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8화 (8/71)

제8장 천지철왕

두 사람이 의각으로 뛰어들었을 때 천장금왕이 침상에 누운 천지철왕을 보며 큰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나…나를 알아보겠는가?”

천지철왕은 눈을 떴지만 초점이 없었다.

“눈에 힘이 있어야 하는데.”

지켜보던 천검은왕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만동승의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살아 난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철왕님께서는 뇌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잠깐이나마 의식을 차리다니 이 늙은이 또한 놀라고 있습니다. 아마 뭔가 철왕님을 잠시 깨어나도록 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뭔지는 알수 없지만.”

“이…이보게 사제.”

“사…사형.”

“아미타불! 사제 날 알아봤군. 몸은 어떤가?”

천지철왕이 메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대…대법왕님…은 어디에?”

“대법왕님은 왜 찾는가?”

“대…대법왕님이 배우…셔야 할 지옥금 후반부를.”

순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배운 지옥금 후반부를 남기기 위해 정신을 차렸다는 것이었다. 뇌가 죽은 상태에서 깨어난 것도 기적이지만 그 깨어남이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굳센 의지 때문이라는 것에 모두가 경악한 것이었다.

“일각 이상을 살지 못합니다. 어서 대법왕님을 모셔 오십시오.”

만동승의가 말했다.

천장금왕이 천권동왕을 향해 말했다.

“뭐하는가? 어서가서 대법왕님을 모셔오게.”

“알겠습니다. 사형.”

천권동왕이 기관 장치를 눌러 열린 문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만경의 시선이 한동안 영탑전 뒤쪽에 있는 동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한동안 굳은 얼굴로 영탑전 뒤쪽을 쳐다보던 만경의 입술이 나직이 열렸다.

‘아미타불! 역대 조사님들이여 이 늙은이가 하는 일을 용서 하소서. 모두가 본궁의 미래를 위함이니.’

영탑전 뒤쪽으로 한참을 걸어가자 숲이 나왔고 안으로 들어가자 넝쿨에 가린 조그만 동굴입구가 드러났다.

만경의 눈이 강렬한 빛을 폭사했다.

안으로부터 기척이 들려나왔다. 상당히 시끄러운 것을 보아 무예수련이 한참임을 알 수 있었다. 예상대로 기척은 하나뿐이었다. 아무리 청력을 끌어올려 살펴도 무예를 수련하는 사람 말고 다른 기척은 잡히지 않았다.

사실 만경은 일찍부터 동천몽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사대법왕이 종일 그의 곁을 돌아가면서 보호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접근할 기회를 좀체 찾지 못했다.

그런데 일목에 의해 천지철왕이 무력화 되면서 세 명이라면 한 번쯤 모험을 해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승리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급적 기회를 노리되 여의치 않을 땐 과감히 세 사람과 부딪히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천만 다행히도 천지철왕이 깨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너무 흥분한 나머지 동천몽의 신변을 잠시 망각하고 삼대법왕 모두가 동굴을 떠난 것이다.

만경은 지체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해도 자신의 십초 지적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여유를 부렸다가는 애써 찾아온 기회를 날릴 수가 있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눅눅한 습기와 한기가 온몸을 덮쳐왔다. 소리없이 안으로 들어가자 제법 넓은 광장이 나타났고 한 명의 흑의사내가 열심히 검을 연습하고 있었다.

콰콰콰!

손에 쥔 것은 목검이었다. 뻗어 나온 검기가 동굴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확!

만경의 눈이 커졌다. 믿을 수가 없었다. 무예를 수련한지 겨우 일 년 가까이 밖에 되지 않았는데 끝이 뭉텅한 목검으로 석회암에 깊은 자국을 남긴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했다.

촥!

파아아아!

동천몽의 검은 파상적이었고 강렬했으며 기묘했다. 이미 만마생사혈의 검식을 완벽히 숙지하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십초면 끝나리라고 예상했는데 저 정도라면 최소한 이십초는 수고해야 할 것 같았다.

“뭐하느냐? 죽이러 왔으면 서둘러 손을 쓰지.”

그런데 갑자기 동천몽이 검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

일체 기척 없이 들어왔는데 어느새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내공만큼은 이미 이 늙은이와 비견될만하구나’

국화공주민박석백유 탓이었다.

“아미타불! 놀랍습니다. 백오십년을 살아왔지만 아직까지 대법왕님처럼 짧은 시간에 그런 높은 경지에 오른 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본궁의 역사 어디에도 그런 분이 계셨다는 기록은 없지요.”

스윽!

막종오가 검신으로 이마의 땀을 면도하듯 닦아 내더니 환하게 웃었다.

“고맙구나.”

“불충한 노납을 용서 하소서.”

“아니다. 난 그렇게 생각 하지 않는다.”

동천몽이 조용히 입을 열어 말했다.

