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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 가만두지 않겠다 >
“구당문 단주께서 보낸다는 이가 그대였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리 늦었나? 왔어도 진작 왔어야 하지 않았나?”
“허량원을 지나던 중에 귀왕의 시험에 끌려들어 일이 어그러진 것입니다. 그것을 제가 어찌할 수 있었겠습니까?”
건우는 숙류원의 산맥 중에 한 곳에서 만난 선인의 추궁에 마냥 고개를 숙이진 않았다.
자신이 늦은 것을 두고 탓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디 자신의 잘못인가?
“허어. 누가 그것을 모르나? 허량원에 변괴가 생긴 것은 우리도 알고 있네. 하지만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것은 강 선인이 아닌가. 마땅히 실수를 인정하고 사죄를 함이 옳지 않겠나?”
“사죄는 무슨, 되었습니다. 내 게으름 탓도 아니고, 오는 여정에서 불가피한 상황이 벌어진 것을 두고 무슨.”
“뭐라?”
“상황이나 알려주십시오. 아직도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아니면 시간이 흘러 할 일이 없어졌습니까?”
“허어, 어찌 그리 독선적이란 말이냐? 아무리 구당문 단주의 총애를 받는다 하더라도 같은 단의 동도를 이리 무시하려 들어서야 되겠나?”
“내 잘못이 아닌 일로 타박하니 그런 것이 아닙니까. 나는 구당문 선인의 부탁을 받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더구나 구 선인께서 이곳에 대한 정보도 꼭꼭 숨겨 두는 바람에 나는 숙류계에 도착을 하 고도 여기까지 오는데 다시 천 년 가까운 시간을 더 허비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제 탓이겠습니까? 구 선인의 탓이겠습니까? 그도 아니면 다만 상황이 어지러워진 탓일 뿐이겠습니까?”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눈앞의 선인을 노려봤다.
구당문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는 옥선급 선인 하나가 봉인되어 있었고, 그 일을 책임진 것이 눈앞에 있는 마난색(摩亂色) 선인이었다.
건우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며 그렇게 따지자 마난색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제단에 새로 들어온 후배라 하여 약간의 기세 싸움을 했던 것 뿐인데 체면만 구기게 된 것이다.
“강 선인이 끝까지 그렇게 떳떳하다 하면, 나도 더는 뭐라 할 수 없겠지, 하지만 홀로 유아독존할 것이 아니라면 그 뻣뻣한 태도는 고치는 것이 좋을 것이네.”
“알겠습니다. 기억하지요.”
“어쨌건 강 선인이 이제라도 왔으니 다행이네.”
“그 말은 아직까지 내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말이군요?”
“맞네. 아직 옥선의 봉인은 유효하니 그 안에 있는 옥선의 시간을 멈추어 주기만 하면 되네.”
“봉인 안의 옥선이 저항한다면 쉽지 않을 터인데 괜찮겠습니까?”
건우는 옥선을 홀로 제압할 자신은 없다는 듯이 그렇게 물었다.
할 수 있더라도 그것을 마난색 선인에게 드러내긴 싫었기 때문이다.
“걱정할 필요 없네. 저항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이미 봉인이 될 때부터 상황을 인지시켜 뒀으니 대의를 위해서라도 스스로 강 선인의 시간 법칙을 받아들일 것이네”
“대의를 위해서 말입니까?”
“그렇지. 봉인된 옥선도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자각했고, 그것이 천지 법칙의 큰 흐름에 방해가 될 수 있음을 인정했네. 그러니 차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나올 때까지 시간을 멈춘 상태로 지내는 것을 받아들였지.”
"받아들였다라……"
건우는 마난색 선인의 말에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금선이나 옥선이 되었다는 것은 개인적인 오욕칠정을 버린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제리배천단에서 관리하는 대부분의 선인들은 바로 그런 상태의 선인들이었다.
그런데 봉인된 옥선이 스스로의 판단으로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결정했다니.
‘실제로 저 봉인 속의 옥선이 그런 결정을 내렸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진짜 옥선의 결정이라보기 어렵지.’
건우는 개인의 감정과 욕망을 상실한 이들은 원래의 자신을 잃고 세뇌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상태에서 내린 결정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사실 시간이 조금만 더 흘렀다면 봉인 속의 옥선은 윤회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네. 시간 법칙으로 굳혀 놓는다 하더라도 이후에 파탄을 바로 잡을 확률이 극히 낮아졌을 테니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서둘러 일을 마치고 싶습니다.”
건우는 당장 구당문의 부탁, 즉 제리배천단 제단의 일에는 별로 열의가 없었다.
제리배천단의 일이라 어쩔 수 없이 마무리를 하러 왔지만, 서둘러 일을 끝내고 조화선의 기연에 집중하고 싶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다미 선자를 만나고 싶어서 심장이 벌렁거리는중이었다.
