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464화 (464/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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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희에게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

송리역(松里域)은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환경을 지닌 지역에 불과했다.

숲과 강, 호수가 여럿 있고, 간혹 황무지나 사막 등이 있는 드넓은 자연, 그리고 그 곳에서 어우러져 살아가는 천지 만물들.

그런 송리역이 그나마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곳이 허량원과 접한 몇 곳 중에 하나란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허량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송리역 말고도 여럿 있었지만, 그런 곳들이 가까이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건우가 있던 진선도에서 허량원으로 들기 위해서 가장 가까운 곳은 송리역이었는데. 허량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다른 곳을 찾으라면 거기까지 가는 데에만 수백 년은 더 가야 할 정도로 송리역과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허량원과 인접한 곳은 선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다르게 말하면 허량원을 이용하면 그 흩어져 있는 곳들로 갈 수 있다는 거지.’

- 그냥 가는 것보다는 훨씬 빨리 갈 수 있고요?

‘그렇지. 선계의 끝에서 끝까지 비행 선기를 타고 간다는 것은 수천 년. 혹은 수만 년을 기약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지. 그런데 허량원을 이용하면 그 기간을 많이 줄일 수 있다는 이야기지.’

- 그냥 장거리 공간 이동진법을 이용하면 될 텐데 말이죠.

‘그것조차 허량원을 이용하는 것보다 번거롭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경우가 있고, 이번에 내가 가야 할 숙류계 또한 그런 곳이지. 진선도에서 숙류계를 가려면 허량원을 통과하는 것이 가장 빠르다.’

- 그렇다는데 제가 어쩌겠어요? 그런데 구당문이 준 옥간은 어때요?

‘시간 법칙의 깨달음이 들어 있는 그것 말이냐?’

- 네. 그게 시간 법칙을 깨우치는 데 도움이 되긴 하는데, 뭔가 꺼림칙한 것이……. 사실 기분이 좋지 않아요.

‘그건 나도 그렇다. 구당문이 깨달음의 일부를 전해주긴 하지만, 뭔가 함정이 있는 것 같거든.’

-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이번에 허량원을 지나는 동안 시간이 많으니 유희 선인에게도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이다. 아울러서 유희 선인의 일도 의논을 해 보고.’

- 하긴, 이젠 유희 선인의 입장도 분명하게 할 때가 되긴 했어요. 지금껏 길잡이라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제리배천단이 얽히면서 상황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으니까요.

‘그래. 나도 그런 생각이다.’

건우는 허량원에 인접한 송리역의 작은 성에서 유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건우가 있는 성은 송리역과 허량원이 맞닿은 곳에 있었는데, 이곳엔 유희의 걱정대로 허량원을 함께 지나갈 동행을 구하는 선인들이 많이 있었다.

건우에게도 간혹 어디로 가는지 묻는 선인들이 있었는데, 건우는 목적지를 밝히지 않았다.

이곳에 도착해보니 숙류계로 가려는 선인 하나가 있었는데, 애타게 동행을 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그가 건우의 목적지를 알게 되면 함께하자고 들러붙지 않겠는가.

그래서 목적지를 밝히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희 선인, 그분은?"

건우는 몇 달 후에 성에 도착한 유희가 숙류계로 가는 동행을 구한다던 그 선인과 함께 나타나자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이쪽은 세해갈(世解渴)이다. 허량원을 통하여 숙류계로 간다는구나."

- 아니, 유희 선인. 선인께서 아무나 동행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그를 데리고 오시다니요?

건우가 유희에게 심언을 이용하여 따져 물었다.

분명 유희가 이런 것을 조심하라며 주의를 주지 않았나.

그런데 유희가 도리어 누군가를 데리고 온다고?

"그리 숨겨 말할 것 없다. 내가 너에게 동행을 주의하라 했던 것은 문제가 될지도 모를 이를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여기 세해갈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도리어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그렇습니까? 사실 유희 선인을 믿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리 의논도 없이 일을 벌이신 것은 별로 달갑지 않습니다."

건우는 유희의 독단적인 행동에 불만을 드러냈다.

마치 자신을 두고 어떤 일을 꾸며 그리 끌고 가려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나는 너의 길잡이 노릇을 하고 있느니. 절대 너에게 해가 될 짓을 하지는 않는다. 여기 세해갈 역시 너의 일에 도움이 될 것이라 이리 데리고 온 것이다. 그러니 기분 상해 할 일은 아니니라."

"그 또한 유희 선인의 독단이 아닙니까."

"그럼 세해갈 선인을 그냥 돌려보내면 되겠느냐?"

건우의 거부감이 크다고 생각했는지 유희가 굳은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건우는 잠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대답했다.

