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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지 법칙의 비호가 네게는 별로 없는 모양이다 >
"홍,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다. 그러니 하던 일을 마무리 하면 될 일이다."
눈빛으로 질문을 받은 유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자.
"이 녀언, 그 무슨말도 안 되는 소리냐? 네가 고작 진선에 불과하여 천지 법칙의 숨은 이치를 알지 못하는구나. 그래서 그리 방자하게 입을 놀리는 것이야!"
탐혈은 유희가 아무것도 아니라 말하는 것이 실상을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의 입장으로 보자면 건우가 탐혈을 소멸시킨 이후에 천지 법칙의 재앙을 받거나 말거나 탐혈은 이미 죽은 후가 된다.
그러니 유희가 별것 아니라 한 말을 건우가 믿는다면 꼼짝없이 소멸을 맞게 될 판인 것이다.
어디서 감당하지 못할 괴물 같은 진선 놈이 나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일의 내막을 알려서 경계심을 갗도록 해야 할 일이다.
"잘 듣거라. 금선, 옥선, 대라선은 진선과 달리 천지 법칙의 특별한 가호를 받게 되어 있다. 그러니 그들을 함부로 해치게 되면 당연히 천지 법칙의 벌이 어찌 없겠느냐."
탐혈은 언제 건우가 자신을 해칠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금선, 옥선, 대라선이 받는 특별한 혜택에 대해서 떠들었다.
이는 건우도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자연스럽게 건우의 시선이 유희를 향해 돌아갔다.
"그런 것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저 혈기 법칙의 옥선이 도대체 천지 법칙의 이치에 얼마나 기여를 한단 말이냐? 하는 일이 없으니 받는 것도 없을 터."
"하는 일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저 놈이 하는 일이 어찌 천지 법칙의 거대한 이치에 부합하는 것이겠느냐."
"하지만 천지 법칙의 일이 항상 밝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 탐혈이 벌이는 짓도 역시 거대한 천지 법칙의 이치로 따지자면 꼭 필요한 일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오직 선하고 밝은 것만이 있어야 한다면, 천지 법칙 속에 혈기 법칙이나 암흑 법칙 따위가 어찌 있을 수 있을까.
건우는 이미 조율 법칙에 대해서 조금의 깨달음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이치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때문에 천지 법치의 흐름 속에서의 역할로 따지자면 탐혈을 무조건 업신여길 수는 없었다.
탐혈이 수미에서 패악을 부리는 것도 어떻게 보면 대천세계의 전체적인 균형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천지 법칙의 흐름이 보기에는.
"네 말도 일리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저 탐혈 놈을 오늘 여기서 네가 처리한다고 해서 천지 법칙이 크게 문제 삼을 일은 없을 듯 하구나."
"어찌 그렇습니까?"
"이 년! 네가 뭘 안다고! 고작 진선 따위가! 내가 옥선임을 모르느냐! 천지 법칙이 그만하다 여겼으니 옥선으로 올린 것이고, 그에 맞춰서 역할을 주는 것이 아니냐. 그런데 감히 진선 따위가 옥선을해하려 해?!"
유희가 별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하자 탐혈이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듯이 몸부림을 치며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건우의 생기 법칙에 묶여 있는 상태라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영찬후에 깃든 여섯 영물이 도움을 주는 이상, 탐혈이 구속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고 봐야 했다.
"금선이나 옥선 정도 되면 간혹 저리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있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금선, 옥선, 대라선이 천지 법칙의 비호를 받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이 맡은 일이 있으니 당연히 돌보아 주어야지. 하지만 그 돌봄이라는 것이 생각과는 조금 다르니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저 탐혈 옥선이 아주 중요한 자였다면, 그래서 천지 법칙이 저 자를 지키려 했다면, 우리가 오늘 이곳에 이런 모습으로 있지 않았을 것이란 뜻이다."
"애초에 저 자가 중요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천지 법칙이 개입을 했을 것이란 말입니까?"
"그래, 직접적인 방법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저 놈을 보호했을 것이다. 네가 저 놈을 잡으려는 일을 할 때마다 뭔가 여의치 않은 상황이 있었겠지. 그런데 그런 일이 있었느냐?"
"별로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하는 말이 아니겠느냐. 그것만 보아도 저 탐혈 놈은 그리 중요한 놈이 아닌 것이다."
"그럼 다행이군요."
