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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 법칙의 결계 안에서 그녀들을 만나다 >
마지막일 것으로 보이는 결계는 쉽게 건우에게 그 속을 보여주지 않았다.
결계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것과 엮여 있는 시간 법칙을 분별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건우는 도무지 시간 법칙의 실체를 잡아내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시간 법칙에 대한 깨달음 자체가 너무 미천하기 때문이다.’
법칙 자체를 깨닫지는 못하여도 그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인식은 있어야 법칙의 존재라도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건우는 어쩐 일인지 시간에 대한 개념이 모호했다.
‘도대체 나는 왜 시간에 대해서 이리도 아는 것이 없었던 것일까? 나는 그저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정해진 이치에 따라서 흘러가며 세상 만물을 변화시키는 것이란 정도만 알 뿐이다. 하지만 그것 조차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구나.’
건우는 그렇게 자성하며 한층 깊은 사색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고 시간에 대해서 궁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정작 궁구하는 시간의 흐름조차 잊고 개념과 인식에 묻혀가고 있을 때, 유희의 일갈이 건우의 정신을 일깨웠다.
- 정신 차려라! 가장 단순한 것에서부터 기반을 다져야 할 것이다!
번쩍!
건우는 유희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건우의 정신은 깨어났지만 여전히 깊은 사색에 들어 있는 상태였다.
그는 그 상태로 다시 시간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시간에 대한 개념을 잡아가며 시간의 흐름과 속도, 그 상대성에 대해서 생각했다.
‘시간 법칙은 실로 단순하면서 또한 오묘하구나. 시간을 거스르는 것은 진정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인가. 이 대천세계의 시간 법칙 도조는 그것을 가능하게 허락했을까, 아니면 불가능하게 막았을까.’
건우는 어느 순간 조금씩 시간에 대해서 깨닫던 중에 문득 그런 의문을 느꼈다.
하지만 그 순간의 의문은 일순 햇빛을 맞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고 무엇을 고민했는지도 알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그 후에 남은 것은 그저 평범한 시간에 대한 깨달음 뿐이었다.
‘뭔가 잊었지만 상관없겠지. 한 번 들였던 발걸음을 누가 되돌리게 했다고 한들, 내가 그곳에 갔던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건우는 아쉬움을 느꼈지만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또다시 유정정, 자신의 반려였다.
“호오? 이제 눈을 떴느냐?"
건우가 고개를 들어 전각의 지붕을 바라보자 유희가 그렇게 물었다.
건우는 그녀가 물은 것이 정말 눈을 떴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법칙을 알아볼 재주를 깨우쳤느냐 하는 것임을 알았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까막눈은 면한 듯 합니다."
건우는 전각 지붕의 결계에서 고개를 돌려 유희를 보며 그렇게 인사를 했다.
염치없이 모른 척하기에는 깊은 망아의 세계에서 그의 정신을 붙잡아 준 은혜가 작지 않았던 것이다.
자칫했으면 아주 오래도록 그 깊은 망아의 세계에서 답도 없는 잘못된 질문을 붙잡고 떠돌았을 것이다.
그것을 바로잡아 줬으니 어찌 은혜가 아닐까.
“무료하게 너를 지켜보는 것은 재미가 없지 않으냐. 어차피 알게 될 것이라면 조금 일찍 알게 한다고 무슨 문제가 있을꼬."
유희는 별것 아니란 듯이 그렇게 말하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건우는 그 웃음을 보며 다시 전각 지붕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희가 저리 웃었으니 당분간은 재미가 없다고 신경질을 내지는 않겠다 싶어 한시름을 놓았던 것이다.
‘으음. 시간 법칙을 알아볼 수 있게 되니 결계의 모습도 선명하게 드러나는구나. 그런데……
건우는 시간 법칙이 깃들어 있는 결계를 낱낱이 살피던 중에 뭔가 익숙한 것을 느끼고 생각이 깊어졌다. 그러다가 한참 후, 자신의 허벅지를 치며 탄성을 질렀다.
