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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당문이 일거리를 맡기다 >
구당문은 건우에게 녹림대산의 선인과 그가 기르는 영과목에 대한 것을 일러준 후, 한동안 제리배천단에 대한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궁금해하는 건우에게.
‘천지 법칙의 흐름을 유지하는 것에 매번 일이 생긴다면 어찌 버틸 수 있겠느냐. 그런 일은 조금씩 진행되어 어느 순간 파탄이 생기는 법이다. 그러니 그 파탄이 일기 전에 미리 방비하면 될 일이지 만 또 그래서 다급하게 뭘 해야 할 일은 많지 않지.’
라고 상황을 설명해 주긴 했다.
그 후에는 때때로 건우를 불러 시간 법칙에 대해서 가르침을 주곤 했는데, 건우는 그 맛에 구당문을 자주 찾았다.
그리고 그만큼 건우의 시간 법칙에 대한 깨달음이 깊어졌고, 어느 때부터 시간을 느리게 만들거나 혹은 빠르게 만드는 것이 능숙해졌다.
그리고 오늘, 건우는 시간 법칙을 공부한 이래 처음으로 시간을 멈추는데 성공했다.
물론 그 범위는 무척 한정적이었지만 그 작은 성공이 가지는 의미는 지대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대단하구나. 벌써 시간을 멈추는데 성공하다니."
구당문은 건우가 주먹 크기의 공간 안쪽의 시간을 멈춰 놓은 것을 확인하고 그렇게 칭찬했다.
"실로 감격스럽습니다. 고작 이 작은 공간의 시간을 멈춘 것이지만 이미 선인들에게 공간의 크고 작음 따위가 무슨 의미겠습니까?"
건우는 그렇게 말하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건우 자신이 공간 법칙을 익히고 있으니 공간을 압축하거나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익힌 공간 법칙과 이 시간 법칙을 더하면 어떠할까.
어쩌면 거대한 공간 전체에 시간을 정지시키는 힘을 깃들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정정도 그런 공간에서 지금껏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시간이 멈춘 공간에서 정정은 어떠할까?
정말 한 공간의 시간을 멈추면 그 안에 있는 선인의 정신까지 멈추는 것이 맞을까.
혹시라도 모든 것이 멈춘 중에 정신만 깨어 있다면?
그 억겁과 같은 시간의 형벌을 정정이 견딜 수 있었을까?
‘아니다. 분명 나에 대한 그리움으로 일어난 정신적인 문제를 잠재우기 위해 스스로를 봉인했다 했으니 정신까지 철저하게 봉인하여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것이 시간법칙을 수련한 다미 선자에게 도움을 청한 이유가 아닌가.’
건우는 저도 모르게 정정에게 일어났을지도 모를 끔찍한 일을 상상하다가 다급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정정이 연화주에 봉인된 것이 십만 년이 되어 가는데 그 사이에 시간이 멈추는 술법에 문제가 있었다면 정정이 어찌 무사할 수 있을까.
절대 그런 일은 없어야 했다.
"좋구나. 너는 확실히 배움이 빠르다. 거기다가 항상 열정적이지. 영생불사를 얻은 등선자들은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 말이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시간 법칙도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했을 뿐인데, 제가 배우고 익혀야 할 법칙은 수도 없이 많이 남지 않았습니까."
"크하하하. 너는 진정으로 그런 욕망을 가진 것이로구나. 다양한 천지 법칙을 모두 깊게 궁구하려는."
"지금은 한계를 두지 않으려 합니다. 앞으로 익힐 법칙에 한계를 두는 순간 퇴보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너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다. 우리 제리배천단에 홍복이 깃들었음이야."
건우의 말에 구당문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허벅지를 쳤다.
"감사합니다. 구선인님."
"하하. 그래, 이제 네가 시간 법칙을 이리 다룰 수 있게 되었으니 내가 일을 하나 맡길 수 있겠구나."
"네?"
건우는 갑작스러운 구당문의 말에 저도 모르게 그렇게 반문하고 말았다.
수련 성취를 축하하며 기뻐하던 분위기 속에서 난데없이 일을 맡긴다는 말을 하다니?
"마침 시간 법칙이 필요한 일이 있었는데 네가 조금만 더 정진하면 능히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구나."
"그, 그렇습니까?"
"일이 급한 것은 아니나, 진선도에서 할 일은 아니다. 그러니 네가 좀 나서 주어야겠다. 나는 지금 진선도를 비울 수 없는 상황이니."
