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465화 (465/499)

(465)

< 허량원(虛量原)에서 귀왕을 만나다 >

건우는 허량원에 든 이후, 유희와의 대화를 마친 다음 곧바로 탑의 4층으로 올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당문이 준 옥간을 보며 시간 법칙에 깊이 몰두하고 있었다.

하지만 허량원은 그렇게 간단한 곳이 아니었다.

그저 홀로 수련 삼매에만 빠져서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면 무슨 이유로 그토록 동행을 찾고자 했겠는가.

‘음? 무슨 일이지?’

건우는 수련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전해지는 유희와 세해갈의 기운에 삼매경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몸을 날려 탑의 1층으로 내려갔다.

"왔구나."

"오셨습니까?"

그곳에는 유희와 세해갈이 이미 나와서 건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건우가 둘을 보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거용의 비행 경로에는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마물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허량원의 시련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유희는 이미 각오한 일이란 듯이 담담하게 말했지만, 곁에 있는 세해갈은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저것들은 일반적인 마물이 아닌 듯합니다. 실체는 부족하고 영(靈)과 혼(魂)의 기운이 강합니다."

건우는 마물들을 의 념으로 훑어보고 그렇게 말했다.

그의 의념에 잡힌 허량원의 마물들은 그와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옳다. 그래서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저것들을 처리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습니까?"

"실체가 있기는 하되, 그것이 허물어진다고 영이나 혼이 흩어지는 것은 아니다. 허량원에는 영이나 혼이 몸으로 삼을 뼛가루가 허다하니 곧바로 새로운 몸을 만든다."

"뼛가루가 그리 많습니까?"

"저기 황사처럼 흩날리는 것이나 바닥에 깔린 가루나, 바위처럼 보이는 것들까지. 그 모두가 뼛가루의 다른 모습이니라."

"아니, 도대체 저 많은 뼈는그럼 어디서 나왔다는 말씀입니까?"

허량원에서 눈에 보이는 대지의 모든 것이 뼈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건우는 그런 사실을 들은 적이 없기에 유희를 보며 물었다.

"원래 이곳은 태고 시대에 이름도 지워진 거대한 신수가 죽은 곳이다. 그 신수의 크기가 지금의 허량원 만큼이나 컸던 것이고, 그 신수의 뼈가 풍화되어 허량원의 땅이 되었지."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나조차도 진위를 알 수 없을 정로도 까마득한 옛 일이다. 하지만 이 허량원의 대지가 뼛가루로 되어 있음은 확실하지."

"그렇군요."

"하지만 저 마물들의 몸을 이루는 뼛가루에는 그 태고 신수의 뼈는 거의 없느니라."

"네?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전에 말하지 않았더냐, 이곳 허량원은 홀로 지나기 어려운 곳이라고."

"네, 그리 말씀을 하셨지요. 그레서 여기 세해갈 선인도 우리와 함께 한 것이 아닙니까."

"세해갈이야 지금 거론할 문제는 아니고, 다만 이곳 허량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대략이라도 알아야겠지."

유희는 그렇게 말을 시작해서 허량원의 무서움을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로 이곳 허량원은 태고의 거대 신수가 죽어서 만들어진 땅이라, 그 때문에 초기에 신수의 살과 장기가 썩어가며 오랜 세월 시취를 풍기고, 부패의 기운과 독기를 뿌렸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 시기에는 이곳 허량원이 죽음의 땅으로 불리며 그와 같은 법칙을 익히는 이들에게 수련 복지로 이름이 높았다고.

하지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흘렀을 때에, 신수의 살과 피와 장기는 물론 골수까지 모두 진(盡)하여 사라지자 남은 것은 뼈밖에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 뼈도 보통이 아니었을 것은 능히 짐작하겠지? 신수의 기운에 죽음의 기운은 물론이고 죽은 것들이 되살아나려는 원념과 저주 따위가 뒤엉키게 된 것이지. 원래 피와 뼈와 살과 골육까지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뼈이다 보니, 죽은 것의 원념이 가장 쉽게 깃드는 것도 뼈가 아니더냐."

건우는 뼈를 다루는 술법이나 법칙에 대해서는 깊이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떤 류의 술법이나 법칙에서 뼈를 매개체로 많이 쓰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유희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후로 신수의 뼈 때문에 이곳 허량원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까?"

"호호호. 그걸 그리 볼 수 있을까 모르겠구나. 이전 신수의 몸이 썩어갈 때의 폐해에 비하면 뼈만 남아서 생긴 문제는 약소하다 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렇습니까?"

