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451화 (451/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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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나 그녀는 그곳에 없었다 >

“잠깐! 모두 진정하시오."

건우가 달려드는 사념체들을 만류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열두 명의 유정정이 모두 한 걸음 물러났다.

건우는 마치 한 몸인 듯이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에 등에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어찌 살펴봐도 모두가 유정정의 사념체다.

아닌 부분을 찾을 수가 없고, 모두가 다르지 않다.

‘이게 어찌 된 것일까?’

건우는 살짝 눈을 내리감으며 생각에 잠긴다.

그런 건우의 모습에 열두 사념체는 모두 건우의 상념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이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그런 중에도 서로 다툼이 없다는 것이다.

번쩍!

건우가 고개를 들며 눈을 떴다.

“내 말을 들어 보시오."

그리고 열두 정정을 모두 한 번씩 돌아보며 말했다.

“말씀하시어요."

“듣고 있어요."

“그렇답니다."

열두 정정은 서로 엇비슷한 대답을 내어놓았다.

“나는 사실 누구 하나를 꼭 집어서 진짜라 할 수가 없소. 그런데 기이한 것은 어찌 그대들은 서로 자신이 진짜라 우기지 않는 것이오? 그리고 상대가 가짜라 말하지 않는 것이오?"

건우는 그것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답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열두 정정의 사념체는 서로의 얼굴을 한 번씩 보더니 저마다 말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보아도 저들 역시 저와 같기 때문입니다."

“거부감이 들지 않아요."

“우리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건우는 그녀들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했던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서로를 잘 느껴 보시오. 모두가 서로 같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다른 것이 있지 않겠소?"

건우가 자신은 파악할 수 없지만 그녀들 사이에선 뭔가 다른 것이 있고, 그것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렇게 물었다.

그 말에 유정정의 사념체들은 한동안 서로를 탐색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쉽게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는 모양인지 아미를 찌푸리는 일이 많아졌다.

건우는 그런 모습이 걱정이 되었지만 지금은 그녀들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건우와 처음으로 만났던 사념체가 뭔가를 깨달은 듯이 입을 벌리며 낮게 탄성을 터트렸다.

“아아, 알겠어요."

그러자 다른 열한 명의 정정들이 그녀를 바라봤다.

“다들 집중해 보아요. 우리는 상공께서 우리를 찾아 오셔야 모습을 드러낼 수 있어요. 그렇지 않은가요?"

“맞아요. 그리 되어 있지요."

“그래요."

“네에. 그렇죠."

그녀의 물음에 열한 명의 정정들이 저마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어째서 나를 제외한 다른 분들은 상공이 없이 이 숲을 헤매고 다닌 것인가요?"

첫 유정정이 다시 물었다.

그러자 열한 명의 정정들은 저마다 화가 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야 당신이 먼저 상공을 모시고 갔기 때문이지요."

“그래요. 내가 나왔을 때에는 상공이 이미 숲으로 들어간 후였다고요."

“저도 그랬죠."

그런 정정들의 모습에 첫 번째 정정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겠죠. 여기 이 분은 나를 쫓아 숲으로 들어왔을 것이고, 여기 이 분은 나와 이 분을 쫓았을 것이고, 다시 이 분은 나와 이 분과 이 분을 쫓아 들어왔을 거예요. 그리고 결국 마지막분 은 상공과 열한 명의 우리들을 쫓아 왔겠지요. 그렇지 않은가요?"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니까 우리들은 시간 차이를 두고 숲의 입구에 나타나게 되었다는 거군요?"

“상공께서 숲의 입구에 들어온 순간을 열두 단계로 나누어서 우리들을 불러낸 것이군요."

“아주 몹쓸 짓을 한 거네요. 그리고 우리는 결국 모두가 진짜란 소리고요."

유정정의 열두 사념체들은 그렇게 사건의 정황을 파악해냈다.

그리고 건우 역시 그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역시 시간 법칙을 사용한 선인이 야료를 부렸다. 정정이 만들어 놓았던 뒷길을 멋대로 바꾼 것이다. 아울러서 이전에 있었던 결계들에도 손을 대어 정정의 뒷길을 없앤 것이리라. 그렇다면 왜 이런 함정을 판 것일까?’

