금부터 십육대 대법왕님의 설법이 계실 것이다. 제자들은 모두 가슴깊이 대법왕님의 말씀을 담아 삶의 주춧돌로 삼길 바라노라. 알겠느냐?”

“아…미…타…불!”

제자들이 함성처럼 불호를 외웠다.

동천몽이 자신을 쳐다보는 일만 이천 쌍의 눈을 스윽 훑어보았다. 하나같이 반짝거리는 것이 기대와 설렘으로 넘쳐 보였다.

“무진의보살이 백불언 하되 세존 아금에 당공양관세음보살 하리이다.”

동천몽이 큰소리로 외쳐 말했다.

흠칫!

꿈틀!

제자들은 물론 단상에 앉아 있는 원로들이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동천몽이 지금 뱉은 말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가에서 잔뼈가 굵은 자신들도 처음 들어보는 낯선 설법이었기 때문에 더욱 눈을 크게 떴다.

“즉행경중보주영락 가치백천량금. 제자들이여, 이 말이 무슨 뜻인 줄 아는가?”

동천몽의 질문에 장내가 숨을 죽였다.

동천몽의 날카로운 시선이 제자들을 찌르듯 쳐다보았고 그와 눈이 맞주 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부는 고개를 숙이거나 돌리기도 했다. 어느 누구도 말뜻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정녕 아는 제자가 단 한명도 없단 말인가? 아는 제자는 손을 들라.”

동천몽이 버럭 소릴 지르자 천장금왕이 전음을 보냈다.

‘대법왕이시여 굳이 손을 들라고 할 것 까지는 없사옵니다. 적당히 하시고 넘어 가십시오.’

동천몽이 실망스럽다는 듯 제자들을 노려보더니 이번에는 뒤로 돌아서더니 원로들을 향해 물었다.

“그대들 중에 아는 사람 있느냐? 있으면 손을 힘차게 들어 보아라.”

원로들 또한 당황해 하며 얼굴이 붉어졌고 일부는 헛기침을 하며 바닥을 쳐다보거나 엉뚱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콰앙!

동천몽이 탁자를 주먹으로 쳤다.

“아미타불! 한심하도다. 정녕 실망했도다. 이 많은 제자들 중 어찌 본왕이 뱉은 말을 단 한명도 알아듣지 못한단 말이냐? 오호 통제라! 귀를 씻고 잘 새겨 듣거라. 졸거나 딴짓 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동천몽이 형형한 안광을 쏘아 보내며 말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런 뜻이니라. 무진의 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는데 세존이시여 나는 지금 마땅히 관세음보살을 공양하겠나이다. 하면서 목에 걸었던 가격이 백천 냥이나 되는 보배 구슬과 영락을 받들었다는 말이다. 알겠느냐?”

“아…미…타…불!”

“후…훌륭하옵니다. 미천한 제자들의 머리를 깨어나게 해주셔서 감사 하나이다 대법왕이시여.”

제자들의 얼굴에 감탄과 감동의 물결이 일었고 단상의 원로들까지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대법왕의 환생자는 신통력을 갖는다. 그중 하나가 아주 어려운 법문을 술술 이해하고 꿰뚫는다는 것인데 지금 동천몽이 그런 현상을 제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너무 어려운 것 같으니 내가 이제는 풀어 말하겠노라. 무진이 또 여쭈었다. 어진이며 법으로써 드리는 이 보배 구슬과 영락을 받아 주옵소서. 그러자 관세음보살이 사부 대중과 하늘, 용과 사람이 아닌 듯한 것들을 불쌍히 여겨 그걸 받아 반으로 쪼개어 한 몫은 석가모니불에게 마치고 한몫은 다보불탑에 바쳤다.”

동천몽의 목소리는 홍궁의 앞뜰을 가득 메운 일만 이천 제자들의 귓속을 파고들었고 제자들은 거대한 함성으로 응답했다.

“아미타불!”

“나의 눈이 열리도다.”

