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불사심법
팔용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솟구쳐 오르는 분노와 답답함을 가까스로 짓누르라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벌써 쉰 번을 읽어주고 물었는데도 동천몽은 단 한 줄도 외우지 못했다. 사람의 머리는 다 똑같지 않다고 하지만 이건 숫제 돌덩이가 따로 없었다.
“서두르지 마시고 다시 한 번 읊어 보십시오. 아주 천천 생각해 가면서 말입니다.”
“허흠! 왜 이렇게 안되지.”
스스로도 계면쩍은 듯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떼기 시작했다.
“도남라…라…라 돈, 아니지. 도남라….라라 절. 이것도 아니고.”
팔용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대법왕만 아니라면 금방이라도 욕을 한 바가지 뱉었으면 시원할 것 같았다.
“이봐. 너 지금 인상 쓰는 거야?”
동천몽이 노려보았다.
팔용이 화들짝 놀라며 표정을 고쳤다.
“그…그게 아닙니다. 잠시 배가 아파.”
“이제 생각났다. 도남라전 어때? 맞지?”
팔용의 굳었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오오! 장하십니다. 맞추었습니다. 그 다음 부분을 말씀해 보십시오.”
동천몽이 침을 삼키며 눈을 희번득 거렸다.
“구…군성…보오…군성보…통, 이건 아니고 군성보안 이것도 아니고…아 생각났다. 군성보벌.”
“오! 예! 계속 하십시오.”
“그 다음에는 교고….교고…교고…교고.”
팔용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서두르면 절대 안 됩니다. 곰곰이 생각하시고 대답하십시오. 교고 그 다음에는 뭡니까?”
“교고읍.”
“맞습니다. 마지막 한 글자?”
동천몽의 눈알이 부지런히 돌았다.
생각해 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래 교고읍지.”
“아미타불! 또 맞추었습니다. 대법왕이시여.”
팔용이 좋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에 반해 동천몽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밖은 아직도 캄캄했다. 동녘 하늘에 붉은 서광이 비추려면 상당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은 어두운 새벽에 천장금왕이 묵는 천량전 문이 열렸다.
흠칫!
들어서던 천검은왕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아직 천장금왕이 잠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너무 이른 방문이 아닐까 은근히 걱정했었다. 그런데 천장금왕은 이미 이부자리를 단정하게 개워 놓고 결가부좌하여 운기조식을 취하고 있었다.
칠채서광이 천장금왕의 온몸을 감싸고 있는 것이 운기조식이 절정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몸을 감싸고 있던 칠채서광이 천장금왕의 콧속으로 스며들며 눈을 떴다.
“아직 날이 새려면 멀었는데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날 찾아왔는가?”
사대법왕중 천검은왕의 행동은 가장 진중하다. 함부로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고 남의 말을 쉽게 믿지 않는다. 생각은 길게 하지만 일단 결심이 서면 과감히 행동으로 나선다.
“자네가 날 이렇게 일찍 찾아온걸 보면 궁내에 좋지 않은 중차대한 일이 벌어진게 로군.”
“그렇습니다. 불법(不法)이 살해되었습니다.”
“몇 명인가?”
“벌써 일곱입니다.”
천장금왕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 포달랍궁 에는 열 명의 가짜 동천몽이 있다. 가짜 대법왕이라고 하여 불법(不法)이라고 불리는 십인.
반대세력의 시선을 유도하기 위해 제자 들 중 일부를 골라 가짜행세를 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런데 불과 몇 일 만에 일곱이 죽었다는 것은 자신들의 의도가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역시 사숙 쪽이겠지?”
“그럴 것입니다.”
“으음!”
천장금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거운 얼굴로 천검은왕을 쳐다보았다.
만경이 노골적으로 나섰다는 것은 더 이상 물밑 작업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정면 돌파를 하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포달랍궁에서 가장 배분이 높고 그를 따르는 원로들이 적지 않다. 그가 본격적으로 나섰다면 사태는 더욱 엄중해진다.
만경은 사제인 전 전대법왕에게 대법왕의 위(位) 를 빼앗겼다. 그런데다 사질인 전 대법왕에게조차 밀리자 그의 분노는 폭발직전에 있었다.
“어찌할까요?”
천검은왕이 물었지만 천장금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뾰쪽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최선을 다해 만경사숙 쪽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그 사이에 부지런히 동천몽을 키워내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사실 만경에게 끝까지 동천몽의 존재를 감출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포달랍궁 제일 어른이다. 상대가 아무리 자신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고 해도 만경에게는 얘길 해주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하루 정도면 충분히 외울 심법을 동천몽은 무려 한 달 만에 가까스로 기억했다.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일사천리로 외우지는 못하고 더듬거리는 수준이었다.
