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7화 (7/71)

제7장 불가제일검, 만마생사혈

하지만 그가 곧바로 행동에 나서지 못한 것은 사대법왕 때문이었다. 포달랍궁은 전통적으로 사대법왕에게 대법왕이 익혀야 할 무공을 배우도록 한다. 그 이유는 이번처럼 권력의 공백이 생기면 피를 부를 가능성이 높았고 그래서 반란을 잠재우기 위한 조치인 것이었다. 혼자라면 완전한 무공이 아니기 때문에 위력이 보잘 것 없지만 네 사람이 힘을 합치면 대법왕의 무예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이유 만경은 행동에 나서지 못한 것이었다.

“하면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배운 것이 아니라 조금씩 나눠 배웠다는 얘기구나.”

“그렇습니다. 한사람에게 모든 것을 모두 배울 수 있도록 해주면 사대법왕 또한 반란을 꿈꿀 수 있기 때문에 대법왕이 배울 무공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배우는 것이지요.”

“그래서 넷이 힘을 합치기 전에는 절대 그 위력이 나타나지 않는단 얘기군.”

“옳습니다.”

“넷이 힘을 합쳐 반란을 획책할 수도 있잖는가?”

천장금왕이 웃으며 말했다.

“고금을 털어 여러 사람이 천하의 주인이 된 적은 없습니다. 한 산에 여러 마리의 호랑이가 살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동천몽이 맞는 소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대법왕이 대법왕의 무공을 네 가지로 토막 내어 익히는 것은 오로지 반란을 대비 위함일 뿐입니다.”

“그래서 만경 그 늙은이가 함부로 껍죽대지 못 하는구만.”

카악!

동천몽이 비웃듯 말하더니 바닥에 가래침을 뱉었다.

“네가 내게 가르칠 것은 무엇이냐?”

“만마생사혈의 초반부입니다.”

“그래 쇠뿔도 단김에 뽑으랬는데 곧바로 시작하자고?”

“알겠사옵니다. 그렇잖아도 미적거릴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만경 사숙의 칼이 바짝 다가서고 있습니다. 하루속히 대법왕께서 위풍당당하게 보좌에 오르셔야 만경사숙께서도 야망을 버릴 것입니다.”

“그 늙은이 가만 안두겠어.”

동천몽이 인상을 쓰며 내 뱉었다.

“그럼 지금부터 만사생사혈 초반부 구결부터 말해드릴테니 정신 똑바로 세우고 들으십시오.”

동천몽이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봤다.

그것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는 의미였고 천장금왕이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조용히 입을 열어 말했다.

‘사망행즉불혈 악불징사도행 혈벌명살륙부’

‘무신불무형이 불유소불아참 대난사검여울’

천장금왕이 동천몽을 쳐다보았다.

동천몽이 물었다.

“다 끝난 거냐?”

“다시 한 번 불러 드릴 테니 잊지 마십시오.”

천장금왕이 좀 더 큰 소리로 천천히 불러 주었고 동천몽이 두 눈에 핏발을 세우며 새겨들었다.

“어떻습니까? 몇 자 되지 않기 때문에 크게 기억하는데 어려운 점은 없을 것입니다.”

동천몽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몇 글자 안되니 금방 접수 되는군.”

“좋습니다. 한번 외워 보십시오. 빨리 외운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틀리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야 이를 말인가?”

혼쾌히 말을 하고 난 동천몽이 목을 가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사…사…사망…망…망… 에또….그러니까.”

생각보다 쉽지 않은 듯 더듬거리며 천장금왕의 눈치를 살폈다.

“사망…사망…사망유희…이건 아니고 사망…사아마앙…떠올랐다. 사망행.”

천장금왕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동천몽이 더욱 신이 난 듯 심호흡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사망행…사망행…사망행…사망행동…맞나?”

눈치를 보며 물었고 틀렸다는 듯 천장금왕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동천몽이 다급히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사망행…사망행사…아닌데…이런 젠장.”

고개를 연신 좌우로 갸웃 거리고 머리를 쥐어박고 난리를 쳤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한 글자도 잇지 못했고 천장금왕의 안색이 점점 굳어갔다.

‘환생을 하시더라도 두뇌만큼은 바꾸어 환생하실 일이지.’

천장금왕의 얼굴에 암담한 그림자가 떠올랐다.

동천몽은 더욱 더듬거렸다.

“사망행…사망행…사망행님…아냐.”

“정신 차리고 똑똑히 기억하십시오.”

“진짜 이번이 마지막이야. 믿어봐. 화끈하게 외울 자신 있으니 빨리 읊어보도록.”

입술에 혀로 침을 묻히며 크게 소리쳤다.