“출가인이기에 앞서 사람 아니더냐? 야망을 품지 않고서 어찌 인생을 살수가 있단 말이냐? 난 너의 행동을 탓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역지사지라고 내가 너의 입장이라고 해도 필시 이렇게 나왔을 것이다. 기회란 자주 오는 건 아니니까.”

만경의 눈이 커졌다.

동천몽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사제에 이어 사질에게까지 대법왕 자리를 넘겨주어야 했으니 너의 심정 충분히 이해한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성공하여 꿈을 이루길 바란다.”

온갖 욕설을 내 뱉고 악을 벅벅 써가며 악담을 퍼부을 줄 알았는데 전혀 뜻밖의 반응에 만경은 당황했다. 포달랍궁 제일고수인 자신을 이겨 목숨을 부지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전혀 당황하거나 긴장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욕망을 정상적인 행동으로 인정하며 오히려 행위를 격려하기까지 했다.

“뭣 하는가? 어서 공격해라. 밤이 길면 꿈도 길다고 했는데 사대법왕이 오기 전에 해치우는 것이 쉬운 일 아니겠느냐?”

만경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그릇이 크다. 음력 정월이니 이제 열일 곱 살인데 그런 어린 나이에 저토록 위엄과 여유를 부리는 것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리지만 대설산의 웅장한 산세를 보는 듯 했다.

“아미타불! 소승의 불경을 사죄하는 뜻에서 삼초를 양보하겠습니다. 최대한 능력을 발휘하십시오.”

“고맙구나. 성의를 거절하지 않겠다.”

동천몽이 길게 호흡을 내뿜더니 목검을 들어 올렸다.

두 명의 대법왕을 보냈다. 그래서 대법왕만이 익힐 수 있는 만마생혈과 지옥금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흠칫!

만경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만마생사혈의 기수식을 펼친 동천금의 자세가 너무도 완벽했다.

‘아아…미타불!’

자신도 모르게 불호가 떨리며 나왔다.

만마생사혈의 완숙하게 이해하고 있지 않고서는 보여 줄 수 없는 기수식이다.

이것이야 말로 운명이었다. 자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포달랍궁 역사상 최고의 대법왕이 될 자질이 넘쳤다.

“간다!”

동천몽이 신형이 미끄러지듯 파고들었다.

단순한 동작이었다. 너무 깔끔하고 변화가 없어 그다지 위력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화악!

그런데 만경의 눈은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정중동(靜中動)이라니’

파아아아!

단순하게 찔러 들어오던 검기가 벼락처럼 좌우로 퍼져나가면 전신을 에워쌓아 버렸다.

만경은 기절할 듯 놀라며 양손을 전후좌우로 빠르게 쳐냈다.

파파파팍!

검기와 장력이 부딪히며 강한 반탄강기가 동굴을 휘몰아쳤다.

우직끈!

쿡--투투툭!

거대한 종유석들이 부러지고 깨져 날아갔다.

두 사람은 처음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동천몽은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만경은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눈빛을 지었다.

고요함 속에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를 담는 정중동은 일대종사의 반열에 들어서지 않고서는 보여줄 수 없는 고도의 경지였다. 자신이 지금 본 검식은 완벽한 정중동이었다.

평생 검과 싸워도 얻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인 정중동이 너무도 간단하게 펼쳐졌다.

“이초다.”

동천몽의 검이 수평으로 찔러 들어오더니 휙 하며 원을 그었다.

만경을 가운데 두고 그려진 동그라미.

만경이 엇 하는 비명을 질렀다. 동그라미는 단순하지 않았다. 자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조여오고 있었다. 검기를 이용해 자신을 포위해버린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자신은 지금 탄탄한 검기의 벽에 갇혀 있었다.

그그그!

검기는 계속 조여 온다.

검기의 벽을 깨지 못하면 자신은 압사할 것이다.

구우우웅!

장포가 부풀어 올랐고 양 손바닥에 무형의 폭풍이 피어났다. 전신의 내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조여 오는 검기의 벽을 향해 부딪혀 갔다.

빡-빠빠빡!

지진이 일어난 듯 동굴이 움직였고 일부에서는 꽈르릉 소리를 내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동굴이 초토화가 되었지만 두 사람의 신체는 멀쩡했다. 강한 호신강기가 종유석 파편들을 모두 막아낸 것이다.

“윽!”

동천몽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만경은 상체만 약간 흔들거릴 뿐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이제 일초 남았습니다. 모든 재주를 쏟아야 할 것입니다.”

이번 공격이 지나면 영영 기회가 없다는 죽음의 경고였다.

동천몽이 웃었다. 내상을 입은 듯 약간 창백한 안색이었지만 웃음은 환했다.

“아랏차차차!”

죽을 힘을 다해 기합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콰콰콰콰!

검의 비(劍雨)였다. 무엇이라도 자르고 쪼갤 것 같은 강력한 검기가 파상적으로 만경을 베어갔다.