“허음!”
국화공주민박석백유에 들어앉은 동천몽이 목을 좌우로 돌렸다. 팔용으로부터 훌륭하다는 칭찬을 받은 뒤끝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머리로 그 복잡한 불사심법을 외웠다는 것이 꿈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내용인지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외우라고 했으므로 외웠을 뿐이다.
한 달 만에 겨우 외워놓고 잔뜩 목에 힘을 주고 있는 동천몽을 쳐다보는 팔용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난 한 달 동안 지켜본 동천몽의 지능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동천몽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렇기 때문에 답답한 것이다. 차라리 요령을 피우며 노력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 달 만에 외웠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데 죽자 사자 매달리며, 심지어는 잠까지 줄여가며 외우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차라리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동천몽은 스스로의 능력에 감복한 듯 연신 헛기침을 하며 목을 좌우로 돌려대고 있었다.
“대법왕님.”
“뭔데 또?”
“외운 불사심법을 오늘부터 하루에 세 번씩 외우십시오.”
“세 번씩, 아침 점심 저녁으로 말이냐?”
“예! 아침 점심 저녁을 드시기 일다경 전에 외우시면 국화공주민박석백유이 조금씩 몸속으로 스며들 것입니다. 물론 외우고 이해하는 속도가 빠를수록 스며드는 속도는 달라 질 것입니다.”
“한 마디로 불사심법을 외우면서 국화공주민…박석백…유를 몸으로 흡수하란 뜻 아니냐?”
“갈수록 지혜로워 지십니다. 맞습니다. 아주 정확히 보셨습니다.”
“알았어. 염려 말고 나가봐. 지난 한 달 동안 가르치느라 고생했어. 나중 내가 큰 상을 내리지.”
“가…감사하옵니다. 그럼 속하는 이만.”
팔용이 크게 허리를 구부리고 밖으로 나갔다.
팔용이 나가자마자 동천몽은 등을 기대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려서부터 책이라면 몸서리가 쳐질 만큼 싫었고 책만 보았다 하면 잠이 들었다. 가뜩이나 지능도 떨어진데다 책까지 멀리하자 부친의 꾸중을 달고 살았다. 보통 사람은 꾸중을 들으면 다음부터 잘해야지 한다는데 이상하게 자신은 부친이 꾸중을 하면 할수록 오기로 책을 더욱 멀리했다. 그럴수록 자신에 대한 부친의 태도는 가혹했다.
그런데 그토록 글이라면 쳐다보기도 싫어한 자신이 한 달 만에 외웠다는 것은 흥분될 일이며 그만큼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입 밖으로 꺼낼 수조차 없는 창피한 얘기지만 자신으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하나라도 빨리 배울수록 이곳을 빠져나가는 날이 빨리 온다는 사실에 미친 듯이 노력한 것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잠시 눈을 감고 피곤함에 젖어 있던 동천몽이 등을 떼었다.
촥!
가부좌를 틀고 앉아 불사심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도남라전 군성보벌…!’
동천몽은 외우고 또 외웠다.
단 한시도 쉬지 않고 혀가 부르트도록 외운 결과 이제는 막힘이 없었다.
그런데 사흘 쯤 지났을까. 열심히 불사심법을 외우던 동천몽이 억 하는 놀라움을 터뜨렸다. 열심히 불사심법을 외우느라 미처 발견하지 못했는데 처음 턱밑까지 차올랐던 국화공주민박석백유가 명치부위까지 내려와 있었다.
‘하면 줄어든 만큼 내 몸속으로 들어갔단 말인가’
한 번도 몸으로 스며드는 광경을 목격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명치부위까지 떨어졌다면 몸속으로 스며들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석 달째가 되는 날 동천몽은 놀라움을 경험했다. 국화공주민박석백유는 배꼽아래까지 내려가 있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일은 다음에 벌어졌다.
술시가 되어 밖으로 나오던 동천몽이 그대로 머리를 석실 천장에 부딪힌 것이다.
“아이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떨어진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바닥과 석실 천장의 약 이장 정도 될 만큼 아주 높았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기 위해 가볍게 다리에 힘을 주고 뛰어 올랐을 뿐인데 천장에 머리를 박은 것이다.
잠시 부딪힌 머리 부위를 오른손으로 감싸며 생각에 잠기던 동천몽이 다시 한 번 발끝에 힘을 주고 뛰어 올랐다.
슈욱!
퍼억!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욱 세차게 부딪혔다.
“끄윽!”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그러나 바닥에 내려선 동천몽의 눈은 휘둥그레 해졌다. 까마득한 석실 천장까지 힘들이지 않고 뛰어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팟!
또다시 바닥을 박차며 뛰어 올랐다. 이번에는 부딪힐 것을 염려해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푸욱!