"지금껏 유희 선인이 제게 많은 도움을 주셨는데 어찌 단번에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앞으로는 저와 논의를 거친 후에 일을 결정하심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결국 조건을 달아 세해갈의 동행을 허 락하고 말았다.

"고맙습니다. 세해갈이라 합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세해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인사를 했다.

그는 이십 대 초중반의 수려한 외모를 지닌 수사였는데 투명한 녹옥석(綠玉石) 빛깔의 머리카락이 눈길을 끌었다.

건우는 그 머리카락에 물(水)과 관계된 법칙의 힘이 깃들어 있음을 알수 있었다.

세상의 갈증을 없앤다는 특이한 이름처럼 세해갈은 물의 법칙을 깨우친 이였다.

"나는 강건우라합니다. 이미 세해갈 선인께서 허량원을 거쳐서 숙류계로 향할 동행을 찾고 있음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이곳에 그것을 모르는 이가 누가 있겠습니다. 벌써 4년 동안 이곳에서 숙류계로 함께 갈 동행을 구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런 것도 있지만 며칠에 한 번씩 성의 상공에서 숙류계로 가는 이를 구한다며 목청껏 외치지 않았습니까. 그런 특이한 분을 어찌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건우가 이곳에 오자마자 세해갈을 알게 된 것이 바로 그런 이유였다.

그래서 곧바로 목적지는 절대 입 밖으로 내지 말자는 생각을 했던 것이고.

‘기이한 놈이라 생각해서 거리를 두려 했는데, 유희 선인이 이 자를 데리고 올 줄은 몰랐군.’

"자, 그럼 망설일 것이 있겠느냐. 인사를 마쳤으면 이만 허량원으로 들도록 하자."

건우가 세해갈과 몇 마디를 나누자 유희가 곧바로 건우를 보며 말했다.

"함께 허량원으로 들어야 한다고 하셨으니 셋 모두 거룡을 타고 들어가면 되겠습니까?"

허량원에 따로 들어가면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는 다시 만나기 어렵다고 했다.

그렇게 뿔뿔이 흩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함께’라는 틀이 필요할 것이고, 이는 거룡같은 비행 선기면 될 듯 했다.

"그리하면 되겠지. 어차피 허량원을 지나는 동안은 계속해서 거용의 탑에서 거해야 할 터이니."

건우의 말에 유희가 고개를 끄덕였고, 세해갈은 거용이 무엇인지 궁금한 표정으로 건우를 보았다.

건우는 곧바로 둔술을 펼쳐 성의 상공으로 올랐고, 유희와 세해갈이 따라오기를 기다려 거룡을 불러냈다.

"오! 뛰어난 비행 기물입니다. 원래 부족함이 있던 것을 선기로 끌어 올린 것이군요. 그런데 그 수준이 가히 선보에 뒤지지 않을 듯합니다."

거용의 등장에 세해갈이 감탄하며 놀라는 눈빛으로 건우를 보았다.

"나조차도 가끔은 탐이 나는 비행 선보니라."

거기에 유희도 어쩐 일인지 거용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럼 원래대로 탑의 3층은 유희 선인께서 쓰시고, 4층은 제가 쓰겠습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세해갈 선인께서는 2층을 쓰시면 되겠지요. 1 층은 의논할 일이 있으면 모이는 곳으로 하고 말입니다."

건우가 거용의 주인으로서 객들의 거처를 정해 주었다.

그리고 곧바로 거룡을 움직여 허량원으로 들어갔다.

*  *  *

"이제는 이야기를 해 주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허량원에 들어온 직후, 건우가 탑의 1 층에서 유희를 만나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결국 네가 말을 꺼내는구나."

유희도 어느 정도는 이런 날이 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는지 차분한 어조로 건우의 말을 받았다.

"사실 많은 것이 혼란스럽습니다. 언제부터입니까? 처음 환상대시에서 삼십육 홍의선자부터였습니까?"

건우가 물었다.

"그것은 아니다. 삼십육 홍의선자는 그저 환상대시의 무료함을 덜어내기 위한 놀이였을 뿐이다. 거기에 네가 걸려들었다고 할까?"

"그럼……

"그리 따질 것도 없다. 네가 수미의 연화궁과 관계가 있다 했을 때부터 일은 시작되었으니."

"그럼……"

"그래, 시작은 단순한 놀이였지만, 수미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나는 너를 특별히 보았느니라."

"그렇군요. 그럼 그것은 역시 제리배천단 때문이었습니까?"

"호호호. 그래. 숨길 것이 뭐가 있겠느냐. 그것이 옳다. 수미에서 제리배천단이 일을 꾸며 연화궁의 궁주인 유정정을 연화주에 봉하였지."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단 말입니까?"