일초의 공격만 남았다. 단 한차례만 휘둘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천몽의 검은 십여회 쏟아지고 있었다. 언뜻 보면 약속을 어긴 듯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만마생사혈중 십구참(十九斬)이란 초식이었다.

일초에 열 아홉번 검을 휘두르는 쾌의 극치인 초식.

지금 동천몽은 열 번을 휘두르고 있었다. 완성되면 열 아홉번을 휘둘러야 하는데 이제 열 번이다. 하지만 대법왕이 익혀야 할 만마생사혈이란 검식의 얼마만큼 복잡하고 어려운지 아는 만경으로서는 숨이 넘어가는 신음을 흘렸다.

열 번을 휘두른다는 것은 동천몽의 검이 이미 칠성가까이 올라섰다는 뜻이었다.

‘죽여야 한다. 기어코.’

만경의 두 눈에서 살기가 쏟아졌다. 만약 오늘 죽이지 못하면 머지않아 자신이 당할 것은 뻔했다.

촷촷촷촷!

만경의 쌍수가 칼처럼 뻗어나갔다.

콰콰콰쾅!

검과 장이 충돌했고 커다란 신음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동천몽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는데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만경 역시 붉은 가사가 걸레처럼 찢어져 있었다.

“이제 삼초가 지났습니다. 그럼 노신이 공격을 하겠습니다.”

만경의 신형이 바닥을 박차고 날아갔다.

번쩍!

붉은 그림자가 허공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너무 빨라 눈에서 놓친 것이다. 동천몽은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하고 목검으로 정면을 힘껏 후려쳤다.

콰앙!

예상대로 눈에서 사라진 만경은 어느새 눈앞에 나타났고 동천몽과 일초를 겨룬 것이다.

“우욱!”

동천몽이 기우뚱 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천장에서 떨어진 물기로 미끄러웠고 고르지 못하기까지 한 바닥으로 인해 동천몽의 몸이 휘청하며 좌측으로 몸이 기울었다.

쏴아아아!

장력이라기보다는 칼날이 뻗어왔다.

본능적으로 왼손을 들어 채 습득하지 못한 지옥금 앞부분을 펼쳤다.

뻑!

“으악!”

허공을 날아간 동천몽의 몸이 천장에서 내려온 종유석 기둥에 사정없이 부딪히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만경의 공격은 무자비했다. 동천몽이 일어나기도 전에 재차 다가와 쌍장을 갈겼다. 숨 돌릴 틈도 주지 않는 폭풍 같은 공격이었다. 동천몽은 반쯤 일어난 상태에서 검을 휘둘렀다.

빠박!

검은 채 뻗어나가지도 못했고 가슴에 엄청난 충격이 밀어닥쳤다.

“크아악!”

바람에 날아가는 낙엽처럼 오장 정도 날아가 다시 떨어졌다. 동천몽은 몸을 세워 일으켰다. 일단 몸을 일으켜야 피하든지 말든지 할 것이다.

그러나 만경은 동천몽이 일어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파파팍!

무려 삼장을 정통으로 맞았다.

비명도 지를 힘이 없었고 끝없이 피만 흘린 체 바닥을 나뒹굴었다. 다행이라면 구르면서 구석진 벽에 기대 반쯤 일어난 상태였기 때문에 몸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

으웩!

커다란 핏덩이를 토한 동천몽이 다가오는 만경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신의 공격을 정통으로 네 번이나 맞았다. 그런데도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내공이 심후한 탓이었다.

사람은 맞은 순간 몸에 힘을 주게 된다. 몸에 강한 힘이 생기면 외부에서 들어온 힘이 약간 밀리면서 충격이 완화되도록 하려는 신체의 본능인 것이다.

동천몽 또한 그러했다. 부상은 입었지만 아직 몸속의 내공은 그렇게 소모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힘으로 버틴 것이다. 하지만 내공으로 만경의 공격을 완화 시키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 증거가 바로 내상이었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충격보다 버티는 몸속의 힘이 강하면 결코 내상은 입지 않는다. 몸이 충격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가해지는 외부의 힘에 비해 세배의 내공을 지녀야 가능하다. 그건 자신보다 약한 사람의 공격에도 버틸 수는 없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물며 만경은 현재 포달랍궁 제일고수 아니던가.

슈우욱!

쌍장이 날아왔다.

이번엔 눈이 부실만큼 노오란 금광이 휩싸여 있었다. 금광불기였다.

저항하는 것이 그냥 맞는 것보다 좀 더 유리하다. 동천몽의 검이 힘껏 만경의 황금빛 장력을 후려쳤다.

콰콱!

툭!

둔탁한 소리와 더불어 목검이 부러졌다.

쇠보다 강하다는 파룡목으로 만들어졌는데 힘없이 손잡이 근처가 날아가 버렸다.

