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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걸음을 남기고 발목을 잡히다 >
건우의 의념은 감여진인의 탁류에 휘말린 상태로 흐르고 또 흘렀다.
그것은 실제의 시간 흐름과는 다른 관념의 문제였다.
감여진인이 윤회로 떠나며 이생 수도계에서 경험한 모든 것을 벗어 놓았다.
게다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감여진인이 남기고 간 것에는 수많은 전생의 업보까지 적잖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대문에 제리배천단이 감여진인의 유진에서 윤회 법칙만 따로 뽑아내지 못한 것이다.
윤회 직전의 생에서 얻은 것은 그런대로 정리가 되었지만 그전에 거친 전생의 업보들은 좀처럼 손을 쓰기가 어려웠다.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은 감여 진인이 윤회 법칙을 익히면서 여러 차례 비정상적인 윤회를 거쳤기 때문이었다.
제리배천단도 그런 사실을 짐작했지만 대라선의 수련 경지에 있던 감여진인의 유진을 포기하지 못하고 활용하려했다. 그 결과 특별한 진법을 만들어 끝없이 생겨나는 찌꺼기를 걸러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많이도 비틀렸구나.'
건우는 감여진인의 바로 그런 윤회의 업보들 사이에 스스로를 던진 셈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감여진인이 얻은 윤회 법칙에 대한 깨달음을 조금씩 엿볼 수밖에 없었다.
'좀 더 나은 운명을 얻기 위해서 몇 번이나 윤회를 비틀었군. 그런데……?'
건우는 속으로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감여진인이 남긴 업보들을 살펴보니 그가 결국에는 원하던 것을 얻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똥을 싸질러 놓고 가버린 것이구나. 그것도 아주 좋은 곳으로.'
그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금선, 옥선, 대라선, 도조 등이 순수한 영혼으로 거듭나서 윤회하게 되는 곳은 이곳 대천 세계가 아니다.
그들은.
'한 차원 격이 높은 세상으로 갔다.'
그것이었다.
애써서 이곳에서 쌓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곳의 천지 법칙 운행에 기여한 공, 그것을 인정받아서 더 상위 세계로 간다는 거군. 바로 그런 거였어.'
건우는 감여진인의 찌꺼기들에 뒤섞여 정화 술법진으로 흘러가며 그러한 사실을 깨우칠 수 있었다.
'인계, 영계, 선계를 어렵게 올라왔더니, 이 모두를 아우르는 대천세계보다 상위의 세계가 또 있다고? 허! 기가 막힐 일이다.'
의념체인 건우가 어이가 없어 기의 흐름이 뒤틀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하지만 건우는 다시 정신을 다잡았다.
'까짓, 상위 세상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건 또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알아보면 될 일. 지금은 정정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
그렇지 않아도 점차 위기감이 느껴지는 중이었다.
수많은 전생의 업보들이 뒤섞여 있는 감여진인 유진의 찌꺼기.
그것은 매번 감여진인의 유진에서 복제되듯 만들어진다.
그리고 청동 거울을 씻어내는 순수한 기운의 흐름에 녹아내려 이렇게 정화 술법진까지 밀려오게 되는 것이다.
그럼 정화 술법진에 도달한 찌꺼기들은 어찌 될까?
당연히 정화의 힘에 의해서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며 순수한 기운만이 남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이곳 정화 술법진의 힘.
'나조차도 이 정화 술법진 안에서는 더러운 오물에 불과하다. 순수하지 못한 모든 것은 깨끗하게 정화되어야 하는 곳이 이곳이지.'
그러니 자칫하면 건우의 의념이 그대로 정화되어 순수한 기운으로 변해 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유정정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고.
'어떻게든 정화 술법진의 힘을 버텨야 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정정을 만나게 되리라.'
연화주에 들어 있는 유정정이 정화 술법진에서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검은 찌꺼기들이 하얗게 정화되는 과정에 유정정을 지나지 않을 수가 없다.
'버티면 된다. 버티면!'
의념체인 건우가 이를 악물었다.
* * *
“하아, 또 실패로군.”
청동 거울 앞에 가부좌를 하고 있던 건우가 초췌한 안색으로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매번 의념체가 상실되니 타격이 커요. 벌써 열일곱 번이에요.
“그러게 말이다. 쉽지 않구나. 휴우우.”
몽이의 말에 건우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정화 술법진을 뚫지 못하고 매번 의념체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화 술법진에서 순수한 기운만 남기고 걸러지며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것.
