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5화 (5/71)

제5장 천하제일 추적자

회의장을 빠져나온 동오룡은 녹풍원 뒤뜰을 걷고 있었다. 뒤뜰에는 형형색색의 온갖 꽃이 만개해 있었고 벌과 나비가 꿀을 찾아 쉬임없는 비행을 하고 있었다.

팔(八)자 형으로 생긴 연못 팔담(八潭)가에 우뚝 선 동오룡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깊이 잠긴 시선으로 푸른 연못 속을 들여다보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총관 여추량이 다가왔다.

“시끄럽겠지?”

여추량이 공손히 허리를 구부렸다.

“조금은.”

“모두가 불만일거야? 단 한 놈도 만족해하는 놈은 없을 걸세.”

한 마리의 벌이 접시모양으로 활짝 피어 있는 분홍색 수련 위로 조심스럽게 내려 앉고 있었다.

“사실은…조금 시끄럽습니다.”

동오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넨 어떻게 생각 하는가? 내 결정을 말일세.”

“소…속하는 그저.”

“놀랐겠지. 가장 내 뜻을 잘 알고 날 위해 헌신한 자네에게까지 일체 귀띔도 없이 그런 큰 발표를 해서 말일세.”

“아…아니옵니다. 전혀.”

당황한 표정을 짓던 여추량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로 이제 가내 문제는 관여 하시지 않을 생각이시옵니까?”

“그렇네. 녀석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다 가장 쓸만 한 놈이다 싶으면 정식으로 완전히 자리를 넘겨주고 마누라와 함께 여행이나 다니면 인생을 마무리 할 걸세.”

여추량이 가만 동오룡을 살폈다.

오늘따라 동오룡이 무척 늙어 보였다. 잔혹하리만치 앞만 보고 밀어붙이는 저돌성에 수많은 중원의 군소상가가 무너지고 짓밟혔다. 살려달라고 피눈물을 흘리는 상가 주인들의 절규와 호소에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을 만큼 냉정하던 그가 갑자기 평범한 노인으로 보인 것이다.

“홀가분하군. 헛헛!”

가벼운 미소를 지었지만 여추량이 보기에는 결코 홀가분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때 등 뒤로부터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오만상이 다가와 말했다.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오만상이 백쾌섬을 데리고 있었다.

“그럼 속하는 이만.”

여추량이 잽싸게 허리를 구부리며 자리를 피해주었다.

여추량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 서야 백쾌섬이 동오룡 곁으로 다가섰다. 오만상 또한 멀찍이 물러나 섰다.

“자식들에게 거의 전권을 일임했더군요.”

“아직 대문 밖으로 흘러 나갈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자네는 알고 있군.”

백쾌섬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저의 가장 큰 고객인데 한 치도 소홀함이 없어야 하지요. 한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객점을 동천몽 공자에게 넘긴다고 하셨던데 그건 곧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죽기라도 했단 말인가?”

동오룡이 눈을 빛냈다.

백쾌섬이 말했다.

“뿐만 아니라 다섯 핏줄 중 유독 동천몽에게 야멸차게 대했다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그런 큰 재산을 맡긴 이유는 뭡니까?”

동오룡이 백쾌섬을 빤히 쳐다보았다.

백쾌섬 또한 마주 쳐다보았는데 어서 대답을 해보라는 추궁을 두 눈에 담고 있었다. 동오룡은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뭔가 깊이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다시 백쾌섬을 보며 말했다.

“그렇게 궁금한가?”

동천몽을 찾는데 그런 것 까지 일일이 알아야 하느냐는 질문이었다.

백쾌섬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많이 알수록 찾는 시간이 빨라집니다.”

“미안하네. 자네가 무슨 의도로 묻는지 짐작을 하겠는데 대답이 너무 간단해서. 그 놈 또한 내 자식이기 때문일세.”

“이상하군요. 남의 자식 대하듯 하셨으면서 천상각이 취급하는 알짜배기 업종중 하나로 알려진 객점을 맡겼다는 것이 말입니다.”

“좋네. 이왕지사 말이 나왔으니 제대로 대답해주겠네. 주위 눈 때문이었네. 평소 모질게 대했는데 넘긴 재산까지 형편없다면 사람들이 날 어찌 보겠나?”

“그게 이유의 전부입니까?”

“아니란 말인가?”

동오룡의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백쾌섬이 약간 고개를 갸웃했다. 결코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한 참을 쳐다보던 백쾌섬이 포권의 예를 취했다.

“잘 알겠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돌아선 백쾌섬을 향해 동오룡이 물었다.

“뭔가 진전은 있는가?”

백쾌섬이 돌아서서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약간은?”

그러면서 다시 몸을 돌려 걸어갔다.

걸어가는 백쾌섬의 두 눈은 예리한 빛을 뿌렸다.

