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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당문이 실전 참관을 시키다 >
"오랜만에 보는구나."
"네, 유희 선인님."
건우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유희와 마주 앉았다.
이곳은 유희의 거처로 은밀한 계곡 깊은 곳에 있는 데다가, 평소 밖으로 드나드는 일이 없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는 곳이었다.
건우는 구당문에게 접근하기 시작하면서 유희와의 만남을 극도로 조심하고 있었다.
그런 건우가 유희를 찾아온 것은 구당문의 일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나를 찾아온 것을 보니 뭔가 일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그렇습니다. 이번에 구당문 선인이 저를 제리배천단의 단원으로 올리겠다고 했습니다."
"호오? 그래?"
건우의 말에 유희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표정이 드러났다.
"네, 그는 스스로를 제리배천단의 제단주라 했습니다."
"뭐라 제단주? 그게 정말이냐?"
하지만 이어진 건우의 말에 유희가 평소 볼 수 없었던 격앙된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건우에게 얼굴을 내밀기까지 했다.
"그렇습니다. 스스로 그리 말하며 저를 직속으로 삼겠다 했습니다. 거기에 응하지 않으면 소멸시키겠다고 한 것이 흠이라면 흠입니다만."
"놀랍구나. 제리배천단의 제단주라니."
"그게 그리 놀랄 일입니까?"
건우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제리배천단은 비밀스럽기 짝이 없는 단체다. 그런 중에 몇 가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제리배천단은 네 명의 단주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는 말씀은 구당문이 제리배천단의 네 우두머리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까?"
"아니지. 그 위에 총단주라 할 수 있는 이가 있을 것이고, 총단주의 명을 따르는 무리가 또 있지 않겠느냐?"
"어쨌거나 네 명의 단주 중에 하나라면 거의 최상위급의 거물이 아닙니까."
"그러니 내가 이리 놀란 것이 아니겠느냐. 정말 의외로구나. 하긴, 시간 법칙을 깊이 익힌 자라고 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저 역시 구당문이 시간 법칙에 조예(造諸)가 깊다 하기에 어느 정도 위치는 있으리라 짐작했습니다만, 제단주란 위치가 그리 높은 것일 줄은 몰랐습니다."
"제리배천, 그 네 글자를 따서 제단주, 리단주, 배단주, 천단주가 있느니라."
"그렇군요."
"어쨌거나 네가 아주 튼튼한 줄을 잡고 제리배천단에 들어가게 되었구나."
"하하하. 감사합니다."
"아니, 이는 그저 잘되었다고만 할 일은 아니니라."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제 언젠가 네가 제리배천단을 뛰쳐나오려 할 때에 제단주라는 그 구당문이 너를 막으려 할 것이 아니냐. 그러니 네 미래가 마냥 밝다고만 할 수는 없겠지."
"아, 그렇군요."
제리배천단의 단원이라 하더라도 건우는 단주의 직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다른 말단들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당연히 이후에 탈단을 하려 할 때에도 그 저항이 말단과는 다르리란 소리다.
"어쨌거나 네가 원하는 정보를 알아내는 것만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출발을 하게 되었구나."
"하하하.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이후의 일이야 어떻게 되건, 조금이라도 정정에게 가까이 갈수 있게 된 것이니 그것으로 족합니다."
건우는 그렇게 말하며 활짝 웃었다.
"네가 그리 밝게 웃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구나. 그래, 그 또한 보기 좋으니라."
그 모습에 유희도 즐거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 건우와 유희는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고 헤어졌다.
아마도 한동안은 다시 만나기 어려우리라.
제리배천단의 단원이 되면 한동안은 은밀한 감시를 받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 그리 대비하는 것이 당연했다.
* * *
"내, 오늘은 너에게 한 가지 일을 보여 줄 것이다. 그러니 너는 그것을 보고 배우도록 해라."
"그것이 제리배천단에서 하는 일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모든 것이 마무리되면 그 때에 이야기를 해줄 것이다. 또한 나와 함께 다니다 보면 시간 법칙에 대해서도 주워듣는 것이 있지 않겠느냐?"
"시간 법칙의 현기를 어찌 곁눈질 따위로 배울 수 있겠습니까. 모두 구 선인께서 배려해 주셔야 가능한 일이겠지요."
"녀석, 그 배움에 대한 갈망만큼은 항상 나를 감탄게 하는구나. 일단 가자꾸나."
