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1)
< 천지 법칙의 근원을 거쳐 허원계에 이르다 >
= 도조가 삼천이라 한다.
= 말은 그러하나 도조의 수는 항시 변화하여 일정치가 않다.
= 일정치 않다는 것도 과거의 말일 뿐이다.
= 도조의 수가 변하지 않은 것이 언제부턴지, 원기소 이후로 새로운 도조가 없었다.
= 조만간 원기소로 인하여 도조 하나가 줄어들게 되겠지.
= 도조란 법칙의 주인을 이른다.
= 애초에 역천자인 수사들은 그 법칙의 주인을 거꾸러뜨려야 할 의무가 있었다.
= 선계는 오래전부터 그러한 의지를 지닌 자가 사라졌느니.
= 삼천 도조가모여서 이룬 것이 대천세계이니라.
= 법칙들이 모여서 대천세계가 되었다 함은, 그 법칙 하나가 무너지면 대천세계가 무너짐을 의미한다.
= 그런 즉, 도조가 바뀐다는 것은 세계의 뒤틀림을 각오해야 할 대사(大事)이다.
= 그럼에도 도조의 정체가 바른(正) 것인지는 의문이다.
= 천지 법칙이 견고해지는 것이 이로운가? 해로운가? 대천세계에.
= 아직 고착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변화가 줄어들고 있다.
= 틀이 잡혀가는 것이지.
= 현 천지 법칙이 그러하니.
빛의 기둥 안에서는 여러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흘러 나왔다.
하지만 건우는 그 기둥 안에 있는 존재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니 존재를 인식할 수도 없었다.
건우는 고작 거대한 빛의 기둥과 그 기둥에서 번져 나오는 무량한 법칙의 힘을 겨우 알아차릴 수 있을 뿐이었다.
'저 안에 있는 이들은 누굴까? 도조일까? 아니면?'
문득 빛 안에 도조들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해 봤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 옛다! 가지고 가거라
지금까지와는 달리 건우의 의념으로 밀려드는 목소리 하나가 들렸다.
그리고 빛의 기둥에서 무언가 떨어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용의 비늘 같기도 했고, 벽돌 같기도 했으며, 또는 찢어진 종잇조각 같기도 했고 낡은 책 같기도 했다. 건우가 바라보는 동안에도 하염없이 인지를 바꾸게 만드는 그것이 건우에게 날아왔다.
'어어어?'
그리고 그것은 건우의 의념으로 파고들더 니 결국에는 의 념 공간의 중앙에 자리 잡았다.
'뭐지?'
의념 공간은 건우가 절대자나 다름이 없는 곳이다.
그럼에도 정의되지 않고 끝없이 모습이 바뀌는, 혹은 바뀌지 않아도 인지되지 않는 그것 때문에 건우는 당황했다.
스화화화홧!
“허어어어억!”
- 건우 님! 정신… 차……?
한순간이 었다.
건우는 빛의 기둥이 번쩍하는 느낌과 함께 지극한 쾌감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 고얀!
= 어허, 실없는 짓을. 그래 봐야…….
= 심술일 뿐이…….
빛의 기둥에서 몇 마디의 말이 더 들린 듯 했지만 그것이 건우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허어어억!”
- 아이고오. 여기가 어디에요?
건우와 몽이는 한 순간 동시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둘 모두 아직도 정신을 뒤흔드는 쾌감의 흔적에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게 쾌감의 잔재를 떨어 낼 때마다 뭔가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정신에 묻어 있던 찌꺼기들이 그 쾌감의 잔재와 함께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 어떻게 된 거예요?
'모르겠다. 그것이 천지 법칙의 근원이었다고? 고작?' 건우는 억울한 표정으로 원형석판을 둘러보았다.
이 미 조화진법은 한 번의 발동으로 그 쓰임을 다한 후였다.
진법을 이루던 복잡한 선과 문양, 문자 따위가 모두 빛을 잃었다.
그것들은 이제 저계 수사들이나 쳐다볼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우르르르르르응 꽈르르르르릉!
머리 위에서 보랏빛 구름 속 샛노란 뇌전이 뇌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구름과 뇌전은 점차 힘을 잃고 모습을 감추는 중이 었다.
천지 법칙이 조화진법의 발동에 대한 벌을 내리지 못한 것이다.