자신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동천몽을 대하는 동오룡의 행동은 상상을 초월했다. 다섯 자식 중 가장 멍청했고 온갖 말썽을 피우며 부친의 뜻을 철저히 저버린 망나니적인 행동 때문이었다. 동천몽에게 대한 그의 여러 행동을 종합해 본다면 객점을 남긴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혹 남겨 준다고 해도 재산 같지도 않는 보잘 것 없는 업종을 넘겨야 했는데 알짜배기인 객점을 남겼다는 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다.

천상각이 운영하는 객점은 최고급이다. 특히 객점은 다른 업종과 달리 철저히 현금으로 거래된다. 외상이나 어음이 통용되지 않기 때문에 때에 따라서는 천상각의 전장(錢場)역할도 했다. 중상들에게 결제할 자금이 부족하거나 할 때면 항상 객점에서 나온 돈을 끌어다 메꾸었다. 돈주머니라 할 수 있는 그런 중요한 기관을 가장 차별하고 혹독하게 대했던, 뿐만 아니라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도 없는 동천몽에게 넘겼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멈칫!

한참 생각에 젖어 걸어가던 백쾌섬의 걸음이 세워졌다.

맞은편에서 한 대의 마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삼두마차였는데 마부석에 한 명의 노파가 앉아 있었다.

‘저 노파는?’

백쾌섬이 마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한쪽으로 비켜서며 마부석에 앉아 있는 노파를 보며 눈을 빛냈다.

‘틀림없는 비천야차(飛天夜叉)’

힐끔!

백쾌섬 앞을 지나가는 순간 마부석의 노파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잠깐 일별 했을 뿐인데 노파의 두 눈에서 푸른 광채가 번득였다. 사라지는 마차를 보며 백쾌섬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천상각이 모용세가와 사돈을 맺었다는 소문이 사실이란 말인가?’

백쾌섬은 사라지는 마차에게서 한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서 오십시오. 야차.”

마차가 멈췄다. 맞은편에서 동천비가 다가왔다.

비천야차가 대뜸 마부석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부친은 계시는가?”

“물론입니다. 안에 계시옵니다.”

“오라버니.”

마차 뒤에서 뾰쪽한 음성이 들려왔다. 푸른 경장을 한 백의여인 마차를 내려 다가왔다. 스물 중반쯤 되어 보였는데 버들잎 같은 눈썹과 높으나 우뚝하지 않은 코가 시선을 끈다. 피부는 풍후하고 윤택하여 한 개의 보석을 박아 놓은 듯 했고 입술은 광택이 났으며 붉디 붉어 도발적인 느낌을 주었는데 포두가 둥글고 풍만한 귀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십전지미라 할 수 있었다.

“어서오너라. 산.”

동천비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모용산(慕容山), 당금 오대세가 중 한 곳인 모용세가의 후예이다. 가주 모용파가 쉰 네 살에 겨우 얻은 모용세가의 유일한 혈육으로 여인답지 않게 다혈질 적이며 선이 굵어 어려서부터 부친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키워졌다. 학문은 물론이고 무예가 뛰어나 당금후기지수중에서도 그 명성이 으뜸에 이르고 있는데다 무림 쌍미 중 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죠? 막내 몽 도련님에게 객점을 주셨다구요?”

“벌써 낭자 귀에까지 들어가다니 빠르구려.”

“그럼 사실이란 말인가요?”

“일단 아버지부터 뵈시오.”

모용산이 눈을 부릅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따위 망나니에게 객점을 넘긴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요? 뭔가 크게 잘못된 거예요. 막아야 해요.”

“나도 아버지의 생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이미 결정이 난 일인데 어찌하겠소?”

“내가 따져 보겠어요. 아니 내가 가로막겠어요. 아버님은 지금 어디계시죠?”

“헛헛! 여전히 급한 성정은 변함없군요.”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쳐들자 녹풍원 입구 계단 끝에 동오룡이 서 있었다.

휙!

단번에 도약하여 동오룡 앞에 날아내린 모용산이 날카롭게 말했다.

“정말인가요? 막내 도련님께 객점을 주셨나요?”

“사실이오.”

“그걸 지금 말씀이라고 하시나요? 차라리 길가에 개를 주고 말지 그런 사람에게 넘기다니 망하자는 수작 아닌가요?”

동오룡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모피와 비단이 본가의 주력이오. 천비에게 주력 업종을 넘겼으니 후계자인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오?”

“당장 번복하세요. 객점을 오라버니에게 주세요.”

“아가씨?”

비천야차가 목소리를 높여 불렀다. 아무리 무가(武家)와 상가(商家)의 신분적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예비 시부이다.

“반갑소이다.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야차.”

“그간 별고 없으셨나요?”

“헛헛! 묘용가에서 많은 도움을 주시는데 별탈이 있을 리가 없지요. 자자 들어가십시다.”

동오룡이 두 사람을 데리고 녹풍원 안으로 들어갔다.

붉은 가사를 걸치고 백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고승 열 두 명이 근엄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하나 같이 전신에서 장중한 기세가 뻗어 나왔는데 포달랍궁의 최고 의결기관인 십이법신들이었다. 모두 세수 아흔을 넘긴 인물들로 나름대로 한 분야를 거머쥔 일대 종사라 할 만 한 거목들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십이법신 회의를 시작하겠소이다.”

