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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칙(法則) 삼라만상(森羅萬象) >
"이제 연화주의 봉인을 풀어낼까 하오."
"때가 된 것이군요?"
"그렇소. 그런데……"
"연화궁을 어디에 놓았으면 좋을지 걱정이십니까?"
"정정 당신은 어찌했으면 좋겠소?"
"그야 공간 법칙을 깊이 익히신 상공께서 무슨 수를 내어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호호호."
"흐음. 그리 말을 하니 내 어깨가 더욱 무거워 지는 듯 하오."
"이리 오세요. 제가 주물러 드릴 터이니."
"커엄. 그럼 어디 한 번 해 보시오. 그 성의에 따라서 더 나은 방법이 나올지 어떻게 알겠소?"
"그럼 대충 주무르면 제대로 해 주시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어요?"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소. 아니오. 아니오."
건우와 정정은 여전히 연화주 안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건우는 결국 연화주에 걸린 시간 법칙을 풀어내고, 이어서 봉인까지 해결할 방법을 찾아냈다.
그런데 문제는 연화주의 봉인을 풀어 버리면, 연화주 안에 있는 연화궁이 원래 크기로 돌아가니, 그만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정, 그럼 내 의념 공간에 머무는 것은 어떠하겠소?"
건우가 곰곰 생각하다가 뭔가 결심한 듯이 유정정에게 물었다.
"어머나, 저에게 상공의 의념공간에 갇혀 살라는 말씀이어요?"
"갇혀 살다니, 그곳에 본신이 있더라도 밖으로 분신을 내는 것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 아니오. 그러니 이참에 아예 연화궁을 안전한 곳에 놓자는 것이지."
"흐응, 생각해보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기는 한데……"
"정정 당신이 너무도 오래 연화궁과 엮여 있느라 거의 영족과 비슷하게 되어 버리지 않았소."
"무슨, 그건 아니어요. 연화본궁의 정원 연못에 있는 연꽃이 제 본신이 된 것일 뿐."
"그게 그거 아니오. 하긴, 오래전에 수미 세계에서 스스로를 연화경에 봉인할 때의 연꽃이 바로 지금 당신의 본신이 된 그 연꽃이 아니오?"
"호호, 맞아요. 어찌하다 보니 결국 제가 그 연꽃과 하나가 되어 영족인 듯, 목령족인 듯, 그렇게 되었지요."
"아무튼, 어찌 생각하시오. 본신을 내 의념 공간에 두는 것은. 그리하면 우리 두 사람,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지 않겠소?"
"흐응. 우리 상공께서 저를 완전히 독차지하고 싶으신 모양이네요. 호호호. 좋아요. 낭군께서 그리 말씀하시는데 어찌 싫다 하겠어요? 그리하여요. 상공의 의념 공간에서 연화주를 푸는 것으로."
유정정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건우의 생각에 동의해 주었다.
"하하. 고맙소."
"그럼, 결심이 섰으니 당장 그리해요. 괜히 시간을 보낼 것이 뭐가 있겠어요?"
유정정은 곧바로 연화주의 봉인을 풀자고 말했다.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난 상태였기에 건우도 유정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내 당장 연화주를 의념 공간에 넣고 봉인을 풀어내리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빨리…….오시어요."
건우의 말에 유정정이 건우의 소매를 슬며시 잡으며 부끄러운 표정으로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밖으로 나갈 일이 뭐가 있겠소? 의념체를 굳이 본신으로 불러 넣지 않아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소."
그러자 도리어 건우는 그런 유정정의 손을 꼭 잡아주며 그렇게 달랬다.
"으음."
그 시간, 무망애 절벽 은신처 깊은 곳에 가부좌를 하고 있던 건우가 눈을 떴다.
그리고 곧바로 손에 쥐고 있던 연화주를 의념 공간으로 옮겼다.
- 와, 정정의 본신인 연화궁 연꽃을 의념 공간에 둘 생각을 하시다니, 놀랐어요.
그러자 몽이가 건우의 얼굴 앞에 나타나 눈을 똥그랗게 뜨고 말했다.
'나 대문에 정정의 수련 경지에 제약이 생길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정정이 나보다 뛰어난 깨달음을 얻을 경우에 문제가 될 일이야.'
- 그래서 더 문제잖아요. 정정 선인의 앞을 건우 님이 막을 수도 있다는 건데요.
'하하. 설마 내가 그리 후안무치하겠느냐? 정정이 나보다 큰 깨달음을 얻고, 법칙의 경지가 뛰어나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내 의념 공간을 벗어나게 되겠지. 그것이 이치가 아니겠느냐. 나는 절대 정정의 성장을 막을 생각이 없으니까.'