구당문은 시간 법칙을 깨우치려는 건우의 열성적인 모습에 그렇게 타박을 하면서도 흐뭇하다는 듯이 웃었다.
이후 구당문은 건우를 데리고 몇 달 동안 여기저기를 다니며 여러 모습으로 스스로를 바꾸고 선인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 때마다 한 가지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진선도 바로 옆에 있는 녹림대산의 선인과 그 선인이 키우고 있다는 영과에 대한 것이었다. 그 선인은 세상과 연을 끊고 오직 하나의 영과목(靈果木)을 키우는데 온 정성을 다하고 있다는데, 그 세월이 10만 년에 이른다 했다.
그런데 근래에 그 영과목에 과일 몇 개가 달렸는데 안타깝게도 영과에 영성이 깃들지 못했다 한다.
다만 그 영과들에 특별한 효과가 생겼으니 아무리 지고한 등선자라 하더라도 원하는 기억을 말끔하게 도려내어 지울 수 있다는 것이다.
구당문은 여러 신분으로 변장하고 그런 이야기를 퍼트린 것이다.
건우 역시 구당문과 함께 하며 동료 도반인 척, 혹은 친우인 척, 혹은 길가다 만난 사이인 척하며 그런 일을 함께했다.
"어떠하냐?"
그리고 거처로 돌아오는 길, 구당문이 건우를 보며 물었다.
"무엇을 한 것인지 사실, 조금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건우는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그런 소문을 여기저기 흘린 것이 제리배천단의 일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우리 단에는 네 개의 큰 파벌이 있느니라. 그 중에 하나인 제단을 내가 이끌고 있지."
"그렇습니까?"
"별 감흥이 없는 모양이구나. 나중에 제단의 단주인 내가 너를 입단시켰다는 것이 어떤 의민지 알게 될 것이다."
"네, 높은 분께서 끌어들이셨으니 그만큼 주목을 받겠지요. 어쩌면 중요한 자리에 오르기 쉬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녀석, 여전히 흥미가 없다는 투로구나. 하지만 오래지 않아 바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선 이번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거라."
"네네. 알겠습니다."
건우의 대답에는 건성이 묻어 있었지만 구당문은 탓하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제리배천단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천지 법칙의 흐름을 정상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그거야 선계의 선인들이 모두 관여하는 일이 아닙니까."
법칙의 힘을 함부로 쓰지 못하는 제약부터가 천지 법칙의 흐름을 지키는데 일조하는 일이다.
그러니 굳이 그런 것을 강조할 이유가 있냐는 질문이다.
"물론 크게 보면 네 말도 틀리지 않지. 하지만 모든 것에는 좀 더 중요한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천지 법칙의 흐름을 유지하는 것에도 중요한 선인과 덜 중요한선 인이 있을 수밖에 없지."
"그건 이해합니다. 결국 금선, 옥선, 대라선, 도조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들이 일반적인 진선들에 비해서 훨씬 중요하다는."
"그래, 옳다. 바로 그렇지. 그런데 항상 모든 일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어서 법칙의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금선, 옥선, 대라선 등에 문제가 생길 때가 있느니라."
"알겠습니다. 그 문제를 바로잡는 역할을 하는 것이 제리배천단이란 말씀이 아닙니까?"
건우는 이제 알겠다는 듯이 손벽까지 치며 아는 척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이야기를 또 얼마나 오래 들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옳다. 바로 그거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이번에 말했던 그 영과들은 어떠할 것 같으냐?"
"네? 영과 말입니까? 녹림대산에 있는?"
"바로 그렇다."
"그것이…….잘 모르겠습니다."
"끄응, 그 영과의 효능이 기억을 들어내어 없애는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그것을 이용하여 문제가 생긴 금선이나 옥선, 대라선을 도울 방법이 없겠느냐?"
"설마 그런 선인의 기억을 지운다는 말씀입니까?"
"모든 번민은 기억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기억을 지워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겠지."
"아니, 그래서야 어디 온전한 상태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옳지 못한 것 같습니다."
건우는 상대의 기억을 지워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발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문제를 일으킨 기억이라 하여도 그것이 사라진 후라면 어찌 이전의 존재와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하.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떠하냐?"
"무엇을 어떻게 말입니까?"
"여기 한 명의 옥선이 있는데, 그가 어떤 법칙의 흐름을 제어하는 일을 50만 년 동안 해 오고 있다고 치자."
