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485화 (485/499)

(485)

< 정정, 내가 지금 가오 >

“호호호. 선인의 형(形)이 어디 따로 있다더냐? 감여진인이 본래 거울(鏡)에서 태어난 영족(靈族)이었지 않았겠느냐. 그러니 저런 모양이 되었겠지.”

“으음. 거울의 영족이라, 그런 것이라면 이해가 되기는 합니다만.”

“호호. 그렇더라도 보통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기 마련인데, 저리 거울의 형상을 하고 있으니 이상하다는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더 놀란 듯합니다.”

건우는 자신이 너무 편협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깨닫고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사실 그런 것은 그다지 문제가 아니었다.

감여진인이 선보의 모습인 것이 무슨 상관일까.

건우에게 중요한 것은 연화주였다.

건우의 의념은 감여진인의 수련동부에 도착한 이래로 줄곧 연화주를 찾기 위해 강렬하게 일렁이는 중이었다.

"으으음"

건우가 낮으면서 깊은 신음을 토해냈다.

“무슨일이더냐?”

그러자 유희가 의아한 기색으로 건우를 보며 물었다.

“연화주! 연화주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건우는 침중한 안색으로 유희를 보며 말했다.

분명, 감여진인의 폭주를 진정시키는 용도로 연화주를 사용했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감여진인의 거처를 이 잡듯이 뒤져도 연화주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유가 있겠지. 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유희가 담담한 어조로 건우에게 물었다.

“휴우, 감여진인을 감싸고 있는 진법 전체를 들어 엎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연화주는 필경 진법들이 만들어낸 공간의 틈 어딘가에 있겠지요.”

“나도 그리 생각한다. 그러니 확인을 해 보기 전까지는 실망할 일이 아니지.”

“옳으신 말씀입 니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릴 듯합니다.”

“호호. 그래. 그것이 문제긴 하구나.”

건우의 말에 유희가 짧게 웃으며 뒤돌아 지나온 통로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가 보는 것은 고작 감여진인의 동부 전실이나 입구 따위가 아닐 것이다.

건우가 시간을 걱정하는 이유, 유희가 등을 돌려 뒤를 보는 이유는 제리배천단 때문이었다.

분명 그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을 터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최대한 서둘러 보는 수밖에요.”

건우는 애써 불안한 마음을 다독이려 애썼다.

“호호. 그럼 나도 조금 도움을 주도록 하마. 너는 네 일을 하거나, 나는 뒤쫓아 올 제리배천단을 어떻게든 막아 볼 터이니.”

그런데 그런 건우에게 유희가 뜻밖의 말을 했다.

그녀가 직접 나서서 제리배천단의 접근을 막겠다니.

“이번이 내 마지막 유희가 아니겠느냐. 그런 즉,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보고 싶구나. 그리하여 네가 제 반려를 만나는 것을 직접 확인하고 싶으니.”

“감사합니다. 유희 선인.”

유희의 말에 건우는 진심을 다해 고개를 숙였다.

그것 이외에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되었다. 어서 시작을 하자꾸나. 나는 겹쳐 있는 산맥의 바깥에서부터 결계를 만들어 올 것이니, 너는 이곳에서 감여진인에 얽힌 진법을풀어 보아라.”

“알겠습니다. 유희 선인. 수고를 좀 해 주십시오. 최대한 서둘러 보겠습니다.”

“호호호. 마지막이라하지 않았느냐. 내가할 것은 모두 할 터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건우의 말에 유희는 그렇게 약속을 하고는 훌쩍 몸을 날려 감여진인의 동부를 떠났다.

이후. 건우는 감여진인의 유진인 청동거울 앞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연화주를 찾기 시작했다.

'저 청동거울은 윤회 법칙의 힘을 뿜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 법칙의 힘은 천지 법칙의 흐름에 섞여드는 중이고.'

그렇게 단순하진 않죠. 보이진 않지만 청동거울과 연결된 진법이 어마어마해요.

'그래, 그 진법 중에 일부는 천지 법칙과 감여진인의 윤회 법칙을 이어주는 것이고, 다른 것들은 감여진인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지.'