"아, 알겠습니다."
결국 시간 법칙을 써야 하는데 구당문이 나서지 못하니 건우에게 시키겠다는 소리였다.
"시간 법칙을 익힌 이가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찾지 못할 것은 아니지. 하지만 우리 제리배천단 안에는 그 수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마침 내가 당장 일을 맡길만한 이가 곁에 있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느냐."
구당문이 말하는 이는 건우가 분명했다.
건우는 고개를 숙여 구당문의 말에 따르겠다는 뜻을 나타내며 혹시 하는 마음에 물었다.
"단(團)에 시간 법칙을 익힌 이가 많지 않습니까?"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식 단원 중에는 몇 없지. 물론 우리 제단이 아닌 다른 단에 대해서는 나도 확실히 알 수는 없고."
"아, 구 선인께서도 다른 단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다른 단에 대해서 모른다는 말보다는 관심이 없어 알아보지 않았다는 쪽이 듣기에 좋을 것이다. 그렇게 건우의 말에는 보이지 않는 꿀이 발라져 있었다.
"허허허. 아주 모르기야 하겠느냐. 게다가 시간 법칙이라면 제리배천단 전체를 보아도 나보다 뛰어난 이가 없다. 그러니 시간 법칙을 익히고 있는 단원이라면 대충은 알 수 있지. 그저 네 말대로깊 이 신경을 쓰지 않았을 뿐."
"아, 그렇군요. 그럼 저희 제단에는 어떠합니까? 저보다 뛰어난 시간 법칙의 선인이 있을 터인데 말입니다."
"녀석, 경쟁심을 느끼는 것이냐? 하긴 그런 마음이 성장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긴 하지."
"아닙니다. 경쟁심이라니요? 그저 같은 시간 법칙을 익힌 단원이 있다면 서로 교류하여 깨달음을 나누면 좋지 않을까 했을 뿐입니다. 물론 그 역시 구 선인께 배운 것이 많겠지만 말입니다."
"쯧, 그렇게까지 말할 것은 없다. 실상을 말하자면 우리 제단에는 너보다 시간 법칙을 뛰어나게 익힌 단원이 없느니라."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제리배천단의 역사는 그 기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지 않습니까? 게다가 단주이신 구 선인께서 시간 법칙에 능통하신데 어찌 단원 중에 시간 법칙을제대로 익힌 이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구당문의 말에 건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똥그랗게 뜨며 물었다.
건우는 다미 선자를 찾으려 했는데, 지금 구당문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제단에 속하지 않았다는 뜻이 될 것이라 실망감이 들었다.
하지만 실망감보다는 의문이 더 컸다.
제단의 단주인 구당문이 어찌 시간 법칙의 단원을 양성하지 않았을까?
"놈, 스스로 얼굴에 금칠을 하는구나."
그런 건우를 보며 구당문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
"이 놈아, 시간 법칙은 천지 법칙 중에서도 익히기가 어렵기로 손에 꼽는 법칙이다. 누가 그것을 네 놈처럼 그리 쉽게 제 것으로 만든단 말이냐?"
"하, 하지만 진선도에 시간 법칙을 궁구하는 도반 모임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들 모두가 시간 법칙을 익히고 있는데 어찌……"
"그 놈들의 수준이 어떠한지 몰라서 하는 말이더냐? 네가 돌아다닌 시간 법칙의 도반 모임 중에서 네 수련에 도움이 될 실오라기 하나라도 내어 준 곳이 있더냐?"
"그럼요. 처음 시간 법칙에 대해서 배운 것이 바로 그런 도반 모임이었습니다."
"하! 기가 막힌 놈이구나.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느냐. 그 때의 너는 널리고 널린 도반 모임들에서도 회자될 정도로 하찮은 내용조차 몰랐다는 이야기가 아니냐."
"그, 그게……"
듣고 보니 얼굴이 붉어질 일이다.
그만큼 부족했던 자신의 상태가 드러났으니 어찌 그렇지 않을까.
"그런데, 그랬던 놈이 벌써 시간을 정지시킬 정도로 법칙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니, 어찌 내가 너를 놀라워하지 않겠느냐."
"제가 그 정도로 뛰어나다는 말씀입니까?"
"허허허허! 고놈 참! 그래 이 놈아 너는 내가 지금껏 만난 녀석들 중에서 가장 성장이 빠른 놈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시간 법칙에 대해서는 너는 천재가 아닐까 싶구나."