건우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해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다행이네요.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에요."

“그러게요. 사실 속으로 무척 화가 나 있었거든요."

“상공께서 이리 많은 첩들을 거느리실 것을 생각하면 절대 참을 수 없었지요."

“이를 말이겠어요? 쌍수 수련의 깊은 정이 이곳 숲에 이리도 짙게 깔려 있는데."

“어찌 이런 곳에서 수많은 년… 아니 첩들을 들일 수가 있을까 했지요."

“호호호. 그래도 상공께서 진정 그리 하신 것은 아니니 다행이지요. 우리 모두가 하나와 같으니 말입니다."

“맞아요. 정말 다행입니다."

열두 정정의 담화가 이어질수록 건우는 이 뒷길에 담긴 엄청난 함정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자칫했으면 저 열두 명의 정정으로부터 조리돌림을 당할 뻔하지 않았나.

만약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이겨도 문제요 져도 문제였을 것이다.

이겼으면 열두 정정을 해쳤을 것이니 그 심적인 부담이 오죽했을까.

그리고 졌다면 이곳에서 의식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겠나.

‘아주 골치 아픈 함정을 파 놓았어. 이것은 당장 이곳에서 나를 어찌하겠다기 보다는 나를 괴롭게 만들겠다는 의도가 커 보여.’

누가, 무슨 이유로 그런 함정을 팠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악의가 가득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내가 아는 놈일까? 하지만 정정이 나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누군가와 이런 결계를 만들고, 나아가 후일을 기약하는 일을 함께 하지는 않았을 텐데?’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게다가 상대는 시간 법칙을 익힌 선인.

시간 법칙은 매우 고명한 것이라 접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건우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아는 이들 중에 시간 법칙을 익혔을만한 이를 떠올리지 못했다.

‘어쨌거나 이제 뒷길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겠군. 하지만……'

기대하기론 전각 안에 정정이 있었으면 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뭔가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쩔 수 없이 가슴에 돌이 들어앉은 기분을 느끼는 건우였다.

“어쩐 일이셔요?"

“왜 그리 근심이 가득하셔요?"

“무슨 문제라도 있으셔요?"

그 모습에 열두 정정이 모두 건우를 걱정했다.

“아무래도 일이 어그러진 모양이요. 이곳을 만들 때에 정정이 누구에게 도움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지금과 같은 함정을 팠으니 안쪽에 무슨 일이 있을지 어찌 알겠소?"

건우는 근심을 숨지기 않고 정정들에게 털어 놓았다.

어차피 모두가 정정의 사념체가 아닌가.

“흐음. 그러네요. 확실히 제가 열둘이나 된 것은 정상이 아니지요."

“그러니 안쪽 상황도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네요."

“설마 다미(廢婚) 선자가 이런 짓을 할줄은 몰랐어요."

“다미 선자라니 그건 무슨 말이오?"

“어? 제가요?"

“언제 그런 말을 했지요?"

“누가 들었나요?"

건우는 대화 중에 문득 한 정정의 사념체가 다미 선자라는 말을 꺼낸 것을 듣고 놀라서 되물었다.

그런데 그 순간 모든 정정들이 그런 말을 한 적도 들은 적도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필시 음모를 꾸민 놈이 부린 수작 때문이리라.’

건우는 정정의 사념체들이 어떤 부분의 기억에 제약을 받았음을 확신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 제약의 틈을 비집고 다미 선자란 이름이 흘러나온 것이리라.

그것이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행운인 것인지는모르지만.

일을 꾸민 원흉에 대한 단서가 나온 것은 분명해 보였다.

“아이참, 이럴때가 아니어요."

“그래요. 어서가야 해요."

“이제 곧 숲이 사라질 것이어요. 여기 계속 계시면 안 되어요."

그 때, 정정들이 입을 모아 시간이 없다고 떠들었다.

건우도 뒷길을 이루는 규칙이 쌍수수련 공법에 따른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정정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구려. 아쉽기는 하지만 이제는 헤어져야 할 때가 왔구려."