동천몽이 눈을 찢어져라 부릅뜨며 귀를 모았다. 양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았고 고개를 측면으로 돌려 귀를 앞세운 것이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천장금왕이 모두 읊은 듯 물었다.

“기억 하셨습니까?”

“들어보아라.”

동천몽이 침을 삼키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사망행즉불혈! 맞지?”

천장금왕의 눈이 커졌다.

“좋으십니다. 그 다음을 말씀해보십시오.”

“악…악불…악불…악불장.”

그리고 잽싸게 천장금왕의 눈치를 살폈다.

천장금왕이 고개를 흔들었다.

“틀렸습니다.”

“악불식.”

또다시 천장금왕이 고개를 저었고 동천몽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악불룡.”

“악불삼.”

“악불광.”

부지런히 떠들어도 천장금왕의 고개가 여전히 저어지자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으이그 이 석두…악메롱.”

천장금왕이 안색이 굳어졌다.

타계한 전대법왕 역시 악명 높을 만큼 머리가 나빴다. 모습만 사람일 뿐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지능이 뒤떨어져 전 사대법왕들로부터 무공을 배우는데 무려 십년이 걸렸다고 했다. 그래서 전대 법왕은 역대 대법왕들중 가장 무공이 약했다.

동천몽은 천장금왕의 눈치를 살피며 부지런히 외우려했지만 한 구절도 기억하지 못했다.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마다 지능이 다르다지만 이토록 나쁠 줄이야.

천장금왕 느릿하게 다시 구결을 말해주었다.

동천몽이 눈을 반짝이며 또다시 큰 소리를 쳤다.

“맞아 악불징이었어. 악불징사도…악불징사도…악불징사도.”

또 다시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악불징사도행…혀…혈벌…혈벌침…아니고.”

어렵게 뒷부분을 가르쳐 주면 외웠던 앞부분을 잊어 먹었다. 한 번에 한줄 이상을 제대로 외우지를 못했다. 본인 스스로도 무척 외우려고 노력을 했지만 쉽게 되지 않는 듯 급기야 이마에 땀방울까지 맺히기 시작했다.

그런 동천몽을 바라보는 천장금왕의 낯빛은 이제 굳다 못해 검게 변해 있었다. 거의 절망에 이른 듯 두 눈까지 깊이 가라앉았다. 천지철왕이 의식불명상태에 빠졌다. 언제 만경의 살수가 들이닥칠지 알 수 없어 하루라도 서둘러 무예를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동천몽의 지능은 상상을 벗어나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달빛이 들어와 방안을 비추었다. 오각형으로 된 조그만 차상을 놓고 천장금왕과 천검은왕 천권동왕이 마주 앉아 있었는데 모두들 표정이 무겁다. 아무도 차를 마시지 않고 조용한 침묵 속에 이마를 찌푸리고 있었다.

세 사람 입에서는 한숨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고 우그러진 표정에서 심각한 근심을 엿볼 수 있었다.

“어찌하면 좋겠나?”

천장금왕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천검은왕과 천권동왕이 고개를 들었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벌써 사흘이 지났는데 구결 한 줄을 외우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후유!”

“아미타불!”

두 사람의 입에서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어찌나 구결을 떠들었던지 보게. 혀 바닥에 물집까지 생겼네.”

천장금왕이 혀를 내보였다.

과연 혓바닥에 좁쌀 크기의 물집이 솟아나 있었다.

“어떻게 강제로라도 주입할 방법이 없습니까?”

“어떻게 말인가?”

“듣자하니 지능을 발달시키는 약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정말인가?”

“확실치 않지만 언젠가 한 번 들어본 것 같습니다.”

“당장 만동승의를 데려오게.”

천장금왕의 지시에 천권동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문이 다시 열리고 천권동왕이 만동승의를 데리고 들어왔는데 잠에서 막 깨어난 듯 부스스했다.

“이 밤중에 무슨 급한 일이 있어 부르셨습니까?”

“일단 앉아보게.”

만동이 눈 꼽을 손으로 닦으며 천장금왕 맞은편에 앉았다.

천장금왕이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지능을 발전시키는 약이 있다는데 사실인가?”

“…….”

“지능을 발전시키는 약이 있느냐고 묻는데 뭘 그렇게 쳐다만 보고 있는가?”

“갑자기 지능을 발전시키는 약은 왜?”

“있나 없나 그것만 대답하게.”

“솔직히 지능을 발전시키는 약은 없습니다. 약간 지능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것은 있지만 눈에 드러날 만큼 향상 시키는 약은 없습니다. 만약 그런 약이 있다면 세상에 멍청할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없다는 말을 길게도 하는군.”

천장금왕이 쏘아붙였다.

만동승의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지능을 발전시키는 약은 왜 찾습니까?”