"아니 그럴 리가……"
구당문의 말에 건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그렇게 뛰어난 성취를 보이고 있다곤 생각지 못했다.
그저 시간 법칙을 연구하는 도반 모임에서도 다들 중요한 것은 숨기고 보여주지 않아서 토론이나 연구 수준이 낮았던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설마 그것이 숨김없이 드러낸 수준이었을 줄이야.
"이제 내가 너에게 시간 법칙의 큰 가르침 한 덩이를 줄 것이니, 너는 그것을 깊이 궁구하며 길을 나시거라. 그리하여 내가 이르는 곳에 가면 네 시간 법칙이 필요한 일이 있을 터, 그것을 잘마무리 하고 돌아오면 네게 큰 상이 있을 것이다."
"상이라니요?"
"네 놈이 바라는 것이 별 것 있더냐? 그 때에는 내가 가진 깨달음 대부분을 너에게 전할 것이다."
"아! 그런……. 알겠습니다. 성심을 다하여 구 선인께서 맡긴 일을 해 내겠습니다."
건우는 구당문의 깨달음 대부분이란 말에 크게 놀라다가 급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 * *
"그래서 숙류계(激流界)라는 곳으로 가야 할 듯합니다."
"숙류계는 참으로 먼 곳이지. 이곳 진선도에서 그곳으로 가는 데에만 족히 천 년은 걸릴 게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중간에 허량원(虛量原)을 지나야 하는데 그곳은 전송진이나 기타 공간 이동으로 지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그곳에서만 9백 년을 보내야 하지."
"숙류계를 아십니까?"
"그래, 가 본 적이 있느니라. 그리고 네 덕분에 또 다시 가 보게 생겼구나. 하지만 구당문의 감시가 만만찮을 터이니, 일단 허량원까지는 각자 가는 것으로 하자꾸나."
"허량원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씀이군요?"
"아니다. 허량원에 들어가는 것은 함께 해야 하느니. 따로 간다면 절대 그 안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기 어렵다.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 따로 가야 할 것이다."
"어찌 그렇습니까? 허량원에 그런 비밀이 있습니까?"
"호호호. 허량원은 모든 것이 비어 있는 거대한 평원이니라. 그곳에 있으면 드넓은 세상에 오로지 함께 있는 일행만이 남겨진 것처럼 느껴지곤 하지. 그래서 혼자 허량원을 지나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하다."
"허량원이 위험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곳에 요괴나 마수가 살기라도 하는 것입니까?"
"물론이다. 어찌 그곳이라고 요괴나 마수가 없겠느냐. 그곳에 있는 것들은 더더욱 오랜 세월 허량원에 잡아먹힌 등선자를 흡수한 것들이다. 절대 만만할 수가 없지."
"아! 허량원에서 등선자들이 죽기도 하는 모양이군요?"
"허량원의 무서운 점은 그곳을 지나는 이들의 정신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너도 아는 것처럼 등선자의 가장 큰 약점이 바로 불안정한 정신이 아니더냐."
"등선자의 정신이 불안정하다는 것이 말이 안 되어야 하는데, 실상은 또 그 말이 옳으니 참으로 기묘한 일입니다."
"어쨌거나 허량원이 그런 곳임을 잘 알아야 한다. 그러니 절대 홀로 지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고."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허량원의 입구에서 유희 선인과 다시 뵈면 되겠군요."
"그렇게 하면 된다. 다만 명심할 것은 허량원에 너와 나 이외의 다른 동행은 함께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당문의 감시를 피하고자 했는데 어찌 유희 선인 이외에 다른 동행을 구하겠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허량원은 홀로 지나지 못하는 곳이라 항상 동행을 구하는 이들이 많으니라. 목적지가 비슷한 이가 없다면 수백 년을 기다리는 일도 흔하다. 그러니 어떻게든 동행을 하겠다고 붙는 이가 있을수도 있다."
"네, 알겠습니다. 조심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허량원의 입구에서 보도록 하자꾸나. 어딘지는 알고 있겠지?"
"구당문이 숙류계까지 가는 길을 자세히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알았다. 너는 먼저 출발을 하거라, 나는 이후에 알아서 갈 터이니."
"네, 유희 선인."
건우와 유희는 그렇게 구당문의 눈을 피해서 숙류계로 가기 위해 허량원 입구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이후 건우는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허량원의 입구가 있는 가까운 역(域)으로 이동했다.
< 구당문이 일거리를 맡기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