“아, 결계를 무시하고 지날 수 있는 숨겨진 길이 있음이야. 그것도 내게 익숙한 방식으로!"
“응, 그게 무슨 소리냐? 결계에 숨은 통로가 있어? 그것도 네가 아는 것이라고?"
유희도 그것은 몰랐다는 듯이 눈을 똥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건우는 유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렇습니다. 저 결계는 굳이 파괴하지 않고도 통과할 수 있는 길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과거 제가 정정과 함께 수련했던 쌍수 수련과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오호라? 쌍수 수련의 공법을 풀어서 결계의 뒷길을 만들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저 결계는 아무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결계를 알아볼 재주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지요."
건우는 그것이 정정의 배려라고 생각하여 더없이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건우를 향해 유희가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앞서의 결계에는 그런 뒷길이 없었더란 말이냐? 그것은 이상하지 않으냐?"
“사실 그렇기는 합니다. 제가 정정이었다면 뒷길을 만들지 않으면 모를까 만들 것이면 결계 전부에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래, 나 역시 그리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소리가 아니겠느냐."
“사실 유희 선인의 말을 인정하기는 싫습니다. 그것은 마치 정정에게 흠을 내는 것과 같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군요."
건우는 슬픈 표정으로 그렇게 말을 하고는 지붕 결계의 시간 법칙을 향해 공간 법칙을 투사하기 시작했다.
뒷길을 쓰지 않고 앞서처럼 결계 자체를 허물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러자 곧바로 결계가 강하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결계에 담겨 있는 시간의 법칙은 워낙에 특별하여 건우의 공간 법칙이 좀처럼 싸워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 법칙은 오묘합니다. 제 공간 법칙이 시간 법칙을 열에 하나도 제대로 맞서지 못합니다."
건우는 그런 현상을 눈으로 보며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법칙의 힘만으로 따지자면 건우의 공간 법칙이 훨씬 강력한 법칙의 힘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시간 법칙과 부딪히면 대부분이 허상을 만난 듯이 비껴나가 의미을 잃어버리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보니 결계를 깨는 것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본래 결계란 것은 그 자체로 스스로 복구되는 성질이 있는 바, 결계에 약간의 흠이 생겨도 금방 복원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전 결계에 있었던 복원 법칙의 힘과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쉽지 않겠구나."
그 모습에 유희도 이마에 주름을 만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런 표정임에도 유희의 눈빛이 반짝인다는 것이었다.
상황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재미는 있다는, 그런 상태를 뜻하는 모습이었다.
‘그럼 유희 선인은 아직 걱정할 때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건우는 의념 공간에 있는 영찬황후선보에 소망이를 비롯한 여섯 영물 모두를 깃들게 하여 최대한 법칙의 힘을 강화하는 방법을 떠올려 봤다. 그렇게 하면 지붕 결계에 녹아 있는 시간 법칙을 어떻게든 허물 수 있을 듯 했다.
‘하지만 그것은 최후의 수단이다. 그보다 나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유희 앞에서 그만한 힘을 드러내는 것은 조심스러웠다.
비록 지금까지는 호의를 주고받고 있다고 하지만, 갑자기 옥선을 뛰어넘는 법칙의 힘을 드러내면 유희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껏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여 어쩌면 건우를 적대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건우는 전각의 지붕 결계를 바라보며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결계를 정면으로 깨는 것보다는 차라리 결계에 숨어 있는 함정을 찾아서 박살내는 쪽이 더 쉬울 수도 있다.’
모르고 당하면 문제가 크겠지만 이미 쌍수 수련의 공법을 따라서 만든 뒷길에 함정이 있으리라 예상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으리라.
그게 안 되면 결계 안에서도 결계를 깨트리면 될 일이고.
건우는 그렇게 결심하고 곧바로 시간 법칙이 깃든 결계를 향해서 의념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이로서 건우의 의식은 결계 안으로 스며들어 바깥에 있는 몸은 허깨비나 같은 상황이 되었다.