“각설하고 오늘 내가 너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니라. 정직해라. 정직하면 부처님께서 돌보신다. 정직하지 않은 자는 당장 산을 내려가라. 이곳은 정직한 사람만이 살 수 있는 극락이니라.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아미타불.”

“가…가슴이 뜨거워집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마치겠다. 이상.”

그리고 몸을 돌려 홍궁으로 걸어갔다.

수많은 제자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고 원로들까지 박수로 홍궁으로 들어가는 동천몽을 배웅했다.

“막혔던 것이 확 뚫리는구나.”

“과…과연 대법왕님 다우신 뛰어난 설법이셨다.”

제자들이 함성과 감탄을 아끼지 않았고 동천몽은 홍궁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많은 것에서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그동안 십육 년 동안 비워져 있었던 대법왕의 자리가 채워졌다는 것이었다. 수장이 있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중 가장 큰 차이는 조직의 안전성이었다.

수장이 없음은 불손한 자들에게 반란이란 피의 충동질을 한다. 그 실예가 만경의 야망이었다. 설혹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조직의 질서와 체제가 흔들린다. 수직적인 구조가 흔들리면 조직은 균열과 분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외부의 침략이나 혼란에 휩싸이는데 즉위식이 있음으로 그동안 느슨해져 있던 힘의 중심이 완전히 잡혔다.

또 하나는 인사이동이었다. 십 육 년 간 대법왕이 공석이 되면서 단 한 번의 조직개편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모든 인사권이 대법왕에게 쥐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집단이건 상벌 규정이 명확하고 뚜렷해야 융성한다. 그런데 대법왕이 공석이 되므로 인해 부지런히 무예를 수련하고 공을 세워도 마땅한 상이 주어지지 않자 상당한 사기저하를 가져왔었다.

그런데 이제 동천몽이 등장함으로 대규모 인사태풍이 불 것은 자명했고 모든 능력의 우선순위가 강한 무예인만큼 그 동한 수련을 게을리 했던 제자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조용하던 포달랍궁이 무예를 수련하는 제자들의 함성과 움직임으로 활기가 넘쳤다.

동천몽 또한 무예수련에 적극적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와 다르게 깨우치면 깨우칠수록 기분이 좋아졌고 흥미가 동했다. 저자거리를 쏘다니며 힘을 위력을 누구보다도 일찍 깨닫고 실감한 동천몽으로서는 게으름을 피울 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하루하루 무예가 증진될수록 더욱 수련에 빠져들었다.

강요가 아닌 스스로의 노력이었기 때문에 성취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빨랐다. 동물적인 몸의 감각을 지닌 체신혜감의 능력까지 더해지면서 동천몽의 무예는 가파르게 성장했다.

포달랍궁에 들어 온지 어느덧 이년이 반이 흘렀다. 시간은 동천몽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그중 가장 많은 변화를 가져온 나이였다.

열여섯의 치기어린 나이에 끌려와 어느덧 열아홉 성인이 되었다. 뽀얀 솜털로 뒤덮인 턱과 코밑은 밤송이 같은 검은 수염이 자리해 있었고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멍울이 질 만큼 연약해 보이던 흰 피부는 검게 그을려 있었다. 작달막하던 체격도 훌쩍 성장했고 무예를 수련하여 어께는 바위덩이처럼 쩍 벌어져 있었다.

뜨거운 물로 몸을 씻고 중요부위만 가린 체 방안으로 들어서자 팔용이 갈아입을 법의와 가사를 받쳐 들고 있었다. 이제 승복이 속의(俗衣) 보다 훨씬 자연스러웠고 거부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사를 어깨위로 걸치고 동경 앞에 섰다. 동경 속에 한 명의 승려가 당당하게 서 있었다.

허험!

자신의 모습에 근엄한 헛기침을 내 뱉은 후 백옥으로 된 태사의에 떡 앉았다.

“저…저어 대법왕님께 한 가지 묻고 싶은 말씀이 있사옵니다.”