손등이 천장에 부딪히고 몸은 다시 바닥으로 내려섰는데 떨어질 때도 가볍다. 또다시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동천몽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어쭈구리, 이게 바로 무림인들이 말하는 내공이라는 것이로구나.’
무예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은 아니었다.
천상각에는 적지 않은 호위무사들이 있었고 왕왕 그들이 수련하는 장면을 구경할 수가 있었다. 무공을 모르는 입장에서 그들이 고수다 아니다 할 수는 없었지만 어지간한 높이와 거리는 단숨에 날아올랐다.
그런데 자신이 지금 그런 광경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스윽!
동천몽은 걸음도 조용히 내딛지 않고 펄쩍 뛰어봤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장 정도를 단숨에 건너 뛰어버렸다.
재미가 붙은 동천몽은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뛰었고 순식간에 석실의 계단을 벗어나 밖으로 나갔다.
밖은 이미 캄캄했는데 걸음에 재미가 붙은 동천몽은 일광전을 향해 계속 뛰었다. 그때마다 동천몽의 몸은 이삼 장씩 쏘아갔고 재미가 붙자 더욱 용을 쓰며 땅을 박찼다.
어둠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천장금왕을 비롯한 천검은왕과 천권동왕이 감탄을 했다.
“이상하군요. 머리가 나쁘면 상식적으로 무예의 진전도 느린 편인데 대법왕님은 전혀 그렇지 않다니.”
천검은왕이 말했다.
천권동왕 또한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허참 볼수록 희한합니다. 보법을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시늉을 낼 줄 알다니 말입니까?”
“어쨌든 무예에 흥미를 가진 것이 다행일세. 배우기 싫다고 또다시 고집을 피우면 어떡하나 염려 했는데.”
그때 문이 열리고 천지철왕이 들어섰다.
들어서는 천지철왕을 보며 천장금왕이 물었다.
“어찌되었던가?”
“조금 전 마지막 열 명째 불법이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천장금왕이 나직히 불호를 외웠다.
예상보다 빠르다. 열 명 모두를 제거 하는데 최소한 반년은 걸릴 것으로 내다 보았다. 그 반년 안에 동천몽을 완성시키지는 못해도 확실히 기초는 잡아 놓으리라고 계산한 것이다. 그런데 불과 한 달 조금 지났을 뿐인데 가짜 동천몽 열 명이 모두 제거되었다는 것은 만경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다 죽였으니 안심하겠죠?”
천검은왕이 물었다.
천장금왕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사숙을 모르는가? 영민하기가 누구도 따르지 못하네. 열 명 모두 가짜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을 걸세.”
“그럼 어떡하지요?”
천장금왕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땅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열 명의 모두 죽였다고 보고를 했는데도 만경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약간 이마를 찡그리며 골똘히 뭔가 생각 하는 듯 했고 잔뜩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자신하고 들어온 일목은 그런 만경을 불만스런 얼굴로 보았다.
만경은 자신이 조금만 잘한 일이 있어도 항상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즐겁고 기쁜 일이었다.
“주인 왜 그러시오? 기분 나쁘시오?”
만경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일목의 하나 뿐인 눈이 깜박거렸다.
일목의 눈은 태어 날 때부터 한 개였다. 보통 사람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뿐인 눈이 치명적인 장애가 되겠지만 한 조직에서만 큼은 예외였다.
그곳은 희미한 전설 속에 묻혀 있는 집단이었다. 워낙 은밀하고 좀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어딘가 존재 하는 것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신비지처.
전설은 있으나 실체를 드러내지 않아 더욱 부풀려지고 온갖 기변괴사로 뭉쳐지고 다져진 그곳에서 하나의 눈만을 갖고 태어난 사람을 목신(目神)이라고 부른다. 그들의 역사에 의하면 목신이 태어나면 자신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찬란한 자신들만의 문화를 꽃피운다고 했다. 하지만 전설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문파의 정통성과 위력을 돋보이기 위해 만든 가설일 뿐이었다.
목신, 즉 일목이 태어났으나 세상을 지배하기는 커녕 오히려 포달랍궁의 제일고수라고 할 수 있는 만경에게 제압되어 그의 시위노릇을 하고 있었다.
대설산 십년 면벽에 들어간 만경 앞에 일목이 나타난 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수하들과 사냥을 나왔다가 폭설을 피해 들어간 동굴이 하필 만경이 수행하고 있는 석굴이었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석굴의 임자를 자처하며 언쟁을 벌였다. 만경은 자신이 먼저 차지하고 있었으니 주인이라고 우겼고 일목은 대설산은 예로부터 조상들의 땅이므로 자신이 주인이라고 했다. 급기야 두 사람은 힘으로 주인을 가리기로 했고 만경이 이긴 것이다. 패자는 승자의 평생 종복이 되기로 약속하였기에 그날 이후 일목은 만경의 충실한 시위가 되었다.