"물론 허량원의 재앙이 모습을 달리했으니 이전과 구별해도 틀리다 할수는 없겠지. 어쨌거나 그 뒤로 허량원에서는 죽은 이들의 원념이 들끓으면 저기 보이는 것과 같은 마물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쌓여서 결국 이곳 허량원이 위험하게 되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지. 그리고 사실 그 이전부터 허량원에서 죽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뼈만 남기 전에 이곳이 어떠했는지 말하지 않았더냐."

"그래서 그 때에 죽은 것들까지 한꺼번에 문제가 되었다는 것입니까?"

"옳다. 뼈만 남은 후에 사령술 계열의 술법이나 법칙의 힘이 이곳에서 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 결국 이 허량원의 문제란 것도 그쪽 계열의 법칙을 익힌 수사나 선인들이 배후에 있단 말이군요? 휴우우."

결국 허량원도 사람들이 문제라고 짐작하며 한숨을 쉬는 건우였다.

"대부분 네 말이 맞지만 한 가지는 틀렸다. 허량원에는 원흉이 되거나 숨어서 일을 꾸미는 선인이 여럿 있는 것은 아니니라."

"네? 그게 무슨?"

"있다고 하면 아마도 그 태고의 거대 신수가 원흉이 아닐까? 모든 일은 그로부터 시작된 것이니."

"언젠지도 모를 과거에 죽어서 이제는 뼈조차 풍화되어 가루만 남은 그 신수 말입니까?"

"그래, 그 뼈에 깃든 사념이 지금 허량원의 모습을 만든 것이지.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느니라."

유희가 그렇게 말을 했을 때, 뼛가루로 몸체를 만들고, 령과 혼으로 피와 살을 붙인 마물들이 거룡 비행 선기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그냥 가루로 만든 후에 뚫고 지날까요?"

건우가 유희를 보며 물었다.

그러자 유희가 손을 뒤집어 바닥에서 탁자와 의자를 솟구치게 하더니 의자 하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세해갈과 건우를 손짓으로 부르며 말했다.

"저것들을 그리 힘으로 뚫고 갈 것이면 우리가 이렇게 동행으로 모일 일이 뭐가 있겠느냐. 자 앉거라."

유희의 말에 세해갈은 아무 말도 없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건우 역시 유희를 믿는 바가 있었기에 군소리 없이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원형의 탁자를 정확히 삼분한 위치에 건우와 유희와 세해갈이 자리를 잡고 앉게 되었다.

"그럼 시작을 해 보자꾸나. 재미있을 것이다."

건우가 이제 무엇을 하려는가 하는 눈빛으로 유희를 보는데 유희가 그렇게 외치고는 한 손을 휘둘러 투명한 결계를 만들었다.

"저 마물들은 아무리 부수고 깨트린다고 하여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사실 저것들의 능력이란 것은 고작해야 정신을 파고들어 자아를 잃게 만드는 그 하나밖에 볼 것이 없다."

"자아를 잃게 만든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단지 그것뿐이지. 그래서 이렇게 동행이 있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정신을 일깨워주면 저것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하지."

"그럼 허량원이 그리 위험할 것은 없지 않습니까."

유희의 말처럼 마물들의 위협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면 뭐가 문제란 말인가?

"하지만 때로는 그와 같은 방법이 쉽게 통하지 않을 때도 있다. 아주 강력한 마물이 등장하여 정신을 빼앗으려 할 때가 그러하지."

"어째 말씀을 듣고 있자니 지금이 그런 상황인 것 같습니다만?"

"옳게 들었다. 저리 많은 마물들이 나타난 것을 보면 귀왕(鬼王) 역시 나왔다고 봐야겠지."

"그 강력한 마물의 이름이 귀왕이었습니까?"

"그래. 세해갈, 준비는 되었느냐?"

"네, 선인. 이제 귀왕만 모습을 드러내면 곧바로 계획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유희는 건우를 외면하고 세해갈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졌고, 세해갈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희 선인, 지금 일부러 귀왕이란 존재를 불러냈다는 말로 들립니다만?"

듣고 있던 건우가 깜짝 놀라며 유희에게 물었다.

"진정하고 즐겨 보거라 재미있을 것이니."

건우가 따지듯 묻는 말에 유희는 빙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고, 이어서 세해갈이 허공에 손짓을 했다.

우우우우웅! 우우우웅!

이게 무슨?"