“알 것 없네. 자네 가서 자기나 하게.”

만동이 궁금한 듯 뭔가 더 물어보려다 워낙 굳어 있는 세 사람의 얼굴을 보고 조용히 물러나왔다.

동천몽에 대한 구결암기 훈련은 계속 되었다. 그러나 뚜렷하게 나아지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본인도 괴로운 듯 하루 종일 인상을 썼고 심지어 석벽에 머리를 박기까지 했다. 오히려 지켜보기에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어느덧 구결 암송이 시작 된지 십일이 지났다. 하지만 진척은 별로 없었고 가르치는 천장금왕이나 배우는 동천몽 모두 지쳐가기 시작했다.

“잠시 바람 좀 쏘이고 올 테니 구결을 외우고 계십시오.”

천장금왕이 답답하다는 듯 석굴 밖으로 나갔다.

석굴 밖에는 어느새 낙엽이 지고 있었다. 동천몽이 이곳에 온지 어느덧 반년이 지나고 있었다.

털썩!

석굴 앞에 세워진 납작한 바위에 걸터앉은 천장금왕이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들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올해로 세수 일백이었다. 다른 집단 같으면 조용히 뒤로 물러나 바둑이나 두며 소일할 연륜이지만 지난 십 육년 동안 단 한 번도 쉬지 못했다. 그것은 그 어딘가에 환생해 계실 대법왕을 찾기 위해 천하를 샅샅이 뒤진 것이다. 그리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마침내 소주에서 전대법왕의 환생자를 찾고 말았다.

이제 자신의 임무는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환생한 대법왕께 무예를 가르쳐준 후 현역에서 물러나는 것이었다. 대설산 깊숙한 곳에 있는 동굴을 찾아 조용히 못다 한 공부를 하다 생을 마감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소망에 착오가 생기고 있었다.

만경의 칼은 좁혀 오는데 동천몽의 구결암송은 미칠 듯 느리다.

벌떡!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 같다.

길게 찬바람을 들어 마셔도 속은 여전이 뜨겁다. 급기야 석굴 저 아래로 흐르는 계곡물에 그대로 몸을 던졌다.

풍더덩!

늦가을이어서 한기가 뼈 속까지 파고들었다. 그런데 춥기는커녕 오히려 속이 시원하고 얹힌 음식이 쑥 내려가는 것 같았다. 잠시 물속에 몸을 담근 채 높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촥!

뭍으로 나왔다. 온 몸이 물에 흠뻑 젖었지만 내공을 끌어올리자 젖은 옷에서 수증기가 피어나며 반각이 채 되지 않아 햇볕에 말린 듯 빳빳해졌다.

침통한 표정으로 금장천왕의 발길이 닿은 곳은 의각이었다. 환자를 치료하고 있던 만동승의가 깜짝 놀라며 다가와 예를 취했다. 만동승의의 예를 받는둥 마는둥 하며 가장 끝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기관장치로 출입구가 작동되는 곳이었다. 한쪽 벽에 달린 주먹 만 한 단추를 누르자 문이 열렸고 빨리듯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천지철왕이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처음 데려온 그대로 온 몸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가사 또한 걸레조각이 되어 있었다. 숨은 쉬고 있었지만 아직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보고 있습니다만 그다지 차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곁에선 만동승의가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어 말했다.

천지철왕이 죽으면 안된다. 그가 죽으면 단순히 한 사람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죽음으로 인해 자칫 대법왕이 배워야 할 무예의 일부가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혹시 만약을 대비해 자신이 익힌 부분을 그림으로 남겨 놓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 또한 본인만이 보관해 놓은 장소를 알고 있기 때문에 죽어버리면 찾는 다는 것이 쉽지 않다. 자신의 거처 서랍 따위 등에 넣어 두면 찾기가 쉽겠지만 워낙 절정의 무공이고 대법왕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되기 때문에 깊이 감추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더욱 깨어내야 하는 이유인 것이었다.

가느다란 숨만 쉬고 있는 천지철왕을 바라보는 천장금왕의 어금니가 물렸다.

‘사숙 당신 뜻대로는 절대 안될 것이오. 내가 있는 한.’

비장하게 중얼거린 후 문을 열고 나왔다.

천장금왕은 곧바로 동천몽이 있는 석굴로 돌아왔다.

동천몽은 그때까지 구결을 외우고 있었는데 온 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그것은 본인 스스로도 외우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반증이었기 때문에 쳐다보는 천장금왕의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의지는 있으나 지능이 따라주지 않는 고통은 당사자가 아니면 모른다.

“무…무신불…무…무.”

어느새 한 달 보름이 지났는데 아직 두 번째 구결에서 헤매고 있었다.

