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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그 수미선문(煩隔禪門)의 비석을 찾아내다 >
"그냥 저리 주셔도 되는 것입니까?"
총단주 일행이 떠나자 가만히 지켜보던 유정정이 물었다.
"어차피 복사를 해서 전해 준 것 뿐이오. 그리고 나는 다시 구룡승룡단을 쓰지 못할 것이니 굳이 쓸모가 없지 않겠소."
"하지만……. 귀한 것을 그리 쉽게 내어 주시니 어쩐지 속이 상하여서……"
"하하하. 그럴 것이 무엇이 있겠소. 이제 언젠가 제리배천단에서 구룡승룡단과 조화진법을 새로 만들어 내지 않겠소?"
"그렇겠지요."
"그럼 후일에 그 과실을 정정 당신이 따 먹는 것은 어떻겠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어요?"
"이미 말한 바가 있지만 나는 구룡승룡단의 연단로는 물론이고 그 영단들을 연성해 낼 자신이 없소. 아울러 흑와류계를 만들어 낼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진법도."
"그래서 그냥 제리배천단에게 기록을 내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구룡승룡단과 조화진법을 만들게 하신다는 것이어요?"
유정정이 새삼 놀랍다는 표정으로 건우를 보았다.
그런 심계가 있었을 줄은 몰랐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렇소. 이미 나는 연이 다하였지만 혹여 정정 당신에게 그 인연이 닿는다면 얼마나 좋겠소?"
"그야 그렇지만……"
"하하하. 여기 이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이미 당신에게 구룡승룡단의 연이 닿았다 할 수 있지 않겠소? 적어도 다른 이들에 비하면 몇 발은 앞선 것이겠지."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며 소매에서 옥간 하나를 꺼내 유정정에게 내밀었다.
"이것이......"
"조화선인이 남겼다는 그 기록이오. 방금 그들에게 내어준 것과 한 치의 다름도 없는 것이지."
"그렇군요. 호호호. 그럼 상공 말씀대로 제가 다른 누구보다 다음 구룡승룡단과는 가장 가까이 있다 할 수 있겠네요?"
유정정도 이제 건우의 뜻을 완전히 이해한 듯 활짝 웃음을 머금었다.
"그럴 것이오. 하지만 천지 법칙이 당신에게 그것을 허락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소."
"그렇겠지요. 그리고 또한 저는 상공과 함께 할 것이고, 제가 있는 곳은 대천 세계와는 무관한 곳이니 구룡승룡단의 기연이 완성되었을 때, 제가 그것을 취할 가능성이 아주 없을 수도 있겠어요."
말은 그렇게 하여도 유정정은 별로 아쉬운 표정이 아니었다.
어차피 구룡승룡단이나 조화진법이 자신과 인연이 없을 것이라 여기는 듯 했다.
"아무러면 어떻소. 굳이 욕심내지 않아도 내가 삼라만상에서 배우고 익히는 것을 당신 역시 그대로 얻을 것인데. 정정 당신이 굳이 새로운 삼라만상을 욕심낼 이유가 있겠소?"
"호호호. 그건 그러네요."
건우의 말에 유정정은 활짝 웃었다.
물론 유정정이 건우를 앞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전혀 거리끼지 않았다.
그녀와 건우의 사이에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 그럼 우리도 이만 가 봅시다."
"네 그리 하여요. 오랜만에 고향을 보는 것이라 기대가 되어요."
건우의 말에 유정정이 한층 더 밝은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말처럼 건우와 유정정은 몽유희의 은신처를 나서며 수미 세계를 찾아가기로 의논한 상태였다.
물론 수미를 찾는 이유는 새로운 세상으로 변모하는 건우의 의념 공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 씨앗을 얻기 위해서였다.
수미 세계 정도면 괜찮은 씨앗이 되리라 생각하는 건우였다.
얼마나 많이 넣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고.
* * *
"드디어 수미 세계여요."
유정정이 거용의 머리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며 탄성을 터트리듯 말했다.
환상대시의 문을 통해서 수미 세계와 가까운 곳으로 공간을 열었다.
환상대시의 문이 선계의 곳곳으로 공간 연결을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몽유희가 정해 놓은 여러 곳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이라 수미로 곧장 공간을 연결할 수는 없었다.