일목은 약속대로 만경에게 충실했다. 그가 지시하고 내린 명령은 불구덩이라고 거부하지 않고 뛰어 들었다. 더구나 만경이 하고자 하는 일에 반대를 하거나 가로막은 자는 일목에게 있어 무조건 적이었다. 하늘처럼 믿고 따르는 만경을 괴롭히는 사람들은 절대 용서해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주인에게 함부로 말하거나 비위를 건드린 사람들을 보면 기어코 죽이려고 했고 만경 또한 눈엣가시들은 만경에게 몰래 제거토록 했다. 하지만 누구도 만경 옆에 일목이라는 보이지 않은 가공할 살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는 사람은 모두 죽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이상하지 않느냐?”
“뭐가요?”
“네가 모두 죽였는데도 그 놈들이 별로 이상한 낌새를 보이지 않지 않느냐? 만약 대법왕의 환생자가 죽었다면 지금쯤 난리 법석을 피우고 있을 텐데 말이다.”
“아닙니다. 아까 낮에 금 돼지를 보았는데 아주 괴로워하는 표정이던데요.”
일목은 천장금왕을 금 돼지라고 불렀고 나머지 세 법왕을 서열대로 은 돼지 동 돼지 철 돼지라고 부른다.
“아니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다. 뭔가 있어.”
“주인님, 차라리 이번 기회에 그 네 마리의 돼지를 내가 죽여 버리겠습니다.”
금방이라도 명령만 내리면 당장이라고 목을 베어버릴 듯 일목의 눈에서 섬칫한 광채가 번득거렸다.
일목은 단순했다.
조금만 눈에 거슬리거나 만경의 심기를 괴롭히는 사람은 덮어놓고 죽이려고 들었다.
일목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사대법왕의 적수가 되지는 않는다. 일목도 강하지만 사대법왕도 강하다. 특히 네 사람이 힘을 모으면 천하에 대적할 인물이 없다. 만경 자신 또한 네 명이 합공을 펼치면 이기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사대법왕 각기 한 사람에게 강력한 무공 한가지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법무(大法武), 네 사람에게는 대법왕이 배우게 될 무공이 한 가지씩 주어져 있었다. 사대법왕은 대법왕이 공석일 때에는 철저히 그의 권한을 넘겨받는다. 또한 대법왕이 생존해 있을 때는 완전한 충신이어야 한다.
그런 그들이지만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는 법, 혹시라도 반란을 꿈꿀 것을 대비해 죽기 직전 대법왕은 네 사람을 차례대로 불러 자신이 지닌 절기를 나눠 가르쳐주었다. 혼자서는 완성된 기예가 아니기 때문에 위력이 없지만 넷이 뭉치면 사숙인 자신도 절대 당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팟!
만경의 두 눈이 갑자기 빛을 발했다. 뭔가 좋은 계교를 생각해낸 것 같았다.
처음 앉아 있을 때 턱밑을 적시던 국화공주민박석백유가 완전히 바닥을 드러내었다. 자리를 잡고 앉으면 이제 엉덩이만 겨우 적실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알몸으로 결가부좌한 동천몽은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그 많던 흰 액체가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갔는데 것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가뜩이나 까만 피부로 인해 숯덩이라는 놀림까지 당했는데 이제는 어린아이처럼 희어졌고 온 몸에서는 터질 것 같은 힘이 넘쳐흘렀다.
동천몽은 자신의 체질이 예전과 엄청난 변화가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완전히 체질이 변한 것이다. 어려서부터 색을 밝히고 술을 좋아해 몸이 비리비리 했는데 이제 온 몸은 단단하게 균형이 잡혀져 있었다.
근육질 사내들을 보면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여자들은 근육질 사내들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해보지 않은 운동이 없었다. 심지어 근육을 키우기 위해 좋다는 약까지 복용했지만 키워지기는 커녕 가짜 약장사에게 속아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 했다.
“흐흐!”
갑자기 동천몽이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수많은 야월루 기녀들을 모두 품어봤지만 주인 홍화를 품어 보지 못했다. 홍화는 항상 붉은 옷을 자주 입어 붙여진 이름인데 얼굴만 아름다울 뿐 아니라 몸매 또한 팔등신이라고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문제는 그녀는 아무리 돈을 많이 주어도 몸이 나약한 사내와는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상대하는 사내들은 대부분이 강호의 이름난 고수들이었다.
자신의 허약한 몸으로 그녀를 넘어뜨린 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보기에도 구리빛 근육질로 바뀐 자신의 몸을 보자 가장 먼저 홍화가 떠올랐다.