- 아, 그러니까 의념 공간에서 건우 님이 정정 선인을 배려할 것이라 문제가 안 된다는 거군요?
'정정에게 유익한 일이라면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이룰 수 있게 도와야지.'
- 그 전까지는 반려를 안전한 곳에서 보호하는 것이고요?
'그런 거지. 자, 이제 연화주의 봉인을 풀어 보자꾸나.'
몽이의 말에 건우는 활짝 웃으며 의념 공간에 의식을 집중하여 연화주의 봉인을 단박에 풀어버렸다.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의념체가 연화주 안쪽에서 작업을 해 두었다.
그래서 봉인을 푸는 것은 거칠 것이 없었다.
- 어? 어어어? 건우 니임!
그런데 그 순간 몽이가 깜짝 놀라며 건우를 불렀다.
그리고 건우 역시 몽이와 같은 순간에 의념 공간에서 벌어진 이상 현상을 느끼고 놀라는 중이었다.
'뭐야?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자신의 의념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임에도 단박에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의념 공간의 주인이 현상을 파악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다니.
"이게 무슨 일이어요?"
"그러게 말이오. 나도 지금 알아보는 중이오만."
건우의 의념 공간에 모습을 드러낸 연화궁, 그 중심에 있는 연화본궁의 정원에서 건우와 정정이 놀라고 있었다.
건우는 여전히 의념체이긴 했지만 이미 본신과 의념체의 구분은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 안녕하세요오. 몽이입니다.
"호호. 그래, 상공의 상념 한 자락이라지? 귀엽구나."
- 고맙습니다아.
"호호호. 상공, 어찌 이런 모습을 만드셨어요?"
정정은 다급한 상황에서도 몽이의 등장에 즐거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그렇게 물었다.
"내가 작정하고 만든 것은 아니오. 그저 윤회 후에 허전한 마음이 만들어 낸 위로의 한 모습이 아닐까 싶소. 덕분에 당신이 없는 시간을 버틸 수 있지 않았겠소?"
"호호호. 상공께서 언젠가 말씀하셨던 다중이? 그런 류인가요?"
"으음. 그리 볼 수도 있겠소만, 그나저나 괜찮은 것이오?"
건우는 조심스럽게 유정정의 모습을 살폈다.
"네, 괜찮아요. 아니, 참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마치 새로 태어난 느낌이어요."
그런 건우를 보며 유정정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천지 법칙의 근원에서 딸려온 '그것'이 원인이었던 건 분명해요.
그 때, 몽이가 심통이 난 표정으로 한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곳은 건우의 의념 공간에서 상징적으로 '중심'의 의미를 지닌 곳이었는데, 그곳에 무언가가 있었다.
"연꽃이군요?"
유정정은 그것을 보고 연꽃이라고 말했다.
"당신이 보기엔 연꽃인 모양이지만 내가 볼 때에는 세상의 모든 것이오."
"그러면서 어떤 것도 아니라 하셨지요?"
이미 조화선인의 진법을 통해서 천지 법칙의 근원에 다녀온 이야기는 유정정도 들었다.
그리고 그 대에 천지 법칙의 근원으로 보이는 빛의 기둥에서 떨어져 나온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내가 볼 때에는 쉬지 않고 모습이 바뀌는데, 그것은 곧 대천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인 듯 하고. 그리고 동시에 나는 그것이 어떤 무엇도 아닌 듯이 모호하게 인식될 때도 있소."
"네, 그리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그것이 저에겐 이리 복을 주었습니다."
"진정 괜찮은……"
"무얼 그리 자꾸 물으셔요? 이미 상공께서도 제 상황을 아시지 않으셔요?"
건우의 말에 유정정이 곱게 휘어진 눈썹으로 건우를 보며 말했다.
그 말에 건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의념 공간 안에서 벌어진 일이다.
사실 현상의 원인과 과정은 알 수 없었지만 결과만은 파악해 냈다.
연화주에서 연화궁이 빠져나와 의념 공간에 자리를 잡을 때에, '그것'이 유정정에게 모종의 간섭을 했다.
그 시작과 과정은 알 수 없지만, 그 덕분에 유정정은 최상의 상태가 되었다.
육신은 물론이고 정신까지, 마치 금간 도자기를 원래의 상태로 되돌린 듯이 느껴질 정도였다.
유정정이 오랜 세월 연화주에서 겪었던 정신적인 고초의 흔적은 물론이고, 태어나 지금까지 쌓았던 부정한 것들이 대부분 사라졌다.
그런 변화 대문에 연화본궁의 연못에 있는 연꽃은 이전보다 훨씬 크고 아름답게 자라난 상태였다.