“무신불…무신불무….무신불무.”

“쉬어가면서 하십시오.”

“아니다. 우린 무슨 일을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기 전에는 쉬지 않는 성질이다. 구결이 이기는지 내가 이기는지 기어코 한판 겨루고 말겠다.”

이젠 본인 스스로도 오기가 생긴 듯 했다.

하지만 지능은 오기를 피운다고 나아지지 않는다. 흥분 할수록 오리혀 감정이 앞서다 보면 더욱 뒤처지고 더딜 뿐이었다.

노력하는 동천몽을 바라보며 천장금왕은 쉬임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으로 체질도 바꾸고 내공까지 완벽하게 증진 시켰다. 이제 남은 것은 초식연마인데 지능이 낮다는 엄청난 암초를 만난 것이다.

아침 일찍 석굴을 찾아 들었다. 그런데 일찍 일어나 죽기 아니면 살기고 구결을 외워야 할 동천몽이 아직까지 바닥에 누워 자고 있었다.

천장금왕의 눈썹이 좁혀졌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한가롭게 늦잠을 자는가 싶어 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구쳤다.

“대법왕님.”

감정을 자제 한다고 했지만 목소리가 커졌다. 코까지 골며 자던 동천몽이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천장금왕을 보며 대번에 인상을 썼다.

“뭐야? 지금 당신이 소리친거야?”

천장금왕이 답답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지금 이렇게 늦잠을 주무실 때입니까? 한 시가 급하옵니다.”

동천몽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누가 그걸 모르나? 그렇다고 그렇게 소릴 지르면 어떡하나?”

동천몽이 길게 기지개를 켜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천장금왕이 다그치듯 말했다.

“어서 외우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금왕.”

동천몽이 갑자기 목소리를 깔았다.

천장금왕이 가볍게 허리를 숙여 대답했다.

“하명 하소서. 대법왕님.”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구결을 외우지 말고 그냥 넘어가는 거야?”

“네엣?”

“뭘 그렇게 놀라나. 구결을 외우지 말고 바로 초식 수련으로 넘어가자는 얘기지. 뭐 굳이 안 되는 구결에 매달려 있느니 그냥 초식연마로 들어가는 게 좋잖아.”

천장금왕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동천몽을 쳐다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느냐?”

“불가합니다. 구결을 외우고 그 뜻을 이해해야 지만 형(形)과 세(勢)의 연마가 가능합니다.”

동천몽이 인상을 썼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그냥 넘어가자니까? 구결을 외우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해도 형과 세만 제대로 따라하면 되잖느냐?”

“물론 그렇지만 천재라도 구결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만마생사혈은 보통 검법과 다릅니다. 아직까지 만마생사혈을 창조하신 대법왕님을 제외하고 완벽하게 익힌 분이 계시지 않다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짐작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천몽이 왁 하며 소릴 질렀다.

“무슨 말인지 알았으니까 일단 그래도 한 번 해보자니까? 한번만 해보자고?”

금방이라도 욕이 튀어나올 듯 인상이 우그러졌다.

동천몽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자기 딴에는 최선을 다했는데도 외워지지 않으므로 지금 감정이 무척 상해있다. 그런데 계속 안 된다고 거절을 하면 평소 성격을 보아 거친 행패가 나올지도 모른다.

“정히 그러시다면 좋습니다. 제가 자세를 보일 테니 따라 해보십시오.”

“빨리 해봐.”

동천몽이 짜증스럽게 말했고 천장금왕이 석굴 밖으로 나가더니 석자 크기의 나무토막 두개를 만들어 한 개는 자신이 쥐고 다른 한 개는 내밀었다.

“정신 집중하고 잘 보셔야 합니다.”

스으으!

기수식을 취한 천장금왕이 검을 앞으로 느리게 찔러갔다.

동천몽이 충분히 이해 할 수 있게 하려는 듯 아주 느려 팔꿈치가 펴지는데 무려 반다경 가까이 걸렸다. 보다 못 한 동천몽이 짜증을 내었다.

“좀 더 빠른 속도로 찔러 보거라. 너무 느리니까 성질이 나는 구나.”

“알겠사옵니다.”

쉬이익!

이번에는 조금 빨리 찔렀다.

아주 단순한 동작이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변화가 들어있다. 그 변화를 끄집어내려면 자신이 취해보이는 자세에서 단 한 치의 빈틈이나 억지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 솔직히 자신의 자세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위력이 뛰어난 만큼 워낙 복잡하고 어려워 채 구성의 경지정도 밖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이론으로 가르쳐야 한다.

“그냥 찌르면 되는 것 아냐?”

동천몽이 별것 아니라는 듯 길게 심호흡을 하며 천장금왕의 자세를 따라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찔러갔다.