오척단구에 귀가 유난히 큰 육십가량의 노승이 입을 열어 말했다.

총법사(總法師) 노강선사(怒江禪師), 일반 집단으로 말하면 총관인 셈이었다.

노강 좌측으로 만경이 앉아 있었고 오른 쪽으로 사대법왕이 무거운 얼굴로 앉아 있었다.

노강이 맞은편에 앉은 십이법신을 보며 말했다.

“오늘 법신회의는 본궁의 최고 어른이신 만경사조의 청으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노강에게 만경은 사조가 된다.

노강이 좌측에 앉은 만경을 보며 말했다.

“사조님 말씀 하시지요?”

모든 시선이 만경에게 멎었다. 천장금왕을 비롯한 사대 법왕 또한 과연 만경의 입에서 무슨 말이 떨어질지 자못 긴장한 얼굴이었다. 어떤 얘기가 나올 것인지는 대략 짐작하고 있지만 숨을 죽였다.

만경이 자신을 쳐다보는 십이법신을 한 번 스윽 훑어보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오늘 십이법회를 청한 것은 대법왕 때문이다. 내가 아는바 본궁에 지금 타계한 전 대법왕의 환생자가 들어와 있다고 한다. 포달랍궁의 제일 어른으로써 난 환생자로 지목된 그를 이 자리에 데리고 오길 사대법왕에게 청한다.”

‘우훕!’

천장금왕이 기겁할 듯 놀랐다.

나머지 삼대법왕 역시 엄청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만경의 말은 자신들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생각은 만경이 더 이상 대법왕 자리를 비워둘 수 없으니 십이법신들에게 거수로 당장 대법왕을 옹립하자고 강요 할 줄 알았다. 물론 옹립대상은 자신일 것이다. 그래서 어제 그제 이틀 동안 부지런히 십이법신들을 찾아다니며 만경이 대법왕이 되어서는 안되는 부당함을 설명하고 거수 시 반대를 해 줄 것을 청했다. 그런데 만경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한 동천몽을 이 자리에 데리고 나와 줄 것을 요구했다.

‘아차!’

천장금왕은 앞이 캄캄했다.

완전히 만경에게 당한 것이다. 만경이 동천몽을 이 자리에 데리고 나오라고 요구한 것은 과연 자신이 대법왕 환생자를 죽였는지 죽이지 못했는지 확인을 하려는 것이다. 십이법신이 데리고 오라고 의견을 모으면 꼼짝없이 동천몽을 데리고 나와야 하고 그가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한 만경이 가만있을 턱이 없었다.

“십이법신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본궁 최고의 어른이신 만경사조의 말씀이 일리 있다고 생각 하시는지요?”

노강이 물었다.

“아니 정말로 전대법왕님의 환생자를 찾아 냈단 말이오?”

“그가 누구요? 지금 어디에 있는거요?”

“아미타불! 그렇다면 본궁의 염원이 이뤄진 경사 아니오. 지금 궁내에 있다면 당장 이 자리에 모셔야 할 것이오.”

십이법신들이 앞 다투어 놀라며 동천몽을 데려 올 것을 흥분하여 말했다. 천장금왕의 표정이 굳어졌다. 평소 논리정연하고 입담 좋기로 소문난 자신이지만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변호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뭣들 하는가? 십이 법신들이 당장 사대법왕이 대법왕님의 환생자로 규정한 그 아이를 데려오라고 하지 않는가?”

모든 시선이 사대법왕의 수장인 천장금왕에 쏠렸다.

‘아미타불!’

친장금왕의 입술을 비집고 탄식에 가까운 불호가 흘러나왔다. 강하게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원래는 어제부터 대법왕이 지녀야 할 무예를 수련키로 했지만 십이법회로 인해 연기되었다. 동천몽은 지하 석실에 놓인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팔용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주로 동천몽이 묻고 팔용이 대답했는데 질문 거의가 포달랍궁에 관한 내용이었다.

동천몽이 한마디 한 마디 물을 때마다 팔용은 극도로 공손하게 대답해 주었다.

동천몽의 두 눈이 빛나고 있었다. 팔용의 얘기를 듣고 보니 천장금왕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대법왕은 포달랍궁의 최고 어른이고 서장의 하늘이며 그의 한마디면 제자들의 목숨이 왔다갔다했다. 자금성의 황제가 따로 없었다.

“이봐 팔용.”

“네엣 대법왕님.”

팔용은 끝까지 부동자세로 서 있었는데 동천몽의 부름에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며 대답했다.

“내가 널 이 자리에서 죽어라고 하면 죽겠느냐?”

움찔!

팔용이 너무 놀란 듯 아무 말도 못하고 쳐다보았다.

동천몽이 눈을 부라렸다.

“내 말 한마디는 곧 하늘의 말과 같으므로 누구도 거절할 수 없다며?”