‘계집 돌아가면 가장 먼저 네년을 죽여주겠다. 기다려라’
동천몽은 불사심법을 외우며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불사심법을 외우다 보니 어느새 자신의 몸속에 기를 다스리는 법을 배웠고 그것이 운기조식이라는 것을 깨우쳤다.
마침내 바닥이 드러났다. 국화공주민박석백유이 완전히 몸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지금 기분이 어떠십니까?”
팔용이 물었다.
동천몽이 통 밖으로 나와 옷을 걸치며 말했다.
“좋구나.”
“하늘을 훨훨 날아갈 것 같고 뭐든지 부숴버릴 것 같은 힘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오냐! 엇 이게 뭐야?”
의복을 걸친 동천몽이 인상을 찌푸렸다.
옷이 착 달라붙어 금방이라도 찢어질듯 했다.
“핫핫! 대법왕님께서 벌모세수로 인해 옥체가 성장하여 옷이 작아졌군요. 당장 새 옷으로 대령하겠나이다.”
마치 어린아이의 옷을 입은 같았다.
동천몽은 무릎을 구부리고 슬쩍 뛰었다.
팍!
슈우우!
슬쩍 바닥을 박차고 뛰어 올랐을 뿐인데 또다시 몸은 화살처럼 천장을 향해 솟구쳤다. 번개처럼 양손을 머리위로 올려 천장과의 충돌을 완화시켰다.
빠악!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동천몽은 뛰다가 지하석실을 걸어보기도 하고 날아보기도 했다.
휙!
휘이익!
자신의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순식간에 이동을 한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하고 즐거웠다. 재미에 푹 빠져 열심히 지하석실을 뛰어다니고 있을 때 팔용이 돌아왔다.
“갈아입으소서.”
몸을 세운 동천몽이 팔용이 내민 옷을 보더니 와락 인상을 썼다.
팔용이 내민 것은 승려들이 입는 재색의 법의였다.
“왜 그러시옵니까?”
“이걸 날더러 입으란 말이냐?”
“이제 대법왕님께서는 속인이 아니시옵니다. 앞으로 이런 옷을 걸치셔야 하옵니다.”
동천몽이 불쾌한 한참을 오려보더니 하는 수 없다는 듯 법의를 받아 입었다. 머리만 짧으면 영락없는 승려였다.
“어울리십니다. 대법왕님.”
그때 문이 열리고 천장금왕이 들어섰다.
법의를 걸치고 서 있는 동천몽을 바라보는 천장금왕의 얼굴에 모처럼 환한 미소가 감돌았다.
“단지 법의만 걸쳤을 뿐인데도 당당하신 모습이 과연 대법왕 다우신 풍도입니다. 자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천장금왕이 한쪽에 놓인 의자로 앉을 것을 권유했다.
동천몽이 멈칫 거리다 의자에 앉자 천장금왕이 소매춤에서 은빛이 번쩍이는 삭도(削刀)를 꺼내 쥐었다.
“그…그건 또 뭐냐?”
“이제 불가에 들어오셨으니 삭발을 하셔야지요.”
“그….그래서 지금 내 머리를 자르겠단 말이냐?”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머리가 긴 중을 보셨습니까? 금방 깎아 드릴테니 염려 마십시오.”
동천몽이 천장금왕을 노려보았다.
천장금왕이 여전히 미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어서 머리를 숙이십시오.”
슥!
동천몽이 고개를 숙였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이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거나 제의를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평생 중이 되어 살 것도 아니고 잠시 뿐이니 깎은 머리는 다시 길면 된다.
싹!
싸아악!
차가운 한기를 품은 삭도 지날 때마다 긴 머리가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이미 많은 제자들의 머리를 깎아 본 듯 천장금왕의 칼질은 능숙했다. 불과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동천몽의 머리에 긴 머리털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슥!
천장금왕이 소매 춤에서 손바닥만 한 동경을 꺼내주었다.
“보십시오.”
동천몽은 동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머리를 깎고 법의를 걸친 자신의 모습은 완전한 중이었다.
“처음 며칠은 어색하겠지만 차차 괜찮아질 것입니다.”
천장금왕이 건네준 동경을 받아 품속에 넣더니 나직이 말했다.
“내일부터 무공을 배우시게 될 것입니다.”
“누구에게 말이오?”
“쌍거불(雙巨佛)을 비롯해 본 사대법왕들이 한 가지씩의 무예를 가르치실 것입니다. 배우게 될 무공은 본궁 대대로 대법왕님만 배우실수 있는 절학이지요.”
동천몽이 인상을 썼다.
“어렵겠지?”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대법왕님께서 워낙 영민하시니 금방 배우실 것입니다.”