쉭!

나무토막이 곧바로 수평이 되게 찔러갔다가 그대로 회수 되었다.

“이것 아냐? 어때? 이거 맞잖아.”

그러면서 어렵지 않게 또다시 찔러보았다.

슈슈슉!

찔렀다가 거둬들이는데 마치 고정된 자세처럼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맞지? 뭐 아무것도 아니잖아. 쉽네.”

천장금왕의 눈이 굳어졌다.

“다…다시 한번 찔러 보십시오.”

“그러지 뭐.”

동천몽은 별것 아니라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하더니 벼락 같이 찔렀다. 비록 나무토막이고 처음 취해보는 자세이지만 능숙했고 완벽했다.

‘어떻게!’

천장금왕의 눈이 부릅떠져 있었다.

“대…대법왕님 송구하지만 한 번만 더 찔러 보시겠습니까?”

동천몽은 알았다는 듯 곧바로 찔러갔다.

슈슈슈!

자신이 붙은 듯한번만 찌르라고 했는데 세 번을 연거푸 찔렀다.

파르르!

천장금왕의 흰 눈썹이 물결처럼 파장을 일으켰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지금 동천몽이 취한 자세는 자신이 시범을 보인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단 한 번에 그대로 따라 할 만큼 뛰어난 재질을 가진 무인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을 뿐더러 더욱 놀라운 것은 구결을 전혀 외우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었다.

“씨벌 인상이 왜 그래? 마음에 안 들면 안 든다고 말로 하라구?”

“하…한번만 더 해보시겠습니까? 딱 한번입니다.”

그까짓 것 무슨 어려울 것 있느냐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한 동천몽이 다시 찔렀다. 속도는 처음보다 더욱 빨라졌고 찌르고 거둬들이는 동작이 물이 흐르듯 부드러웠다.

‘체…체신혜감(體神慧感)이다!’

체신혜감은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을 하는 것을 말한다. 주로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는 짐승들이 보여주는 것으로 머리로 판단하고 이해하는 것보다 본능적으로 몸이 스스로를 조절하는 것이다. 그래서 초상감각(超上感覺)이라고도 불린다.

천장금왕은 너무 놀라운 일이었기에 계속해서 찔러 볼 것을 요구했고 동천몽은 어렵지 않게 찔렀다. 뿐만 아니라 찌름이 거듭될수록 더욱 힘이 넘치고 부드러웠다.

천장금왕의 얼굴이 모처럼 환해졌다. 모든 걱정이 한 순간에 날아 가버렸다.

환생자라고 해서 모두가 전대법왕을 닮은 것은 아니다. 전대법왕이 보여주었던 열 가지 행동중 다섯 가지 이상을 보여주면 환생자로 규 정하고 인정을 한다. 그런데 동천몽은 아홉 가지가 닮았다. 그것도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외모에서부터 성격까지 단 한군데도 틀리지 않고 마치 쌍둥이를 보는 듯 했다.

한데 한 가지 틀린 점은 지금 보여주었든 체신혜감이었다. 전대법왕은 머리만 나쁜 것이 아니라 몸도 둔하고 느렸다.

한동안 입을 떡 벌리고 있던 천장금왕이 다시 동작을 보여주었고 천몽은 그대로 재현을 해 내었다. 천장금왕은 자신이 알고 있는 만사생사혈을 본격적으로 시전해 보이기 시작했다.

사사삭!

동굴은 넓지는 않았지만 검을 휘두르며 가르치기에는 충분했다.

천장금왕의 동작을 바라보는 동천몽의 눈은 반짝 거렸다. 상당한 재미를 갖는 듯 마른침까지 삼키며 구경했다.

무공이지만 마치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분명히 직선으로 찌르고 베는 동작인데 너무 부드럽게 가벼워 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호접의 날개짓을 닮아 있었다.

사르르!

파아아!

산들바람처럼 베다가 벼락처럼 찔렀고 재주를 부리듯 허공에 둥근 원을 그리더니 일거에 석굴 바닥에 검흔을 남겼다.

딱---따따딱!

반각쯤 지나자 천장금왕이 동작을 멈췄다.

혼신을 다한 듯 붉은 가사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숨을 가다듬은 천장금왕이 동천몽을 향해 물었다.

“잘 보셨습니까?”

“음!”

“보여주시겠습니까?”

“험! 조금 틀린 부분이 있더라도 화내지 말고 넓은 아량으로 푹 감싸 주거라.”

천장금왕이 씩 웃었다.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긴장하지 마시고 가벼운 마음으로 펼쳐 보십시오.”

“그럼 지금부터 보았던 것 그대로 한 번 재현 해보겠느니라.”