“그…그렇습니다. 대법왕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십니다.”

“그러니까 내가 널 죽어라고 하면 화끈하게 죽어줄 자신 있느냐고?”

동천몽의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았다. 팔용이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죽지 않으면 보나마나 이것들이 날 속였다고 난리를 치며 또다시 도망칠 궁리를 멈추지 않을 것이 뻔했다. 팔용은 두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위대한 선조님들이시여, 이 한 목숨 죽어 대법왕님께서 본궁을 이끌어 갈 수만 있다면 기꺼이 죽겠나이다.’

동천몽이 버럭 소릴 질렀다.

“뭐야 이거, 순 거짓말 아냐? 이것들이 진짜 날 뭘로 보고 사기를 쳐.”

질근!

팔용이 비장한 얼굴로 이를 물었다.

“죽겠나이다. 이 한 몸 대법왕님을 위해서라면.”

퍼억!

팔용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오른 손을 서서히 머리 위로 올렸다.

지켜보던 동천몽의 두 눈이 빛났다.

“너 죽어라고 했더니 왜 손을 쳐들고 그래?”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려도 되겠사옵니까?”

“해봐.”

“본궁을 훌륭하게 이끌어 주십시오. 억조창생을 위해 대법왕님의 혼을 태우시길 간절히 소원하며 불충한 소승 이만 이승을 떠날까 하옵니다.”

그러면서 그대로 자신의 천령개를 내려쳤다.

“잠깐!”

동천몽이 크게 소릴 질렀다.

칼날처럼 곤두선 팔용의 오른손이 천령개 한 치 위에서 멈췄다.

“죽지마.”

“네엣? 조금 전까지는 죽으라고 했잖습니까?”

동천몽이 자리에서 일어나 웃었다.

“그냥 한 번 해본소린데 진짜 죽으면 어떡하나? 일어나 편히 쉬어.”

“대법왕님의 성은에 감사드립니다.”

죽었다 살아난 팔용은 눈물까지 찔끔 짜며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절을 했다.

그때 문밖으로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그그긍 하는 소리와 더불어 석실 문이 열렸다.

천장금왕인줄 알고 있던 동천몽은 낯선 사람이 들어서자 눈을 빛냈다. 팔용이 입구에 선 노강선사를 보며 잽싸게 가까이 다가가 예를 취했다.

“총법선사님 아니시옵니까?”

‘이…이럴수가.’

동천몽을 쳐다보던 노강선사가 벼락을 맞은 듯 온 몸을 세차게 떨며 볼근육을 실룩 거렸다.

‘이…이런 일이 어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틀림 없는 대법왕님이시다.’

동천몽이 이죽거리듯 하며 물었다.

“당신은 또 누구지?”

퍼어억!

노강선사가 무릎이 깨질 듯 바닥에 꿇어 엎드렸다.

“소…소승 노강이 삼가 대법왕님을 뵈옵나이다.”

동천몽이 누구냐는 듯 팔용을 쳐다보았다. 팔용이 노강선사에 대해 빠르게 설명을 해주었고 얘길 들은 동천몽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어 말했다.

“일어 나거라. 무릎은 괜찮느냐? 아무리 내가 무섭다고 해도 그렇지 늙은 노인이 그렇게 사정없이 무릎을 꿇으면 어떡하느냐?”

노강선사가 일어나며 큰 소리로 말했다.

“대법왕님의 자비에 감사 하옵나이다.”

팔용이 나서서 물었다.

“한데 어떻게 총법선사님께서 이곳을?”

이곳은 사대법왕과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출입 할 수 없었고 여기에 동천몽이 있다는 사실은 더욱 극비였다.

노강선사가 자초지종을 말해주었다.

팔용의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동천몽을 데려 오라는 만경의 의도는 너무 뻔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노강선사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천장금왕이 허락을 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자신이 가로막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날 더러 회의에 참석하라는 얘기더냐?”

노강이 허리를 구부렸다.

“아미타불! 그러하옵니다. 소승이 앞장을 설 테니 뒤를 따르시지요.”

“뭔 일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오라고 하니까 가지. 앞장서도록.”

노강선사가 조심스럽게 허리를 구부리고 앞장을 섰고 동천몽이 뒤를 따랐다.

석실 문을 나갈 때 등 뒤로부터 팔용의 음성이 들려왔다.

“대법왕님.”

동천몽이 돌아섰다.

팔용이 근심 가득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역대 조사님들이 대법왕님을 지켜드릴 것입니다.”

팔용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동천몽은 단순히 자신을 생각해서 던지는 말로 알아듣고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오냐, 금방 돌아올테니 기다리거라.”

쿵!

문이 닫히고 혼자 남은 팔용이 근심 가득한 시선으로 입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아미타불을 끝없이 중얼 거렸다.

회의장은 긴장이 흘렀다. 모두가 동천몽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대법왕의 얼굴도 굳어 있었고 의외로 만경선불까지 표정이 딱딱해져 있었다. 사대법왕은 끝내 동천몽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현실 때문에 굳었고, 만경선불은 모조리 척살했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에 표정이 어두워진 것이다.