영민하다는 표현에 팔용이 천장금왕을 돌아보았다.
천장금왕은 전혀 웃지도 않고 진지했는데 진짜로 동천몽이 영민하다는 듯 했다. 하지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뱉은 말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동천몽은 지금까지 자신이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멍청했다.
“사형!”
지하실에 다급한 음성이 흘렀다.
석실 입구 문이 열리고 사대법왕 중 나머지 세 사람이 들어섰다. 모두의 안색이 돌덩이처럼 굳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 변고가 생겼음을 천장금왕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예상대로 천검은왕의 입에서 나온 말은 놀라웠다.
“이틀 후 십이법회 가 열린다 하옵니다.”
“십이 법회.”
천장금왕이 깜짝 놀랐다.
십이법회(十二法會), 십이법신으로 불리는 포달랍궁애 열두명의 장로를 가리킨다. 십이법신은 일체 궁내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대신 중요 간부들 인사와 율법을 개폐하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십이법신회에서 의결된 사안은 무조건 이행되어야 한다.
“십이법회를 요청한 사람은 누구던가?”
“만경 사숙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천장금왕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무슨 안건을 토론하기 위해 십이법회를 요청했을 까요?”
천권동왕이 물었다.
천장금왕이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에 젖더니 조용히 고개를 들고 말했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는 모양이군. 아마 자신이 직접 대법왕의 위에 오르겠다는 선언을 하려는 것일 걸세.”
“말도 안 됩니다.”
“그런 억지가?”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보았다.
천돈법왕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알다시피 십이 법회에 올려 진 안건은 철저히 숫자로 결정되네. 사숙이 갑자기 십이법회를 요청한 것은 자신이 있기 때문일 걸세.”
“십이법신 중 여덟 명이 우리쪽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것은 궁내 제자들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사옵니다.”
“그렇기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가 없네. 배신이 속세에만 있는 것이 아니지.”
“하면 우리 쪽 인물 중 누군가가 사숙쪽 으로 넘어갔다는 얘깁니까?”
“가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닐세. 당장 십이 법회를 대비해야겠네.”
천장금왕이 팔용을 향해 말했다.
“넌 곧바로 대법왕님을 쌍거불에게 데려가라.”
“예 수석법왕님.”
네 사람이 긴장한 표정으로 석실을 나갔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동천몽이 팔용에게 물었다.
“십이법회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뭐냐?”
“한마디로 본 궁내 최고 의결기구입니다. 중요한 안건을 결정하고 집행하는데 십이법회에서 결정이 나면 누구도 거역할 수 없고 무조건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유일한 예외가 있습니다. 대법왕님에 대한 간섭이나 통제만큼은 십이법회에서도 관여하거나 제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대법왕은 누구의 간섭이나 영향을 받지 않는 황제나 마찬가지라는 얘기 아니냐?”
“그런 셈이지요.”
동천몽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나타났다.
팔용이 계속 말했다.
“대법왕님은 십이법회에서 결정된 사안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대법왕님께서 정식으로 착좌하지 않았으므로 십이법회에는 현재 본궁 최고 핵심부이지요. 그래서 결정된 사안은 무조건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미 팔용을 통해 만경이라는 백오십살 먹은 노인이 대법왕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얘길 들었다. 전전대법왕의 사제로 무공은 이미 입신의 경지에 올랐으며 사대법왕이 합공을 해야만 겨우 상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천장금왕은 갑자기 열린 십이법회가 만경이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동천몽은 생각을 달리했다. 이번 십이법회는 필시 자신 때문에 열릴 것이었다. 그것은 장사꾼에게만 있는 본능적인 육감이었다.
동오룡이 느닷없이 천상회의를 소집했다. 천상회의는 천상각 최고 회의로 중요한 사업이나 거래를 앞두고서 좋은 묘안을 듣기 위해 소집하며 이따금 큰 인사이동이 있을 때 열린다.
자주 열리지 않은 천상회의가 소집되었기 때문에 발걸음을 옮기는 간부들 얼굴에 의문과 궁금증이 잔뜩 묻어 있었다.
천상회의가 열리는 상대옥(商大屋)의 공기는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오십 여명의 간부들이 동오룡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숨소리 하나 흘러나오지 않았다. 오늘의 천상회의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모두가 느낀 듯 모두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딸칵!
문이 열리고 여추량이 들어섰다.
“각주님께서 오시오.”
앉아 있던 오십명의 간부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오만상을 거느린 동오룡이 회의장에 들어섰다.
천천히 자신의 빈자리로 가서 앉자 그제 서야 나머지 사람들이 착석했다. 모든 시선이 궁금증을 듬뿍 담고 동오룡을 쳐다보았다. 동오룡 역시 자신을 바라보는 오십 여명의 간부들을 주시했는데 표정에서 어떤 낌새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
“…….”