동천몽이 어께를 좌우로 비틀고 우드득 소리나게 목을 좌우로 비틀며 몸을 풀었다.

카악!

이윽고 손바닥에 침을 뱉어 목검을 움켜쥐었다.

슈욱!

가볍게 찔렀다.

지금 가볍게 찌른 동작이 사망행이란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듯 별 볼일 없는 아주 평범한 동작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구결 내용처럼 느림 속에 빠름이 있고 가벼 운 것 같지만 폭풍 같은 힘이 실려 있어 절정에 오르면 아무리 강한 철벽도 단숨에 뚫어버리는 파괴력을 지닌다.

슈아아아!

동천몽의 몸 놀림은 갈수록 빨라졌다. 석굴 안을 완벽하게 자신의 검 아래 놓고 있었다. 그것은 곧 사방위를 완전히 검으로 점령하여 상대를 옴짝 달싹 하지 못하도록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아미타불!’

한쪽에서 지켜보던 천장금왕의 입에서는 쉴 사이 없이 충격적인 불호가 터져 나왔다. 기적 같은 현실에 솟구치는 흥분을 자제하려는 안간힘이었다.

완벽했다. 단 한곳도 자신과 다른 동작은 없었다. 종이에 자를 대고 줄을 긋듯 자신이 보여주었던 검로(劍路)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불끈!

양주먹이 자신도 모르게 쥐어졌다.

그리고 눈앞으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어쩌면 두 번째로 만마생사혈의 정화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지 모른 다는 것이었다.

학학!

동천몽이 거친 숨을 헐떡였다.

그 역시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는데 천장금왕을 향해 물었다.

“어떻나? 비슷했느냐?”

“대법왕이시여.”

감격에 찬 천장금왕의 음성이 석굴을 메아리쳤다.

자신을 쳐다보는 천장금왕의 눈가에 물기를 발견한 동천몽이 눈을 부릅떴다.

“지금 우는 거냐?”

“도…도저히 흥분이 되어 참을 수가 없나이다.”

“흐…흥분? 당신 지금 흥분했다고 했소?”

동천몽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에게 흥분이라는 의미는 오로지 한 가지 뜻으로 밖에 해석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여인을 품었을 때 짜릿하게 온 몸을 덮쳐오는 쾌감이었다. 오로지 여인을 상대할 때만 얻을 수 있는 흥분을 천장금왕이 하고 있다고 말하자 그의 상식으로서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이봐 진짜로 지금 흥분했다고 했나?”

그러면서 아랫도리를 주시했다.

하지만 붉은 가사에 가려 아랫도리 상태는 확인 되지 않았다.

천장금왕은 자신의 아랫도리를 갑자기 쳐다보는 동천몽의 행동을 이해 못했다가 이내 이유를 깨닫고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헛헛헛!”

“왜 웃느냐?”

동천몽이 기분 나쁘다는 듯 인상을 썼다.

천장금왕이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소승이 말한 그 흥분이라는 것은 동물적인 느낌이 아니라 대법왕님께서 너무 완벽하게 재현을 해내어 감동을 받았다는 뜻이옵니다.”

“난 또.”

동천몽이 씩 웃었다.

다음날부터 반복 수련이 시작되었다. 더 이상 가르쳐 주고 지적해줄 것도 없었다. 단 한 번에 자신의 동작을 그대로 재현해 냈기 때문에 남은 것은 검에 내력을 주입하는 방법만 남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한낱 기우로 끝나고 말았다.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운기를 하여 내력을 검에 주입하고 있었다.

‘가…가히 놀랍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구나.’

천장금왕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르는 일이었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수직에 가까운 석벽이 잡초와 넝쿨식물에 덮여 있었다. 절벽 곳곳에 푸른 이끼가 새까맣게 붙어 있었는데 오로지 한 곳만 단 한포기의 풀도 자라지 못하고 휑 했다.

그곳은 조그만 동굴 입구였는데 바로 만경선불이 살고 있는 빙굴이었다. 어떤 현상으로 인해 그토록 차가운 기운이 동굴안을 지배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오십 여장 떨어져 있는데도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

빙굴이 잘 보이는 곳에 두 사람이 나무를 은폐물 삼아 숨어 있었다. 그들은 천검은왕과 천권동왕이었다. 두 사람은 삼십여장의 거리를 두고 만경선불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다.

척!

천검은왕이 한참 빙굴을 주시하고 있을 때 기척이 들리며 천장금왕이 나타났다.

“사…사형!”

“어떤가? 사숙께서는 여전히 움직임이 없으신가?”

“전혀.”

천장금왕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여긴 내가 지킬 테니 자넨 그만 가보게.”

“가라뇨? 어디로?”

