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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선계의 크나큰 비밀이니라 >
"제리(制理)…배천단(拜天團)이라니 금시초문입니다."
건우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이름이라 그렇게 대답했다.
"하긴 그럴 법도 합니다. 이들은 어지간해서는 이름을 아는 이들이 없는 비밀스러운 조직이지요."
"비밀 조직이란 말씀입니까? 그러면 그 다미 선자란 이도 거기에 속했다는 말씀입니까?"
건우는 다급한 마음에 서두르는 모습으로 물었다.
"앞뒤의 이야기를 마저 들어 보시지요. 과거 유정정 선인이 자신의 병을 알아차리고 스스로를 봉인할 생각을 했을 때, 애써 찾은 이가 있었습니다."
"정정이 애를 써서 누군가를 찾았다는 것입니까?"
"특정 인물이 아니라, 특정 법칙을 익힌 이였지요."
"아, 알겠습니다. 시간 법칙을 익힌 선인이 정정에게 꼭 필요했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마침 때맞춰 수미에 시간 법칙을 익힌 선인이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나들이를 왔었습니다."
"나들이라……. 상황이 공교롭기 짝이 없군요."
건우는 자연스럽게 그들을 의심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렇지요. 하지만 당시에는 그게 그리 이상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수미는 선계에 속하게 된 지 오래지 않은 곳이라 소문을 들은 선인들이 지나던 길에라도 간혹 들러가곤 했으니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게다가 시간 법칙을 익힌 선인 홀로 나타난 것도 아니고, 여러 선인들이 어우러진 가운데 시간 법칙의 선인이 끼어 있었으니 무엇을 더 의심하겠습니까."
"으음."
"게다가 유정정 선인도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어서 나름 많은 조사를 하고, 깊게 살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결국 그 선인과 거래를 하기로 한 것이지요."
"거래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저 안면이 있는 정도로 어찌 중한 일을 맡길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것도 유정정 수사 자신을 봉인하여 시간을 멈추어 두는 일인데 말입니다."
"생각해보니 그렇습니다. 정정이 누군가를 세워서 일이 제대로 진행되었는지 확인하게 했겠습니다. 저라도 그렇게는 해야 안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 다미 선자와 거래를 하고, 그것을 지켜보며 책임질 선인을 세워 두는 것이 이치에 맞지요."
"그래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까? 하지만 그랬다면 지금처럼 일이 틀어지진 않았을 텐데요?"
건우는 그렇게 물으며 불쑥 정정이 감시를 위해 세웠던 자가 배신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으음. 솔직히 거기까지는 저도 모릅니다. 누구에게 그 다미 선자를 감시하게 했는지, 어떻게 연화주가 세상에 떠돌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건우는 아쉬운 마음에 탄식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나마 뭔가 단서가 생기긴 했지만 아직도 그 때의 일에는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하지만 여기서 제가 알아낸 제리배천단(制埋拜天團)을 끼워 맞추면 이야기가 제법 많이 풀리게 됩니다."
"제리배천단이 그리 중요합니까?"
건우는 종 선생의 말에 반색을 하면서도 제리배천단이란 단체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그들은 스스로 천지 법칙의 수호자라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천지 법칙의 수호자요?"
"그렇습니다. 건우 선인도 아시겠지만 천지 법칙의 흐름은 실상 등선자들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뭐, 우리 같은 진선들이야 있으나 없으나 별 소용이 없겠지만 금선, 옥선, 대라선, 도조 등의 역량이 어우러져 법칙의 흐름을 주도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법칙을 펼치는 선인들이 또한 서로 거대한 흐름에 뒤섞이어 천지 법칙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역시, 등선한 지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천지 법칙에 대한 이해가 남다르십니다. 건우 선인의 말씀이 실로 옳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 법칙의 흐름을 주도하는 금선, 옥선, 대라선, 도조 등에게 문제가생 기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금선이라면 법칙의 흐름에 작은 걸림돌이 될 것이고, 옥선, 대라에 이르면 더 큰 일이 생기겠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네? 그것이라니요?"
종 선생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무릎을 쳤지만 건우는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제리배천단, 그들은 바로 그 금선, 옥선, 대라선, 도조 등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애쓰는 이들인 것입니다."
"으음. 천지 법칙의 흐름을 유지하는 나름의 역할을 하는 이들을 돌본다는 말입니까?"
"건우 선인도 아시지 않습니까. 금선, 옥선, 대라선, 도조가 참으로 대단한 이들이긴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잊은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야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그야말로 대도(大道)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 한 걸음 더 나아간 대각자(大覺者)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닙니까."
"옳습니다. 옳고 말고요. 따져보면 그런 희생 덕분에 천지 법칙의 흐름이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그런데."
"그런데요?"
"그들에게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문제라, 역시 정신적인 부분이겠지요?"
건우는 어렵지 않게 종 선생이 말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제리배천단을 더하고, 거기에 유정정의 연화주를 더하니 문득 떠오르는 답이 있었다.
"결국 제리배천단에 속한 다미란 선자가 정정을 봉인하여 연화주를 만들고, 정신이 불안정한 누군가에게 그 연화주를 주었다는 말이군요?"
정정은 원래부터 정화 법칙을 깊이 깨달았다.
그러니 그녀가 봉인된 연화주는 그 자체로 정화 법칙의 힘을 지닌 선보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 정신을 안정시켜 주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니 제리배천단이 노리기에 충분한 보물이었다.