침묵이 길어지고 회의장내 공기는 달아올랐다.
문득 꽉 물린 동오룡의 입술이 열렸다.
“모두 궁금할 것이다. 사전 예고도 없이 천상회의를 소집한 본각주의 의중이 말이다.”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조용한 실내에 동오룡의 목소리가 칼날처럼 뻗어나갔다.
“알다시피 지난달 에 소씨상가의 거래선 절반이 우리쪽으로 넘어오면서 이제 절강성은 물론 복건성과 광동 안휘까지 우릴 대적할 상가는 없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들이 열심히 뛰어준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어제 소가지가 날 찾아와 나머지거래선 마저 모두 인수 받아 달라고 했다.”
“그…그게 사실이옵니까?”
“하면 소씨상가는 완전히 궤멸되는 것이옵니까?”
궤멸이라는 표현을 쓴 간부를 향해 동오룡이 차갑게 말했다.
“궤멸이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소가지가 능력이 부족하여 내게 경영을 의뢰 한 것이다. 물론 그의 식솔 일부도 내가 거두기로 약조 했느니라.”
오십 쌍의 눈빛이 일제히 동오룡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동오룡이 마른침을 삼키며 계속 말을 이었다.
“오늘 천상회의의 안건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상당히 피곤하다는 말을 하려고 소집했느니라. 다시 말 해 일선에서 물러나 휴식을 취하고자 한다.”
“휴…휴식이라뇨?”
“그…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사람들이 놀라며 물었다.
동오룡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 그대로다. 나도 늙었는지 이제 지쳤다. 그래서 조금 쉬고 싶을 뿐이다.”
“가…각주님.”
“아직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여기서 물러나시면 아니 되옵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강력히 반대를 했다.
“천하의 상권을 완벽히 틀어쥐기 전까지는 절대 현역에서 물러나지 않겠다고 하시지 않았사옵니까?”
“지금이야 말로 각주님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인데 물러나신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 합니다.”
동오룡의 일선퇴진을 가로막는 요청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스윽!
동오룡이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시끄럽던 실내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앞으로 날 대신해 천상각은 이들이 이끌어 갈 것이다.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고 세 명의 사내와 한 명의 여인이 들어섰다.
그들은 모두 동오룡의 자녀들로 동천비를 비롯한 동생들이었다.
동오룡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쇠(鐵)와 유기(鍮器) 도기(陶器)는 앞으로 천혁이 맡을 것이다.”
동오룡의 말이 끝나자 동천비 곁에 서 있던 백의사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약간 마름 체격에 코가 우뚝 하고 광대뼈가 불거져 약간 차가운 인상을 풍겼다. 동천룡의 둘째 아들 동천혁이다. 특히 이마가 좁아 약간 음침한 느낌까지 풍겼다.
“면(棉)과 약재는 천완이 맡을 것이다.”
세 번째 백의 사내가 한걸음 나섰다. 창백한 안색에 약간은 유약해 보였다. 올해 스물일곱으로 동오룡의 셋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유난히 잦았고 상술보다는 학문에 뜻이 깊다고 전해진다.
“향(香)과 피혜(皮鞋)는 천화가 이끌 것이다.”
맨 끝에 선 백의여인이 앞으로 나서 사람들을 향해 절을 했다.
오남매 중 유일한 여식인 동천화이다. 여자지만 사내의 배포를 넘어선다고 알려지며 어려서부터 사람 관리에 매우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위에 적지 않은 가신들이 들끓는다.
“잘 부탁드려요.”
그녀가 살짝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비단과 모피는 천비가 잘 끌어갈 것이다.”
와아아!
조용하던 실내에 함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동천비를 따르는 간부들이었고 비단과 모피는 천상각이 취급하는 업종중 규모가 제일 컸다. 즉 동천비야 말로 천상각의 중심임이 드러난 것이었다.
스윽!
조용히 하라는 듯 동오룡이 손을 쳐들자 장내는 다시 침묵으로 빠져 들었다. 모든 시선이 다시 동오룡에게 멎었고 그의 두툼한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마지막으로 객점(客店)은 천몽이에게 줄 생각이다.”
순간 네 명의 자녀들 고개가 일제히 동오룡을 향해 돌아갔다. 모두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천몽이라면.”
“오래전 사라진 막내 공자님 아니옵니까?”
사람들도 의외인 듯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만 회의를 마치겠노라.”
동오룡이 자리에서 일어나 뒷문을 통해 걸어 나갔고 그 뒤를 오만상이 따랐다.
탁!
문이 닫히고 동오룡이 사라지자마자 장내는 시끄러워졌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말도 안됩니다. 공자님께 고작 유기와 도기라뇨?”