그때 갈아 입은 법의를 들고 나가던 팔용이 몸을 돌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동천몽이 목소리를 깔아 말했다.

“말해 보거라.”

그런데 팔용이 눈치만 살필 뿐 선 뜻 질문을 하지 못했다. 팔용이 계속 주저하자 동천몽이 이마를 약간 찡그리며 말했다.

“뭘 물어보려는데 그렇게 내 눈치를 살피느냐? 어려워 말로 가벼운 마음으로 말해 보거라?”

“하…하오면 속하가 무슨 말을 해도 절대 화 안내겠다고 약속을 해 주심이.”

화를 안내겠다고 약속하라는 말에 동천몽의 눈이 빛을 뿌렸다. 하나 이내 자비스런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알았다니까? 어려워 말고 부드럽게 말해 보거라.”

그제 서야 용기를 낸 듯 팔용이 눈을 빛냈다.

“호…혹시 고향에 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예전에는 틈만 나면 고향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떼를 쓰며 탈출을 감행 했잖습니까? 심지어 자해까지 하시면서.”

“그런데 요즘은 왜 이렇게 조용하느냐는 말이구나?”

“이제 대법왕님의 무공이 높아져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소주로 돌아가실 수 있사옵니다? 그런데 전혀 돌아갈 기색을 보이지 않아 속하무척 궁금하옵니다.”

척!

동천몽이 다리를 포개고 앉더니 손끝을 까닥 거렸다.

“가까이.”

팔용이 멈칫 하며 두어 걸음 다가섰다.

동천몽이 웃으며 다시 까닥거렸다.

“좀 더!”

주춤!

팔용이 또 다가섰고 동천몽이 만면에 자비스런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가까이 오라고 하지 않느냐?”

범접하기 어려운 목소리와 표정에 팔용이 더욱 다가섰다.

“내가 자세히 듣지 못했느니라. 다시 한 번 말해주겠느냐?”

팔용이 잽싸게 말을 이었다.

“왜 이제는 고향 간다는 말씀을…악!”

동천몽의 앉은 자세 그대로 날아와 이단 옆차기로 팔용의 가슴을 찼다. 팔용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고 동천몽이 다가가 사정없이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팔용이 사타구니를 감싸 쥐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빠악!

동천몽이 재차 사타구니를 가린 손등을 갈겼다.

“크헉!”

거품을 물며 팔용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동천몽이 넘어진 팔용을 발로 걷어차며 욕설을 내 뱉었다.

“이 개자식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고향 간다는 말을 왜 않느냐고? 네놈이 뭔데 날 더러 고향을 가느냐 마느냐 묻는 거야 이 상노무새끼야.”

퍼퍼퍽!

양발로 정신없이 걷어찼고 팔용은 바닥을 뒹굴며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동천몽의 발길질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이런 씨발 놈이 좋게 대해줬더니 이제 날 기어 오르려고 하네. 고향을 가고 안 가고는 내 마음이야. 그러니까 뭐야, 날 더러 고향으로 꺼지라는 거야?”

“으악! 아니옵니다. 속하는 그런 뜻으로 한 얘기가 아니옵고.”

“시끄러 어디서 말대꾸야.”

동천몽이 쓰러진 팔용을 한동안 짓밟더니 씩씩 거리며 다시 태사의에 앉았다.

태사의에 앉아 사타구니를 감싸며 바닥에 엎드려 있는 팔용을 향해 버럭 소릴 질렀다.

“똑바로 서지 못해.”

“네…네!”

팔용이 똑바로 서지 못하고 다리를 반쯤 꼬아섰다.

“팔용?”

“하…하명 하소서 대법 왕이시여.”

“내 고향은 내가 알아서 간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아미타불! 알겠사옵니다.”

“내 맘이란 말이다.”

동천몽이 버럭 소릴 질렀다.

팔용이 더욱 굽실거리며 대답했다.

“용서! 용서 하소서.”