절대 절명의 위기였다. 검을 갖고서도 상대가 안 되는데 검이 부러졌으니 더욱 결과는 뻔했다. 더구나 장법 지옥금은 이제 겨우 걸음마를 떼고 있다. 실전에 사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동천몽은 계속 비틀거렸다. 온 몸은 입에서 흘러나온 피로 벌겠고 오른쪽 눈은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다행히 장력을 스쳐 맞았기에 망정이지 아차 했으면 시력을 잃을 뻔 했다.

“사람을 죽이는데 속이 편치 않아 보기에는 백오십년을 살아온 동안 지금이 처음입니다.”

만경이 조용히 말했다.

“그만큼 대법왕의 자질이 무인이라면 붙잡고 가르쳐 보고 싶을 만큼 뛰어나다는 뜻이지요. 지금 상태로 라면 넉넉잡고 이 삼년이면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불패의 무사로 성장하겠습니다.”

동천몽이 웃었다.

“나 또한 십칠 년 동안 살아오면서 타인의 입을 통해 이토록 뜨거운 칭찬을 받아보기는 처음이다.”

“저승에서 만나면 그때는 제대로 한번 모시겠습니다. 그럼 앞서 가십시오. 대법왕이시여.”

만경이 쌍장을 들어 올리다 멈칫 했다.

동천몽의 눈빛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자신을 보고 득의만면했다.

죽음이 목전에 이름 사람이 죽이려는 자신을 보고 기뻐 할리는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등 뒤로 누군가 다가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동천몽은 자신의 등 뒤를 보며 반색 했었다.

자신의 기척을 속이고 접근해 올 인물 정도라면 사대법왕 중 한 명일 것이었다. 그라면 소리 없이 접근하여 동천몽에게 정신이 팔린 자신을 일격에 격살할 수도 있었다.

만경은 빠르게 돌아섰다.

홱!

돌아선 만경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희미한 어둠뿐이었다. 혹시 교묘한 신법으로 자신의 눈을 속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진기를 끌어올려 살폈지만 여전히 기척은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만경은 등 뒤에서 날아오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속았다!’

재빠르게 돌아서는 그 순간 동천몽의 몸이 면전에 도착해 있었다.

타탁!

쌍 장을 들어 올렸지만 그 보다 자신의 팔목을 거머쥔 동천몽의 양손이 더 빨랐다.

털썩!

두 사람은 끌어안은 체 바닥으로 넘어졌다. 동천몽의 양손은 갈고리 같았다. 만경이 잡힌 손목을 빼내기 위해 혼신의 공력을 쏟아 냈지만

꼼짝할 수가 없었다. 다리 또한 뱀처럼 만경의 양다리 속으로 집어넣어 새끼처럼 단단히 꼬아버렸다.

퍼어억!

동천몽이 머리로 만경의 얼굴을 박았다.

양손이 잡혀 있으니 피할 방법이라곤 없었다. 엄청난 충격이 얼굴에 가해지며 뜨거운 것이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다. 보지 않아도 코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동천몽은 미친 듯 머리로 자신의 얼굴을 박기 시작했다.

빡----빠바박!

힘에서는 뒤떨어지지 않으므로 잡힌 양손은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고 동천몽의 박치기를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크크!”

아무리 신음을 흘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짐승 같은 괴로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콱콱콱!

동천몽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들이 받았다.

어지간한 바위나 책상 모서리에 부딪혀도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은 머리였다. 오히려 부딪힌 바위나 책상 모서리가 깨어져 나가는 광경에 부하들이 신기해했었다.

일두사(一頭死).

급기야 부하들은 자신의 가공할 박치기를 일두사라고 불렀다. 한 번 받히면 목숨이 끊어진다.

만경의 노안은 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코뼈가 부러 진지는 오래되었고 이빨과 눈 탱이까지 찢어지고 갈라졌다.

“화악!”

만경도 안되겠다고 생각 한 듯 동천몽의 얼굴을 받았다.

그냥 들이 받히는 것보다는 마주 공격을 하는 것이 덜 충격적이고 낫다는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급기야 들소처럼 두 사람의 머리가 서로를 향해 미친듯 부딪히기 시작했다.

빡---바바바!

퍽--뻐어억!

두 사람의 머리는 피로 완전히 물들었고 얼굴은 난장판으로 변해 있었다.

밀리면 죽는다.

기호지세,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누가 오래 참고 버티느냐가 생사를 가늠한다. 두 사람의 머리는 암컷을 놓고 다툼을 버리는 숫양처럼 끊임없이 부딪혔다.

뻑!

뻐억! 뻑!

깨진 머리조각이 파편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사람의 얼굴인지 괴물인지 구분이 안 될 만큼 처참한 상태인데도 서로의 얼굴을 들이 받는 두 사람의 동작은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만경이 밀리고 있었다. 특히 만경은 속도에서 밀리고 있었다. 그가 한 번 받을 때 동천몽은 두 번 들이 받았다. 그런 탓에 당연히 더 피해가 클 수 밖에 없었다.

빡!

빠박!

이마가 함몰되고 눈은 부어 감춰지고 코뼈는 뭉개졌다. 이빨 또한 산산조각이 되어 입안을 맴돌았다.