하나 정작 중요한 것은 사대법왕이 자신을 완벽히 속이고 동천몽을 보호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상대의 능력이 생각 밖으로 뛰어나다는 것을 반증했다. 특히 일목의 암살 능력을 비춰본다면 더욱 만만치 않았다. 어쨌든 만약 동천몽이 진짜 들어선다면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야말로 큰 소득이랄 수 있었다.

딸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일제히 고개가 돌렸다.

노강이 앞장을 섰고 뒤를 따라 동천몽이 들어섰다.

벌떡!

“오오!”

“대…대법왕이시여.”

동천몽이 들어서자 자리에 앉아 있던 십이법신들이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외쳤다. 일부는 그 자리에 엎드려 오체복지를 마다하지 않았고 일부는 눈물까지 흘렸다. 원로들답게 한 눈에 동천몽의 외모에서 타계한 전대법왕의 모습을 찾은 것이다.

만경 또한 다른 사람들과 틀리게 자리에 꼿꼿하게 앉아 있었지만 소스라치게 놀라는 표정은 감추지 못했다.

“어…어쩌면 코도 저렇게 똑같을 수가 있단 말이오?”

“이게 꿈이오 생시오?”

“어서 오소서. 대법왕이시여.”

여기저기서 감격에 들뜬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동천몽이 의자에 앉아 있는 천장금왕 곁으로 다가왔다.

“금왕, 날 보자고 한 만경이란 늙은이가 누구야?”

동천몽의 입에서 늙은이라는 표현이 거침없이 쏟아지자 사람들은 또 한 번 소스라쳤다. 목소리 또한 구분 할 수 없을 만큼 똑같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현재 포달랍궁 내에서 제일 연장자인 만경을 향해 거침없이 늙은이라는 표현을 쓴 것 때문이었다. 타계한 전대법왕도 사숙이 되는 만경에게 하대는 물론 조금만 화가 나도 욕을 바가지로 퍼부었다.

‘또…똑같다.’

‘대…대법왕님이 기어키 환생 하셨구나.’

동천몽이 인상을 썼다.

“내 말 안들려. 날 오라고 한 만경이란자가 누구냐고?”

“이 몸이 옳습니다. 대법왕이시여.”

만경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의 입에서 대법왕이란 호칭이 나왔다는 것은 그 역시 외형적이라도 일단 동천몽을 죽은 전대법왕으로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팔용을 통해 포달랍궁의 서열과 직책 및 관습 예절에 대해 자세히 들었다.

대법왕은 결코 누구에게도 공대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도 대법왕 앞에서는 공손해야 하고 대법왕의 명령은 지엄하다고 했다.

이왕지사 당분간 이곳에 머무르기로 한 이상 어정쩡하게 나가는 것보다는 대차게 밀어 붙이는 것이 좋다는 것이 동천몽의 판단이었다.

“늙은이가 만경이야? 날 왜 불렀지?”

파르르!

만경의 몇 가닥 남지 않는 눈썹이 떨림을 보았다.

새파란 동천몽에게 욕설에 가까운 말을 들어서가 아니라 말투나 성격이 죽은 전대법왕이 살아온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말해봐. 날 보자고 한 용건이 뭐지? 뭐 날 두려워 할 것 없어. 허심 탄회하게 말해보도록.”

만경의 마른 입술이 조용히 물렸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속으로 불호만 열심히 되 뇌일 뿐이었다.

“이봐 노승, 내 말 안 들려. 감히 나 대법왕의 말을 우습게 여기는 건가?”

만경이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아니옵니다. 감히 이 늙은이가 어찌 위대하신 대법왕님의 말씀을 가벼이 듣겠나이까. 절대 그렇지 않사옵니다. 소승은 단지.”

“단지 뭐지?”

“구…궁의 제일 어른으로써 환생하신 대법왕님의 옥체를 뵙고 싶어 청했을 뿐이옵니다. 너무 노여워 마소서.”

“그럼 이제 됐나? 확인했으니까 돌아가도 되겠지?”

“무…물론이옵니다. 대법왕이시여.”

동천몽이 자신을 쳐다보는 십이법신들을 쭈욱 노려보았다.

눈빛이 마주친 십이법신들이 움찔거리며 놀라기도 했고 서둘러 눈빛을 피하는 사람도 있었다.

‘젠장! 못해도 평균 나이가 백 살은 넘겠구만, 그나저나 어휴 냄새들.’

동천몽이 인상을 쓰며 돌아섰다.

자리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외쳐 말했다.

“대법왕이시여.”

탁!

문이 닫히고 동천몽이 사라지자 이곳저곳에서 수근 대는 소리가 들렸다. 천장금왕의 귀에 들려온 수근거림의 대부분 전대법왕과 너무 닮았다는 얘기가 주류를 이루었다. 목소리는 물론 말투와 생김새까지 찍어낸 듯 같다면서 모두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일부에서는 마침내 대법왕님이 환생해 오셨으니 본궁의 미래는 더욱 쾌청하다고 즐거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이 표정이 굳어 있었다.