“킁, 그렇다면 그리 하지.”
마난색은 건우가 처음부터 사교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에 더는 길게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곧바로 건우를 데리고 봉인의 중심으로 향했다.
“이것이 옥선을 봉인한 것입니까?”
건우가 마난색을 따라가니 절벽에 큰 삼 층의 옥선 단을 쌓고 그 위에 주둥이가 넓은 항아리를 놓은 것이 보였다.
바로 그 항아리 안에 봉인의 중심이 되는 봉인물이 있었는데 그것은 특이하게도 커다란 접시였다.
지름이 한 발은 되어 보이는 큰 접시가 항아리에 가득한 물 위에 떠 있었는데 그것이 봉인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 물 위에 떠 있는 접시 안에도 물이 거의 가득 차 있었다.
건우는 그 접시 안에 있는 물이 숙류계에서도 흔히 보기 어려운 정화수(晶華水)임을 알아봤다.
새벽 우물물을 뜻하는 정화수가 아니라 맑고 깨끗함을 뜻하는 정화수는 숙류계의 특별한 기운을 받아 생성되는 물방울이었다.
건우가 알기로 그 숙류계 정화수는 한 방울을 얻기 위해서 수십 년을 애써야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런 정화수를 가득 담은 큰 접시가 항아리의 물 위에 아슬아슬하게 떠 있었다.
“봉인된 옥선에 대해서는 강 선인이 자세히 알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그 정화수가 옥선의 파탄을 막아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
“그럼 이제 봉인된 옥선의 시간을 멈추면 이 정화수들은 필요가 없겠군요?”
“일의 대가로 정화수를 가져가려는가?”
마난색은 건우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곧바로 알아차리고 그렇게 물었다.
“숙류계의 보물인데, 얼마쯤 얻어갈 수 있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건우는 보물을 얻을 기회가 생겼는데 그것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뻔뻔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이에 마난색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좋네. 원래 내 것이긴 하지만 일이 끝나면 한 병 내어주지.”
결국 그렇게 말하는 마난색의 어투에는 처음과 달리 어서 떼어냈으면 좋겠다는 피로감이 담겨 있었다.
이후 건우는 접시를 채운 정화수에 담긴 봉인을 읽어내고, 그 안까지 의념을 밀어 넣었다.
이는 봉인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한 마난색이 건우의 의념을 봉인 안으로 인도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건우도 그 봉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정도는 마난색도 짐작했을 것이다.
= 어떤가? 보이는가?
건우의 의념이 봉인 안으로 들어오자 마난색의 심언이 건우에게 전해졌다.
= 아직입니다. 온통 안개가 가득하여 옥선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선인께서 마저 이끌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건우는 의 념으로 봉인 안쪽을 살피며 대답했다.
= 그런 곤란하네. 옥선이 나를 느끼게 되면 폭주를 할 가능성이 있으니 그를 찾는 것은 강 선인이 홀로 해야 하네.
‘풋, 봉인된 옥선이 스스로 자청하여 그 길을 택했다면서 왜 자신을 보면 폭주를 한다는 거야? 결국 마난색이 이곳에 봉인된 옥선과 사이가 나쁘다는 말이잖아.’
건우는 마난색의 말을 듣자마자 그런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결국 마난색의 말에서도 제리배천단의 행사가 올곧은 것만은 아님이 드러나고 있었다.
= 알겠습니다. 내가 직접 찾아서 시간 법칙을 베풀도록 하지요.
건우는 그렇게 마난색에게 심언을 전하고는 다시 접시에 담긴 정화수 봉인에 집중했다.
접시에 정화수를 담고, 그 정화수의 성질을 이용하여 봉인을 만들었는데, 물이 가진 포용성을 기반으로 봉인 공간을 만들고, 정화수의 깨끗하고 맑은 기운을 이용하여 봉인된 옥선의 파탄을 붙잡고 있었다.
건우는 그러한 사실을 파악하면서 조심스럽게 봉인 안의 안개를 의념으로 더듬어갔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 사이에 건우의 의념은 일종의 분체처럼 형상을 갖추고 안개 속을 걷는 형상이 되었다.
“이런 곳에 계셨습니다 그려.”
그리고 결국 건우의 의념 분체가 안개를 늘어진 비단 들추듯 걷어내며 그 안에서 한 사람의 형상을 찾았다.
“누구냐?”
건우의 기척을 느낀 선인이 눈을 뜨고 물었다.
그런데 그 형상이 기괴했다.
그는 커다란 바위에 머리와 오른팔만 밖으로 드러난 상태로 묻혀 있었다.
“후배는 강건우라 합니다. 제리배천단의 제단주 구당문의 부탁으로 선배에게 시간 법칙을 걸기 위해 왔습니다.”