“끄으으!”

또다시 만경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의 동작은 더욱 느려졌다. 그에 반해 동천몽의 박는 속도는 처음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 그것은 힘에서 우위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이미 오랫동안 소주의 저자거리를 활동하며 숱하게 사용한 경험이 절대적이었다. 또한 여기서 무너지면 죽는다는 필사의 각오가 그의 투쟁력을 더욱 높여주고 있었다.

꽉--꽈꽉꽉!

급기야 밑에 깔린 만경이 거의 저항을 포기했고 올라탄 동천몽은 쉴틈 없이 이마로 들이받았다.

“죽어! 씨벌!”

동천목이 악을 썼다. 만경의 얼굴은 동천몽이 박는 데로 흔들렸다. 좌측을 받으면 우측으로 돌아갔고 우측을 받으면 좌측으로 돌아갔다. 정면으로 천장을 올려다 볼 때면 코 있는 부분을 정통으로 박았다.

빠아악!

동천몽은 헐떡거리면서도 쉬지 않았다. 늙은 생강이 맵다. 죽은 척 있다가 양손을 놓고 일어서면 어떤 돌발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더욱 양 팔목을 힘껏 쥐고 쉬지 않고 만경의 얼굴을 박고 또 박았다.

퍽---퍼퍼퍽!

만경의 얼굴이 조금씩 부숴 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그런대로 사람의 모습을 갖췄지만 동천몽이 끝없이 박아대자 무너지듯 얼굴이 깨져 나간 것이다.

팍!

좌측 대뇌쪽이 부서졌고 이번에는 우측 전두부가 깨져나갔다.

만경은 죽은 듯 꼼짝을 하지 않았지만 동천몽의 박치기는 멈추지 않고 계속 되었다. 동굴 안으로 둔탁한 소리가 끝없이 울렸다.

“아미타불!”

바로그때 동굴 안으로 불호소리가 울려왔다.

천권동왕이 들어서다 동굴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에 기겁을 했다.

“우웃!”

“허허…뻑!”

“으하…빡!”

동천몽은 거친 숨을 한 번씩 들이마시며 만경의 얼굴을 열심히 박았다.

“대…대법왕님.”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위에서 머리를 박고 있는 사람이 동천몽이라는 것은 알아보았다. 하지만 밑에 깔린 사람의 얼굴은 도저히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대…대법왕님 도대체 깔린 그자는 누굽니까?”

“말 시키지 마라. 워낙 교활한 늙은이 이니 무슨 잔머리를 굴리지 모른다. 완전히 머리를 아작 내버려야한다.

동천몽의 동작도 지친 듯 조금씩 느려졌다. 그러나 박치기는 멈추지는 않았다.

“누…누굽니까?”

동천몽이 박치기를 계속 하며 말했다.

“보…보면 모르겠느냐? 흐아아…빡! 그 늙은이니라. 만경.”

“으허허! 마…만경이라면 사숙?”

“이딴 늙은이가 무슨 얼어 죽을 사숙이야. 뒈져라…빡!”

천권동왕이 믿을 수 없다는 두 눈을 비볐다. 얼굴은 도저히 알아 볼 수가 없었으므로 옷차림과 하체를 살폈다. 맨발에 비쩍 마른 몸은 틀림없는 사숙 만경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포달랍궁제일고수를 동천몽이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절대 말이 되지 않았다. 동천몽이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마…말이 되는 말씀을 하셔야.”

“학! 뻑! 으와! 뻑!…믿기지 않으면 말시키지 말고 조용히 있거라.”

동천몽은 열심히 박았다.

만경의 머리가 완전히 부숴 지고서야 박치기를 멈추었는데 이마에서 만경의 피와 뇌수가 뚝뚝 떨어졌다.

벌러덩!

자신 또한 완벽히 지친 듯 큰 대자로 누워 버렸다.

“하아! 하아아!”

천권동왕은 얼굴로서는 확인이 불가능하여 신체 곳곳을 세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모셨기 때문에 만경의 신체 구석구석을 훤히 알고 있었다.

부르르르!

만경의 시신을 살피던 천권동왕이 전신을 떨었다. 자신이 살피고 있는 눈앞의 시신은 만경이 분명했다. 오십 여 년쯤 두 사람은 대설산의 계곡에서 우연히 함께 멱을 감을 기회가 있었다. 그때 만경의 사타구니에 손바닥 만한 검은 점이 있었는데 지금 시신에도 똑같은 크기의 점이 있었다. 그것 말고도 신체 곳곳이 눈에 익었다. 만경이 분명했다.

“사제 빨리 대법왕님을 모셔오라는데 뭐하…”

천검은왕이 뒤따라 들어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동굴의 처참한 상황에 눈을 부라리더니 더듬거리며 물었다.

“사…사제 그 사람은 뭔가?”