"내가 아는 제리배천단의 행사가 몇 있는데 그 중에 그 일도 있었더니라."

"그럼 이미 그곳에 정정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리고 지금 정정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을 것이……

"진정해라. 세상일이 어찌 그리 간단하게만 돌아간다더냐? 내가 모든 것을 안다고 하지는 않았느니!"

건우의 흥분에 유희가 따끔한 일갈을 날렸다.

그 서슬에 건우는 움찔하며 흥분했던 마음을 간신히 가다듬었다.

"나 또한 기억이 온전하지 못하다.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굳이 너에게 숨길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

"그, 그건……"

"물론 네가 아직 부족한 것이 많은 까닭에 대사(大事)를 논하기에 마땅치 않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꽁꽁 숨길 일은 없었느니라."

"그럼 정정에 대해서 아시는 것이 어디까지란 말입니까?"

유희가 뭐라 하건 건우에게 정정의 일이 다급할 뿐이었다.

"쯧, 수미 연화주의 일을 제리배천단에서 꾸몄고, 그 연화주를 결국은 대라인지 도조인지 모를 어떤 선인에게 주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대라나 도조란 말입니까?"

"그것은 기억이 분명치 않다. 어쩌면 그것까진 알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

"아니 어째서……"

그걸 모르느냐고 따지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고, 그럴 상황도 아님을 알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건우였다.

"제리배천단이 나를 두고 일을 꾸몄더니라."

그런 건우를 향해 유희가 말했다.

"네? 제리배천단이 유희님께 일을 꾸몄다고요?"

"정확하게는 내 본체인 몽유희를 노렸던 것이지."

"아니 그게 어찌 말이 됩니까? 유희, 아니 몽유희님은 대라선이 아니십니까? 천지 법칙의 흐름에 대라선께서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데, 제리배천단이 몽유희님을 상대로 일을 꾸민단 말입니까?"

제리배천단은 애초에 천지 법칙의 원활한 운행을 목적으로 움직이는 단체다.

그런데 감히 대라선에게 일을 꾸몄다니?

"호호호. 그것들이 보기에는 내가 대라선으로서 부족한 점이 많았던 게지. 그래서 좀 더 완전한 대라선으로 만들려 했던 것이고."

"몽유희 님을 완전한 대라선으로 만들려 했다고요? 그게 무……. 설마몽유희 님의 희로애락(喜怒哀樂) 오욕애(惡慾愛)를 제거하려 했던 것입니까?"

건우가 말을 하다 말고 깜짝 놀라 유희를 보았다.

그러자 유희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실상 본체라 할 수 있는 몽유희는 겉으로는 모든 감정과 개인적인 욕망을 잃고 법칙의 흐름을 유지하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느니라."

"그럼 환상대시는 어찌 된 것입니까?"

"그것은 또 다른 몽유희의 작품이라 해야겠지."

"네? 다른 몽유희라고요?"

"몽유희는 꿈과 희의 법칙을 깊이 익혔느니라. 그래서 꿈을 이용하여 또 다른 몽유희를 만들고, 그 몽유희로 하여금 희(喜)의 법칙을 추종하게 했느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쉽게 생각하거라. 이는 원래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감정을 거세당한 몽유희가 어찌 희(喜)를 느끼겠느냐."

"아! 감정이 없는 희의 법칙은 성립이 되지 않는군요?"

"더 크고 깊이 들어가면 개인감정이 아닌 법칙의 흐름 자체의 지극한 기쁨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에 이르지 못했으니 결국 감정이 거세된 몽유희와 그렇지 않은 몽유희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하나이면서 또 하나가 아닌."

"무슨 말씀인지 조금은 알겠습니다."

"어쨌건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 정신이 온전치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너에게도 모든 것을 알려줄 수 없었던 것이고."

"네. 이해했습니다."

"그럼 이제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는 이유도 짐작하겠지?"

"제리배천단에 대한 복수입니까?"

"쯧, 그것만으로 되겠느냐? 부족하다!"

"그럼??????"

"내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기억은 물론이고 감정까지도."

그렇게 말하는 유희의 눈빛이 사뭇 서늘하였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알겠습니다. 저 역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당연히 그리해야 할 것이다. 너는 모르겠지만 지금 너를 둘러싼 모든 일은 네가 바라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이다. 언젠가는 연화주에 닿게 될 것이고, 또 그 안에 있는 반려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무 조급해 할 것도 없느니라."

"그, 그게 정말입니까?"

"천지 법칙이 인도하는 운명이라는 것은 때로 얄궂은 면이 있느니라. 제리배천단이 항상 천지 법칙의 비호를 받는 것은 아니지."

이번에도 유희는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말을 하며 다시 묘한 미소를 지었다.

< 유희에게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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