건우의 의식이 결계의 뒷길로 들어섰다.
그러자 결계 안에서 건우의 몸이 만들어지고, 울창한 숲과 좁은 소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길이 곧 이 결계를 통과할 수 있는 뒷길일 것이다.
“어서 오시어요. 참으로 오래 기다렸답니다."
그리고 건우의 염에 모습을 드러낸 유정정.
건우는 반가움에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정정, 내 그대를 참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건우도 그녀의 모습이 진짜가 아니란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곳에 나타난 정정의 형상은 그녀가 결계에 뒷길을 만들 때에 끼워 넣은 사념체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건우는 그녀를 만났다는 기쁨과 행복을 조금이라도 이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마치 진짜 정정을 만난 듯이 사념체를 대하는 것이었다.
“이리 오시어요. 이쪽으로 가면 되어요."
정정의 사념체가 건우의 손을 잡고 숲의 작은 길로 이끌었다.
“하하. 그럽시다. 어서 갑시다."
건우는 정정의 사념체에 이끌려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건우는 그 사념체가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지 세세히 확인했다.
어차피 이 뒷길은 정정과 함께 익혔던 쌍수 수련 공법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니 건우가 길을 잃을 일은 없다고 봐야 했다.
“이리로요."
“이쪽이어요."
“여기로."
유정정의 사념체는 숲에서 갈림길이 나타날 때마다 건우를 올바른 길로 이끌었다.
그런 과정이 계속 반복되자 건우는 유정정의 사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다른 수작을 부렸을 텐데?’
건우는 반드시 뒷길에 함정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정정의 안내가 끝나갈 때가 가까워질수록 더욱 긴장하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결국 건우가 예상했던 대로 둘만 있어야 할 길에 새로운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상공, 잠시 기다리셔요. 어찌 반려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리 현혹이 되셨답니까."
그런데 나타난 여인의 모습이 앞서 건우를 이끌던 바로 그 정정의 사념체와 머리카락 한 올의 차이도 없이 꼭 같았다.
건우는 자신의 손가락을 잡고 있는 사념체와 새로 나타난 사념체를 번갈아 바라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리되면 어쩌지요? 제가 진짜일까요? 아니면 저 이가 진짜일까요?"
“그러게요, 저도 알지 못하겠네요."
“맞아요. 상공, 소녀도 소녀가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걸 어쩌지요?"
“어쩌지요?"
그 때, 두 여인이 더욱 건우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시작했다.
자신들도 스스로 진짜란 확신이 없다고 하니, 이러면 어쩌라는 것일까?
건우는 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두 여인을 보며 말했다.
“정정, 나도 둘 중에 누가 진짜인지 모르겠소. 아니 사실 두 사람 모두 진짜가 아니지. 결계의 뒷길을 안내하기 위해 안배한 사념체인 것이지."
“그렇다고 해도 우리 중에 누군가는 가짜가 아니겠어요?"
“그래요. 그러니 상공께서 누가 진짜 사념체인지 가려 주시어요."
“그토록 오랜 기다림의 끝에서 드디어 상공을 만났는데, 사념체라 하여도 아낌을 받고 싶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 중에 누가 진짜인지 가려 주시어요."
두 사념체는 건우를 보며 진실을 밝혀달라 호소했다.
그런데 그 때, 숲의 소로에서 다시 다른 사념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념체들 역시 앞에 있는 둘과 같이 머리카락 하나까지 다른 점이 없이 똑같은 모습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건우는 갑자기 열두 명으로 늘어난 사념체의 숫자에 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상공!"
“어찌 된 건가요?’
“우리 중에 누가 진짜인 것이지요?"
“제발 밝혀 주시어요."
“상공!"
“상공……"
건우는 한 순간 열두 명의 아내에게 둘러싸여 눌리기 시작했다.
< 시간 법칙의 결계 안에서 그녀들을 만나다 > 끝