동천몽 곁으로 다가와 내려 보던 천검은왕이 깜짝놀라며 소리쳤다.

“아니 대법왕님 아니시옵니까? 이게 어찌 된 일이옵니까?”

“으화! 으와!”

동천몽이 말할 기운도 없다는 듯 헐떡거리며 오른손가락으로 비키라는 손짓을 했다.

“사…사제! 이 시신은?”

“사숙입니다.”

“네엣?”

“우리에게 사숙이 한 분 밖에 더 있습니까? 만경사숙입니다. 대법왕님의 손에 돌아가셨습니다.”

“허걱!”

천검은왕이 숨이 넘어갈 듯한 다급성을 지르며 놀라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냐고 물었지만 천권동왕 또한 자세히는 모른다면서 거친 숨을 헐떡이며 누워 있는 동천몽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동천몽은 얼굴에 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상당부분은 만경의 피와 살점이었다. 얼마나 필사적으로 힘을 쏟아냈는지 동천몽은 가쁜 호흡은 쉽게 멈춰들지 않았다.

두 사람은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지만 동천몽이 호흡이 잦아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퉤에!

고개를 좌측으로 돌리고 피가 섞인 가래침을 뱉은 동천몽이 상체를 일으키자 천검은왕이 재빨리 부축했다.

“어찌된 영문이온지?”

동천몽이 죽은 만경을 보며 씨익 웃었다.

“길고 짧은 건 역시 대봐야 알아. 건방진 늙은이.”

“정말 사숙입니까?”

“늙은이 의외로 질긴데.”

천검은왕과 천권동왕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동천몽을 바라보았다. 궁금해 하는 두 사람을 보며 동천몽이 또다시 침을 뱉으며 입을 열어 말했다.

“무예 수련에 완전히 푹 빠져 있는데 이 늙은이가 날 찾아왔더군. 한 눈에 날 죽이기 위해 왔다는 것을 눈치로 긁었지.”

“……”

“……”

얘길 듣는 두 사람의 눈이 반짝 거렸다.

동천몽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거 장난 아니군! 어찌나 박았던지 골이 흔들거리는구만. 정말 세더군.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어. 그래도 어른이랍시고 삼초를 양보해주더군. 고양이 쥐 생각 해준 꼴이지 뭐.”

두 사람은 긴장으로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나도 싸움이라고 하면 한 쌈 하는데 강했어. 도저히 방법이 없더군. 내가 배운 것을 모두 쏟아 냈는데도 털끝도 건드리지 못했어. 죽음은 다가오고 죽기는 싫고 그때 한 가지 꾀가 떠오르더군.”

“어떤 꾀였습니까?”

천검은왕이 다급히 물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은 결과였기 때문에 과연 그 꾀가 무엇인지 가장 궁금했다.

동천몽이 갑자기 목을 좌우로 돌리더니 목소리를 깔았다.

“소주 저자거리에서 강적들을 만날 때마다 왕왕 써먹은 방법이지. 일명 형님지계라고나 할까?”

멈칫!

천검은왕과 천권동왕의 시선이 부딪혔다.

“혀…형님지계?”

“어렵게 생각 할 것 하나도 없느니라. 도저히 상대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이 들 때 잽싸게 적의 뒤쪽을 보며 형님 하며 소리를 치면 백이면 백 모두 뒤에 누가 온줄 알고 돌아본다. 바로 그때를 놓치지 않고 돌진하는 거지. 붙들면 목숨이 꺼져도 놓아서는 안 된다. 번개처럼 양 팔목을 강하게 붙잡으면 상대는 꼼짝을 하지 못하지. 발길질도 할 수 없도록 두 다리 또한 가랑이 사이에 넣고 꼬아버리면 그야말로 완전히 묶이게 되는 거지.”

꿀꺽!

꼬올깍!

두 사람이 흥미롭다는 듯 침을 삼켰다.

“오로지 신체 중에서 원활한 것은 상대와 나 모두 머리 뿐이지. 그때부터 서로는 머리로 싸운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어지간한 바위쯤은 가볍게 깨뜨린 내 머리를 당하는 놈은 여지껏 못 봤다.”

“허…허면 그 형님지계가 사숙에게도 통했단 말이옵니까?”

“약간 방법을 변형했느니라. 강호경험이 워낙 풍부하고 닳고 닳은 늙은이인 만큼 티 나게 뒤쪽을 보고 소리를 지르거나 쳐다보면 속임수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전혀 돌아보지 않을 것 같았지. 그래서 순간적으로 눈빛을 빛냈다가 거둬들였지. 흐흐! 그랬더니 내가 뭘 숨기는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뒤를 돌아보더군. 내 정도야 고개 좀 돌아봐도 전혀 위험요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하고.”

“그 순간 달려 들었단 말씀입니까?”