“뭘 멀대처럼 서 있는거야? 당장 가서 속의(俗衣) 한 벌 가져오지 않고.”

팔용이 고개를 쳐들었다.

“소…속의라면.”

“속의도 몰라? 네놈들 말처럼 중생들이 입은 옷 말이야?”

“어…어디에 쓰시려고?”

“이런 개자식이!”

또다시 동천몽의 몸이 이단옆차기로 날았다.

퍼어억!

팔용이 또다시 나가 떨어졌고 잽싸게 일어나는 팔용을 보며 험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법왕이 하는 일에 왜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다…당장 대령 하겠나이다.”

팔용이 어그적 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태사의에 앉은 동천몽이 화가 덜 가라앉은 표정으로 나가는 팔용을 노려보았다.

사실 팔용의 말처럼 처음에는 무공을 배운 후 모두 때려눕히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대법왕이 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생사를 지배하고 다루는 서장의 황제가 되면서 마음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너무 좋았다. 미치도록 좋았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한마디에 절절 맨다는 사실이 꼭 꿈만 같았다. 한 마디로 사는 재미가 솔솔 붙은 것이었다. 자신이 대법왕의 환생자이고 아니고는 관심 없었다. 현재 하루하루가 하늘을 나는 기분이라는 것이었다. 자금성의 황제도 부럽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덧 고향은 기억 속에서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었다.

팔용이 깨끗하게 준비된 흑의 한 벌을 가져와 내밀었다.

동천몽은 망설이지 않고 걸치고 있던 가사와 법의를 벗어 던지고 흑의로 갈아입었다. 삭발을 하긴 했지만 흑의를 걸치자 불현듯 옛날 생각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잠시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물고 동경속의 자신을 살피던 동천몽이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어딜.”

어딜 가느냐고 물으려다 또다시 두들겨 맞을까봐 얼른 입을 다물었다. 팔용의 임무는 대법위(大法衛)였다. 대법위는 대법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며 수발을 드는 사람이자 위기가 닥칠 때는 호위무사의 역할까지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만큼은 어딜 가는지 행선지를 캐물을 자격이 주어졌다. 하지만 앞서 물었다가 죽도록 얻어 맞았기 때문에 차마 묻지 못했다.

문 쪽으로 다가서던 동천몽이 다시 돌아와 동경 앞에 섰다. 한참 동안 공경속의 자신의 모습을 살피더니 뒤에서 지켜보고 서 있는 팔용을 향해 말했다.

“가서 삿갓 하나 가져 오너라.”

“삿갓은 왜?”

동천몽의 인상이 또다시 우그러졌다. 그러자 팔용이 두말 않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스윽!

동천몽은 동경 속에 비친 자신의 머리 없는 머리를 양손으로 쓰다듬었다. 비록 흑의를 걸쳤지만 머리를 깎았고, 오랫동안 포달랍궁 안에서 생활한 탓인지 출가인의 분위기가 짙게 풍겨 나왔다.

팔용이 빛바랜 삿갓 하나를 가져와 내밀었다.

동천몽이 삿갓을 쓰고 동경에 모습을 비춰보더니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끈을 턱밑으로 당겨 삿갓이 벗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조여 맨 다음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팔용이 조심스럽게 뒤를 따라나섰다. 몇 번이고 어딜 가시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또 다시 무자비한 폭력이 가해질까봐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윽고 동천몽이 일광전 마당으로 내려섰고 거기까지 따라간 팔용이 입술을 깨물었다. 대법위로써 행선지를 모른다는 것은 절대 안될 일이었다. 사타구니가 깨어지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알아야 했다.

“저어 대법왕님, 어딜 가시는지 소승에게만 살짝 가르쳐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역대 대법왕들이 즉위 이후 가장 먼저 행한 일이 무엇이라고 했더냐?”

“그야 백성들의 생활을 알아보고 살피기 위한 민정시찰이옵니다. 하오면 대법왕님께서도?”

“물론이다.”