"물론 저 놈을 해치면 약간의 손해는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천지 법칙이 임명한 옥선을 해치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래 봐야 약간의 공덕치가 깎이는 것일 뿐이니. 저 놈을 살려둬서 후환을 걱정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제 결심이 굳어집니다."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탐혈을 향해 생기 법칙을 더욱 강하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 탐혈을 소멸시키겠다는 뜻이었다.
"이, 이보시게. 자, 잠시만 기다리시게! 내, 맹세하건대 자네에 대한 모든 것을 잊겠네. 그러니 후환 따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네. 응? 내 옥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네. 그러니 굳이 공덕을 허물어서 까지 나를 소멸시 킬 이유가 없지 않은가."
건우가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을 알아차렸는지, 탐혈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태로로 애원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건우는 그런 탐혈의 말을 귀에 담지 않았다.
"너 또한 천지 법칙에 속해 있음을 안다. 어찌 보면 너는 필요악이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내가 너를 이리하는 것은 단지 너와 나의 악연 때문일 뿐, 다른 뜻은 없느니라."
"악연이라니!"
탐혈은 건우의 말에 자신이 건우와 무슨 악연이 있느냐며 고함을 질렀다.
"하하하. 네가 네 수하들을 시켜 나와 여기 유희 선인을 죽이려 하지 않았더냐. 그것이 어찌 악연이 아니고, 또 그것이 어찌 너를 죽이려는 이유로 부족하겠느냐."
건우는 자기 생각에 묻혀서 스스로 건우에게 저지른 짓을 떠올리지 못하는 탐혈을 그렇게 비웃었다.
그리고 더욱 생기 법칙의 힘을 강화하여 탐혈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이에 탐혈도 더는 건우에게 자비를 바랄 수 없음을 깨달았는지 처량한 얼굴이 되었다.
"이보시오. 그, 그렇다면 소멸만은 면케 해 주시오."
결국 탐혈은 죽음을 각오하고 소멸만은 시키지 말아달라 애원했다.
이에 건우는 잠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유희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악연이라 하여도 윤회를 거치면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쯤에서 아량을 베푸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건우의 말에 유희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덤덤한 표정으로 건우를 보며 말했다.
"이번 일에 나는 별로 연연하지 않는다. 저 탐혈이란 놈과의 일은 모두 너와 연관된 것일 뿐, 나는 애초에 길잡이 노릇이었지만 이번 일에는 그조차도 별로 한 것이 없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 뜻대로 하겠습니다."
건우는 유희가 탐혈과의 일에 끼어들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느끼고는 그렇게 대답했다.
이후,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유지시켜 두었던 탐혈을 보며 말했다.
"소멸이 가장 뒤끝이 없는 방법임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영혼의 귀함이 알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내가 지금껏 몇몇 영혼을 소멸시켰으니, 내 죄가 적지 않겠지. 이런 중에 너 하나를 더한다고 뭐가달 라질까 싶다만."
"제발 자비를……"
"하지만 여섯과 일곱이 다르고, 아흔아홉과 백이 다른 것 또한 알고 있으니, 이제 너를 소멸시켜 내 죄를 더하기보다 너를 용서해서 덕 하나를 더 쌓고자 한다. 너는 윤회하여 새 삶을 살겠지만, 부디 그삶이 순조롭기를 빌어주마."
"가, 감사… 감……"
건우의 말에 탐혈은 인사를 하려 했지만 건우는 시간을 주지 않고 곧바로 그의 명을 끓었다.
그리고 그 영혼이 윤회의 흐름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또 하나의 사건이 마무리 되었다는 생각에서였다.
"온통 피 밖에 없구나. 쓸만한 기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아."
건우가 그렇게 감회에 젖어 있을 때, 유희는 탐혈의 영역이었던 혈세동을 돌아보며 마땅찮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탐혈은 모든 것을 피와 연관지어 살던 이였다.
그래서 그의 선기나 선보들도 혈세동의 피와 연결이 되어 있었는데, 그가 죽게 되자 그 모든 선기나 선보가 연결고리를 잃고 핏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옥선이나 되는 놈인데, 결국 얻은 것은 없구나."
"그렇군요."
아쉬워하는 유희의 말에 건우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사실 탐혈을 잡으면 옥선의 재산을 취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왜 하지 않았을까.
건우 역시 속으로는 꽤나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결과는 이리 허망하니 맥이 빠질 수밖에.
"그런데 그리 쉽게 죽이지 말고 연화궁에 대해서도 물어보지 그랬느냐?"
그렇지 않아도 쓰린 속에 문득 유희가 그렇게 거친 소금을 뿌렸다.