이전에 환상대시에서 수미로 올 때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이번에도 과거 건우가 유정정을 찾아 수미로 올 때에 거쳤던 경로를 따라서 수미로 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둘에게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건우가 유정정에게 그 때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며 좋아라 하는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드디어 수미 세계의 가장 바깥쪽 철위산에 닿았다.
지금 건우와 유정정이 굽어보는 아래쪽에 수미 세계의 가장 외곽으로 함해를 둘러싸고 있는 철위산이 보이고 있었다.
"어찌하실 거여요?"
유정정이 건우를 보며 물었다.
"당장 저 철위산의 일부를 떼어서 의념 공간에 넣는 것은 그리 좋은 수가 아닐 것 같소."
건우는 곧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어째서요?"
"그렇게 여기저기를 조금씩 잘라 넣을 것이면 굳이 수미여야 할 이유가 뭐겠소."
"수미 세계 전체를 아울러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러면 어찌하시게요?"
"안쪽의 수미산에서부터 이곳 철위산까지를 한 번 잘라내 봅시다. 아무래도 전체를 삼키긴 어려울 듯 하니."
"부채꼴 처럼 자르자는 말씀이어요?"
"그렇소. 그리하면 대충 수미 세계를 품었다 할 수 있지 않겠소?"
"그래도 그냥 수미 세계 전체를 어찌할 수는 없을까요?"
건우의 말에 유정정이 욕심을 부렸다.
하지 만 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생각해 볼 수는 있겠지만 천지 법칙이 그것을 허락할까 모르겠소."
"그런가요?"
"일단 삼라만상을 통하여 천지법칙의 근원과 타협을 해 볼 생각이오."
"네? 타협이요?"
유정정은 건우의 말이 뜻밖이라 눈을 똥그랗게 떴다.
무슨 수로 천지 법칙과 대화를 한단 말인가. 천지 법칙은 거대한 흐름일 따름인데.
"꼭 말로 대화를 하는 것만이 소통은 아니지 않겠소? 정정 당신 역시 때로 천지 법칙의 뜻을 읽고 그것에 순응하거나 혹은 거역하거나 하지 않소?"
"그야 그렇지요."
"바로 그런 것을 말함이오. 대신 나는 삼라만상을 통하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천지 법칙의 흐름과 소통할 수 있소."
"그건 또 어찌 아셨어요?"
"그저 자연스럽게. 그렇소, 의념공간에 있는 삼라만상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해야겠소."
"그거 위험하지 않을까요? 삼라만상이 점점 성장한다는 것이 아니어요?"
유정정이 깜짝 놀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삼라만상의 기운이 강해지는 것은 분명하오. 하지만 아직 삼라만상이 내 의식 자체에 영향을 주는 것은 일절 없으니 걱정할 단계는 아니오."
"큰 보물이기는 하여도, 마음대로 떼어낼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이라. 마냥 두고 볼 수밖에 없으니 답답하여요."
"하하하. 그래도 의념 공간 안에서는 내가 어느 정도는 통제할 수 있으니 다행이지 않소."
"그야 아직 삼라만상이 작은 탓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점점 힘을 키우는 것 같으니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어요?"
"후일은 장담하지 못하나, 지금은 걱정할 것 없소. 그러니 안심하시오. 하하하."
건우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고, 그 때문인지 유정정은 조금 안도하는 듯 했다.
"그럼 어찌하시게요? 지금부터 수미산까지 곧장 가실 것입니까?"
"천천히 가십시다. 예전 우리가 거닐었던 곳들을 모두 돌아보며."
"흥, 그러다보면 멸계의 그 길매(吉味)란 아이도 생각이 나시겠군요?"
"길매? 하하하."
건우는 갑작스러운 유정정의 말에 그만 크게 웃고 말았다.
"어찌 웃으셔요?"
"수사의 기억도 항상 들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소. 길매란 그 이름은 참으로 오랜만에 떠올리는구려. 하하하."
"제가 상공께서 가라앉혀 신경도 쓰지 않던 이름을 뜻하지 않게 끌어내었다는 말씀이군요?"
"실상 그렇기는 하오."
"흥, 그래도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라 반가우시지요?"
"과거 멸계로 갔던 분혼의 기억이 있으니 어찌 담담하겠소만, 그런 이유로 내가 정정 당신에게 미안하거나 하지는 않소."
"어쩐 말씀이어요? 이해가 아니 되어요."
"수사가 아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잊었을 이름이오. 사실이 그러한데 내가 정정 당신에게 미안할 이유가 무에 있겠소?"