그나마 혼을 갈아 넣는 것이 아니라, 의념을 뭉쳐 사념체처럼 만든 것이라 버티는 것이지만, 그것도 열입곱 번이 되고 나니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래도 또 하실 거죠?
“그래야지. 약간씩이지만분명 성과는 있으니까.”
버티는 시간이 길어진다고 그게 반드시 나아지는 거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아니다. 이번에는 정말 정정의 기운을 느낀 듯 했다. 거의 닿았어!”
몽이의 말에 건우는 초췌한 안색에서도 눈빛을 형형하게 빛내며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안타까움이 함께 묻어나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알알이 박혀 있는 희열 또한 함께 했다.
급할수록 돌아가란 말이 있어요. 건우님, 진정하세요.
“걱정하지 마라. 이번에는 반드시 닿을 수 있을 터다. 그녀를 만날 수 있을……. 으음?”
몽이의 조언에 건우가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였다.
불행하게도 건우의 새로운 도전을 잠시 미뤄야 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감여진인의 거처를 향해 낯선 기운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가장 앞서 오는 것은 익숙한 유희의 기운이었고, 그 뒤를 쫓는 몇 개의 기운은 낯선 이들의 것이었다.
건우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련실 입구를 경계했다.
번쩍!
“후우, 결국 이리 되었구나. 버틴다고 버텼는데.”
먼저 유희가 둔광과 함께 건우 옆에 모습을 드러내며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건우는 그런 유희에게 고개를 돌릴 여유가 없었다.
겨우 몇 걸음 떨어진 수련실 입구에 세 명의 선인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으음."
“쯧쯔.”
세 선인이 모습을 드러낸 직후 건우와 구당문이 서로를 확인하고 각각 신음과 혀차는 소리를 냈다.
“네가 강건우란 놈이구나."
그런 중에 세 선인의 중앙에 있는 여인이 건우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비단 띠가 늘어져 있었는데, 그 띠에는 눈금이 선명했다. 건우는 그것이 비단으로 만든 띠자임을 알아보았다.
“그러는 선자께선 누구신지요?”
건우가 그 여인을 향해 물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말을 높이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선인들의 세월을 존중하여 말을 높이는 것이 껄끄러울 것도 없었다.
“나는 여염(麗融)이다. 천단의 단주이지.”
“제리배천단 천단주란 말씀이군요? 그러면 다른 한 분은 누구십니까? 리단의 단주이십니까? 아니면 배단의 단주이십니까?”
여염의 오른쪽에는 안면이 있는 구당문이 있어 따로 통성명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여염의 왼쪽에 있는 팔목(八目)의 선인은 누군지 궁금했다.
그 선인은 커다란 두 개의 눈 위에 눈썹처럼 작은 눈 세 개씩을 양쪽에 달고 있었다. 건우는 지금껏 그런 종족을 본 일이 없어 새삼 대천 세계가 넓음을 실감했다.
“나는 태고지주(太古蜘蛛)라 한다. 리단의 단주이니라.”
건우의 물음에 팔목의 선인이 대답했다.
“아, 지주(蜘蛛)라, 그렇군요. 그래서 외모가 그리 생경했습니다그려.”
건우는 태고지주란 소개를 듣고서야 그가 근본이 거미에 있는 선인임을 알아보았다.
“나는 대천세계의 모든 지주를 보호하는 자이기도 하다. 리단의 일이 아니라면 항상 지주를 돌보는 것에 몰두하는 편이지.”
“그 말은 이곳에 온 것이 리단의 일이란 뜻입니까? 제가 지주(蜘蛛)의 보호자에게 죄를 진 일은 없으니 말입니다.”
"하하하. 옳다. 제리배천단 전체의 일이니 리단의 일이라 아니할 수가 없겠지.”
“무슨 말이 그리 많은가요? 그냥 저 놈을 죽여 없애면 그만인 것을.”
건우가 태고지주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천단의 단주라는 여염이 화를 내었다.
“하하, 천단주께서는 성급하기도 하십니다. 비록 천단의 단원 몇이 죽기는 했지만 아직 저 녀석과 협상의 기회는 남아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런 여염을 말리고 나선 것은 다름 아닌 구당문이었다.
자연스럽게 건우의 시선이 구당문에게로 향했다.
“숙류계의 일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요? 설마 그리 얄팍한 수를 쓰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건우가 그를 보며 말했다.
“곤란하게 되었구나. 실로 그 사이에 어찌 이리 괄목상대를 하였을꼬?”
그런 건우를 보며 구당문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얼굴을 마주하니 그 일이 부끄럽기는 한 모양입니다. 그리 말을 돌리는 것을 보면.”