만경의 굳어진 표정을 보며 사대법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숙 소질들은 이만 물러 갈까하옵니다.”

만경이 굳은 시선으로 노려볼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고 네 사람은 회의장을 빠져 나왔다. 회의장을 빠져 나온 천장금왕이 황급히 세 사람을 보며 입을 열었다.

“큰일났네. 대법왕이 자신의 손에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확인됐으니 죽이고자 더욱 날 뛸 텐데 좋은 방법들 있으면 말들을 해보게.”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어두운 표정만 지을 뿐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우선 대법왕님의 거처부터 옮겨야겠네.”

네 사람은 서둘러 동천몽이 묵고 있는 지하 석실을 찾아갔다. 동천몽에게 만경의 야망과 그가 꾸미는 계략을 설명하고 장소를 옮길 것을 청했다.

만경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말에 동천몽은 피식 웃었다. 모두가 충격을 받을 줄 알았다가 어이없다는 듯 웃는 동천몽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보다 못해 천검은왕이 말했다.

“무공으로 따지면 본궁에서 최고의 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봐 은왕, 당신 보기에 내가 그따위 늙은이에게 죽을 사람처럼 보이나?”

천검은왕이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구부렸다.

“아…아니옵니다. 절대 그렇지 않사옵니다. 대법왕님은 불사불노의 위대한 지체이십니다. 누구도 감히 해할 수 없습니다.”

동천몽이 씨익 웃었다.

“그나저나 어디로 가잔 얘긴가?”

“이럴 때를 대비해 준비해둔 비밀 장소가 있지요. 소승을 따라 오시지요.”

천장금왕이 앞장서 나갔고 동천몽을 가운데 두고 나머지 세 법왕이 에워싸듯 하며 석실을 빠져나갔다.

동천몽이 새롭게 자리를 잡은 곳은 거치 일광전에서 동쪽으로 십 마장쯤 떨어진 석굴이었다. 자연적인 석굴에 사람의 손길이 보태져 무척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천장금왕은 역대 대법왕들이 깨우침이 부족할 때마다 이곳에서 면벽을 하던 장소라고 설명해 주었다. 동천몽이 이곳은 안전 하느냐고 묻자 천장금왕이 대법왕이 머무는 곳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이 포달랍궁의 율법이라고 했다.

“언제 만경사숙의 살수가 들이닥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둘러야 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무공을 배우란 얘기군?”

“그러하옵니다. 옛 말에 열 장정 한 도둑 막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소승들이 아무리 엄중하게 지킨다고 해도 틈은 생기고 언젠가 위험을 맞이할 것입니다. 유일한 방법은 대법왕님 스스로 완성이 되어 적의 위험을 막는 것입니다.”

동천몽이 이마를 찡그리며 물었다.

“한 가지 이해 못할 것이 있군. 대법왕의 권위는 하늘과 맞닿아 있으며 본궁제자들의 모든 생사여탈권을 거머쥐고 있다고 했지 않느냐?”

“그러하옵니다.”

“그럼 날 진정으로 대법왕으로 인정한다면 만경인지 뭔지 하는 그 늙은이를 죽이라고 명령 하면 간단히 끝나는 것 아니겠어?”

천장금왕이 표정을 고치며 말했다.

“만경사숙은 본궁의 어떤 직책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누구에게도 구속당하지 않고 지시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이지요.”

“한마디로 최고 어른에 대한 예우라는 것이군?”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분이 대법왕님을 시해하려고 했다면 결코 죽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난 몇 달 동안 우리가 내 세운 가짜 대법왕 모두가 살해되었지만 어느 누구의 몸에서도 만경사숙이 직접 죽였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피하는 도리 밖에 없다는 것이군. 무슨 뜻인지 알겠다.”

천장금왕이 천검은왕을 향해 물었다.

“자네는 빨리 가서 쌍거불을 데려오게. 이곳으로.”

천검은왕이 대답을 하고 석굴 밖으로 사라졌다.

동천몽이 물었다.

“쌍거불은 누구냐?”

“잠시 후면 도착 할 테니 직접 보시지요.”

동천몽이 알았다는 듯한쪽에 만들어진 석좌에 털썩 주저앉았다. 천장금왕을 비롯한 나머지는 입구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혹시라도 있을 지모를 만경의 침입을 막겠다는 행동이었다.

일각쯤 흘렀을 때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맨 선두에 천검은왕이 들어섰고 뒤를 따라 거구의 두 승려가 들어섰다. 사대법왕의 덩치도 컸지만 지금 들어서는 두 거승에 비하면 어린아이였다.

쿵쿵!

두 사람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석굴이 울렸고 그들은 어깨에 각기 한 개씩 커다란 포대자루를 메고 있었다.

퍼퍽!

어깨에 메고 있던 포대자루를 내려놓고 두 거승은 천장금왕을 향해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쌍거불이 법왕님을 뵈옵니다.”