“속았다고 느끼고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늙은이 양 팔목은 내손에 잡혔고 두 다리는 내 다리에 제대로 옭아 메어졌지. 다른 건 몰라도 힘에서는 밀리지 않은 만큼 내 손아귀를 빠져나오지 못했고 그때부터 우린 바닥에 쓰러져 머리로 치고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난 이겼다.”

천검은왕과 천권동왕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한 달이 넘어도 초식 구결 한줄 외우지 못하는 머리에서 어떻게 그런 경이적인 재치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짧은 눈짓에는 아무리 경험이 풍부한 만경일지라도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욱!”

동천몽이 목을 돌리다 비명을 질렀다.

“대법왕님.”

“아무래도 목뼈가 이상이 생긴 것 같군. 날 의각으로 안내 하거라.”

“소승의 등에 업히십시오.”

동천몽은 거절하지 않고 천검은왕에 업혀 의각으로 사라졌다.

동천몽의 행색을 본 만동승의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목불인견이라는 말이 실감 날 만큼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천장금왕의 표정은 거의 사색이 되었다.

“이…이게 어찌된 일인가? 대법왕님께서 왜 이리 되신건가?”

천권동왕이 간단히 사건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뭐…뭐라고?”

천장금왕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만경과 싸워 죽였다는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정말로 대법왕님께서 만경 사숙을 죽였단 말인가?”

“그렇다니까요?”

한편 목뼈 이곳저곳을 매만져 보던 만동승의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이건 말이 안 됩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천장금왕이 긴장하여 물었다.

만동승의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모두 세 곳의 목뼈가 부러졌습니다.”

“세…세 곳이나 부러졌는데도 참고 싸웠단 말입니까?”

침상에 누운 동천몽이 말했다.

“그럼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국에 아픔 느낄 틈이 어디 있단 말이냐?”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목뼈는 다른 부위와 달라서 조그만 금이 가도 머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무려 세 곳이 부러졌는데도 동천몽은 끝까지 만경을 박았다.

“일단 지지대로 목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 다음 약을 처방 하겠나이다.”

천장금왕이 빠르게 말했다.

“서두르게.”

천검은왕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넨 당장 천룡구십구불을 데리고 빙굴을 포위하게. 필시 그곳에 전번에 사제를 공격했다가 부상을 입은 자가 치료 중 일걸세. 사숙이 나선 것을 보면 그의 몸이 아직 회복되기 전인 것 같으니 당장 사로잡게.”

“알겠사옵니다. 사형.”

“그리고 우리가 파악해 놓았던 만경사숙쪽 인물들을 모조리 기습하여 체포하게. 반항하면 죽여도 상관없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일거에 쓸어버려야 하네.”

“그러지요.”

천검은왕이 밖으로 사라졌다.

동천몽이 누운 체 말했다.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니냐? 수장을 죽였으니 별 볼일 없는 존재들인데.”

“아니옵니다. 밀어 붙일 때 깨끗하게 쓸어 버려야 합니다. 만경사숙의 죽음을 알게 되면 오히려 복수에 불타 더욱 날뛸지 모릅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엄청난 피를 흘리게 될 것입니다.”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군.”

동천몽이 누운 체 눈을 깜빡거렸다.

만동승의가 부드러운 나무와 천을 이용해 동천몽의 목을 꼿꼿하게 감쌌다.

“당분간 불편하시더라도 움직이지 말고 그렇게 지내십시오. 부러진 뼈가 붙으려면 아무리 빨라도 보름 이상은 걸릴 것입니다.”

동천몽이 미이라처럼 빳빳하게 누워 말했다.

“이렇게 보름동안을 살란 말이냐?”

“바…방법이 없사옵니다. 만약 답답하다고 해서 목을 움직이면 뼈가 어긋나게 되어 목이 기우뚱 해질 수 있으니 조심 하십시오.”

막종오는 알았다고 눈으로 대답했다.

그때 천장금왕이 심각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 동천몽 가까이 다가섰다. 동천몽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천장금왕의 얼굴에 긴장이 서려 있음을 발견하고 물었다.

“할 말있느냐?”

“막내사제가 깨어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루를 버티지 못할 것 같다고 하옵니다.”

동천몽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찌해야 하느냐?”

동천몽은 천장금왕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천장금왕이 입술을 지그시 물며 말했다.

“사제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제가 죽기 전에 그가 알고 있는 대법왕의 무예를 이 자리에서 배워야 합니다.”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천장금왕이 빠르게 말했다.

“지체할 틈이 없습니다. 한시라도 서둘러야 합니다. 그가 죽기 전에 대법왕께서 익혀야 할 지옥금 마지막 부분을 재현할 것입니다.”

“날 더러 그 부분을 배우라는 얘기냐?”

사제의 죽음은 분명 오랜 세월 동고동락해온 자신에게 더할 나위 없는 비극이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그의 죽음보다는 그가 갖고 있는 지옥금을 죽기 전에 빨리 동천몽이 보는 앞에서 펼쳐 보이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침상을 세울 수 있는가?”

천장금왕이 만동승의에게 물었다.