“축하드립니다. 아가씨.”
“예상된 결정 아니옵니까?”
각자 자신들이 따랐던 동오룡의 자식들 주위로 몰려들며 기뻐하거나 불만을 터뜨렸다.
특히 삼공자 동천완 주위로 몰려든 간부들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공자님 이럴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공자님께 면과 약재를 주실수 있단 말입니까?”
면과 약재는 천상각이 취급하는 업종 중 가장 소규모이다. 규모가 작다보니 가내에서의 발언권 또한 보잘것없었다.
“당장 각주님을 찾아가 따져야 합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막내공자에게는 객점을 주셨는데 어떻게 삼공자님에게는 이런 대우를 한단 말입니까?”
천상각이 소유하고 있는 중원의 객점은 오두 스무 곳이다. 하지만 스무곳이라고 해서 우습게 보다가는 큰 코 다친다. 중원의 객점 중 가장 화려하고 고급스럽다.
천상각이 경영하는 객점을 이용하는 손님들 대부분이 강호의 귀빈들이었고 어지간한 경제력 가지고는 한 끼 식사도 꿈꿀 수 없다. 하룻밤 숙박료만 해도 금화 닷냥이 넘을 만큼 비싸지만 예약을 하지 않으면 투숙할 수 없는 최고급 객점들인 것이다.
“공자님.”
자신을 따르는 간부들의 추궁에 동천완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아버님의 결정이오. 더 이상 왈가 왈부 하지 맙시다.”
동천완이 흥분한 측근들을 다독이며 말했다.
“뭘 그렇게들 화를 내시오. 난 이것도 감사하거늘.”
어려서부터 병약했고 내성적이며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책으로 소일하는 자신을 부친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대륙을 종횡하며 치열하게 이윤을 추구해야 하는 상인의 아들로서는 철저히 부적합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도 부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천성이 그래서인지 잘 되지 않았고 언제부터 자신과 장사는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운명은 결코 그를 가만두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장사를 배우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항상 형제들중 가장 저조한 결과를 낳아 부친의 눈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그래서인가 예상대로 가장 보잘것없는 업종이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전혀 불만은 없었다. 자신에게 그나마도 넘겨주었다는 것은 자신을 자식으로 여긴다는 의미였으므로 오히려 부친이 고마울 뿐이었는데 측근들은 영 못마땅한 얼굴들이다.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냉수를 들이켰다. 연거푸 두 잔을 가득 비운 뒤 소매로 입가에 묻은 물을 닦고 돌아선 동천비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동천비의 얼굴이 굳어져 있는 반면에 따라 들어온 측근들의 표정은 환해져 있었다. 비단과 모피는 천상각의 매출에서 삼분지 일을 차지할 만큼 가장 규모가 큰 업종이다. 그런 두 개를 맡았으니 보나마나 미래의 천상각 주인은 동천비라는 것이 뻔했으므로 흥분 된 것이다.
“이제 대내외적으로 대공자님을 천상각의 정식 후계자로 선포하는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꼭 그렇게 즐거워 할 일만은 아니오?”
동천비가 입을 열었다.
“분명히 비단과 모피는 본가의 주력이오. 하지만 또 하나의 주력이 있소?”
“그게 무엇입니까?”
“객점이오. 물론 객점이라고 해봤자 중원에 고작 스무 곳 밖에는 되지 않소. 하지만 문제는 본각이 경영하는 객점을 찾는 손님들의 면면이오. 소위 명사라는 사람들은 본각의 경영하는 객점에서 유숙하고 한끼 식사를 하는 것을 자존과 명예로 생각하오.”
“그렇긴 하지만 어떻게 그것이 주력이 될 수 있는지요?”
“매출 규모로 봐서는 비교가 될 수 없지만, 조금 전에도 말했듯 객점을 출입하는 사람들의 면면이오. 객점을 맡게 되면 당연히 그들과 친분을 쌓을 수 밖에 없소. 그들은 황실의 고관대작에서부터 무림의 명사들까지 망라되어 있소. 장사는 인관관계가 승패를 좌우하오. 아니 장사뿐만이 아니리 인간의 삶 자체가 사람과 사람사이의 교류 아니겠소.”
순간 측근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동천비의 말뜻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객점을 잡아야 하오.”
“하지만 이미 막내 공자님께 주신다는 말씀이 계셨는데.”
동천비의 두 눈이 예리하게 빛을 뿌렸다.
“죽은 아이에게도 넘겨 줄 수 있겠소?”
흠칫!
사람들이 일제히 놀랐고 동천비의 얼굴에 살기가 내려 앉았다.
동천몽이 말하는 뜻을 모두가 깨달은 것이었다. 그것은 곧 동천몽이 살아 있으면 죽여야 한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