“하하하. 조혼후, 그 놈이 눈치가 없었지. 상황을 살피고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면 다른 수를 쓰라고 했건만.”
이 번에도 구당문은 혼잣말을 하며 건우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건우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 때, 구당문이 건우와 두 눈을 맞추었다.
“네게 기회를 주마.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없던 것으로 해 줄 터이니, 이후로 제리배천단의 일에 성심을 다하거라. 그리하면 네게 무궁한 영화가 있을 것이다.”
“무궁한 영화! 하하하. 등선자에게 도대체 어떤 것이 무궁한 영화가 될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도대체 제리배천단이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죽음이 나 소멸을 면하게 해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무궁한 영화를 준다니.
건우는 지금 자신에게 무엇이 무궁한 영화가 될 수 있을지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진심으로 구당문이 이야기하는 무궁한 영화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네 곁에 있는 몽유희의 분체를 본다면 네가 이미 많은 것을 알았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건우를 보며 구당문이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건우는 그의 뒷말을 기다리며 가만히 그를 노려봤다.
“사실 제리배천단의 단원들도 때가 되면 그 공을 인정받아 대천세계를 떠나 더 높은 곳으로 윤회하게 된다. 그래, 그것이 제리배천단에 속한 이들이 얻고 싶은 궁극적인 보상이니라.”
“그런데 어찌 그걸 아는 단원이 거의 없다는 말입니까? 내가 만난 단원들 중에 그러한 목표를 이야기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만?”
“그야 당연하겠지. 그런 비밀을 어찌 금제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금제 때문에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까?”
“금제로 인하여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단지 때가 되면 그 금제가 풀리며 드디어 보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다만 금제를 받을 때에 강력한 세뇌를 함께 받게 되어 제리배천단의 일에 충심을 다하게 되기는 하지.”
“그래서 몇몇은 마치 광신도처럼 이상하게 날뛰기도 했던 것이군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지. 그만한 흠 정도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비밀을 굳게 지킬 수 있었겠느냐.”
“하하하하. 그러니까 나에게 제리배천단에 들어서 대천세계 천지 법칙의 운행을 도우란 말씀이지요? 그렇게 하면 언젠가 대천세계보다 상위 세계로 윤회를 시켜준다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렇다. 그러니 괜한 저항을 하지 말고 이만 투항을 하는 것이 어떠냐?”
“그렇다면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건우가 문득 정색을 하며 구당문을 향해 말했다.
“무엇을 묻고 싶은 것이냐?”
“제 반려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음?”
“제 반려와 함께 아름답게 살 수 있다면 제리배천단의 일을 돕는 것이야 못할 일도 아니지요. 그러니 묻겠습니다. 저 감여진인의 정화 술법진을 파하고 제 반려를 돌려주실 수 있습니까?”
“흥, 결국 그럴 줄 알았다. 제단주, 이제 더는 나서지 마십시오. 저 놈에게 더 이상의 기회는 줄 수 없습니다. 리단주 또한 제 판단에 동의하시겠지요?”
건우의 말이 끝나는 순간, 천단주 여염이 손에 들고 있던 비단 자(尺)를 건우에게 겨누며 말했다.
하늘하늘했던 비단 띠가 날카롭게 건우를 향해 뻗고 있었다.
“아쉬운 일이지만 천단주의 양보를 계속 요구할 수는 없겠지. 인정합니다.”
그 때, 대고지주라 했던 팔목(八目)의 선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대답하더니 팔짱을 끼고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흐음. 저 놈의 선택이 저러하니 나 역시 천단주를 말릴 명분이 없어졌습니다. 물러나지요.”
뒤를 이어 구당문 역시 고개를 흔들며 세 걸음 물러 났다.
“긴장해야 할 것이다. 이제 천단주 여염이 우리를 죽이려 들 테니까.”
그러자 건우 옆에 있던 유희가 긴장한 음성으로 건우에게 경고를 해 주었다.
건우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북현무룡갑팔혈개영찬황후선보(北玄武龍甲八穴蓋靈探皇店仙寶)에 여섯 영물을 깃들게 한 후 곧바로 현실에 구현시켰다.
“호호호. 대단한 보물을 가지고 있구나. 하지만 그것으로 감히 나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건우가 영찬황후선보를 현현시키는 모습에 여염 또한 긴장한 표정이 살짝 드러 났지만 크게 염려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어디 한번 재어 보자꾸나.”
그리고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비단 자를 건우에게 날리며 법칙의 힘을 쏟아냈다.
“으음?”
이에 건우는 낯선 법칙의 힘을 느끼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 한 걸음을 남기고 발목을 잡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