건우는 그 선인의 물음에 자신이 그를 찾은 이유를 숨김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어차피 눈앞의 선인이 저항을 한다면 임무를 완수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솔직하게 말하고 협조를 구하는 것이 임무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많이 늦었구나. 아니 오히려 너희 입장에서는 적당하다 해야 할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바위에 묻힌 옥선의 말뜻을 건우는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너희는 내 흐름 법칙이 필요하지 않으냐. 천지 법칙의 거대한 흐름에 내 힘이 도움이 되길 바라지. 아니 그러냐?”
“그런 일은 제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그저 구당문 선인의 부탁을 듣고 이곳에 왔을 뿐, 그 내막까진 알지 못합니다.”
“네가 제리배천단에 속해 있다 하지 않았더냐?”
“그렇다고 제가 제리배천단의 속깊은 일까지야 어찌 알겠습니까.”
“기이한 놈이로구나. 내 일을 처리하는데 어찌 너 같은 놈을 보낸단 말이냐? 제리배천단이 이리 일을 허투루 하지는 않을 터인데?”
“무슨 말씀인지 모르지만, 구당문 선인이 직접 움직일 상황이 아니라 했고, 선인께 시간 법칙을 걸어줄 사람이 없다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리 오게 된 것이지요.”
“뭐라? 시간 법칙을 걸어줄 이가 없다고?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이냐? 제리배천단이 그리 얄팍한 곳이 아니거늘. 흐음. 그러고 보니 너는 내 시간을 멈추면 어찌 되는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허허허. 미련한 놈. 내 비록 옥선에 불과하지만 천지 법칙의 거대한흐름에 적잖이 기여하는 바가 있다. 내가 쓸 수 있는 흐름 법칙의 힘을 모두 쏟아부어 천지 법칙의 운용을 돕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습니까?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흥! 존경?”
“일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일 자체의 규모가 존경할 만하다는 것입니다.”
“놈, 말하는 것이 제리배천단의 골수분자는 아닌 듯하구나. 그러니 이번 일의 중요성도 모르고 있었겠지.”
“제가 견문이 좁아 그렇습니다.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간청 드립니다.”
“크흐흐. 그래도 예의가 있는 놈이구나. 그렇다면 내 특별히 너에게 지금 네 놈의 처지를 일러주마. 그러니까 내가 천지 법칙의 거대한 흐름에 일조하고 있음을 말해 주지 않았더냐?”
“그렇습니다.”
“그럼 내가 너의 시간 법칙에 걸려서 덜컥 멈춰 버린다면 어찌 되겠느냐?”
“그것은……"
“나를 생각할 필요는 없느니라. 그저 천지 법칙의 흐름과 나의 상태를 연관 지어 보아라.”
건우의 망설임에 바위 속 선인이 가볍게 조언을 던져 주었다.
“으음. 제가 천지 법칙의 흐름에 큰 지장을 주게 되는 것입니까?”
그 말에 건우는 곧바로 선인이 경고하려는 말을 추측해 내었다.
“크하하하하.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너는 일이 끝나고 나면 얼마나 곤란한 처지가 되겠느냐.”
“하지만 그런 경우라면 제가 법칙의 힘을 쓰기 전에 미리 전조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법칙의 힘이 역천을 행하려 하면 그 전에 반드시 천지 법칙의 경고가 있는데 어찌 이번 일이라고 그런 경고가 없겠습니까?”
그러니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건우 자신이 미리 알게 되었을 거라는 이야기다.
“이럼 미련한 인사를 보았나. 천지 법칙의 이목을 속이는 방법이 어디 한두 가지더냐? 너는 내가 있는 곳까지 왔으면서도 이 안개 봉인에 숨겨진 일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구나.”
“그, 그런……"
건우는 옥선의 말을 듣자마자 자신이 함정에 빠질 뻔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 속지 마시게. 그 자가 강 선인을 속이려는 것이네. 내가 만든 봉인은 엄중하기 짝이 없네. 그래서 그 안에서 그 자에게 시간 법칙을 쓰더라도 천지 법칙이 알아차릴 수가 없네. 그러니...
= 허튼소리!
갑작스럽게 마난색이 다급하게 심언을 보내어 건우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건우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버럭 노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곧바로 바위에 갇혀 있는 옥선에게 의념 분체로 공수 인사를 했다.
“선배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잠시 나가서 밖에 있는 놈에게 이 일을 따져 물어야하겠습니다.”
“크하하하하. 따져 묻겠다? 그럴 능력은 되더냐?”
“선배님께 걱정을 끼칠 정도는 아닙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건우는 옥선의 염려를 가볍게 일축하고 곧바로 봉인에서 의념을 수습했다.
그러자 항아리 위의 접시로 손을 뻗고 있던 건우가 번쩍 눈을 떴다.
“마난색! 이 노옴!”
그리고 건우는 곧바로 마난색을 향해 노성을 터트렸다.
< 하! 가만두지 않겠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