괜히 천지 법칙과 연결된 진법을 건드리면 좋지 않은꼴을 보겠죠?

'그래, 그래서 일이 쉽지 않은 것이고.'

그래도 어쩌겠어요? 최선을 다해 봐야지요. 일단 진법을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하죠.

'으음. 그래야지.'

건우는 이후로 모든 의념의 힘을 동원하여 청동 거울과 연결된 진법과 술법, 금제 따위를 파악해내기 시작했다.

그건 아니에요. 공격이나 방어에 관한 진법에 연화주를 쓸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 진법, 그 안에 또 다른 진법이 들어 있어요. 그것도 파 봐야 해요.

청동 거울, 감여진인의 유진에서 부정적인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을 잡아냈어요. 그걸 따라가면 정화 법칙의 힘을 가진 뭔가 있을 거예요.

아, 이건 아니네요. 다른 경로를 찾아봐요.

감여진인의 문제를 조금 더 파고 들어가는 것이 좋겠어요. 그걸 따라가며 해결책들을 살피는 것이…….

여기! 여기에요. 이곳으로 엄청난 부정적인 기운과 사념, 오염들이 몰리고 있어요. 이것들을 모두 해결하려면 매우 강력한 정화 법칙이 필요할 거예요.

찾았어요. 드디어 감여진인의 상태이상을 제어하는 술법진을 찾았어요. 여기에요. 여기!

"으으음."

건우는 여전히 가부좌를 하고 의념을 집중하여 감여진인을 살피는 중이었다.

그는 너무도 집중한 까닭에 외부의 시간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중에 드디어 연화주를 재료로 사용한 술법진을 발견하게 되었다.

'저것, 저것이 분명 연화주겠지? 다미의 기억에 있는 것이 분명 저것이었어!'

건우는 의념체의 모습으로 흑백으로 나누어져 있는 거대한 술법 공간에 서 있었다.

지금 건우의 눈에 보이는 흑백의 모습은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술법진에 의해서 벌어지는 현상이 건우의 의념에서 구현된 모습이었다.

검은 것은 감여진인이 쏟아내는 찌꺼기들이고 하얀 것은 그 찌꺼기가 정화된 깨끗한 기운이었다.

그 깨끗한 기운은 다시 청동거울로 흘러가서 그것을 씻어 내는 역할을 할 것이다.

당연히 천동거울을 씻어낸 맑은 기운은 더럽혀질 수밖에 없고, 그 기운이 이곳으로 와서 정화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으아아아아! 감히! 정정을 이런 용도로 써먹었더란 말이냐!'

우르르르르릉! 쿠구구구궁!

건우의 의념이 거대한 분노를 터트리자 술법진 전체가 요동쳤다.

하지만 대라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진법이 만만하지는 않을 터.

건우의 분노에 반응하며 진법 전체를 아우르는 열두 겹의 방어막이 떠올랐다.

“허어, 윤회 법칙의 힘까지 끌어왔구나.”

건우가 그 방어막을 보며 탄식을 토해냈다.

술법진을 지키기 위해서 방어막을 만드는 것은 예상한 일이다.

어떤 식으로든 준비가 되어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이 감여진인이 천지 법칙에 보내는 윤회 법칙의 힘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은 곤란한 문제였다.

건우가 방어막을 깨트리기도 쉽지 않겠지만 방어막이 깨어지면 그 순간 천지 법칙으로 흘러가는 감여진인의 윤회 법칙의 힘에 문제가 생긴다. 이는 천지 법칙의 흐름에 크게 지장을 주는 것이 될 수밖에 없고, 당연히 천지 법칙의 반서가 돌아올 것이다.

“교묘하구나. 겹겹이 방어막만둘렀을 뿐인데, 내가 공격할 백 가지 방법을 무력하게 만들었어.”

공격 자체가 불가능하다.

아무리 건우라 하더라도 대라선급의 법칙 운용을 방해한 대가로 천지 법칙이 쏟아낼 반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열두 번이나 반복하며 견뎌내야 술법진을 뚫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 어쩌지요?

'어쩌긴,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몽이의 물음에 건우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화의 술(術)을 펼치는 술법진을 뚫고 들어가 연화주를 취할 방법이 필요했다.