"조오망 등에게 듣기로 탐혈이 수미에 온 것은 연화궁이 사라지고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라 했습니다. 그러니 탐혈은 연화궁의 일과는 연관이 없겠지요."
"그러냐?"
"연관이 있었다고 해도 이미 윤회에 든 놈을 불러내어 추혼을 하기도 어렵지 않습니까."
"윤회법칙을 익힌 이가 있다면 못할 것도 없지. 뭐 공적치가 많이 깎이긴 하겠다만."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직 연화궁의 일을 알아볼 사람은 남아 있지 않습니까."
"응? 누굴 말하는 것이냐?"
"그야 당연히 수미산 지하에 갇혀 있다는 괴뢰선과 다른 선인들이 아니겠습니까."
"아,그렇구나. 그들 중에 몇은 수미가 영계에 있을 때부터 이곳에 있었던 이라 했었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안면이 있거나, 제 이름을 알겠지요. 당연히 저의 반려인 정정이 세운 연화궁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다행이구나. 그렇게라도 그 때의 일을 알아볼 수 있다니 말이다."
"네, 그 중에 혹시라도 다미라는 선인을 아는 이가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건우는 그 후, 탐혈의 혈세동에 퍼져 있는 법칙의 힘들을 모두 씻어내고 격리 공간을 풀었다.
고오오오오오오!
"으으윽!"
그 순간 건우에게 밀어닥치는 정체불명의 기운.
건우는 신음을토하며 비틀거 렸다.
그리고 유희는 팔짱을 낀 상태로 그런 건우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서 있었다.
건우는 마치 열병에 걸린 것처럼 몸이 아프고 정신이 혼미한 것을 느끼며 어떻게든 몸을 추스르려 애썼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통했는지 건우는 조금씩 기력을 되찾았다.
"이제 괜찮으냐?"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건우는 자신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그녀가 전혀 놀라지 않은 것을 보면 유희가 답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천지 법칙의 힘이다. 탐혈을 죽인 것을 두고 크게 벌을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부려먹던 옥선 하나가 사라졌으니 자초지종을 살피고 네게 어느 정도 공덕치를 빼앗아 간 것이지."
"그런 것입니까?"
"그래도 정신을 잃지 않은 것을 보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게다."
"하지만 혹시라도 쌓았던 공덕이 일거에 사라진 것은 아니겠습니까?"
건우가 혹시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네가 정신이 혼미해진 것은 그저 심술에 불과해. 일꾼 하나를 다시 뽑아 올려야 하는 상황에 대한 심술이겠지."
"천지 법칙이 무슨 그런……"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자, 그래서?"
"네?"
"이제 탐혈의 일이 끝났으니 수미의 지하에 있다는 놈들을 만나러 가야 할 것이 아니냐."
"아, 그렇지요."
건우는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유희의 말에 자신이 할 일을 떠올렸다.
"어딘지는 알고 있느냐?"
이에 유희가 건우를 보며 물었다.
"이를 말이겠습니까? 과거 그 지하 세계에서 한동안 머물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정정과 머물며 태령기에 올랐었지요."
"그래? 그럼 위치는 정확히 알겠구나."
"네, 잠시 몸을 추스르고 출발하도록 하지요."
"음, 그러려면 그리 하거라."
어쨌거나 갈 곳이 정해지자 유희는 다시 건우의 일에 간섭하기를 멈추고 관찰하는 모습으로 돌아갔다.
건우는 혈세동이 사라지고 흙과 돌, 바위가 뒤엉켜버린 곳을 떠나 수미산이 내려다보이는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곳에 거용을 불러놓고 탑에서 며칠 머물며 심신을 안정시켰다.
‘여섯 영물들이 영찬황후선보에 힘을 더해주는 것도 마냥 바랄 수만은 없겠군. 지친 기색들이 역력하니.’
그런 중에 의념 공간의 여섯 영물의 상태를 확인한 건우는 혀를 찼다.
그만큼 영물들의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옥선을 상대하면서 쉽게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이 아이들이 이런 상태라면 당시의 상황도 무척 긴박했던 것이야. 아이들에게 문제가 생겼으면 내가 패했을 테니까.’ 건우는 자신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여섯 영물들을 기특하게 여겨, 의념 공간의 환경을 여섯 영물들에게 적합하게 바꾸었다.
‘이렇게 해 주면 회복이 더 빨라지겠지.’
< 천지 법칙의 비호가 네게는 별로 없는 모양이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