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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혈이 불나방처럼 건우와 유희를 찾아오다 >
건우는 유희에게 탁자의 의자를 권하고 그녀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 결계 안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그 다미 선자라는 자가 그 일을 꾸몄다고 봐야겠구나?"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그 이름이 나오게 된 과정이 미심쩍은 구석도 있고……
“하긴 그것도 그렇구나. 그래 이제는 어찌 할 것이냐?"
건우는 유희의 물음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당장 유정정의 행방을 쫓을 단서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전각 전체를 의념으로 훑어봤지만 이곳 접객실 이외에는 그럴듯한 것이 없었다.
결국 유정정의 애장품들 몇 개를 얻은 것이 끝이란 소리다.
물론 유정정이 결계를 만들고 스스로를 봉인했다는 것은 거의 사실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 다음 길이 막힌 것은 분명해 보였다.
“당장은 방법이……"
건우가 그렇게 속을 털어놓으려다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리고 거의 같은 순간에 유희 역시 건우와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지금 이곳을 찾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건우가 유희를 보며 물었다.
“기운이 사납고 거칠구나. 게다가 피비린내도 나고."
“탐혈이군요."
건우와 유희는 그렇게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예서 이럴 것이 아니라. 나가서 맞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건우는 곧바로 탁자에서 일어나며 유희에게 밖으로 나갈 것을 권했다.
그러자 유희가 건우를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접객실의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건우가 유정정의 흔적이 있는 등대애정(等待愛情) 공간을 지키려 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유희는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곧바로 몸을 날려 등대애정의 현판이 있는 대문 밖으로 나섰고, 곧이어 건우 역시 그녀의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두르는 것이 좋겠다."
유희가 건우에게 그렇게 말하자, 건우가 의념을 크게 부풀리며 공간 법칙의 힘을 사용했다.
푸확! 쿠르릉!
그 순간 등대애정의 현판이 있는 대문은 물론이고 그 대문과 연결되어 정원과 전각을 감싸고 있던 돌담까지 모두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렇게 공간이 지워지자 비어버린 곳으로 흙더미와 돌이 밀려들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건우는 유정정의 흔적이 있는 별채 전체를 공간으로 잘라내어 따로 보관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등대애정(等待愛情)의 공간은 건우의 의념공간 깊은 곳에 안전하게 들어앉았다.
“올라가자."
일이 끝나자 유희가 한마디를 던지고 둔광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지금 건우와 유희가 있는 곳은 지하 깊은 곳.
유희는 지상을 향해 둔술을 펼친 것이다.
이에 건우도 유희의 기운을 쫓아 지상으로 몸을 날렸다.
“이제야 나오느냐?"
그런데 건우가 지상의 허공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붉은 혈기(血氣)가 가득하였다.
탐혈이 자신의 기운을 넓게 펼쳐서 건우와 유희를 가둘 결계를 완성시켜 뒀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섬뜩한 붉은 기운을 품은 선인 하나가 허공에 팔짱을 끼고 건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탐혈이냐?’’
“놈, 감히 진선 주제에 옥선에게 방자하게 굴다니!"
“하하하. 네 놈이 하는 짓을 모두 아는데, 그런 놈에게 말을 높이란 말이냐?"
“크하하하. 하긴 그도 그렇구나. 어차피 죽을 놈이니 그런 호사라도 누려봐야지."
“네놈 따위에게 하대하는 것이 호사랄 것까지야 있을까. 그나저나 이것은 우리를 잡기 위해 펼쳐 놓은 것이냐?"
건우가 붉은 기운을 둘러보며 물었다.
예전 연화궁의 자리였다는 십여 리의 분지를 감싸고 있는 그 기운은 혈기(血氣)가 분명했는데, 기묘한 법칙의 힘이 흐르고 있었다.
“아둔한 놈이구나. 네가 보기엔 간단해 보일지 모른다만, 너희 둘은 이미 빠져나갈 수 없는 오랏줄에 붙잡힌 바가 되었다. 게다가 이곳에서 죽게 되면 영혼 조차 윤회를 할 수 없게 되지.