"바로 그렇습니다. 제가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알아내지는 못하였지만 다미 선자가 제리배천단에 속한 것만은 어쩌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되니 연화주가 세상에 떠돌았던 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그들이 연화주를 노렸다면 곧바로 연화주를 가지고 가서 필요한 선인에게 주면 그만이 아닙니까. 그것이 어찌 세상을 떠돈단 말입니까?"
건우는 문득 이해가 되지 않아서 종선생에게 물었다.
"그것은 제리배천단이 일을 억지로 꾸미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연화주가 필요한 이에게 흘러가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수법이니라."
그런데 건우의 물음에 답한 것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유희였다.
그녀는 4층탑의 3층에 거처를 정하고 머물고 있었는데 지금껏 1 층에서 건우와 종 선생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모두 엿들은 모양이었다. 이에 종 선생의 안색이 붉어지며 화를 터트리려 했다.
- 진정하십시오. 그녀는 저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에 건우가 급히 심언을 보내어 종 선생을 말렸다.
종 선생은 건우의 심언에 기운의 움직임을 뚝 멈추고, 건우를 쳐다보았다.
"내가 너희의 이야기를 엿들었다고 기분 상할 일은 없다. 나는 건우 선인의 길잡이로 있는 몸이라 그에게 벌어지는 일을 모두 알아야 한다. 그러니 내가 이리 행동 했어도 너희가 이해를 하거라."
유희 역시 분위기를 알아차렸는지 의자에 앉으며 냉랭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유희 선인."
종 선생이 뭐라고 하기 전에 건우가 앞서서 유희에게 고개를 숙였다.
종 선생은 그런 건우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일을 벌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유희 선인 제리배천단(制埋拜天團)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있으시면 좀 알려 주시겠습니까? 그 중에 다미 선자란 이에 대해서도……."
"나도 다미란 이름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제리배천단에 대해서는 조금 알지."
"알려주시겠습니까?"
"내가 너의 길잡이 노릇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알려줘야겠지. 그나저나 참으로 기이하구나. 네가 벌써 제리배천단과 연을 쌓게 되다니."
유희는 참으로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건우를 보며 말했다.
건우는 그게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제리배천단, 달리 배천단이라 하는 그들은 선계에서도 깊은 비밀에 속하는 이들이다. 저 어린 놈이 어찌 그 이름을 알게 되었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유희는 종 선생까지 끌어들이며 그렇게 말했다.
종 선생은 어찌 대처를 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제리배천단(制埋拜天團)이 그리도 비밀스러운 이름입니까?"
건우가 물었다.
"그렇다. 이는 선계를 떠나 대천세계 전체를 유지하는 근간에 대한 이야기에 속하는 것이다."
"역시 그들이 여러 선인들에게 생기는 문제를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까?"
"그렇다. 그들의 활동이 없다면 실로 수많은 선인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스스로 붕괴되어 사라질 것이다."
유희의 대답에 건우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유정정을 찾으려면 어쩔 수 없이 그들 제리배천단과 싸우게 될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리 대단한 단체라면 어찌 건우가 홀로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걱정이 들지 않으면 그것이 이상할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생각은?
절대 없는 건우였다.
"그렇다고 정정을 찾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건우가 굳은 결심으로 유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그렇겠지. 그리고 그래야 재미가 있는 것이고."
그런 건우를 보며 유희가 벙긋 웃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제가 제리배천단과 싸우게 되면 유희 선인께도 누가 될 수 있을 텐데요?"
"호호호. 누가 제리배천단과 싸운단 말이냐.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전혀 예상과 다른 것이었다.
제리배천단의 일을 방해하게 생겼는데 그들과 싸울 일이 없다니?
"아까도 이야기하지 않았더냐. 그들 배천단은 자연스러운 흐름을 추구한다. 그래서 네가 네 반려를 찾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 연화주란 것을 발견하고, 또 그것을 가진 이로부터 그것을 빼앗는다 하여도 제리배천단 전체가 나설 일은 절대 없다."
"그렇습니까?"
"다만 그 연화주와 얽혀 있는 이들이 나설 뿐이지."
"네? 그게 무슨, 그 말이나 제리배천단이 나서는 것이나 뭐가 다릅니까?"
건우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유희를 노려봤다.
"호호호. 전혀 다르지. 제리배천단 전체가 나선다면 어지간한 도조 몇이 나서도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어찌 네 반려의 일에 묶인 이들만 상대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 너는 정말제리배천단 전체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하하. 아닙니다. 제리배천단이 모두 나선다 하여도 정정을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결국 감당할 수는 없겠지요. 옳습니다. 유희 선인의 말씀대로 정정의 일과 연관된 이들 만이라면 정말 다행한 일입니다. 그럼요."
건우는 유희의 말을 곧바로 수긍하고 말았다.
"자, 그럼 이제 마저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할까? 종 가라 하였느냐?"
그러자 유희가 이번에는 종 선생을 직접 지목하여 불렀다.
"그렇습니다. 종 아무개라 합니다."
종 선생은 그 사이에 분위기를 완전히 파악했는지 순순히 자신을 소개했다.
물론 온전히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반발이었을 것이다.
"너는 제리배천단의 이야기를 어디에서 어떻게 듣게 된 것이냐? 이것은 매우 중한 일이니라."
유희가 그런 종 선생을 보며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 그들은 선계의 크나큰 비밀이니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