“대법왕님께서 계시는 석굴이지 어디겠나? 자네가 알고 있는 만마생사혈의 둘째 부분을 전수해야 할 것 아닌가?”

천검은왕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무슨 말씀입니까? 설마 대법왕님께서 사형께서 가르쳐준 만마생사혈의 첫 부분을 소화라도 했단 말입니까?”

“소화가 아니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네. 그 뿐이 아닐세. 하루가 다르게 나보다 나아지고 있다네.”

천검은왕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쩌억 벌렸다.

한참을 천장금왕을 바라보았는데 결코 허언이나 허풍을 떠는 사형이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충격적인 일이었기에 알면서도 다시 물었다.

“저…정말로 대법왕님께서 모든 것을 얻으셨단 말입니까?”

“자네도 가르쳐 보면 알게 될 걸세. 하루라도 빨리 무공을 터득케하여 어서 빨리 본궁을 통합해야 하네.”

만경선불과 사대법왕이 이끄는 세력으로 나뉘어졌다는 사실은 이미 서장무림에 퍼졌다. 지금까지 서장무림에서 포달랍궁의 위치는 독보적이었다. 누구도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고 수많은 군소 문파들이 앞 다투어 조공 바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천년가까이 서장무림을 지배해오던 포달람궁의 위상이 서서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전대법왕이 타계하고 십 육년이 지나도록 수장을 내 세우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비록 지금은 동천몽을 얻었지만 십육 년이란 시간은 포달랍궁을 분열시켰고 그 사이 소뢰음사를 비롯해 전통의 경쟁문파의 세력이 급속히 확장하여 포달랍궁이 차지하고 있던 패문(覇門)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천검은왕이 사라지고 천장금왕이 그 자리를 지켰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역시 만경선불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예 빙굴 밖으로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천장금왕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진 것이다.

“안되겠네.”

“어딜 가시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천장금왕을 보며 천권동왕이 물었다.

천장금왕이 빙굴을 노려보며 말했다.

“사숙이 꼼짝하지 않고 있을 리가 없네. 아무래도 이상하니 내가 들어가봐야겠네.”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무슨 일 생길 것이 뭐 있는가? 웬일이냐고 하면 잠시 지나가던 길에 인사차 들렸다고 하지.”

“그 말을 믿을까요?”

“당연히 믿지 않지. 다녀오겠네.”

천장금왕의 신형이 수직으로 솟구쳐 올랐다. 마치 풍선처럼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빙굴이 있는 절벽 중앙을 향해 천천히 떠오르는 천장금왕을 바라보는 천권동왕의 눈이 커졌다.

‘어…어기충소!’

부은등공이라고 하여 천장금왕이 펼치는 것과 비슷한 신법이 있다. 부운등공은 말 그대로 오장 내외를 떠오르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수십 장을 그것도 무척 느리게 솟구치는 것은 어기충소다. 그것은 일백년의 내공을 얻지 않으면 불가능한 놀라운 능력이었다.

‘사형의 무공이 나보다 한참 위에 있었구나!’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천장금왕에게 자신의 무예가 뒤떨어진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사제라고 해서 사형보다 낮아야 하는 법도 없고 사형이라고 해서 반드시 높아야 한다는 법도 없다. 그러나 자신 만큼은 사대법왕 중 가장 뛰어나다고 은근히 자부했는데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지난 수십 년 간 지녔던 자부심이 잔인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척!

절벽입구에 도착한 천장금왕은 몸을 떨었다.

안으로부터 엄청난 냉기가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내력을 끌어 올려 냉기로부터 몸을 보호한 천장금왕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갈수록 냉기는 더욱 강해졌고 내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잠깐인데도 이토록 추위에 몸이 떨리는데 이곳에서 수십 년을 생활해온 만경을 생각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만경의 무공은 아주 높은 곳에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흠칫!

동굴은 텅 비어 있었다.

낡은 발우와 누더기에 가까운 가사 한 벌만이 벽에 걸려 있었는데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밖에서 지켰던 천검은왕과 천권동왕에 의하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고 했다.

휘이익!

천장금왕은 곧바로 몸을 돌려 밖으로 몸을 날렸다.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들리며 목검이 힘차게 뻗어갔다. 단지 앞으로 찔렀을 뿐인데 천검은왕의 눈이 기광을 뿜어냈다.

‘다르다!’

비록 자신이 가르친 초식과 천장금왕이 가르친 검식은 다르다. 천장금왕의 것은 초반부이고 자신이 가르치는 것은 중반부이다. 그러나 찌르는 동작은 전혀 틀렸다. 만마생사혈에는 찌르는 동작이 모두 열 두 가지이다. 물론 각기 위력과 속도가 다르지만 조금 전 동천몽의 동작에서 엄청난 파괴력을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가르쳐준 검식을 익혔을 뿐만 아니라 완전하게 소화하지 않고서는 보여줄 수 없는 능숙함이었다.