“윤회까지 막는다고? 제법 공을 들인 결계인 모양이구나."
“듣고 보니 두려움이 생기느냐? 하지만 이미 너희 두 년놈이 내 수하들을 해친 것을 알고 있느니라. 그러니 내 자비를 구할 생각은 하지 말아라."
탐혈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허공에 슬쩍 손을 휘저었는데, 그와 동시에 십여 리의 분지를 감싸고 있던 혈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 말을 섞어 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단 서로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한 후에 이야기를 하자꾸나."
그 모습에 건우 역시 법칙의 힘을 일으켰는데 이번에는 공간 법칙이 아니라 생기 법칙이었다.
“으음? 생기 법칙?"
그 모습에 탐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익히고 있는 혈기 법칙은 사실상 생기 법칙의 하위호환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혈기 법칙은 ‘피(血)’라고 정의되는 대상에 작용하는 법칙인데, 그 중에 생기를 다루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혈기 법칙이 생기 법칙의 하위호환인 이유는 혈기 법칙 또한 핏에 담긴 생기를 다루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었다.
세상 만물의 생기 전체를 다루는 생기 법칙과 피에 속한 생기만을 다루는 혈기 법칙은 격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크하하하. 생기 법칙, 좋지. 좋아. 하지만 그래 봐야 진선 놈이 얼마나 큰 힘을 다루겠느냐. 또한 혈기 법칙은 생기만 다루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탐혈은 잠시 놀라긴 했지만 곧바로 여유를 되찾았다.
자신은 이미 옥선의 지위에 있었고, 눈앞에 있는 선인 놈은 고작 진선이었다.
옥선이 되었다는 것은 같은 법칙을 다루더라도 일반 진선에 비해서 네 배는 더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다는 의미다.
게다가 옥선이 되려면 그 법칙에 대한 깨달음 또한 깊어야 한다.
비록 혈기 법칙의 옥선이라지만, 옥선이 되기 위해 그 혈기 법칙을 얼마나 깊이 있게 깨우쳤던가.
그것까지 생각하면 진선 따위는 처음부터 염려할 바가 없는 작은 버러지와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길게 갈 것도 없다. 그냥 예서 짓눌려 죽어라. 그리고 그 피로 나에게 작은 보탬이 될 수 있음을 기쁘게 여기거라."
“별 미친 놈을 다 보겠네. 죽어서 피를 뽑히는 걸 어떻게 기쁘게 여겨? 유희 선인, 저 놈이 아무래도 오래 살다 보니 정신이 좀 이상해진 모양입니다."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되겠느냐?"
“유희 선인은 고작 진선의 힘만을 낼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옥선과 싸우는 일에 어찌 도움을 구하겠습니까? 그저 지켜만 보셔도 될 것입니다."
“저, 저놈이?"
건우와 유희의 대화를 듣게 된 탐혈이 손가락으로 건우를 가리키며 붉었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옥선인 자신을 앞에 두고 저리 무시하다니.
아니 지금도 혈기 법칙의 결계가 저들을 짓누르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 진선에 불과한 년놈이 저리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탐혈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끼고 당황하여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면서도 아닌 척 건우의 건방진 행동에 화가 난 것처럼 꾸민 것이었다.
“탐혈, 네 놈의 속이 훤히 보인다. 지금 일이 어찌 돌아가는 것인지 당황하고 있구나."
건우가 그런 탐혈을 보며 놀리듯 말했다.
지금 건우가 뿜어낸 생기 법칙은 건우 뿐만이 아니라 유희까지 감싸며 탐혈의 혈기를 밀어내는 중이었다.
탐혈은 이미 혈기 법칙을 쓰기에 알맞은 결계까지 펼쳐 놓았고, 건우와 유희는 그 함정에 스스로 뛰어든 상태였다.
그런데 그럼에도 탐혈의 혈기를 거뜬하게 버텨내고 있다니.