그것이 건우와 몽이가 놀라서 당황했던 이유였고.
"역시 상공께선 대단하셔요."
"그건 또 갑자기 무슨소리요?"
"저 연꽃, 아니 제게는 연꽃으로 보이는 저것이 얼마나 큰 복이어요. 저것이 천지 법칙의 근원에서 나왔다면, 저기에 얼마나 큰 깨우침이 담겨 있겠어요?"
"그야 나도 그리 생각하긴 했소만."
"그런데 저것을 의념공간에 품으시고도 저를 찾아 그리 시간 낭비를 하셨단 말이지요?"
"시간 낭비라니, 그 무슨! 그 무엇이 그대와 바꿀 수 있단 말이오?"
유정정의 말에 건우가 펄쩍 뛰었다.
그 모습에 유정정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감사하고 고마운 말씀이지만, 그래도 수도자로선 어울리지 않는 말씀이기도 하지요."
"그래도 상관없소. 내겐 무엇보다 당신이 가장 귀하니."
"호호호호. 그런 귀한 저는 이제 상공의 의념 공간에 이리 꼭꼭 묶였으니 더는 염려하실 필요가 없지요."
"하하. 그건 그렇소. 그래서 내가 이리 행복한 것이 아니겠소."
"저도 마찬가지긴 하지요. 그래도……"
"저것을 깊이 연구해 봤으면 하는 것이 아니오? 어쩌면 천지 법칙에 대해 더 많은 깨우침을 얻을 수 있을 터이니."
"네, 맞아요. 물론 급할 일은 없겠지만요."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 둘, 앞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하지 않겠소? 그런 중에 가끔 심심파적으로 뒤적여 볼, 꺼리가 생겼다 여기면 될 것이오."
"하긴 그렇기도 하네요. 솔직히 저는 아직까지 선계를 제대로 돌아보지도 못했어요."
"수미 세계에서 연화궁을 키우느라 애를 많이 썼다고 들었소. 그러다가 제리배천단의 함정에 빠졌으니 제대로 여행을 할 기회가 있기나 했겠소?"
"호호호. 사실 그 보다는 상공에 대한 그리움으로 제가 조금씩 불안해졌던 것이 문제였지요. 사실 제리배천단의 함정이 아니었다면 그 전에 이미 윤회에 들거나 소멸해서 상공과의 연이 끊어졌을 수도 있지 않았겠어요?"
"흥, 절대 그럴 일은 없었을 것이오. 나와 정정의 연이 얼마나 깊은데, 그것이 끊어지도록 천지 법칙이 그냥 두고 봤겠소?"
"호호호. 심심하면 천지 법칙의 뜻을 거역하고 역천을 행하신 상공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원래, 그런 것이오. 내가 하면 사랑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호호호호호."
"거, 그만 웃고 내가 의념 공간에 모아둔 것들이나 한 번 살펴보십시다. 그 영찬황후선보부터 보여주겠소."
건우는 유정정의 웃음에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데리고 영찬황후선보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뜻만 일으키면 단숨에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공간에서 연화궁을 벗어나 한참을 걸어서.
= 연이 닿았군. 드디어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어.
= 싹은 무슨, 그저 한 번 움씰한 것에 불과하지.
= 그렇더라도 무와 유의 차이는 극명하지.
= 그 놈이 그것의 가치를 알아낼 수 있을까?
= 법칙 삼라만상(森羅萬象)을 품을 수 있는 밭을 지니고 있으니, 언제고 알게 되기는 하겠지. 이미 삼라만상을 가지지 않았나.
= 아무리 작은 조각이라도 크기 따위가 무슨 의민가.
= 옳은 소리. 크거나 작거나 완성에 가까운 법칙이며 동격임은 분명하지.
= 따지자면 홀로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할 터이니 공포스러운 일이지.
= 지금껏 삼라만상을 나누어 준 것이 여러 번인데, 한 번도 실패한 적은 없지 않나.
= 실패할 수가 없지. 하지만 그것은 삼라만상의 성공일 뿐, 그것을 품은 자 중에서 온전한 이는 하나도 없지 않나. 모두가 삼라만상에 흡수되어 사라져 버렸지.
= 그리되면 그 또한 그의 운명이겠지.
= 그만, 이미 한 번이라도 손을 탔으니 다시 회수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 그저 두고 보거나 아니면 관심을 끊도록 하지.
= 그러지. 더 이상 공론에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 그리하자면 그리하는 것이지. 그래도 한동안 지켜보는 재미는 있을 것 같으니…….
= 그렇기는 하지…….
< 법칙 (法則) 삼라만상(森羅萬象)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