쉬이이!

파파파!

자신의 동작은 거칠었다. 팔성가까이 수련을 했지만 완전한 깊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힘은 넘치지만 세밀함이 떨어졌다. 그래서 미리 동천몽에게 그런 단점을 설명해 주고 가르쳤다.

자신의 경험에 비춰 모든 무예는 힘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그러나 그 힘보다 더 비중 큰 부분이 있으니 부드러움이었다. 강함은 절대 부드러움을 이기지 못하며 부드러워지기 위해서는 초식의 연결고리가 생명이다. 연결부위가 끊어짐 없이 얼마만큼 물이 흐르듯 이어지느냐

가 부드러움을 좌우한다. 그래서 고수들일 수록 동작 하나하나가 춤을 추는 듯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동천몽은 천장금왕과 자신이 가르쳐준 두 번째 부분을 완벽하게 연결시키고 있었다.

“대단하지요.”

천검은왕이 입구에 선 천장금왕을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만경이 행적을 감추자 삼대법왕은 모두 동천몽이 수련하고 있는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지금 밖에는 천권동왕이 호위를 하고 있었다.

천검은왕이 검을 휘두르는 동천몽을 보며 말했다.

“가르치면서 몇 번을 까무러칠 뻔 했습니다. 직접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겨지지가 않더군요. 과연 사람의 능력으로 구결을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초식을 흉내 내는지 말입니다. 처음 사형께서 극찬을 하실 때만 해도 솔직히 믿지 않았거든요.”

“합!”

동천몽이 기합까지 지르며 더욱 목검을 휘둘렀다.

바닥과 천장에 수많은 검흔이 생겼다. 목검이고 초식의 숙달 정도를 보여주기 위해 내력을 별로 검에 담지 않았는데도 화강암으로 된 바위는 거침없이 패였다.

동천몽을 쳐다보는 두 사람 입가에 미소가 떠돌았다. 흔들리는 포달랍궁이 점차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군.”

동천몽이 검을 거두며 말했다.

이마에 땀방울 하나 흐르지 않았고 호흡도 조용했다. 그것은 힘으로 펼쳤다기 보다는 초식이 완전히 몸에 배었다는 뜻이었다. 몸이 초식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무리하게 힘을 가할 수밖에 없고 지칠 수밖에 없는데 동천몽에게서는 그런 낌새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올랐다

“또다시 장소를 옮겨야겠습니다.”

보름에 한 번씩 장소를 옮기고 있었다.

한곳에 너무 오래 묵는다는 것은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이 늙은이가 정말 사람 피곤하게 하는군.”

뒤를 따라 나가는 동천몽이 투덜거렸다.

동천몽이 다시 자리를 옮긴 곳은 포달랍궁 영탑전에서 멀지 않은 천연 석굴이었다. 영탑전은 역대 대법왕들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으로 절대성지였다.

천장에서 수많은 종유석이 삐쭉삐쭉 뻗어 내려왔고 물방울이 지면을 적셔 축축했으며 박쥐가 날개짓을 했다.

바닥은 울퉁불퉁 했고 특히 습기로 인해 무척 미끄러웠다. 무공을 연마하다 넘어지기라도 했다가는 뾰쪽한 종유석등에 찔려 부상을 각오해야 할 것 같았다.

동천몽은 곧바로 초식 연마에 들어갔다. 그리고 동굴을 이전한 사흘 뒤 천권동왕이 무예를 지도하기 시작했다.

천권동왕 또한 동천몽을 가르치며 몇 번이고 까무러칠 만큼 놀랐다. 가르쳐준 그대로 한 치의 틀림이나 벗어남이 없이 똑같이 해내었다.

일백년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기변괴사를 겪었지만 지금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처음이었다. 구결도 모른 체 곧바로 초식을 연마한다는 말은 듣도 보지도 못했다. 사실 두 사형이 하도 칭찬을 하기에 동천몽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러나 직접 가르쳐본 천권동왕은 급기야 탄식을 하고 말았다.

‘체신혜감이 진짜로 존재하다니!’

그저 그런 신체가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강호라는 곳이 워낙 뜬 구름 같은 전설과 신화가 뒤엉켜 있는 곳이기 때문에 믿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하나의 전설이 태어나고 있었다.

열심히 동천몽의 검식을 지켜보고 있을 때 밖으로부터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막내 사제가 의식을 차렸다는 군.”

천검은왕이 뛰어 들어왔다.

천권동왕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어서 가보세.”

두 사람은 빠르게 동굴을 벗어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