만동승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당장 막내사제와 마주 볼 수 있도록 하여 침상을 움직이게.”

곧바로 만동승의는 침상을 이동했다. 천지철왕의 침상과 동천몽의 침상이 마주 보며 놓여 졌고 등 뒤로 베개를 두껍게 깔아 두 사람의 상체를 반쯤 일으켜 세웠다.

“사제.”

창백한 안색으로 누워 있던 천지철왕이 눈을 떴다. 초점 잃은 시선은 금방이라도 감길 것처럼 힘이 없었다. 맞은편에 동천몽을 발견한 천지철왕이 몸을 한차례 떨더니 신음을 흘리며 눈에 힘을 끌어모았다.

“대…대법왕이시여…소…소승이 지금부터 보이는 동작을 놓치…지 마시고…”

동천몽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로 무서운 충성심이고 책임감이었다. 하나 뿐인 목숨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오직 사문의 발전과 포달랍궁의 내일만을 염려 할 뿐이었다.

학학!

불과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천지철왕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지…지금부터 소승이 보여주…는 동작을 잘 보십시오. 모…몸이 이러하여 한 번 밖…에 보여드리지 못하옵…니다. 지옥금 후반부입니…다.”

무엇인가를 외우는 지혜는 형편없지만 눈썰미는 빼어나다.

천지철왕이 양손을 천장을 향해 뻗었다.

스스스!

힘이 없어 속도가 아주 느렸다.

동천몽은 두 눈을 빛내며 천지철왕의 손놀림을 보았다.

스으으으!

스슥!

짧게, 그러다 아주 길게 손바닥을 뻗었다. 둥글게 원을 그리다가 한 가운데 중심을 번개처럼 찔러 들어갔다.

쉭!

천지철왕의 손놀림은 갈수록 빨라졌다.

천장금왕은 물론이고 천검은왕도 처음보는 초식이었다. 철저히 대법왕이 죽기 전 한 사람씩 불러 각자가 배워야 할 몫만 가르쳐 주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무공은 일체 알지 못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켜보던 천장금왕과 천검은왕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알아 보는 듯 했지만 갈수록 손놀림이 복잡해지고 빨라지자 실타래처럼 엉킨 것이었다. 급기야 두 사람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의 시선이 동천몽에게 멎었다.

동천몽의 눈은 예리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양손으로 장난하듯 천지철왕이 보여준 동작을 시늉 내며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일각쯤 지났을까. 천지철왕이 거친 숨을 내쉬며 손을 내렸다.

“학학! 어떻게 외우셨…습니까?”

천지철왕은 기력이 다한 듯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동천몽이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한 번 보겠느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동천몽의 양손에 머물렀다.

몸을 풀듯 잠시 어깨를 좌우로 한 번씩 들썩이더니 침상에 누운 체 조금 전 천지철왕이 펼쳐 보였던 손동작을 시늉내기 시작했다.

쉭!

처음에는 느리게 움직이던 손이 점차 빨라졌다.

오랫동안 배워 아주 숙달이 된 사람처럼 막힘없는 손동작에 누워 보던 천지철왕의 눈이 부릅떠졌다.

동천몽의 손은 더욱 빨라졌다.

육안으로 왼손과 오른손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빨라졌고 침상 위로 수십 개의 장영이 가득 채워졌다.

뚝!

한순간 점을 찍듯 손동작이 멈추고 천천히 가슴 앞으로 내린 동천몽이 물었다.

“어떻느냐? 제대로 되었느냐?”

천지철왕이 온 몸을 떨었다.

“사…사형의 말씀을 듣고 설마 했는데 사실이군요. 와…완벽하옵니다. 오오! 이럴 수가.”

만동승의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지…지금 한 부분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재현해냈다는 얘깁니까?”

천지철왕이 고개대신 눈을 깜빡거렸다.

“그…그렇다네. 단 한곳도 흠을 잡을 수 없는 완벽한 동작이었네. 아미타불!”

천지철왕의 얼굴에 감동과 기쁨이 넘쳐흘렀다.

자신은 비록 곧 죽겠지만 포달랍궁의 미래가 훤히 보였다. 그것은 어떤 선조 때보다도 찬란한 문화와 힘을 꽃피울 것이라는 낙관이었다.

우욱!

천지철왕이 검은 피를 토했다.

바르르!

온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입술이 까맣게 변하기 시작했고 몸이 거칠게 경련을 일으켰다.

“대…대법왕이시여.”

주르륵!

입으로 엄청난 검은 피를 쏟아냈다.

“부…부디 본궁을 반석위해 세우…소…서.”

그 말을 끝으로 천지철왕은 눈을 감았다.

숨이 끊어졌는데도 천지철왕의 입에서 계속 검은 피가 흘러내려 침상을 적혔다.

지켜보던 사람들의 얼굴에 침통한 빛이 내려앉았다. 입가로 흘러내리던 피도 멎었고 천지철왕의 몸은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