이미 진은 발동되었고, 그 안에서 있었던 일은 천지 법칙의 흐름이 간섭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항상 그러하듯 법열 이후에 천지 법칙의 흐름에 다가가는 것은 보상이다.
그 이전에 그것을 시도하는 것을 막거나 시험할 수는 있어도 성공한 후에는 관여하지 못한다.
천지 법칙은 그 규칙에 따라서 조화진을 발동시킨 건우를 어쩌지 못하고 물러나는 것이다.
'그런들 무얼 한단 말인가. 도대체 내가 그곳에서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건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 었다.
조화진을 통해서 대라선과 맞서 싸울 힘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도조를 넘볼 수 있을 거라 하지 않았나?'
건우는 허탈한 마음으로 의념 공간에 있는 '그것'을 바라봤다.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것은 여전히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거나 혹은 인지할 수 없는 무엇으로 고요히 있었다.
'저것이 조화선이 얻고자 했던 그것인가? 모든 천지 법칙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것?'
인지할 수 없는 것은 간섭하거나 이용할 수 없다.
그나마 존재 자체를 인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글러먹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 건우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이제 어쩌지?'
- 진선도의 구당문에게 돌아갈 건가요?
건우의 고민에 몽이가 선택지 하나를 던졌다.
하지만 건우는 고개를 저 었다.
'이미 제리배천단에서 나를 공적으로 지정했을 것 같은데?'
네? 어째서요?
'제단에서는 숙류계에서의 일을 밝혀냈겠지. 그 봉인되어 있던 옥선이 나에 대해 말했을 수도 있고. 그것이 아니라도 구당문이 제 발이 저리지 않았겠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거기다가 다미 선자를 비롯한 여덟 명의 선인을 죽인 것이 문제가 될 수도 있지. 천단에서 그들의 죽음을 모를 것 같지는 않은데?'
천단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구룡승룡단은 그 여덟 선인이 꽁꽁 숨기고 그들끼리만 일을 도모했댔잖아요.
'그게 아니라, 천단에 속한 단원들의 생사를 파악할 수단 정도는 있을 거란 말이지. 그런데 그들이 한꺼번에 죽었다면?'
그 여덟 선인의 뒤를 쫓다 보면 결국 이곳까지 드러날 거라는 거죠?
'음. 내 생각에 아마도 흑와류계를 뒤덮었던 천겁뢰가 사라지면 오래지 않아서 천단의 선인들이 이곳으로 들이닥칠 것 같은데?'
아, 조화선인의 진법이 힘을 잃었으니 생문을 몰라도 흑와류계의 중심인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을 거란 말씀이네요? 그럼 뭐해요?
'응?'
당장튀어야죠! 당장요!
* * *
허원계 (虛原界).
흑와류계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은 특이하게도 금선, 옥선, 대라선 등의 고계 선인들이 많이 머물기로 유명한 곳이다.
듣자면 진선들만 모인다는 진선도와 대척점에 있는 듯한 곳이지만 실제론 진선들의 왕래도 빈번한 곳이다.
말하자면 선계에서 고위 선인들을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곳이라 하면 될 것이다.
결국여기까지 오셨네요.
몽이가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이곳에 정정이 있는데 오지 않을 수가 있어?'
하지만 당장 대라선을 상대할 방법이 없잖아요. 게다가 이곳에는 고계 선인들이 많아서 그 대라선을 건드렸다가는 당장 다른 선인들이 우르르 달려들지도 모른다고요.
'선인들이 설마 그렇게 하진 않겠지. 다들 다른 이들에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이들인데.'
이곳 허원계는 다르잖아요. 이곳의 선인들은 의외로 교류가 활발하다는 이야기는 건우 님도 들었잖아요.
'그렇다고 한들 개인적인 원한을 풀고자 하는데 끼어들지는 않겠지. 그리고 그런 일이 없도록 최대한 조심해서 일을 꾸며야 할 것이고.'
아이고, 저도 모르겠어요. 대체 대라선을 어찌 감당하려고 그러시는지 모르겠네요. 그것도 하필이면 윤회 법칙의 대라선을요.
몽이가 앓는 소리를 하며 머리통을 쥐고 웅크렸다.
하지만 그래 봐야 몽이는 건우의 생각 한 면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정정이 들어 있는 연화주를 찾으려는 건우의 결심을 막지 못할 것은 몽이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건우가 가지고 있는 불안과 갈등이 몽이를 통해서 드러난 것일 뿐이다.