"네, 50만 년……"
"그는 50만 년 동안 오직 그 한 가지 일에만 몰두를 했느니라. 그런데 요즈음 조금 문제가 생겼지."
"50만 년이나 같은 일을 했는데 어찌 문제가 생겼다는 말씀입니까?"
"원래 그 옥선은 큰 깨달음을 얻어 천지 법칙이라는 거대한 흐름과 자신을 하나로 묶어 내는데 성공한 분이었다. 그래서 개인적인 일체의 희노애락은 물론이고 모든 번뇌까지 벗어난 분이지. 그런 데 갑자기 그 희노애락과 온갖 번뇌가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군요."
"그렇지. 자, 그럼 이런 경우에 그 녹림대산의 선인이 키우는 영과를 하나 가져다가 그 옥선의 지난 50만 년의 기억을 지운다면 어떠하겠느냐?"
"네? 50만 년의 기억을 모두 지운단 말입니까?"
"그렇지. 오래 전 대오각성하여 천지 법칙과 스스로를 묶어 냈던 바로 그 직후부터 지금 문제가 생긴 상태까지의 모든 것을 지우면?"
"그, 그렇게 해서 온전한 옥선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까? 적어도 50만 년은 다시 자리를 지킬 수 있는?"
"크하하하하.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야. 어떠하냐, 너는 이것이 문제가 있다고 여기느냐? 어차피 그 옥선은 지난 50만 년 동안 일체의 사적인 기억이나 감정은 가진 적이 없느니라. 그러니 그것을 지운다고 한들, 그 옥선의 본질에 무슨 영향을 준다는 말이냐?"
"모르겠습니다. 실로 구 선인의 말씀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건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 마음 속에서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 하는데, 옳지 않음의 근거를 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그런 상태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겠지. 큰 깨달음으로 천지 법칙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니 무엇도 확신할 수가 없는 것이야.’
건우는 자신이 느끼는 혼란의 원인을 짐작했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큰 깨달음을 얻어 천지 법칙과 하나로 연결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렇게 자신을 버리는 것에 큰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워 할 것 없느니라. 그저 그 영과가 그렇게 쓰일 수 있음을 이야기 했을 뿐이니까."
"그렇습니까? 그럼 그 동안 했던 일은……"
"나에게 이야기를 들은 이들은 저마다의 욕망을 가지고 녹림대산의 영과목을 찾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영과목의 주인과 싸움을 벌이겠지."
"네?"
"계속 들어라."
"네, 구 선인."
건우는 구당문이 낮게 질책하자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눈빛을 감춰서 불만을 들키지 않으려는 행동이었다.
"내가 이야기를 퍼트린 이들은 모두 각자의 역할이 있느니라. 그들이 어우러져 싸우다 보면 결국 마지막에는 영과목이 잘려 나가고 영과는 뿔뿔이 흩어져 몇몇 선인의 손에 들어갈 것이다. 이후, 그들 또한 영과의 존재를 알게 된 이들에게 영과를 빼앗기기도 하고 지키기도 하면서 한동안 혼란이 일겠지."
"아니 왜……"
"그런 중에 가장 잘 익은 영과 하나는 남모르게 옮겨져 문제가 생긴 옥선에게 쓰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겠지. 우리 제단에 속한 단원들을 제외하면."
"결국 제리배천단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혼란을 만든 것이란 말입니까?"
"오직 그것만이겠느냐? 이번 일에 얽혀 있는 이들은 다시 우리 제리배천단의 손아귀에 걸린 것이라. 이후에도 쓸 곳이 있으면 그 성향과 능력에 맞추어 이용할 수 있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것이 옳게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건우는 일부러 혼란스러운 모습을 꾸며 보였다.
실상 자신이 알지도 못하며 인연도 없는 선인이 어떤 꼴을 당하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런 속내를 섣불리 드러내긴 싫었다.
"이것만 생각하면 될 일이다. 대의!"
구당문이 그런 건우를 보며 단호하게 ‘대의 (大義)’를 말했다.
"그 옥선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서 이 대천세계의 혼란을 막게 되지 않았느냐. 그것만으로 수천 수억의 생령을 구한 것이다. 그 중에는 이번 일에서 희생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숫자의 선인과 수사 들이 있겠지. 그걸 생각하면 이번 일의 가치는 충분하지 않으냐?"
건우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구당문의 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너희는 너희들의 일을 한 것이겠지. 그리고 나는 내 일을 하면 그만이다.’
< 구당문이 실전 참관을 시키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