목소리가 우렁찼다.

“어엇!”

“으와앗…!”

고개를 쳐든 두 사람이 돌 의자에 앉아 있는 동천몽을 발견하고 기겁할 듯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퍼퍽!

말릴 틈도 없이 무릎을 꿇더니 큰 소리로 외쳐 말했다.

“대…대법왕이시여.”

“오오! 환생을 하셨군요. 쌍거불이 인사 올립니다.”

무릎을 꿇고 있는 거구의 두 승려를 바라보는 동천몽의 눈은 여전히 부릅떠져 있었다. 태어나 아직 이토록 큰 덩치를 갖은 사람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동천몽이 석좌에서 일어나 엎드린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쌍거불?”

두 사람이 엎드린 체 머리를 조아린 체 대답했다.

“소…소승은 동불이라 하옵고.”

“저…저는 서불이라 하옵니다.”

“합해서 쌍거불이라는 얘기구나.”

“그렇사옵니다.”

동천몽이 천장금왕을 보았다.

이들은 도대체 누구며 무엇하는 사람들이냐는 질문이었다. 천장금왕이 바닥에 엎드린 쌍거불을 보며 설명했다.

“이들은 앞으로 대법왕님께 걸병광우철포공(傑屛鑛旴鐵袍功)을 가르칠 것입니다.”

“거…걸…걸…걸.”

“걸병광우철포공.”

“응 그래. 그건 또 뭐지?”

“대법왕님의 신체를 도검불침의 철벽으로 만드는 무공이지요. 자세한 설명은 쌍거불에게 들으시면 이해가 빠르실 것입니다. 그리고 아참.”

스윽!

천장금왕이 품에서 한 가지 물건을 꺼냈다. 놀랍게도 그것은 동천몽의 얼굴을 빼닮은 인피면구였다.

“숨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네. 그래서 어제 밤 대법왕님의 용안과 똑같은 가짜면구를 만들었지. 받게.”

천장금왕이 천지철왕에게 내 밀었다.

천지철왕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설마 소제더러 대법왕님의 대리 노릇을 하라는 얘깁니까?”

“시간 없네. 어서 이것을 쓰고 이 약을 먹게.”

품에서 푸른 약병을 꺼냈는데 가루약이 가득 들어있었다.

“이것은 반위성이라는 걸세. 이걸 복용하면 목소리까지 대법왕님과 똑같아 질 걸세.”

천지철왕의 표정이 가볍게 변했다.

그것은자신이 동천몽을 대신하여 만경의 표적이 되라는 뜻이기도 했다.

“뭣 하는가? 어서 받지 않고?”

“아미타불! 알겠사옵니다.”

만경은 무공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다. 대법왕의 호위하는 사대법왕일지라도 한 사람씩 붙는 다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 오직 대법왕에게 전수해줄 무공으로 합공을 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만큼 강력한 만경의 암살 표적에서 자신이 동천몽 노릇을 한다면 살수를 피할 가능성은 낮았다. 그러나 자신의 한 목숨보다 대법왕의 생명이 훨씬 중요했으므로 천지철왕은 망설이지 않고 인피면구를 쓰고 건네준 가루약을 단숨에 입안으로 털어 넣고 삼켰다.

“이제 어떡해야 합니까?”

화악!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생김새도 자신과 같았는데 목소리까지 똑같았다. 이따금 천상각의 호위대장 오만상이 변장을 하는 모습은 보았지만 목소리까지 바꾸는 비법이 있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다.

“자넨 대법왕님이 되어 다른 석굴에 숨어 있게. 그리고 대법왕님은 이것 쓰시고 역시 이 약을 드십시오.”

또 하나의 면구는 천지철왕의 얼굴이었고 또다시 가루가 든 약병을 주었다. 동천몽은 주저앉고 인피면구를 썼고 단숨에 가루약을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셨다.

“허허험!”

일부러 실험삼아 헛기침을 했는데 전혀 엉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는데 천지철왕의 것이었다. 한 순간에 자신의 외형은 사대법왕 중 한 명인 천지철왕이 된 것이다. 동천몽은 무척 신기한 듯 자꾸 헛기침을 해댔다. 그런 그를 보며 사대법왕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쩔 수 없는 소년의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그럼 소제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심하게. 너무 드러내놓고 다니면 오히려 가짜라는 것을 고백하는 꼴이 되니 더욱 깊숙이 은신해야 하고 가급적 밖으로 나다니는 행동은 삼가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동천몽으로 변한 천지철왕이 밖으로 사라지자 천잠금왕이 천지철왕으로 변장해 있는 동천몽을 향해 허릴 숙였다.

“소승들도 이만 가보겠나이다.”

천장금왕 일행이 석굴 밖으로 사라졌다.

쌍거불은 여전히 오체투지를 하듯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두 사람, 그만 일어나가라.”

“대법왕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두 사람은 큰 소리로 대답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어찌나 큰지 동천몽은 하늘을 올려다보듯 고개를 쳐들어 봐야 했다.