"흥, 그리 말씀을 하시니 저도 그 이야긴 그만하도록 하지요. 호호."
그래도 건우의 대답이 아주 싫지는 않았던지 유정정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그려진다.
그런 유정정을 보며 건우는 곧바로 거룡을 움직였다.
그 후, 건우와 유정정은 수미 세계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옛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아무리 느리게 흐르는 강물도 언젠가는 바다에 닿는 법.
결국 시간이 흘러 건우와 유정정은 수미산의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으음."
그곳에서 한동안 무엇인가 골몰하던 건우는 깊은 신음을 내었다.
"어찌 그러셔요?"
유정정이 예상치 못한 건우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에 건우가 허공을 향하여 소매를 흔들었다.
우우우우우우웅!
그러자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비석.
"어머나 저것이 무엇이어요?"
수미선문(煩備禪門)이라 적힌 거대한 비석의 등장에 유정정이 깜짝 놀랐다.
"어찌 저런 것이 숨어 있었지요? 저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였어요."
유정정이 새삼 건우의 능력이 뛰어남을 알았다는 듯이 경이의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내가 저계 수사였을 때에 이곳 수미 세계가 들어 있는 겨자씨를 가지고 있었소."
건우가 문득 과거의 이야기를 꺼냈다.
"네, 그렇다 하셨지요."
"그러던 중에 가끔씩 겨자씨 안의 수미 세계에 올 일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문득 이 비석을 한 번씩 보고 지나갔었소."
"네."
"그런데 내가 겨자씨의 봉인을 풀어 수미세계를 밖으로 꺼냈을 때에도 나는 이 비석을 찾지 못하였었소."
"수미 선문의 비석이 있어 저도 보기는 했지만 그것이 이와 같은 것은 아니었지요."
유정정 역시 수미 선문과 인연이 있었기에 그들의 현판이라 할 수 있는 비석을 여러 번 보았었다.
생긴 것은 분명 지금 눈앞에 있는 것과 비슷했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현묘한 이치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옳소. 그래서 나는 이 비석이 실존하는 것이 아니었을 거라 생각했었소. 단지 겨자씨에 들어 있는 수미 세계처럼 어떤 술법에 의한 것이라 생각하고 말았던 것이고. 그런데 오늘 이곳에 오니 뜻밖에도 비석이 이리 숨겨져 있었소."
건우는 감회가 새로운 눈빛으로 연이어 비석을 쓸어보았다.
"굉장한 비석이네요. 현묘한 이치가 가득 담겨 있어, 저는 그 진체를 모두 파악할 수가 없어요."
유정정도 비석을 보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옳소. 이제 보니 저 비석은 삼라만상의 다른 모습이오."
그런 유정정에게 건우가 놀라운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자 유정정의 눈동자가 더욱 커지며 건우를 보았다.
"삼라만상? 저 비석이 말이어요?"
"정확히 삼라만상은 아니고, 그 이전의 단계, 미완성, 시험품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소."
건우는 자신이 비석을 보며 알아낸 것을 유정정에게 그대로 전했다.
"확실히 그렇게 볼 수도 있겠어요. 비석에 엄청난 숫자의 법칙이 담겨 있는데 그것들이 어떻게든 조화를 이루어서 비석을 이루고 있어요."
덕분에 유정정도 어느 정도 비석의 모습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맞소. 다만 아쉬운 것은 비석에 담긴 법칙의 힘들이 기초적인 것들이라는 것이오. 옥선은 고사하고 금선에도 미치기 어려운 수준의 법칙의 힘을 엮어 비석을 만들었소.
"네, 그러네요. 하지만 저는 저 수많은 법칙의 조화를 아직 파악하지 못하겠어요. 송구해요."
"하하. 천천히 하시오. 나도 고작 겉핥기에 불과할 뿐이오."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허공에 몸을 띄우고 비석 앞쪽에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그러자 유정정 역시 건우의 옆으로 다가와 포단을 꺼내 올라앉았다.
"정정, 당신은 저 비석을 살펴보시오. 나는 이제부터 천지 법칙과 소통하며 이후 내가 해야 할 바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 같소."
건우는 염에 앉은 유정정에게 그렇게 수련의 시간을 주고 자신은 의념 공간의 삼라만상과 의식을 연결하여 대천 세계의 천지 법칙을 엿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다시 시간이 흘렀다.
< 그때 그 수미선문(煩備禪門)의 비석을 찾아내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