이것은 결계가 없었다면 건우의 압승으로 승부가 났을 것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찌 탐혈의 눈동자가 저리 바쁘게 굴러다니지 않을 수 있을까.
“이것이 끝이냐?"
건우가 불쑥 탐혈을 향해 물었다.
사실 지금 건우는 의념공간에 영찬황후선보를 불러내어 생기 법칙의 힘을 강화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아직 선보에 영물이 깃들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리한 환경에서도 탐혈의 공격을 쉬이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 놈이? 뭐라 지껄이는 것이냐?"
건우의 말에 탐혈이 분노를 터트리며 의념을 크게 끌어 올려 십여 리에 걸친 혈기를 건우에게로 응축시키기 시작했다.
그만큼 건우에게 가해지는 혈기 법칙의 힘이 강력해지는 것이다.
“풋, 겨우 한다는 짓이 이 정도라고? 내가 너를 너무 과대평가 했던 게로구나."
건우는 그런 탐혈의 공격에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탐혈의 혈기가 아무리 건우를 향해 응축되어도 건우가 뿜어 낸 생기 법칙을 침범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생기 법칙에 대한 건우의 깨달음이 혈기 법칙에 대한 탐혈의 깨달음을 앞섰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게다가 영찬황후선보의 도움을 받아 법칙의 힘 자체가 강력해진 것도 있으니 탐혈의 혈기 법칙이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 이게 어찌 된 것이냐? 고작 진선에 불과한놈이 어떻게 이런 강력한 법칙의 힘을 쓴단 말이냐?"
탐혈도 이제는 상황이 제대로 파악된 모양인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더듬거렸다.
“놈! 애초에 네 놈이 옥선의 본체로 왔다고 해도 상대가 되지 않았을 터인데, 지금의 너는 고작해야 핏덩이를 잘라 만든 분신이 아니더냐. 금선 정도의 능력이면 나와 유희 선인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여겼더냐? 하하하."
건우가 그런 탐혈을 마구 비웃었다.
사실 그 말대로 지금 눈앞에 있는 탐혈은 옥선 탐혈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힘을 일부 덜어내어 만든 분신이었던 것이다.
건우도 처음에는 그런 사실을 몰랐지만 직접 상대하다 보니 옥선이라기엔 모자란 면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놈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나를 쉽게 어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건우가 자신의 정체를 밝혀내자 탐혈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이전보다 더욱 강력하게 혈기를 응축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몸에서도 붉은 피를 뽑아내어 흩뿌리며 혈기를 강화하기까지 했다.
“마지막 수단이냐? 그래 봐야 소용이 없음을 모르느냐?"
하지만 건우는 그런 탐혈을 비웃으며 본격적으로 생기 법칙을 넓게 펼쳐 혈기 법칙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어지간하면 흡수할까 했지만 기운이 너무 지저분하고 더럽구나. 차라리 세상에 흩어서 천지 만물의 양분이 되게 함이 옳겠다."
“이 노오오오옴!"
회심의 한 수라 생각한 공격이 별 효과도 없이 흩어지는 모습에 탐혈이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런 저항 따위는 건우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다만 끝까지 탐혈이 스스로 피를 뿜어 버티면서도 본체에게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음은 아쉬웠다.
“놈이 본체에게 갔더라면 탐혈 놈이 숨어 있는 곳을 쉽게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결국 탐혈이 피가 모두 말라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 후, 건우는 주위에 퍼진 법칙 대결의 여파를 수습하며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유희는 그런 건우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꼭꼭 숨으면 찾기가 쉽지는 않겠구나. 끝장을 보지 못하면 뒤숭숭하여 기분이 좋지 못한데."
“그렇지요? 그럼 좀 귀찮더라도 이번 일을 확실하게 매조지 지어야 하긴 하겠습니다."
“무슨 방법이 있느냐?"
건우의 말에 유희가 물었고, 건우는 이전에 포반자와 구이형 등에게 얻었던 혈주(血珠) 세 개를 꺼내 들었다.
< 탐혈이 불나방처럼 건우와 유희를 찾아오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