“조금 전 금왕이 말한 거….걸병광우…처…철포공이라는게 뭐냐?”

“사형이 설명해 드리십시오.”

서불이 동불을 향해 말했다.

동불이 큰 소리로 말했다.

“금왕법왕님께서 말씀하셨듯 대법왕님의 몸을 쇠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어떻게 해서 내 몸을 단단하게 만드냐는 거지?”

“아주 간단합니다. 철타십병(鐵打十二)으로 만듭니다.”

동천몽이 힐끔 두 사람이 내려놓은 자루를 보았다. 자루에는 다섯 개씩 모두 열 개의 병기가 들어 있었는데 모양이 모두 달랐다.

“저 것이 철타십병이라는 것이냐?”

“예.”

동천몽이 쭈그리고 앉아 자루 속에 들어 있는 병기들을 살펴보았다.

쇠몽둥(鐵杖)에서부터 검(劍)과 칼(刀)를 비롯해 련(鍊) 활(弓)을 포함한 화살(矢)과 채찍(鞭) 큰 도끼(鉞) 창(矛) 밧줄(索) 낫(鎌)이었다.

하나같이 흉측하게 생긴 병기들을 보며 동천몽이 고개를 거렸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걸병광우철포공이라는 무예에 대해 떠오르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천몽이 일어서며 말했다.

“아무튼 상당히 기대가 되는구나. 한 가지 부탁을 하겠다.”

“부…부탁이라뇨 당치 않으시옵니다. 그냥 명령만 내리소서. 그럼 소승들은 죽을 힘을 다해 받들겠나이다.”

“가급적 빨리 완성시켜달라는 얘기를 하고 싶다.”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숙여지며 올려다보는 동천몽의 시선과 마주쳤다.

“저희 또한 법왕님들로부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석 달 내에 완성을 시켜야 한다는 엄명을 받았습니다. 반드시 석 달 이내에 성공을 시켜드리겠나이다.”

“다른 사람은 어느 정도 걸렸느냐? 역대 법왕들 말이다.”

“저희들이 알기에 걸병광우철포공을 가장 빨리 익히신 대법왕님은 칠대 법왕님으로써 반년 걸린 것으로 아옵니다.”

“반 년?”

동천몽의 눈이 약간 커졌다.

역대 수많은 포달랍궁의 대법왕 중 가장 빠른 사람이 반년 걸렸다는 말에 동천몽이 승부욕 타오르는 눈으로 물었다.

“어렵나?”

“저희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다만 뭐냐?”

“모든 건 참느냐 못 참느냐가 좌우합니다.”

“잘만 참으면 석 달이 걸리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구나.”

“물론이지요.”

동천몽이 씨익 웃었다.

“좋다. 난 두 달 만에 끝내고 싶다. 할 수 있겠느냐?”

“결과는 우리가 쥐고 있지 않습니다. 대법왕님께 메어 있지요.”

“난 걱정마라. 난 얼마든지 열심히 가르쳐 준대로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

하루라도 이곳을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렇기 위해서는 단 하루도 소홀히 보낼 수 없었고 어떻게 해서라도 서둘러 무공을 배우고 싶었다.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겠지?”

동불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곧바로 수련에 들어가자는 말씀입니까?”

“어차피 할 거라면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자자 어떻게 하는 것이냐 어서 설명을 해 보거라.”

동불과 서불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잠시 후 동불이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대법왕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곧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그럼 우선 옷을 벗으십시오.”

흠칫!

느닷없이 옷을 벗으란 말에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걸병광우철포공은 옷을 벗고 수련하는 것입니다.”

동천몽이 고개를 갸웃 거리더니 알았다는 듯 대답했다.

“거참, 알겠느니라.”

동천몽이 순식간에 옷을 벗었다.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사타구니를 가린 사각의 천 조각밖에 없었다.

“됐느냐?”

“그것도 마저 벗으십시오.”

동천몽이 눈을 크게 떴다.

“홀라당 벗으란 말이냐?”

“걸병광우철포공은 몸에 단 한조각의 옷을 걸치고 있어도 안 됩니다. 어서 벗으시지요.”

동천몽이 약간 이상하다는 듯 동불과 서불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허험! 그렇다면 벗지.”

마지막 천 조각까지 완전히 벗은 동천몽을 보며 쌍거불이 허리를 숙였다.

“그럼 지금부터 걸병광우철포공 수련을 시작 하겠습니다.”

그러더니 두 사람이 동시에 무릎을 사정없이 꿇었다.

“왜 그러느냐? 왜 갑자기 무릎은 꿇고 그러느냐?”

동천몽이 놀라 물었고 쌍거불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대법왕이시여 지금부터 저희들이 하는 짓은 결코 고의가 아님을 이해해주십시오.”

“무슨?”

“절대 고의가 아니며 오로지 대법왕님과 본궁의 미래를 위한 길임을 이해하시고 절대 화를 내거나 미워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동천몽이 잠시 멍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도무지 머릿속에 잡히거나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