“하오시면 법의를 걸치고 나가실 일이지 왜 속의로?”

동천몽의 인상이 또다시 구겨졌다.

“너 혹시 역…역…역지사지라는 말 아느냐?”

확!

팔용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지금까지 겪어본 동천몽은 일자무식이었다. 그런데 약간 더듬거리긴 했지만 사자성어를 쓰자 놀란 것이다.

“한 마디로 입장 바꿔 생각해보라는 뜻 아닙니까?”

“제대로 알고 있군. 그렇다 네가 백성이라면 신분을 드러내놓고 시찰을 다니는 대법왕을 보고 삶의 부대낌을 제대로 말 하겠느냐? 보나마나 내 눈치를 보느라 어려워도 쉽다고 할 테고 힘들어도 살기 좋다고 할 것 아니냐? 이제 왜 내가 복장을 바꾸었는지 알겠느냐?”

“그…그러시오면 속하만이라도 따라가면 안 되겠사옵니까? 절대 신분을 드러내거나 시찰에 폐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겠습니다.”

동천몽의 시선이 팔용을 바라보았다.

두 눈에 자신을 걱정하는 진정성이 가득 넘쳐흐른다. 데리고 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자신의 신변을 염려하는 마음까지 무시하면 군신 간에 신뢰가 깨진다.

그것은 아버지에게서 많이 보았다.

거래에 실패를 한 수하에게 오히려 격려를 할 때가 있었고 때로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어도 일부러 수하의 의견을 수용했다. 그리하여 결과가 잘못되었어도 절대 수하를 꾸중하거나 질책하지 않는다. 잘못했을 때의 칭찬과 격려야 말로 나중 결정적일 때 생명을 내 던진다는 것이 아버지의 철학이었다.

“맘대로 해라. 대신 내가 하는 일에 끼어들거나 간섭하려 했다가는 각오하도록. 너도 속의로 갈아 입어.”

“가…감사하옵니다.”

팔용이 잽싸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흑의를 걸친 팔용이 나왔는데 그 역시 머리에 삿갓을 눌러쓰고 있었다.

“대법왕님 잠깐만.”

막 걸음을 떼려는데 팔용이 불러세웠다.

또 뭐냐고 짜증을 내려는데 팔용이 급히 말했다.

“사대법왕님께 보고를 하고 오겠습니다.”

“거기 서.”

서너 걸음 걷던 팔용이 벼락같은 외침에 흠칫 놀라며 몸을 세웠다.

“네 이놈 지금 제정신이냐? 내버려두고 그냥 따라와.”

“하지만.”

“이놈이.”

금방이라도 한 대 갈길 듯 하자 팔용이 겁먹은 얼굴로 주춤 거리며 따라나섰다.

사대법왕에게 말했다가는 모든 계획이 엉망진창이 될 것이 뻔했다. 보나마나 자신들이 따라나서겠다고 할 것이고 수하들을 동원하고 난리 법석을 피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계획에 철저히 차질이 생긴다.

예상대로 정문을 나서는데 지키고 있던 두 명의 호위무사가 신분패 제출을 요구했다. 일만 이천 명이나 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법왕이라는 신분을 밝히면 보나마나 발칵 뒤집힐 것이었으므로 팔용에게 시선을 보냈다. 네가 알아서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팔용이 덩치가 큰 호위무사에게 다가가더니 조용히 소매 춤에서 자신의 신분패를 꺼내보였다.

“으허헉! 대…대법위님.”

“됐다. 신경쓰지 말고 열심히 근무 하거라.”

“아…알겠사옵니다.”

지나가는 두 사람을 향해 두 호위무사가 이마가 땅에 닿을 듯 허리를 숙였다. 그러면서 팔용의 우측으로 걸어가는 동천몽을 깊숙한 시선으로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법위는 오로지 대법왕의 시위이므로 다른 사람과는 절대 동행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팔용과 같이 나가는 사람이 대법왕 같지는 않았다. 잠시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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