건우는 열두 정정을 모두 한 번씩 눈에 담았다.

그리고 곧바로 그녀들을 등지고 숲길을 걷기 시작했고, 이내 숲의 끝자락에 닿았다.

“이만가오. 모두 평안하시오."

건우는 숲길 끝을 장식하고 있는 창호문살의 문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이에 뒤에 남은 열두 정정들은 모두 말없이 그런 건우의 등을 바라보았다.

삐걱!

건우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창호문살의 문을 열고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예상대로 문의 안쪽에는 전각의 접객실이 있었다.

벽에는 이런저런 화폭이 걸려 있고, 그 아래로 문갑과 장식장이 있었다.

하지만 건우의 눈은 방의 가운데에 있는 탁자 위에 머물렀다.

귀한 보물을 담으려는 듯이 부드러운 융을 돋워 놓은 속이 훤히 보이게 뚜껑이 열려 있는 상자가 거기 있었다.

“역시!"

건우가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실망감을 드러내며 탄식을 터트렸다.

상자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무엇이 있었을까?’

그걸 물어 뭐하겠어요? 당연히 연화주란 것이 있었겠죠.

건우의 물음에 몽이가 침울한 음성으로 답했다.

‘그럼 연화주는 무엇이었을까?’

그것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요. 연화주에는 정정 선자가 들어 있었을 거예요.

‘그렇겠지? 십만 년의 기다림에 지친 정정이 스스로를 봉인했겠지?’

의식 자체를 완전히 죽인 상태였을 거고요. 그 안에서 시간을 잎고 건우 님이 깨워줄 때를 기다리려 했겠죠.

‘그런데 여기 있어야 할 그녀가 없단 말이지.’

애초에 연화궁의 멸망 이후, 연화주에 대한 소문이 선계에 퍼진 것이 이상한 일이죠,

‘그래. 정정이 완전히 연화주에 봉인된 후에 문제가 생긴 거지. 그녀가 생각지 못했던 변수가.’

건우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눈앞에 그런 일을 벌인 놈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겠다는 살벌한 의지가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건우는 한참을 분노하다 조금씩 마음을 추스르고 접객실의 모습을 살피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정정의 흔적을 찾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혹시 과거의 상황을 짐작해 볼 단서가 없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모두가 귀한 보물들이네요. 저 족자에는 공간이 담겨 있고, 저 항아리는 선기네요. 그리고 저기 저 연꽃문양의 패는……

“정정의 본명법보?"

아니에요. 그 정도는 아니고 선보인데 매우 강력한 정화 법칙이 깃들어 있네요. 정정 선자가 꽤나 애용했던 모양이에요.

“그렇군. 그녀의 기운이 강하게 담겨 있어."

이곳의 시간이 멈춰 있어서 그 동안 기운의 소실이 없었던 거죠.

“확실히 보물창고군. 정정이 아꼈던 물건들이 제법 많이 놓여 있어. 그런데……"

비어 있는 자리들도 있죠. 그 역시 누군가가 훔쳐 갔다고 보면 되겠네요.

“남겨 놓은 것은 욕심이 나지 않았다는 걸까? 그 정도로 부유한 선인이라고?"

그렇진 않을 거예요. 작은 거라고 챙길 수 있으면 챙기는 것이 수사들의 습관인데.

“아, 이것들이 이곳의 결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했던 거군. 그런 거였어."

건우는 새삼 전실에 있는 보물들이 제각각의 쓰임이 있음을 깨달았다.

한동안 충격을 받아 좁아졌던 시야가 이제야 제대로 돌아온 것이다.

이에 건우는 소매를 휘저어 강력한 공간 법칙을 떨쳤다.

우우우우웅! 우우우웅!

그러자 전각을 감싸고 있던 마지막 결계가 풀렸고, 잠시 후에 유희가 전각 안으로 들어왔다.

“어찌?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가 모르겠구나."

유희는 건우를 보자마자 그렇게 물었다.

< 역시나 그녀는 그곳에 없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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