천지 법칙의 방해를 피해서.

*   *   *

= 오셨나요? 내님.

유정정은 오랜 고요가 깨어지는 것을 느꼈다.

= 여기까지 저를 찾느라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요? 내 님.

자신을 감싸고 있는 고요는 얼마나 되 었을까?

매우 오래된 듯하면서 또 그리 오래지 않은 듯도 하다.

시간이 어찌 흐르고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던가, 그녀는 그것조차 잊었다.

= 드디어, 드디어 님께서 오신 것이어요.

하지만 어찌 되었건 고요가 깨어진 것은 너무나도 기쁜 일이었다.

이미 그녀는 그 고요에 잠식되어 존재가 거의 사라질 지경이 되어 있었으니.

고요가 깨어짐으로 자아를 되찾은 것이 아닌가.

님께서 오심으로.

= 님께서 오시면 저는 가여요. 그곳이 어디라도 가여요.

유정정은 건우가 온 것을 알았다.

그리고 건우에게 가려는 열망을 품었다.

그 열망은 이미 그녀가 연화주에 봉인될 때부터 안배해 뒀던 것.

님이 있다면 반드시 가리라.

님께서 나를 부르시면 나는 가리라.

그녀는 스스로 연화주에 들기 전에 그렇게 맹세했었다.

그것이 지금 그녀를 깨어나게 한 단초가 되었으리라.

= 아아, 님이여. 어디신가요? 어디에 계신가요?

하지만 막상 가려하니 님이 있는 곳을 알 수가 없다.

님께서 가까이 오셨는데, 그리하여 나를 부르는데.

드디어 오신 것인데, 가까이에 계신 것인데.

= 어찌하여요? 어디 계세요? 아아아, 님이여.

고요가 깨어지고 파랑이 일어나며 그녀의 상념은 점차 거세게 날뛰기 시작하였다.

= 가여요. 가여요. 제가 님께 반드시 가여요.

= 가여요. 가여요. 제가 님께 반드시 가여요.

= 가여요. 가여요. 제가 님께 반드시 가여요.

* * *

-왜 그러세요?

'정정이다. 정정이 나를 불러.'

무슨 말씀이세요? 어디요? 어떻게요? 정말이……. 아! 그렇군요.

뭔가 건우의 의식에 변화가 생긴 것을 알아차린 몽이는 스스로 질문을 던지다가 답을 알아차렸다.

'감여진인의 유진은 끝없이 상념의 찌꺼기를 만들어 낸다. 온전히 윤회 법칙의 깨우침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렇죠. 천지 법칙의 운용에는 아무 쓸모도 없는 부분들이 잔뜩 남았죠.

'순수한 영혼으로 윤회하기 위해서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모두 남기고 떠나는 거지. 그게 무엇이 되었든. 아마도 감여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그랬겠지.'

그래서 그렇게 남은 유진에서 필요한 부분만 덜어내고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게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는 거였어요.

'성공하면 아무 문제없이 써먹을 수 있는 천지 법칙의 보조 법보가 만들어지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관리가 필요한 불량품이 만들어지는 거죠.

'어쨌거나 그건 상관없다. 감여진인의 찌꺼기가 이곳으로 들어와 정화 술법진을 통과하여 순수한 기운이 되는 것은 이미 아는 바.'

그런데 순수하기만 해야 할 그 기운에 정정 선자의 의념이 섞여 나오기 시작했네요. 그녀가 건우님을 부르고 있어요.

'그래, 그거다. 그녀가 나를, 내가 찾아온 것을 알고 저리 애타게 부른다. 그러니 나는 가야겠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건우는 드디어 정정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정에 닿을 수 있는 방법도 알아차렸다.

위험하긴 하겠지만,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말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네요. 건우님의 의지가 이리도 확고하니, 저 역시 건우님의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어요.

몽이도 상황을 알아차리고 결연(決然)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건우는 곧바로 자신의 의념을 감여진인의 유진에서 흘러오는 찌꺼기, 그 검은 흐름에 섞어 넣었다.

'정정, 내가지금가오.'

< 정정, 내가 지금 가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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