'시간을 오래 끌기도 어렵다. 너도 알겠지만 제리배천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네네. 그렇겠죠. 제단과 천단이 모두 건우님을 찾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이미 건우 님이 수미 세계의 연화궁 유정정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을수도 있겠죠
'그러니 더욱 일을 서둘러야지. 자칫하면 제리배천단이 연화주를 빼돌릴 수도 있고, 정정을 볼모로 나를 협박할 수도 있다.'
그럼 뭐 크게 한바탕 난리가 나겠죠. 건우 님이 협박 따위에 굴할 분은 아니시잖아요.
'또 모르지. 정정과 내가 아름다운 생을 살아갈 길을 보장해 준다면야 순순히 물러나 줄 수도 있으니.'
그럴 거면 협박을 왜 하겠어요? 아니 제리배천단의 힘이면 굳이 협박을 할 필요가 없을지도?
'어쨌거나 일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것이 아니냐. 안 그러냐?'
네네. 그러니 어서 감여진인(堪與眞人)이나 찾지요.
결국 몽이는 건우의 고집에 항복하고 말았다.
감여진인이 바로 연화주를 가지고 있다는 윤회 법칙의 대라선이었다.
'그래, 감여진인, 그 자를 찾아야 하는데……'
하지만 몽이에게 대꾸하는 건우의 말에는 힘이 없었다.
허원계에 도착한 것이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감여진인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저 아주 오래전에 감여진인이 있었다는 것과, 그가 윤회 법칙의 대라선이라는 정도만 선인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이런 경우는 감여진인이 외부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봐야 하는데, 그렇다면 그를 찾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아, 그것 참.”
건우가 허원계 대성의 교차로에서 긴 한숨과 함께 혀를 찰 때였다.
“무얼 그리 고민하고 있는 것이냐?”
“아니, 유희 선인? 선인이 어찌 이곳에 계신 것입니까?”
기척도 없이 건우의 곁에 새빨간 비단옷을 입은 유희 선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몸의 굴곡을 따라 딱 붙은 빨간색 비단옷은 허벅지에서 갈라지며 한쪽 다리를 매혹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호호호호. 내가 아직 너의 길잡이 노릇을 그만두지 않았으니 내가 너를 찾는 것이 무에 어려울까. 호호호.”
놀라는 건우의 모습을 보며 유희가 '재미있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하지만 분명히 진선도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진선도라고? 너는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구나. 네가 그 약속 이후로 도대체 무엇을 하였더란 말이냐? 그러고도 그런 말을 하다니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것이 아니냐?”
“아, 저……"
건우는 유희의 반박에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실 유희에게 진선도에서 만나자 한 것은 그녀를 떼어 내기 위해서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숙류계의 일을 마치고 진선도로 돌아가지 않고 흑와류계로 가지 않았던가.
게다가 그곳에서 수천 년을 보낸 다음에는 또 이곳 허원계로 오느라 천 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결국 유희 선인은 건우의 말을 믿고 진선도에서 수천 년을 기다렸을 터.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을 수밖에.
“이제야 표정이 제대로 되었구나. 그래, 너는 그리 미안해 해야 하느니라. 호호호.”
건우가 입을 다물자 유희는 짤랑짤랑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러다가 정색을 하고 건우를 보았다.
“죄송합니다. 제 잘못이 큽니다.”
건우는 그런 유희의 표정에 곧바로 사과를 했다.
분명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자신의 잘못이니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는 생각이었다.
“되었다. 고작 몇 천 년 정도야 문제도 아닌데 그리 심각할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언제고 네가 진선도로 찾아왔겠지. 그렇지 않으냐?”
“물론입니다. 제 일이 마무리되면 당연히 유희 선인을 만나러 갔을 것입니다.”
“호호호. 곁에 반려를 데리고 말이냐?”
“음, 그……. 그렇습니다. 일이 잘 풀렸다면 분명 그리 되었겠지요.”
“하지만 내가 이곳에 나타났으니 문제가 생기게 되었구나. 이를 어쩌면 좋겠느냐? 호호호.”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유희의 말에 건우는 뭔가 불길한 느낌을 받고 그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유희가 이곳에 왔으니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호호호호. 왜? 이제 겁이 나기 시작하느냐? 호호호.”
그런 건우를 보고 유희가 또다시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 천지 법칙의 근원을 거쳐 허원계에 이르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