그 순간 그들이 있는 탁자를 감싼 투명한 결계가 요란하게 뒤틀렸고, 이어서 건우는 정신이 혼몽해지는 것을 느끼고 당황했다 등선자가 된 자신의 정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이게 어찌된 거지?"

건우가 애써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가 있는 곳은 자욱한 안개 속이었는데 언제 어떻게 그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어 당황스러웠다.

"그리 호들갑 떨 것 없다. 우리는 그저 귀왕이 만든 놀이터에 잠시 정신이 옮겨 왔을 뿐이니라."

유희의 목소리가 들리며 그녀와 세해갈이 건우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 둘은 조금 전 탁자에 있었던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건우도 겉모습은 변한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유희의 말로는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이 귀왕의 놀이터라 한다.

"어찌된 것입니까?"

"별 것 아니다. 그저 귀왕의 시련만 무사히 넘기면 우리는 다시 거용의 머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우리 셋의 몸은 그대로 1 층 탁자에 있습니다. 여기 있는 것은 우리의 정신일 뿐이지요."

유희의 말에 세해갈이 이해를 돕겠다는 듯이 설명을 더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건우가 유희를 보며 물었다.

"혹(惑)하지 않는 것이다."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귀왕의 속임수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혹은 귀왕의 바람을 완벽하게 들어주는 것입니다."

유희와 세해갈이 번갈아 가며 답을 늘어놓았다.

그 모두가 귀왕의 시련을 통과하는 방법인 듯 했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귀한손님께서 오셨습니다. 이리 드시지요."

갑자기 아름다운 여인의 목소리가들리더니 마물 하나가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마물이 걸어 나온 부분부터 안개가 걷히더니 그 속에서 화려한 3층 전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리로."

마물이 건우 일행을 전각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뼈가 훤하게 보이는 반투명한 몸을 가진 마물이었다.

그나마 몸을 감싸고 있는 비단옷은 투명하지 않아서 흉한 모습 대부분은 가리고 있었다.

거룡 비행 선기를 가로막았던 마물들이 거의 헐벗은 것에 비하면 제대로 된 복장을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

"이곳은 어딘가??"

건우가 전각으로 오르는 계단에 막 발을 디딘 마물을 향해 물었다.

"아, 이곳 말씀이십니까? 여기는 귀왕께서 머무시는 곳입니다."

"그럼 귀왕이 전각 안에 있다는 것인가?"

"아, 그것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계실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저 같은 하찮은 존재가 어찌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가?"

건우는 그 여자 마물의 대답에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주변을 살폈다.

잘 꾸며진 정원에 커다란 연못이 있고, 그 연못 위에 걸쳐진 무지개다리도 있었다.

그런 정원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네 개의 계단을 올리고, 그 높이의 넓은 단에 전각을 세웠다.

그래서 위에 올라서니 나름 정원의 전경이 눈 밑에 드러난다.

"어서 드세요. 선인들께서는 술과 음식을 즐기지 않는다 들었지만, 이곳에 있는 술과 음식은 선계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귀한 것들입니다. 마음껏 즐겨 주십시오. 그러다 보면 귀왕께서 여러분을 찾으실 것입니다."

마물은 그리 말을 하고는 전각 안쪽 대전에 건우 일행을 남기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산해진미가 모두 모여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때, 건우는 길게 늘어진 상 위에 잘 차려진 음식을 보며 감탄했다.

그는 수도계에 든 이후에도 다른 이들과는 달리 먹고 마시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다.

도리어 어떤 때에는 스스로 찾아서 먹고 마시는 행위를 할 때도 있었다.

그런 건우가 잘 차려진 산해진미를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거기에 무슨 함정을 숨긴 것이 아니라면.

"귀왕이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요?"

건우를 따라 긴 식탁에 앉게 된 세해갈이 유희를 보며 물었다.

"귀왕이 노릴 것이 달리 뭐가 있느냐. 당연히 우리의 혼백과 몸을 노리겠지. 우리는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고."

유희는 당연하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 때, 유희의 바로 옆에 있던 빈 의자에 누군가 갑자기 나타났다.

"다들 그런 오해를 하지. 내가 저희들의 몸과 혼백을 노린다고. 하지만 그것은 절대 사실이 아니지."

말만 들어도 그가 귀왕임은 단번에 짐작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건우는 검은 갑옷을 입은 귀왕을 보며 오래 전 기억 속에서 죽음의 기사가 걸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오랜만에 그렇게 지구의 기억이 떠올랐다.

< 허량원 (虛量原)에서 귀왕을 만나다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